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로 막힌 담을 헐라 엡2:12~18
신촌성결교회에 와서 이렇게 말씀을 전하게 된 것이 제게는 참 큰 복입니다.
저는 이번 세 번의 집회를 통해서, "정말 예수님을 잘 믿으시자"는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여러분은 다 예수님을 믿으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진짜 잘 믿으시도록"
이왕 예수님을 믿으셨으니 "정말 잘 믿으시도록" 3번의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 지난 1년 동안 정말 많은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똑같은 예수님을 믿는데, 신앙생활은 교회마다 다 다르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쓰셨는데,
그 교회마다 편지 쓴 내용이 다 다릅니다. 교회는 그런가 봅니다.
신촌성결교회도 주님이 이 교회에 대하여 하실 말씀이 아마 있으실 겁니다.
제가 그걸 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배당이 얼마나 크냐, 작으냐' 하는 것은 주님의 별로 관심이 아니실 겁니다.
'교인 수가 얼마나 되느냐'도 별로 주님의 관심이 아닐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신촌성결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예수님을 잘 믿으시는가?'
그것만 주님의 관심이실 겁니다.
계시록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이 쓰신 편지를 읽어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였고, 그게 자부심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부유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자기들 스스로 그렇게 말할 정도로, 대단히 부유한 교회였습니다.
우리 교회도 말입니다. 이왕이면 부자교회가 다 되고 싶어 하죠. 그죠.
'어느 교회가 아주 부자 교회다' 그러면, 은근히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근데 주님의 눈에는 그게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을, 라오디게아 교회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그 부자교회, '부유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는 그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너를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아주 끔찍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계3:16
그 라오디게아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까요?
그 부자교회 안에, 예수님이 들어 가실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교회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그 교회에 들어가실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문을 열면 내가 들어가...' 계3:20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씀이에요.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을 믿지만,
예수님은 정작 교회 안에 들어가실 수가 없는 교회였으니, 토하여 버리실만 하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네가 알지 못한다'
겉으로는 아주 부유하고 부자인 교회인데,
영적으로는 너무너무 가난하고 불쌍한 교회였습니다.
한마디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 잘 믿는 교회'가 아니었던 거예요.
그 정말 심각한 문제죠.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해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죄짓는 것이 참 두렵잖아요.
근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자기가 어떤 죄를 짓고 사는지를 모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회개도 못하는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면, 그러면 회개하고 고칠 수 있잖아요.
근데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고 살면, 그건 정말 심각하잖아요.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자기들이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모르고,
오히려 거꾸로 자기들은 '부자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거 정말 심각한 문제죠.
하나님과 라오디게아 교회 사이에, 막힌 담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오늘 말씀을 나눌 때,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알게 해주세요!' 기도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짜 '회개의 문'을 여시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뭐가 막힌 것이 있으면, 주님이 깨닫게 하시고,
그걸 정말 회개하고, 그래서 그 막힌 것이 해결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한국 교회가 지금 가지고 있는 심각한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버린 거예요.
불교 아시죠. 또 이슬람교도 아시죠. 또 유교도 아시죠.
거기에 그냥 기독교가 (같은 레벨로) 들어가는 거예요. *일개 종교로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가 특별할 거라고 전혀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우리는 '기독교가 불교와 비교 되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나 불교나.. 그저 같은 종교일 뿐인 것으로 인식합니다.
사람들은 종교적 열심이 본성적으로 대단합니다.
이 율법주의자들도 열심이 대단해요.
유교라든지, 이슬람교라든지.. 그런게 율법주의적인 종교입니다.
그들의 기도생활이나, 또 그들의 종교생활을 보면, 그 열심은 인정해 줄 만하죠.
근데 우리 기독교도 잘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런 어떤 율법적인 열심만 남아 있을 수 있다는 거예요. *생명이 사라짐
우리가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되어버린 현상 중에 하나가,
말씀은 아는데, 말씀대로 살지는 않아요. 정말 심각한 거죠.
여러분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그래서 항상 기뻐하시나요? 만약 항상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게 지금 율법적인 종교로 내가 지금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 중 하나에요.
말씀은 알지만, 내 삶은 말씀하고 달라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세요.
우리가 아까 찬양도 했잖아요. '예수님 내 마음에 계시다고'
그런데도 은밀한 죄를 짓고 살아요. 무서운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버린 거예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은, 더 이상 실제 reality 가 아니에요.
내 마음에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고, 감사도 없고, 사랑도 없고...
그런데 겉으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요.
이 정말 무서운 일이 되어 버린 거예요.
내 마음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뭐가 이렇게 꽉 막혀 버린 거예요.
▲역대상 10장에 보면, 사울왕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죽습니다. 아들들과 함께.
근데 그때 하나님이 사울 왕을 전쟁에서 죽게 하셨는데, 이유를 말하기를,
'신접한 자에게는 묻고, 하나님께는 묻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울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귀신 들린 여자에게 찾아가서
사무엘 선지자를 불러내 달라고... 그런 내용을 여러분도 아시죠? 그게 죄라는 거예요.
그런데 사무엘상 31장을 읽어보면, 사울 왕이 블레셋과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실제로 기도했어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무 응답을 안 해주세요. 아무런 응답을 안 하십니다.
그러니까 너무너무 다급해서, 신접한 여자에게 찾아가서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달라는 요청을 해요.
자 성경을 가만히 읽어보면, 분명히 사울 왕이 기도했는데,
왜 역대상 10장에서는 '그가 신접한 자에게는 묻고, 하나님께는 묻지 않았다'고 했을까요?
사울 왕과 하나님 사이에 아주 막힌 담이 막혀있었던 거예요.
기도를 한다고, 다 기도가 아닌 겁니다.
사울 왕이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이미 하나님과 사울 왕 사이에는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담이 막혀져 있었어요.
그건 사울 왕이 평소에,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고 하나님께 향한 마음과 갈망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예감이 안 좋은 그런 전쟁을 눈앞에 두고,
그제야 마음이 급하니까 하나님께 구하기는 했는데,
이미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는 아무런 교통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사울왕처럼)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안 하는게 아닙니다.
정말 간절히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런데 답답해합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들으셨을까?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뭐라고 응답하시나?' 그 점에 대해서 전혀 확신이 없어요.
사울 왕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는 하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전혀 하나님과 사이에 교통함이 없어요.
이건 정말 심각한 거예요.
▲자 여러분 안에, 하나님과 나사이에, 이런 막힌 담이 있는지 아닌지
간단하게라도 한번 점검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제가 10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정말 생명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
살아계신 예수님이 내 안에서 내 생명이 되시고, 내 주님이 되시고, 나의 왕이 되신 그런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율법주의적인 종교로서 내가 예수를 믿고 있는지,
한 10가지 질문을 해보면 드러나요.
'예수님을 믿으면 이렇게 된다'고 성경이 말한 내용들을
10가지로 여러분에게 질문을 드릴 테니까
듣는 즉시 '아멘!' 이렇게 마음에서부터 아멘이 되시는 분은, 막힌 담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아멘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약간 좀 마음에 걸림이 생기거나,
확신이 없으면... 막힌 담이 있다는 거죠.
1) 십자가로 인하여 속죄함의 확신이 있습니까?
2)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3) 오늘 죽어 천국에 간다고 해도 기쁘시겠습니까?
4)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임하셨음을 아십니까?
5)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는데,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까?
6) 예수님이 목자시니 이제 내게 부족한 것이 없습니까?
7) 예수님을 믿기에 두려움과 염려가 다 사라졌습니까?
8) 예수님이 내 마음에 임하셨으니, 이제 나의 은밀한 죄가 사라졌습니까?
9) 원수도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10) 내 자아가 죽었습니까?
주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없는 사람은, 이렇게 산다는 것이죠.
그러나 막힌 담이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죠.
건강검진 받으러 가서 결과가 나왔는데 "온몸이 다 문제네요" 이런 경우는 없습니다.
"폐가 문제네요. 간이 문제네요!" 그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죠.
몸의 기관 하나만 문제라도 심각한 문제잖아요.
자 여러분이 주님 앞에 섰을 때, 이 10가지 질문에 대하여
여러분이 어느 하나라도 분명하게 "아멘"을 못한다면,
지금 주님과 나사이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 거예요.
부흥회를 왜 하나요? 내 신앙 점검을 받으려고 하는 거거든요.
주님 앞에 서기 전에!
내 신앙생활에 문제가 없는지, 내 영적 상태에 혹시 문제가 생긴 건 없는지?
특히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은 없는지?
그걸 점검하려고 부흥회를 하는 거거든요.
근데 한 두 가지라도 어느 항목에 내가 아멘이 안 된다면, 그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예요.
이번 3일 동안 5번의 집회를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이 정말 진지하게, 기도원에 와 있다고 생각하시고,
정말 그렇게 3일 동안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무너뜨리시려고 그렇게 하신 거예요.
엡2: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 말씀은 이방인과 유대인들 사이가 그렇게 가까워졌다는 뜻이에요.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는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담이 있었던 사이이거든요.
예수님 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완전히 담이 무너져 버렸어요.
그게 초대교의 기적이에요.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도무지 해결되지 못할
막힌 담을 완전히 무너뜨리셨다는 거죠. 주님의 십자가가!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인(가자 지구)들 사이에 정말 끔찍한 전쟁을 벌이고 있잖아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 그 벽이 무너진 거예요.
근데 이렇게 사람 사이에 도무지 해결될 수 없는,
사람 사이에 담이 무너지는 이 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담이 무너졌기 때문에 그 일이 가능해지게 된 겁니다.
엡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마음의 벽이 무너지게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그 둘을 하나가 되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2: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해결되는 것과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이 해결되는 것이 같이 간다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분명히 사실 상상이 안 되는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해결되고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도 다 해결되는 역사를, 십자가 복음으로 얻게 됐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은혜예요.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분명히 그런 은혜를 받았는데, 여전히 하나님이 현실(실재, reality)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에게 너무 멀리 계신 것 같아요.
'지금도 나와 함께 살아계신 하나님' 그렇게 입술로 고백은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내게 현실이 아닌 거예요.
뭔지 모르게 하나님과 나사이에 뭐가 딱 막힌게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더니, 그 부흥회의 주제가
"하나님이 현실이 되게 하자" 정말 기가 막힌 주제예요.
우리가 다 하나님을 믿지요. 문제는, 하나님이 내 삶의 현실이 아닌 거예요.
그냥 마음과 생각으로, 이론으로만 믿고 있다는 거죠.
하나님과 뭐가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과 나사이에 막힌 담이 있으니
자동적으로 사람들과 나 사이에도 다 막혀 버린 것입니다.
부모 자녀 사이에도 담이 생긴 것 같고, 교인들 사이에도 다 담이 있고,
교회와 교회 사이에도 담이 생기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있으니까, 사람들 사이에도 다 담이 생긴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이전의 상태로 마치 돌아간 것처럼 된 거예요.
이게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 <현실>
▲우리가 회개할 죄가 많습니다.
정말 술 취하고, 방탕하고, 음란한 죄.. 그런 죄가 있다면 정말 회개해야 하죠.
거짓말하고, 욕심부리고,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재정과 시간을 마음대로 허비하고...
하여튼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죄들이 너무너무 많아요.
그런데 알기는 좀 분명하게 알았으면 좋겠어요. 무슨 죄가 가장 심각한 죄죠?
우리가 짓는 죄 중에, 무슨 죄가 가장 심각한 죄일까요? 많은 분들이 그 점을 잘 몰라요.
간음하고, 음란한 짓을 한 사람은, 진짜 상종하기도 싫은 죄를 지은 거죠.
그런 죄가 드러나면, 그 사람이 목회자든 또는 장로님이든 또는 교회 교인이든
그건 정말 교회 안에 너무너무 수치스러운 일이 되잖아요.
재정 사고가 날 때도 있고, 교인이 교인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참 민망한 일이죠.
욕심을 부리는 것도 그렇고, 교인들이 서로 시기 질투하는 것,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것,
그것도 참 부끄러운 죄들이죠.
그런데 그 모든 죄들 중에 가장 심각한 죄가 있어요. 그걸 정확하게 아셔야 돼요.
우리가 짓는 죄 중에 사람에게 짓는 죄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자기 자신에게 짓는 죄가 있어요. 심각한 죄예요.
그런데 하나님께 짓는 죄가 있습니다. 당연히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께 짓는 죄지요.
불신자들이 짓는 죄, 그들이 짓는 죄 중에 제일 무서운 죄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죄입니다.
그 사람들은 이해가 안 되죠. 하나님 믿지 않는게 왜 그렇게 심각한 죄인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다면, 그게 가장 심각한 죄예요.
모든 죄는 사실 거기서부터 나온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도 '하나님께 짓는 죄'가 있어요.
우리는 다 하나님을 믿잖아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짓는 죄가 있다고요. 그게 뭐죠?
예수님을 영접하고도, 예수님을 무시하고 사는 죄입니다.
우리가 다 입술로는 고백해요.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다고.
그런데 실제로 오늘 하루, 여러분은 예수님을 얼마나 생각하고 사셨나요?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면서요.
아침에 눈을 뜰 때, 여러분이 예수님을 생각하셨나요?
아침에 눈 뜬 그 첫 순간, 여러분 안에 계신 것을 진짜 믿는다면,
눈 뜬 순간에 "주님!" 그렇게 찾고, 그 이름을 불러야 되는게 맞죠.
여러분이 누구랑 식사할 때, 주님도 함께 식사하셨나요?
내가 혼자 있든지, 사람들과 같이 있든지,
일을 하든지, 또는 쉬는 시간이든지... 주님은 항상 여러분 안에 계셨잖아요.
그 점을 여러분은 오늘 정말 분명하게 인식하셨나요?
만약에 그러지 않았다면, '목사님 오늘 제가 주님을 거의 생각 못하고 살았네요.'
바쁘게는 살았어요. 할 일이 얼마나 많아요? 정신없이 살았어요.
저녁 부흥회도 또 있으니, 저녁 일과를 다 뒤로 미루고 아주 허겁지겁 여기에 오셨어요.
근데 여기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오늘 하루 종일, 거의 주님 생각 못 하고 살았어요.'
여러분 이것은 무슨 뜻이에요? 완전히 주님을 무시하고 살았다는 거죠.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지 않다면,
주님을 생각하지 못하고 산게, 주님께 무슨 죄가 되겠어요?
근데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고 산다면, 문제는 달라지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집에 갔는데, 가족들이 다 여러분들을 전혀 본 척도 안 한다면,
그날 여러분의 마음은 어떨까요?
여러분이 교회에 왔는데, 신촌성결교회 교인인데, 내가 교회에 왔잖아요.
그런데 누구도 나를 아는 척도 안 해요. 본 척도 안 해요.
그러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떠실까요? 무시 당했다고 느끼겠죠.
여러분이 무시당해 봤을 때, 그 느낌 아시죠.
우리 중에서 가장 무시당하시는 분이 누구신가요?
예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인 거예요.
주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전혀 기억도 하지 않고, 바라보지도 않고 살면서
급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주여!" 라고 기도하면,
사울 왕이 겪었던 그 느낌을, 그대로 겪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기도를 하기는 하는데, 전혀 아무런 역사를 경험을 못하는 거죠.
▲한국 교회에 부흥이 임했던 1907년 평양대부흥,
그때 그 부흥의 가장 중심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장로님,
당시는 장로님이시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목사님이신 경우예요.
왜냐면 그때는 안수받은 목사님이 아직 안 계실 때였죠.
그 길선주 장로님이 무슨 회개를 했었냐 하면,
친구가 일찍 세상 떠나면서, 그 친구가 자기에게
자기 자녀들이 장성하면 전달해 달라고 맡긴 유산을
자기가 절반을 떼먹었다는... 교인들이 경악할 만한 일이죠.
저렇게 존경받는 길선주 장로님이, 친한 친구가 맡겨놓은 유산을 반이나 떼먹었다니...
근데 한국교회 부흥회 시작은, 1903년 하디 선교사님의 회개부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회개의 부흥이 전국으로 퍼져가면서, 1907년 평양대부흥으로 폭발하게 된 거예요.
자 그렇다면 1903년 하디 선교사님은 무슨 죄를 회개했을까요?
예수님을 자기가 실제로 믿지 않았다는 거죠. 이게 무슨 말이죠?
아니 20대 의사였던 하디 선교사가, 머나먼 조선 땅에 와서
선교사로서 자신의 귀한 한 평생을 드렸어요.
그 선교사가 예수를 안 믿었다니요...
자기가 한국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예수 믿는 성도들을 세우려고 할 때
자기가 배운 신학 지식, 자기가 훈련받은 의사로서의 경험,
그리고 자기의 개인적인 열심과 그리고 노력으로
영혼을 구원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왔던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 그의 선교는 열매가 없었어요.
한국 교인들은 제대로 예수 믿는 것 같지도 않고,
'한국에 제대로 된 교회가 설 수 있을까?' 도무지 믿어지지도 않았어요.
하디 선교사님이 선교지를 순회하고 돌아오는 날은, 밤새도록 울고 기도하셨어요.
너무 한국교회의 현실이 비참하고, 믿을 만한 교인은 거의 없고...
'이런 한국 교회가 제대로 되겠나?' 그게 너무 마음이 무너졌어요.
한국교회 선교는 실패라고 생각했어요.
이유는 한국교회 교인들의 수준이 너무 낮았다고 생각한 거예요.
'도대체 이 사람들은 믿음을 제대로 가질 수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1903년 원산에서 선교사 수련회 때
하디 선교사님이 설교 준비를 하다가, 그가 설교의 대지를 이렇게 정했어요.
'우리가 진짜 기도의 역사를 믿어야 된다.
기도 응답을 받으려면 어떻게 되냐? 예수님을 진짜 믿어야 된다.
그리고 정말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알아야 된다.
그리고 철저히 주님께 순종해야 된다.'
근데 그렇게 설교 준비는 했는데, 그 시간에 성령께서 물으시는 거예요.
'너는 그러냐?'
'너는 정말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신 것을 진짜 믿고,
모든 것에 주님께 순종하여, 네가 지금까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느냐?'
거기서 하디 선교사는 고꾸라진 거예요.
설교는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자기는 이제껏 자기 열심과, 자기 노력과, 자기 경험 가지고
그렇게 전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교회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해왔던 거예요.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지 않았다는 거죠.
그러니 한국선교의 열매가 없었던 거죠.
성령께서 '네가 설교 준비를 했지만, 선교사님들 앞에서
네가 깨달은 죄, 네가 회개한 그것을 고백하라'
그래서 하디 선교사는, 선교사님들 앞에서 눈물로 고백한 거예요.
"한국교회 선교의 실패, 한국 교인들이 제대로 예수 못 믿는 이유는,
이 하디 선교사 때문입니다. 제가 전적으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그동안 선교한게 아니었습니다..."
거기 모인 선교사님들도 충격을 받았어요.
자기들이 실제로 (하디처럼) 그렇게 했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이 그 다음 주일에, 각자 섬기는 한국 교회에 가서
한국 교인들 앞에서 '여러분들이 예수를 제대로 못 믿는 이유는 선교사 저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진짜 믿지 않고, 주님을 의지하지 않았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기가 막힌 거예요.
선교사들이, 우리가 예수 제대로 못 믿는 이유를, 다 선교사들이 자기 잘못이라고하니까,
그래서 회개가 터진 거예요. 그리고 일어난 회개 운동이
평양대 부흥까지 이어진 거예요.
길선주 장로님의 그 회개 고백이 거기에 불을 당긴 것이죠.
▲여러분, 친구 돈 횡령한 죄가 커요?
예수님을 안 믿은 선교사의 죄가 커요?
얼핏 보면, 친구 돈 횡령한 죄가 더 커 보이죠.
그러나 그것 과는 비교가 안 되는 죄예요.
예수님을 진짜 믿지 않는 죄!
그 죄가 지금 우리들의 문제라니까요.
우리가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에요.
그래서 더 기가 막힌 거예요.
우리는 다 '예수님이 내 마음에 계시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죄가 더 심각한 거예요.
정말 예수님을 생각하지도 않고, 주님을 정말 무시하고,
우리가 교회 일을 의논하던, 교단 일을 의논하던... 주님을 바라보지도 않아요.
율법주의적인 종교가 되어 가는 것은, 진짜 끔찍한 일이에요.
겉으로는 예배도 드려요. 기도도 해요. 헌금도 해요. 여러 가지 전도의 일도 해요.
그런데 실제로는 주님을 안 믿어요. 현실의 삶에는, 주님을 무시하고, 잊어버리고 살아요.
많은 성도들이 입술로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살자'고 말은 합니다만,
실제로 내 자아가 죽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히 힘들다고 말들을 합니다.
사실이에요. 그건 힘들어요.
그렇제만 실제로 예수님을 내 마음에 영접했으면, 나는 죽고 예수로 살아야만 돼요.
예수님을 내 생명으로 영접했으면, 나의 옛 사람은 죽는 거죠.
그래야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복음'을 설교하면,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세요.
"목사님 죽는 거 진짜 어려워요. 내 자아가 죽는 거 너무 힘들어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안 죽고 예수를 믿으려니까 어려운 거죠.
죽는게 어려운게 아니에요. 그건 이미 이루어진 일이에요.
(처음에는 힘들지만, 점점 익숙해지면 그리 힘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실 때,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거라니까요. 우리는 믿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삼하 6장에 보면 웃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사가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소가 그 수레를 끌고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가던 중이었어요.
그 자체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가 아니죠. 법궤는 수레에다 싣고 가면 안 돼요.
법궤는 레위인들이 어깨에 매고 옮겨야만 되는 거죠.
근데 그걸 전혀 누구도 몰랐어요.
그래서 나름대로 잘 하겠다고, 새 수레를 만들고, 거기에다 법궤를 실어서 가는데
갑자기 소가 날뛰는 거예요. 법궤가 땅에 떨어지게 생겼습니다.
요즘 아스팔트 길은 그래도 겉으로는 깨끗한 길이죠.
옛날에는 다 흙길이었잖아요. 그 흙길에는 짐승들이 오고 가면서 온갖 배설물이 그냥
난무하는 진짜 말할 수 없이 더러운 길이에요.
그 길에 여호와의 법궤가 나뒹굴지 모르는 상황이 된 거예요.
이것만큼은 막아야 되잖아요. 법궤가 다른데도 아니고, 길바닥에 나뒹굴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 웃사는, 그 법궤가 그냥 땅으로 떨어지려고 하니까
급하게 법궤를 붙잡았다니까요. 그게 무슨 죄예요?
그게 근데 법궤를 붙잡았다고,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이셨어요.
도대체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죠? 웃사가 무슨 큰 죄를 지은 거예요?
상을 줘도 될 일이잖아요. 근데 여러분 잘 아셔야 돼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길바닥이 더럽죠.
'거기에 법궤가 나뒹구는 것은 어떻든지 막아야 된다' 이건 인간의 생각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 차라리 길바닥에 나뒹구는게 낫지,
아니 어떻게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대?'
길바닥이 더럽다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그렇죠.
길바닥은 그냥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 자연세계 속에 그냥 하나일 뿐이에요.
짐승 오물, 배설물이 더러워요?
그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의 일부인 거예요.
그걸 더럽다, 깨끗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냥 우리 관점에서 보는 거죠.
그런데 사람은 달라요. 만물보다 더럽고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 마음이에요. 렘17:9
'아니 길바닥에 법궤가 차라리 나뒹구는 것이 낫지, 어떻게 거기에 더러운 사람이 손을 대냐?'
그래서 즉시 웃사가 죽었어요.
웃사는,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하나님이 쓰신 도구이죠.
▲우리가 그런 더러온 존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터치하면 안 되는 존재예요.
그런데, 그런 우리 안에 예수님이 오셨어요. 이게 신약의 복음이죠.
그렇다면 우리는, 웃사처럼, 죽어도 벌써 수없이 죽어야 될 존재예요.
십자가의 복음이 뭐예요? 예수님과 함께 나의 옛사람이 이미 죽었기에,
그래서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실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새 생명이 되신 거라니까요.
그런데 '죽는게 어렵다'는 말이 왜 나와요? 아니 당연한 일인 거죠.
내가 죽었으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거죠!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나는 죽었다'고 하는 분명한 믿음과 고백이 없이 믿으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딱 담이 생긴 거예요.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주님의 역사가 안 나타나요.
내 속에 생수의 강이 흐르는 것이 느껴지지 않아요.
내 삶에 물이 포도주가 되는 역사가 경험되지 않아요.
예수를 믿기는 믿었는데, 왜 도대체 성경에 나와 있는 그 모든 역사는
내게 안 나타나는 거죠?
내가 안 죽었다고 생각하는 거죠.
죽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부활해서 살 수 있나요?
죽지 않았는데,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나의 새 생명이 될 수 있냐고요?
내가 죽어야, (그 결과 부활해서) 예수님이 내 생명이 되시는 거잖아요.
우리가 진짜 회개해야 될 것이 뭔가요?
물론 뭐 욕심부린 거, 거짓말한 거, 음란했던 거... 다 회개해야될 죄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진짜 중요한 죄,
그 모든 죄의 시작은, 내가 이미 죽었음을 믿지 않는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예수님을 영접했으면서도, 죽지 않은 자아로 계속 살고 있는 거예요.
이걸 정말 회개해야 하는 거예요.
▲어느 목사님이 습관적인 음란물을 탐독하는 음란물 중독에 빠져 있었어요.
그 목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문제가 드러났어요.
'목사님, 저는 도무지 음란물 중독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회개도 못하겠다고 그래요.
그동안 하나님 앞에 수도 없이 회개도 하고, 금식도 하고,
자기 나름대로는 음란물을 끊어 보려고 애를 썼대요.
그런 사정을 교인들도 몰라요. 가족도 몰라요. 아내도 몰라요.
자기 혼자서 어떻든지 해결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끊어지지 않는데요.
'저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제가 그 목사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목사님, 음란물을 끊으려고 노력해서, 이거 못 이깁니다."
만약에 노력해서 죄를 이길 수 있었다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왜 지셨겠습니까?
우리가 노력해서 죄를 안 지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주님이 십자가 지실 이유가 없잖아요.
"안 되니까, 우리 힘으로는 도무지 안 되는 문제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예수님만 죽으신게 아니고, 목사님도 함께 죽으셨습니다.
목사님이 하실 일은 '나는 죽었다'고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옛 사람이 죽었음을 받아들이세요.
그 외에는 죄를 이길 길이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은,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내가 죽었다는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거예요.
"목사님이 지금 믿어지냐, 안 믿어지냐를 따질 문제가 아니에요.
목사님은 지금 죄와 심각한 싸움을 싸우고 있잖아요.
싸움이 아니고, 아예 죄에 끌려가고 있잖아요..."
목사인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게 현실인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신 답은, 우리 보고 그냥 '죄짓지 말라' 그랬으면
우리는 하나님 믿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답은 '죄의 종노릇 하던 우리 옛 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을 뿐이에요. 그렇게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께서 '자신이 없다'는 거예요.
"목사님 그러면 그냥 나를 따라하세요.
'하나님 저 아무개는 죽었습니다.' 이걸 따라하세요."
그랬더니 대답을 안 하셔요.
"아니 목사님, 따라 하지도 못합니까?
'나는 믿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없다.'
아니 언제까지 그렇게만 하고 있을 겁니까?
아니 저를 따라서 한번 해 보세요.
'하나님 저 아무개는 죽었습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너무나 놀라운 복음이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겨우 따라하세요. "하나님 저 아무개는 죽었습니다."
그랬더니 눈물이 터졌어요.
그리고 "하나님 진짜 믿게 해주세요."
그러고는 통곡을 하는 거예요.
이제는 회개도 안 된다는 분이, 이제는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해도 눈물도 안 난다는 분이
그냥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하신 거예요.
그 목사님을 붙들고 같이, 저도 울고 그 목사님도 울고,
그날 하나님의 영이 그 목사님을 사로잡았어요.
▲우리가 진짜 회개해야 될 문제가 뭐죠?
가정 생활에서, 교회 생활에서, 내 일터에서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왜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아무도 모르는 거죠?
남편도 모르고, 아내도 모르고,
노부모도 모르고, 어린 자녀도 모르고,
같은 교인들끼리도 모르고, 세상 사람은 더 모르고,
내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내가 죽었다'고 진짜 믿고 고백하지 않으니까...
이것이 정말 해결되지 않으면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도, 실제로 뭐가 꽉 막힌 상태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신촌성결교회는 정말 은혜로운 교회잖아요.
이 교회 교인이라는 것은 정말 자랑스럽잖아요.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은혜로운 교회 안에 여러분이 있어도,
여러분 각자의 영혼이 복된 것은 보장되는 일이 아니에요.
여호수아 서에 나오는 아간이,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이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재물, 보화는 손대지 마라.
이 여리고 성에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손대지 마라. 다 불태워 버리라'
그랬는데도 불구하고 아간이 외투 하나, 은 200세겔, 금 50세겔을 숨겼어요.
그 죄 때문에 그 다음 아이성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여호수아가 나가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누군가가 여리고성의 제물을 손 댄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그리고 제비를 뽑게 되지요.
나중에 '아간이 그랬다'는 것이 이제 드러나서
그 아간을, 온 가족들과, 심지어 가축들까지 다 돌로 쳐서 죽입니다.
여러분 외투와 은 200세겔, 금 50세겔을 숨긴 죄가, 그렇게 무서운 죄입니까?
왜 그렇게까지 엄하게 처벌해야 됩니까?
그 말씀을 묵상하다가, 제가 두 가지 충격을 받았어요.
1) 하나는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백성인지
이미 여러 번 말씀도 듣고, 성경 공부하면서 알죠.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을 속썩이게 했던 백성들이에요.
그런데 그 여리고성이 무너졌을 때, 여리고 성 거민들이 가지고 있던 그 수많은 보화들,
재물들을 손댄 사람이, '아간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건 엄청난 충격이에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냐 말이에요.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 그런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참 신앙생활에 문제가 많고,
하나님 말씀 안 듣고, 속썩이고 그랬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 그런다고, 아간 외에는 한 사람도 손 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건 진짜 놀랄 만한 일이잖아요.
근데 왜 그랬을까요?
요단강을 건너면서, 여리고성을 소리 한번 지르고 완전히 무너지는 걸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구나, 하나님이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시구나!' 하는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하나님의 임재를, 그들은 경험했어요.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고 그랬어요.
그러자 아무도 손 안 대세요. 아간 한 사람 외에는.
2) 자 그런데 또 하나의 충격은,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아간이라는 사람이 나오냐 말이에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하나님이 손대지 말라고 그래서
누가 보든 안 보든, 자기들 눈앞에 금덩어리가 돌아다니고, 은덩어리가 돌아다니고
좋은 외투가 있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도.. 누구도 손을 안 대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아간은 손을 댔냐 말이에요.
더 무서운 것은 제비를 뽑는데, 시간이 걸리잖아요.
지파별로, 족속별로, 가문별로 제비뽑아 갈 때
아간이 본인이 알았지 않겠어요. '나에게로 점점 모든게 좁혀져 오는구나'
왜 자기가 제비를 뽑기 전에 '여호수아여, 제가 외투랑 금은을 좀 숨겼습니다.'
만약 그랬으면, 어쩌면 온 가족이 처벌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결국 최종적으로 자기가 제비 뽑힐 때까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었을까요?'
완전히 아간의 심령이 영적으로 굳어져 있었던 거예요.
그 은혜로운 시간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렇게 놀랍게 나타나는 그 상황 속에,
아간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있다는 거죠.
그러니 좋은 교회 다닌다고,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을 보장해 주는게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주변에 믿음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여러분도 믿음이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 스스로가 확인해야 돼요.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졌나?'
'나는 진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그 믿음으로 내가 그렇게 사는가?
▲제가 한번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어느 장로님 한 분이 너무너무 환한 얼굴로 점심 대접을 해 주셨어요.
그러면서 하시는 이야기가 '목사님, 이번 부흥회에 우리 교회에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우리 집에도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는 거예요.
무슨 일이냐고 여쭈었더니
아내 되시는 권사님이 집회가 끝나고 나가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장로님을 끌어안으면서 우시더래요.
"여보 나를 용서해요. 내가 그동안에 당신에게 너무 잘못했어요."
장로님이 너무 당황스럽더래요. 권사님이 갑자기 그렇게 하시니까.
그러더니 집에 갈 때까지도 권사님이 내내 울기만 하시더니
집에 들어가서는 장로님 앉으라고 그러고,
그 장로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여보, 나를 정말 한 번만 용서해 달라
다시는 내가 당신한테 마음 상하게 안 하겠다고.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너무 잘못했다고" 그렇게 회개하더라는 거죠.
그래서 제가 "장로님은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랬더니
장로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다는 거예요.
'제가 밥을 계속 먹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내 권사님이 그렇게 회개해서, 장로님이 너무 기뻐서 제게 밥을 사 주시는 거예요...
제가 그 자리에서는 더 이야기를 안 했어요.
근데 회개는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 하는게 아니더라고요.
은혜 받은 사람이 하는 거예요. 은혜 받은 사람이 회개하는 거더라고요.
그렇게 영혼이 딱딱하게 굳은 사람이 있더라고요.
그런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는 중에도
자기는 도무지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하지도 못하고, 돌이키지도 못하는 사람...
▲여러분 이번 신년 집회 3일에, 여러분이 여러분의 영혼을
정말 말씀 앞에 성령의 역사로, 주님 앞에 다 드러내 보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저는 3대째 목사예요. 아버님도 목사님이고, 할아버님도 목사님이시고,
저는 어릴 때부터 목사로 구별된 사람으로 자랐습니다.
빗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고, 아주 모범생으로 자랐어요.
어릴 때부터 '영락없이 목사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랐습니다.
그리고 제가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저는 그래도 제가 꽤 괜찮은 목사인 줄 알았어요.
근데 제 실상이 드러나는 그런 날이 왔습니다.
제가 군목 훈련을 받으러 광주 상무대에 입대했을 때
훈련받다가 고관절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급히 군인 병원으로 후송을 갔습니다.
근데 군의관이 엑스레이를 찍어 보더니 '장애인이 되겠다'는 거예요.
수술은 하지만, 완전히 고치기가 어렵다는 거죠.
그 말을 듣고, 저는 '이게 현실인가 꿈인가' 싶었어요.
한 번도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없이 살았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만난 거예요.
그때 제 마음속에 아버지밖에 생각이 안 났어요.
수원에서 목회하시던 아버님,
'어떻든지 아버님에게 연락을 해야 되겠다.'
그래야 아버님이 바깥에서라도 손을 쓰셔서
제가 이런 야전병원이 아니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서 좀 제대로 수술을 받으면,
제가 장애인이 되진 않지 않겠나? 뭐 그런 생각 뿐이었어요.
근데 아버님에게 연락이 안 돼요. 군훈련 상황이니까요.
수술 준비실에서 내일 아침에 응급 수술을 들어가게 되는데
이제 수술 대기실에 저 혼자 있게 됐습니다.
그때서야 하나님 생각이 나는 거예요.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계시구나...'
그래서 거기서 크게 하나님을 불렀어요.
"하나님!"
아무 소리가 안 들려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는 건지, 하나님의 음성을 어떻게 듣는 건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저는 알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하나님"을 세 번 크게 불렀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그냥 누운 채로 제 혼자 통곡하기 시작했어요.
너무너무 비참했어요. 제가 장애인이 된다는게 비참한게 아니고,
제가 군목 목사인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철저히 안 믿는 목사라는 게 드러난 거죠.
여러분 누구든지 진짜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가 믿는 대상을 찾게 돼 있어요.
누구를 믿는지를.. 그때 알게 돼요.
근데 저는 아버지부터 찾았어요.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당시 제게 있어서 하나님은 '현실'이 아니었어요. 그저 생각으로만 믿고 있었던 거죠.
그때부터 제 속에, 그냥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회개!
그동안 살아오면서, 사람들 보는 앞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내 모습,
그건 모범생이었어요.
그러나 아무도 안 보는 그 시간에 나는,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음란하고, 거짓되고, 교만하고, 악하고... 사람들은 모르죠.
안 보여주고, 감추고 살았으니까요.
그날 그게 깨달아지는 거에요. 내가 얼마나 가증하고 더러운지 자인지...
밤새도록 울고 회개하고, 울고 회개하고...
그냥 생각이 나는 거예요. 사람들 안 보는 그 시간에 내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렇게 새벽녘쯤 되어서, 꼬박 밤을 샜지요.
예수님의 십자가가 전혀 다르게 느껴져요.
그 전에도 이미 저는 그 십자가 설교도 했었어요.
그렇지만 그 십자가가, 나를 구원하는 십자가라는 진실한 고백이 내게 없었어요.
근데 그날은, 내 죄를 사하는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주님이 십자가에 피흘려 주신 것이, 내 모든 죄를 다 씻으시는 은혜라...
그게 얼마나 감격스러운지요... 그리고 기도가 바뀌었어요.
다리를 고쳐 달라고가 아니고, 성한 오른쪽 다리도 바치겠다 그랬어요.
그게 훨씬 더 주의 종이 되기에 좋겠더라고요.
두 다리 멀쩡하니까, 주의 종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내가 가고 싶은 데로 가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그렇게 살았더라고요.
제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 종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장애인이 되면, 제가 선택할 여지가 없게 되지요.
오라는 대로, 어디서 불러 주기만 해도 감사한 거죠.
'이제 진짜 하나님의 종이 되겠구나'
아버지가 낳아서 제가 태어나자마자 하나님께 바쳐서 목사가 된게 아니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나를 드릴 수 있겠구나'
그래서 남은 오른쪽 다리도 바치겠다... 저를 고쳐달라고 안 했어요.
저는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어요. 결국은 주님 앞에 설 거 아닙니까.
제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든지, 마지막은 주님 앞에 설 때가 오겠죠.
그때 한 마디만 들을 수 있으면 좋겠더라고요.
주님이 저에게 '수고했다. 내 종아!' 그 말씀을 들을 수만 있으면 성공한 거잖아요.
한 평생을 주의 종으로 일하고
주님이 '수고했다. 내 종아!' 라고 불러 주시면, 다른 소원은 아무것도 필요 없더라고요.
그렇게 눈물은 쏟아지는데.. 그런데 제 마음은 너무 기뻤어요.
제가 이제 진짜 주의 종이 되는 것 같았어요.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어제 밤, 그 수술 대기실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모르겠던데
그날 새벽에는, 하나님이 너무나 나와 함께 계신 거예요. 그게 그렇게 믿어져요.
그게 저에게는 회심이었어요.
그리고 이후로 모든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제 속에 하나님과 사이에 맡긴 담이 있었어요.
겉으로는 아주 괜찮은 목사같이 보였어도
영적으로는 아주 완고한..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는 것은 뭔지도 모르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도 못하고,
그저 속으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되고 싶은 대로, 내 욕망대로 행하고...
그렇지만 겉으로는 괜찮은 목사처럼 보이며, 이렇게 살아왔던 거예요.
그날 그것이 꺾여졌어요. 그리고 모든게 달라졌어요.
▲여러분 그저 새해만 왔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막힌 담이 무너지고...
그러면 사람과 막힌 담도 다 무너지기 시작해요.
그러고나서 한 해가 새로워지는 거예요.
이제부터 주님 앞에 갈 때까지 남은 기간이 여러분 각자 다 다를 거예요.
어떤 분은 10년 20년 30년 얼마 안 가서 주님께 가실 분도 있을 수 있죠.
여러분 주님과 사이에 지금 막힌 담이 해결되지 않으면
그러면 갑자기 다가오는 죽음은 끔찍한 일이 되는 거예요.
우리 이제 기도하는 시간을 좀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고 기도하면서, 주님과 시간을 좀 더 깊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오늘 기도할 때 '하나님 제가 하나님과 사이에 맡긴 담이 무엇입니까?
왜 저는 영적으로 이렇게 답답합니까?
왜 제게는 기도의 문이 이렇게 딱 막힌 것 같습니까?
제 심령에는 왜 기쁨과 감사와 사랑이 없습니까?
주님을 바라보는 눈을 뜨기 원합니다.
하나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있다면, 그게 다 무너지기 원합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내 생명이십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 하나를 분명하게 붙잡으면, 모든 막힌 담이 다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님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실제로 여러분의 삶의 현실 reality 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보다도 더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정말 주님과 사이에 막힌 담이 오늘 이 시간부터 다 무너지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정말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억지로 일어나지 마십시오.
지금 하나님과 사이에 뭔가 막힌 것이 있다고 느껴지시는 분,
근데 하나님은 이것이 해결되기 원하십니다.
더 이상이 이 모습으로 계속 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 상태로 10년을 더 살고, 20년을 더 살면 뭐합니까?
'주님 제 안에 막힌 담이 무너지는 시간이 되게 해 주옵소서!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더 분명하게 뜨여지게 되길 원합니다.
이제는 진짜 예수님이 나의 생명이시고, 내 주님이시고,
이제 저는 왕을 모시고 사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해 주옵소서!
그래서 가족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지고,
교인들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어지고,
내 주변 사람들 사이에 막힌 담이 다 무너지게 해주옵소서'
우리 '주여!' 한번 부르짖고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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