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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한 것 (빌립보서 3장 1절~9절)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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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고상한 것 (빌립보서 319)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절대가치를 알고 절대가치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가치를 모르거나 부인하고, 상대가치에 매달려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217, 18절의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요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어려운 성서신학적인 해석은 접어두고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 말씀을 한번 이해 해보십시다. 관제(灌祭)란 피를 제물 위에 쏟아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살아 있는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 양의 목을 쳐서 피가 치솟아 오르면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곧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의 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가치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과 그를 향한 정열, 그리고 결단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혹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단 한번도 이러한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그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할망정 기쁜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상과 이러한 가치,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열----이것이 행복이요 절대가치입니다. 그럴진대 왜 이리저리 쫓아다닙니까? 무엇이 더 좋은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first priority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지개를 좇아가는 어린아이처럼 대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해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나는 헛된 생을 살았노라, 인생이 허무하다' 라고 후회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이렇게 분류해놓고 있습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는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입으로는 젖을 빨고 손으로는 다른 한쪽의 젖무덤을 만지면 그만입니다.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만족해합니다. 유아기에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유년기로 접어들면 장난감이 중요해집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당시의 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학생이 옆에 있으면 정신이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남학생을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레임과 행복은 잠깐만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덧없습니다. 청년기가 되면 지식을 따릅니다. 아는 것, 깨닫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진리나 지식이 중요하기에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려고 애를 씁니다. 새로운 것, 좀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채울 수 없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40대가 되면 사업을 원합니다. 온 생애를 걸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사업적인 욕망이 커집니다. 그러다가 하나라도 이루면 얼마나 기쁘고 만족스럽습니까? 그러나 그것 또한 덧없는 것입니다. 이내 후회로 끝나고 맙니다.

50대로 접어들면 명예를 필요로 합니다. 요즈음 보면 무슨 의원이다, 위원이다 하면서 서로들 한자리씩 차지하려고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의 명예가 필요한 것입니다. 몇억, 몇십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고 다닙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정신없는 사람이라거니, 그 돈으로 편안히 살지 뭣하러 쓸데없는 곳에 뿌리고 다니느냐거니 합니다만, 그때는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명예를 얻으려고 양심을 팔아먹고 도덕성을 팔아먹습니다. 소중한 인격까지 내던지는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이토록 시끄럽습니다.

얼마 안가 곧 후회하고 말 것입니다. '그 부질없는 짓에 왜 그토록 매달렸던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60대가 되면 여러 모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힘도 부치고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이제는 그저 먹는 것에만 관심이 갑니다. 세상 것이 다 그림의 떡입니다.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사업이 제일 중요한 줄로 알았습니다. 자녀교육이 중요한 줄로 알고 거기에 온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습니까? 후회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건강, 자기 욕망만을 채우느라고 바쁩니다. 그야말로 피곤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아무 소용없음을 깨닫습니다. 순간순간 이것이 좋고, 저것이 귀하고, 거기에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다가 사기 당하고 맙니다. 잘못 알고 살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바닷가에 나가보면 매끌매끌한 조약돌이 참 많이 깔려 있었는데 아주 예뻤습니다. 친구들과 몰려나가면 저마다 예쁜 돌을 줍겠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의 어떤 분이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인데 저도 그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외어보면 가사가 대충 이렇습니다.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어여쁜 돌 주워보면 다른 돌만 못하여 새 것으로 바꿉니다. 바닷가의 모래밭엔 돌멩이도 너무 많아 맨 처음 찾던 돌을 다시 찾다 해가 집니다.' 예뻐서 손에 든 것은 보지 않고 딴 것만 봅니다.

저것이 더 좋아 보여 이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워요. 줍고 또 줍고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맨 처음 가졌던 것이, 그 첫사랑이 제일 좋은 것 같아서 다시 그것을 찾으려다 해가 진다는 자못 철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피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것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마침내 니힐리즘에 빠지고 맙니다. 내 일생을 여기서 이대로 마쳐도 괜찮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렇지 못해서 허무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 매여 허덕이고 있어서 피곤한 것입니다. 하루빨리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바로 이것이다,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일생을 살아왔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은 절대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갈다가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옛날에는 은행이 없어서 보화가 있으면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아들에게조차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땅속에 묻어둔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그것은 임자 없는 보화가 되고 맙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그런 것은 발견한 사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한 곳이 남의 땅이라면 땅 임자에게 절반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밭을 갈다 보화가 든 항아리를 발견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공개해버리면 부득불 밭의 주인과 반반씩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 귀한 보화를 혼자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나눌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어두고는 밭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밭을 사는 이 사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값을 흥정할 것이 아닙니다. 얼마고 간에 사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사고 마침내 보화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1344)," 여러분,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없다면 아직 천국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1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 헤매는 진주 장사가 마침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골동품 장사가 시골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간에서 개가 밥을 먹고 있는데 그 밥그릇이 아주 귀한 골동품이더랍니다. 그래 그것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밥그릇을 사자고 하면 팔지 않을 것 같아 일단 개를 사자고 주인에게 흥정합니다. 별 볼일 없는 개를 후하게 십만 원을 주겠다고 하니 주인이 기꺼이 그러자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를 샀습니다. 이제 밥그릇만 손에 넣으면 됩니다. "주인장, 그 개 밥그릇까지 끼워서 삽시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안됩니다. 그 밥그릇 때문에 개를 백 마리도 더 팔았는데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골동품 장사나, 개 밥그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것으로 개를 팔고 앉아 있는 주인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절대 가치란 바로 그 사람의 절대가치를 높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가장 고상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위페레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excellency, the best'입니다. 가장 귀한 것, 탁월한 것,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 가치 자체도 소중할 뿐더러 그렇게 여긴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알고 그렇게 여김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가치관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나니 전에 좋아하던 것, 유익하게 여기던 것이 다 시시해져서 그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봅시다. 사도 바울에게는 물려받은 소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커다란 특권입니다. 순종(純種) 이스라엘사람이요, 언약과 축복과 선민된 특권을 가진 사람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라 함은 왕족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사울 왕이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히브리의 종교문화에 정통한 히브리인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리새인이라면 큰 명예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남보다 특별히 깨끗하고 특별히 경건하고 특별히 열심이 있고 특별히 율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바리새파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은 열심파였다는 말입니다.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훼방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의와 경건을 말씀함입니다. 적어도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수준보다 높고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였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나니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어졌습니다.

지식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종교적인 교만, 의식적인 교만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알고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소유하는 인격으로 바꾸어 삽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 절대 가치의 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기 위하여 전에 좋아하고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제미오덴' 인데,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우리말로는 '잃어버린다' 라고 다소 약하게 번역이 되었습니다마는 원뜻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버린다' 입니다. 저 같으면 '잘라버린다'라고 고쳐서 번역하고 싶습니다. 내 던져버린다는 말입니다. 버리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시는 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잃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빼앗기는 일이 있고 사기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은 빨리 잊어버립시다. 다 지난 일인데 잊지 못하고 매여 있는 것을 봅니다.

가끔 소중히 여기던 것을 분실하고 많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봅니다. 잃어버린 것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내가 빼앗긴 것이 아니라, 분실하고 상실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내버리고 잘라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었기에 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내버립니다. 여러분은 혹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고나서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것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 남 주고 맙니다.

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더럽게 여겼다는 것이지요.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 두면 오염된다----이렇게 여기고 멀리 버렸습니다.

셋째로, 좀더 나아가 해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을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돈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더럽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돈에 미쳤던 사람은 다시는 돈과 인연이 없습니다. 돈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성 관계에서 빈번이 실수하는 사람은 다시는 이성을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명예나 인기 같은 것을 챙기려다 번번이 실수하고 괜한 혈기를 부리다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될 뻔한 사람, 이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게 해로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내게 해로울 뿐입니다. 내게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돈 만지지 않아야 할 사람 많습니다. 깨끗이 마음을 끊어야 합니다.

주위에 보면 액세서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교인 한 사람이 스스로 소중히 여기던 다이아반지를 비롯하여 목걸이, 팔찌 등을 한줌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것을 좋은 일에 써주세요." 다 내어놓으면서 지난날을 이야기합디다. 보석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보석가게 앞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하다가 마침내는 사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석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보석을 모으게 되었는데, 어느 날 중생하여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소중하던 것들이 하찮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질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돌멩이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처박아두었으나 그것이 가끔 시험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없애기로 하고 교회로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들을 받으면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순간부터 저들의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울까!' 시시한 것에 매여 사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치는 시원치 않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속이 알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겉치레가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요즈음도 돈푼 깨나 있는 사람 가운데 집이라든가 가구 같은 것에 지나치게 사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습니다만, 그에게도 양심은 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가난하게 사는 형제나 친척들을 만나면 마음이 꺼림칙합니다.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건강하겠습니까?

좀 적당히 살아가십시다. 제가 어쩌다 버스를 타게 되면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전에 없이 좌석을 양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절대로 앉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앉으면 마음이 아프고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픕니다. 굳이 저는 다리 아픈 편을 택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물질적으로 좀 낫게 살면서 마음 괴로운 생활일랑 마십시오. 검소하게 바르게 살면서 양심 편한 것이 건강상 좋습니다. 버려야 할 것 버리고, 끊어야 할 것 끊을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귀한 것, 보다 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 지식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나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자랑이요 그리스도만이 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가는 것이 나의 행복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이 기쁨 외에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그밖의 것은 추구해보았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분명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설명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디카이오스.'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되고, 이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의,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적자냐 흑자냐를 따지며 살아갑니다.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집니다마는 어떠한 손해를 지불해서라도 예수님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어떠한 적자를 지불해서라도 보다 큰 흑자를 얻었으면 얻은 것이지 잃은 것이 아닙니다. 때론 물질을 손해보면서 인격을 얻습니다. 명예를 손해보면서 신앙을 얻습니다. 이것이 잃은 것입니까, 얻은 것입니까? 좀더 큰 것, 좀더 귀한 것, 좀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얻었기에 그밖의 것을 미련없이 내 던집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박덕은 교수님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아까운 유익을 버립니다.

당신 앞에 발견되기 위하여 녹슨 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당신을 얻기 위하여 끝없이 나의 경주를 계속합니다.

당신을 얻기 위하여 키 작은 나의 생애를 그대로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다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했기에 다 안 것처럼 만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영생 안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얻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 기쁨, 이 감격, 이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장 고상한 것 (빌립보서 319)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절대가치를 알고 절대가치를 누리며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절대가치를 모르거나 부인하고, 상대가치에 매달려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습니다.

빌립보서 217, 18절의 말씀은 제가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요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어려운 성서신학적인 해석은 접어두고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으로 이 말씀을 한번 이해 해보십시다. 관제(灌祭)란 피를 제물 위에 쏟아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살아 있는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 양의 목을 쳐서 피가 치솟아 오르면 그 피를 받아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곧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의 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가치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과 그를 향한 정열, 그리고 결단력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여러분, 혹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그렇다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단 한번도 이러한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면 그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그분을 위해서라면 비록 완전하게 이루지는 못할망정 기쁜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대상과 이러한 가치, 그리고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정열----이것이 행복이요 절대가치입니다. 그럴진대 왜 이리저리 쫓아다닙니까? 무엇이 더 좋은가,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first priority인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무지개를 좇아가는 어린아이처럼 대상이 변하고 마음이 변해서야 어떻게 하겠습니까? 인생을 다 살고 나서 '나는 헛된 생을 살았노라, 인생이 허무하다' 라고 후회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성장과정에 따른 가치관의 변화를 이렇게 분류해놓고 있습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는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입으로는 젖을 빨고 손으로는 다른 한쪽의 젖무덤을 만지면 그만입니다.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만족해합니다. 유아기에는 그것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유년기로 접어들면 장난감이 중요해집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당시의 나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학생이 옆에 있으면 정신이 없었습니다. 좋아하는 남학생을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마구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 설레임과 행복은 잠깐만에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덧없습니다. 청년기가 되면 지식을 따릅니다. 아는 것, 깨닫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진리나 지식이 중요하기에 스스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려고 애를 씁니다. 새로운 것, 좀더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채울 수 없는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40대가 되면 사업을 원합니다. 온 생애를 걸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야겠다는 사업적인 욕망이 커집니다. 그러다가 하나라도 이루면 얼마나 기쁘고 만족스럽습니까? 그러나 그것 또한 덧없는 것입니다. 이내 후회로 끝나고 맙니다.

50대로 접어들면 명예를 필요로 합니다. 요즈음 보면 무슨 의원이다, 위원이다 하면서 서로들 한자리씩 차지하려고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을 해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의 명예가 필요한 것입니다. 몇억, 몇십억을 아무렇지도 않게 뿌리고 다닙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을 두고 정신없는 사람이라거니, 그 돈으로 편안히 살지 뭣하러 쓸데없는 곳에 뿌리고 다니느냐거니 합니다만, 그때는 명예가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그렇습니다. 명예를 얻으려고 양심을 팔아먹고 도덕성을 팔아먹습니다. 소중한 인격까지 내던지는 사람들로 인하여 사회가 이토록 시끄럽습니다.

얼마 안가 곧 후회하고 말 것입니다. '그 부질없는 짓에 왜 그토록 매달렸던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무슨 소용입니까? 60대가 되면 여러 모로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힘도 부치고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이제는 그저 먹는 것에만 관심이 갑니다. 세상 것이 다 그림의 떡입니다. 내 입을 즐겁게 하는 것만 추구하게 됩니다.

때로 우리는 사업이 제일 중요한 줄로 알았습니다. 자녀교육이 중요한 줄로 알고 거기에 온 정성을 쏟아 부었습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일이었습니까? 후회하는 사람을 많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건강, 자기 욕망만을 채우느라고 바쁩니다. 그야말로 피곤한 일입니다. 여러분,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결국에는 아무 소용없음을 깨닫습니다. 순간순간 이것이 좋고, 저것이 귀하고, 거기에 높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다가 사기 당하고 맙니다. 잘못 알고 살아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 바닷가에서 자랐습니다. 바닷가에 나가보면 매끌매끌한 조약돌이 참 많이 깔려 있었는데 아주 예뻤습니다. 친구들과 몰려나가면 저마다 예쁜 돌을 줍겠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면서 부르던 노래가 있었습니다. 고향의 어떤 분이 지어서 아이들에게 부르게 한 노래인데 저도 그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습니다. 기억나는 대로 외어보면 가사가 대충 이렇습니다. '바닷가의 모래밭에서 어여쁜 돌 주워보면 다른 돌만 못하여 새 것으로 바꿉니다. 바닷가의 모래밭엔 돌멩이도 너무 많아 맨 처음 찾던 돌을 다시 찾다 해가 집니다.' 예뻐서 손에 든 것은 보지 않고 딴 것만 봅니다.

저것이 더 좋아 보여 이것을 내려놓고 그것을 주워요. 줍고 또 줍고 하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맨 처음 가졌던 것이, 그 첫사랑이 제일 좋은 것 같아서 다시 그것을 찾으려다 해가 진다는 자못 철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여러분, 피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쓸데없는 것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착각했습니다. 마침내 니힐리즘에 빠지고 맙니다. 내 일생을 여기서 이대로 마쳐도 괜찮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 그렇지 못해서 허무한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에 매여 허덕이고 있어서 피곤한 것입니다. 하루빨리 꿈에서 깨어나십시오. 바로 이것이다, 이 순간을 위하여 나는 일생을 살아왔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은 절대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성경은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남의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갈다가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옛날에는 은행이 없어서 보화가 있으면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두었습니다. 아들에게조차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땅속에 묻어둔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그것은 임자 없는 보화가 되고 맙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그런 것은 발견한 사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한 곳이 남의 땅이라면 땅 임자에게 절반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밭을 갈다 보화가 든 항아리를 발견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공개해버리면 부득불 밭의 주인과 반반씩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 귀한 보화를 혼자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나눌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어두고는 밭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삽니다. 밭을 사는 이 사람의 기쁨과 감격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값을 흥정할 것이 아닙니다. 얼마고 간에 사기만 하면 됩니다.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밭을 사고 마침내 보화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1344)," 여러분, 이러한 기쁨이 있습니까? 없다면 아직 천국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1345)"라고 말씀하십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 헤매는 진주 장사가 마침내 값진 진주를 발견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진주를 산다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들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골동품 장사가 시골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문간에서 개가 밥을 먹고 있는데 그 밥그릇이 아주 귀한 골동품이더랍니다. 그래 그것을 사기로 마음먹습니다. 밥그릇을 사자고 하면 팔지 않을 것 같아 일단 개를 사자고 주인에게 흥정합니다. 별 볼일 없는 개를 후하게 십만 원을 주겠다고 하니 주인이 기꺼이 그러자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개를 샀습니다. 이제 밥그릇만 손에 넣으면 됩니다. "주인장, 그 개 밥그릇까지 끼워서 삽시다." 그러자 주인이 하는 말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안됩니다. 그 밥그릇 때문에 개를 백 마리도 더 팔았는데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골동품 장사나, 개 밥그릇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것으로 개를 팔고 앉아 있는 주인이나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입니까? 절대 가치란 바로 그 사람의 절대가치를 높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가장 고상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위페레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excellency, the best'입니다. 가장 귀한 것, 탁월한 것,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함입니다. 그 가치 자체도 소중할 뿐더러 그렇게 여긴다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알고 그렇게 여김으로써 비로소 새로운 가치관이 수립되는 것입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나니 전에 좋아하던 것, 유익하게 여기던 것이 다 시시해져서 그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봅시다. 사도 바울에게는 물려받은 소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커다란 특권입니다. 순종(純種) 이스라엘사람이요, 언약과 축복과 선민된 특권을 가진 사람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라 함은 왕족을 자처하는 것이 됩니다. 사울 왕이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 히브리의 종교문화에 정통한 히브리인임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리새인이라면 큰 명예를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남보다 특별히 깨끗하고 특별히 경건하고 특별히 열심이 있고 특별히 율법을 많이 안다고 해서 바리새파라 하지 않았습니까? 교회를 핍박했다는 것은 열심파였다는 말입니다. 소신껏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훼방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의와 경건을 말씀함입니다. 적어도 일반사람들이 말하는 수준보다 높고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였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나니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어졌습니다.

지식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종교적인 교만, 의식적인 교만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알고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소유하는 인격으로 바꾸어 삽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 절대 가치의 것을 소유할 수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기 위하여 전에 좋아하고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다' 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제미오덴' 인데, 그 의미가 특별합니다. 우리말로는 '잃어버린다' 라고 다소 약하게 번역이 되었습니다마는 원뜻은 '희생을 지불하면서 버린다' 입니다. 저 같으면 '잘라버린다'라고 고쳐서 번역하고 싶습니다. 내 던져버린다는 말입니다. 버리는 것도 여러 가지입니다. 아시는 대로 잊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잃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빼앗기는 일이 있고 사기 당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내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분, 잃어버린 것은 빨리 잊어버립시다. 다 지난 일인데 잊지 못하고 매여 있는 것을 봅니다.

가끔 소중히 여기던 것을 분실하고 많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봅니다. 잃어버린 것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내가 빼앗긴 것이 아니라, 분실하고 상실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내버리고 잘라버린 것입니다. 스스로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었기에 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내버립니다. 여러분은 혹 그러한 경험이 있습니까?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고나서 그 동안 애지중지하던 것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고 다 남 주고 맙니다.

다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로,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더럽게 여겼다는 것이지요.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 두면 오염된다----이렇게 여기고 멀리 버렸습니다.

셋째로, 좀더 나아가 해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상대적이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이를테면 ''을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돈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더럽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번 돈에 미쳤던 사람은 다시는 돈과 인연이 없습니다. 돈과 가까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성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이성 관계에서 빈번이 실수하는 사람은 다시는 이성을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존심 때문에, 혹은 명예나 인기 같은 것을 챙기려다 번번이 실수하고 괜한 혈기를 부리다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될 뻔한 사람, 이제는 자존심을 버려야 합니다. 내게 해로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자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내게 해로울 뿐입니다. 내게 약점이 있기 때문에 해로운 것입니다. 여러분, 돈 만지지 않아야 할 사람 많습니다. 깨끗이 마음을 끊어야 합니다.

주위에 보면 액세서리에 연연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교인 한 사람이 스스로 소중히 여기던 다이아반지를 비롯하여 목걸이, 팔찌 등을 한줌 가지고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것을 좋은 일에 써주세요." 다 내어놓으면서 지난날을 이야기합디다. 보석을 굉장히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보석가게 앞을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것을 보기라도 하면 발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보고 또 보고 하다가 마침내는 사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석에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많은 보석을 모으게 되었는데, 어느 날 중생하여 은혜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소중하던 것들이 하찮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부질없는 짓을 했구나 하는 후회가 생깁니다. 돌멩이에 불과하다 생각하고 처박아두었으나 그것이 가끔 시험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예 없애기로 하고 교회로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분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들을 받으면서 제가 가만히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순간부터 저들의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자유로울까!' 시시한 것에 매여 사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치는 시원치 않은 인격을 가진 사람이나 하는 것입니다. 속이 알차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겉치레가 그렇게도 중요합니까? 요즈음도 돈푼 깨나 있는 사람 가운데 집이라든가 가구 같은 것에 지나치게 사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내 돈 가지고 내 마음대로 하는데 무슨 소리냐고 하겠습니다만, 그에게도 양심은 있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어서 자신의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가난하게 사는 형제나 친척들을 만나면 마음이 꺼림칙합니다. 꿈자리가 뒤숭숭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건강하겠습니까?

좀 적당히 살아가십시다. 제가 어쩌다 버스를 타게 되면 나이가 좀 들어서 그런지 전에 없이 좌석을 양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절대로 앉지 않습니다.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앉으면 마음이 아프고 서 있으면 다리가 아픕니다. 굳이 저는 다리 아픈 편을 택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물질적으로 좀 낫게 살면서 마음 괴로운 생활일랑 마십시오. 검소하게 바르게 살면서 양심 편한 것이 건강상 좋습니다. 버려야 할 것 버리고, 끊어야 할 것 끊을 때에 비로소 자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보다 귀한 것, 보다 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이 지식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나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자랑이요 그리스도만이 나의 기쁨이요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행복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아 나가는 것이 나의 행복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이 기쁨 외에 아무런 기쁨도 없습니다. 그밖의 것은 추구해보았자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분명코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설명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디카이오스.'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되고, 이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의, 그 의를 소유하는 것이 가장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적자냐 흑자냐를 따지며 살아갑니다. 손해냐 이익이냐를 따집니다마는 어떠한 손해를 지불해서라도 예수님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어떠한 적자를 지불해서라도 보다 큰 흑자를 얻었으면 얻은 것이지 잃은 것이 아닙니다. 때론 물질을 손해보면서 인격을 얻습니다. 명예를 손해보면서 신앙을 얻습니다. 이것이 잃은 것입니까, 얻은 것입니까? 좀더 큰 것, 좀더 귀한 것, 좀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얻었기에 그밖의 것을 미련없이 내 던집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박덕은 교수님의 시 한 구절을 소개합니다.

 

'당신을 위하여 아까운 유익을 버립니다.

당신 앞에 발견되기 위하여 녹슨 나의 형상을 회복합니다.

당신을 얻기 위하여 끝없이 나의 경주를 계속합니다.

당신을 얻기 위하여 키 작은 나의 생애를 그대로 바칩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다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했기에 다 안 것처럼 만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영생 안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얻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 기쁨, 이 감격, 이 능력 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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