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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불성문법(롬2:1~13)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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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문법(롬2:1~13)

 

 

사도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줄기차게 사람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인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철저한 죄인이요, 구제 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거듭거듭 강조합니다. 내가 그러한 죄인임을 인정하고야 비로소 은혜를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에 나의 죄인 됨을 절반만 인정한다고 합시다. 그러면 은혜도 절반밖에는 경험하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완전 죄인임을 인정해야만 완전 은혜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이든 지간에 이 모습 이대로가 다 은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이라도 마음에 아직도 걱정이 있고 근심이 있습니까? 혹이라도 원망, 불평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의 죄인 됨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일본사람들 예수 안 믿는 것 참 이상하다, 왜 안 믿을까 합니다. 저들은 우리보다 백년 먼저 선교를 받았거든요. 또 한때는 순교자도 냈어요. 그리고 한때 상당수의 사람들이 예수 믿었던 때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일본 전 인구의 1%밖에 예수를 안 믿습니다. 왜 이렇듯 시원찮을까--이 문제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나름대로 이 소리 저 소리, 글도 써보고 얘기도 해봅니다마는 그 중에서 어떤 분이 지적한 말 한마디가 마음에 들어서 제가 소개해봅니다. 그는 일본사람들 안 믿는 것은 '사무라이 정신' 때문이라고 지적했어요. 사무라이 정신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일종의 '무사도'입니다. 이 정신은 절대로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정신입니다. 만일에 어려워지고 잘못됐으면 스스로 칼로 배를 찌르고 죽을지언정 잘못했다고는 인정을 하지 않아요.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이 같은 맹랑한 고집이 있는 한 예수 믿을 수 없지요. 죽어도 회개가 없으니까요.

내가 잘못했습니다. 온전히 내 잘못입니다. 완전히 잘못됐습니다-이렇게 인정하고야 예수 믿을 수 있는 것인데 잘못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인정을 하지 않아요. 아예 잘못했다는 말하는 것을 못 배웠어요.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 소리는 죽어도 안하고 스스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이 고집 때문에 예수 믿기 어렵다-이런 얘기입니다.

세상에는 오늘도 집단이건 개인이건 스스로 잘못을 인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아이들을 키워봐도 그런 현상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스스로 잘못을 저질러놓고 책망을 듣던가 매를 맞던가 하면 "잘못했습니다"하는데, 어떤 아이는 하루종일 때려도 항복을 하지 않아요. 스스로 다 알면서도 끝까지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잘못했다는 소리만 하면 용서해준다고 얼러도 들어먹지 않아요. 시인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못된 심성입니다. 이런 심성은 꼭 있습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무릇 사람이라면 "I am sorry"를 정직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고는 은혜를 받아들일 수가 없고,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지난 시간에 사도 바울은 율법을 가진 사람들 곧 유대사람들의 죄를 말씀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는 율법 없는 이방사람들의 죄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방사람도 죄인이다,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넓은 의미의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사용할 때가 있고 좁은 의미로 사용할 때가 있는데, 이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율법은 십계명을 비롯한 구약적 율법인 것입니다. 법이 있고야 죄가 죄로 성립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으니까 살인이 죄가 된다, 만일에 그 법이 없다면 살인이 죄 안될 것이다--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기준이 없으니까 죄가 죄될 수 없다--이렇게 하려 하는데, 오늘 로마서는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요. 죄를 지었는데 율법이 없었다면, 혹은 율법을 몰랐다면 죄를 죄로 모르고 있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죄는 죄다, 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이를테면 이런 경우와 같습니다. 내가 병에 걸렸어요. 그런데 내가 병을 몰라요. 아픈 것도 느끼지 못해요. 그러나 병들었고, 지금 죽어가고 있어요. 이 경우, 내가 병을 모른다고, 병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한다고 병 안 걸린 것입니까?

내가 율법을 알건 모르건, 십계명을 알건 모르건 죄인은 죄인인 것입니다. 죄는 이미 지었어요. 그 죄가 죄 아니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명심할 것입니다. 법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죄는 죄다, 그 말씀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은 때때로 법 자체를 부인하려고 해요. 법이라는 게 있으니까, 살인하지 말라는 법이 있으니까 살인하게 되고 간음하지 말라는 법이 있으니까 간음하게 되는 것 아니냐, 그 법이 없으면 되겠다--이렇게 법 자체에, canon 자체에 도전하는 마음이 있어요. 참으로 무서운 마음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법을 부정해버려요. 나는 몰랐다. 나는 그런 법 모른다, 이래버립니다. 또 하나는, 법을 축소하거나 왜곡하려고 합니다. 이래서 자기의 죄를 죄 아니라고 우기려 하는 못된 성품이 있습니다. 개중에는 철학적 방법도 있습니다. 그 하나가 공리주의입니다.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조그마한 악은 행할 수밖에 없었다, 보다 작은 악을 행해서 보다 많은 의를 이루려고 한다, 합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서 '내가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한다, 내가 나라를 위하여 요만큼 죄를 지었다, 그런고로 이것은 죄라고 할 수 없다, 죄라 하더라도 이것은 하찮은 죄에 불과하다'--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철학적 방법이 공리주의입니다. 또 하나는 결과주의입니다. 죄는 죄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좋은 결과가 왔으니 좋은 것이 아니냐, 합니다. 결과가 방법을 정당화한다고 합니다. 결과가 좋으면 됐지, 합니다. 거창한 말인 것 같지만 별 것 아니예요.

자고로 유명한 철학자들은 대체로 아내가 악처였어요. 그런데 이 악처가 왈 "내가 못된 마누라인 덕분에 당신이 철학자가 된 것 아니냐"한다면 말되는 것입니까? 대개 보며 학자들이 그런 경우가 많아요. 아내가 시원치 않으니까 책이나 들여다보고, 그러느라니 철학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내가 좋으면 마누라 들여다보느라고 공부 제대로 했겠어요?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도 유명한 악처였다 하지 않습니까? 그래놓으니 소크라테스 이 양반이 집에는 있기 싫고 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진리 가르친다고 하다가 철학자가 된 것일 법한테, 결국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고, 이러니 크산티페 여사도 "당신 위대하게 된 것도 다 내 공로 아닌가요?" 할 법하지 않습니까? 결과를 놓고 이런 식으로 합리화하려 하는 것, 못된 심성입니다. 좋지 않은 심성입니다. 못된 것은 못된 것이지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제 와서 그 결과를 가지고 방법을 정당화하려 하는 것은 안될 일이지요.

또 하나는 정반합(正反合)의 논리입니다. 이것은 변증법적 사고 방식입니다. 논리전개를 3개의 단계로 나눈 것인데, 말하자면 하나의 판단()과 이것에 모순되는 다른 판단()이 더한층 높은 종합적인 판단()에 통합되는 과정을 정반합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합()을 이루기 위해서 반()은 필요하다는 논리입니다. 더 깊은 철학적 얘기는 이 시간에 더 하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저런 식으로 생각하기로 들면, 악은 악이지마는 완전한 악이 아니요,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며 축소될 수도 있는 것이며 의미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이렇게 스스로 변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죄 아니라고, 큰 죄를 작은 죄라고 강변하게 되는데 이것이 인간의 못된 심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법에서 빠져나가려 하고, 법을 몰랐다 하고, 때로는 세상이다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가피했다--이렇게 둘러대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인간을 둘로 나누어서 보아라 합니다. 하나는 율법 있는 자, 하나는 율법 없는 자, 다르게 말하면 유대사람과 이방인, 하나님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좀더 구체적으로는 십계명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 혹은 좀더 깊이 생각해서 진리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오늘도 보면 죄인은 죄인인데 두 가지가 있지 않습니까? 알고 죄를 짓는 자와 모르고 짓는 자가 있어요. 자신을 놓고 보더라도 모르고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알고 할 때가 있거든요. 그런데 많은 것을 아는 사람, 법을 잘 아는 사람, 많이 공부한 사람, 성경공부도 많이 한 사람이라면 똑같은 죄를 지었어도 이런 사람은 죄가 더 무거워요. 알고 지은 것이니까요. 무지해서, 무식해서, 몰라서 지은 죄보다 알고 지은 죄가 훨씬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가 아닙니까?

여기서 십계명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사람들이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저들은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어요. 본문에서 바울이 아주 따끔하게 고발을 하는데 보세요.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다,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하심을 얻으리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율법을 행하는 바가 없어요. 그러면서 율법 아는 것 가지고 자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율법을 안다, 그러나 저 이방사람들은, 저 개 같은 사람들은 율법을 모른다, 우리는 율법을 아는 민족이다--이렇게 자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저들을 꾸짖었습니다. 행동은 다른 것 하나도 없는 너희들은 율법을 안다고 하는 것만으로 마치 율법을 행하는 것처럼, 마치 의인이 된 것처럼 착각을 하는데, 그래서 죄가 더 크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지식과 의를 혼동하지 마세요. 내가 알고 있다 해서 그 자체로 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별히 지성인들은 많이 알아요. 사랑이 어떻다, 믿음이 어떻다, 인간이 어떻다, 인간관계가 어떻다, 말을 얼마나 잘합니까? 그러나 행동은 엉망이에요. 이게 문제 아닙니까? 반면에 어떤 사람은 옳은 건지 그른 건지 모르고 행하지만 곧잘 해요. 알 것 다 알면서도 행동이 따르지 않는 지성인과, 아는 것 하나 없는데도 행동은 제대로 하는 자--어느 쪽이 옳은 것입니까? 율법의 의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너희들은 안다고 만 했지 행하는 건 없지 않느냐, 그렇다면 유대사람들은 특권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유대 사람되고 율법을 알았기 때문에 죄가 더 클 뿐이다--바울은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듣는 자도 아니요, 아는 자도 아니요, 행하는 자라야 한다, 율법 있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오늘의 주제로 돌아가서 율법 없는 자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율법 없는 자는 율법 없이 심판을 받는다--바울의 뜻은 이렇습니다. 본문의 뜻인즉 율법 없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율법이 없다는 것일 뿐이에요. 기록된 율법은 없어요.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십계명을 몰랐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 십계명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나님의 법인 이 십계명을 알고 있지는 않았어요. 그러나 'Unwritten Laws'--기록되지 아니한 이른바 불성문법은 가지고 있어요. 기록된 율법만 없달 뿐이지 기록되지 아니한 율법은 누구나 다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9절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그 속에, 우리들 속에 다 있어요. 그런고로 결론지어 말한다면 불법이 있고 무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법 없는 사람은 없어요. 다만 법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요. 사람마다 그 속에 법은 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파스칼의 소품 집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항해 도중 배가 파손되어 유독 한 사람만 살아남아 표류하다 어느 섬에 닿았습니다. 그 섬에 들어서자마자 원주민들이 수백 명 달려오더니 이 사람을 추켜세우면서 "만세! 임금님 만세!"하고 외치는 거예요. 이 사람은 어리둥절했어요. 그러나 사실을 밝히려 해도 어디 말이 통합니까? 원주민들은 이 사람에게 옷을 갈아 입혀준다, 음식을 해준다, 반지를 끼워준다 하고 부산을 떨더니 이 사람을 턱하니 왕궁으로 모시는 거예요. 이래서 별수 없이 이 사람은 왕노릇을 하게 됐어요. 알고 본즉 그렇게 된 곡절은 이러했습니다. 며칠 전에 그 섬의 임금이 배를 타고 나갔다가 실종됐어요. 기다려도 왕이 돌아오지 않는 거예요. 이렇게 왕을 잃어버리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들은 평소 왕을 가까이서 본 일이 별로 없어요. 그 모습이 그저 어렴풋할 뿐인데 어느 날 난데없이 표류해온 이 사람을 보아하니 자기네 왕과 닮은 것만 같았어요. 그래 무턱대고 이 사람을 왕으로 모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보좌에 면류관을 쓰고 앉았지만 왕 노릇 할 줄을 몰라 처음에는 무척 어려웠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는 차츰 익숙해져서 이제는 왕 노릇 하는 게 제법 재미가 나는 거예요. 잘 얻어먹고, 떠받들리고, 명령을 하고, 궁녀들도 많고…… 꽤 재미가 납니다. 이렇게 거짓 왕이 되어서 얼마를 지내는데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두려움이 엄습해오기 시작합니다. '내가 거짓 왕인 걸 아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자기가 왕이 아니라는 것을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갈수록 죄의식은 더 커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왕이 아니오" 한다면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얻어먹은 거요?" 할 것이 아닙니까?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요. 회개도 못해요. 이제는 그런 중에 더욱 고민이 생겨요. 진짜 왕이 표류됐다는데 그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당장에 가짜임이 들통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람은 생각합니다. 만일에 진짜 왕이 돌아온다면 몰래 죽여버려야지--그리고는 스스로 양심에 가책이 되고 괴로운 나머지 발광을 해요. 날로 성품이 나빠져서 애꿎은 백성들을 얼마나 괴롭히는지 몰라요. 모조리 때리고, 죽이고, 학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폭군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입니다. 왜요?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습니다. 분명히 자기가 자기에게 법이 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다니(14)"라고 말씀합니다. 스스로는 알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설명해줄 필요도 없는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알건 모르건, 성경을 알든 모르든 그것은 본성인 것입니다. 이 본성을 가리켜 성경은 양심이라고 말씀합니다. 본성이란 본래적인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본성이 있어요. 본성은 좋은 방향으로도 있지만 나쁜 방향으로도 있어요.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쓰는 설화입니다. 어느 날 거북이가 강가에 앉아 있는데 전갈 한 마리가 어정어정 걸어오더니 "강 저쪽으로 건너가야겠으니 네 등에 태워서 좀 건네 달라." 거북이는 몸을 움츠리며 말합니다. "싫다, 너는 쏘는 본성이 있지 않느냐 태워다주다가 네가 쏘아버리기라도 하면 나는 꼼짝없이 죽고 말 것이 아니냐, 아서라. 내가 왜 그같이 위험한 일을 하겠느냐." 그러니까 전갈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도 모르느냐. 내가 너를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도중에 내가 너를 쏘면 네가 죽고, 네가 죽으면 나도 빠져죽고, 둘 다 죽을 것이 아니냐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너를 쏘아 죽인단 말이냐 이건 논리적이지 않느냐, 이놈아." 듣고 보니 논리적으로 말이 되는 것은 같아요. 거북이는 여기서 그만 속고 말았어요. "그렇다면 내가 봉사하지." 전갈을 등에다 태우고 갑니다. 아니나다를까, 강을 절반 넘어갔을 때에 전갈은 꼬리를 내려서 거북이를 툭 쏴버렸어요. 독이 퍼지면서 거북이가 죽어갑니다. "이놈아, 너 여기서 쏘면 너도 죽고 나도 죽는데 왜 쏘느냐"하고 거북이는 죽어가면서 한마디 합니다. 전갈이 뭐라고 대답했는고 하니 "나는 쏘는 것이 본성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죽고 나 죽는 줄 다 알면서도 남 죽이고 저 죽는 것이 못된 사람의 본성이에요. 본성이 그 모양인 것입니다. 논리적인 게 아니예요. 합리적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이 나빠졌어요. 그러나 그 본성에 의해서 심판을 받습니다. 마치 거울과 같습니다. 거울 가운데는 깨진 거울이 있지요. 혹은 더러워진 거울이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나이가 많은 분들은 웬만하면 거울 자주 보지 마세요. 그저 하루에 한 번 정도나 보고 말 것입니다. 옛날, 거울이 없었던 때에는 그저 연못에나 가서 물에 한 번 비춰보고 이게 내 얼굴이구나 할뿐이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자기 얼굴을 볼 길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새같이 쉬 늙지 않았습니다. 실망할 것도 없었습니다. 내 얼굴 못 보니까.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 거울이 처음 나왔을 때입니다. 한 나무꾼이 결혼한 지 1년도 안됐을 때인데 나무를 지고 시장에 나가 팔아서는 그 돈으로 거울을 샀어요. 그것을 애지중지 들고 와서 자기 집 안방에 턱 걸어놓았어요. 밖에서 돌아온 색시가 그 거울을 들여다보았는데, 예쁜 색시가 보이는지라 이 색시, 깜짝 놀라 방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면서 탄식을 합니다. '이 양반이 결혼한 지 1년도 안됐는데 벌써 딴 색시를 보았구나!' 새색시는 목을 놓아 울면서 시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저것 좀 보세요. 어머니"하고 색시는 거울을 가리키면서 "그이가 벌써 딴 색시를 데려다 놨어요. 예쁜 색시를요"하고 가슴을 칩니다. 시어머니가 거울을 봅니다. 떡 보더니 "예쁜 색시가 다 뭐냐! 이 애가 어디서 다 늙어 쭈그러진 할망구 하나 데려다놨구나! 첩을 데려올 것이면 젊은것을 데려오지, !" 두 사람 다 제 얼굴을 못 본 사람들이거든요. 보세요. 자기 얼굴은 분명히 자기 얼굴대로 있지요. 그러나 거울을 보기까지는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분명히 죄인입니다. 그러나 내 얼굴을 내가 못 봅니다. 율법을 보면서, 성경을 보면서 비로소 내 모습을 바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양심이 있지요. 그러나 양심이 다 무디어졌어요. 깨진 거울과도 같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 편이나, 복음서에는 요한복음 89절 한 곳에만 양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디모데전서 119절에 보면 "착한 양심", 15절에는 "선한 양심", 39절에는 "깨끗한 양심", 심지어는 "화인맞은 양심"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우리는 "너는 양심도 없냐"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이럴 때에 대꾸하는 것 보세요. "양심이 없는 게 아니다, 네 양심, 내 양심이 다른 거지." "내 양심은 625때에 다 타버렸지, 아직도 있냐 그게." "양심? 그거 귀찮은데 뭐하러 가지고 다녀? 그런 건 집에 두고 다닌다"--여러 가지가 있지요.

양심,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이 더러워졌고, 이지러졌고, 깨져서 이젠 양심 구실을 못해요. 한마디로 거울 구실을 못해요. 이제는 본성을 볼 수가 없어요. 내가 내 모습을 볼 길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왔다,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양심이 없다고 해서 없는 것입니까? 핑계할 수가 없어요. 죄인은 여전히 죄인이더라, 그 말씀입니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 기록된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밝은 양심을 가지게 되는데, 설사 기록된 바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이런 귀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난 율법을 모른다, 이것으로 핑계할 수는 없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성경에 예수님의 말씀하신 바 '황금률'이라는 것이 있지요?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다--황금률입니다. Golden Rule입니다. 이 법은 말을 조금 바꾼다면 성경 아니고도 우리네한테 얼마든지 있어요.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 소리가 그 소리 아닙니까? 가끔 우리는 '글법이 따로 있나'라고도 합니다. 육법전서 따로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의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남의 눈에 눈물을 내면 내 눈에 피가 난다'--이것도 황금률입니다. 표현이 조금 다를 뿐이지요. 가끔은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라는 말도 합니다. 이것도 황금률과 같은 의미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그게 있어요.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픈 거예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지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든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라든가 '서로 사랑하라'라든가 하는 귀중한 말씀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의 말 속에, 우리의 풍속 가운데는 상당한 법이 있어요. 율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마음에 있는 법입니다. 본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율법으로 인해서 이것이 되살아납니다. 법이 되살아나고 더 분명하게 되고 더 생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살아나는 순간, 깨끗한 양심이 살아나는 순간, 거울이 밝아지는 순간, 나는 더 무거운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울을 깨려고 해요. 거울을 안 보려고 해요. 일부러 거울을 닦지 않아요. 왜요? 보기 싫으니까요. 내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 술을 먹는 거예요. 맑은 양심으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퍼마시고, 다음날 아침에는 속쓰리고, 돈 없어졌고, 망신했고…… 그럴 줄 뻔히 알면서도 그랬어요. 맑은 의식, 양심을 흐리게 한 짓이에요. 거울에 먹칠하는 사람이나 똑같아요.

깨끗해야지요. 깨끗한 거울로 비춰보고, 깨끗한 양심으로 판단해야 되겠는데, 일부러 어지러워지려 하고 일부러 더러워지려 하는 것입니다. 고의적이지요. 이게 얼마나 악한 일입니까? 이제 조금 더 성경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봅시다. 모세가 가르쳐준 십계명을 잘 보세요.

출애굽기 20장에 나옵니다. 그런데 안식일 지킨 이야기는 만나가 내릴 때, 곧 출애굽기 1623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십계명 주시기 이전에 안식일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법이 십계명이라고 하는 틀로, 문서로 되기 이전에 이미 불성문법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꾸 아브라함으로 올라갑니다. 율법은 모세로부터 시작이 되고 불성문법, 기록되지 아니한 더 온전한 그 법은 아브라함 때부터 있어온 것이다--아브라함 때부터다, 모세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온 것이다, 아니 그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하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말씀함입니다. 이방인들과 유대사람들을 다 포함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 중요한 결론이 나옵니다. 16절에 가서 보면 "곧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합니다. 내 복음,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입니다. 유대사람과 이방사람이 따로 없이 다 죄인이고, 다 예수로만 구원받는 것이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다--이것이 바울의 '내 복음'입니다, 여러분도 나름대로 내가 믿는 복음이 있을 거예요. 그러나 바울이 생각하는 복음은 그런 것입니다. 그 복음 앞에서 진정으로 은밀한 것이 다 드러나게 된다,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이 율법으로 인해서 어느 정도 깨끗해집니다. 내가 내 모습을 알게 됩니다. 죄인 된 모습을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로써는 부족해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사실은 십자가의 은혜 앞에서 내 모습을 볼 때라야 정말 나의 죄인이에요. 모든 것이 다 드러나요. 만 가지의 어느 것 하나도 죄 아닌 것이 없어요. 십자가 앞에서는 모든 것이 다 깨끗하게 드러납니다. 완전한 죄인이 됩니다. 동시에 그 은혜 안에서 완전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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