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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장 1절~22절)

by 【고동엽】 2023.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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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번제로 드리라(창세기 22장 1절~22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이들은 행복하게 자라날 권리가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기쁘고 자유롭게 자라나야 합니다. 아이들의 행복은 자신을 향한 사랑을 확인하는 데에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다 아시겠습니다마는 자다가도 손을 내밀어 어머니가 옆에 있는지를 확인하려듭니다. 주위 사람들이 어떠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가에 늘 민감합니다.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부모님과 주위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나를 귀찮은 존재로 여기는가---눈치 빠르게 판단합니다.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위치를 찾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중에만 자신의 존재가 확증됩니다.
여기서 오늘의 자녀교육을 생각해봅시다. 문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숱하게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교육방법론이 어떻고, 교육심리학이 어떻고…… 이것저것 다 이야기해보아야 소용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장 중요한 원론적인 문제는 생명에 대한 이해입니다.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요즈음의 아이들은 자라면서 내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나의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인간에 대한 도덕성이나 종교성을 알기 이전에 인간의 동물성과 생리성을 먼저 알아 버립니다. 나의 생명의 귀중함을 알기 이전에 단순히 남녀의 육체적인 본능에 의해서 내가 태어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의 존재는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과 진실이 없습니다. 물질적 혜택만을 사랑으로 강요하는 것만큼 모순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이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어느 미국인 가정에 초대를 받아 가본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귀한 집이라서 그런지 아이들이 제게 매달리며 좋아라 합니다. 좀 친하게 되자 제 손을 붙잡아 지하실로 이끕니다. 그 넓은 지하실이 장난감으로 꽉 차 있습니다.

인형부터 시작하여 심지어 고장난 텔레비전까지 있습니다. 장난감이 늘 부족했던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너희들은 참으로 행복하구나"라고 말했더니 'No. it doesn't !'---한마디로 아니라는 것입니다. 엄마 아빠가 저희들끼리 놀러나갈 때에 떼어놓으려고 사다준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도 고맙지 않다고 합니다. 이런 아이들이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나는 분명히 귀찮은 존재다' '어쩌다 낳아놓고는 무던히들 고생을 하는구나' ---- 이러니 무슨 교육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나의 나됨은 빵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돈으로 되지 않습니다. 빵으로, 돈으로 된다고 하는 유물론적 철학이 인간을 타락시키고, 인간 존재를 근본적으로 말살시키고 있습니다. 생명의 경시 ---- 나의 생명이건 남의 생명이건 경시하는 사고가 만연해 있습니다마는 따져보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닙니다. 애초부터 잘못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번 보십시다.
1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 행해지는 낙태수술만도 무려 150건에 이른다고 합니다. 미국의 인구가 우리 나라의 5배나 되는데도 낙태수술의 건수는 우리가 더 많다고 합니다. 결국 미국의 5배가 넘는 낙태수술이 우리 나라에서 자행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대단히 부끄러운 기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명을 무참히 죽이고 있습니다. 낳아놓고도 반갑지 않습니다. 불평불만 속에서 키웁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아이들이 먼저 알고 있습니다. 가출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살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자살할 마음,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필요 없는 존재로 태어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의 목적이 불투명합니다. 행복의 모델도, 삶의 전형도 없습니다. 쉽게 말해보십시다. 아버지 어머니가 늘 기쁘고 행복해 보이면 '세상이 이리 살기 좋으니까 나를 낳았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날 때마다 싸우고 죽지 못해서 사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한숨이나 쉬고 있다고 해봅시다. 아이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들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 왜 나까지 낳아서 이 고생이냐?' 할 것입니다. 이래서 교육이 되겠습니까? 교육학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인생관의 문제요 신앙적인 인생관의 문제입니다. '두 남녀의 사랑행각의 실수로 내가 태어났다'라는 인식 안에서는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하나는 막내가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 때에 다시 아이를 낳았습니다.

한번은 만나서 농담 삼아 '자네 노망했구먼'하고 말했더니 실수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마는 아이가 있는 자리에서도 번번이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귀찮아서 죽겠다' '괜히 태어나서 말썽이다' '너 때문에 뭘 할 수가 없다' 라면서 원망을 합니다. 보다못해 제가 '아이가 그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섭섭하고 마음이 아프겠느냐'라고 정색하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 말에 깜짝 놀라더니 이내 생각을 고쳤습니다. 얼마 뒤에는 그 아이가 없었더라면 살 재미가 없을 뻔하였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은 자녀를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되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십니다. 주시려면 좀 일찍 주실 것이지 75세에 주시겠다고 하신 것도 이미 늦었는데 다시 100세까지 기다리게 하십니다. 아내 사라가 단산한 다음에 주십니다. 기다리다 지쳤습니다. 왜 이리도 어려운 말년에 가서야 자식을 주였겠습니까?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너희가 결혼생활은 하지만 생명은 내가 주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결혼생활의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결혼생활과는 달리 하나님께서 별도로 주시는 것이 생명임을 확증하시기 위함입니다. 노년에 얻은 자식이요 불임 중에 얻은 자식이 이삭입니다. 이삭은 약속의 자식입니다. 인내와 신앙으로 얻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창세기 30장 1절로 보면 질투 많은 라헬이 남편 야곱을 들볶는 장면이 나옵니다. 언니 레아는 아들을 넷씩이나 쑥쑥 잘 낳았습니다. 남편의 사랑은 자신이 많이 받고 있는데 아이는 오히려 언니가 낳는 것입니다. 속이 상한 라헬은 마침내 야곱에게 투정을 부립니다.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여자들이 보통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에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임에도 불구하고 라헬을 엄하게 책망합니다. "그대로 성태(成胎)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와 잠자리를 함께 하지만 자식을 낳고 못 낳고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하고도 바른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러므로 소중한 것입니다. 내가 낳았건 남이 낳았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합니다. 내 마음대로 죽여서도, 내 마음대로 죽어서도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중한 생명이기에 그러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기본적인 것이 이것입니다. 약속의 자녀---모든 것을 여기로부터 풀어나가야 합니다. 몸이 불편해서 30세에 단산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간절히 기도한 끝에 40세에 가서 드디어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산모의 나이가 많고 해서 자칫 태아와 산모가 다 위험할 수도 있으니 제왕절개수술을 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극구 고집을 부립니다.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은 귀한 자식입니다. 제 힘으로 낳겠습니다." 의사의 권고를 물리치고 죽을 고생을 하여 자식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지극 정성을 다하여 소중하게 키우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 대하여 얼마만큼 감격하십니까? 얼마만큼 신앙적으로 대하십니까? 기도와 정성으로 자식을 얻어야 합니다. 옛날사람들은 선행을 해야 자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많은 정성을 드렸습니다. 여기에 신비성이 있고 은혜성이 있고 축복성이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자녀를 소중하게 여기는 근본적인 가치를 생각하는 데서부터 신앙적인 교육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이 귀한 아들은 분명코 은혜 그것입니다. 나의 공로, 나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단산한 후, 그것도 100세에 낳았으니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생명의 은혜성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100세에 얻은 그 소중한 아들을 번제로 드리라 하십니다. 번제는 자원적인 제사요 전적인 제사입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다 불태워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아들을 그렇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 자식을 통하여 하늘의 별처럼 많이 신령한 자식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바치라는 것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참으로 불합리합니다.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시험입니다. 이 자식을 통하여 대대손손 후손을 주시겠다 하시고는 이제 와서 장가도 안간 자식을 바치라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불태워 바치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깊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마는 끝내 하나님의 말씀을 따릅니다. 자식을 번제로 드리기로 합니다.

자녀라고 하여 다 참 자녀가 아닙니다. 육체의 자녀 이스마엘은 참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신령한 자녀 이삭이 참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 또한 중생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제사의 사건입니다. 아마도 아브라함이 이 아들을 낳아 키우면서 너무도 기쁜 나머지 하나님 섬기는 것을 좀 등한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자식, 내 아들' 하면서 그저 자식 사랑에 취해서 키웠다는 말입니다. 이제 그런 자식을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십니다. 당시 이삭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성경을 잘 연구해 보아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27세 전후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이가 꽤 많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바치라고 하십니다. '네가 낳은 자식이라고 하여 네 것이 아니다' --- 주었으면 감사할 것이요 달라면 어느 때에라도 내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대로 키워서 네 마음대로 무엇이 될 줄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농사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내가 씨를 뿌릴 수 있고 물을 줄 수 있고 가꿀 수 있습니다마는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우유를 줄 수 있고 밥을 줄 수 있고 옷을 줄 수 있고 학비를 대줄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생명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아느냐? 그러므로 바쳐라 ---- 오직 믿음, 오직 순종, 오직 약속을 확인하려 하심입니다. 절대로 자식이 우리의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내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번은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에 있는 육군사관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학교 교장의 말에 따르면 공부와 훈련이 하도 고되어서 도중하차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낙제를 하는가 하면 아예 퇴교 당하는 학생들도 많습니다. 부모들이 아들들에게 보내온 격려의 편지와 전보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데 그 중의 몇 개를 보여주더랍니다. 제일 많은 내용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첫째는, '너는 말을 잘 들을 줄로 믿는다' 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학교에서 쫓겨나면 우리 집안에서도 필요 없는 아들이다.' 셋째는, '만일 쫓겨나면 정신병원으로 보내버리겠다.' 또 하나는 '집안 망신시키면 빈털터리로 쫓아내겠다' 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식이라고 마치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처럼 협박하고 있습니다. 착각입니다. 다행히도 그 중에 좋은 말이 하나 있더랍니다. '내 아들아, 꾸준히 꾸준히. 아빠로부터.' 그런 대로 괜찮은 아버지입니다. 뭔가 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낳았지만 내 자식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그 사실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내 아들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할례입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예식입니다. 오늘은 유아세례를 줍니다. 이는 하나님께 바쳐서 이 아이로 하여금 복 받게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유아세례의 근본 뜻은 주님께서 주신 생명을 주님께 다시 바칩니다. 주님께 다시 드립니다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야 합니다. 내 인정 다 끊어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언제든지 쓰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쓰십시오--- 주님께 온전히 드리는 데에 진정한 교육의 길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19절)." 그래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약속의 자녀입니다. 이스마엘이 아닙니다. 사실 육체의 자녀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마는 다 소용없습니다. 약속의 자녀, 언약의 자녀가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쳐져야 합니다. 온전히 드려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결혼하지 않았고, 따라서 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을 보면 '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울이 아들 디모데를 얼마나 사랑하였던지, 디모데 또한 바울을 얼마나 사랑하고 따랐던지 평생을 아버지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로마에 있는 바울 성당에 가보면 한가운데에 바울이 묻혀 있고 그 바로 밑에 디모데가 묻혀 있습니다. 디모데야말로 진정한 믿음의 계승자요, 믿음의 아들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신령한 아들, 신령한 자녀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육체의 아들이 신령한 아들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나무와 불과 칼을 준비해 가지고 지시한 산으로 올라갑니다. 그 때의 이삭의 나이 27세요, 아브라함은 127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칼을 들어 내리치려고 합니다. 제가 이삭이라면 그 순간에 아마도 이렇게 대들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나이가 들더니 노망하셨군요' '하나님께서 저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삭은 묵묵히 순종합니다. 하루아침에 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충심으로 섬기는 것을 줄곧 보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아브라함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확실하게 믿을 수 있었기에 또한 가능했던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 그 부자지간에 이런 대화가 오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 아들 이삭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버지의 목숨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래.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한다. 이제부터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예, 잘 알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이 제단에 올라 누워라." 아들은 이 말에 순종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서입니다. 그 신뢰와 그 사랑이 이삭으로 하여금 엄청난 말에 그대로 순종하게 합니다. 이제 칼을 들어 내리치려고 합니다. 그 순간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부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리고 양을 주시어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리게 합니다. 이삭은 살았습니다. 그제야 의미를 알았습니다.
부활신앙적인 의미가 이 사건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와 방불한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는 그 사실 자체에 부활신앙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의미상으로는 완전히 죽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쳤습니다. 그러나 도로 받았습니다. 신령한 아들로 약속의 자녀로, 영원한 약속의 자녀로 받았습니다. 여기에 부활신앙이 있고 십자가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없지만 그 다음 장면이 저는 눈에 선합니다. 돌려 받은 아들, 아버지는 그 아들을 얼싸안고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들이 혹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이 일이 실현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내심 고민했을 아브라함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손을 잡고 모리아 산을 내려오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다. 얼마나 감격스럽고 기뻤겠습니까? 하나님을 더욱 드높이 찬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말이 자녀들에게 먹혀들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저 아름다운 신앙적 관계, 순종과 헌신---신앙의 극치요 사랑의 극치입니다. 여기서 아버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됩니다.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큰 은혜를 주시고자 하십니다. 이미 주셨고, 또 주시고자 하시고, 그 주신 은혜를 확인하려 하십니다. 우리가 확인하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것입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당신의 것입니다---이렇게 온전히 드려질 때에 도로 받게 되는 축복이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고 새로 자라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약속의 자녀는 바로 모리아 산에서부터 시작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마 18:5)" ----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를 하나님의 것으로 드릴 때에 진정 하나님의 귀한 은혜와 축복이 우리의 가정, 우리의 자녀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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