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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2,345편◑/종려주일 설교

버림받는 예수/시 22:1-2

by 【고동엽】 2021. 10. 19.

시 22:1-2

오늘은 고난주일입니다. 일년 절기 가운데 가장 절정은 이번 고난주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생 가운데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부분도 이번 주간에 겪는 고난입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은 이번 주간 한 주간을 숙연하게 보낼 것입니다. 절제의 삶을 살고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2천년 전에 있었던 십자가 행렬이 재현될 것이고 금식과 절제와 고난을 묵상하는 마음으로 보내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한결같이 처음 부분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해 놓았지만 마지막 부분에 가서 보면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모습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 보면 예수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픈 고통을 당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그런 고통의 모습은 신약성경에만 묘사되어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고 구약성경에도 여러 곳에서 그 모습을 예언해 놓고 있습니다. 특히 이사야서를 보면 예수님의 탄생의 모습과 고난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7장 14절을 보면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였고 53: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자세한 내용입니까. 예수 탄생 700년 전에 이렇게 자세하게 예언해 놓았습니다.

또 시편에서도 장차 고난당하실 예수님의 그 고난의 모습을 그대로 적어놓고 있습니다. 22장 1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하고 절규합니다. 이 말씀은 마 27:46절에 나오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제 9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고난의 모습을 시편에서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시편은 다윗과 솔로몬이 쓴 시입니다. 다윗과 솔로몬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천년 전에 생존했던 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나서 고난당하실 것을 그대로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그래서 뜻이 깊고 의미가 있으며 소중한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모습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의 모습을 몇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버림받는 예수

본문 1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외치십니다. 그런데 마 27:46을 보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고 외치십니다. 이 외침은 동일한 말씀으로 철두철미 예수님이 버림받는 모습입니다. 우선 “하늘로부터 외면당하고 버림”받습니다. 불러도 하나님은 대답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엘리 엘리 라바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고 부르짖어도 하나님은 끝내 고난당하는 아들의 아픔을 외면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과 고난에 끝까지 침묵하시고 개입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그때 답답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 22:2절을 보면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하고 절규합니다. 그렇게 절규하면 누군가 다가와야 하고 응답이 있어야 하는데 누구도 찾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렇게 홀로 몸부림치다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것은 버림당하신 모습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자식이 이렇게 고난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 심정은 모두 같습니다. 때로 이 땅에는 자식을 버리는 부모도 있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부모가 아닐 것입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기가 낳은 자식을 그렇게 내다 버릴 수가 없습니다. 정상적인 부모라면 자식이 그런 고난을 당한다면 눈뜨고 볼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기절해서 깨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그렇습니다.  

고대 화려했던 폼페이시가 AD 79년에 화산폭발로 매몰됩니다. 그 거대했던 도시가 화산재에 매몰되어 도시 전체가 사장되어버립니다. 1738년도에 그 도시를 발굴해 보니까 비참한 형상들이 그대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는 화산재가 눈 내리듯 내리니까 그 재를 다 맞으면서 품에 어린 아이를 꼭 안은 채 그 화산재에 묻혀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아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의 마음뿐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서 울부짖고 탄식을 해도 하나님은 외면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들은 제물로 바치려고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십자가에 매달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며 부르짖을 때에도 하나님은 모른 체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하나님은 어디서 어떤 마음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계셨을 것입니까. 그때 그 모습을 보며 애태우셨을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것 같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아픈 마음입니다. 그래서 일본의 지다구라라는 신학자가 한말이 자꾸만 생각납니다. 그 신학자는 “이런 하나님의 아픔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함부로 십자가를 입에 담지 말라”고 했습니다. 참 지당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고 살아갑니다. 이 십자가에 들어있는 이 깊은 뜻이나 소중한 의미나 하나님의 아픈 고뇌의 마음이나 예수님이 당하신 그 고통의 내용을 보면 우리는 십자가를 함부로 입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외면당하신 것 뿐 아니고 땅으로부터도 외면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로부터도 철저하게 외면당하시고 버림받으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모두 어디로 다 도망가서 나타나지를 않았습니다. 배고플 때 떡을 얻어먹은 사람들도 다 도망가서 어디 있는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사람들, 나병환자들, 눈뜬장님들, 혈루병자들, 앉은뱅이들, 심지어는 무덤에서 건짐 받은 나사로도 어디 가고 한사람 없이 홀로 고독하게 고난 받다 운명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외치고 몸부림치다가 숨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을 철두철미 버림받은 고난이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은 엄밀히 표현하자면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고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고난 보다 한층 더 강한 표현이 버림받았다는 뜻입니다. 버림받았다는 말은 고난 받았다는 말보다 더 강렬한 표현입니다. 어떤 아이들은 집에서 굶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해서 불쌍하다고 하는데 그런 아이들 보다 더 불행한 아이는 버려진 아이입니다. 그래서 버림받는 다는 말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난당하신 것이 아니고 버림받으신 것입니다.  

조롱받는 예수

예수님은 또 철두철미 조롱도 당했습니다. 시 22:6-7절을 보면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모두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하고 그때의 모습을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가장 고통을 주려는 자에게 해당하는 형입니다. 피를 다 쏟아야 죽는 죽음이 십자가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 형 보다 더 큰 고통은 조롱당하는 아픔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들로부터 심판을 받습니다. 법조계에서는 후배가 더 높이 승진하면 모두 사표를 제출합니다. 후배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의미도 들어 있지만 선배가 후배 밑에서 일할 수 없다는 뜻이 더 강할 것입니다. 그것은 창피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창조주가 피조물로부터 재판을 받고 심문을 받고 문초를 받고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가는 동안 연도에 모여 있던 시민들의 침 뱉고, 욕하고, 돌 던지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으로서는 그 모습이 인내하기 힘든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 53장에 보면 그때의 모습을 기록하기를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았으며 그는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고난을 당하였다 하였노라“고 했습니다.  

고통도 육신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통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가난하거나 심한 노동을 해야 살아가는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가난하거나 직장이 어려운 일로 인해서 정신적으로 고통당하는 것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격적인 고난은 참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우 사장이 물에 빠져 죽은 것입니다. 인격적인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끔 교장선생님들이 목을 매서 자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살은 어떤 미명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문제이지만 그럼에도 자살하는 것은 이 인격적인 고통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그 인격적인 고난을 당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달려 있을 때 밑에서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벗겨 나누고 제비뽑고 놀이를 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죽어가는 예수를 모독하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18절에 보면 예수님은 “저들이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하고 한탄하십니다. 이것은 조롱의 극치이고 철저하게 고통을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군인들이 예수를 그렇게 모독하고 장난을 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예수

뿐만 아니고 뭐니 뭐니 해도 예수께서 당하신 가장 큰 고난은 십자가상의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고통을 1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십자가형은 당시로서는 가장 처절한 극형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온 몸에서 피를 빼내서 빈사상태에서 죽게 하는 고통의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는 오늘 목에 걸고 다니는 그런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옛날 티베트에서는 흉악한 죄인을 사형시킬 때는 시체가 썩은 물웅덩이에 던지는 형이 있었다고 합니다. 네팔에서는 뱀 가죽을 물에 불려서 그것으로 죄인을 묶은 다음에 그 뱀가죽을 말려 오그라들게 해서 조여 죽이는 형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 옛날 중동에서는 죄수를 죽은 사람의 시체와 함께 묶어 놓아서 기절해서 죽게 하고 시체에서 옮겨지는 독에 의해서 죽게 하는 형도 있었다고 합니다. 모두 극악한 죄수에게 고통을 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고안된 형일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처절한 사형 법은 십자가형일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옛날 페니키아, 아수르, 이집트를 거쳐서 당시 로마에서 활용하던 사형법입니다. 그런데 그 사형법이 너무나 잔인해서 로마에서는 자국민에게는 시행하지 않고 극악한 죄수들 중에서 반란자나 노예, 포로, 속국 민들만 해당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로마의 치안용으로 이 십자가 형을 활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무서운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잔인한 십자가 형틀이 마침내 예수께서 죽으심으로 인해서 오늘은 구원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잔인한 형틀이 이 세상 어디를 가 보아도 구원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국기로 사용되는 나라도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들을 가 보면 어느 민족이나 이 십자가를 세워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쯤 되면 이 십자가는 더 이상 흉측한 사형 틀이 아니고 구원의 상징이 되어버렸습니다.  

고난의 이유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모든 것을 다 내놓고 가셨습니다. 아주 철두철미 다 내놓고 가셨습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내 놓고 가셨는가 하면 18절을 보면 “속옷도 내 놓고 가셨다”고 했습니다. 겉옷은 물론이고 속옷도 다 벗어놓고 가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하신 고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예수님의 고난을 우리를 위한 고난이라고 결론짓습니다. 사 53:4절을 보면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땅 어느 것에도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구원의 길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만드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참혹한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 별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행으로 구원받아 보려고 새벽에 목욕재개도 해 보고 겨울에 얼음을 깨고 들어가 추위 속에서 자기를 학대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선행을 해서 구원받아보려고 구제도 하고 봉사도 하고 나누어 보기도 하고 수고도 해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아 보려고 눈물겹도록 율법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중심해서 살아갔던 삶의 모습을 보면 참 감동이 주어질 만큼 처절하게 지켰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길 밖에 없다고 단언해서 말씀합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십자가를 믿음으로”,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만이 구원이 있고 부활이 있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라고 그렇게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고 예수님이 또 십자가에서 처절한 고난을 받으신 것도 그런 연유에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음미하고 묵상하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생각하게 되고 나의 모습을 보게 되고 나의 삶을 되새겨보게 됩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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