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인 명설교편◑/김동호목사 명설교 (155편)

쓴 나물을 먹으라 출12:7~8

by 【고동엽】 2013. 3. 30.

쓴 나물을 먹으라          출12:7~8    

 

출12:7~8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밤에 그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되’

 

‘무교병’은 효소의 역할을 하는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죠.

이것은 누룩으로 부풀릴 시간조차도 없는 첫 유월절의 긴박한 상황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누룩은 죄와 옛생활의 상징이기 때문에(고전5:5-7),

무교병은 구속받은 거룩한 자가 먹을 신령한 음식을 상징합니다.

 

‘쓴 나물’ - 원문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식물인지는 밝히지 않고

단순히 '쓴 것'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나 분명 이것은 애굽의 쓰라린 생활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먹을때마다 애굽의 쓰라린 옛 생활을 겸손히 돌아보고

그곳으로부터 피흘려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라는 뜻이죠.(신5:15, 15:15).

 

‘아울러 먹되’ 쓴 나물의 쓴맛은 어린 양의 달콤한 고기와 중화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이는 우리의 고난스런 삶을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사역에 대비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사52:4-6, 마11:28).

 

.........................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학질이라는 열병이 유행했습니다.

이 병을 하루거리라고도 했는데 그것은 하루걸러 고열이 났기 때문입니다.

이 병이 들면 꼭 먹어야 하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을 키니네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 약의 이름은 키니네(Quinine)라고 하는 약인데 얼마나 쓴지

아이들이 아무리 아차도 이 약을 먹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 약을 먹어야 병이 났겠는데 먹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떤 엄마는 큰 눈깔사탕을

보여주면서.. 약을 먹으면 이 사탕을 주겠다고 달래기도 합니다.

 

영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이 잘되고 신앙의 연단을 주기 위해서

쓰디쓴 약을 먹이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출12:5~10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해서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나기 전에,

1년 된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는 대문에 바르고 고기는 불에 구워 먹되

쓴 나물도 아울러 먹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부드럽고 맛있는 고기만 먹지 말고

반드시 쓴 나물을 사이사이에 먹어 가면서, 고기를 먹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를 잘 아시기 때문에

달콤한 것만 주시지 않고 때로는 쓰디쓴 것을 먹으라고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요즘 21세기에는 장을 튼튼하게 하려면 쓴 나물을 먹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쓴 나물을 반찬으로 만들어 먹는데요,

물론 성경에 쓴나물을 함께 먹으라는 뜻은, 장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부수적 효과도 있다는 거죠.)

 

하나님께서 쓴 나물을 먹이실 때는 괴로워도 그것을 먹어야 우리에게 유익하고,

키니네 먹은 후 왕 사탕을 물려주듯이 달콤하고 수지 맞는 큰 축복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달콤한 것만 주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닙니다.

반드시 쓴 나물을 먹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아는 치과의사는 아이들에게

초콜릿을 절대로 먹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치아가 상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달콤한 은혜만 주시는 법이 없고,

수지맞는 일만 생기게 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신다면 그 사람을 축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영육간에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약 성경의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람이고,

삼층천에 올라가 하나님의 음성을 친히 듣고 내려온 사람인데,

하나님은 그에게 사탄의 찌르는 가시를 주셔서 늘 고통을 받으며 괴로워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제거해 달라고 3번이나 특별 기도를 드렸으나 하나님이 고처 주시지 않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 응답에 대하여 사도는 너무 큰 은혜를 받고

그 말씀을 이렇게 선히 해석을 하여 잘 받아들였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 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시려고 이 가시를 뽑아 주시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기가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한 은혜로운 해석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귀하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쓴 나물을 더 많이 먹이시는 것입니다그래야 건강해지니까요.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모양으로

쓴 나물을 먹이시든지 뱉어 버리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아먹고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1. 말씀의 쓴 나물을 먹어야 합니다.

 

계10:9절에, 천사가 사도요한에게 작은 두루마리 책을 갖다 주며 받아먹으라고 했습니다.

받아먹으니까 "내 입에는 꿀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을 때는 꿀같이 달고 맛이 있지만,

이 말씀을 깨달은 대로 내 생활에 실천해 옮기려면 쓰디쓴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말씀의 쓴맛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덜된 신자요, 성숙되지 못한 신자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 말씀을 어떤 고통이 오고 손해가 와도

말씀대로 실천해 옮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려고 하실 때

너무 너무 고통스러운 쓴잔이므로 밤새도록 기도하시며

그 쓴잔이 물러가게 해 달라고 하셨지만,

나중에는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십자가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달콤해 보이는 선악과를 따먹으므로

죄와 멸망을 끌어 들였지만, 제2의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십자가의 쓴잔을 받아 마심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가져 왔습니다.

 

말씀의 쓴맛을 날마다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일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쓴 말씀에 고민이 없이 어떻게 영혼의 병이 치유되겠으며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일로 자책감이 없이 어떻게 성도라 할 수 있겠습니까?

 

▲2. 징계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이 불순종하고 곁길로 갈 때에는 사랑의 채찍으로 때립니다.

 

무섭게 때릴 때가 있고 약하게 때릴 때가 있습니다.

물질,질병,교통사고, 재난으로, 또 자식을 통해서 때리실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리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요,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일 수가 있습니다.

 

히12:5절 이하에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11절에는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안한 열매를 맺나니"라고 했습니다.

징계의 쓴 나물을 감사히 받아 먹고 회개하면 달콤한 축복의 열매를 먹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계의 쓴 나물을 먹여서 깨닫게 하십니다.

모든 고통과 슬픔을 우연으로 돌리거나 도리어 하나님을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으로 알고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욥기 5:17절로부터 보면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 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신다"고 하셨습니다.

 

▲3. 수치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과 칭찬만 받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수치도 당하게 합니다.

쓰디쓴 욕도 먹게 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30-33절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뺨을 때리시며,

수치를 당하게도 하시는 때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때리는 자에게 뺨을 향하여 수욕으로 배불릴지어다.

이는 주께서 영원토록 버리지 않으실 것임이며 저가 비록 근심케 하시나

그 풍부한 자비대로 긍휼이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 시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뺨을 때릴 때는 실컷 맞고, 망신을 주고 수치를 당하게 하실 때는,

아무 변명이 불평하지 말고 실컷 당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이 그 풍부한 자비대로 갚아 주시는 때가 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높이실 때가 있는가 하면 낮추실 때가 있고,

낮추실 때가 있는가 하면 높이실 때가 있습니다.

언제나 높여 주시지만 않고, 또 언제나 낮추시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자만하고 우쭐하고 교만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 억울하게 욕을 먹고 핍박을 받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모두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축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5장11-12절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1장 7-8절에는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옥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도록 노력하면 됩니다.

사람들의 비방이나 훼방에 지나치게 반응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4. 환난의 쓴 나물도 먹어야 합니다.

언제나 맑게 개인 하늘만 계속되면 기분은 좋을는지 모르지만,

나무도 자랄 수 없고 농사도 지을 수 없고 이 세상은 사막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생활에도 기분 좋은 일이나 평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쓰디쓴 고난과 환난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온실 안의 꽃처럼 만들기 원치 않습니다.

때때로 환난도 당하고 슬픔도 당하고 고통도 당하게 합니다.

 

언제나 성공과 승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도 있고 낭패도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끊게도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난공불락의 큰 여리고 성도 함락시켰는데,

조그마한 아이성 싸움에서 실패하여 크게 혼난 적이 있습니다.

 

불의 사자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과 대결해서 갈멜 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는데,

아합의 아내 이세벨 한 여자의 공갈 협박에 낙심하여 도망치다가

로뎀나무 아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까지 요청하는 신세로 전락하기도 했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칭찬을 듣고 홍수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으나,

후에 포도주에 취해서 하체를 드러내 놓고 큰 망신을 하고 수치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늘 승리와 성공의 삶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과정으로 보고 인내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 45:7절에 "나는 빛도 짖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짖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통의 쓴 나물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고난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는데

-감당치 못할 고난과 시험은 없는 것과,

-고난과 시험 뒤에는 큰 축복이 있다는 것과,

-모든 고난은 합동하여 유익하게 해 주신 것입니다.

 

............

 

▲히12: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개역에 ‘징계’로 번역했는데, ‘훈육’이 더 좋은 번역입니다.

 

그런데 이 히브리서 말씀에 대해 저는 이렇게 다시 반문하고 싶습니다.

‘히브리서여, 아버지의 훈육을 아들이 받는 것을 당연한 듯 얘기하는데

훈육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실제로 얼마나 됩니까?’

 

실로 우리는 아버지의 훈육(‘징계의 본래 뜻)을 책망으로만 여기고

시련을 벌로만 여길 뿐

훈육 discipline 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또한 윗사람으로부터

별로 책망을 많이 받지 않았고

시련도 많이 받지도 않았지만

그 책망이나 시련을 징벌 (처벌 punishment) 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이가 점점 들어가면서

저는 충고나 책망을 오히려 많이 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 되었지요.

 

그래서일까, 저의 훈육을 훈육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충고를 충고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이 책망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볼 때

왜 그렇게밖에 못할까 많이 안타까워하게 됩니다.

 

그게 뭐든지, 사람들은

다 미움 때문에 주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사랑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합니다.

 

그런데 지도자는 몰라도, 어찌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할까요?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준다는 것을 알거늘

어찌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나쁘고 해로운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입니까?

 

도저히 그럴 수 없는 것인데

그럼에도 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경험의 왜곡> 때문입니다.

 

우리 또는 우리의 아버지가 정말 독선적으로 책망하거나

홧김에 할 말 못할 말을 퍼붓거나 한 경험이 있었다면,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사랑으로 하셨겠지만

그 사랑에 약간의 분노가 불순물처럼 있었다면)

그 과거의 쓴 경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그럴 거라고... 오해를 하기 쉽지요.

 

무서운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하나님도 무서운 분,

벌주시는 분으로만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지금 이 시간 ‘육신의 아버지’는 예로 든 것이고,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영적 지도자’의 경우입니다.

 

그러니 우리 영적 지도자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하고

우리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 각자의 언행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왜곡하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하나님의 참 사랑을 전달해 주기도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전달자입니까, 왜곡자입니까?

 

신자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가끔이라도 진심어린 충고를 해 줄 때도 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 사랑의 왜곡자로 규정하는 일이 없도록

특히 충고하고책망할 때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도록.. 성령님의 인도를 구해야 하겠습니다.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