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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 전도 대 헌신 예배
천직 의식
요한복음 6: 26-33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잡으려고 열심히 살고 애를 씁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패러다이스(낙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는 그곳을 타락 전의 에덴 동산이라고 합니다. 또 그곳을 성도들은 천국이라고도 합니다. 낙원이던 에덴 동산이던 천국이던 그곳은 살기 좋고 병이 없고 사랑이 충만하고 기쁨이 넘치는 곳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재미가 있는 놀이터 즉 에버랜드나 롯데 월드 같은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 동산을 사람에게 주실 때, 만물을 다스리고 주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면서 일을 주신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지 방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며,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개념을 분명히 파악하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좋은 환경, 좋은 음식, 좋은 삶의 조건들만이 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진실한 복의 개념은 그런데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복된 여건이 아니라 복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소유할 뿐 아니라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복으로 알아 소유하고 즐기는 데 의의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의 본능과 복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식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본능을 말합니다. 먹고 싶다는 것-그것은 생의 욕구입니다. 살아 있는 증거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식욕이 떨어지면 큰 일입니다. 그런데 식욕은 입맛에 좌우됩니다. 음식의 맛보다 입맛이 더 식욕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식욕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오는 하나님의 생리적인 축복입니다. 열심히 일하지 않아 식욕이 떨어진 사람에게는 진수성찬이 좋은 음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옛날 장작불을 떼는 난로 앞에 이런 글을 새겨 놓았다고 합니다. ‘장작을 몸소 패면 겹으로 더워진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마태복음 4장에서는 예수님이 40일간 굶주리시고 시험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단은 예수님에게 돌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합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고 합니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줄 테니 나를 경배하라 합니다.
사단이 예수님에게 시험하는 모든 유혹의 숨겨진 비밀은 ‘지름 길’입니다. 사람이 노력을 하고 일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소중하고 값진 것들을 일하지 않고 노력 없이 쉽게 얻도록 유혹을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넘어진 시험도 이런 지름길의 시험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과일 하나 따먹고 하나님과 같아 질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시험을 받고 삽니까? 우리들도 얼마나 이런 시험을 받고 삽니까? 힘들지 않고 돈을 버는 방법, 힘들지 않게 좋은 학교를 진학하는 방법, 힘들지 않고 높은 지위에 올라가는 방법을 연구하고 추구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정신을 파는 그것이 우리들이 당하는 마귀의 시험입니다.
사람은 일을 해야 하고 그 일들을 통해 살고,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될 수 있습니다. 생업, 직업, 천직이 그렇습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이 세 가지를 구분할 수 있을 것입니까?
첫째, 생업이란 문자 그대로 살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여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와 처자식이 먹고살아야 되겠으니 일을 하는 것입니다. 생존을 위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실 비참한 사람입니다. 그 사회의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하는 빈자들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인 버나드 쇼는 ‘세상에서 가장 바보스러운 사람은 자기 직업을 의무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무 때문에 일을 하는 사람은 괴롭고 따분한 사람입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 직장에서 책임을 진 일 때문에 할 수 없이 하는 일,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 우리들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고 피곤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창조성이 없고 출근 시간에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 같습니다. 5분전에 도착하면 좋은 것을 5분 후에 도착하느라 뛰고 달립니다. 오후 3시만 되면 퇴근 준비를 합니다. 정해진 시간 봉사를 고집하면서 그것이 가장 정직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왜 직장에 나가지 하는 생각이 들고, 가족들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한다고 생각하니 가족들이 짐스러워집니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집에 들어오면 짜증이 나고, 삶의 회의에 시달리면서 좋은 날 나쁜 기분으로 삽니다.
둘째, 직업이라는 일 자체를 즐기며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 혹시 이 일 아니면 할 일이 없나, 아이고 힘들어, 너무 어려워---하고 고개를 흔들어 보신 일은 없습니까? 일을 하다가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불평은 말아야 합니다. 일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힘이 들어 직장에 휴가를 받아 시원한 바닷바람이 부는 동해안이라도 갈라치면 얼마나 기분이 상쾌합니까? 그러나 그곳에서 일주일을 지나고 일없이 한 달을 살아 보십시오.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일없이 빈둥거리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알게 됩니다. 정년 퇴직을 하고 집에 들어앉으신 어른들을 만나 보십시오. 얼마나 괴로움이 많은지---- 월급을 조금만 주던지 식사만 주어도 일을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고, 누어 있으면 허리가 아프고, 자식들 눈치 보이고 월급이야 많던 적던 시간 마쳐 출근하고 일한다는 그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나도 빨리 나아서 퇴원하여 열심히 일을 하겠다고 합니다. 임종을 당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해야 할 일을 다 못하고 간다고 합니다. 수입이 많고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일한다는 것이 곳 그 일에 보상입니다. 일 자체가 소중하고 보람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일을 할 때는 잘 모르고 있다가 일 자리를 잃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더욱이 그 일이 자기 적성에 맡고, 전문적이고, 수입이 적당하면 금상첨화 격입니다.
처칠은 평생 정치를 한 사람입니다. 피카소는 그림을 그린 사람입니다. 토스카니니는 평생 음악을 한 사람입니다. 세 사람 다 아흔이 넘도록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따로 휴식 시간을 가지거나 레저를 한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건강하게 일하고 장수하고 인생을 보람있게 살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에게는 일 자체가 레크레이션이고 여가고 휴식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칠은 남달리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고난을 많이 격은 사람입니다. 그는 2차 대전을 치르고 그것을 승리로 이끌어 그 나라를 구해야 하는 막강한 책임을 졌습니다. 그는 영국의 수상직에 올라 不撤晝夜 그 어려운 일들을 감당하여 마침내 그의 조국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수상직에서 물러났을 때 돈이 없어서 사글세로 이 집 저 집을 전전긍긍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한번도 돈에 마음을 쓴 일이 없었으며 돈을 벌기 위해 정치를 한 사람이 아니 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고향 작은 예배당의 뜰에 비석 하나도 없이 안장이 되었습니다. 직업이란 바로 이런 것이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퇴직 후에 남은 것이 없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닌데 어떻게 돈이 있겠습니까?
발명왕 에디슨은 18시간을 일을 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일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하루도 일하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나 모든 일을 오직 재미로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셋째, 천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축복이요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일을 이루신다는 신념을 가진 일, 믿음으로 하는 일들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 전도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 많은 한 여자가 중생 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을 보시면서 식사하시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즐겨 하시던 일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천직을 발견한 사람이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천직 말고 다른 복은 내게 묻지 말라’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 이상의 좋은 직업을 없습니다.
우리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의사가 천직 의식을 가지고, 교사가 천직 의식을 가지고, 목사가 천직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 직업만이 천직은 아닙니다. 사업을 하던, 어떤 다른 직업을 가지던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고 이 세상을 밝히는 기쁨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천직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요리사는 요리는 하나의 예술이며, 그 예술을 즐긴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천직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누구에게나 천직 한가지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천직 의식이 아주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죄인 괴수였던 자기에게 전도자의 직분을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예수님을 전하게 된 것에 대한 넘치는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달리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감옥에 갇혀도 감사하고 핍박을 당해도 감사하고 죽어도 감사합니다. 삶의 여한이 없습니다. 만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달려 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하나님의 상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전도자의 사명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 일을 천직으로 마끼신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 그것은 매우 신령하고 은혜로운 축복입니다.
천직 의식이 뚜렷한 사람에게는 짜증, 스트레스, 권태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자리를 잡을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는 이유가 죽을 이유보다 더 분명해야 합니다. 의와 봉사는 힘겨운 의무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무라는 말만 들어도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하나님을 위한 의무, 천직을 위한 헌신에는 사실 기쁨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가 결코 굴욕적인 패배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한 헌신과 희생이 값싼 희생이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시작이요 일은 우리 생의 지속입니다. 믿음은 안이요 일은 곁입니다. 믿음은 동기며 일은 결과입니다. 믿음은 뿌리요 일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까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확실히 믿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그 일을 잘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준 일을 천직이라고 합니다. 그 하늘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것이 무엇이던 다 성직입니다. 그리고 천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천직 의식을 잃고 살면 세상 사람과 다름이 없는 힘없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내 일의 목적이 거기에 있고, 내 일의 결과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즐거움, 현재의 배부름을 위하여 일하지 마십시오. 일 자체를 복되게 여기고 분명한 목적과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해 보십시오. 전도를 해 보십시오.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를 하십시오. 여러분들에게 천직에 충성하는 사람들의 기쁨과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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