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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시대 신앙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학자 케플러의 예(1)

by 【고동엽】 2021. 10. 20.

종교개혁시대 신앙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과학자 케플러의 예(1)

 

종교개혁은 하나님께서 루터와 칼빈의 굳센 믿음을 쓰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개혁하여 바로 세우신 역사적 사건이다. 종교개혁은 또한 교회 외에도 문화, 예술, 정치, 경제, 과학 등 삶의 모든 영역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사건이기도 했다. 이런 태풍이 휘몰아치던 그 시대의 역사적 현장에 있었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몇 년 전 필자는 ‘종교개혁과 과학’이라는 주제로 강변교회 청소년학교의 과학 과목을 준비하면서 시공간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던 종교개혁 시대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 한 과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 바로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라는 인물이다. 그는 일생 바른 신앙을 지키고 나갔을 뿐 아니라 그 신앙으로 자신의 일(과학)을 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일생 종교적 박해로 인해 피난을 다니고, 전쟁으로 인해 쫓겨 다니는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일과 생활을 꼼꼼히 기록하고 편지로 남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편지를 쓸 때도 반드시 한 부를 더 써서 보관했을 뿐 아니라 피난 중이라 여유가 없을 때는 상대방에게 자기 편지를 잘 보관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다.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오늘날의 필자에게까지 생생한 감동을 전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그런 습관 덕분에 보존된 자료와 서신들이었다. 현재 독일어와 라틴어로 쓴 그의 400여 편의 편지와, 그가 받은 700여 편의 편지, 그리고 수백 쪽의 노트와 개인 서류가 남아 있다. 이 글에서 필자는 케플러의 과학적 업적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그의 신앙과 그의 과학에 신앙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가 남긴 자료들을 통해 소개하려 한다. 필자가 섭렵한 자료들이란 영어로 번역된 그의 일부 서신들과 그의 저서들, 그리고 그에 관한 전기 및 자료로부터 뽑은 것이기에 추후 나머지 많은 원본 자료를 검토한 뒤에 수정 보완해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먼저 밝힌다.

 

케플러는 갈릴레오(1564-1642)와 동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그와 함께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검증하여 근대 과학의 토대를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케플러는 고대 이래로 가장 완전하다고 믿었던 원이 아닌 타원 궤도로 행성이 돈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그때까지 지속되어 오던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 과학 체계를 무너뜨리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가 발견한 세 가지 법칙(타원 궤도의 법칙,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조화의 법칙)은 지금 우리나라의 모든 과학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다. 그의 이런 과학적 발견과 방법론은 『우주의 신비』, 『신(新)천문학』,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 『우주의 조화』, 『루돌프 행성표』 등 그의 저서들에 잘 기술되어 있다.

 

그런데도 케플러는 그가 이룬 과학적 업적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과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동시대 과학자인 이탈리아의 갈릴레오가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갈등을 통해 종교와 과학 간 투쟁의 선봉에 선 인물로 지금까지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케플러의 삶을 살펴볼 때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을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중요하지도 않아 보이는 가톨릭과 신교 신앙 사이에서, 더 나아가서는 신교 신앙 안에서도 성례와 같은 ‘하찮은’ 교리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더 큰 과학적 업적을 성취할 좋은 기회를 번번이 놓쳐 버린 어리석은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바로 방대한 분량의 그의 자료들이 왜 아직 영어로 모두 다 번역되어 있지 않은가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케플러는 루터(1483-1546)나 칼빈(1509-1564)과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던 역사적 현장에서 일생을 산 인물이다. 그는 1571년 독일 남부 슈투트가르트 부근 바일의 루터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거나 여유 있는 집안은 아니었지만, 어릴 때부터 경건한 신앙을 소유했고, 일찍부터 목사가 되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라틴어에 뛰어나 13세 때 아델베르크 중등 신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이 학교는 새벽 4시부터 시편 찬송으로 하루 공부를 시작했다. 이때 그는 벌써 루터와 칼빈 신학 사이의 논쟁을 보고 자기 스스로 해석하려고 시도했다고 적고 있다. 마울브론 고등 신학교를 거쳐 18세 때 신교(루터교) 신학 연구의 중심지인 튀빙겐 대학에 목사가 되려고 입학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의 삶에 큰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와 일생 교류했던 수학 및 천문학 전공의 매스틀린(Maestlin) 교수를 만나 기하학과 천문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매스틀린 교수는 당시 유럽에서 몇 안 되는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의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신학 과정 3년차였던 23세 때 케플러는 언젠가는 신학자나 목사가 될 것을 바라면서 오스트리아 남부 그라츠의 신교 신학교에 수학 교수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천문학에 깊이 빠져 25세 되던 해인 1596년에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쓴다. 이 책에서 그는 당시에 알려진 태양계인 태양과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의 위치를 코페르니쿠스 지동설에 입각한 기하학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이때 비로소 신학이 아닌 천문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존경하는 선생님, 저는 (제가 관찰한 바를) 책으로 출판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는 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연이라는 책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서입니다. 다른 이들이 이런 노력을 계속해 나가면 해 나갈수록 저는 더욱더 기쁠 것입니다. 저는 누구도 시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그러지 않겠다고 서약했고, 그것이 또한 저의 결정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전에 신학자가 되려는 생각을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해 오랫동안 제겐 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저는 저의 노력에 의해, 천문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화로워지시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출판하기를 바라면서 튀빙겐 대학의 마스틀린 교수에게 쓴 편지, 1595년 10월 3일, 그라츠)

 

오늘날 과학은 객관성을 이유로 종교적 영향을 거부한다. 또 과학이 원래 그렇게 객관적인 학문이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근대 과학의 한 토대를 놓은 케플러는 『우주의 신비』 서문에서 과학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밝혀 그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경배하는 신앙 활동이라고 적고 있다.

 

사람에게는 무언가 장엄한 것을 보고 싶은 바람이 있지요? 하나님의 빛나는 성전보다 더 귀하고 더 아름다운 것은 없습니다. 사람은 또 신비한 통찰을 얻고 싶어 하지요? 자연에서보다 더 신비하고 더 깊숙이 숨겨진 통찰은 현재도 없고 과거에도 없었습니다.……성경이 격찬한 그 자연의 책을 여기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물이나 거울을 통해 태양을 관찰하듯 바울은 자연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이방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송하고 높이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연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껴선 안 될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창조하신 세계와 그 위대함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경배도 더욱더 깊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한 종 다윗이 (창조에 대해) 얼마나 많은 노래로 찬송을 드렸는지요! 그는 하늘을 관찰함으로써 시편들의 소재를 얻었습니다. “하늘들이 하나님의 하신 일을 선포하는도다”라고 그가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이제껏 학자들이 부인해 왔던 한 증거, 즉 우주의 창조에 대한 중요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강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필자 주: 출판을 맡은 튀빙겐 대학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기에 그 말 대신 ‘이제껏 학자들이 부인해 왔던 한 증거’라고 표현함) 그럼에도 우리는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치 건축가처럼 질서와 규칙에 따라 세상의 기초를 놓으시고 모든 것을 측정하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체(天體)의 가치를 늘 먹는 음식처럼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굶주린 배에 자연이나 천문학적인 지식이 무슨 소용이냐고 물을 것입니다.……무슨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화가들은 우리의 눈을 기쁘게 해 주기 때문에, 음악가들은 우리의 귀에 즐거움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그들의 일을 계속해 나가도록 허락받은 게 아닐까요?……어린 새가 지저귈 때 무슨 이익을 바라고 노래한답니까? 새는 노래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노래하는 것이 그 새에게는 기쁨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람의 영혼이 하늘의 비밀을 찾기 위해 왜 그렇게 수고하는지 그 이유를 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이는 우리에게 감각 말고도 영혼을 주셨습니다. 단순히 우리 스스로 생계를 이어 가는 것 이외에 또 다른 삶의 이유를 주신 것이지요. 단순히 생계를 이어 가는 일이라면 온갖 종류의 다른 피조물들이 우리 인간보다 훨씬 더 잘 해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창조주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눈을 통해 지각하는 사물의 외관에서 눈을 돌려 그 사물들의 존재의 근원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떠미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아무런 직접적인 효용이 없을지라도 말입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자연의 갖가지 현상은 아주 크고, 우주라는 둥근 천장에 숨겨진 보물들은 아주 풍성해서, 자연은 인간의 영혼을 살찌울 재료들을 부족함이 없이 준비해 놓고 있다고 말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결코 빈둥빈둥할 틈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의 영혼을 훈련시키기 위한 작업장이 늘 열려 있기 때문입니다. (『우주의 신비』 서문에서, 1596년 5월 15일)

 

케플러는 26세 때 그라츠에서 바바라 뮐러라는 과부와 혼인을 한다. 혼인한 이듬해 그라츠에는 가톨릭 신앙을 가진 페르디난트 대공이 즉위하게 된다. 그의 즉위에 따라 신교 신학교는 폐쇄되고, 신교도들은 2주내로 그라츠를 떠나라는 추방령이 내려진다. 교회사에서 보았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 즉 독일의 백성들은 자기 지역의 제후가 루터교와 가톨릭 사이에서 선택한 신앙을 따라야 한다는 종교 협정이 그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케플러는 헝가리로 피신하였으나 천문 현상을 관측하여 농사나 전쟁 등 주요 일정을 정하고 달력을 제작하는 당시 수학자의 중요성 때문에 귀국을 허락받아 다시 돌아온다. (필자 주: 당시 수학자의 이런 역할 때문에 케플러를 점성술가로 기록하고 있는 자료를 많이 보게 된다.) 그러나 이어진 가톨릭으로의 개종 요구를 거부함으로써 결국 수학자의 직책에서 면직되게 된다. 아울러 신교도라는 이유로 무거운 재산세가 부과되었다. 그 와중에 태어난 어린 두 아이가 죽었는데, 가톨릭 방식의 장례를 거절하였기에 매장 허가를 받지 못하고 벌금형을 선고받게 된다. 케플러는 이때를 가리켜 “현 통치자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한, 다른 곳에서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여기보다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결국 1600년에 케플러 가족은 그라츠에서 추방당하게 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7월 27일 대공의 포고문이 발표되는데 7월 31일 오전 6시에 그라츠의 모든 시민은 신앙을 조사받기 위해 집결하라는 것이었다. 31일 아침, 대규모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나타난 페르디난트 대공의 입회하에 개혁위원회는 3일간 1000명이 넘는 시민들을 일일이 호명하며 각자의 종교적 신념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대부분의 신교 시민들은 재산과 가업을 잃지 않기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마지막 날 이름이 불린 케플러는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거부하여 61명의 개종 거부자 명단에 오름과 동시에 45일 안으로 그라츠를 떠나라는 추방 명령을 받게 된다. 두 대의 마차에 부인과 딸, 그리고 반출이 허락된 최소한의 가재도구를 싣고 목적지 없이 그라츠를 떠난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살도록 허락해 주신다면 배를 타고 가족과 함께 도나우 강을 따라 선생님께로 가고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조교수 자리를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의료 분야의 일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저는 언젠가 부자가 되기를 소원했었는데 정말 가난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저는 상당히 재산이 있는 아내를 얻었습니다. 아내의 전 가족도 지금 이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재산은 부동산이고, 지금은 그 값이 상당히 떨어져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공짜로 그 부동산들을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영을 내려 이 부동산들이 45일 내에 팔리지 않을 경우, 교황을 따르는 자들에게 빌려 주는 일조차도 금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모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는 형제의 교제 안에서 우리의 신앙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상처와 모욕의 고통을 받으며 집과 땅, 친구와 나라를 포기하는 것이 이렇게 달콤하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진정한 의미의 순교나 생명을 희생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그리고 기쁨이 커지는 일이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의미라면 신앙을 위해 죽는 일 또한 쉬울 것입니다. (그라츠에서 추방된 후 매스틀린 교수에게 쓴 편지, 1600년 9월 19일)

 

피난길에 올랐던 케플러는 그의 『우주의 신비』를 읽고 감명을 받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실 천문학자인 티코 브라헤의 초청으로 제국의 수도인 프라하로 가서 그의 조수가 된다. 브라헤는 정밀한 천문 관측의 대가였지만 천동설을 지지하여 지동설을 지지하는 케플러와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다. 프라하에 온 이듬해인 1601년, 브라헤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케플러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수학자가 되는 극적인 일이 일어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이 안정된 몇 년을 화성의 원(圓) 궤도가 브라헤의 관측 값과 8분(1분은 1/60도)의 오차가 생기는 원인을 밝히는 데 전념한다. 1605년, 화성이 원 궤도가 아닌 타원 궤도로 돈다고 설명하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는 것을 알아낸다. 그러나 ‘왜 하나님께서 완전한 도형인 원 대신 타원을 사용하셨을까’ 하는 고민은 계속되었다. 즉 ‘타원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실 만한 조화롭고 질서 있는 도형인가’라는 것이었다. 타원은 초점이라 불리는 가상의 두 점으로부터의 거리의 합이 일정한 점들이 모여 만든 도형이다. 마침내 케플러는 태양이 타원 궤도의 가상의 두 초점 중 하나에 위치한다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수학적 질서의 아름다움을 확신하게 된다(케플러의 제1 법칙). 이어 행성과 태양을 이은 선이 동일한 시간 동안 같은 면적을 쓸고 지나간다는 그의 제2 법칙을 발견한다. 1609년, 그의 제1, 2 법칙과 지동설을 과학적으로 증명한 『신천문학』이라는 책을 출판하게 된다. 그는 이 책을 내면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에게 티코 브라헤 같은 성실한 관측자를 허락하였다. 우리가 감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적으면서 과학의 특징인 정확한 관측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종교개혁시대 신앙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케플러의 예(2)

 

케플러가 40세였던 1611년, 프라하에 내전이 일어나 자신의 후원자였던 황제 루돌프 2세가 폐위되게 된다. 그는 그의 모교인 튀빙겐 대학의 수학 교수 자리를 원했으나 그가 루터교의 성찬 교리(그리스도의 몸이 성찬의 떡과 잔에 실제로 임재한다는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과, 칼빈주의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라고 말한 적이 있다는 이유로 교수 임용을 거절당한다. 당시 프라하는 이 도시에서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후스의 추종자들을 비롯한 ‘보헤미안 형제들’ 등 다양한 종파들이 비교적 자유롭게 신앙 활동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왕실 수학자로서 케플러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했는데, 그중에는 체코 귀족 부도베츠처럼 칼빈파 신앙을 가진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런 이유로 케플러는 그의 모국에서 수상하고 믿을 수 없는 칼빈주의자로 불린다. 튀빙겐 대학으로부터 임용이 거절된 후 그는 병약한 아내를 위해 그녀의 고향인 그라츠에서 멀지 않은 오스트리아 린츠로 가기를 희망하지만 그 해 세 자녀와 함께 아내를 잃게 된다.

 

외부에서 온 불운과 위협들과는 별개로 내 집안에서 재난이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를 덮쳤다네.……내게는 삶의 동반자가 있었네. 난 그녀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으려네. 왜냐하면 그 사실은 늘 변함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사회적으로 존경과 의로움과 정숙함의 칭송을 받았던 여성을 그렇게 부를 수야 없지 않겠나? 그녀처럼 이런 미덕들과 외모의 아름다움과 마음의 상냥함을 함께 지니고 있는 여성은 흔치 않을 것이네. 내면의 미덕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과 불쌍한 자들을 향한 동정심까지 갖추었었네. 그녀에게서 나는 여러 아이들을 얻었는데, 특히 여섯 살이었던 사내 녀석이 아내를 꼭 빼 닮았었네. 이른 봄날 아침 히아신스가 그 섬세한 향기로 방을 채운다는 점에서 보면 그 녀석은 모든 면에서 이른 봄날 아침의 히아신스로 불릴 수 있었다네. 그 녀석과 아이 엄마는 너무 결합되어 있어서 사람들은 둘이 서로를 향한 사랑으로 약해졌다고 하기보다 얼이 빠졌다고 말하였다네. 나는 아내가 가장 좋은 나이에 3년 동안이나 몸 안의 종양의 공격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당하고 흔들리고 무너져서 정신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었네. 그러고 나서 회복되는 듯 보였을 때라도 아내는 사랑하는 자녀들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병치레 때문에 깊은 우울증에 빠졌으며 그녀의 심장이나 다름없었던 그 어린 녀석을 잃고 나서는 심장 깊숙이 상처를 받았네. 군인들의 잔혹한 행동과 성(프라하)에서 전쟁을 목도하고 나서 몸이 얼어붙고 보다 나은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는 절망에 내몰리고 잃어버린 어린 자식에 대한 누를 수 없는 그리움 때문에 아내는 헝가리 열병(아내는 그 와중에도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멈추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그녀의 자선이 그녀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 할 수 있네)에 걸렸다네. 태양 아래 가장 슬픈 정신 상태라 할 수 있는 우울증에 빠져 그녀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네. 사람들의 슬픔은 대단해서 장례식에 와서 크게 울부짖는 사람도 몇 있었다네. 그녀가 가고 난 지금 이 땅에는 더 이상 선한 여인이 존재하지 않는 듯하네. 그 영혼의 온유하신 목자께서 얼마나 그녀를 더 잘 돌보아주실 것인가를 기억하는 것이 내게는 필요한 일인 듯 하네.……(아내를 잃은 지 몇 개월 후 친구 스쿨테투스에게 쓴 편지, 1612년 4월 13일, 프라하)

 

41세인 1612년, 루돌프 2세가 서거하고 마티아스 황제가 즉위하자 케플러는 아내와 함께 가기를 희망했던 보수적 루터교 지역인 린츠의 지역 수학자 자리를 얻게 된다. 그곳에서도 그는 성찬에 대해 루터교 교리에 동의하지 않는 자신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성찬 참여를 허락받지 못한다. 아울러 ‘칼빈주의자의 견해에 호의를 가진 비국교도’라는 이유로 회중에서 제외되게 된다. 1613년 수잔나 루팅거와 재혼하여 그 후 일곱 자녀를 낳았으나 다섯 명은 유아 때 죽게 된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유아세례 장면을 큰아이의 죽음과 함께 담담히 기록한 그의 개인 노트를 보면서, 유아 사망률 0%에 근접해 있는 21세기의 우리들과 달리 줄줄이 죽어 가는 아이들을 둔 그 시대 부모들에게 유아세례가 얼마나 큰 은혜였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케플러는 자녀의 신앙 교육에 마음을 기울여 성례에 대한 요리문답을 직접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런 분쟁의 시대에, 인류가 이처럼 여러 종파로 나뉘고 있는 마당에, 함께 어디에 속해 있다는 느낌은 어느 정도 위로를 줍니다. 그러므로 제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루터교 신앙고백, 1530, 1540년 개정)을 지지하며 트렌트 공의회(1545-1563, 종교개혁에 대항한 로마 가톨릭의 종교 회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켐니츠(Martin Chemnitz, 1522-1586, 2세대 루터교 신학자)의 사역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주십시오. 교회의 현 종파들은 당연히 여기지만 옛 교부들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가르침을 저는 지지하지 않습니다. 개혁적인 것에 대한 아주 작은 정열 때문에 나를 비난하는 것은 공정치 못한 처사입니다.……내가 일치 신조(성례에 대한 루터교의 교리, 1577)에 서명했다면 이 모든 다툼을 다 끝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심의 문제에서 위선자가 되는 것은 아직은 내 방식이 아닙니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이런 나의 조건들을 고려해 주기만 한다면 저는 기꺼이 서명하려고 합니다. 저는 신학자들의 격노에 관계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형제들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을 것입니다. 서 있건 아니면 주저앉건 간에 그들은 내 형제들입니다. 저는 교회의 가르치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그들을 오해하기보다는 그들을 좋게 여기고 용서하는 것이 제게는 더 잘 맞는 일입니다. (린츠에서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고 회중에서 제외된 후 매스틀린 교수에게 쓴 편지, 1616년 12월 22일, 린츠)

 

47세 때인 1618년, 타원 궤도의 질서와 조화로움을 더 자세히 보인 제3법칙을 발견함으로써 우주론 연구를 완성하여 『우주의 조화』(Harmony of the World, 1619)라는 책을 쓴다. 그의 제3법칙은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타원 궤도의 장축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것으로 뉴턴(1642-1727)의 만유인력(萬有引力) 법칙으로 쉽게 설명된다.

 

아!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은총을 갈망하게 만드셨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 영광의 빛을 전달하셨습니다. 저는 우리의 창조주인 주께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제가 주님의 작품들을 즐기도록 허락하셨으며, 저는 그분이 만드신 작품들 속에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주님이 저에게 주신 모든 능력을 발휘해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저는 제 정신이 완전히 소진될 때까지 사람들에게 주님의 영광스러운 작품들을 보여 주고자 합니다. 돼지 같은 탐욕 속에서 자란 하찮은 벌레 같은 제가 주님의 생각들을 가치 없게 만든 것이 있다면 그것들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저에게 영감을 주옵소서. 제가 주님의 작품들이 지닌 감탄할 만한 아름다움에 이끌려 무분별하게 행동했다면, 또한 제가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고 나만의 영광을 추구했다면 자비와 동정을 베푸사 저를 용서하옵소서.……(『우주의 조화』제5장에서)

 

우리 주는 크시고 그의 덕과 지혜는 높으셔서 이루 셀 수 없도다. 그를 찬송하라, 그대 하늘들이여, 그를 찬송하라. 태양이여, 달이여, 그리고 행성들이여, 모든 지각을 사용해서 그대의 창조주를 깨닫고 모든 혀를 사용하여 그대의 창조주를 선포할지어다. 그를 찬송하라, 그대 하늘의 조화로움이여. 그를 높이라, 그대 숨어 있는 조화의 심판자여. 내 영혼은 끝까지 그대의 창조자 주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로부터 그를 통해서 그 안에 분별 있고 지식이 있는 모든 것들이 존재하나니. 그것들이 어디서 오는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거니와 우리가 아는 것들도 그것들의 일부에 지나지 않나니 늘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하는 까닭이어라. 그분께 찬양과 영예와 영광과 세상이 끝없이 있을지어다. 아멘. (『우주의 조화』마지막 문단)

 

그의 나이 47세 되던 1618년, 케플러를 그라츠에서 추방했던 가톨릭 진영의 페르디난트 대공이 보헤미안 왕으로 즉위하자(이듬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됨) 신교도의 반발로 가톨릭과 신교 간의 30년 전쟁(1618-1648)이 시작된다. 그 전쟁 중에 쓴 『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1617-1621, 제1부는 1619년 로마 교황청에 의해 금서로 지정됨)에서 그는 그의 과학 활동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찬송”이라 말하고 있다.

 

……황제 폐하의 은총과 그 우정으로 말미암아 저는 자연의 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위해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코페르니쿠스 천문 요약서』 헌사 중에서)

 

전쟁 발발 후 몇 년이 지난 1621년에 린츠의 신교 혁명군이 가톨릭군에 패배한다. 린츠가 가톨릭에 패배함으로 1622년 린츠에 사는 신교도들은 가톨릭으로 개종하거나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이번에도 케플러는 수학자라는 이유로 추방은 면제받았으나 끈질긴 박해가 따랐다. 1625년에는 가톨릭 교리에 위반되는 글과 책들의 압수 및 신교도 추방 칙령이 발표되어 그의 서재도 폐쇄되는데 그 서재에는 그가 늘 옆에 두고 읽던 그리스어 성경과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도 있었다. 그는 결국 이듬해 독일 울름으로 피난을 떠난다.

 

……스넬리우스(‘스넬의 법칙’이라는 빛의 굴절 법칙을 발견한 레이덴 대학의 역학 교수)가 쓴 두 권의 책을 보낼 수 없는 이유는 이단적인 책들을 제거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수석 사제와 비서관의 명령으로 개혁위원회가 어떤 책이든 반출을 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월 1일부터 과학 서적 몇 권을 제외하고는 저의 서재도 폐쇄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책들을 다시 찾으려면 내 스스로 압수될 책들을 선택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어 놓았습니다.……(린츠에서 신교 저서들 압수령 후 비엔나 대학의 수학 교수인 굴딘에게 쓴 편지, 1626년 2월 7일, 린츠)

 

……저는 당신이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눈여겨보시고 언젠가 당신에게도 닥쳐올지 모를 비슷한 어려움을 위해 마음을 준비하시길 바랍니다.……우리가 화형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은 크나큰 위로입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다면 말입니다. 듣자 하니 농부들과 노동자들, 가난한 자들까지 그들의 재산과 명예를 전부 잃은 뒤에야 이 나라를 떠나는 것이 허용되었답니다.

독일에서만이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의 나라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런 혼란 가운데서 책(루돌프 행성표)을 출판하려는 내 계획이 이런 무질서한 환경의 영향을 받아 현재로서는 연기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마시길 바랍니다. (린츠에서 신교도 추방령 후 튀빙겐 대학의 시카드 히브리어 교수에게 쓴 편지, 1626년 4월 25일, 린츠)

 

56세인 1627년, 피난 중에 케플러는 『루돌프 행성표』라는 책을 완성하게 된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로부터 가톨릭으로 개종할 경우, 모든 출판 비용뿐 아니라 지위와 신분 보장, 그리고 거주의 자유까지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하고 완성한 것이기에 그에게는 더 소중한 것이었다. 이 책은 행성들의 운동 위치를 자세히 표시하여 뒷날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할 때 그 근거 자료로 이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57세 되던 해에는 또 다시 신교 인정 지역인 지금의 폴란드 사간으로 옮겨 간다. 옮긴 지 4개월 후 사간에서 반동 종교개혁이 일어나 신교도는 가톨릭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사간을 떠나야 하였기에 다시 독일 레겐스부르크로 피난을 간다. 그의 나이 59세인 1630년, 케플러는 독일의 레겐스부르크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임종 시 그를 방문한 도나우어 목사가 구원을 희망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유일한 피난처이며 우리의 구원을 발견할 수 있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에게는 정말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피난처였다. 죽고 나서도 신교도라는 이유로 시내에는 묻히지 못하고 시 외곽의 신교 묘지에 묻혔으나 그 무덤마저 3년 뒤에 가톨릭군에 의해 파헤쳐지게 된다. 우리가 교회사나 세계사에서 글로만 읽었던 30년 전쟁이 노후의 케플러에게 세상은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이라는 것과 어느 곳에도 그가 쉴 곳이 없음을 철저히 보여 준 것이다.

 

케플러는 독일 땅에서 루터가 죽은 후 그가 뿌린 종교개혁의 씨가 뿌리를 내려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어야 할 중요한 시대를 산 사람이다. 그런 시대적 사명을 잘 깨달은 사람답게 그는 일생 변함없이 종교개혁의 신앙을 유지함으로써 가톨릭 진영으로부터 평생 재산과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나 끝까지 굴하지 않았다. 또한 사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사랑하여 루터와 칼빈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루터와 그 후계자들이 정한 성찬 교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조국과 국교 (루터교) 진영으로부터는 원하는 직장과 교회의 일원이 되는 자격을 얻지 못하는 불행을 감수하고 살았다. 그런 중에도 그는 신앙으로 자신의 본업에 충실하여 과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인 열매로 입증하였다. 이 글에서 밝히지 않은 그의 인간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의 일생은 개인의 삶뿐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심을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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