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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설교 2,345편◑/설날설교 07편

고향 가는 길 (히11:13~16)

by 【고동엽】 2024. 12. 14.

고향 가는 길  (히11:13~16)

설날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성급한 귀성객들은 벌써 고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아직은 길이 붐비지 않지만 이제 공식적인 설 연휴가 시작되면 전국의 도로는 귀성 인파로 북새통이 될 겁니다. 항상 그렇듯이 귀성길은 고생길입니다. 그 고생이 하도 심해서 귀성전쟁이란 표현까지 씁니다. 그래도 고향 가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한결같이 환합니다. 그만큼 고향은 좋은 것이고,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명절이 되도 고향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실향민입니다. 남북이 분단된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나 많은 실향민들이 있습니까? 그 고통은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겁니다. 명절 때가 되면 그 고통이 심해져 하다못해 임진각에 가서라도, 혹은 금강산에 가서라도 아픈 마음을 달래야 되는 분들도 많습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이런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탈북한 청년인데 얼마나 고향이 그리운지 한 밤중에도 벌떡 일어나 엉엉 울 때가 많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참 이상합니다. 거기서 살기가 너무 힘들어 목숨 걸고 탈출했는데, 여전히 그곳을 그토록 그리워하다니! 이게 바로 인간의 심성에 아로새겨진 귀소본능일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성경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 고향 외에 또 하나의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고향도 있지만, 그보다 ‘더 좋은 고향’이 따로 있다는 말씀입니다. 16절 보면 ‘더 나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에게는 땅 위의 고향도 있지만 동시에 하늘 위의 고향도 있다는 것입니다. 땅 위의 고향은 육신의 고향이고, 하늘의 고향은 영혼의 고향입니다.

  흔히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은 불행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불행한 사람은 이 땅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더 좋은 고향’ 천국을 잃어버린 ‘영적인 실향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땅의 고향은 언젠가는 떠나야 하고, 또한 사라지고 말 겁니다. 오직 하늘나라만이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고향보다 하늘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불쌍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혼의 고향을 갖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인 줄 알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 중에 몇 분이라도 아직 영혼의 고향을 발견하지 못한 분이 계십니까?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 꼭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적인 실향민이 아니라, 영혼의 고향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복된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더 좋은 고향을 가진 사람들 : 믿음의 사람들    

  잘 아시는 대로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 장(章)이라 부릅니다. 여기 보면 수많은 믿음의 조상들이 등장합니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 이들은 하늘나라를 영원한 고향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그 중에 13절의 ‘이 사람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물론 그들 모두가 동일한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문맥을 살펴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들을 가리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천국에 있는 더 좋은 고향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다가, 그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혹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고 상관없다는 듯 무관심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육신을 위해서는 이 세상이 전부이지만, 인간의 영혼은 불멸입니다. 죽음 너머 내세로 들어가 영원히 존재합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내세가 한 군데가 아니고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진다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를 아주 쉽게 생각합니다. 증명할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어렵다는 이유로 무심하게 넘겨 버립니다. 물론 인간의 지각에 한계가 있으므로 증명하기도 어렵고, 쉽게 믿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염두에 둔다면 그렇게 쉽게 지나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천국을 증거하는 사람들의 증언을 곰곰이 생각하고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신뢰할 만하다 싶으면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믿음이죠.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마르코 폴로(이탈리아의 상인, 여행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13~14세기 사람인데, 당시 유럽인들은 동양에 대해 전혀 무지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몽골, 중국 등을 무려 20년 이상 여행했습니다. 특히 중국에서는 17년간 거주하면서 여러 가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체험담을 기록한 것이 유명한 「동방견문록」입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신기한 이야기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진실성에 의문을 가졌고 합당한 호응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늙어 임종이 가까워지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 중 몇이 호기심을 갖고 묻습니다. 그 책에 있는 내용이 정말 사실이냐 이겁니다. 혹시 상상으로 쓴 픽션이 아니냐는 겁니다. 죽기 전에 진실을 밝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마르코 폴로는 답답한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답니다. “아닐세. 내가 책에 쓴 것은 전부 진실일세. 오히려 그 내용은 내가 보고 경험한 것의 절반도 안 되지.”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보고 경험하지 못한 것은 없다고 착각합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못한 것도 얼마든지 존재합니다. 우리가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은 우주만물 가운데 눈곱 만큼도 안 됩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남들이 보고 겪은 것을 듣고 믿음으로써 그 존재를 받아들입니다. 천국도 마찬가지 그곳을 보고 경험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에 계시다가 이 세상에 사람의 모습으로 와서 천국을 증거하신 분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그 증언을 믿고 목숨 바쳐 증거했습니다. 그만큼 확실하다는 겁니다. 특히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천국의 광경을 본 후 요한계시록을 썼습니다. 말하자면 ‘천국견문록’인 셈입니다.

  그 중에 천국에 대해 자세히 묘사한 부분을 인용해 봅니다. 계21:1~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2:1~5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말씀은 천국의 몇천만분지 일도 안 되는 내용일 겁니다. 그 증거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직접 가보지 않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지만 목격자, 경험자의 증언이 있기에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부디 더 좋은 고향 천국을 믿음으로 소유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에게도 천국 복음을 증거하여 함께 더 좋은 고향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2] 더 좋은 고향으로 가는 유일한 길 : 예수 그리스도


  지상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돌아가는 길도 있고 샛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고향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그 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3절 보면 구약의 족장들도 그 길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갔음을 증거합니다. “ ...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 ”그 약속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믿음의 족장들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나의 때’는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 구원 등을 가리킵니다. 즉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 가운데 메시야가 오셔서 천하 만민에게 복을 줄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희미하게 바라보았으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 그는 천국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 후 아브라함과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서도 그분이 유일한 길 되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전에 제자들이 분위기가 이상한 것을 예감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근심하지 말라며 하신 말씀입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 ‘아버지 집’은 천국을 가리킵니다. 그곳에 예비할 처소는 천국의 거주지를 의미합니다. 그곳으로 가는 길이 곧 예수님 자신이라는 겁니다. 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헬라어 원문을 보면 ‘길’이란 단어 앞에 유일성을 나타내는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이냐 이겁니다.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고 우깁니다. 다수가 그러니까 그런 말들이 옳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다수결이 무조건 옳은 줄 압니다. 만장일치는 마치 절대 진리처럼 신봉합니다. 그거야말로 착각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이 아닙니다. 소수가 지지해도 진리를 항상 진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만장일치로 망한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이 바로 그겁니다. 당시 사람들이 일치단결해서 성을 쌓고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의 악한 마음을 보시고 바벨탑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언어도 혼잡해집니다. 사람들이 일치해서 주장해도 진리가 아닌 것은 무너지게 됩니다.

  천국에 이르는 길은 누가 뭐래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환영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그러므로 아무리 힘들어도 오직 예수 신앙으로 더 좋은 고향 천국에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3] 더 좋은 고향을 향한 인생 여정 : 천국 사모하는 나그네 인생

  우리에게 천국 고향이 있고, 언제라도 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일정 기간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의 수명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인생 여정을 걸어가게 됩니다. 행선지는 물론 천국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지상 생애는 천국을 향한 나그네 인생인 것입니다.


  ①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 :

  믿음의 족장들이 보여준 인생의 모델이 바로 나그네 인생입니다. 본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입니다. 그것을 떠난 가나안 땅으로 간 아브라함은 계속 이동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아갑니다. 가나안 땅은 타향이요 객지입니다. 가나안 땅에 와서도 묘지로 구입한 막벨라 굴 외에는 땅 한 평도 갖지 못했습니다. 행7:5에서 이를 증거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 ” 이처럼 족장들에게 현실적으로 땅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더불어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그들의 장막 생활입니다. 히11:9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와 같은 장막 생활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히11:10에 나옵니다.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하나님이 정말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시고 싶으셨던 것은 가나안 땅도 아니고, 이 세상의 부와 축복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갈대아 우르에서 나오게 한 것부터가 모순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영원한 도성, 천국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은 이 세상에 정착하지 않고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13절~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그런데 본향 천국을 향하는 그들의 마음이 각별했습니다. 16절. “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 ” 여기서 ‘사모하다’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 말은 성경 원어 헬라어로 ‘오레고’인데, ‘(~을 얻으려고) 손을 내뻗다’ ‘열망하다’ 등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을 향해 열망한 나머지 마음을 세상에 두지 않고 천국에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3:20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 ” 어제 뉴스 앵커가 귀성길을 소개하면서 이런 멘트를 하더군요. “귀성객들의 마음은 벌써 고향에 가 있습니다!” 바로 이게 천국을 향해 가는 나그네의 인생 모습입니다.


  ② 나그네 인생 여정에 지킬 사항 :


  나그네 인생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사항을 지켜야 합니다. 그럴 때 나그네 인생 여정이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i) 거룩한 삶 : 나그네는 이 세상 소속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기오스’인데 ‘구별되다’ ‘분별되다’ ‘다르다’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라는 겁니다. 무조건 다르게 살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닮은 모습으로 살라는 것이죠. 말하자면 세상의 사악한 풍조에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물고기를 생각해 보십시오. 짠 바닷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 짠 물에 절여지지 않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산소와 양분을 섭취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물고기는 짠 바닷물에 절여집니다. 천국을 향한 나그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얻었기에 세상의 죄악을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2:11-12 말씀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겁니다. 또 벧전4:2~3 말씀을 보십시오.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예수 믿기 전 지난 때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마5:13~16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겁니다. 죄악 세상 속에서 우리가 착한 행실로 살아갈 때 세상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등 족장들은 그들의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습니다. 창23:6 보면, 헷 족속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하나님의 방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ii) 단순한 삶 : 나그네는 여행자입니다. 지혜로운 여행자는 짐을 최대한 줄입니다. 짐이 많으면 여행의 즐거움이 반감됩니다. 간수하느라 신경도 쓰이고 여행의 재미를 놓치기 일쑤입니다. 인생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소유에 대해 너무 집착하면 세상 근심으로 괴로워지고, 천국 가는 길에 방해를 받습니다.


  롯의 처를 아시죠? 그는 소돔성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때 천사의 지시로 황급하게 빠져나옵니다. 그런데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중도에 소금 기둥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가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까? 두고 온 짐이 많아서 그런 거죠. 재물도 있고, 향락도 있고, ... 여러분, 세상에는 정말 우리를 마취시키는 게 너무 너무 많습니다. 부귀와 영화, 향락 등 ... 자칫 잘못하면 이런 데 빠져 정신을 못 차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버리는 연습, 떠나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세상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생활의 군살 빼기, 마음의 욕심을 버리는 심령의 다이어트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천국의 기쁨과 평안이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면 환경과 관계없이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이 곧 바울이 말했던 자족의 비결입니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iii) 인내하는 삶 : 나그네는 또한 외국인입니다. 요즘도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 사회에서는 정말 어려웠습니다. 외국인을 학대하는 일이 흔했고, 외국인은 대개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신분 보장도 되지 않아 노예보다 나을 게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별도의 세금이 부과되고, 식당에서 따로 앉히는 일도 있었고, 심한 경우 낙인을 찍어 놓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불편함과 조롱을 감수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이므로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대우받고, 여기서 편안한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기쁨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핍박 등이 있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어야 합니다. 아마 천국 가는 그날까지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고 천국을 바라보는 소망이 있기에 우리는 인내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iv) 최선의 삶 : 나그네 인생은 지나가는 삶입니다. 아주 짧습니다. 그러므로 기회를 선용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물, 시간, 건강, 재능 등은 우리의 인생 여정 중에 최선을 다해 선용해야 됩니다. 그 중에 어느 것도 갖고 갈 수 없습니다. 가지고 간다 해도 그런 것들은 천국에서 쓸 데 없는 것들입니다. 세상의 최고는 천국의 최저보다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 있을 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선한 목적을 위해 선용하는 것이 지혜로운 태도입니다.  


  한 부자가 임종이 가까워지자 고민이 됐습니다. 재물이 많은데 갖고 갈 수 없으니 속이 상했던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조금만이라도 갖고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천사가 나타나 안 된다고 통보합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 계속 졸라대듯이 기도합니다. 그러자 천사가 다시 나타납니다. 하도 졸라서 허락을 하기는 하는데, 여행 가방 한 개만 갖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감지덕지해서 그는 가장 큰 가방을 구합니다. 그리고 가방 속을 순금 금고로 가득 채웁니다. 임종을 앞두고 침상 곁에 그것을 잘 두고 누워 있다가 마침내 죽었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렀는데, 베드로가 정문에서 제지합니다. 가방을 갖고 들어 갈 수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확인해 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안으로 들어가서 확인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확인됐소. 하지만 뭐가 들었는지 짐 검사를 해봐야겠소.” 가방을 열어본 베드로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흔해 터진 보도 불록을 무겁게 왜 갖고 왔소?”


  물론 지어낸 이야기겠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갖고 있는 것은 그 어느 것도 갖고 갈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갖고 간다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살 동안 최선을 다해 선용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더 좋은 고향을 소유하셨습니까? 더 좋은 고향 천국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아가십시오. 이 세상 살 동안 나그네 인생길에 때때로 고난이 찾아오지만 인내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죄악 세상 살지만 거룩하게, 단순하게,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과 주신 사명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그네 인생을 승리하고 더 좋은 고향 천국에 당당하게 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출처/ 홍문수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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