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깨닫지 못하는 사람(시편 49편 1절~20절)

by 【고동엽】 2023. 2. 22.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깨닫지 못하는 사람(시편 49편 1절~20절)


만민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물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묵상하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 에우는 환난의 날에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양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지어다.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습니다만 깨닫는 바가 적어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했고 그렇게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해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생을 끝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신문지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봅니다. 즉 행위의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그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렇게도 바보스러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결론은 한마디로 깨달음의 문제입니다. 안다는 것은 이성의 기능에 근거해서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지혜를 생산하는 것으로, 알고 느끼고 결단하는 종합적인 지식을 말합니다. 지식을 과거 지향적이라고 한다면, 지혜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교육학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지적인 것(Knowledge), 받아들이는 것(Acceptance), 그리고 실천하는 의지력(Practice)의 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지․정․의(知情意)가 합쳐진 그런 지식을 뜻합니다. 오늘의 복잡한 모든 문제가 알고 보면 깨달음이 부족한 데서 비롯한 그릇된 가치관 때문입니다. 무엇이 귀중한 것입니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로 사는 것입니까? 무엇이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입니까? 이 길이 죽는 길인지 사는 길인지도 모르고 그릇된 욕망으로 인하여 치닫는 어리석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깊은 이해가 없고 가치관이 결핍되고 미래적인 깨달음이 없어서입니다.
인간은 깨달음을 축적하면서 지혜를 얻어 오늘의 문명을 이룩했습니다.
야고보서 1 : 24에 보면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라는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쉽게 풀이하면 거울을 통하여 자기 얼굴 생김새를 보았는데 곧 잊어버렸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건망증이 심한 사람입니까? 거울을 보면서 이 얼굴을 씻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곧 잊어버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경험에서 오는 깊은 지식이므로 그렇게 쉽게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마음 문을 열고 뜻을 굽히고 고집을 버려 믿음으로 이해하면 깨달음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몽롱한 가운데서 경험한 것은 무효입니다. 생각과 경험이 합쳐지고 여기에 믿음이 플러스되어야 깨달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자녀 교육에 문제가 많다고들 합니다. 그 이유로는 오늘의 어머니들이 해산의 고통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란 정말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면하기 위해 제왕절개니 무통분만을 시도하는 것입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는 고통 없이 마취된 상태에서 아기들을 낳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어머니가 아니고 자식도 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통하여 생명의 소중함과 자녀의 소중함, 그리고 부모님의 고마움이 우러나는데, 이것이 없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된다는 이 사실까지도 의식 밖의 경험이기에 무효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마취 중의 경험은 경험이 아닙니다. 맑은 의식 상태에서 경험과 생각이 합치고 여기에 플러스 알파로 믿음과 사랑이 합쳐지면, 완전한 깨달음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은 전인적(全人的)인 것입니다.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으며, 매맞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경험이 없이는 돈 십원의 귀중함을 깨닫기란 쉬운 일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어느 분이 길을 가다가 지갑을 몽땅 잃어버렸답니다. 그래서 집으로 전화를 해야겠는데 20원이 없어 쩔쩔매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해 보았다는 것입니다. 잔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바쁜 걸음걸이를 멈추기가 귀찮아서 많은 사람들이 그냥 못들은 척하고 지나치곤 해서 20원을 얻는 데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제야 10원이 귀한 것을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대체로 잃어버린 다음에야 그 가치를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현재는 모르다가 과거사로 돌아간 다음에 그 가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은 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도 조금만 사정이 나아지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저 죽을 지경이 되어야 기도하고, 죽을 지경이 되어야 교회도 나오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제대로 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좀더 심한 사람은 죽은 다음에야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부자는 살아생전에 끝내 깨닫지 못하고 죽어 지옥에 떨어져서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서야 깨닫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믿었어야 했다고 지옥에서 깨닫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사실 지옥에까지 가서야 깨닫게 될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보고 압니까? 듣고 압니까? 아니면 죽을 지경이 되어야 압니까? 혹시 아직도 깨닫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지옥까지 가서 알게 될 것입니다. 깨달음의 시점이 어디며 어느 정도에서 깨닫는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경험에는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사람이 경험한 것을 듣고 보고 또한 책을 통하여서 전승으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 말씀도 들으면서 이 모든 사건을 내 사건 내 경험으로 깨닫게 되는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만약 이 깨달음이 없다면 기어이 그 모든 시련을 자신 스스로가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부분적으로 경험하고 전체를 압니다. 어떤 사람은 한번 경험하고 그리고 일생동안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즉 하나를 경험하고 전체의 경험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미련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특히 바로 왕을 보면 그 대표적인 예로, 열 가지나 되는 재앙을 다 받고서야 이스라엘 백성을 놓아주는 것을 봅니다. 웬만하면 눈치 있게 한두 가지 재앙에서 알아차려야지 어쩌자고 열 가지 재앙을 다 받고 나서야 손을 듭니까? 솔직히 말하면 그는 홍해를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을 쫓다가 그 곳에 빠져 죽었으니 열한 가지 재앙을 받은 셈입니다. 미련하게도 꼭 여기까지 왔어야 했습니까? 하나님이 양보하리라고 미련을 부렸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잘못되었다고 생각되면 빨리 돌이키는 용기가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를 볼 때마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미련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곧 깨닫게 됩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는 몇 가지나 매맞고 지금 여기까지 와있는지 자신이 더 잘 알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경험은 단회적입니다. 한 번이면 충분하고 두세 번이면 충분하지, 여기서 또 맞고 또 맞아야 하겠습니까? 이사야서 1:5이하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 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라고 간곡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에 여러 번 발을 담글 수는 있으나 같은 물에는 한 번밖에 담글 수 없습니다. 사건이 지나갑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사는 것도 한 번이요 죽음도 한 번이며 청춘도 한 번입니다. 즉 모든 사건이 단 일회적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경험을 결코 두 번 겪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간 다음에 후회한들 이제 무슨 소용입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강하게 말씀하시기를 깨달음이 없는 자는 멸망할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사실 짐승만도 못할 때도 많습니다. 저는 시골서 자랐는데 아버님께서 늘 말씀하시기를 소는 자기가 빠진 함정에 두 번 빠지는 법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한 번 잘못한 실수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련하게도 실수할 줄 알면서 번번히 가던 길을 또 가고 또 가서 마침내는 죽어야 끝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깨달음에 대해서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재물의 문제이고, 또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첫째, 재물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로서 은사입니다. 둘째, 재물은 기회입니다. 얻을 기회도 있지만 써야 할 기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써야 할 기회에 쓰지 못하면 그 재물은 나에게서 다른 곳으로 넘어가서 그 때는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하는 때가 오는 것입니다. 아무튼 재산이란 많든 적든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재물은 할 수 있게 하는 가능성이요 능력이며, 넷째, 자유하게 합니다. 내게 주어진 경제적인 여유만큼 나로 하여금 자유를 향유하게 해서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재물은 책임을 가지게 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그만큼 책임이 있고,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그만큼의 축복이기 이전에 책임이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혹시 가난합니까? 책임이 적습니다. 그러나 남보다 얼마간의 재산을 더 가졌다면 더 가진 만큼 책임이 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재산을 잘 관리하고 잘 써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가서 추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주변을 어지럽게 하는 문제들을 보십시다. 지나치게 많은 재산을 모으기만 했지 잘 쓰지 못하여, 그 책임을 신랄하게 추궁 당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하루 세 끼면 족한데, 쓸데없이 많이 가졌다가 망신당하는 것입니다. 소유한 재물만큼 무거운 책임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또한 재물은 악으로 기울어지는 큰 함정입니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황금흑사심(黃金黑邪心)을 말씀하셨고 청빈낙도(淸貧樂道)를 원했습니다. 그저 가난하면 마음이 깨끗하고 부하면 마음이 어지럽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옛날 이야기로만 돌리기에는 상당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로 인해 기울어지기 쉬운 악은 무엇입니까? 재산을 지나치게 신임하는 것입니다. 아니 필요 이상으로 그 능력을 믿으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극복해야 할 심리적 함정이 네 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귀족 심리 발동입니다. 돈이 있다고 귀족입니까? 사람들은 부하면 스스로 교양 있고 인격이 있다고 착각하기까지 합니다. 인격과 재산은 별개입니다. 나를 보고 남을 보듯이 재산과 그 인격은 완전히 별개입니다. 그러므로 부유하다고 귀족인 체하지 말고, 가난하다고 비굴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재물과 상관없이 고결한 자기 인격과 체통을 지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빠지기 쉬운 함정은 의인 심리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즉 돈이 있으면 스스로 의인인 양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모아서는 안 될 재산을 축적해 놓고는,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을 주셨다고 감사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욱 한심한 것은 이 돈을 모으면서 지은 죄들을 다 사함 받은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물론 의인에게 내리시는 부함도 있지만 악인에게도 부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부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고 가난하면 저주라도 받은 것처럼 잘못 알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셋째로 이기심이라는 함정입니다. 돈이란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가지려고 하는 이기심이 있어, 극복하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미주 여행을 하면서 긴 비행 시간 동안 4편의 영화를 보았는데, 공교롭게도 모두가 갱 영화였습니다. 그 내용은 하나같이 경찰과 불량배들과의 시이소 같은 싸움이었습니다. 불량배들은 은행을 털거나 보석 등을 훔치는 것까지는 모두가 합심하여 일을 잘 진행시키는데, 문제는 공정한 분배에서 꼭 말썽이었습니다. 서로 좀더 가지겠다는 이기심에서 드디어는 "서로를 죽이고 죽는 혈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한 자에게 큰 경고가 있습니다. 즉 분배를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면, 그것으로 인해 남도 망하고 나도 망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우상 심리가 있습니다. 즉 돈을 섬기고 자기는 돈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사실 알고 보면 돈이란 그렇게 귀한 것이 못 됩니다. 돈이 절대적인 것 같지만 돈처럼 시시하고 가치가 적은 것은 없습니다. 자,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 보십시다. 나에게 건강이 있고 명예가 있고 자식이 있고 그리고 재산이 있다고 합시다. 이 중에 만약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어느 것을 포기하겠습니까? 건강입니까? 자식입니까? 아니면 명예입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재산이 가장 시시한 것입니다. 재산이 가장 낮은 가치의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맨 꼭대기에 올라가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사에서 맨 마지막에 있어야 할 돈이 제일 위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웬일입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이 어려워지는 이유입니다. 돈은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여기에 안정이 있거나 영구적인 것은 더욱 아닙니다. 돈은 지극히 상대적이며 임시적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사는 정말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잠깐이면 지나가는 영화 장면처럼 금방 지나갑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깨달음의 문제는 죽음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 인간은 지금 죽음을 향하여 달리고 있습니다. 종말이 순간순간 가까워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나이가 50을 넘었다면 이제 욕심을 줄이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생각과 행동을 다듬어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 것인지 잘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지난날은 되는대로 살았더라도 이제부터 정신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지난날에는 후회할 일도 많습니다만 이제는 다시 후회할 일을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곧 떠나야 하므로 시행착오할 시간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비행기를 탈 때는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끝난다는 심정으로 말입니다.
우리들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과 정직함의 유산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떠나야 하고 요단 강을 건너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의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을 뵈올 것입니까? 욥은 말하기를 그는 내게 낯설지 않게 대할 것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그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리라"고 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주님을 뵈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멀어져 가는 세상을 아쉬워 말고 가까워 오는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주님 뵈올 준비를 해야 합니다. 송나라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희귀한 보석을 재상에게 뇌물로 진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재상에게 말하기를 "이 보석을 감정해 보니 대단히 희귀한 것이라 재상에게 바칩니다" 하며 보석을 내놓았습니다. 그 때 재상은 "그것이 소중한 보석이지만 내게도 귀한 보석이 있소. 그것은 탐심하지 않는 것이오. 그러니 내가 당신의 보석을 받는다면 그 순간 당신도 보석을 잃게 되고 나도 나의 보석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당신 보석은 당신이 가지고 내 보석은 내가 가지도록 해 주시오"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보석은 어떤 것입니까? 무엇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람은 존귀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같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특권이 주어졌습니다. 이제 죽음에 대하여 종말에 대하여 깨달아야 하는 시간이 왔습니다. 그리고 물질에 대한 새로운 정리도 있어야 하겠습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인간입니다.
한번 깨달았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다. 다시는 후회하지 않는 깨끗하고 정결한 신앙 생활로 하나님께 바르게 응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