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23:44~49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때 백성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다 하여 ‘종려주일’(棕櫚主日 Palm Sunday)이라 부릅니다. 또한 고난주간이 시작된다 하여 ‘고난주일’(Passion Sunday)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고난주간 마지막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마침 그 날은 유대인의 명절 유월절이며 금요일이었습니다. 오전 9시(당시 시간 법으로 제3시)에 못 박혀 오후3시(제9시)에 운명하셨으니까 약 6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려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놀라운 기적 몇 가지가 발생했습니다. 한낮이었는데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에 깔렸습니다.(본문 44절) 큰 지진이 일어나 온 땅이 뒤흔들리고, 바위 무덤이 터지면서 시체들이 벌떡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기적들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증거하는 겁니다. 예수님은 일개 사형수에 불과한 게 아니라, 평소 말씀하시던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경을 가장 가까이 지켜본 백부장(사형집행관)이 뭐라고 고백합니까? 본문 47절. “ ...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 ” 여기서 의인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현장인 골고다가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또 한 가지 중요한 기적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곧 성소(=성전)의 휘장(揮帳 Curtain)이 찢어진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共觀福音 Synoptic Gospels)인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한 가지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태와 마가복음 기록은 동일한데, 누가복음의 기록은 좀 다릅니다. 막15:37~38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본문 눅23:44~46 “때가 제 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며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이 둘을 비교해 보면 무엇이 다릅니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운명하시고,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으로 기록합니다. 반면 누가복음은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왜 차이가 날까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글이라는 건 ‘평면적 한계’를 갖고 있잖습니까? 그러니까 동시에 일어난 두 사건, 예를 들어 A와 B를 어떻게 기록합니까? A - B라고 기록해도 되고, B - A 이렇게 기록해도 됩니다. 만일 이것을 영상으로 표현한다면, 화면을 둘로 나눠서 한쪽에 A, 다른 한쪽에 B를 동시에 보여주면 되겠죠.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숨을 거둡니다. 바로 그때 멀리 예루살렘 성 안의 성전에서 성소 휘장이 찢어졌다는 겁니다. 그것이 왜 기적인가, 그리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면 먼저 ‘성전의 구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성전(聖殿 Temple)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만들었던 ‘성막’(聖幕 Tabernacle)과 그 구조가 같습니다. 물론 성전은 큰 건물이죠. 하지만 규모가 크고 부속실이 붙어 있을 뿐 그 ‘기본 구조’는 동일합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구조 대신 단순한 성막의 구조를 알아보면 이해가 빠를 줄 압니다.
성막의 구조에 관해 살펴보려면 출애굽기 25장~31장, 35장~40장 등을 보면 됩니다. 성막의 평면도를 펼쳐보면 그 구조를 잘 알 수 있죠. 사방으로 울타리가 세워져 있고, 동쪽에 출입문이 있습니다. 그리 들어가면 마당이 있고, 그 안쪽에 장막(帳幕 Tent)이 나옵니다. 그 장막은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첫 번째 칸을 성소(聖所 The Holy Place), 두 번째 칸을 지성소(至聖所 The Most Holy Place)라 부릅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휘장(Curtain)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또 지성소 안에는 법궤/언약궤(The Ark of the Covenant)가 놓여 있는데(출25:10~22 참조), 그 뚜껑 부분을 ‘속죄소’(贖罪所 Atonement Cover)라 부릅니다. 속죄소는 피를 뿌림으로 속죄를 받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속죄소 위에 정금으로 만든 그룹(Cherubim) 천사 둘이 마주보고 있는데, 바로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인간을 만나 주시는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지성소는 아무나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백성들은 물론이고, 일반 제사장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대제사장도 1년에 단 한 번 ‘대속죄일’(大贖罪日 The Day of Atonement)에만 들어갑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그 겉옷 자락의 가장자리에 금방울이 죽 달려있습니다. 만일 지성소에서 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면 방울 소리가 계속 나지만, 실패하면 대제사장이 죽어 넘어지고 방울 소리가 그칩니다.(레16:2, 출28:33~35 참조) 그럴 경우 지성소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으므로 밧줄 같은 것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추측건대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미리 밧줄 같은 것을 몸에 묶고 들어갔을 겁니다. 형편이 이러니,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래서 백성들의 대표인 대제사장이라도 지성소에 들어갈 때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습니다.
지성소가 이렇게 대단한 곳인데,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바로 그 순간 지성소 앞에 드리워져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마침 그날은 유월절이라 제사장들이 그 시각에 성소에 들어갔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안쪽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좍 찢어졌으니 얼마나 기겁을 했을까요? 또 밖에서 참관하던 백성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그것은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서 ‘경악’ 그 자체였을 겁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지성소를 훤히 들여다보았는데도 아무도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그 순간 그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오늘 설교의 주제입니다.
[1] 죽을 길과 살 길 : 세상의 길 vs.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흔히 ‘길’ 가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저마다 길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그 길은 두 가지로 대별됩니다. 하나는 세상의 길이요, 다른 한 길은 예수님이 만드신 ‘새로운 길’입니다. 세상의 길은 ‘죽을 길’이고, 예수님의 길은 ‘살 길’입니다.
① 세상의 모든 길 - 죽을 길 :
그러면 세상의 길이 왜 죽을 길인가 생각해 봅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선언합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인류의 시조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原罪)를 갖고 태어납니다. 원죄는 죄성, 즉 악한 성향으로 아담과 내가 혈통적 관계로 연결되어 이어져 온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죄인입니다. 아무리 부정해도 내가 조상의 특성을 이어받는 것처럼 아담의 원죄를 이어받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자식이 부모 닮는 것을 보면 신기할 정도입니다. 때로는 안 닮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자식이 닮습니다. 부모로서 참 속상하죠. 또 자식 입장에서는 참 억울합니다. 그래도 할 수 없다는 겁니다.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원죄를 가진 인간이 자기 스스로 살아가면서 생각으로, 언행으로 죄를 짓습니다. 이것을 ‘자범죄’(自犯罪)라 부릅니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원죄와 자범죄를 가진 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그 결과 어떤 비극이 생깁니까?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 ” 여기서 ‘사망’이란 1차적으로 ‘영적 사망’을 말하는데, 하나님과 단절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이 세상 살 동안 그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늘 불만족과 불안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다 육신적으로 죽게 되는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내세에 영원한 사망, 즉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인간의 비극적 종말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는 그저 단순히 자기 원하는 대로, 욕심나는 대로 인생의 길을 찾아가는데, 그게 결국은 죄의 길이고, 마지막은 영원한 사망이라는 겁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모든 인생의 길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는 인생을 잘 사는 것 같고, 때로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종국에는 영원한 사망, 영원한 멸망이라는 겁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여러분, ‘막다른 길’이란 말이 있죠. 이 말을 영어로 표현하면 의미가 새롭습니다. 막다른 길은 영어로 ‘dead end’ 혹은 ‘blind alley’입니다. ‘죽은 길’ ‘눈 먼 길’ 이란 뜻입니다. 자기는 열심히 가는데 나중에 가보니까 막혀 있습니다. 낭떠러지입니다.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그 당황스러움을 표현한 것이 전도서의 고백 아닙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지만 한때 하나님을 배반하고 제 멋대로 인생길을 찾아다니며 살았습니다. 좋은 줄 알았는데, 잘 사는 줄로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막다른 길이요 죽을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전1:2 “ ...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또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이상향’(理想鄕)입니다. 사람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아주 좋은 곳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래 의미는 그게 아닙니다. 그런 데는 없다(No Place)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상향을 찾아 자기 길로 갑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아무리 좋다고 떠들어도 이상향은 없습니다. 오직 천국만이 진정한 이상향입니다. 세상의 길은 모두 죽을 길입니다.
② 예수 그리스도 - 살 길 :
따라서 우리는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찾아가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 길을 예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 성소 휘장을 찢으신 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길’을 뚫어놓으셨음을 상징합니다. 그것을 잘 설명해 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개역개정판=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성소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을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담을 쌓게 합니다. 단절시킵니다. 휘장은 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스스로 죄를 짊어지고 죄의 담을 허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휘장을 찢으신 사건의 영적인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새로운 길이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요 참으로 ‘살 길’입니다. 부디 이 길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새로운 살 길 : 영생의 길, 은혜의 길
그러면 그 길은 구체적으로 어떤 길일까요? 그 길은 영생의 길이요 은혜의 길입니다.
① 영생의 길 :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14:6 “ ...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을 헬라어 원어 성경이나 영어 성경을 보면 길, 진리, 생명의 각 단어 앞에 유일성을 나타내는 정관사(the)가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오직 한 길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행4:12에도 보면 예수님의 유일성을 증거합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요즘 유식한 척 하는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득실거립니다. 세상에 많은 종교들이 있는데 다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구원과 영생의 길임을 천명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면 천국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영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모릅니다. 천국이 어디 있냐고 따집니다. 물론 우리도 천국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천국은 실재하고, 그곳에 가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일평생 예수님만 따라가면 마침내 천국에 당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 오지에 처음 부임했습니다. 정글 안에 있는 여러 마을들을 방문해야 복음을 전할 수 있는데, 아주 막막합니다. 지도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로가 나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길을 찾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원주민 청년 한 명에게 가이드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청년이 이상한 데로 자꾸 갑니다. 하도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청년, 길이 아닌 것 같은데 ... 그리 가면 정말 마을이 나오나?” “걱정 마십시오! 제가 길입니다.!(I am the way!) 그냥 따라오시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영생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만 따라가기만 하면 반드시 천국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휘장 가운데 열어놓으신 영생의 길로 담대히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② 은혜의 길 :
또한 그 길은 은혜의 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통로’ ‘은혜의 하이웨이’입니다. 죄인은 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없습니다. 길이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 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간구할 수 있습니다.
성전 지성소에 법궤가 있고, 그 뚜껑 부분이 ‘속죄소’라고 했죠. 그런데 그 속죄소를 가리켜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시은좌’입니다. 시은좌(施恩座 Seat of Grace, Mercy Seat)는 ‘은혜를 베푸는 좌석’이란 뜻으로, 하나님 보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 길로 당당히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앞에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그림 그리듯이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예수 그리스도)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sympathize)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the throne of grace)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은혜의 보좌가 곧 시은좌입니다. 지성소의 속죄소(시은좌)가 곧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데, 예수님이 휘장을 찢으심으로 이제 거침없이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 간구할 수 있게 되었음을 증거합니다.
여러분, 모든 좋은 것은 어디서 옵니까? 세상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옵니다. 약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 ”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세상에서 우리 인생을 위해 좋은 게 과연 무엇입니까? 돈이요? 명예요? 권세요? 그것은 컴퓨터로 말하면 하드웨어입니다. 만일 소프트웨어가 없으면 그것은 쇳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내 영혼에 평안과 기쁨, 새 힘과 용기, 삶의 지혜 등입니다. 아무리 소유와 조건을 다 갖춰도 그것들을 컨트롤할 수 있는 은혜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은혜가 중요한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에 영적 자원이 되어서 인생을 승리하도록 해 줍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 길이 바로 은혜가 우리에게 내려오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그 길로 나아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리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이것은 마치 고속도로 개통과 같은 이치입니다. 길이 없던 산간벽지 오지에 고속도로가 개통됩니다. 가로막던 산을 뚫어 터널을 놓고 고속도로를 만듭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새로 생긴 그 도로가 통로가 되는 겁니다. 인적 교류, 물적 교류가 이뤄집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고속도로가 개통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과 교통합니다. 신령한 영적 교제입니다. 그래서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3] 새로운 살 길로 가는 사람 : 회개하는 마음과 십자가를 믿는 믿음
그러면 어떻게 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히10:22이 설명해 줍니다. “우리가 ...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참 마음’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면 인간은 죄를 고백하게 됩니다. 그것이 참 마음입니다. 참 마음이 있다면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온전한 믿음’은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마음과 십자가 믿음만 있으면 다른 인간 조건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면 참 신자요 성도입니다. 그러므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든지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생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제사장이 된 겁니다. 벧전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 ” 누구든지 제사장이 된다는 뜻에서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이라 부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여러분 자신을 대신 한 것임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길이 유일한 살 길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이미 그 길에 접어든 성도요 제사장이 되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영생을 맛보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보좌 앞에 나아가 담대히 간구하심으로 풍성한 은혜를 받으시고 승리의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아울러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할 게 있습니다. 제사장은 특권만 있는 게 아니라, 책임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에게 이어주는 다리 역할입니다. 예수님이 열어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소개하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벧전2:9(하) “ ...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곧 복음 전도요 선교인 것입니다.
아무쪼록 이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시고, 예수님이 열어주신 살 길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길을 많은 사람들에게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홍문수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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