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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좇으라(누가복음 9장 57절~62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다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서, 다같은 모습으로 살고, 다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같이 보이지마는 그 삶의 철학과 동기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생들을 사는 줄 압니다.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봅니다.
첫째는 쫓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운명이 있다 생각하고 '운명이다' '팔자다'하면서 질질 끌려가는 모습으로 삽니다.
원치 않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합니다. 나가고 싶지 않은 직장에 나갑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습니다. 모든 일이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고,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불가피하다고 하면서 딴에는 이것을 책임이라고도 하고, 의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밭을 매는 소만 코뚜리 꿰인 것이 아닙니다. 덜미를 잡힌 채, 멱살을 잡힌 채 하릴없이 끌려가는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은 생을 부득불 사는 것 같은, 그런 생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늘상 뜬구름 잡자는 듯이 삽니다. 현실이나 객관적 사실은 무시하고, 뭔가 앞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허황하게, 무지개 잡으러 가는 소년처럼 삽니다. 나름대로 세운 이상을 향하여 좇아갑니다. 나름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소원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가 그리고 세워놓은 꿈을 향하여 좇아갑니다.
평생이 다하도록 아직도 이루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지막 순간에라도 될 줄로 알고, 실망 절망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좇아가는, 이른바 이상지향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본래성도,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운명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과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과거도 하나님께 있고 미래도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맡깁니다. 오늘의 내 현실이 절대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큰 뜻과 경륜과 음성과 나를 향한 부르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당연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면서 사는, 이런 유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한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 이런 경우, 두 가지의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하고 선뜻 대답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데요?"하고 무슨 일을 시킬 것이냐고 꼭 물어보는 아들이 있습니다. 반문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할 것인지 해로울 것인지 부터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산적이지요. 또한 내가 할 수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도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면 하고, 안 들면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하고 반문합니다. 그보다 조금 더 심한 자식은 "왜요?"하고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무슨 일이냐고, 그걸 내가 할 수 있느냐고, 왜 해야 하느냐고 조건적으로 나오는 자식은 아버지에게 효자가 못됩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 아닌 아버지의 부탁이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예"합니다. 무슨 일인지 물을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이라면 나에게 이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의 말입니다. 나아가서는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그가 더 잘 알아요. 내가 알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한다고 할 때에는 오직 "예"라고 하는 것이 바른 응답(right response)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고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면,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지 "예"하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예수를 좇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배운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예수의 능력을 빌어서 내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예수의 지혜를 배워서 내가 똑똑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성경을 배워서 내가 남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되겠다는 계산도 아닙니다. 언제나 "예"하고 대답하는 바른 응답자, 바른 응답--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믿음입니다. 구하는 무슨 도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아니요, 연구하고 학습하고 탐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 경건을 높이고 내 윤리생활을 높이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다리를 놓아 하나님께로 까지 올라가겠다고 하는 건방진 생각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서 내가 더 정결하게 살겠다고 하는 도덕적 차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뜻하지도 못했을 때, 어쩌면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서 반대로 멀리멀리 갈 때에 그가 먼저 나를 부르셨고, 그 부름에 내가 응답하게 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 : 6)"하시고 맙니다. 내가 길인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구나, 설명을 한다고 알아듣겠느냐---얼마나 심각하고도 정확한 대답입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도 물을 것 없습니다. 그저 "예"라고 응답하고 따라갈 따름입니다. 실상은 따르면서, 좇아가면서 깨닫고, 좇아가면서 배우고, 좇아가면서 확인하고, 좇아가면서 능력도 얻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먼 훗날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목적이 있었구나,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하고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알고 움직인다면 무슨 일이 될 것 같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잡지에서 글 한 편을 보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달나라에 가는 우주선이 있습니다. 그것을 타고 쏘아 올려져서 달나라까지 갔다오는데, 실패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실패한 경우에 대하여 쓴 글입니다. 보니, 본래가 인간이 알고 있는 부분에도 40퍼센트밖에는 가능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쏘아 올린다고 합니다. 100퍼센트라고 해도 믿을 것이 못되는 일입니다. 사람의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워낙에 상당한 부분은 모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올라타는 것이니 우주비행사야말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내놓은 도박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계속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존 카터는 바람직한 자기성장을 위한 다섯 가지 요건을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에게만 자기성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든 남이든 먼저는 현실적으로 객관적으로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에 매이는 사람, 주관적인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요. 적어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용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끝난 것입니다. 적어도 남도 용서할 뿐더러 자기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세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 목표 세워놓고,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바른 가치관을 가질 뿐더러 우선 순위를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 이루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몇 가지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할뿐입니다. 다 가지지 못하고 다 배우지 못합니다.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알고 이것에 따라 가치관을 세워 나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자아 가능성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못하는 것을 두고 못한다고 탓하면 안돼요. 이미 가진 것, 이미 가지고 있는 자아의 가능성을 스스로 계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자아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좇으라(59절)" 하십니다. 헬라 원문으로 '아콜루소'라고 하는 이 '좇는다''따른다'라는 말씀은 4복음서에 무려 79회나 나타납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순종을 뜻합니다. 제자됨의 행위를 말합니다. 나의 사생활이나, 나 중심의 생각이나, 나 자신에게 목적을 두지 않고 그의 길, 그의 목적, 그의 가는 곳을 따라오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본문에 보니 세 가지 유형의 예수님 좇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열정형이 있고, 회의형(懷疑型)이 있고 인정형(人情型)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열정이 있어 좋습니다. 스스로 구도하는 자세가, 탐구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어쩌면 상당한 호기심도 있습니다. 용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그 열심을 못마땅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이 부잣집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편안하게만 살아온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는 안되겠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요. 마음만 가지고 무엇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 보니까 선교사가 되겠다고 해서 많이 준비해 가지고 나갔는데 1년만에 병 걸려 되돌아옵니다. 부잣집 아들이어서 고생을 해보지 못한 탓입니다. 음식이며 잠자리에 적응을 못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중국에 가서 참 훌륭한 청년을 하나 만났습니다. 서른 여덟 난 청년인데, 미국에서 아주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신학을 마치고, 그리고 중국에 선교사로 온 지 5년 되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중국말을 중국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중국문학 하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능란해요. 설교를 유창한 중국말로 합니다.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보니 농담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지 아십니까? 그 좋은 여건에 살던 사람이 여기에 와서는 중국사람들이 사는 가장 서민적인 아파트에 삽니다. 열 집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단지입니다. 게다가 문도 달려 있지 않은 화장실입니다. 이렇듯 어지럽고, 지저분한 데서 2년 넘어 사는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와 보고 깜짝들 놀랍니다. 심지어 그곳 보안부에서도 이 사람이 왜 그런 곳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러다가 조사까지 해보았다고 합니다. 철저히 헌신적입니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타고난 사람이라야 됩니다. 그리고 상당한 훈령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청년은 예수님 따르는 일을 아주 화려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한 소리 같기도 하고, 비장한 결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 그 인기,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이런 것을 보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참 멋있겠다 싶어서 따르겠다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아서라, 너는 안된다 하십니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될 것이 있는데 너는 버리는 것 없이 따르려고 하는구나, 적어도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지불해야 될 값을 너는 지불할 수 없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정열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하심입니다.
두 번째 사람, 이 사람은 말하자면 조용히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이 사람을 보시고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지명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보세요. 일찍이 베드로나 요한이나 혹은 마태가 주님께서 따르라 하셨을 때에 따타부타 없이 선뜻 일어나 따랐던 것처럼 선뜻 "예" 하지를 않고 군소리가 있어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합니다. 이 놀라운 기회에 "그러나……"하고 조건을 달다니요? 가만히 보면 서로 만나서 참 좋은 얘기들을 나누다가도 끝에 가서 "그렇지마는" "그러나" 어쩌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통에 판이 깨지는 일이 많습니다. 군말이 없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딱 끝내면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가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할 때면 "사실로 잘못했습니다"하고 시인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 끝내 지를 못하고 "그렇지만……" 어쩌고 하는 바람에 다시 시비가 붙는 것을 많이 봅니다. 구차한 변명이 진실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따르라 하시면 "알았습니다"하면 될 일을 "아버지 장례 치르고"어쩌고 사족을 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청년 하나를 지도자로 키우기 위하여 똑똑한 사람에게 초청장을 냈습니다. scholarship 장학금을 주면서 와서 공부하라고 불러들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회답이 왔어요. '나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님 장례를 치른 다음에 가겠습니다.'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부모가 임종을 맞은 줄 알고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형편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인즉 그의 부모는 한창나이 40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not now'형(型)입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르기는 따르겠으나 지금은 아니요, 장차 언젠가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필요 없어요. 즉각적으로 따라야지요. 언제나 순종의 기회는 지금입니다. 내일도 아니요 모레도 아닙니다. 다른 상황에서도 아닙니다. 이대로, 이 모습 이 대로입니다. 그렇게 좇으라 하십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과거가 어떻습니다, 그런 것은 알 것 없습니다.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나를 좇으라"---"예"할 뿐입니다. 지금은 안됩니다. 다른 상황에서 따르겠습니다---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합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full time ministry로 따라갈 사람이니 집에 가서 인사하고 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안 된다 하십니다. 우스갯소리 같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공처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 집에서 붙들면 못 올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집에 가서 합의하고, "가세요"하면 송별회하고, 인사하고, 그리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릇 중요한 결단을 할 때에 합의 보는 일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혼자 결정하는 법입니다. 결정해 가지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입니다. 합의 보아 가지고 예수 믿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옛날 어른들, 예수 믿기 어려웠어요. 저의 할아버지가 옛날에 예수 믿으실 때에 상투 자르고 예수 믿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3대 독자인데도 집에 돌아가서 얼마나 매를 맞고 쫓겨났는지 한달 후에야 집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었어요. 가족회의 해서 예수 믿는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결정적인 문제는 나 혼자 결단해야 합니다. 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뒤에 가서 언젠가 동의를 얻고, 언젠가 좋게 지지를 받을 때가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할 때도 그래요.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를 할 때에도 그래요, 무릇 큰일을 하는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인사하고, 가족의 동의를 얻고, 이래서 만장일치가 되고, 그런 다음에 순교할 사람 있겠습니까? 가족회의 해 가지고 순교합니까? 예수님께서 "네 원수가 집안식구니라"하십니다.
중요한 문제에 가서 가족에 걸리고 인정에 끌려서 갈 길을 못 가고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사람들 연예하는 것도 그래요. 사랑하는 것도 좋고 연예하는 것도 좋지만 이것 때문에 공부 못하는 사람, 한심한 사람입니다. 크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망치는 것이라니, 어떻습니까? 고대 로마에서는 군인들에게 결혼도, 농사도, 사업도, 가정교사도, 변호사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해서였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하게 했어요. 그것이 로마 군인의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헤르만 코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 사람입니다. 이 장군이 멕시코를 점령하러 와서 바야흐로 싸움을 걸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멕시코 군인은 많고 자기네 군대는 적고, 정세가 불리해요. 그러자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들 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기네가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외쳤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래놓고 진군을 명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이겼습니다.
중국 속담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넘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 뭡니까? 전적으로 주를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주를 따르고, 전적으로 생명과 모든 것을 위탁해버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나를 통해서 주님은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왜냐고 묻지도 말 것이요,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도 궁금해하지 말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사랑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따르면 그 언젠가는 모든 문제가 하나하나 풀릴 것입니다. "너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너는 나를 좇으라(누가복음 9장 57절~62절)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다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서, 다같은 모습으로 살고, 다같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같이 보이지마는 그 삶의 철학과 동기에 있어서는 엄청나게 차이가 있는 생들을 사는 줄 압니다. 세 가지 유형의 인간을 봅니다.
첫째는 쫓기며 사는 사람입니다. 무엇인가 잘못된 운명이 있다 생각하고 '운명이다' '팔자다'하면서 질질 끌려가는 모습으로 삽니다.
원치 않는 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합니다. 나가고 싶지 않은 직장에 나갑니다. 먹고 싶지 않은 음식을 먹습니다. 모든 일이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 발을 들여놓았다고, 이미 시작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불가피하다고 하면서 딴에는 이것을 책임이라고도 하고, 의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끌려가는 모습입니다. 밭을 매는 소만 코뚜리 꿰인 것이 아닙니다. 덜미를 잡힌 채, 멱살을 잡힌 채 하릴없이 끌려가는 모습으로, 살고 싶지 않은 생을 부득불 사는 것 같은, 그런 생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좇아가는 사람입니다. 늘상 뜬구름 잡자는 듯이 삽니다. 현실이나 객관적 사실은 무시하고, 뭔가 앞에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허황하게, 무지개 잡으러 가는 소년처럼 삽니다. 나름대로 세운 이상을 향하여 좇아갑니다. 나름의 욕망을 추구합니다. 소원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가 그리고 세워놓은 꿈을 향하여 좇아갑니다.
평생이 다하도록 아직도 이루어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지막 순간에라도 될 줄로 알고, 실망 절망하면서도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좇아가는, 이른바 이상지향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본래성도,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종말론적 운명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과 큰 경륜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과거도 하나님께 있고 미래도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맡깁니다. 오늘의 내 현실이 절대로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큰 뜻과 경륜과 음성과 나를 향한 부르심이 있다고 믿습니다. 당연한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주의 음성에 진실하게 응답하면서 사는, 이런 유형의 인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입니까? 한 아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에게 말합니다. "나의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겠느냐?" 이런 경우, 두 가지의 반응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하고 선뜻 대답하는 아들이 있는가 하면 "무엇인데요?"하고 무슨 일을 시킬 것이냐고 꼭 물어보는 아들이 있습니다. 반문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유익할 것인지 해로울 것인지 부터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타산적이지요. 또한 내가 할 수 있을 것인지 없을 것인지도 내가 판단하겠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들면 하고, 안 들면 그만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하고 반문합니다. 그보다 조금 더 심한 자식은 "왜요?"하고 나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렇게 무슨 일이냐고, 그걸 내가 할 수 있느냐고, 왜 해야 하느냐고 조건적으로 나오는 자식은 아버지에게 효자가 못됩니다. 적어도 다른 사람 아닌 아버지의 부탁이라고 한다면 서슴없이 "예"합니다. 무슨 일인지 물을 것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가 시키시는 일이라면 나에게 이로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의 말입니다. 나아가서는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그가 더 잘 알아요. 내가 알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런고로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탁한다고 할 때에는 오직 "예"라고 하는 것이 바른 응답(right response)인 것입니다. 이 한마디 말고 다른 이야기가 있어서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아들에게 하는 말이라면, 어머니가 딸에게 하는 말이라면, 어떤 말이든지 "예"하고 따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예수를 좇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배운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예수의 능력을 빌어서 내가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예수의 지혜를 배워서 내가 똑똑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도 물론 아닙니다. 성경을 배워서 내가 남보다 더 지혜로운 자가 되겠다는 계산도 아닙니다. 언제나 "예"하고 대답하는 바른 응답자, 바른 응답--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요, 믿음입니다. 구하는 무슨 도를 찾아 헤매는 것도 아니요, 연구하고 학습하고 탐구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내 경건을 높이고 내 윤리생활을 높이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사다리를 놓아 하나님께로 까지 올라가겠다고 하는 건방진 생각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말씀을 배워서 내가 더 정결하게 살겠다고 하는 도덕적 차원의 이야기도 아닙니다.
내가 미처 생각지도 뜻하지도 못했을 때, 어쩌면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서 반대로 멀리멀리 갈 때에 그가 먼저 나를 부르셨고, 그 부름에 내가 응답하게 되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을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주님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 : 6)"하시고 맙니다. 내가 길인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구나, 설명을 한다고 알아듣겠느냐---얼마나 심각하고도 정확한 대답입니까? 그 결과에 대해서도 물을 것 없습니다. 그저 "예"라고 응답하고 따라갈 따름입니다. 실상은 따르면서, 좇아가면서 깨닫고, 좇아가면서 배우고, 좇아가면서 확인하고, 좇아가면서 능력도 얻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필이면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욥도 그랬습니다. 먼 훗날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목적이 있었구나,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구나, 하고 나중에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알고 움직인다면 무슨 일이 될 것 같습니까? 저는 얼마 전에 잡지에서 글 한 편을 보고 놀란 일이 있습니다. 달나라에 가는 우주선이 있습니다. 그것을 타고 쏘아 올려져서 달나라까지 갔다오는데, 실패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실패한 경우에 대하여 쓴 글입니다. 보니, 본래가 인간이 알고 있는 부분에도 40퍼센트밖에는 가능성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쏘아 올린다고 합니다. 100퍼센트라고 해도 믿을 것이 못되는 일입니다. 사람의 지식에 한계가 있으므로 워낙에 상당한 부분은 모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올라타는 것이니 우주비행사야말로 참 대단한 사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을 내놓은 도박이지요. 여러분, 우리는 계속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심리학자 존 카터는 바람직한 자기성장을 위한 다섯 가지 요건을 들었습니다. 적어도 이런 사람에게만 자기성장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첫째, 자기든 남이든 먼저는 현실적으로 객관적으로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주관에 매이는 사람, 주관적인 생각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발전이 없습니다. 끝난 것이나 다름없어요. 적어도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용납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끝난 것입니다. 적어도 남도 용서할 뿐더러 자기도 용서할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목표를 세운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 목표 세워놓고,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 바른 가치관을 가질 뿐더러 우선 순위를 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 이루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됩니다. 어차피 우리는 몇 가지밖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우선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할뿐입니다. 다 가지지 못하고 다 배우지 못합니다. 다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순위를 알고 이것에 따라 가치관을 세워 나가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리고 자아 가능성을 계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못하는 것을 두고 못한다고 탓하면 안돼요. 이미 가진 것, 이미 가지고 있는 자아의 가능성을 스스로 계발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자아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설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좇으라(59절)" 하십니다. 헬라 원문으로 '아콜루소'라고 하는 이 '좇는다''따른다'라는 말씀은 4복음서에 무려 79회나 나타납니다. 이것은 행동적인 순종을 뜻합니다. 제자됨의 행위를 말합니다. 나의 사생활이나, 나 중심의 생각이나, 나 자신에게 목적을 두지 않고 그의 길, 그의 목적, 그의 가는 곳을 따라오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따르라, 나를 좇으라 하십니다. 본문에 보니 세 가지 유형의 예수님 좇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열정형이 있고, 회의형(懷疑型)이 있고 인정형(人情型)이 있습니다.
자원해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열정이 있어 좋습니다. 스스로 구도하는 자세가, 탐구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어쩌면 상당한 호기심도 있습니다. 용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의 그 열심을 못마땅하게 보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빗대어 말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절)." 이 말씀에서 주님은 무엇인가 많은 것을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추측컨대 이 사람이 부잣집 아들이었던 것 같아요. 편안하게만 살아온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너는 안되겠다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오늘도 가끔 보면 그런 경우가 있어요. 마음만 가지고 무엇이 되는 줄로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분 보니까 선교사가 되겠다고 해서 많이 준비해 가지고 나갔는데 1년만에 병 걸려 되돌아옵니다. 부잣집 아들이어서 고생을 해보지 못한 탓입니다. 음식이며 잠자리에 적응을 못한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중국에 가서 참 훌륭한 청년을 하나 만났습니다. 서른 여덟 난 청년인데, 미국에서 아주 좋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신학을 마치고, 그리고 중국에 선교사로 온 지 5년 되었는데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던지 중국말을 중국사람보다 더 잘합니다. 중국문학 하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능란해요. 설교를 유창한 중국말로 합니다. 같이 앉아 식사하면서 보니 농담도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자, 그런데 이 사람이 어떤지 아십니까? 그 좋은 여건에 살던 사람이 여기에 와서는 중국사람들이 사는 가장 서민적인 아파트에 삽니다. 열 집에 화장실이 하나밖에 없는 아파트단지입니다. 게다가 문도 달려 있지 않은 화장실입니다. 이렇듯 어지럽고, 지저분한 데서 2년 넘어 사는 것입니다. 미국사람들이 와 보고 깜짝들 놀랍니다. 심지어 그곳 보안부에서도 이 사람이 왜 그런 곳에 사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러다가 조사까지 해보았다고 합니다. 철저히 헌신적입니다.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닙니다.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결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타고난 사람이라야 됩니다. 그리고 상당한 훈령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청년은 예수님 따르는 일을 아주 화려하게 생각한 모양입니다.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대답한 소리 같기도 하고, 비장한 결심도 없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지혜, 그 인기, 그리고 그 능력과 권세--이런 것을 보고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참 멋있겠다 싶어서 따르겠다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아서라, 너는 안된다 하십니다. 얻기 위해서는 버려야 될 것이 있는데 너는 버리는 것 없이 따르려고 하는구나, 적어도 이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지불해야 될 값을 너는 지불할 수 없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정열 그것만 가지고는 안된다 하심입니다.
두 번째 사람, 이 사람은 말하자면 조용히 있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이 사람을 보시고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참 귀한 일입니다. 지명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 보세요. 일찍이 베드로나 요한이나 혹은 마태가 주님께서 따르라 하셨을 때에 따타부타 없이 선뜻 일어나 따랐던 것처럼 선뜻 "예" 하지를 않고 군소리가 있어요.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합니다. 이 놀라운 기회에 "그러나……"하고 조건을 달다니요? 가만히 보면 서로 만나서 참 좋은 얘기들을 나누다가도 끝에 가서 "그렇지마는" "그러나" 어쩌고 사족(蛇足)을 붙이는 통에 판이 깨지는 일이 많습니다. 군말이 없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딱 끝내면 됩니다. 이런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누가 가서 "내가 잘못했습니다" 하고 말할 때면 "사실로 잘못했습니다"하고 시인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거기서 끝내 지를 못하고 "그렇지만……" 어쩌고 하는 바람에 다시 시비가 붙는 것을 많이 봅니다. 구차한 변명이 진실을 그르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따르라 하시면 "알았습니다"하면 될 일을 "아버지 장례 치르고"어쩌고 사족을 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옥스퍼드대학에서 아프리카의 청년 하나를 지도자로 키우기 위하여 똑똑한 사람에게 초청장을 냈습니다. scholarship 장학금을 주면서 와서 공부하라고 불러들였습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런데 회답이 왔어요. '나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효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부모님 장례를 치른 다음에 가겠습니다.' 옥스퍼드에서는 그의 부모가 임종을 맞은 줄 알고 '그러면 아버지 어머니가 어떤 형편인가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답인즉 그의 부모는 한창나이 40세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람이 문제인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not now'형(型)입니다. 지금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르기는 따르겠으나 지금은 아니요, 장차 언젠가에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필요 없어요. 즉각적으로 따라야지요. 언제나 순종의 기회는 지금입니다. 내일도 아니요 모레도 아닙니다. 다른 상황에서도 아닙니다. 이대로, 이 모습 이 대로입니다. 그렇게 좇으라 하십니다. 죄인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과거가 어떻습니다, 그런 것은 알 것 없습니다. 다 알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나를 좇으라"---"예"할 뿐입니다. 지금은 안됩니다. 다른 상황에서 따르겠습니다---결정적으로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세 번째는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합니다.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full time ministry로 따라갈 사람이니 집에 가서 인사하고 오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예수님께서는 이것도 안 된다 하십니다. 우스갯소리 같습니다마는 이 사람은 공처가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집에 인사하러 갔다가 집에서 붙들면 못 올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집에 가서 합의하고, "가세요"하면 송별회하고, 인사하고, 그리고 오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릇 중요한 결단을 할 때에 합의 보는 일 있습니까? 가장 중요한 일은 혼자 결정하는 법입니다. 결정해 가지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입니다. 합의 보아 가지고 예수 믿습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옛날 어른들, 예수 믿기 어려웠어요. 저의 할아버지가 옛날에 예수 믿으실 때에 상투 자르고 예수 믿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3대 독자인데도 집에 돌아가서 얼마나 매를 맞고 쫓겨났는지 한달 후에야 집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그만큼 힘들었어요. 가족회의 해서 예수 믿는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 결정적인 문제는 나 혼자 결단해야 합니다. 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습니다. 다만 뒤에 가서 언젠가 동의를 얻고, 언젠가 좋게 지지를 받을 때가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할 때도 그래요. 공부하는 사람이 공부를 할 때에도 그래요, 무릇 큰일을 하는 사람이 다 그렇다는 것입니다. 가족에게 인사하고, 가족의 동의를 얻고, 이래서 만장일치가 되고, 그런 다음에 순교할 사람 있겠습니까? 가족회의 해 가지고 순교합니까? 예수님께서 "네 원수가 집안식구니라"하십니다.
중요한 문제에 가서 가족에 걸리고 인정에 끌려서 갈 길을 못 가고 해야 할 일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젊은 사람들 연예하는 것도 그래요. 사랑하는 것도 좋고 연예하는 것도 좋지만 이것 때문에 공부 못하는 사람, 한심한 사람입니다. 크게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망치는 것이라니, 어떻습니까? 고대 로마에서는 군인들에게 결혼도, 농사도, 사업도, 가정교사도, 변호사도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 갈라지면 안 된다고 해서였습니다. 오직 한 가지만 하게 했어요. 그것이 로마 군인의 신분이었다고 합니다. 헤르만 코르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장군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페인 사람입니다. 이 장군이 멕시코를 점령하러 와서 바야흐로 싸움을 걸려고 하는데 보아하니 멕시코 군인은 많고 자기네 군대는 적고, 정세가 불리해요. 그러자 군인들은 사기가 떨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들 하는 것입니다. 장군은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에 그는 충복 몇 사람을 불러서 자기네가 타고 온 배들을 모조리 불질러버리라고 명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장군은 외쳤습니다.
"자, 우리는 이제 정복을 하거나 죽거나, 둘 중에 하나다. 돌아가는 길은 없다!" 그래놓고 진군을 명했습니다. 결국 전쟁에 이겼습니다.
중국 속담에 '개가 급하면 담장을 넘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생명을 걸고 하는 일에는 엄청난 위력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것이 뭡니까? 전적으로 주를 받아들이고, 전적으로 주를 따르고, 전적으로 생명과 모든 것을 위탁해버린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나를 통해서 주님은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왜냐고 묻지도 말 것이요,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이냐고도 궁금해하지 말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사랑을 믿고, 십자가의 사랑을 믿고 따르면 그 언젠가는 모든 문제가 하나하나 풀릴 것입니다. "너는 나를 좇으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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