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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가난한 과부의 헌금.

by 【고동엽】 2024. 11. 24.

막 12:41-44.

2001년 10월 7일 높은 뜻 숭의교회를 처음 시작하는 주일 설교는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21절을 본문으로 한 ‘반석위에 세운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자 예수님께서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하신 말씀을 보고 우리 교회를 이 신앙고백 위에 세우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위에 세운 교회가 되리라 믿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에서 우리 교회가 뽑아낸 구체적인 목표는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교회는 구체적으로 6가지 실천적인 목표를 세웠습니다. 저희 교회 홈페이지에 보시면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교회.
둘째, 하나님의 식과 법을 고집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교회.
셋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즉 사역에 힘쓰는 교회.
넷째, 올바른 장로정치를 통하여 민주적인 교회가 되기를 힘쓰는 교회.
다섯째, 십일조 정신과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교회.
여섯째, 교인들을 세상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키우는 교회.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이 목표 중 하나에 집중하게 하시는데 현재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집중케 하시는 것은 다섯 번째인 십일조 정신과 희년정신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희년 정신의 실천입니다.

학교에 학년이 있듯이 신앙도 학년이 있다면 저는 제일 고학년의 신앙이 순교의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순교의 신앙 다음쯤으로 높은 고학년의 신앙을 꼽으라면 저는 희년을 실천하는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희년은 실천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희년의 실천은 설교를 들으시는 여러분들에게도 부담스러운 주제이지만 그것을 설교하는 저에게도 참으로 부담스러운 주제입니다. 80년 5월 6일 목사안수를 받은 후부터 지금까지 저는 거의 한번도 희년을 주제로 설교를 해 본 일이 없습니다. 희년을 예화로 삼은 설교는 있었지만 희년을 주제로 삼은 설교는 올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처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힘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안식년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육년 동안 힘써 일하고 이레째 되는 해는 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희년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7년 안식년을 7번 쉰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희년으로 선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희년이 되는 해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모든 종을 자유케 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본래 자신들에게 나누어 주셨던 땅을 제외 한 모든 땅을 본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어야만 했습니다. 사람의 한 평생이라고 할 수 있는 50년 동안 하나님은 사람을 사회주의 식으로 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의하여 가난하게도 되고 부하게도 되는 그런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민자본주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그 부와 가난이 운명처럼 자자손손 주어지는 것에 찬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50년이 되는 해에 희년을 선포하고 모든 가난과 모든 부를 원점으로 다시 돌리곤 하셨습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해였습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희망을 가져다주는 해였습니다.

그러나 희년은 부한 자들에게는 별로 달갑지 않은 해였습니다. 50년의 수고가 다시 물거품으로 되는 해이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희년을 실천하였습니다. 저들은 그것이 저들의 희생인 줄 알았습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해이고 자신들을 위한 해는 아닌 줄 알았습니다. 가난한 자들만 복을 받고 자신들을 복을 빼앗기는 해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희년을 실천하면서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희년은 가난한 자들에게만 자유를 선포하는 해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년이 부한 자들에게 진정한 의미를 자유를 선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그 동안 가난의 노예가 되어 살았지만 자신들은 그 동안 부함 즉 물질의 노예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년을 실천함으로 가난한 자들도 자유를 얻게 되고 부한 자신들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산이 물거품이 된 것이 아니라 정말 가장 뜻있고 보람 있게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도리어 그 일을 실천하지 못하고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얽매여 살다가 자신의 모든 재산이 다 물거품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목사이지만 정작 희년을 실천하면 돌려받는 입장이 아니라 돌려주어야만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희년이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이제껏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이 자신의 것을 돌려주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엄청난 축복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용기를 내게 되었습니다.

제가 제 자신과 여러분들에게 제시한 구체적인 희년의 실천은 재산의 일부를 하나님께 유산으로 남기는 것입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과 재산을 1/6로 나누어 생각했었습니다. 식구가 여섯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가 벌었기 때문에 내 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등기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내 재산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 가족 여섯의 몫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든 돈과 재산의 1/6은 내 돈이 아니기 때문에 아들에게도 1/6씩은 마땅히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라 본래 아이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몫은 돈과 재산의 1/6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재산과 돈을 1/6로 계산하다가 하나님이 섭섭해 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제 마음에 하신 말씀은 ‘아버지라며?’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모든 돈과 재산을 1/7로 계산하기 시작했고 모든 돈과 재산의 1/7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희년의 실천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이 희년의 실천이라면 쉽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한번 도전해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생각을 한지도 이제 십년이 좀 넘었습니다. 그 동안 돈에 대한 믿음의 용기가 조금씩 늘어서 제가 희년의 실천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하나님의 몫은 1/7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번에 우리 교회가 실천하려고 하는 희년 프로잭트에 헌금하려고 합니다. 그 액수가 제가 가지고 있는 현금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재산을 처분하여 실천해 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는데 자꾸 생각하고 자꾸 말하다보니 이제는 별로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자꾸 말하고 생각 할 수록 내가 참 근사한 일에 도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아들 셋은 이와 같은 일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아비인 저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년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가 구체적으로 하려고 하는 일은 열매나눔재단을 세워 가난한 이웃들을 자활시키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밑천나눔운동을 통하여 훈련하고 연습한 일을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대상을 우리 남한에 내려와 잘 뿌리 내리지 못하고 고생하고 있는 탈북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거기에 앞으로 5년 동안 최소한 100억 원의 돈을 투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일은 학교재단이나 장학재단을 세워 이 땅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그리고 기독교회와 교계를 이끌어나갈 훌륭한 인재를 키워내는 일입니다. 이 일에도 열매나눔재단과 같이 5년 동안 100억 원 정도를 투자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라고 정의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희년의 실천으로 헌금할 200억 원을 하나님의 자금을 끌어드릴 마중물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의 마중물로 인하여 끌려 나올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성경에서가 아닌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두 눈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믿음이 비록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고 손에 붙잡히지 않는 것이지만 반드시 증거와 실상으로 우리 눈에 보여주시고 우리 손에 붙잡혀 쥐어지게 해 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번 주에 기도로 잘 준비하여 작정하고 2007년이 시작되는 다음 주일에 하나님께 약정하여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이 헌금을 작정하여 하나님께 드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이번에 드려지는 제 헌금은 액수로 보면 부자의 많은 헌금에 해당하는 헌금이 될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으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날 예수님께 인정받고 칭찬받은 헌금은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돈의 액수를 보지 않으시고 돈에 담긴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진심을 보셨습니다.

저는 다음 주 저와 여러분이 작정하여 하나님께 드릴 희년헌금의 기준을 가난한 과부의 헌금으로 제시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헌금을 하는 동안 저는 여러분들에게 이 헌금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더 많은 복으로 더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가급적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더 많이 받게 될 복 때문에 헌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늘 본문의 가난한 과부와 같이 하나님이 좋아서, 하나님이 감사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드리는 그 헌금을 하나님께 한번 드려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를 개척할 때 저는 동안교회가 분립개척을 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당회에 제안하였었습니다. 당시 동안교회가 장년 출석 5천을 바라보고 있는 교회였음으로 한 천 명 정도 떼어 분립하여도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동안교회가 더욱 더 건강해 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동안교회 당회는 그와 같은 저의 안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교인들까지 떼어주는 분립개척은 어렵고 김동호 목사가 개척하는 교회를 적극 지원한다.’라고 공식적으로 당회에서 결의하였습니다. 저는 별로 문제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은 그래야만 새로 개척하는 교회가 좋겠다는 뜻에서 한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동안교회가 더 건강한 교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랬던 것인데 그 결정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인 동안교회가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안교회 홈페이지에 가보면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를 동안교회가 개척한 교회로 표시해 놓고 있습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말하지 않고 있으나 저는 그 표현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뜻 숭의교회는 동안교회가 개척을 지원한 교회이지 동안교회가 개척한 교회는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개척한 교회’라는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저는 말을 할 때도 ‘개척된 교회’라는 말을 씁니다. 개척의 주체가 동안교회도 김동호도 아니고 하나님이시라는 뜻으로 그렇게 씁니다. 저는 그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얼마를 지원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숭의대학 강당을 빌려 놓았기 때문에 특별히 많은 재정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로님들 사이에서는 그 액수를 놓고 아주 예민하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당회원 한분께서 당회 중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회가 분립개척을 하는 것이 아니니까 원칙적으로 한 푼도 지원하지 않아도 되지만, 목사님 얼마면 되겠습니까?’

숨쉴 사이도 두지 않고 즉시 대답했습니다. ‘한 푼도 필요 없습니다.’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저는 정말 교회로부터 한 푼도 받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나는 그런 마음에 없는 돈으로 교회를 시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교회에서 한 푼도 받지 않으려고 교회 개척에 필요한 돈을 준비했습니다. 잘 아는 집사님에게 3억 원을 빌려 달라고 했고 그 집사님은 기쁘게 허락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동안교회에서 8억 3천 만 원의 재정을 지원해 주시기로 하였습니다. 정말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8억 3천 만 원이 아니라 830억원이라고 하여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돈이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그때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때 그 발언을 하셨던 그 장로님의 생각이 동안교회 전체의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받기로 하였습니다.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동안교회 전체의 생각도 그 장로님의 생각과 만일 비슷한 것이었다면 동안교회는 그 헌금을 하나님께 하였어도 하나님은 그 헌금을 받으신 적이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저는 동안교회가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8억 3천 만 원이라는 돈을 헌금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동안교회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동안교회의 지원을 받게 되어 개인적으로 빌린 3억 원을 돌려드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집사님은 그 돈을 끝내 받지 않으셨습니다. ‘교회를 개척하시는 목사님에게 빌려 드릴 때 그 돈을 되돌려 받겠다고 빌려 드리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라는 것이 그 집사님의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희년 헌금을 드리면서 마음 없는 헌금 억지로 드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바보가 하는 헛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이 있는 헌금은 엽전 두 푼도 귀합니다. 마음 없는 헌금은 부자의 많은 헌금도 헛것입니다. 가난한 자든 부한 자든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의 가난한 과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만 우리가 갖는다면 200억 원 목표도 능히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희년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정신으로, 보이지 않는 성전을 건축하는 마음으로 한 주간 동안 기도하시고 가족들과 의논하시고 작정하여 다음 주 2007년이 시작되는 첫 주 하나님께 봉헌하십시다. 올해 1월 1일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올해를 하나님께 올인 하는 해가 되게 하자고 말씀드렸고 여러분들은 그 올인이라는 말에 도전을 받으셨습니다. 2006년도에 하나님께서 높은 뜻 숭의교회의 교인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중요한 단어들은 ‘올인’ ‘희년’ ‘보이지 않은 성전 건축’같은 단어들인데 구체적으로 서로 잘 연결이 됩니다.

이제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는 희년이라고 하는 정말 높으신 하나님의 뜻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순교에 비교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순교 다음으로는 쉽지 않은 목표에 도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우리의 헌신을 절대로 가볍게 보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때문에 이 헌신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는 우리의 거창한 목표인 열매나눔재단을 통한 탈북자와 빈민 자활과 그것을 통한 통일한국 준비 그리고 장학재단과 학교재단을 통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교계를 이끌어갈 인재양성을 이루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이 이루어지는 날 하나님은 우리 높은 뜻 숭의교회와 교인인 저와 여러분에게 정말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적은 많든 가난한 과부의 헌금과 헌금이 되어 하나님이 기쁘시게 열납하시는 아름다운 희년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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