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자 하나님 (출애굽기 15:22-26)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기적으로 홍해를 무사히 건너고 그들을 추격하던 애굽의 마병들이 홍해에 수장 당했을 때 너무나 기뻐서 춤추며 소고 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모세는 승리의 감격에 도취한 백성들을 인도해서 수르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사흘 길을 가는 동안 물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목이 말랐을까요? 오아시스인 마라에 이르렀으나 그곳 물맛이 너무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짜증을 내면서 모세를 대하여 원망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는지라 그가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졌더니 물맛이 달아졌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본문에 근거해서 ‘치료자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함으로 성도님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선민의 광야생활은 성도들의 인생여정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를 지나야 했듯이, 성도들이 영원한 가나안인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 같은 이 세상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은 성도들이 영구히 머물러 살 곳이 아니라 잠시 거치는 곳에 불과합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광야는 시나이 반도를 가리키는데 그곳은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으므로 물이 매우 귀합니다.
낮에는 태양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는가 하면 밤에는 기온이 떨어져 춥습니다. 광야는 모래 보다는 대부분이 돌이 많은 들판과 산으로 되어 있습니다. 땅에는 생명력이 강한 풀이 약간 자라고 나무라고는 아까씨아 나무처럼 생긴 싯딤 나무가 띄엄띄엄 서 있을 뿐입니다. 지금도 광야에는 약 4만 명의 베드윈족이 유목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과 같이 수백만에 달하는 백성이 생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으로 하여금 광야를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광야의 어려움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을 시험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환경이 좋고 편한 가운데서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생활하기 어렵고 불편한 광야로 선민을 인도하셔서 시험하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40년 광야생활이 끝나갈 무렵, 모세는 출애굽 2세대 백성들에게 이 같이 말씀했습니다.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영적으로 볼 때 선민이 통과했던 광야와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구히 머물러 살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여러 가지 불편한 것이 있더라도 그 때문에 원망, 불평하지 않고 기꺼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많은 연단을 받았듯이, 우리도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연단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순종을 가르치기 위해서 우리에게 연단을 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려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아담이 낙원에서 쫓겨난 것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해 온 인류가 죄인 되었고 사망과 저주 아래 놓였습니다. 반면에,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은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자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명령을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이 땅의 삶은 영원한 천국의 삶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천국에서 살아가기에 합당한 인격과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 영적인 연단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때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수르 광야에서 사흘 동안 마실 물을 얻지 못한 것과 같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마라의 쓴 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처럼 원망 불평하지 말고 모세처럼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그 지시하심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광야 같은 인생 여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은혜로운 나날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나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사흘 동안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해서 갈증에 목이 타던 백성이 종려나무가 우거진 마라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이제 물을 마실 수 있다는 기대로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변했습니다. 마라에는 샘이 있었으나 물맛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갈증이 심한데도 마실 수 없었다니 마라의 물맛이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참담한 심정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한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라의 물이 쓴 것이 모세의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이스라엘 자손처럼 원망 불평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0절로 11절에 이르기를 “10)저희 중에 어떤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원망은 문제를 해결하는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도움은커녕 일을 더 어렵게 만듭니다.
그러면 난관을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모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삶의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가 할 일은 화를 내거나 원망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서 부르짖어 간구하는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문제가 생기거든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으로 아시고 즉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고귀한 특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격려하시는 말씀을 친히 여러 번 하셨습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 하셨는가 하면, "13)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무엇은 구해도 되고 무엇은 구하면 안 된다든가, 얼마큼은 구해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는 제한이 없습니다. ‘주 안에서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같은 주님의 약속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다. 누구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문제는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기 때문에 유익합니다. 문제가 없다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고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는 자들에게는 역경과 고난조차도 은혜 받을 기회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이에 그 나뭇가지를 꺾어 물에 던졌더니 쓴물이 달아졌습니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성도들에게 고통을 주는 쓴물을 달게 하여 고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하게 합니다.
본디 아담과 하와가 살던 에덴동산은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낙원이었습니다. 그들은 저주와 죽음과 상관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의 명을 불순종하고 범죄하자 그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수고로운 삶이 시작되었으며, 죄와 더불어 사망과 저주가 인간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삶은 마라의 샘처럼 쓴물을 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 아무런 문제도 없고 행복하게만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삶을 들여다보면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쓴물을 내는 인생에 불과합니다. 요즘 우리사회는 인기연예인들의 연이은 자살로 인해 충격에 휩싸여 있습니다. 오늘날 청소년들이 선망하는 직업 가운데 1위가 연예인이라고 합니다. 한번 스타덤에 오르기만 하면 부와 명예를 걸머쥐게 됩니다. 영화 한편에 출연해서 보통 사람들이 일평생 일해서 버는 돈을 벌기도 합니다.
그런데 한창 나이에 앞길이 구만리 같은 젊은 연예인들이 자살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생활만 보고 ‘저 사람은 아무 걱정이 없을거야’ 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누구의 인생이든 겉포장만 다를 뿐이지 내용물은 같습니다. 모세는 고백하기를 “우리의 연수(年數)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고 했습니다.
이 세상이 주는 즐거움은 그 속에 죄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드는 것입니다. 한자로 이런 경우를 일컬어 흥진비래(興盡悲來)라고 합니다. 세상 즐거움은 죄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 눈물로 끝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이 누리는 즐거움은 죄가 섞여 있지 않은 참 즐거움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16편 11절에 보니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였고, 빌립보서 4장 4절에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같이 말씀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도들이 누리는 즐거움은 다름 아닌 구원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 불변하듯이 구원의 즐거움 역시 성도들의 심령 속에 영원히 샘솟듯 솟아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지옥 백성을 천국 백성으로 변케 합니다. 마귀의 종 되었던 자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인생의 쓴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거든 주님의 십자가로 데려와서 죄인들을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끔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만 하면 아무리 비참한 인생도 복 된 인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흰 눈 같이, 양털 같이 정결케 됩니다. 쓴맛을 내는 인생이 변해서 단맛을 내는 인생이 됩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간구를 들으시고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이 세상에 질병이 만연한 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 에덴동산에서는 질병이 없었습니다. 죄와 함께 질병도 생겨났습니다. 계시록 21장 4절에 보면 장차 성도들이 들어가게 될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곳은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계시는 곳이요 죄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죄악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언제라도 질병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온갖 세균이 공기 중에도 섞여 있으므로 우리는 숨쉬기를 통해서도 병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신 덕분입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치료자이십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심령을 치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질병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병든 심령을 고쳐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시편 103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찬송합니다. “2)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죄악을 사하시는 방법으로 심령을 치료하신다고 증언합니다. 현대인들은 육신의 질병으로도 고생하지만, 동시에 마음의 병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때로는 마음의 병이 육신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 한 예로, 우울증이나 공황증은 마음의 병이지만 육신도 병들게 합니다. 악령에게 사로잡히면 정신 뿐 아니라 몸에도 이상이 생깁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기에 앞서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마음의 건강입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살아가는 정신적인 환경이 너무나 나쁘다는 것입니다. 보고 듣는 것이 죄 아닌 것이 거의 없습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이 들기까지 인간의 욕망을 자극하는 광고나 드라마나 오락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심령이 황폐해 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같은 것들을 좋아하지만 그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병든 심령을 고치려면 치료자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만병의 대 의사이신 하나님께 나와서 치료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날 자살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욕망이 좌절된 것을 견디지 못한 것이 그 원인입니다. 그러나 마더 테레사처럼 자기 욕망을 버리고 오로지 불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전념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세상적인 즐거움을 아무것도 누리지 못해도 조금도 우울해 하지 않고 늘 기쁜 낯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자살의 원인은 빈곤이나 실패나 질병 때문이 아니라 심령이 병든 것이 그 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우리의 추한 심령을 정결하게 하시며 모든 마음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전에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입니다. 성경에 일곱이라는 숫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일곱 귀신 들렸다 함은 귀신들에게 완전히 사로잡힌 상태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막달라 마리아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을까 상상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그 심령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도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 앞에 성스러울 성(聖) 자를 붙여서 성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신의 병을 치료해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은 우리 영혼의 구원 뿐 아니라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함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사야서 53장 5절에 보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의 질병을 담당하시기 위해 채찍질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사 복음서를 읽어 보십시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역의 거의 대부분을 병자를 치료하는데 할애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 이하에 이 같이 증언합니다.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나온 병자를 단 한 사람도 물리치신 적이 없이 다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현대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도 말씀 한 마디로 다 고쳐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치료의 능력은 오늘도 변함이 없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질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는 믿는 우리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절로 18절에 보니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5장 14절 이하에는 “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믿고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치료를 경험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신 하나님께서는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 된 성도들의 몸과 마음이 병에서 놓여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부르짖어 간구하십시오. 그리하여 치료하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발하시는 치료하는 광선을 받아 모든 질병에서 고침 받고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기뻐 뛰는 활기찬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양인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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