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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 마 5: 21-26

by 【고동엽】 2021. 10. 10.

분노는 살인을 낳는다/ 마5: 21-26

 

 

할렐루야. 오늘 우리는 참 놀라운 말씀을 펴 놓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느끼는 것을 여러분도 똑같이 느끼실 것입니다.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두번 다시 읽고 싶지 않다는 느낌입니다. 그만큼 굉장한 부담감을 주고 어떻게 보면 우리 하고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당시의 제자들이나 청중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만 죽이지 않는 이상 자기는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이요, 전혀 양심에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들을 다 갖고 있었습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살인죄를 엄하게 다루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자기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이목구비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본성의 많은 점을 우리에게 이양시켜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해 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살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소중한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살인을 그렇게 보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사람을 죽이면 가차없이 사형에 처했습니다. 생명을 생명으로 대치하게 한 것입니다. 창세기 9장 6절입니다.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즉 살인을 하면 그 사람이 자기 피를 흘려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이만큼 하나님께서 살인을 엄하게 다루고 계시다는 것을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나 청중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나는 살인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하는 생각들을 다 가지고 있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나는 살인을 한 일이 없으니 하나님 앞에 의인이다.' 하는 생각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놓고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2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은 엄청난 말씀입니다. 굉장한 선언입니다. "너희들이 구약 성경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배웠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통하여 살인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정도로 배웠는지 모르지만, 내가 이제 이 계명에 들어있는 참 뜻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아는 바 대로,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가 계명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주신 당자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이 계명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의가 무엇인가를 이제 밝혀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종적인 유권해석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씀 속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수준의 거룩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을 지금 예수님이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시면 참 기가 막힌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그리고는 공회, 지옥 불 등의 말이 이어서 나옵니다. '심판'이라는 것은 사람을 죽인 자가 받는 사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노하면 살인자가 받는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라가'라는 욕설을 하는 자는 살인자가 받는 공회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형제를 향해 미련한 놈이라고 모독하는 자는 지옥불에 들어가리라고 합니다. 살인자는 지옥에 간다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십니까?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그런 생각을 갖고 이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는 사람입니다.

 

헬라어에 화를 낸다는 표현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두모스라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오르게라는 말입니다. 두모스는 가랑잎이 활활 타다가도 금방 꺼지는 것처럼 기분이 나쁠 때 감정이 폭발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불끈 화를 냈다가 자기도 모르게 금방 그 화가 식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성격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화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오르게 쪽입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서 한번 화를 냈다 하면 그 화를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고두고 쌓아가는 것입니다. 분노를 마음에 쌓아가면서 그 분노가 증오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증오로 바뀌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해서 말이 험하게 나옵니다. 그를 대할 때마다 좋은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마음이 편치 않고 마음에 분노가 있기 때문에 대할 때마다 말이 좋게 나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라가'라는 욕설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라가'라는 단어의 의미는 '이 머리 빈 깡통아!' 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의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미련한 놈'이 무엇인지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곰보다도 못한 미련한 놈이라고 하면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분노가 쌓이고 그 분노에 미움이 섞여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말이 좋게 안 나가는 것입니다. 말로써 사람을 잡는 것입니다. '이 머리가 빈 깡통아. 곰처럼 미련한 놈아.' 하면서 깔아 뭉개는 것입니다.

 

주님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이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향해서 마음 속에 분노를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살인하는 행위요, 형제를 향해서 말 속에 분노를 담는 것도 살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행동 전에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먼저 주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칼을 들고 사람을 찔러서 피를 흘려야 살인인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손에 칼을 들기 전에 벌써 마음에 칼을 갈고 있는 사람도 살인한 자와 똑같이 보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라고 역대상 28장 9절에 분명히 명시하셨고, 잠언 16장 2절에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해 보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동으로 살인하지 않았으니 나는 괜찮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마음의 깊은 곳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살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남을 미워하고 남을 증오하는 감정이 있으면 하나님은 벌써 살인한 사람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3장 15절에는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입니까? 누가 그 하나님의 눈을 피할 것입니까? 멀리 있어도 우리 생각을 통찰하시고 우리의 감정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을 누가 피할 것입니까?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분노를 쌓아놓고 있는 사람을 살인자라고 규정하시는 말씀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면서 무릎을 꿇고 "아멘." 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들어 있는 이 중요한 뜻을 마음에 깊이 담아야 합니다.

 

분노가 살인이라고 하는 이 말씀이 얼마나 진리인가를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자주 체험합니다. 또 자주 봅니다. 미국의 문화를 흔히 분노의 문화라고 일컫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화를 잘 냅니다. 감정이 폭발하면 앞뒤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제일 잘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총을 들고 나가는 것 아닙니까? 다 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총을 들고 나가서 난사를 함으로써 1년에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당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살인입니다. 마음에 분노를 품은 사람은 살인자입니다. 누가 이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까?

 

저 자신도 가끔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깜짝 놀랠 때가 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고 우리 가슴에 아픔을 주는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러브 호텔 문제입니다. 나라의 장래와 미래를 책임지고 있다는 공무원들이 어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감히 어느 곳에다가 러브 호텔을 허가해 줍니까? 차를 타고 오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막 가슴을 치고 싶어집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산자락 밑에 초막집이 있어도 마음이 차지 아니할 텐데 러브 호텔이 서 있다니 말입니다. 학생들이 날마다 우글거리는 학교 주변에 러브 호텔이 줄줄이 서 있습니다. 나는 그런 것을 허가해 준 공무원들에 대해 솔직히 분노하고 있고 그들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보고 살인자라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차를 타고 가다가 러브 호텔을 보면 저도 모르게 무슨 말이 불쑥 나오는지 아십니까? "불이나 나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는 제가 놀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짜 밤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객실 50개에 한 100명이 둘씩 둘씩 다 들어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거기에 불이 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오겠습니까? 상상을 해 보십시오. 내 속에 있는 분노가 수십 명을 죽이고도 남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하나님 옳습니다. 형제를 향하여 화를 내는 자체가 살인이라는 것이 옳은 말씀입니다." 하고 저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런 교훈 앞에 초연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자유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더욱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 마음에 또 한번 당혹감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형제라는 말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형제에게 노하는 자,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고 욕하는 사람, 형제를 보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사람'

 

성경에서 형제라는 말은 아주 가까운 사이를 가리킵니다. 눈을 뜨면 날마다 보고 만나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일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고 교인일 수도 있고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형제라고 합니다.

 

맥스 루카도라고 하는 아주 탁월한 기독교 저술가는, 이렇게 우리가 날마다 눈을 뜨고 보아야 하고 살을 비비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분노하기 쉽고 욕하기 쉽고 어떤 면에서는 서로 상처주기 쉬운 사람들을 일컬어서 '꼼짝 없이 매인 사람들'이라는 재치 있는 표현을 썼습니다.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렇습니다. 꼼짝 없이 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매임 병이라는 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임 병의 증세는 무엇입니까? 자꾸 짜증이 나고 화를 잘 내고 속에 쌓이는 것이 점점 많아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사돈에 팔촌도 안 되는 모르는 사람 하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들 형제라고 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 때문에 짜증이 자주 납니다. 화가 자꾸 치밀어 오릅니다. 나도 모르게 무엇인가 자꾸만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형제에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형제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항상 숨기고 쳐다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습니까?

 

심리학자들의 말을 들으면 오늘날 약 80% 정도의 부부가, 마음에 숨겨놓고 쌓아놓고 있는 분노 때문에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상담가는 자기를 찾아와서 상담을 하는 부부나 개인을 놓고 한참 이야기를 듣다 보면,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종잡을 수가 없고 감을 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답니다. 그럴 때면 마음 속에 가만히 숨겨 놓고 있는 분노가 있는지를 한번 체크해 본다고 합니다. 그러면 80%가 적중을 한다고 합니다. 모든 문제의 뿌리가 그 분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삭이지 못하는 분노가 있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볼 때마다 가끔 치밀어 오르는 화가 있습니다. 자식을 볼 때 그렇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고 한다면 오늘 우리가 하루에 몇 번씩 아내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몇 번씩 남편과 자녀를 죽이는 것인지 모릅니다. 마음에 쌓여 있는 분노가 나중에 증오의 감정과 뒤섞여서 결국은 어떤 사람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공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무서운 감정,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것은 남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죽입니다. 남도 죽이고 자기도 죽입니다.

 

최근에 미국에서 나온 어느 잡지를 통해서 생각을 깊이 할 수 있는 내용 하나를 읽었습니다. 1983년 죠지아주 클레이턴 카운티에서 재판이 열렸습니다. 기소된 범인은 캘빈 존슨이라고 하는 흑인 남자였습니다. 백인 여자를 성폭행했다는 죄로 기소를 당했습니다. 미국 재판에는 배심원 제도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그 배심원들의 평결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날도 그 재판소에는 배심원들이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배심원들 전부가 백인이었습니다. 한 40분 정도 서로 의논을 하더니 이 기소된 흑인 남자가 진범이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흑인 여자 네 사람이 찾아와서 그 피고의 알리바이를 제시를 했는데도 배심원들은 묵살 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이 진범이라고 단정을 했습니다. 재판관은 무기징역을 선고했습니다. 무기징역을 선고한 재판관 앞에서 캘빈 존슨은 마지막 진술을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증인입니다. 나는 잘못 기소되었습니다.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감옥에서 나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벗겨 주시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날마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는 감옥으로 갔습니다. 그 후 16년이 흘렀습니다. 바로 작년 6월입니다. 캘빈 존슨은 다시 재판정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를 무죄 석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DNA유전자 검사를 통해서 이 사람이 진범이 아니라는 것이 16년 만에 밝혀진 것입니다. 재판관이 그를 이제 석방시켰습니다. 그 시간 그는 손에 조그마한 신약 성경을 꼭 쥐고 서 있었습니다. 무죄석방이라는 재판관의 말을 듣고 묵묵이 재판장을 나오고 있는데 기자들이 몰려 들었습니다. 막 붙들고 질문했습니다. "존슨 씨, 당신을 16년 간이나 감옥에 집어 넣어 썩게 만든 그 판사와 배심원들을 증오하지 않습니까? 보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순이 많은 이 미국의 사법 제도에 대해서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말이 없습니까?" 그 때 존슨의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아니요. 내 마음에 타오르는 분노와 증오를 담고 있으면 그것은 나를 죽이고 맙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나가서 일자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내 가슴 속에 증오를 담고 있고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남도 죽일 수 있습니다. 총을 들고 나가서 맘대로 재판정 안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도 죽이지만 동시에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존슨이 어디서 이와 같은 진리를 배웠을까요? 손에 꼭 쥐고 있는 신약 성경을 읽으면서 형제를 향하여 노하는 자마다 살인자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그는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음에 형제를 향한 분노를 안고 있는 사람은 예배 드릴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23절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왜 원망 들을 일이 있습니까? 내 마음에 분노가 있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킬 수도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서로가 마음에 분노를 안고 있으면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제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쉽게 말씀 드리면 예배를 드리다가, 혹은 예배를 드리러 오다가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한다고 생각되면 예배 드리기 전에 그 사람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먼저 처리하고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지금 마음에 원한을 갖고 이를 갈고 있으면 먼저 사화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 드려야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유대나라 사람들은 제사만 지내면 어떤 죄든지 다 용서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인 줄 알면서도 스스로 회개하지 않고 가슴에 그대로 담고 있는 죄가 있으면 그 사람의 예배는 받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도 똑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먼저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도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신다.'(마6:15)고 분명히 이야기 했습니다. 고의적으로 범하는 죄를 안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형제를 향하여 분노를 갖고 있는 사람은 먼저 분노부터 처리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예물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형제에 대하여 분노를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분노를 하루 빨리 처리하라고 합니다. 내일까지 미루지 말라고 합니다. 25절 말씀입니다.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서로가 어떤 문제로 인해 미워하고 분노하고 대적하는 관계가 됐습니다. 아마 그래서 서로가 소송을 한 것 같습니다. 어쩌다가 재판 날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에서 만났다고 합시다. 그러면 재판하는 자리까지 가기 전에 먼저 사화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있는 분을 삭이고 서로 용납하라는 말입니다. 재판할 때까지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에 형제를 향한 분노를 담고 있고 증오를 담고 있으면 이것 자체가 살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워하는 살인죄를 가슴에 품고 오래오래 있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빨리 먼저 처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시한폭탄과 같은 그런 위험한 것은 빨리 내관을 제거해서 자기도 살고 남도 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 속에 들어 있는 본질적인 의미가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예수님이 설명한 이대로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 정직하게 우리 자신에게 물어봅시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는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까지 단 한번도 살인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렇게 할 자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를 만족시킬만한 사람은 우리 중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를 꼭 기억하십시오.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5장 나머지 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매시간 반복할 수 밖에 없는 네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첫째로, 자기 의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해석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살인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살인자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남보다 선한 데가 있다고 분명히 스스로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이 조용히 다가가서 내 마음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공개해 놓고 보니 살인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내 놓을 수 있는 의라는 것은 나에게 털끝 만큼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아직도 자기는 남보다 선하다고, 그래도 의롭다고 하는 은근한 교만을 갖고 다니시는 분들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자기가 그만큼 의로워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도덕적 표준이 얼마나 높고 고상하고 완전한가를 모르기 때문에, 즉 한 마디로 무식하기 때문에 스스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기 의를 버리십시오. 우리가 계명을 바로 이해하면 계명은 살아나고 나는 철저히 죽어버립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내 놓을 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이 시간 인정해야 합니다. 살인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 아무도 없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철저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스스로 하나님이 원하는 어떤 의를 이룰 수가 없는 줄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자기가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고,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자기 자신이 세밀한 것까지 철저히 순종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자기 의를 의지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 뒤에 숨어야 합니다. 예수님 뒤에 숨어 따라가면서 하나님을 불러야지 예수님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 이름도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때마다 예수님의 옷을 빌려 입어야 합니다. 내 옷을 입고는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합니다. 악취가 천국을 진동 시킬텐데 어떻게 내 옷을 입고 나갑니까? 예수님의 의로운 입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가야 됩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을 믿고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처럼 되기를 소원해야 됩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앞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절대적 표준 앞에서는 의인은 아무도 없다. 도무지 하나님의 요구를 들어줄 만한 능력이 나에게 없으니까 포기해야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니 예수님만 믿자. 그리고 하루에 열두 번이라도 형제를 미워하는 일이 있어도 그것 때문에 마음에 개의치 말자. 인간이기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그러므로 그럴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예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받으면 된다. 화가 날 때는 화 내고 용서 받을 때는 용서 받고 하는 식으로 살자. 이것이 신앙 생활이다.' 아마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가르쳐 놓아서 지금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예수 안에서 의로운 자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중요한 목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맏아들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기에 우리 보고 예수님처럼 되라고 합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 그 역시 365일 떼어 놓을 수 없는, 꼼짝 없이 매달리는 사람들을 데리고 사셨습니다. 그들에게 시달리며 사셨습니다. 완전하시고 거룩하신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이야말로 허물 투성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죄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하루에 100번, 200번이라도 화가 나서 못 견디셨을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시종일관 용서해 버리셨습니다. 그들의 더러운 부분을 만져주고 터진 곳을 싸매주면서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기가 행동으로 막힌 담을 허는 데는 약자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강자가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강자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처리하시면서 사람 사이에 막힌 담을 헐어 놓으셨습니다. 서로 용서할 수 있는 길은 잘못된 쪽에서 벌을 받도록 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 쪽에서 무조건 불쌍히 여기는 데 있다는 것을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할렐루야. 그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십니다. 나를 다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고 예수님처럼 살자는 목표를 정하면 살인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 목표를 잃어버리면 우리는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목표가 있기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고 또 그 이상의 수준으로 거룩한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믿고 확신해야 합니다.

 

넷째로는 성령의 도우심을 철저하게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에 대해서 잘 모르는 구약 시대 사람들은 형제에 대한 증오가 가슴에 일어나고 분노가 일어나도 어떻게 처리해야 될 지 알 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다음에 하나님이 내 안에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은 도우미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돕는 보혜사입니다. 성령은 우리 연약함을 도와주십니다. 믿습니까?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처럼 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여 "성령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내 마음이 분노로 가득 차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무조건 용서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처럼 남을 불쌍히 여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저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살인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은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으로 연약하여 할 수 없던 일을 성령은 하게 하시고, 과거에는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 앞에 거룩하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에게 전적으로 의존하십시오.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다시 말씀 드립니다. '안돼. 사람은 별 수 없어. 그렇게 거룩하다고 하던 목사도 별 수 없더라. 날마다 화내더라. 설교는 저렇게 거룩하게 해도 우리가 안보는 데 가서 아마 화를 내고 똑같이 행동할거야. 사람은 별 수 없어. 그러므로 날마다 그저 잘못하면 하나님 앞에 가서 용서 받으면 돼. 예수 이름 부르면 돼.' 하면서 부정적인 시각으로 자기를 보지 말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성령은 항상 우리에게 '예'라고 말씀합니다.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작은 예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향하여 분노를 가질 지라도 그 분노가 쌓이지 않도록 금방 우리는 사랑으로 녹이고 모든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시각을 갖지 마십시오.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우리가 성령을 향해서 날마다 두손 들고 기도하면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과거에 용서하지 못하던 사람도 용서하게 되고, 다른 때는 쳐다만 봐도 화가 나던 사람도 오늘은 너무나 불쌍하다는 마음이 생기고, 오래 묵은 원한이 나도 모르게 뿌리가 뽑히고 마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행복을 누리고 사는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마음에 잘 담으십시오. 네 가지를 말씀 드렸습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자기 의를 철저히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가 없습니다. 누구만 의지해야 됩니까?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예수처럼 되기를 원하는 목표를 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까?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굉장한 사람 될 수 있습니다. 이 증오와 이 부담과 원한을 가지고 미친 듯이 날뛰는 사람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놀라운 축복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이와 같은 은혜를 우리 모두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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