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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있는 곳에 있는 사람(요한복음 12장 20절~30절)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우리는 의식이 없는 사람을 가리켜 '식물인간'이라고 부릅니다.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삽니다. 그런 경우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부득불 식물인간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분명 살아 있습니다. 음식도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더욱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그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달음이 없으면 만족은 없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의식이 없으면 인간이랄 수 없습니다. 느낌이 없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습니까? 소유도 행복이 아닙니다. 감격이 있어야 행복인 것입니다. 행함이 없고, 무엇인가를 위하여 땀흘려 수고하고 희생하지 않으면 절대로 즐거움이 따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수고한 만큼의 즐거움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가령 여기에 집이 있다고 합시다. 이 집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 이 집을 위하여 시간과 노력과 정성을 투자한 사람, 그 사람만이 이 집을 드나들면서 진정한 행복을 누립니다. 어린아이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어린아이에 대한 사랑이나 어린아이로부터 얻는 기쁨과 즐거움은 그를 위하여 바친 수고와 비례하는 것입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거저 내게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행복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은 지식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깨닫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소유의 문제는 더군다나 아닙니다. 느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행복은 쟁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빼앗을 수 없습니다.
행복을 얻어보겠다고 아무리 몸부림쳐보아도, 그래서 막상 소유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소유하게 된 그 순간, 감격이 없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나를 즐겁게 해주는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즐거움은 더불어 얻어야 합니다. 생명의 문제도 더불어 누려야 합니다.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내가 위하여 행복하게 한 그 사람의 행복, 그 행복을 내가 더불어 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행복의 이치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는 내가 기쁠 수 없다는 행복의 원리를 터득하여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사는 동안은 헛된 세월만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인의 불행이 있습니다. 나 혼자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극단적인 이기심, 남은 불행하게 되어도 나는 행복할 수 있다는 착각 때문에 불행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지성인 가운데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최소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이기적인 행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행복을 추구하면 되지 않느냐---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은 나도 행복하지 못하고 남까지 불행하게 만들고 마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월요일, 미국 버팔로에서 있었던 교역자 수양회에 참가하여 300여 명의 목사님들이 모인 자리에서 강연을 하고 어제 돌아왔습니다. 목사님들을 비롯하여 사회학자, 심리학자, 신학자 할 것 없이 많은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 가운데 놀랄 만한 것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그 분야에서 권위 있는 자의 분명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미국에는 결혼 적령기에 있는 사람의 37퍼센트가 독신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12퍼센트는 한번 결혼했던 사람입니다. 어찌되었건 현재 독신이요 앞으로도 독신으로 살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이 행복하겠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불행합니다. 가정이 없이 혼자서 산다는 그 불행감과 그로부터 당하게 되는 불이익과 고통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작용이 야기되는 것입니다. 알코올중독이니 흡연이니 마약이니, 심지어 동성연애니 호모섹스니 에이즈니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이 복잡한 문제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입니까?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내 행복을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봉사하고 싶지 않습니다. 요즘은 중매를 하면서 보아도 내가 남을 행복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저 사람으로 해서 행복할 수 있을까?---이것만 열심으로 계산하고 있습니다. 결혼의 근본 정신, 근본 철학이 잘못된 것입니다. 나만 행복하겠다, 어떻게 해서든 나만 즐기며 살겠다---이 사고 방식이 결과적으로 나를 무서운 함정에 빠뜨려 영영 헤어날 수 없는 불행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서 모범적인 가정의 예를 생각해보십시다. 룻기에 보면 유대 베들레헴의 사람 엘리멜렉과 그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과 함께 흉년을 피하여 모압땅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이방여자인 오르바와 룻이라는 두 며느리를 맞아 가정을 이룹니다. 얼마 후에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즈음 유대 땅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나오미는 모압땅을 떠나 다시 고향에 돌아가려 합니다. 그때에 그가 두 며느리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1:8, 9)."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이에 오르바는 저의 백성과 신에게로 돌아갑니다. 룻만이 나오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따릅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 17)." 오늘날에는 이런 여자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울 것입니다.
나의 행복이란 전혀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도 전혀 없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들을 다 잃어버리고 쓸쓸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빈털터리의 노파, 그를 따라가서 평생 함께 살다 죽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두 사람은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룻은 보리이삭을 주워 시모인 나오미를 극진히 봉양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어 보아스의 아내가 되고 다윗의 할머니가 됩니다. 이방 여자로서 다윗 왕가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보너스입니까?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까?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입니다. 요즘의 사람들은 지나치게 나의 행복만을 찾습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결혼도 안 합니다. 결혼했어도 이혼합니다. 자식도 낳지 않습니다. 엄청난 불행에 빠집니다. 행복은 이기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갑니다. 요즘의 실내구조는 대체로 응접실과 식당이 나란히 붙어 있어서 부엌일 하는 것이 한눈에 다 보입니다. 제가 너무 보수적인 사람이라고 나무랄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가만히 보면 고무장갑을 끼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팔뚝까지 올라오는 고무장갑을 끼고 음식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아예 음식 맛이 싹 사라집니다. '저렇게 할 것이면 차라리 짜장면이나 시켜줄 것이지'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입맛이 없어집니다. 여러분, 그 손 위해보았자 무엇합니까? 얼굴은 늙어 가는데 손만 예쁘게 남아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음식에는 손맛도 있는 것입니다. 소매 걷어붙이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해야 음식 맛도 나고 삶의 재미도 있는 것이 아닙니까? 손상할세라, 얼굴 상할세라, 몸 상할세라 안절부절못합니다. 화장대 앞에 두세 시간씩 앉아 있어도 주름살은 하나둘 늘어갑니다.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영원히 늙지 않을 것을 늙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차피 늙을 것이고 죽을 것입니다. 걷어붙이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면 안됩니까? 그래야 나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합니다. 소중한 어린아이에 대한 수고조차 남에게 떠맡기고 나의 행복만을 추구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똑똑한 사람일수록 불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26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닙니다. 감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 계신 그 현장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자세인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요 14:5)." 예수님께서는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I am the way.'---예수님 당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긴 이야기가 필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신 그 현장을 찾아야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을 뵙게 되고 나아가 행복, 예수님의 생명, 예수님의 영생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35절로 보면 예수님의 일기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십니다. 전도 생활에서 가장 피곤한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이야 따라다니면서 구경하는 것이 고작인데 피곤할 것도 없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수고하시는 예수님이 가장 피곤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새벽 미명에, 제자들이 잠들어 있을 때에 조용히 빠져 나오시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십니다. 늦잠자고 깨어난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디 가셨느냐고 찾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현장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새벽마다 기도하시는 바로 그 자리에 제자들은 함께 있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병자, 눌린 자, 소외된 자, 불쌍한 자들을 돌아보시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하나 해봅시다. 유월절 명절이 되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어 법석을 떱니다. 촌사람들이 서울에 올라왔으니 오죽하겠습니까? 볼 것도 많고 구경할 것도 많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는 깊은 마음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 많은 사람 중에 가장 외롭고 고독하고 불쌍한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깊이 생각하시고 찾으신 곳이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그곳에서 38년 동안 누워 있는 환자를 만나십니다. 38년 동안 병석에 누워 있는 이 사람을 봅시다. 이제 아무런 여망도 없습니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없습니다. 미신에 의지하고 연못가에 누워 있을 뿐입니다. 가끔 연못의 물이 동하는데 천사들이 그 연못에 와서 목욕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맨 먼저 물 속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전설을 믿고 많은 환자들이 거기에 와 있습니다. 이 미신에 의지하고 36년을 기다린 불쌍한 사람, 그런데 물이 동하여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만났을 때에 그 사람은 물이 동할 때에 제발 나 좀 연못에 넣어달라고 사정을 합니다. 소원이라는 것이 고작 이것입니다. 병이야 낫건 말건 이제는 물에나 한번 들어가 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불쌍한 사람, 이 한사람을 찾아 만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외로운 자와 함께 하시며, 가장 사랑을 필요로 하는 자와 함께 하시고 계십니다. 소중한 시간, 거룩한 몸을 바치는 것에 조금도 인색하지 않으셨습니다. 더욱이 죄인과 함께 하시고, 세리의 집에 가서 음식을 나누시며, 더러운 사람들과 함께 하셨기에 돌아오는 불이익이 많았습니다. 죄인의 친구라는 좋지 못한 별명도 얻으셨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예수님 만나기를 꺼려해서 밤에야 몰래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 그 불쌍한 여인과 길게 말씀하시다가 마침내 제자들에게 오해도 받으실 만큼 예수님은 죄인들과 소외당한 사람들과 가까이, 함께 하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셨습니다마는 나머지 아홉 제자는 아래에 머물러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 세 제자도 깨어 기다리라 하시고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서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깨어 있어야 할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함께 있었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피땀 흘리시며 밤새 기도하시는 그 현장에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제 베드로가 그렇게 굳게 결심하고 약속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을 갑니다. 어째서 베드로가 이토록 비참해졌습니까? 불을 보듯이 환한 이야기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함께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함께 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동산에 홀로 계셨습니다. 거기에서도 혼자이셨고 법정에서도 혼자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실 때에도 혼자이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실 때에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메고 갔다는 것이 참으로 마음 아픕니다. 베드로가 졌다든가, 아니면 죽었다가 나흘만에 살아난 나사로가 졌다던가, 혹은 문둥병을 치료받은 어느 환자가 와서 고마운 마음으로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것이라면 그런 대로 우리의 마음이 그토록 아프지는 않겠습니다. 엉뚱하게도 구레네 시몬이라는 사람이 십자가를 집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 계신 곳에 제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능력도 체험하지 못했고, 그 사랑도 그 기쁨도 그 영생도 현장에서 함께 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썩어지는 밀알의 이치를 다시한번 생각해보십시다. 한 알의 밀이 그대로 있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땅에 떨어져 죽어 썩으면 밀은 열매를 맺습니다. 여러분, 깨끗이 미련 없이 내가 남을 위하여 죽어질 때에 나도 살고 남도 산다는 이 행복의 이치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예수님과 함께 죽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이 엄청난 역사를 이룹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제자라는 말이 열두 제자를 가리킵니다마는 사도행전에서부터는 제자라는 말이 전 기독교인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쓰입니다. 지식의 문제나, 감정의 문제나, 고백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현장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이며 이론적이며 추상적인 이야기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예수님 계신 곳에 있고, 예수님 죽으신 곳에서 죽어야 예수님 계신 하늘나라에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추상적인 철학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언젠가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땅에 떨어지지 않고 강에 떨어졌습니다. 비행기 문이 열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물에 떴습니다. 물 속에서 허우적거리는데 날은 저물고 겨울이어서 몸은 자꾸 얼어듭니다. 헬리콥터가 떠서 구출했습니다마는 불과 십여 명을 구출하고 무려 80명 가량이 그 자리에서 죽은 참사가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 있던 헬리콥터 조종사가 귀한 간증을 했습니다. 조종사가 허우적거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밧줄을 내려줍니다. 그것도 아무나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밧줄을 내리자 한 젊은 사람이 헤엄을 쳐서 밧줄을 잡더랍니다. 잡고 그대로 있었으면 살터인데 잡아 가지고는 옆에서 허우적거리는 다른 사람에게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끌어올립니다. 두 번째 밧줄도 또 그 젊은이가 잡아서 다른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다섯 사람을 살리고는 자신은 가라앉아 죽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자신은 죽은 것입니다. 밧줄은 내가 잡았습니다. 잡고만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그 밧줄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죽어간 이 크리스천을 우리는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무명의 그리스도인이요, 썩어지는 밀 알이었던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데이비드 리빙스턴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의 묘비에 유명한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6절의 말씀입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리빙스턴은 젊었을 때에 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이 성경을 깊이 명상하여 주님을 만나고 그는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보냅니다.
주님을 위하여 일생을 바쳤습니다. 그래서 그 묘비에 이 구절을 새겨놓은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이 있는데 저들도 인도해야 할 터인데'--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내가 있고, 주님 긍휼히 여기신 자를 내가 긍휼히 여기고, 주님 계신 현장에 내가 함께할 때에 거기서 주님을 만납니다. 내가 있는 곳에 주님 계시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주님께서 내 뜻에 따라오기를 바라지 마십시다.
이제는 내가 주님 계신 곳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나 자신을 위하여 내 가정을 위하여 이기적으로 살아왔습니까? 그만하십시다. 이제 더 이상 추구해봐도 별도리 없습니다. 더 얻을 것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멈추고 생각의 궤도를 수정하십시다. 이제는 남을 기쁘게, 나야 썩어지건 말건 나 아닌 누군가를 기쁘게 하며, 남을 위하여 한번 살아보십시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제물로 한번 바쳐보십시다. 분명코 그 안에서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은혜를 체험할 것입니다. 총체적 은혜를 경험할 것입니다. 영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행복은 바로 나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나 있는 곳에 저 하늘나라에 너희도 함께 있으리라.' 주님 계신 곳을 찾는 자가 주님나라의 영생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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