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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스-현재 고난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by 【고동엽】 2008. 5. 29.
 

현재 고난은 장래에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6권4장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18-23)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바 고난과 시련과 환난과 고통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있다.

첫째,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현세’와 ‘나타날’ 오는 세대로 바울이 구분하는 시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였다. 현재의 고난과 고통과 난제들을 가지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전체 세계에 나타나게 될 이 영광스러운 상태에 비추어 살펴보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 ‘생각함’의 과정을 실천에 옮김으로써만이 기독교의 위안과 위로를 즐길 수 있다.

 

둘째, “비교할 수 없도다” - 이 구절은 가치와 값을 가리키는 문구이다. 어떤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할 때, 전혀 무게를 지니지 못한 것이 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아무리 여러분이 지금 감당하고 있는 고난의 짐이 무겁다 할지라도 장차 여러분의 것이 될 영광의 무게와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전형적인 기독교의 방식이다. 고난을 받을 때, 세상은 “힘내라 곧 잘 될꺼야”라고 말을 하나 그것은 하등에 도움을 주지 않는다. 이단들의 방식도 마찬가지이다. 이단들은 마약과 같이 이 무게를 실제보다 가볍게 보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그 문제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사실에 대한 자기의 반응을 변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일종의 어리석은 자의 낙원 속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고난의 실제적인 성질이나 구체적인 성격을 극소화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이 무서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추어 볼 때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본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실제적으로 고통의 진상 그대로를 대처하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알라. 그런 다음에 더 이상 그것이 참아낼 수 없이 무섭다고 느껴질 때, 다른 쪽을 보라. 나타날 영광을 보라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것에 대한 바른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오직 유일한 한 가지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자기의 고난이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과 비교할 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위안을 주는 기독교 방식의 진수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고난을 받아야 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세우신 터를 가진 한 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세의 비결은 ‘보상의 상급에 두었으며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더 좋게 여기는’ 그것이었다.

우리 주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의 고뇌와 수치와 고난을 당하시도록 한 것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이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들이 확신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 주의를 집중시켜야 하는 것은 장차 올 영광의 지극히 큼에 대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활을 좌우하는 교리이다. 삶 속에서 ‘넉넉히 이기게’ 되는 방식은 그것 밖에 없다.

 

셋째, 주요한 교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설명이다. 진화를 말하던 사람들은 오늘날을 설명할 수 없다. 바울이 여기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다. 첫 번째 진술은 모든 피조 세계가 장차 올 이 영광을 고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진술은 어째서 전체 피조물이 그런 식으로 고대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라” - ‘피조물’은 비이성적인 피조물인 동물, 식물, 땅, 하늘, 눈에 보는 것들을 의미하며, 사도는 이 비이성적인 피조물들을 의인화시켜 말하고 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이 창조의 부분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매우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 영광은 너무나도 커서 모든 피조물들이 목을 길게 빼고 그것을 갈망하며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그것을 이렇게 고대하는 것은 피조물의 운명이 사람의 운명과 불가분해적인 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가 피조물의 현재 상태를 가져왔다. 20절에서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한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사람의 타락으로 피조물 전체가 무익하거나 쓸데없는 것, 허무한 데에 복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1절에서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고 말함으로써 더욱 잘 설명해 준다. 피조물은 썩어져 가고 있고 사망과 멸망에 굴복하여 있다. 바울은 피조물 그 자체로서는 부패와 자기 속에 있는 썩어지는 요소를 제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를 구분하는 요점들 중에 하나를 대하게 된다. 비그리스도인은 인생을 바라보고 “인생은 아름답지 않은가!”라고 말하는 피상적인 관점을 취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더 깊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세상에 나오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세상을 빠져 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첫 번째 호흡이 마지막 호흡과 연관되어 있다.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 그것은 안개와 같으니라”. 모든 것이 부패하여 가고 있다. 그것은 어느 시점에 “굴복케” 되었다.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땅과 피조물이 인간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창3:17-19) 피조물은 이러한 결과를 낼만한 하등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을 가져 오게 한 것은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만물의 영장’이 되게 하였고 ‘만물의 주가 타락했을 때’ 그의 당하는 형벌의 일부가 그가 영장 노릇을 하던피조물에게 주어져 허무한 데 굴복하게 되고 썩어짐에 종노릇을 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라고 조성해준 낙원을 누리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사도는 이제 하나님의 계획 속에 긍정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려 한다. 그것이 바로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열심히 기대하며, 열렬한 기대감을 가지고 목을 빼고 기다리고 있는”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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