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기독교 강요> 산책-칼빈의 생애와 사상(고 광 필 교수)

by 【고동엽】 2021. 11. 2.

Ⅱ. 칼빈의 생애와 사상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두 가지 중요한 방법이 있다. 첫째는 알고자 하는 그 사람과 친밀하게 사귐(κοινωνια: fellowship)을 갖는 것이고, 둘째는 알고자 하는 사람의 작품이나 살아온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는 어떤 관계성 속에서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며, 후자는 개인의 역사를 통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란 과거에 일어난 그 사람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칼빈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방법이 모두 필요하다.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가 종교개혁시대의 칼빈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칼빈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그의 생애와 사상, 즉 그의 삶을 이해하는 방법밖에 없다. 칼빈의 삶은 그의 생애와 작품 속에 고이 담겨 있다. 따라서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그 자신이 남겨놓은 작품과 칼빈과 생애를 같이한 사람들의 진실된 서술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죽음을 앞둔 칼빈의 고별사는 그의 인격과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상과 인격의 진면목은 마지막 고백에 가장 진솔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칼빈은 보는 사람의 각도에 따라서 여러 가지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역사가 도비네(D'Aubigne)는 칼빈을 “개혁의 입법자”라고 칭하였다. 루이스 W 스피츠 편, <종교 개혁의 정신>, 정현철 역(도서출판 풍만, 1990), 23. 루이스 W. 스피츠(Spitz)는 칼빈을 조직의 천재로서 제네바에서 장로교 교회 정치의 모델을 발전시킨 사람이라고 했다. 스피츠 편, <종교개혁정신>, 23. 칼빈의 후계자 중의 한 사람인 프랑스와 호트만(Francois Hotman)은 1556년 칼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골(Gaul: 이탈리아 북부, 프랑스, 벨기에, 네델란드, 스위스, 독일을 포함한 옛 로마의 속령)의 순교자들―그들의 피가 당신의 교회의 증거이다―’의 새로운 후예를 탄생시킨 그 정신이 제네바에서 일어났다”고 했다. 스피츠 편, <종교개혁정신>, 24. 루터의 후계자 멜랑톤(Melanchton)은 칼빈은 책과 씨름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했다. 또 칼빈의 대작인 <기독교 강요>에 대해서는 과학과 철학에 있어서 뉴톤의 ‘원리’(principia)나 칸트(Kant)의 ‘순수이성비판’과 비교할 수 있는 책으로서 기독교 교리의 명료하고 조직적인 교본인 동시에 칼빈주의를 성립시키는 도구이며 방어무기라고 했다. 스피츠 편, <종교개혁정신>, 24. 영국의 작가이며 정치가인 존 머레이(John Moraly)는 “칼빈을 서구 진보의 추진력에서 제외한다는 것은 한쪽 눈을 감고 역사를 해석하는 것”이라고 했다. 스피츠 편, <종교개혁정신>, 25. 프레드 그래함(F. Graham)은 칼빈을 사회와 경제에 미친 건설적인 혁명가라고 한다. 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Emanuel Stickelberger)는 칼빈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묘사했다. 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박종숙·이은재공역(도서출판 나단), 1992. 로널드 웰리스(Ronald S. Wallace)는 칼빈을 사회복지가, 목사, 신학자로 묘사했다. Ronald S. Wallace, Calvin Geneva and the Reformatio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90).
최근에 역사학자로 각광을 받고 있는 W. J. 부스마(Bouwsma)는 그의 저서 <칼빈>에서 칼빈의 양면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양면성’이란 칼빈 스스로 갖고 있는 모순을 의미한다. 가령 불안이라고 하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지만 대조적으로 그것은 기독교에서는 구원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을 이해하는 것은 그를 좀더 폭넓게 보게 한다. 칼빈의 대적자로서 카톨릭에서 장로교로 전환했다가 예정론 때문에 칼빈과 크게 다투고 다시 카톨릭으로 전환한 제롬 볼섹(Jerome Bolsec)은 칼빈을 교회의 통일성을 파괴하고 잘못된 교리를 가르친 야심적이고 교만하고 잔인하고 악랄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Hans J. Hillerbrand(ed.), The Reformation(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10.
이렇듯 관점에 따라서 칼빈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많은 차이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어떤 평가가 옳은가를 알기 위해서는 그 평가의 관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반드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 역시 칼빈의 생애를 어느 특정한 관점에서 살펴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필자는 칼빈의 후계자요 칼빈의 마지막 16년을 같이 생활해 온 데오도르 베자(Theodore Beza, Minister of the Church of Geneva)의 저술 <칼빈의 생애>(Life of Calvin)을 근거로 칼빈의 생애와 사상의 진면목을 살펴보고자 한다.
베자는 그의 저서 <칼빈의 생애>에서 칼빈의 생애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다가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귀한 본보기라고 했다. John Calvin, Tracts and treaties on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Vol. 1,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1958), cxxxviii. 인생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점이 많이 있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 것만큼 중요한 문제가 있을까? 정말 이 문제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다. 하나님은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를 당신의 역사에 귀히 쓰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런 질문을 가지고 칼빈의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칼빈의 생애

1) 칼빈의 출생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노용(Noyo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르(Gerard Calvin)는 사공의 아들로서 평민 출신이었지만 후에는 시청 서기를 거쳐 교구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가 됨으로써 시민 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 잔느 르 프랑(Jeanne Le Franc)은 당시 노용시 의회원의 딸로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칼빈의 생애에 있어서 어머니보다는 오히려 아버지에 대해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버지가 칼빈의 생애에 더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2) 칼빈의 교육
칼빈은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노용 대성당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또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교의 후원을 얻어 성당 신부에게 지불되는 성직록(canonry)을 받으며 공부했는데, 12살 때에는 당시 성직자가 되는 풍습대로 삭발까지 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머리가 총명하고 뛰어났던 칼빈은 고향 학교인 카페트 학교(College des Capetes)에 오래 다니지 않고 1523년에 파리로 가서 라 마르슈 학교(College de la Marche)에 등록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공부하다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교육하는 몽테규 대학(college de la Montaigu)으로 옮겼다. 몽테규 대학의 학장인 장 스단동은 공동생활 형제단을 창시한 제라드 후르테의 정신과 목적에 영향을 입었고 엄격한 수도원적인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몽테규 대학의 학장인 장 스단동(Jean Standonck)은 엄격하기로 유명한 공동생활형제단의 창설자인 제라드 후르테(Gerard Groote)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서 대학생활을 매우 엄격하게 관리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에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8-10시까지는 주 강의(grande classe),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 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 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2시에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기도 후에는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여진 교육을 실시했다. T. H. L. Parker, John Calvin(Lion Paperback Publishing Co., 1975), 9-10.
칼빈은 1528년부터 문학석사 학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4-5년을 보냈으며, 철학과 변증법도 배웠다. 그가 배웠던 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스콜라 철학을 계승한 구학파(via antiqua)에 대항하여 일어난 휴머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오캄과 그의 추종자인 삐에르(Pierre d' Aily)와 비엘(Gabreil Biel)의 철학을 지지하는 현대학파(via moderna)의 철학인 유명론(nominialism)의 영향을 받았다. 유명론이란 명사론적 논리학(terministic logic)으로서 그 용어가 암시하고 있듯이 사물에 관한 언어, 사물에 대한 정신 안의 개념과 사물 자체의 관계 분석과 관련을 맺고 있다. 유명론은 인식자의 인식에 중점을 둠으로써 주관적으로 흐르게 되었다. 따라서 결국은 회의주의로 빠지게 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Terminst logic is concerned with an analysi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language about the objects, the mental conception of the object and the object itself). 이름이 뜻하는 라틴어 nomen에서 유래되었으며 세계에는 보편적인 존재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으로서 참된 실재는 개체적 존재이며 보편적 존재는 단지 개념이나 말일 뿐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있다.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 제라르가 제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읽어보면 법학을 하는 자에게 법학이 부를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칼빈은 아버지 명령에 순종하여 당시의 유명한 오르레앙 대학(University of Orleans)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또다시 진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오르레앙 대학에서 칼빈은 영양섭취가 부실한 가운데서도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이로 인해 후일 건강을 잃고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다. 또 이는 결국 그가 일찍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18. 법과대학에 가 보니 그곳은 단순히 법만을 배우는 곳이 결코 아니었다. 교수의 대부분이 사제였는데 법과 대학생 가운데도 훗날 사제가 된 사람들이 있었다. 칼빈은 1531년 봄에 법학사를 획득하고 그후 4년이나 걸려 법률면허증(licentiae in laws)을 1536년에 획득했다. 하지만 칼빈은 면허증을 획득한 자에게 주워지는 법학박사 학위를 거절했다. 한편 칼빈은 오르레앙 대학의 희랍어 교수인 볼마로부터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단네(Piere Danes)의 지도로 능통하게 되었고, 바타블(Francois Vatable)에게는 히브리어를 배웠다. 1531년 5월 26일 아버지 제라르는 결국 참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칼빈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빈의 육신의 아버지는 칼빈을 법학자로 만들고자 애를 썼지만 그의 영적인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의 예정과 섭리에 의하여 그의 진로를 바꾸셨다.

3) 칼빈의 회심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이 있다. 이때부터 참다운 인생이 시작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인생이란 회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칼빈의 생애도 실제적으로는 그의 회심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이란 중생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심이란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회심이란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중요한 것으로서, 칼빈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도 칼빈의 회심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어거스틴이나 루터와는 그 성격이 다소 다르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자신의 회심 과정을 너무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는 키케로의 <호렌시우스>를 읽고 진리를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불탔다고 했다. 마니교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거친 후 마침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회심에 이르게 된다. 그에게 있어서 회심이란 의지의 변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의지’(will)란 인간 전체를 말한다(this term completes the psychological trinity(mens, memoria, voluntas). Viewed as initiating and causing any and all of man's actions, whether incorporeal or corporeal, and the whole soul is called will. Basically, mind, memory, and will are one substance). 인간의 의지는 죄로 말미암아 전도 혹은 왜곡(perversion)되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의해서 왜곡된 의지가 회복되어 새로운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한다. 어거스틴은 의지를 움직이는 원동력을 사랑으로 봤다. 이에 대해 그는 불후의 명저 <참회록>에서 “나의 사랑은 나의 무게입니다. 내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나는 사랑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게 됩니다”(My love is my weight! I am borne about by it. Wheresoever I am borne)라고 말했다. 어거스틴, <참회록>, 13.9.10.
한편 루터의 회심은 칭의에 있다. 그에 있어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되었다. 그에게서 가장 심각한 질문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가?”였다. 우리는 그의 고뇌에 찬 심정을 수도원 생활에서 읽을 수 있다. 그는 금욕생활, 명상, 율법을 지키는 생활, 성지순례를 통해서도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던 가운데 로마서 1:17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다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불현듯이 깨닫게 된다. 바로 이 칭의의 개념에서 루터의 신학은 형성되었고 또 그 개념에 의해서 성경이 해석되었다.
그러나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그의 회심을 이렇게 기술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둡고 천한 시작으로부터 끌어 올리셨고 나에게 가장 영예로운 사자(使者)와 복음 사역자의 직무를 부여해 주셨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 내게 신학을 시킬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 그러나 법률가가 되는 것이 어디서나 소득이 많다는 생각을 하시고 갑작스럽게 마음을 바꾸셨다. 공교롭게도 나는 철학을 공부하다가 법학을 공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소원에 대한 순종으로 나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자신의 섭리의 비밀 고삐(freno)로 나의 진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셨다. 제일 처음 일어난 일은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시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교황제의 미신에 너무 강하게 빠져 있었기에 이보다 못한 그 무엇으로는 나를 그렇게 깊은 수렁에서 끌어 낼 수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렇게 참 경건의 맛을 본 것이 그 안에서 진보하려는 나의 갈망에 불을 붙이게 되어 나는, 비록 전적으로 포기는 하지 않았으나, 남은 공부는 열심 없이 더 냉랭하게 하기에 이르렀다. 1년도 채 못되어 순수한 교리를 배우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초보자요 신참인 나에게 배우기 위해 몰려왔다. T. H. L. 파커, <죤 칼빈의 생애와 업적> 김기찬 역 (생명의말씀사, 1986), 315.

칼빈은 자신의 회심에 대해 ‘갑작스러운’ 혹은 ‘예기치 않은’ 회심에 의해 하나님이 유순하게(subita conversio ad docilitatem) 했다고 기록할 뿐이다. 라틴어 ‘수비타’(Subita)는 ‘예기치 못한’(unexpected)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수비타’를 ‘갑작스러운’ 혹은 ‘예기치 못한’의 의미로 번역할 수도 있다. 학자들 간에는 ‘갑작스러운’이라는 형용사를 해석하는 문제로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파커(T. H. L. Parker)는 ‘갑작스러운’이라는 말을 빼어 버린다고 해도 그 문장의 의미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T. H. L. Parker, John Calvin, 194. 파커는 칼빈에게 받았던 성직록을 버리기 위해서 피카데리 지방에 왔던 1534년 4월 5일과 1534년 5월 4일 사이에 회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칼빈의 나이는 27세가 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칼빈에게 있어서 회심은 중생과 동일하게 생각된다. 회심은 회개를 말하며 회개는 방향 전환, 즉 육이 죽고 영이 사는 것이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3.5-9.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갑작스러운’이라는 언어는 중생은 우리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라는 사실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심에는 중생의 결과로서 방향 전환이 따르게 된다. 칼빈에게 있어서도 올무와도 같은 교황청 미신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게 되었다. 회심은 칼빈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새로운 삶을 살게 했으며, 그 동안 교황청 미신으로 완악해진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유순하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후 칼빈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맛을 알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게 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을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이와 같이 칼빈의 회심은 칼빈의 경건한 삶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4) 제 1의 제네바 개혁(1536-1538)
1533년 칼빈의 친구인 니콜라스 콥(Nicolas Cop)이 루브르 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취임식은 만성절(새 개학식)에 갖게 되었다. 칼빈은 그에게 취임사로 개혁적이고 복음적인 메시지를 전하도록 권유했다. 칼빈의 후계자 베자에 의하면 칼빈이 직접 연설문의 메시지를 작성했다고 한다. 이 가설에 대해서 웬델은 이의를 제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콥이 당국의 수배를 받을 때 동시에 수배를 받고 망명을 떠난 것을 추정한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콥의 설교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사료된다(웬델, <칼빈신학서론>, 49-50). 연설문의 내용은 연설이라기보다 마태복음 5:1-12에 관한 강해설교였다. 콥의 메시지는 교황의 면죄부나 선행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복음에 대한 메시지였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213(각주 25)에서 재인용. 그의 메시지의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복음의 초청이 나타나 있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마 5:11).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 진리를 담대히 말하지 않고 감춥니까?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것이 옳습니까? 몸은 죽이되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옳습니까?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하여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사탄의 결박으로부터 자유케 하신 그분의 이름을 위해 가장 미미한 고난을 받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인류의 배은망덕함이여! 세상과 사악한 자들은 신자들의 마음에 복음으로 순수하고 진지하게 침투하려고 하는 자들을 이단, 미혹케 하는 자들, 악한 말을 하는 자들, 그리고 사기꾼이라고 불러왔습니다. …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모든 것을 태연히 견디는 자들은 복 있는 자들입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존 칼빈, <기독교 강요>(1536년 초판 완역)(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8), 22-23.

만성절 연설로 인해 콥은 신변에 위협을 느꼈으며 칼빈도 피신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프란시스 1세는 콥과 칼빈을 “저주받을 루터파 이단”으로 정죄하고 이들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기독교 강요>, (1536), 23. 어쩔 수 없이 칼빈은 바젤로 피신하였는데, 피신한 지 1년도 못되어 <기독교 강요> 초판(1536년)을 완성했다.
<기독교 강요> 초판 편집이 끝난 후, 칼빈은 고향 파리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영원히 파리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에 영주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칼빈이 파리를 떠나 스트라스부르그로 가고자 했을 때 프랑소아 1세와 칼 5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바로 스트라스부르그로 갈 수가 없었다. 칼빈은 부득불 제네바를 통해서 가고자 했고 그곳에서는 하룻밤만 머물기로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로 말미암아 칼빈은 제네바에서 후일 일생 개혁의 동역자가 될 기욤 파렐(Guillaume Farel)을 만나게 되었다.
파렐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의 저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칼빈이야말로 제네바에서 자기와 함께 개혁 작업을 도와주며 개혁을 이끌어 나갈 적격자라고 생각했다. 파렐이 제네바에서 같이 개혁의 길을 갈 것을 요청했을 때 칼빈은 “저는 소심하고, 허약하고, 천성적으로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저 자신이 그러한 반대들을 감당해 낼 수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파렐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John Calvin, Calvin's Commentaries, Vol. 4(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818), xliii(시편 서문). 다음에는 CC로 표기됨. 그러나 파렐은 이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개혁 작업을 도와주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기필코 저주할 것이라고 칼빈을 협박했다. 마침내 칼빈은 파렐의 제의를 받아들여 제네바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1536년 9월 5일 의회의 의사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시의 지도자 기욤 파렐은 이 고올(Gaul) 출신의 사람(ille Gallus)이 성 베드로 교회에서 시작한 성서 강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 사람이 채용(alimentare)될 것을 요청했다.” 스티겔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66. 의회는 그의 요청을 승인했다.
호반에 위치한 제네바 시는 인구가 대략 1만여 명인 도시로서 오래 전부터 개혁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우상파괴, 소요, 그리고 주교 사보이의 공작에 대한 싸움이 수반되었다. 게다가 인플레이션과 기근이 있었고, 많은 개혁파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추방되며 극적으로 독살을 면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옛 신앙의 미신도 극복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개혁에 대해서 반대하는 자유주의 파들도 있었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개혁을 시작할 때는 이처럼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개혁을 추진했고, 그 개혁의 근본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모든 제네바 주민들이 반드시 지키고 준수하도록 하기 위해 1536년에 제정된 믿음의 고백에서 칼빈은 “성경만이 믿음과 종교의 규법”(scripture alone as the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했다.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LCC, J. K. S. Reid tr.(London: SCM Press, 1954), 22:26. 칼빈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종교를 개혁한 사람이다.
칼빈은 참으로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예배에서 시편을 노래하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한편 매주마다 성찬을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또 성찬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회개치 않은 자에게는 수찬 정지를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교회가 가질 수 있도록 요구했다. 그 외에도 새 교인들에게 교육할 수 있는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교훈과 신앙고백’(instruction et confession de foidont on use en l‘ Eglise de Geneva, 1537)을 만들었으며, ‘어린이 교육을 위한 제네바 교회의 요리문답’(the catechism of the Church of Geneva)도 만들었다. 제네바 교회에서 사용할 교훈과 신앙 고백은 <기독교 강요>(1536)를 요약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칼빈은 어린이들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The Church of God will never preserve itself without a Catechism, for it is like the seed to keep the good grain from dying out, and causing it to multiply from age to age”).
한편 이런 와중에 프랑스 왕의 사신들이 제네바 시를 제국에 합병시키고자 하는 제안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들은 베른 주(州)가 제네바 시를 간섭하기 시작했다. 베른 주의 관리들은 제네바 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개혁이 스위스와 독일의 전통에서 이탈한 것에 대한 위험을 느끼고 제네바 교회 성찬식에 무교병을 성체로 쓸 것을 요구했는데, 제네바 의회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개혁자들은 베른 주 로잔느 종교회의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성찬을 시행하도록 결정했을 때도 단호하게 거부했다.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이 같은 결정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세상 권력이 교회문제를 간섭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른 주와의 불화를 원치 않았던 제네바 의회는 이 시끄러운 설교자들(칼빈과 개혁자들)에게 설교를 금하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칼빈은 성찬식은 거행하지 않았지만 이 결정을 따르지 않고 부활절에 설교를 했다. 이로 인해 결국 칼빈과 파렐은 시의회로부터 면직을 당하고 급기야는 추방을 당하게 되었다.
칼빈이 추방당하기 전에 취리히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칼빈이 얼마나 제네바에서 온 몸을 바쳐서 일했는가를 알 수 있다.

신실한 동역자인 파렐과 함께 내가 제네바 교회의 지도를 떠맡게 된 이후, 나는 제네바 교회를 보존하기 위한 모든 방법들을 발견하고자 충성스럽게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내가 떠맡았던 책임이 나를 심하게 억눌렀지만, 나는 결코 어떻게 이 책임을 벗어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본 일은 없습니다. 내가 책임을 떠맡고 있었던 그 한 해 동안 우리가 실제로 겪었던 역경과 불운을 조금이라도 당신들에게 말한다면, 당신들은 거의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습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84.

5) 칼빈의 스트라스부르그 생활(1538-41)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칼빈의 스트라스부르그에서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그는 당시 하나님의 교회를 치장하는 귀중한 보석과 같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던 부처, 카피토, 헤디오 및 다른 사람들로부터 마치 보석처럼 영접을 받았다. 스트라스부르그의 의회 의원들과 섭정자들에 의해 권한을 부여받은 칼빈은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교회 내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교회의 규율을 도입하였다. 또한 그는 신학강의를 했는데 그의 강의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흠모를 받았다” <하나님의사람 칼빈>, 88에서 재인용.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의 프랑스 난민 교회에서 흩어진 양들을 위해 목회를 하면서 모든 정력을 쏟아 로마서 주석을 완성했다. 그는 “로마서에 드러나는 기독교의 진리들을 찬양한다는 것은 헛된 일이다. 우리의 언어는 이 서신의 오묘한 진리들을 표현해 낼 수 없다. 로마서 스스로가 입을 열어 말해야만 한다. 로마서를 읽기 시작한 사람은 성경의 모든 숨겨진 보화들을 꺼낼 수 있는 광의 열쇠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이다”라고 로마서의 중요성을 주석 서문에서 기록하고 있다.
칼빈이 로마서 주석을 출판하게 되었을 때 제네바의 관리들의 마음이 변하기 시작했다. 당시 칼빈이 떠난 제네바는 종교적으로 퇴보해 가고 있었다. 파커,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 165. 이때 로마 교회 추기경인 사도레토(Jacopo Sadoleto)가 제네바 시민에게 로마 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구원이 없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으며, 칼빈은 사도레토의 편지를 반박하는 답장을 써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1주일 안에 답장을 완성해 보내기도 했다.
칼빈은 그 동안 개혁파간에 있었던 성찬에 관한 논쟁에서 쯔빙글리의 상징론과 루터의 공재설의 중간 입장인 영적 임재설을 주장하는 성찬에 관한 소고를 쓰기도 했다. 칼빈은 비록 루터와 신학적인 면에서 다른 점도 많이 있지만 루터를 아주 존경했고, 루터도 칼빈의 성찬에 대한 소고를 읽고 칼빈을 칭찬했다. 루터는 칼빈의 성찬에 대한 책을 읽고 부쳐에게 보낸 서신에서 “칼빈에게 나의 존경 어린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특별한 기쁨을 가지고 그의 책을 읽었습니다.”(De Wette, Luthers Brief, 5:210). 스트라스부르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멜랑히톤은 “칼빈은 루터의 마음에 대단히 들었습니다.”(1539년 11월 20 파렐에게 보내는 편지)라 썼고 칼빈은 “루터가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지를 기억하십시오. 그의 재능들이 얼마나 놀라운지, 또한 그가 얼마나 용감하게, 얼마나 확고한 자세로, 얼마나 능력 있게, 얼마나 학문적으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그리스도의 파괴와 구원의 교리를 선포하는 일을 줄기차게 수행해 왔는지 기억하십시오. 나는 내가 반복해서 말했던 것을 아직도 고수하겠습니다. 그가 나를 마귀라고 부르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변함없이 그를 존경하고 그를 하나님의 뛰어난 종이라고 부르겠습니다”(1544년 11월 25의 편지).

6) 칼빈의 결혼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결혼했다. 그의 친구 파렐은 칼빈에게 부자요 매력적인 여인을 소개했지만 그는 자신의 결혼관을 이렇게 피력했다. “여성으로서 나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우아함이란 교양, 부드러움, 겸손, 훌륭한 가사관리, 인내 등입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96. 칼빈은 자기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 중 재세례파 교인으로서 벨기에에서 스트라스부르그로 왔던 미망인 이들레뜨 드 뷰렌 (Idelette de Buren)과 1540년 8월에 결혼했다. 이 미망인은 칼빈의 성경 주석에 영향을 받아 개종한 여인이었다. 칼빈과 뷰렌은 세 아이를 낳았으나 모두 다 출생 직후 사망했으며, 1549년 뷰렌의 사망으로 말미암아 그녀와의 결혼생활도 9년을 넘기지 못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던 칼빈은 아내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애도했다.

비록 아내의 죽음이 나에게 쓰라리도록 고통스럽지만, 아직 할 수 있는 한 슬픔을 억제하고 있습니다. … 당신은 내 마음이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연약한지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강력한 자기 통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렇게 오래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나의 슬픔은 보통의 슬픔이 아닙니다. 나는 내 삶의 가장 좋은 동지를 잃었습니다. 어떠한 가혹한 어려움이 닥친다 하더라도 그녀는 나의 자발적인 반려였을 것입니다. 망명과 가난 속에서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음 속에서조차 말입니다. 생전에 그녀는 내 사역의 충실한 조력자였습니다. 그녀에게서 나는 아주 사소한 방해조차 결코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병들어 누워 있는 동안 그녀는 줄곧 자신보다도 자녀들에 관해 더 걱정했습니다. 그녀가 근심을 억제하느라 쓸데없이 자신을 괴롭힐까 두려워, 임종 삼일 전 나는 기회를 보아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게을리 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즉시 말했습니다. “나는 그들을 이미 하나님께 맡겨 두었습니다.” 1549년 4월 7일 Viret에게 보낸 편지. W. J. 부스마, <칼빈> 이양호, 박종숙 공역 (도서출판 나단, 1991), 54.

한편 칼빈은 제네바로부터 다시 돌아오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처음에는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는 “나는 그 십자가를 지느니, 백 번 죽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장 카디에,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이오갑 옮김(대한기독교서회, 1995), 120, 각주 18에서 재인용.라고 파렐에게 제네바로 돌아가기 어려운 자신의 고뇌에 찬 심정을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는 ‘소명’을 확신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자세가 되어 있다고 고백했다.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 4:194. 칼빈에게서 소명에 대한 확신이란 예정의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기독교 강요>, 3.24.1. 칼빈은 시편 주석 서문에서 제네바 교회의 ‘안녕’을 위하여 눈물을 머금고 제네바로 돌아가겠다고 결심했다.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신학적으로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제네바로 돌아가도록 강권을 받았을 때, 그는 파렐에게 편지하면서 “만일 내가 선택한다면 이 일에 대해서 당신에게 복종하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하겠지만,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게 속하지 않았음을 상기할 때 나는 제물로 바쳐진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립니다”라는 감동적인 고백을 통해 칼빈 자신이 이제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했다. R. 스토페르, <남편, 아버지, 친구, 목회자로서의 인간 칼빈> 박건택 역 (도서출판 엠마오, 1989), 100. 각주 6에서 재인용. 칼빈은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손의 모양을 그린 자신의 문장 곁에 “성별된 심장을 제물로 드립니다”(cor mactatum in sacrificium offero)라는 말을 그의 좌우명으로 새겼다고 한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109. 이것은 칼빈이 자기의 심장을 드릴 정도로 하나님을 섬긴 위대한 하나님의 종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7) 제 2의 제네바 개혁(1541-1550)
스트라스부르그 사람들이 칼빈을 제네바로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칼빈을 소개했다. “필적할 이 없는 이 사람, 주님의 드문 도구인 이 사람이 마침내 당신들에게로 돌아갑니다. 참으로 우리가 그와 비교하여 다른 사람을 평가한다면, 우리 세대는 그와 필적할만한 다른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 111.
1541년 9월 13일 화요일, 칼빈은 시의회 의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제네바로 돌아왔다. 칼빈을 호위하기 위해서 호위 부대가 파견되었다. 가족 수송을 위한 마차가 스트라스부르그까지 왔으며 칼빈을 위한 상느완느 거리의 고급 주택이 마련되었다. 파커,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 171. 칼빈은 자신이 다시 돌아온 것은 제네바를 섬기기 위해서이며 이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를 개혁하고 규칙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자신은 제네바의 종으로 기꺼이 헌신할 것임을 시의회 의원들에게 다짐했다. Calvini Opera(Corpus Reformatorum), 21, 282.
또 “정부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규정하고 있는 초대교회 때와 같은 모습의 교회로는 유지해 나갈 수 없다”고 주장하였는데, 결국 그는 시의회의 동의를 얻어 “교회에 대한 칙령”(ecclesiastical ordinances)을 완성했다. 교회에서 삶 전체를 위한 법을 제정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이 칙령은 주로 목회적 기능의 견지에서 작성되었다. 칼빈은 이 칙령에서 질서정연한 교회는 목사(pastors)와 교사(doctors)와 장로(elders)와 집사(decons)가 있어야 하며, 교회의 임무는 기록된 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성례를 올바르게 집행하며 성도들에게 믿음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며 고통 당하는 자들을 보살피는 것이라고 했다.
예배는 주일에는 세 교구의 교회인 성 삐에르, 라 마들레느, 성 베드로 교회에서 각각 새벽과 9시 예배를 드리고 성 삐에르와 베드로 교회에서는 3시에 또 예배를 드렸다. 어린아이들을 위한 요리문답 공부는 각 교회에서 정오에 하기로 했다. 이 밖에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도 세 교회에서 각기 예배를 드렸다. 정당한 이유 없이 주일예배에 참석치 않은 자는 벌금을 물어야 했다. Calvin: theological treatises, LCC, 77. 칼빈은 주일 오전과 오후에 설교했고, 주중에도 세 번(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한 번)씩 설교를 했다. 주일 오전에는 복음서를, 오후에는 시편을, 주중에는 구약을 가지고 강해설교를 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하신 말”이다. 그래서 설교란 하나님께서 설교자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해야 한다고 했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의 “입”(the mouth of God)인 것이다.
제네바에서의 칼빈의 교회 개혁―교회의 규율을 제정하고 시행한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 중의 하나이다. 이런 칼빈에 대해 Rud Staehelin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교회를 존재하도록 만든 이 사람의 신앙의 영웅적 대담성과 불굴의 의지력과 엄청난 자기 부인으로 인해 기독교 교회사에 있어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한 시대가 시작된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 그의 이런 능력과 굳건함의 비결은 자신의 전 존재와 행위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틸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129-130, 각주 117에서 재인용.

칼빈은 하나님의 사람(the man of God)이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전 생애를 아낌없이 바친 사람이었다. 존 낙스는 제네바 개혁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감히 그리고 떳떳이 말한다면 이곳은 사도시대 이후로 지상에 존재했던 그리스도의 학교들 가운데 가장 완벽한 곳이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전파했지만 생활과 종교가 그처럼 신실하게 개혁된 곳을 나는 아직 다른 곳에서 보지 못했다.” 죤 T. 맥닐, <칼빈주의 역사와 성격> 전성구, 양낙홍 공역(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0), 204.
1559년 3월 5일 칼빈은 제네바 아카데미의 개교식을 성베드로 교회에서 가졌는데 칼빈 자신이 직접 학칙을 제정한 이 학교는 신학부와 철학부로 구성되었다. 이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증진시키는 일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었다. 즉 이 학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와 봉사자를 길러내는 곳이었다.
제네바에서 교회 개혁을 하는 동안 칼빈은 많은 어려움과 슬픔을 겪었다. 당시 고국 프랑스에서는 계속해서 프로테스탄트들을 핍박하고 화형에 처했다. 그 중에 제네바에서 칼빈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다섯 젊은이들이 프랑스에서 자신의 개혁 신앙을 고백했다가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강구했던 칼빈은 마지막으로 그들에게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 편지는 칼빈의 신앙과 신학사상을 단적으로 잘 보여준다.

당신들 안에 하늘 아버지의 권능이 힘있게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그분께서 너무나 명백하게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역사를 온전히 이룰 것이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어떤 불안한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과 함께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총으로 양자로 선택되어 상속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당신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그의 독생자를 위한 순교자로 지명하셨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주는 표징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내 영혼이 항상 내 수중에 있나이다. 그렇지만 당신의 율법을 나는 잊어버리지 않습니다”라는 다윗의 말에 따라 행동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라도 당신들의 목숨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당신들의 생명이 복음의 증인이라는 귀중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이제는 복음의 증인으로 죽는 것은 주님께서 얼마나 당신들을 소중히 여기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를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땅이 숨기고 있던 피를 드러내고, 우리가 이 썩어 가는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새로운 몸을 입고 일어날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때까지 우리들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으소서! 우리가 다름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이유로 핍박받고 조롱받고 있다는 이 확실한 보증으로 우리 모두 위로를 삼읍시다. 지금은 단지 희망 속에서만 소유하고 있는 모든 축복들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함께 모여 완전히 즐기게 될 그 날까지….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온 세상을 이 세상에 속한 자랑거리들과 더불어 경멸할 만한 충분한 이유인 것입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161.

자신들의 선생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지 얼마 안되어 다섯 청년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화형에 처해지기 전에 그들은 시편 9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내가 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사를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주께서 나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형제여! 용기를, 용기를” 하면서 죽어갔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 160. 순수한 복음을 지키기 위해서 이렇게 칼빈주의자들은 하나씩 둘씩 죽어갔다.

2. 칼빈의 유언과 고별사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칼빈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질병에 시달렸는데, 그것도 한두 가지 질병이 아니라 위장병, 폐결핵, 에스마, 관절염 등 많은 병으로 고생했다. 가정적으로는 결혼생활이 9년을 넘지 못했고, 세 아이들도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부유하고 감동적인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가 남긴 유언장에서 그의 영적 부유함을 볼 수 있다. 1564년 4월 25일 칼빈은 자신의 신앙의 진수를 보여주는 감동적인 유언장을 구술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제네바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종 된 나 요한 칼빈은, 많은 질병으로 연약했지만, 보잘것없는 피조물인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죄와 연약함 가운데 있는 나를 참아오신 하나님께, 더욱이 나의 부족한 사역을 통해 그분을 섬기는 놀라운 은총에 참여하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에게 주신 은총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또 나의 모든 죄과가 도말된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공로를 영접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피 흘리신 우리 구속주의 위대한 보혈로 하나님께서 나를 정결하게 하셔서, 그분의 면전에서 서게 될 때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도록 해 주시기를 겸손히 간청합니다. 이에 더하여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전하게 가르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총의 분량에 따라 신실하게 성서를 해석하고자 노력하였음을 밝힙니다. 진리의 적에 대항하여 주도했던 모든 논쟁들에서 나는 어떤 교활한 술수나 궤변도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오! 그러나 나의 의지, 나의 열심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차갑고 게을러서 나는 모든 점에서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함이 없다면, 나의 모든 열정적인 노력은 단지 연기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그분이 나에게 주신 은총이 나를 더욱 죄인으로 만들기까지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의뢰하는 유일한 것은 그분이 모든 비참한 죄인들에게 자신을 아버지로 나타내기를 바라시는 자비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나머지 일들에 관해서는, 내가 죽은 후에 축복된 부활의 날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나의 육신이 관례에 따라 매장되기를 바랍니다. Hans J. Hillerbrand(ed.), The Reformation: a Narrative History Related by contemporary Observers and Participants(Grand Rapids: Baker Book House, 1987), 207-208.

칼빈은 1564년(55세) 4월 25일 유언장을 구술했다. 이 유언장은 단순한 유언장이 아니라 그의 생애를 마감하면서 그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가장 단순하면서도 진솔하게 표현하는 유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칼빈의 고별사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칼빈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유언장의 내용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말씀의 종, 칼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말이다. 우리 인생은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살든지 아니면 세상의 노예(정욕의 노예, 물질의 노예, 권력의 노예)로 살든지 둘 중에 하나다. 홀로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도 바울은 고난이 가득 찬 영광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위하여 선택함을 받았다. 그는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였다. 그는 노예로서 일생 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로서 일생동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았다. 또 그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말씀의 종인 사도 바울은 신약성경에 있는 서신 중 2/3를 기록했다.
사도 바울과 마찬가지로 칼빈도 자신을 말씀의 종(I, John Calvin, minister of the Word of God)으로 소개했다. 이틀에 한 번 정도 설교했던 그는 말씀의 종으로서 거의 모든 성경을 주석했고, 수많은 논문과 편지를 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번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해석한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사심 없이 선포하고 그대로 순종하면서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바친 위대한 말씀의 종이다.
칼빈은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으며,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성경 안에서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기독교 강요>, 1.7.4. 우리는 이 사실을 논리나 철학적인 추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증거로 확신한다. 성경이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 들어야 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읽어야 한다. 이 말은 성경을 문학 책이나 철학 책으로 읽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던 롯의 사위들은 어떠했던가(창 19:14)? 그들은 유황불에 타 죽었다. 그렇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 것이 성경을 올바로 읽는 것이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그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된다. 바로 이 진리가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한다(요 8:32). 칼빈은 말씀의 종으로서 자기의 심장을 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섬겼고 또 그 말씀대로 살았다.

2) 하나님께 감사
칼빈은 겁 많고 소심하고 부족하고 연약한 자신을 잘못된 우상숭배와 죄로부터 구원하여 주시고, 오래 참아 주시고, 끝까지 인도하시고, 당신의 복음역사에 쓰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를 드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은총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깊이 감사를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이 칼빈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덴마크의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인 소렌 킬케고올(Soren Kierkegaard)은 그 마지막 저널에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 감사드리는 것이라고 했다(All we have to do is to give thanks to God because everything is out of his love). 그렇다. 우리가 일생을 마치는 날,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일이다.

3) 올바른 구원론의 재정립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문제는 구원의 문제였다. 종교개혁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해 성경적인 구원론을 재정립하였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기독교 강요>(1536)의 제목에서 말해주고 있다. <기독교 강요> 제목은 “기독교 강요, 구원론에서 알아야 할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빠짐없이 다룬다. 경건에 열심히 있는 사람도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며, 최신판이다.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서언에서 이 책은 하나님의 신앙고백으로 왕에게 헌정하고 있다(저자: 노용의 칼빈, 바젤, MD XXXVI)”라고 말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 있다. “나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이나 피난처를 내가 갖고 있지 않음으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믿음 안에서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에 근거해 있다.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예정에 근거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예정을 믿음을 통하여 복사할 수 있다고 칼빈은 에베소서 1장 설교에서 말했다.

4) 성경해석
칼빈은 진리의 대적들에 대해서 어떤 교활한 수단이나 술수나 궤변도 사용하지 않고 도리어 정직하게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싸웠다. 그는 설교, 저작, 주석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고 순결하게 선포하기 위해서, 성경을 충성스럽게 해석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이 말은 칼빈이 성경해석에서 믿음의 유추(analogia fidei, 롬 12:6 믿음의 분량대로)에 충실했음을 말해 준다. 칼빈 자신은 이 말의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잔대학의 신학 교수인 윌리암 바카누스(William Bucanus)는 교리문답서인 그의 노작 “신학강요”(Institutions Theologiae: Geneva, 1605)에서 신앙의 유추란 “성경 여러 곳에서 해석되었으며, 사도신경과 십계명에 일치한 성경의 영원한 의미이며, 또한 신성의 모든 부분의 원리요 일반적인 견해이다”라고 정의했다. <기독교 강요>상, 김종흠·신윤복·이종성·한철하 공역(생명의말씀사, 1991), 46. 뿐만 아니라 칼빈은 성령의 내적인 조명을 통해서 가르쳐 준 자연스럽고 분명한 의미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로 이해했다.

5) 장례식
흰 수의가 입혀지고 소나무 관에 눕혀진 칼빈의 장례식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평범하였다. 한 가지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비문도 쓰지 않도록 한 것이다. 그래서 불과 몇 달 후에 외국학생들이 칼빈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무덤들 사이에서 그곳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칼빈의 생애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할 수 있다.

6) 재산분배
칼빈은 얼마 되지 않는 유산을 가족에게 전부 분배했다. 이것은 칼빈이 극히 검소하게 일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자상한 그의 면모를 보여준다.

7) 시의회 의원들에게 한 고별사
칼빈은 시의회에 가고자 했으나 건강 때문에 시의회 의원들이 칼빈을 찾아왔다. 그때 칼빈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고별사를 했다. 첫째, 자신이 하나님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여러모로 도움을 준 시의회 의원들에게 감사를 드렸다. 그리고 자신은 제네바를 위해서 충성스럽게 일했다고 말했다. 둘째, 자신은 교리에 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결하게(purely, 오염되지 않게), 성실하게(faithfully, 정통신학) 가르쳤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만약 올바르게 전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자기에게 임할 것을 각오하면서 전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했다. 셋째, 칼빈은 시의회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하며 고별사를 마쳤다. “하나님만이 왕들과 국가의 존폐를 좌우한다. 하나님 앞에서 살며 하나님만을 의지하라 그리고 겸손하라, 하나님만이 왕 중의 왕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자는 하나님이 그를 반드시 영화롭게 한다. 성경대로 예배하라. 서로 사랑하라.” 칼빈이 그들을 위해 축도(祝禱)하니 시의회 의원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John Calv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Vol. I, "Life of Calvin," cxxvii-cxxxi.

8) 제네바 목사들에게 한 고별사
1564년 4월 28일 제네바 목사들이 칼빈을 방문했다. 그때 칼빈은 그들에게 고별사를 했다. “그대들이여, 확신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하시오. 하나님이 보호하실 것이다. 서로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시오(embrace each other with mutual love). 하나님이 부르셔서 맡긴 교회에 무엇인가 빚지고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시오. 교회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교인들이 말씀에 순종하도록 힘을 기울이시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쳐서 교인을 떠나게 하는 것임을 늘 명심하시오(think again and again).” Tracts and Treatises on the Reformation of the Church, cxxxi-cxxxii. 칼빈은 목사들에게 이렇게 권면한 후 눈물을 흘리는 목사들과 악수를 나누며 헤어졌다.

9) 칼빈의 죽음
1564년 5월 27일 저녁 8시 하나님의 종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때 그의 나이 54세였다. 베자는 칼빈의 죽음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죽은 사람이기보다는 잠자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의 죽음과 동시에 공교롭게도 태양이 지고, 하나님의 교회의 한 위대한 빛이 하늘로 취하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시대의 한 사람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또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 주셨습니다. 스티켈베르거, <하나님의 사람 칼빈>, 208에서 재인용.

베자는 계속하여 칼빈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네바 시의 표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도시는 온통 비통의 도가니였다. 시정부가 주의 선지자를 위해 슬퍼하였고, 가련한 양떼들은 그들의 신실한 목자를 잃은 것을 애통해 하였다. 아카데미는 학교의 참된 박사요 지도자인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영적 아버지요 하나님 다음 가는 이 위로자의 죽음을 슬퍼하며 함께 울었다. <하나님의 사람 칼빈>, 197-98. Hillerbrand, The Reformation, 208-209.

제네바 시의회의 서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에 그러한 고상함을 각인하셨다”라고 기록했다(Dieu lui avait imprime une caratere d'une si grande majeste). <하나님의 사람 칼빈>, 208. 칼빈의 유언대로 그 무덤에는 비문도 비명도 없었다. 칼빈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위대한 학자인 두메르그는 칼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쯔빙글리,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요, 희랍 정신을 지닌 영웅, 다음 세대에서야 비로소 그 가치가 완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원대한 스케일의 계획을 가진 정치가. 그의 운명이 우리에게 고대 희랍 비극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이 사람은 불길한 패배를 당한 채 전장에서 죽었다. 하늘의 구름이 그가 죽은 곳에, 그의 조국에, 그의 필생의 사역 위에 모여든다.
루터, 독일 서사시의 챔피언, 보름즈의 영웅, 오늘날까지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의 경건과 언어, 그리고 시문을 풍부하게 살찌운 이 사람은 피곤에 지치고 불길한 염려에 가득한 채, 자신을 완전히 대신할 수 있는 후계자를 발견하지 못한 채 죽었다. 또 다시 하늘의 구름이 그 무덤 위에, 그의 조국 위에, 그리고 그의 필생의 사역 위에 모여든다.
칼빈은 죽었지만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는 것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고요히 남아 있었다. 평화와 절대적인 질서 속에서 그는 국가와 교회를 떠났고, 설령 베자보다 덜 탁월했다 하더라도, 그의 후계자는 별 어려움 없이 칼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든 일들이 그대로 고요하게 머물렀으며, 또한 그런 상태가 계속 될 것이다. 반죽이 빚어졌다. 반죽을 빚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반죽은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오른다. 많은 나라들에서, 여러 해 동안, 수세기 동안, 심지어는 신세계 저편에서도 누룩이 활동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칼빈은, 그가 증거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과 같이, 그의 사역과 말들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반죽을 빚은 이 사람이 자신을 넣은 이 누룩의 활동 속에서 최소한의 자신의 몫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확신을 가진 채, 그의 신념이 옳았음을 인정받은 채, 이 제네바의 개혁자는 어떤 묘비도 눈에 뜨이지 않고 알려지지 않는 무덤 속에 누워 있다. 그가 원했을 유일한 한 구절, 겸손하면서도 승리에 넘치는 한 구절만이 찬란히 빛을 발하고 있을 뿐이다. “Soli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하나님의 사람 칼빈>, 210-211, (각주 214)에서 재인용.

3. 칼빈의 주요 저술

칼빈의 저술은 너무도 방대해서 다 기술할 수 없다. 그는 신학자로서 목회자로서 수많은 신학적인 저술과 설교, 주석, 편지, 논문을 남겼다. 이 저술 중에서 가장 위대한 책을 한 권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그의 불후의 명작 <기독교 강요>를 꼽을 수 있다. 본 저술에서는 <기독교 강요>에 대해 분석하고 요약한다.

4. 칼빈의 주요 사상

칼빈의 주요 사상은 그의 생애 특히 그의 유언장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유언장이 그 사람의 생애와 사상을 가장 진실하게 보여주는 최후의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의 유언장을 통해 우리는 칼빈의 사상을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칼빈은 자기 자신을 소개할 때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소개했다. 자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느냐는 것은 중요하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종으로 낮추어 소개했다. 그래서 바울은 일생을 복음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았다. 마찬가지로 칼빈은 말씀의 종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는 요한계시록과 요한 1서, 2서, 3서를 제외한 성경 전체를 주석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한번도 그릇되게 해석한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한 말씀인 성경에 의해서 교회를 개혁했고, 성경이 가는 데서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추는 원리에 의해서 그의 신학을 형성했으며, 성경대로 살도록 가르쳤다. 그는 성경만이 믿음과 종교의 규범(Scripture alone as the rule of faith and religion)이라고 고백했고, 또 그렇게 가르쳤으며, 그리고 그렇게 살았던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었다.

2) 하나님의 절대 주권(Divine Sovereignty)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가 아니라 우주만물을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절대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은 우주만물에 대한 그의 예정, 창조, 섭리, 타락, 구속, 종말의 전 과정에서 나타난다.
칼빈은 그의 유언장에서 자신의 전 구원이 근거해 있는 하나님의 예정 외에는 다른 소망과 피난처가 전혀 없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이 믿음으로 살다가 죽어간다고 고백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예지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예정을 의미한다. 이 예정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행사이며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의해서 된 것이다.
칼빈은 이중 예정을 주장한다.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심판으로 이미 결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선택 자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하신다. 이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서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Sola gratiae)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예정이 구원의 근거라고 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경험에 기초해 있다고 한다면 아무도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경험이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하기 때문이다.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초해 있어야만 구원은 절대적이고 확실한 것이다. 따라서 칼빈의 예정론은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로하고 이 험한 세상에서 절대적인 승리를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중 예정은 하나님의 주권의 역사이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요 섭리이다.
하나님의 지극하신 은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졌다. 그래서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도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감히 설 수 없다고 칼빈은 그의 고별사에서 고백했다. 예정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며 유기(reprobation/永罰)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한다.

3)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칼빈은 사도 바울처럼 이제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산다고 했다. 이제 자신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네바 요리문답에 의하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생활은 인간의 궁극적인 삶의 목적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어떤 삶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생활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일생동안 그를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좋은 것을 원하며, 구원을 찾으며, 필요할 때는 언제나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즉 그분께만 모든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모든 선한 것의 유일한 주인이심을 입으로 고백할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또 사도 바울처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고전 10:31). 이런 생활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죄악으로 오염되어서 입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영광을 구할 때가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칼빈이 신앙생활의 핵심을 자기 부인으로 본 것은 깊은 진리가 그 속에 숨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님도 자기를 따라오려는 자에게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고 말씀하셨다.
요컨대, 하나님은 선하신 자신의 절대 주권에 의해서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하실 것을 예정하셨다가 때가 차매 부모를 통해서 이 땅에 오게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하시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인도하신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는 오로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때가 되면 우리 주님이 마련하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의 주와 함께 살 것이다.

5. 정리

하나님은 당신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서 칼빈을 당신의 말씀의 종(the minister of word of God)으로 부르셔서 순수 복음을 혼탁케 하는 암담한 시대에 성경을 교회 위에 세워서 성경을 다시 제자리에 갖다놓는 위대한 작업을 하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 믿음과 종교의 유일한 규범으로 정했으며, 우주만물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예정과 섭리에 의하여 다스려짐과 성경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구원은 은혜만으로’의 교리를 재천명하게 하셨다. 그리고 인간은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존재 의미라는 사상을 성경을 통해서 다시 보게 하셨다.
칼빈은 자기의 심장을 하나님께 드려서 일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 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자의 말대로 칼빈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를 보여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다. 또 칼빈은 하나님의 절대 무오(無誤)한 말씀 안에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교리와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재발견하고 이 진리를 재천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바쳐 아낌없이 살다가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죽어간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헌신하며 살다가 간 사람이다. 그는 자기의 심장을 드려 이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이다. 심장이 주께 드려지지 않을 때 자신의 존재 의미가 없다고 본 사람이다. 여기에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이라는 말을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야 하는 진리를 가르쳐준 하나님의 위대한 종이다.

출처 : 개혁 신학 연구소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