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아브라함의 믿음(롬4:9~17)
오늘의 본문은 특별히 귀한 말씀입니다. 척 스미스 목사님은 로마서 전체에서 오늘의 이 말씀이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강의한 바 있습니다. 이미 보신 바와 같이 로마서 4장은 전 장에 걸쳐서 아브라함을 들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교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곧 아브라함 이야기입니다. 1절로 8절에서는 아브라함의 의가 어떻게 이루어진 의며 어떤 성격의 의냐 하는 것을 말씀하였고, 9절로 17절에서는 아브라함이 예수 믿는 사람의 조상이 되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어떤 것이기에 그러한지,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기에 우리의 믿음과 그 믿음이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인지를 말씀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성격을 설명합니다. 대단히 귀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 로마서 4장을 두고두고 다시 읽어보세요.
이제, 오늘의 본문인 18절로 25절에는 믿음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도대체 어떤 믿음인지, 이에 대하여 본문은 부활 신앙적인 믿음이라고 합니다. 부활신앙의 예표가 된다는 것이지요. 부활신앙을 미리 우리에게 보여주신 바 표적이 된다는 거예요. 놀라운 신학적 해석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바울 신학에 있어서의 위대한 발견입니다. 부활신앙이 아브라함에게까지 올라갔습니다. 거기에 이미 부활신앙이 있다는 거예요. 오늘 우리는 예수 믿어서 부활을 믿습니다. 내 부활을 믿습니다. 종말론적 부활을 믿습니다. 현재적 부활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부활신앙의 뿌리가 저 아브라함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듯 위대한 신학적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지, 어떤 성격의 믿음이며 그 결과는 어떤 것인지, 종말론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현실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아주 귀한 진리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것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것, 바랄 수 없는 것을 믿었어요. 믿어서 바랐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8절)"-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어요.
그리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요. 여러분, 인격 대 인격에서는 제일 귀중한 일이 뭐냐 하면 바로 믿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믿는 거예요. 믿어주는 것, 믿어드리는 거예요. 부모님이 이렇고 이렇다 하고 이야기하는데 가만히 듣다가 '그건 옛날얘기예요' 한다든가 인생이 어떻다 하고 훈계를 하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해버린다면 참 슬픈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믿어지거든요. 엉뚱한 소리를 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라면 믿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이 식어지면 이제는 믿어지지 않아요.
어떤 사람이 판매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입사하자마자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물건이 청소기였습니다. 이 사람은 그것을 파는 방법에 대해서 1주일 동안 공부를 했어요. 남의 집에 들어갈 때에는 어떻게 문을 열고 들어가고, 들어가서는 어떻게 인사를 하고, 무슨 말을 하고, 이야기할 때에는 웃으면서 얘기해야 되고, 그쪽에서 화를 내더라도 절대로 같이 화를 내면 안되고… 그밖에도 여러 가지에 대하여 1주일 동안 훈련을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마침내 물건을 팔러 나가는데 영 자신이 없어요. 그래서 맨 먼저 자기 아내한테 갔어요. 아내한테 청소기를 내놓고 이 청소기는 이렇고 저렇고 하면서 한참동안 설명하고 나서 "사겠소?" 했어요. "사고 말고요." 아내는 선뜻 대답합니다.
"당신, 내 말을 믿는 거요?" "그럼요. 내가 안 믿으면 누가 믿겠어요? 내 남편인데"하고 아내는 시원스럽게 청소기를 하나 사는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믿는다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정말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꼭 믿어야 돼요. 여러분, 하나님께 영광, 영광, 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는 것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도 믿어요. 그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transcendence of God)을 믿어야 돼요. 그 초월적 능력, 초월적 지혜, 초월적 섭리, 초월적 경륜을 믿어야 돼요. 왜 초월이란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 인간의 판단에 매이지 않거든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적 지식에 매이지 않아요. 우리의 논리적 지식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예요. 초월된 것이지요. 된다, 안 된다-그건 사람들의 얘기지 감히 하나님 앞에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누구 앞에 하는 얘기입니까? 초월적입니다. 높은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어야 돼요. 이 믿음은 곧 기쁨으로 바꾸어지고, 감사함으로 응답하고, 그 다음에 기쁜 마음으로 순종하는 거예요. 자원적으로 순종해 들어가는 거예요. 바로 이런 믿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 적은 지식이 하나님의 초월적 지식을 수용합니다. 나 어리석은 인간이 하나님의 이 엄청난 능력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거꾸로 가는지 바로 가는지 알바가 아니예요. 이 말씀의 약속만을 믿고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대로 헌신해버립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을 보세요. 고향을 떠나라 하실 때에 갈 바를 알지 못하는 채 떠납니다. 약속만 믿고 이정표 하나 없이 떠납니다. 어디서 하룻밤 자고, 어디서 뭘 먹고…… 이런 얘기가 없어요. 떠나라,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시니 그냥 떠나는 거예요. 낯선 곳으로 갑니다. 갈 바를 모르고 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믿었기 때문에 그대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 그 자체가 가능성이요 능력과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나를 향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잡는데 한 마리도 못 잡았어요. 물고기 잡으러 갔다가 한 마리도 못 잡고 돌아오는 것은 대단히 피곤한 노릇입니다. 바로 그런 순간입니다.
제 할아버지가 86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바로 전날까지 낚시질을 하셨어요. 아주 건강하셨어요.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한 마리도 못 잡는 날이 많았어요. 빈 바구니를 가지고 들어오시거든요. 그러면 할머니가 한마디 하셔요. 한 마리도 못 잡으면서 뭘하러 낚시질을 다니느냐고. 그래선지 어떤 날은 물고기를 사 가지고 오십디다. 부끄러우신 모양이지요. 그러니까 잡아 가지고 오시는 날도 할머니는 "사 가지고 온 거요, 잡아 가지고 온 거요?"하고 비난을 합니다.
사실 낚시 가서 밤새껏 물고기 한 마리도 못 잡으면 창피하거든요.
이런 때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식적으로 그것은 될 일이 아니예요. 시간적으로도 안되고, 장소도 마음에 안들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가 묘한 대답을 해요. 밤새껏 수고하여도 잡은 것이 없습니다마는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리다, 합니다. 거기다 괄호하고 딱 한마디, 제가 넣고 싶은 게 있어요. 못 잡을 건 뻔하지만 말씀하신 예수님의 체면을 보아서 내가 그물을 내리리다-그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물을 내렸어요. 바로 그 믿음입니다.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그 얼마나 귀중한 믿음입니까? 성경이 다 그런 얘기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홍해를 건너가라, 지팡이를 들어 홍해를 쳐라, 그리고 건너가라-전설에 따르면 모세가 60만 군중 앞에서 홍해를 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안 생겼어요. 모세가 당황할 때에 옆에 있던 소년이 말을 했습니다. "치고 건너가라 하셨는데 왜 서 있습니까?" 그리고는 물 속으로 첨벙 뛰어드니까 물이 갈라지더랍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믿고 싶어요. 그렇지 않아요? 치고 건너가라 하셨으니 말이에요.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많이 합니다. 전쟁을 할 때마다 저들에게는 꼭 두 가지 말씀이 들리어야 합니다. 하나는 "저 땅을 네게 주었다"하시는 말씀입니다. 저 땅을 네게 주었다-이 말씀이 들려오기만 하면 정세가 어떠하든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네 손에 붙였다"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손에 붙였느니라, 하고만 말씀하시면 저들은 무조건 "아멘"입니다. 군사가 많건 적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미 이겨놓은 전쟁이니까요. 자, 이거 얼마나 중요합니까? 네게 주었다, 네 손에 붙였느니라-이 두 마디 약속을 믿고 저들은 전쟁에 뛰어들었어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 말씀이 곧 능력이요 능력이 곧 가능성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나약함이 있어요. 말씀을 내가 받아들이려고 할 때에 나 자신을 보게 돼요. 내 나약함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보면 내 나이 100세요 아내는 90세로, 단산한 지가 오래됐어요. 그렇다면 이제 생산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죽은 자와 같은 거예요. 생산기능으로 볼 때에는 이미 죽은 자예요. 고목 말입니다. 고목에 무슨 싹이 나요? 무슨 꽃이 필 것입니까? 아브라함으로서는 자신의 나약함이 여기에 있어요. 인간 상식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첫째 문제입니다. 육체적으로 나약해요. 현실적으로 나약해요. 이성적으로 나약해요. 그리고 영적으로 나약합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에는 영적으로도 나약해요. 왜요? 이미 실수가 많아요. 아브라함이 여러 번 실수했어요. 이 땅을 네게 준다고 하셨는데 애굽으로 갔어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았으면 아내 잃어버리고 자기도 죽을 뻔했어요. 큰일날 뻔했지요.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셨기에 살아남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가하면 자식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분명히 믿고 산다고 했는데 웬걸요, 외도했어요. 이스마엘을 얻었어요. 이건 큰 실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렇게 휘청거린 과거가 있어요.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지키지 못한 허물이 있음을 내가 이미 알고 있잖아요? 그러니 이제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신들 염치없이 '예 믿습니다, 말씀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할 수가 있겠어요? 이런 얘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나는 기도를 열심히 해왔는데 요새는 기도할 용기가 없어졌습니다. 회개하고 죄짓고, 또 회개하고 또 죄짓고, 약속하고 또 번복하고… 이제는 체면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감히 뭐라고 할 수가 없어요. 복을 달라는 말도 물론 못합니다."-이 사람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나 자신을 생각하면 어찌 내가 복을 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어머니가 이런 얘기도 합디다. 자식이 지금 대학입시를 봐야 하는데 "합격하게 해주세요"하고 기도하려들면 '아니, 저 공부하는 꼴을 좀 봐라.
저 정도 해 가지고 대학 들어가게 해달라니, 너는 염치도 없느냐'하는 소리가 속으로 들려 감히 합격케 해달라는 말을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이게 인간의 나약함이에요. 믿음 좋아요. 믿고 싶어요.
그러나 육적으로, 현실적으로, 영적으로 믿음을 저해하는 나약함이 내게 있어요. 그런고로 '믿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앞으로는 꼭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예요. 육적으로, 영적으로 아주 부족함과 나약함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무엇이라 말씀드릴 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하실 때에 믿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된다 안된다, 얘기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19절을 보세요.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람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죽은 것 같음을 알았으면서도, 하고 강조하는 거예요. 사실상 죽은 거예요. 생명은 살아 있지만 생식기능에 관한 한 저들은 죽은 사람들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고도 믿었어요. 여기에 아브라함의 위대함이 있어요. 자기의 허물을 알고도, 나약함을 알고도 믿었어요. 자기는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은 믿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나의 나약함이나, 나의 지혜나, 나의 판단능력이나, 나의 자유의지, 나의 인간적 방법…… 이 모든 것들을 다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받아들이고, 나머지의 모든 것은 다 포기해버려요. 그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믿습니다.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니라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다 하시면 나도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다 하시면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되다 하시면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할 수 있다 하시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요,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순종하고, 그리고 생활에 옮기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24절 말씀입니다.
23절부터 보세요.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이것이 아브라함의 사건입니다. 아브라함만 위함이 아니예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를 위함이다, 바로 우리를 위해서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증거 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한번 아브라함의 믿음을 살펴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까?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살아납니다. 나의 생식기능은 다 죽어서 말라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살아납니다'-이것을 믿어요. '죽어도 삽니다'-이것을 믿었어요.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믿었어요. 이것은 현실에 대한 것이요, 자기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얼마나 위대한 믿음입니까?
두 번째로, 그는 자기의 허물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면 의로운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하고 말씀하시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녀 되는 것입니다. 나 스스로는 의가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면 나는 사랑 받을만한 자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자를 창조하시는 것이다'--'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아 헤매시지 않습니다. 기다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할만한 자를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부모님들이 자식이 잘하는 것을 봐서 저들을 사랑합니까? 저들이 대하는 대로 똑같이 대합니까? 아닙니다. 그실 사랑 할만한 자로 만들어가는 거예요. 가르치는 거에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저는 어느 미국가정에 초대받아서 식사를 한 일이 있었어요. 그 집에는 아주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있었어요. 식탁에 둘러앉은 어른들은 다 그냥 의자에 앉았지만, 어린아이는 좀 높은 의자에다 앉혀놓고 허리띠로 아이가 쓰러지지 않게 매어놓았어요. 그런데 이 아이가 두 손으로 열심히 식사를 하다가 잘못해서 바닥에 숟가락을 떨어뜨렸어요. 자기가 숟가락을 줍지 못하니까 "마미(mammy)"하면서 울어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주워서 깨끗이 닦아 가지고 도로 줬어요. 아이는 숟가락을 손에 쥐자마자 또 음식을 먹으려고 했어요. 이 때에 어머니가 식탁을 땅땅 두드리는 거예요. 그리고는 놀라서 쳐다보는 아이한테 "Say something!(할말이 있잖니)"라고 말을 합니다. 아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있으니까 어머니는 또 "Say something!"하며 다그칩니다. 이에 어쩔줄 모르던 아이가 막 울려고 하니까 비로소 어머니가 가르쳐줍니다. "Say thank you(고맙다고 해라)." 아이가 "Thank you"하니까 "You are welcome"이라고 대답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세요. 고맙다고 말할 줄을 모른다면 가르쳐야지요. 그저 내버려두고 고맙다고 말하기를 기다립니까? 어디 죽을 때까지 기다려보세요, 그 말이 나오는지. 자, 고맙다는 말 한마디도 배운 거예요. 매맞아가면서 배운 거예요. 또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네 사람들 중에도 왼손잡이들이 좀 있어요. 어렸을 적에 어머니가 분명히 오른손으로 먹으라고 했으련만 끝까지 고집 부려 가지고 기어이 왼손잡이가 된 것이지요. 어쨌든 간에 알고 보면 우리가 그래도 이만큼 인격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다 배운 것입니다. 사실은 매맞아가면서 배운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끔 어떤 분들은 저한테 "목사님,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 피곤하지 않습니까?" 혹은 "그것 괜찮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괜찮아요. 이 나이 될 때까지 건강한데 뭘 그래요? 새벽기도회 나오면 나만큼은 살 수 있어요"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사실은요, 이것도 매맞아가면서 배운 거예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저희 할아버지께서 "사람은 일찍 일어나야 한다"하시며 저를 깨워 가지고 산책을 했거든요. 아침 일찍부터 손목 잡혀 끌려 다니면서 산책을 했어요. 그래서 새벽 체질이 된 것이지요. 거저 된 것이 아니예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할만한 자로 키우시는 거예요. 가르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을 기다리기만 하신다면 언제 하나님의 자녀를 만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을 만들어 가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 자녀다. 너는 의롭다'-오직 믿음 하나를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이럴 때에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하시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십니다. 그 순간에 '저는 사랑 받을만한 자격이 못됩니다'하면 되겠습니까?
일전에 제가 어떤 돈 많은 재벌한테 "예수 믿으세요"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 분이 가만히 있더니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교회 나가고 싶기는 하지만 내가 교회 안 나가는 게 여러 가지로 좋을 것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저를 비웃을 거예요. '이제껏 제멋대로 살다가 죽을 때 되니까 천당은 가고 싶은가보지?'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비웃으면 어떻소?" 했더니 "아무튼 그저 내가 안 나가는 게 소망교회를 위해서도 좋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똑똑한 척하더군요.
여러분, 이게 다 어디에서 비롯된 생각입니까? 나의 부족함을 생각하는 거예요. 부족하다는 생각까지는 좋아요. 그것이 의가 아닙니다. 그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나는 부족함이 많지만 그가 나를 사랑하신다고 할 때에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 거예요. 여러 말이 필요 없어요.
또, 그가 나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시면 나는 그의 자녀입니다. 그것으로 그만이에요.
저는 성경에 나오는 탕자가 참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못되게 집을 나갔습니까? 또 얼마나 못되게 돌아왔습니까? 그런데도 아버지가 잔치를 해 줄 때에 이 염치없는 사람은 떡 받아먹고 있어요. 체면도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도 한마디쯤 사양이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는 그 때에 생각한 것이 있었습니다. 나 자신의 체면을 생각하자면 모든 것을 다 뿌리치고 외양간으로 가고 싶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실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저렇게 기뻐하시는데 여기에 초를 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마음 한편으로는 괴롭지만 그 잔치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만 생각합니다. 형님의 질투를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이 탕자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으로 의를 수용해야 됩니다. 의, 이것이 중요한 거예요. 의롭다 하시면 나는 의인이에요. 그런고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우리의 의인의 의식을 가져야 됩니다. 의인의 정체감을 가져야됩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면서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영원히 죽을 죄인입니다'-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마세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말이 아니예요.
생각해보세요. 인간 대 인간의 일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무엇을 잘못했을 때에 우리가 때리기도 하고, 꾸중도 하지만 이내 용서합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하고 명랑해져야지, 용서했는데도 그 다음에 심부름이라도 시킬 양이면 "보나마나 나는 또 실수할 거예요.
그러니까 못하겠습니다. 나는 무능하니까요. 나는 부족하니까요"하고 자꾸 궁상맞게 군다면 그게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까? 또 어떤 학생이 만일에 원하던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합시다. 떨어졌으면 떨어진 것이지요. 이 때에 부모가 "괜찮다, 내년에 또 하면 되지 뭐"-이렇게 나오면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한 번 더 해볼께요"하면서 명랑해져야지요. 그런데 "부모님들이 그렇게 수고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낙방을 하다니, 저는 참으로 불효자입니다. 가문을 망신시켰어요"-얼핏 말되는 것 같아도 이것이야말로 참 못된 말이에요. 부모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지 왜 그렇게 말이 많아요? 안그래요? 의를 수용하는 것-믿음으로 의롭다 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이 과거의 부족함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내년에 아들을 낳으리라'하셨습니다. 그의 체면은 지금 말이 아니지요. 하지만 좌우간 '아멘'했습니다. '주신다니까 주시는 거야.
이제 아들 하나 얻었다'-이런 마음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중합니까? 그리고 그야말로 단산한 지가 오래된 아내를 다시 만나는 거예요.
요샛말로 '회춘'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보통 얘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에요. 지난날의 부끄러운 것은 싹 잊어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삭을 낳은 다음에 너무너무 좋아 가지고 아기를 안고 "아 기쁘다. 너무 기쁘다"합니다. 원래 이삭이란 말이 기쁘다는 뜻이에요. 웃는다는 뜻이에요.
그 다음에 우리가 또 한 가지를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이렇게 부족하고 이렇게 허물이 많은 가운데도, 죽은 자와 방불한 가운데서도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고 믿었다-이것은 바로 부활신앙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생산기능의 회복은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분명 부활입니다. 또 그 영적 상태로 보아서도 이것은 완전히 부활입니다. 어쩌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불 신앙적으로 행한 일로 인하여 저주를 받을 수도 있어요. 무서운 책망을 들을 수도 있어요. 이스마엘의 사건은 아브라함이 절대적으로 잘못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부활신앙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영적으로 볼 때에 완전히 부활의 속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활, 신분의 부활, 존재의 부활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면서 새 사람의 신분에 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절)"-이것이 부활신앙 아닙니까? 보세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죽었다--내어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가야바가 죽인 것으로 설명하지 않아요. 정치적 상황에서 죽으신 예수가 아니예요. 예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제물로 내어주셨어요.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내어주셨다-그래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리신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 속에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속에 사죄가 있고, 부활 속에 의롭다 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나는 절대로 죄인일 수 없어요. 죄인의 의식에 매일 수도 없어요. 절대로 저주의식에 매일 수 없어요. 어떤 상황에 이르러도 하나님의 사랑권 밖으로 떨어지는 일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두 가지 걱정을 하면 안됩니다. 하나는 죽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우리는 죽는 게 아닙니다. 하늘나라로 가는 것입니다. 생명의 양상을 달리해서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세상에서 떠나는 게 아닙니다. 또하나, 저주라고 하는 의식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병에 걸리건, 감기에 걸리건, 사업에 실패하건, 어떤 일을 당하건 간에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내 죄에 대한 심판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사랑일 뿐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가까이 느끼게 하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시고자 하는 경륜이 있을 뿐입니다. 그 의식이 분명해야합니다.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고 하니, 효자가 부모의 모든 처사에 대하여 절대로 그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때려도, 책망을 해도, 잔소리를 해도, 무슨 얘기를 해도 '이는 다 나를 위한 것이고,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추호도 '나를 미워해서 이러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마도 아버지가 나에게 실망했나보다'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거예요. 할 수도 없어요. 이것이 바로 사랑 받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아버지의 사랑을 믿는 사람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런고로 부활신앙, 그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죽은 자와 같고, 죄인이요. 저주받은 자와 같은 나이지만 의롭다 하시는 역사가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죄의 타성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심지어는 실제적으로 죄인의식에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죄의식과 죄인의식은 다릅니다. 죄의식은 있어야지요. 이것이 죄고, 이것이 불의고… 그것은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죄인의식은 아니예요. 나는 죄인이 아니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저주받을 죄인이 아니요, 사랑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죄인의식에서 이제 완전히 하나님의 자녀된 의식으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영원히 구제 불능한 그런 저주의식에서, 절망의식에서부터 벗어나서 소망의 세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만을 모든 사건에서 느끼며 사는, 이것이 엄청난 부활신앙입니다. 잊지 말 것이에요. 이것이 바로 부활신앙의 증거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내어줌'이 된 십자가,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사건-이것을 생각하면서 '내가 아무리 추해도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의롭다 하신다'하는 것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아무리 괴롭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많아도 '하나님께서는 나를 죄인 취급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 받는 자이기에 여기에 징계가 있고, 여기에 교훈이 있고, 여기에 인도하심이 있다'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평생을 살다보면 '아무래도 나는 이렇게 의지박약할 수가 없어. 참 할 길 없는 존재야'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번 믿으세요. 변신할 것입니다. 중생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화적 의지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을 두고 '저 사람은 도저히'한다면 그것은 불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에는 얼마든지 새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대한 책을 유심히 읽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는 무려 13년 동안 방황합니다. 어머니가 그 아들 때문에 눈물을 흘린 것이 13년입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절대로 낙심하지 않았어요. 이것이 참으로 위대합니다. 왜요? 부활신앙이 있었으니까요. 내 아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리시지 않을 것이다, 내 아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이것이 무슨 믿음입니까? 그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의 일꾼 될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어떤 사람을 놓고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이젠 틀렸다, 다 끝났다해서는 부활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에는 끝났다는 일이 없어요. 그런고로 중생 합니다. 기적을 믿습니다. 영생을 믿습니다. 또 하나, 성화 의지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나타내실 때에 어느 누구라도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그 믿음, 거기서 정말 고목에 꽃이 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위대한 믿음, 여기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가 있습니다. 그 부활신앙적인 믿음을 우리가 오늘 본받아나갈 때, 거기에 바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있는 것입니다.
'◑ 설교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설교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말씀을 가르치라(신명기 11:18-25) (0) | 2023.03.08 |
---|---|
불성문법(롬2:1~13) (0) | 2023.02.26 |
연합된 생명(롬6:1~14) (0) | 2023.02.26 |
영광된 소망(롬8:18~30) (0) | 2023.02.26 |
참 이스라엘(롬2:17~29) (0) | 2023.02.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