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비판하지 말자 / 마 7:1~6

by 【고동엽】 2021. 10. 10.

비판하지 말자 / 마태복음 7:1~6

 

 

며칠 전에 소포 하나를 받았습니다. 지방에 있는 꽤 큰 교회에 어느 성도가 보낸 소포였습니다. 꽤 두툼했습니다. 뜯어보았더니 편지가 한 장 있고, 테잎이 여러개 들어있었습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제가 쓴 요한복음 강해 설교 집 한 부분이 같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 이상한 것이 왔구나' 하고는 편지를 읽어보았습니다. 그 편지 서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목사님, 저희 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을 알려드립니다. 무슨 내용인가 하고 봤더니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수요일마다 요한복음을 강해하는데 몇 달 동안 옥한흠 목사가 쓴 책에 있는 것을 그대로 베낀다는 것입니다. 토씨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베끼고 설교를 하는데 너무너무 기가 막혀서 저에게 편지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아니할까 싶어서 그 목사님의 테잎을 여러 개 넣어서 보냈고, 제가 쓴 책에 페이지마다 목사님이 어떻게 이 말을 그대로 도용했는가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빨간 줄로 전부 그어서 보낸 것입니다. 증빙서류를 첨부해 보낸 것이지요. 그리고는 편지 말미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주님의 말씀이 없어져 버리는 안타까운 현실을 안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자기 이름도 밝히지 않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참 심정이 착찹했습니다. 일단 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대충 훓어 보니 그 목사님이 토씨 하나도 빼지 않고 그대로 인용한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저의 책에서 중요한 내용들을 발췌하여 설교를 하신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우는 제 책을 읽었던가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 어디서 들은 말인데...' 하고는 귀담아 듣다가 '여기서 빼 가지고 설교하는구나.' 생각하고는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저에게 편지를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교인을 연민의 정으로 봅니다. '조금 비정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여러분, 설교자는 많은 사람에게 빚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 말을 몇 마디나 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 역사 2000년 동안 수많은 설교자들이 배출되었고, 저명한 저술가가 등장해서 많은 책을 남겼고,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하면서 평생을 바친 위대한 주석가들이 남겨놓은 유산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그 모든 분들에게 빚을 지고 사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책을 읽으면서 그분들의 남겨놓은 많은 자료들을 검토하면서 '아, 이 말씀이야말로 참 은혜스러운 말씀이다. 우리 성도들이 들어야 되겠다. 우리 성도들이 이 말씀 듣고 은혜 받으면 그 영혼이 살찌고 그 영혼이 건강해질 수 있다.' 하고 생각하고는 좋은 내용들을 골고루 찾아 그것을 가슴에 안고 씨름하면서 설교를 만드는 게 설교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남의 말을 인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게 아닙니다. 자기가 전혀 준비하지 아니하고 남의 것을 그대로 카피해서 설교한다면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좀 인용한 것을 가지고 견디지 못해서 교회에 주의 말씀이 사라졌느니, 없어졌느니 하고 떠들면 설교자가 어디에 설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설교자가 자기 설교는 자기만이 해석할 수 있는 성경의 의미라고 떠든다면, 그 설교는 아무도 해본 일이 없는 오직 자기만이 할 수 있는 설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이단입니다. 그런 설교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설교자를 놓고 이런 식으로 비판하는 성도들이 교회 안에 많으면 교회가 많이 힘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시시콜콜 비판할 테니 말입니다.

 

지난번 민경배 목사님 설교를 들으신 분들은 공감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테잎을 통해 들어보니 삭개오와 니고데모를 혼동하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나무 위에 있었는데 예수님이 지나가셨어요. 아, 그런데 니고데모야 내려오라.' 하시는 것입니다. 또 너무 흥분해서 '니고데모가 나무에서 내려왔습니다.' 하시는 게 아닙니까? '아, 저 목사님 완전히 삭개오를 니고데모로 착각했구나'. 그러면 그 목사님이 얼마나 귀엽습니까? 이 강단에 올라서서 흥분하면 어떤 때는 이름이 왔다갔다 합니다.

 

저도 옛날에 다윗을 사울이라 하고, 사울을 다윗이라 하고 그랬습니다. '우리 목사님이 너무 긴장하셔서 우리에게 좋은 설교를 해주시려고 하다가 저렇게 약간 혼동을 하셨구나' 하면 오히려 더 은혜가 될 텐데, 저에게 편지를 보낸 그런 성도는 못 참는 것입니다. '세상에 목사가 되서 삭개오와 니고데모도 구별을 못하나?' 이렇게 하면 끝이 없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를 따르는 우리를 향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하는 것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비판이란 무엇입니까? 형제의 약점이나 허물을 들추어서 험담하거나 공격하는 언어의 폭력입니다. 자기 안경을 쓰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로 다른 사람을 재면서 '길다, 짧다' 늘어 놓는 것입니다. 물론 비판 중에는 건전한 비판도 있습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여 아예 비판의식 전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되어 가면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지고 교회가 바로 되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한국교회가 조금이라도 부패하고 세속화되어 간다면 우리는 이런 교회를 가슴에 안고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비판의식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통회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런 비판의식을 주님이 하지 말라고, 나쁘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하여 책망하는 것까지 금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잘못할 때 책망합니다. 교회에서는 우리의 잘못을 놓고 책망합니다. 잘못되는 것을 보고도 책망하지 아니하는 교회는 이미 생명이 떠난 교회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악과 손을 잡고 잘못되어 그 영혼을 파괴하고 있는데도 조금도 나쁜 소리를 하지 않는 교회라고 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하나님의 권위를 잃어버린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책망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고 하셨다 해서 책망하지 말라는 말로 받아들이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교회 안에서 형제끼리 서로의 약점과 허물을 용납하지 못해 말을 가지고 형제들에게 상처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원래 바리새인들은 남을 비판하는 데 도가 트인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십일조를 잘 내는 것을 드러내어 자랑하기 위해서 십일조 안 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공격했습니다. 왜 십일조를 안 하느냐는 말은 자기는 이렇게 한다고 자기를 내세우려는 의도였던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남을 비판했습니다. 나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의 의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5장 20절에 주님이 매우 엄숙한 말씀을 하신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5장 2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바리새인처럼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내세우는 의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죽이고 자기는 사는 의입니다. 다른 사람을 깔아 뭉개고 자기가 의로워지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주님을 섬긴다는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의가 필요합니다. 더 나은 의가 무엇입니까? 형제를 비판하지 않는 의입니다. 나를 죽이고, 형제를 높이는 의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사람이 되기를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할 수 있는 대상은 따로 있습니다. 교회 안에 형제가 아닙니다. 세상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은 우리가 영적으로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영적으로 얼마나 잘못되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과 원수 된 자리에 있으며, 얼마나 악한지 우리는 그들을 얼마든지 영적으로 분별하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7장 6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나오지 않습니까?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거룩한 것이라는 말을 목걸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목걸이를 개에게 던지지 마라. 너희 손가락에 끼고 있는 진주를 빼서 개에게 던지지 마라.' 여기서 개는 집에서 키우는 애완견이 아니라 들개입니다. 사납고 냄새 나고 더러운 옛날의 들개들입니다. 이 개들에게 값나가는 목걸이를 던져준다고 해서 개가 그 가치를 알까요? 보석을 돼지에게 던진다고 해서 돼지가 고맙다고 할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개, 돼지에게 거룩한 것을 던질 수도 없고, 진주를 던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뭘 의미합니까?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우리의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거룩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생의 축복이요, 복음입니다. 이런 것들은 너무너무 소중하고 거룩합니다. 보배보다도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함부로 던지듯이 주면 안 됩니다. 사람을 분별해가면서 예수의 이름을 전해야 되고, 영적으로 잘 판단해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마구 모욕하고, 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도 전도하실 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귀 있는 자가 들을 찌어다.' 아무나 듣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복음을 귀한 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 가치를 모릅니다. 개와 돼지처럼, 뭘 모르고 오히려 찢어버리고 발로 뭉갭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함부로 거룩한 복음, 거룩한 예수의 이름을 던지면 안 됩니다.

 

기독교를 은근히 비판하기를 즐기는 도올 같은 사람에게 가서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을 구원하십니다.' 하고 말하면 어떤 응답을 할 지 뻔하지 않습니까? 뻔하게 알면서 주님의 이름을 그 사람의 발 밑에서 짓밟히게 만들어선 안 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세상 사람을 분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개와 돼지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는 우리가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먼저 두 가지를 생각하면서 마음에 담을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는 이 세상에서 아무도 비판 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남이 날 두고 비판하는 것을 듣기를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 사실을 인정하고 계십니다. 1절에 보면, 첫 서두에 이런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너희들 다 비판 받기를 원치 않지? 남이 너희 소리하는 것을 듣고 싶어하지 않지? 그러므로 너희가 남에게 비판 받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남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도 남으로부터 비판 듣기를 원치 않습니다. 당연합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가장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남의 말 잘 하는 사람치고 남이 자기 말 하는 것 잘 견디는 것을 못 봤습니다. 전부다 히스테리컬 하게 반응합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그렇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자기는 재미있게 하면서, 남의 말은 못 받아주는, 이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습니다.

 

저 자신도 예외가 아닙니다. 목사니까 비판을 하면 겸손하게 받아들일 것 같지 않습니까? 물론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또, 건전한 비판은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건전한 비판이든 불건전한 비판이든 간에 비판하는 조로 말하는 것을 저의 본심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나쁜데 어떻게 합니까? 나쁘면 나쁘다고 해야지 별도리가 없습니다.

 

20년이 넘도록 저에게는 어떤 사람의 표정이 제 마음에 각인이 되어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말 몇 마디가 저의 귀에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참 무섭습니다. 그 사람이 저에게 손가락질하고 삿대질하면서 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20년이 지났는데도, 그 사람의 이름도 모르면서 그 얼굴 표정이 남아있습니다. 그 순간의 표정, 그 순간의 말이 저 안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원래 이름은 강남은평교회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3년 만에 교회 이름을 사랑의 교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이름이 하도 별라서 소문이 났는데, 어느 목사님들 모임에 갔더니 느닷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목사님이 저를 만나 "무슨 교회 이름을 그 따위로 지었느냐?"고 그러시는 겁니다. 굉장히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습니까?" 했더니 "세상에 '의'자가 들어가는 교회이름이 어디 있느냐? 그런 것은 고아원 이름이나 짓지." 하면서 얼굴을 붉히며 대드는 것이었습니다. 자기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데 '의'를 넣던지, '너'를 넣던지 무슨 상관입니까? 그런데 막 화를 내고 달려 들더군요. 그래서 제가 얼떨결에 그냥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표정이 제 마음에 꽉 박힌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흥분하던 음성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그것은 무얼 의미합니까? 제가 비판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의 아내는 항상 자기가 야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사랑의 교회에서 옥목사에게 솔직한 말을 해줄 사람이 거의 없고 잘못돼도 잘못된다는 말을 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자기라도 그 말을 당당하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항상 야당이라고 합니다. 그 말만 들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여러분, 꼭 그럴 필요가 뭐 있습니까? 아내가 이야기하는 말을 들으면 옳은 말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고칠 때도 있습니다. '아, 내가 잘못됐구나!' 하고 인정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고치고 인정하면서도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를 비판하는 것을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또 제 아내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에게는 대놓고 합니다. 그거야 당연합니다. 아무리 비판해도 제가 죽이진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너나 할 것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싫어하는 것이면 남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에티켓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기를 원하면 꼭 해야 될 확실한 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것인데, 내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1절, 2절을 봅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남을 비판하면 비판하는 것만큼 자신도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을 안 하면 자기도 비판을 안 당합니다.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이런 것, 저런 것을 가지고 손가락을 헤면서 입으로 쪼아대면 쪼아대는 것만큼 자신도 다른 사람의 입에 비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7장 12절에 나오는 유명한 황금률하고도 통합니다. 12절의 말씀을 우리는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내가 비판 받기를 원치 않으면 먼저 내가 남을 비판하지 말아야 됩니다. 먼저 내가 대접을 할 때 내가 대접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천해야 됩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지독한 모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비판합니까? 벌써 자기 모순을 알고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은 재미있는 비유로 지적하고 계십니다. 3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네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참 재미있는 말씀이고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티와 들보는 비교가 안됩니다.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로 이것은 너무나 거리가 먼 사물입니다.

 

우리 눈은 워낙 예민해서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티만 들어가도 충혈이 되고 눈물을 흘립니다. 그래서 그것을 닦아내야지, 그렇지 않고는 견디질 못합니다. 이것이 조그마한 티입니다. 들보가 무엇입니까? 천정을 보십시오. 가로질러놓은 시멘트, 저 서까래가 들보입니다.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그러니까 티하고 들보는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서로 비교하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비판하는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비판 받는 사람은 자기 눈에 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 더 나쁘냐? 비판하는 사람이 더 나쁘다." 그 말입니다. 어느 정도 나쁜가 하면 들보가 티보다도 천배 만배 큰 것처럼 비판하는 사람은 비판 받는 사람보다도 천배 만배 더 나쁩니다.

 

자기 눈에는 큰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보지도 못하는 주제에 남의 눈에 있는 티를 가지고 탓한다면은 이 얼마나 자기 모순입니까? 그런 모순된 짓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날마다 "주여,주여." 하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모순을 안고 살면 그 인격이 건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의 소리 잘하는 사람은 자기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든지, 아니면 남의 티가 들보처럼 커보이는 이상 안구를 끼고 있는 환자이든지, 아니면은 자기의 들보를 숨기기 위해서 남의 자그마한 티를 가지고 과장하는 외식주의자이든지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보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읽은 가이드포스트에 보니 아주 단순하면서도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이 낮에 좀 한가할 때에는 응접실에 나와서 커피도 마시고, 신문도 보면서 시간을 보내는 데, 자연히 건너 집에 있는 응접실로 시선이 자주 갔나 봅니다. 왜냐하면 그 아파트는 골목을 하나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아파트와 나란히 서 있었기 때문에 골목 사이를 두고 서로가 응접실이 다 들여다보이는 것입니다. 건너 집에 있는 응접실에는 아주 고상하게 생긴 부인이 가끔 응접실에 나와 가지고 바느질을 하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서로 만나서 대화를 한 일은 없어도 서로 멀리 쳐다보는 사이가 된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여전히 응접실에 나와서 무심결에 건너편에 있는 부인을 바라보았는데 그 날따라 부인이 흐릿하게 잘 안보였습니다. 전처럼 선명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모르게 대뜸 그 입에서 무슨 말이 나왔느냐 하면 '원, 세상에 창문이나 제대로 닦고 책을 읽던지, 바느질을 하지. 저렇게 게을러서 책만 읽으면 뭐하나?' 하고 자기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왔습니다.

 

한 두주가 지났습니다. 따뜻한 봄날, 봄 청소를 했습니다. 유리창들을 닦고, 집안의 구석구석에 있는 모든 쓰레기들을 다 치우고, 하루종일 열심히 청소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늦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커피 한잔을 들고 응접실에 와서 포근한 의자에 앉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건너편집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건너 집에 있는 부인이 너무나 선명하게 잘 보이는 겁니다. 바느질하고 있는 부인이 그림을 보듯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럴 때 그 부인의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저 부인이 창문을 닦지 않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는데, 오늘 보니까 내가 창문을 제대로 안 닦아서 그런 일이 벌어졌구나. 아, 내가 이렇게 바보구나.' 하고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는 한 토막의 글이었습니다.

 

여러분, 비판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자기 창문을 닦지 않고 남의 창문 안 닦았다고 욕하는 사람입니다. 비판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자기 눈에는 들보를 가지고 있으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모순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거룩하게 하나님 찾고, 남 보기에는 경건한 것처럼 기도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이만큼 성장할 수 있고, 나름대로 건강하게 오늘까지 주님의 일을 위해서 쓰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를 저는 주저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를 비판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서로 비판하면서 싸우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간혹 비판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한 1~2년 지나고 나면 어디를 갔는지 사라지고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디로 가버리고 없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생각하면 그것은 당연한 현상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비판 안 하면 잠이 안 옵니다. 남의 말을 안 하면 몸이 근지러워 살지 못합니다. 자기 말을 받아주는 그런 환경이 되어야 신이 나서 뭐든지 합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 와서 이말 저말을 해보니 통하지를 않잖습니까? 바탕이 자기 말을 받아주지 않으니 못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떠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이 간 교회는 불행하지만.

 

얼마나 감사한지요. 주변을 한번 보십시오. 교회 중직을 맡고 있는 분들이 목사가 하는 일마다 이리 비판하고, 저리 비판하고 서로 모이면 쑥덕쑥덕하는 교회 치고 제대로 성장하는 교회 보셨습니까? 건강한 교회 보셨습니까? 과거에 그런 일을 하다가 사랑의교회에 오신 분들은 깊이 반성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래서 성령이 역사하는 것 보셨습니까? 성도들끼리 서로서로 모여 앉으면 이쪽에는 저쪽 이야기하고 저쪽은 이쪽 이야기 하면서 서로가 비판하는 그런 교회,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것 보셨습니까? 새 생명이 태어나는 축제를 경험하는 것을 보셨는가 말입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비판하는 것은 나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끼리 비판하는 것은 나쁜 일입니다.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1~2년 전에 서울에 있는 큰 교회의 유명한 목사님이 여러 가지 스캔들에 말려 들어 홍역을 치룬 일이 있습니다. 신문에 가끔 보도가 되고, TV에서까지 야단법석을 떨고, 기독교회 평신도 단체들이 비난의 성명을 발표하고, 심지어는 그 목사님이 법정에까지 서고, 그야말로 지옥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가 나오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그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 목사님을 좋게 보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목회자들 가운데는 그 목사님의 목회 생명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즈음에 목사님 몇 분이 모이는 어떤 모임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제 옆에 유명한 목사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목사님이 앉아 계셨는데, 식사를 하다가 저보고 이런 말을 합니다. '요사이 자꾸 TV에 나오는 그 목사님 정말 생각하면 안타까운데, 참 야단이다.' 하면서 자기가 우연히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교회 교인을 만나게 되었답니다. 그래서 일부로 좀 떠봤다고 합니다. "당신 교회 목사님 요사이 참 힘들겠어요. 그런 말들을 듣고 있는 목사님인데, 그 교회를 계속 나가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나간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설교가 귀에 들어오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들어온다고 대답했답니다. 그러더니 그 분이 목사님을 향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저는요, 우리교회 목사님을 신뢰합니다. 소문대로 그런 나쁜 짓을 할 분이 아니라는 걸 나는 너무 잘 압니다. 또, 설혹 한두 가지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꼭 교회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흠이 없는 목사가 있습니까? 목사님은 흠이 하나도 없으십니까?" 그래서 슬그머니 떠보려다가 당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목사님이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 이런 교인이 있기에 그 교회가 살아있구나!' 지금도 그 교회가 부흥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들으니 한 주에 세례를 천명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 교회는 제자훈련의 '제'자도 모르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비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우리 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해놓으니 모두가 표준이 높아서 이상론 중독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눈에 걸리면 못 참고 못 견딥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남을 비판하기가 아주 쉬운 교회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이런 시험에 빠지면 주님의 교회로서의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오늘은 오순절 성령 강림 주일입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셔서 능력을 주셨습니다. 성령은 교회에 임하셔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교회에 임하셔서 교회 안에 내주하시고 우리의 심령에 내주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는 온전한 자가 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격을 통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하는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열매를 맺도록 해주십니다. 이렇게 온전한 인격을 닮아가도록 우리 안에서 창조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이기 때문에 성령은 우리 혀를 통제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입니다. 그 사람의 인격에 성숙이나 비성숙을 말로 가지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 신앙의 인격이 온전하냐, 온전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을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만큼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의 말을 통제합니다.

 

성령이 예루살렘 다락방에 임하셨을 때 거기에 앉아 있는 120문도의 말을 통제했습니다. 입을 통제했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크신 일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교회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의 입과 말을 통제하십니다. 우리가 비판합니까? 성령은 슬퍼합니다. 우리가 선한 말을 합니까? 성령이 기뻐하십니다.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선한 말을 형제에게 주고 받을 때 성령은 우리 안에서 기뻐하시고 우리 안에서 충만하시지만, 우리가 성령을 거역하고 형제를 함부로 비판하면, 혀로 형제를 살인하고 형제를 해치면 성령은 근심하고 성령은 소멸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스스로를 서로 돌아봅시다. 형제를 비판하는 근성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여러분은 성령의 통제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육신의 사람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성령에게 순종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형제를 비판하려고 하다가도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려고 하는 노력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성령에게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는 성령 충만합니다. 할렐루야! 이런 사람이 모이는 곳에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하루에 줄잡아 2만 5천 내지 3만 마디의 말을 한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말을 쏟아 놓는지 모릅니다. 말을 하고 나면 말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없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말이 사라지지 않고 남습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에 남기도 하고 어떤 사람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 그만큼 말은 오래 갑니다. 그리고 무서운 힘을 갖고 있습니다.

 

이해인이라고 하는 시인의 <말을 위한 기도>라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더러는 허공으로 사라지고

 

더러는 다른 이의 가슴 속에서 좋은 열매를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주여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우리가 비판했습니까? 그 비판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누군가의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우리로 하여금 비판하지 않도록 항상 도와주십니다. 우선 먼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우리 마음 속에 계속 일으켜줍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치고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비판 받지 아니할 만큼 온전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리 믿음이 좋고, 아무리 목사고, 장로고, 떠들어봐도 약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똑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닮아 온전한 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표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우리의 허물과 약점에서 자유할 수 없는 십자가를 날마다 우리는 지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쳐다보면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의 말씀대로 서로 인자하게 하며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이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도 팔복 가운데 유명한 말씀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오' 우리는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평안한 삶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으려면 내가 남을 불쌍히 여겨야 되지 않습니까?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형제의 관계는 비판하는 관계가 아니고, 불쌍히 여기는 관계라는 것을 성령께서 날마다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불쌍히 여기는 이상 남을 비판할 수 없습니다.

 

성령은 형제를 칭찬하고 격려하도록 우리를 감동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서 살면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지 않습니다. 그의 약점이나 실수를 늘 마음에 기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은 점, 오히려 그 형제가 갖고 있는 장점을 날마다 볼 수 있도록 성령은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십니다. 따라서 자연히 격려하게 되고, 칭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은 성령의 눈입니까? 혹은 사탄의 눈입니까? 성령의 눈을 가진 사람은 좋은 점을 봅니다. 그리고 격려하고 칭찬합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에게 비판을 엄하게 금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0절, 11절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다른 말로 바꾸면, '네가 어찌 감히 다른 너희 형제를, 네 옆에 있는 형제를 비판할 수 있느냐? 비판함으로써 그 형제를 업신여길 수가 있단 말이냐?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내 입으로 한 모든 말 하나하나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심판을 하게 될 텐데 그 형제와 네가 뭐가 다른 것이 있어서 함부로 다른 형제를 비판하느냐?' 그만큼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비판하지 못하도록 우리 혀를 통제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통제에 겸손하게 순종하면서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오늘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고 돌아갑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사람은 형제를 불쌍히 여깁니다. 성령의 사람은 형제의 좋은 점을 봅니다. 성령의 사람은 형제를 격려하고 칭찬할지언정 비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럴 때 성령이 우리 안에서 기뻐하시면서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근심하고 탄식하면 우리는 불행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살아도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늘 근심하고 탄식하신다면 우리는 영적으로 절대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이 기뻐하신다면 그 기쁨은 나에게 행복으로 전달됩니다. 여러분 성령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잔인합니다. 날마다 혀에서 나오는 말 몇 마디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다치고 죽는 지 모릅니다. 칼에 맞아 죽는 사람보다도 혀에서 나오는 말에 맞아 죽는 사람이 몇 십배, 몇 백배로 더 많은 것이 이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뻐하며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서로 의지하고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서로 행복을 나누면서 살 수 있을까요? 어디서 이 행복을 소유할 수 있을까요?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형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형제를 서로 감싸고 함께 아픔과 슬픔을 나누면서 서로가 위해주는 것이 성령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위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만이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서로가 신뢰하고 기댈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주신 주님을 찬양합시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우리가 성령의 통제를 벗어나서 교회 안에서 형제를 헐 뜯고 비판하는 거치는 돌이 되지 않도록, 쓴 뿌리가 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들을 항상 돌아보면서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길이요, 우리가 행복한 길이요,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 주시기를 바라고, 다른 곳에서 여러분이 비판하는 형제들로 인해서 상처입고, 고통 당하고 온 경우가 많다 할지라도 사랑의 교회를 통해서 그 모든 상처가 치유 받기를 바라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새롭게 거듭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