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5:9,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토록 죄가 많고, 사건도 많고, 문제도 많이 일어나느냐?”고 합니다. 세상이 이토록 악하고, 심지어 예수 믿어도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고 오히려 고통만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다고들 합니다.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 땅을 창조하시고 어떤 자연 법칙을 만들어 놓았지만, 그후에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고통 가운데 그대로 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들을 돌보고 계십니다.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유월절을 지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를 타시고, 왕의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또한 만왕의 왕 되신 예수께서 새끼 나귀 위에 몸을 싣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나셨습니다. 그토록 초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겉옷을 길에다 깔고 주님의 길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 중에는 어린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 중에 오히려 아우성치는 어린아이들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오히려 아우성치는 어린아이들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어린아이의 찬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은 꾸밈이 없습니다. 그들은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배신’이란 단어도 생소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고난을 생각하셨습니다.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6:37-39에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민하고 슬퍼하사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은 온 인류에게 구원의 기쁨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철없이 기뻐하는 모습 가운데서 주님은 고통을 견딜 최후의 결단을 굳히셨는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 주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생각하며 이번 한 주간은 어느 때보다도 경건하게 우리의 삶을 정리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편에서 볼 때는 구원의 기쁨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이 우리는 결코 기쁨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혼 구원뿐만 아니라 성도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기쁨에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당한 고난은 하나님께서 버려 두셔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현실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더욱 잘 통찰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5:3, “우리가 환난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평안은 영원한 평안입니다. 고난 주일에 우리는 오히려 기뻐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고난 주일은 우리 자신이 구원받은 기쁨에 대하여 은혜 받고자 합니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이상스러우리 만치 남이 기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내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어주어야 하고, 이웃의 기쁨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 기쁨을 주는 자가 됩시다.
추워하는 사람에게는 옷을 줄 수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쌀이라도 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 당신에게 요구하기를 “기쁨을 주십시오”하면 곤란합니다. 다른 것은 다 줄 수 있어도 기쁨만은 마음대로 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지금 괴롭고 답답하고 불안한데, 어떻게 이웃에게 기쁨을 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나 가정도, 미국이나 구라파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집부터 방안 장식까지 서구화되었습니다. 집집마다 아쉬운 것 없이 다 갖추어 놓고 삽니다. 그러나 가정마다 웃음이 없어졌습니다. 기쁨이 없습니다.
어느 가정의 식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웃고 즐거워합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깥에서 헛기침 소리가 나면 그때부터 온 가족들의 얼굴 표정이 굳어지고 대화가 그쳐 버립니다. 아버지가 무표정한 모습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재미나게 놀다가도 친구 중 어느 하나만 나타나면 ‘쉬-’하고 잠잠합니다. 성도들끼리 모여서 은혜를 나누다가도 어떤 집사님만 나타나면 ‘쉬-쉬-’합니다. 이 사람들은 기쁨을 주는 자가 아니라 빼앗아 가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어떤 존재인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초대되어 갑니다. 이 사람만 있으면 모임이 부드럽습니다. 웃음이 그칠 줄 모릅니다. 우리는 어느 곳에서든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6에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은 환난으로 갚으시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환난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안식으로, 위로로 갚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쁨을 주고자 하되 기쁨이 없습니다.
2. 기쁨을 얻는 자가 됩시다.
기쁨이란 사람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물질적으로 어려운 사람은 물질(돈)이 기쁨이겠지만 병약한 자에게는 건강이 기쁨입니다. 우리가 나눠 줄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남편이 안내에게 사다 주는 옷감이 아닙니다. 명절 때 고깃근이나 사서 부모 앞에 놓고 절 한 번 꾸벅하고 돌아오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로부터 오는 기쁨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요 15:11)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7:13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하려 함이니이다”평안도 예수께로부터 와야 영원합니다. 요한복음 14:27을 봅시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주의를 살펴보거나 가정을 생각할 때도, 사업을 계획할 때도 도무지 기쁨이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주님을 생각하면 기쁨이 내 맘 속에서 물밀 듯이 밀려옵니다.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얻을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2:10에 천사가 말했습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생각해보면, 과거 신앙을 가지기 이전에 누렸던 기쁨과 신앙을 가진 후의 기쁨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의 병이 치료된 기쁨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은 기쁨입니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된 기쁨입니다. 삶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기쁨입니다. 마리아는 죽은 오라비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기쁨을 얻었습니다. 나인 성 과부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들이 살아난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배고픈 무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배불리 먹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기쁨은 누가 얻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만 지정으로 영적으로 기쁨을 누리는 자는 적습니다. 병이 치료되고, 배불리 먹고, 가정이 화목해지고, 목적이 이루어질 때 얻어지는 기쁨만 아니라 환난중에도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롬 5:3)진정한 기쁨입니다. 바울은 매맞고 굶고 자지 못 하고 풍랑 속에서 사경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은 놀랍습니다. 그는 땅에서 주어진 기쁨이 아니라 하늘의 기쁨을 얻은 자입니다. “그런즉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 땅에는 영원한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육체는 질병으로 무너져 가고 있습니다. 도덕과 윤리는 이미 가치를 상실해 버린지도 모릅니다. 경제는 점점 악화됩니다. 정치적 상황은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숨바꼭질을 합니다. 전쟁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그네길의 인생을 불안해 하다가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오늘의 세상입니다. 골로새서 3:2에 “땅에 것은 죽었고”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우리의 기쁨은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안에서 천국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현재에는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때로는 질병의 억눌림과 생활의 궁핍으로 굶주림과 헐벗음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에서 이 땅에 사는 육은 할 수 없어 탄식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4절에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침같이,”6절 “우리가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8절에는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 극심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9절에 보면 사형 선고를 받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14절에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바울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후서 2:8에서는 “사랑을 저희에게 나타내라”고 권고합니다. 고린도후서 4:8 이하에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이 땅의 기쁨이 아닙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여러분도 바울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는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사모할 때 하나님께서는 진정한 기쁨을 주십니다.
3.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생활이란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쁘게 살려면 먼저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입니다. 기도하는 생활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맡기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찬송하는 생활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이 이루어지는 데 대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세상은 불신에 꽉 차 있습니다. 서로가 믿지 못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그리고 예수의 사랑에 이끌려 사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4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고 기도하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어 줄 때에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고후 5:5). 성령의 은혜 속에서 복음에 미친 듯 성별된 삶을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이 더욱 넘친 은혜로 역사하십니다. 어디 어느 곳에서든지 가는 곳마다, 있는 곳마다 기쁨을 전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이란 자신을 옳게 분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의 생활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날이 되기 위해 노력합시다. 오늘의 현실을 벗어 버리고 싶겠지만 우리가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해 나감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김충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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