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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기둥 불기둥(출애굽기 13:17-22)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항오를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니리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그들이 숙곳에서 발행하여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귀중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과 믿음이 없이 세상을 사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여기 늦게 귀가하는 남편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남편을 온전히 믿고 있는 아내는 남편의 귀가 시간이 늦어질수록 초조해지고, 더욱 남편을 사랑하게 되고, 더욱 남편을 소중히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남편을 맞이할 때에는 어느 때보다도 그 남편이 소중하고 반갑습니다. 바로 이 순간이 사랑이 뜨거워지는 시간인 것입니다. 반면에 남편의 행동거지를 믿지 못하는 아내는 남편의 귀가가 늦어지면 그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어디로 샜나, 어디서 누구를 만나나, 못된 짓을 하나보다…… 자꾸 나쁜 방향으로만 생각하다가 남편이 딱 들어서면, 문간에서부터 한바탕 붙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그렇습니다. 그저 전적으로 서로를 믿고 사는 가정이라면 가난하건 부하건, 병들었건 건강하건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보기에는 으리으리하게 잘사는 것 같고 좋아 보여도 서로 불신하고 산다면 소용없습니다. 참으로 불행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 짧은 생을 살면서 그렇듯 욕되게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간혹 우리는 주위에서 똑똑하다 하는 여자들을 보게 됩니다.
똑똑하다는 것과 의심한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런데 대체로 보면 똑똑한 여자가 남 의심하기를 좋아합니다. 내가 속을 줄 아냐 하며 미리 방어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겉보기엔 똑똑해 보여도, 그실 헛 똑똑한 것입니다. 만사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이큐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자기도 손해요 남까지도 괴롭힙니다. 그런가하면 속아도 그냥 묻어두는 사람, 그래서 좀 미련해 보이기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미리부터 의심하고 똑똑한 척할 것 없습니다. 그저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는 만큼 행복할 수 있고, 믿는 만큼 평안할 수 있습니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믿음이 있는 사람은 평안하고 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을 다 갖추고 살아가면서도 믿음이 없는 사람은 늘 원망과 불평에 차 있습니다. 내 주위에 가득한 행복을 믿게 해줄 수 있는 요건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구제불능입니다. 의심이라고 하는 병은 고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정의에 대하여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 11: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미래를 봅니다. 미래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미래로 현재 생활의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그곳에 있을 하나님의 뜻을 찾기도 합니다. 나아가 생의 의미를 재확인하기도 합니다. 믿음에 근거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셨던 것은 온전한 믿음과 전적인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부귀영화, 자유, 평등, 번영을 바라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당신을 전적으로 믿고 감사하고 순종하고 의지하는 백성이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을 우리는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 사랑하시고 약속하신 연유가 바로 이 믿음에 있었습니다. 믿음을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이 430년이라는 시간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지금 애굽에서 사는 모든 이스라엘사람들은 노예생활 중에 태어난 2,3세들입니다. 노예생활 중에 태어났고, 노예생활 중에 성장했습니다.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자유인이 되리라고는, 구원받고 독립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람 모세를 불러서 이 백성을 구원케 하십니다. 출애굽--Exodus를 시키십니다.
출애굽에 앞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열 가지의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 재앙은 물론 완악하고 강팍한 바로 왕의 마음을 꺾기 위하여 필요했습니다마는, 이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을 교육하기 위하여 더 긴요히 쓰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가,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놀라우신 가를 깨닫게 하고 믿게 하는 데에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듯 크신 능력을 나타내 보이심으로 저들이 전적으로 수락하고, 전적으로 순종하고, 전적으로 위탁하기(total commitments)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요 소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을 바라시는 마음에서 저들을 출애굽 시키셨습니다. 그리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애굽을 비롯한 고대왕국에는 전쟁이 많았습니다. 대개 전쟁을 치를 때에는 수만, 수십만 명의 군사가 열을 지어 행진을 합니다. 지금처럼 차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기에 먼길을 그저 몇 날 몇 달씩 걸어서 행진을 합니다. 수많은 군사가 행진을 하니, 그 대열이 얼마나 길었겠습니까? 그 끝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선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때에는 선두에 가는 대장의 바로 옆에 훨훨 타오르는 불이 담긴 항아리를 따르게 합니다. 그것을 보고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길로 선두가 어디인지를 알게 합니다. 후미에 있는 군사가 그 연기와 불길을 보고 '지금 우리 대장님이 저 앞에 가시는구나'하고 알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도 '신성하고 영원한 불'이라고 이름 붙인 불을 담은 큰항아리를 가지고 행진을 했다고 역사가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길로 선두진영을 뒤에 오는 군사들에게 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말씀에 보이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여내신 것입니다. 낮에는 거대한 구름기둥이 뜨거운 사막에 그늘을 만들어줌으로 저들로 타죽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거대한 불기둥으로 어두움을 밝히사 저들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란 참으로 무서운 곳입니다. 일본의 어느 목사님이 광야가 어떤 곳인지 살아보겠다고 안내원도 없이 혼자 지프차를 타고 깊숙이 들어갔다가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결국은 그곳을 헤매다 타죽고 말았다 합니다. 광야란 그렇듯 혹독하고 무서운 곳입니다. 낮에는 뜨거워서 타죽고, 밤에는 추워서 얼어죽습니다. 이것이 광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육십만 백성이 이런 광야를 거쳐 가나안땅까지 왔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 사건입니다. 저들을 인도한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것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에 담긴 의미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저들은 몰래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오랜 노예생활로 노예근성에 젖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선민(選民)된 자격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뿐 아니라 그 후손까지도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증거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연약함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저들이 타죽을새라 얼어죽을새라 보우해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약점을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이 미련한 사람들이 가다가 전쟁이라도 하게 되면, 어려운 일이라도 닥치면 도망가리라는 것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또한, 적절하게 보우하셨습니다. 분노한 애굽 군대가 뒤미처 쫓아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있는 곳 가까이 까지 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진로를 불기둥으로 막아버리십니다. 불기둥으로 가로막힌 애굽의 군대는 그 속에서 어지럽게 되어 더는 이스라엘 백성 가까이로 올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출14:20-25).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기둥으로 적당한 때에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지표이기도 했습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입니다. 이것이 움직이면 그 움직이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따라갑니다. 그리고 이것이 멎으면 거기서 장막을 치고 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저들을 인도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지금 이정표 하나 없이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동으로 가야 할지 서로 가야 할지 전혀 모릅니다. 저들을 구름기둥 불기둥이 앞서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름기둥 불기둥에는 이 길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겠다고 하시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는 자는 내가 그 운명을 책임지겠다----어디로 가든, 어느 위험한 곳으로 가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에 대해서는 당신이 책임을 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흐뭇하고 고마운 뜻입니까? 좀더 나아가 여기에는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대로만 좇아가면 가나안에 이른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이 구름기둥 불기둥만 따라가면 목적한 땅 가나안에, 약속한 땅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이 구름기둥 불기둥에 증거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남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과연 얼마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믿고 따랐느냐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전적으로 믿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온전히 믿고 따르면 아무 걱정이 없습니다. 식량이 없으면 식량을 주실 것이고, 물이 없으면 물을 주실 것이고, 전쟁이 나면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이 진정 이를 온전히 믿었다면 감사하고 찬송하고 기뻐하면서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광야에서 범한 죄 가운데 가장 큰 죄가 원망죄였습니다. 도대체 이 원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믿지 않음에서입니다. 어느 순간 믿지 못할 때에는 구름기둥 밑에서도 원망하게 되고, 만나를 먹고도 원망하게 되고, 반석에서 나온 물을 마시고도 원망하게 됩니다. 이렇듯 원망투성이의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상식적으로 본다면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군중은 북쪽으로 올라갔다가 동쪽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이 길이 일반적으로 쓰이던 군사도로요 교역을 위한 통로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북쪽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길은 블레셋 군대가 심히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17절). 애굽에서 나오자마자 블레셋사람과 전쟁을 치르게 되면 이스라엘사람들이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 걱정하시어 동쪽으로 인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동쪽에는 홍해가 펼쳐져 있습니다. 수에즈만에 잇닿아 있는 이 홍해는 깊이 340미터나 되는 아주 험한 물길입니다. 막다른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을 이리로 인도하셨습니다. 보세요. 앞에는 홍해,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습니다. 좌우에는 절벽이 있습니다.
사면초가의 이 백성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그 길로 인도하셨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홍해를 갈라 저들이 건너감으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능력으로 저들을 인도하시는가를 알게 하시고자 홍해의 광야길로 돌려 인도하신 것입니다. 나아가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되돌아올까 봐,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그 길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홍해의 광야길---이것은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합리하고 모순되고 부조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마는 하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세밀하게 그 백성을 믿음의 길로 인도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인도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책임질 터이니 나를 믿어라. 내가 인도할 터이니 나를 믿고 따르라. 큰 믿음을 가지라'라고. 지금의 이 곤경은 하나님의 섭리요, 이 홍해의 광야 길은 하나님의 교육 프로그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에서는 저들이 당신을 찬송하며 기뻐하며 따르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사기 7장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지금 미디안으로부터 침략을 당해 괴로워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기드온에게 군사를 모집하여 이스라엘을 구하라고 이르십니다. 나팔을 불며 군사를 모집해보았더니 삼만 이천 명이 모였는데 오합지졸입니다. 게다가 그 모인 수가 너무 적어 걱정인데 하나님께서는 줄이라고 하십니다. 만 명으로 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시 더 줄이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줄여나가다가 결국은 삼 백 명의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저쪽에는 수십만 명의 군사가 진을 치고 있는데, 고작 삼 백 명으로 어찌한다는 것입니까? 기가 막힌 기드온이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전쟁은 내가 하는 것이요, 이 전쟁은 이기도록 되어 있다. 만일 많은 군사로 나가 이겼으면 너희가 싸워 이겼다 할 것이요, 삼 백 명의 군사로 나가 이겼으면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할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온전히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도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도 하실 수 있는 일을 해버리면 대체로 내가 그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하지 못할 일을 했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믿게 됩니다. 인간 궁극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긍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끝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 길로 인도하신 것은 이 때문입니다. 그 막다른 길로 인도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뜻으로,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고 찬송 받으시겠다고 하심의 증거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여러분, 원망이란 참 이상합니다. 원망을 심리적으로 연구한 어떤 사람에 따르면 악성건망증이 원망의 이유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에 건망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좋은 일은 싹 잊어버리고 나쁜 일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성건망증입니다. 그 숱한 좋은 일들, 그 많은 은혜스러웠던 일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불리했던 일, 나빴던 일만 잔뜩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섭섭했던 일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악성건망증 때문에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일어났던 그 놀라운 기적을 10분의 1만 기억했었더라도 원망을 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은혜로운 일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 처한 이 현실만을 생각했기에 결국은 원망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이 원망은 조급한 인간성에서 비롯합니다. 좀 느긋하게 생각하면 좋으련만 자기가 뭐 잘났다고 판단을 너무 빨리 해버립니다. 특히나 오늘날은 정보화시대라 하여 누구 할 것 없이 너무 미리 알려고 합니다. 선거 때도 보면 그 집표 과정을 잠도 안자고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조금 더 먼저 알기 위하여 지켜보다가 심장마비에 걸리는 사람도 있을 정도입니다. 푹 자고 다음날 누가 당선되었는지 그 결과만 보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그리도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입니까? 그런가하면 시험 치러놓고 발표도 나기 전에 알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발표하는 날 보면 안됩니까? 그 결과를 미리 알겠다고 연줄을 내세워 전화를 해대는 사람들, 참으로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원망체질입니다. 만사에 조급하므로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아가 불신에서 원망이 생겨납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믿지 못합니다. 불신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원망을 하게 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도 줄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착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 농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 딴에는 진실하고 착하게 살아왔습니다. 어느 날, 몸이 불편하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니 위암이라고 합니다. 더는 살 길이 없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온 농부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나는 남보다 깨끗하게 경건하게 살려고 애를 썼는데, 왜 내가 위암에 걸려야 합니까? 세상에 못된 놈도 많은데, 왜 내가 몹쓸 병에 걸려야 합니까?'라고 원망의 기도를 합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로 그에게 임하시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기도는 듣지 않으십니다. 감사의 기도만 들으십니다." 성령의 감화로 불현듯 지난 주 교회에서 들은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난 농부는 원망을 멈추고, 이렇게 고쳐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은 없습니다만, 좌우지간 감사합니다'라고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다시 성령의 감화로 감사할 일이 생각납니다. 오늘까지 건강한 것, 오늘까지 농사지은 것, 내가 죄지을 때에 하나님께서 참아주신 것, 내가 잘못된 길을 갈 때에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 가정에 대한 것, 믿음에 대한 것--그저 감사할 일만 자꾸 생각납니다. 그 농부는 원망의 기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병에 걸린 것도 잊어버리고, 낫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도 잊어버린 채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며 열심히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그러자 온 마음과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더니 결국은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원망을 멈추십시다. 이제는 감사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 원망에 찬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모세는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사람은 또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출 14:13)"하고 외칩니다. 앞에는 흥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쫓아옵니다. 저들은 지금 불안과 초조에 떨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능력을 알기에 의연히 "가만히 서서 여호와에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하고 외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여기에 정말로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시대가 급격히 변하고 있습니다. 요즘 가만히 보면 미국 대통령이 하나 바뀌었다고 해서 걱정이 많아요. 도대체 언제 우리가 미국 대통령을 믿고 살았습니까? 우리가 믿는 것은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십니다. 언제 우리가 돈을 믿고 살았습니까, 경제인들을 믿고 살았습니까, 정치가를 믿고 살았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뿐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십니까? 분명코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으로 민족적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온 세계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이렇게 말한답니다. 한국은 참 이상한 나라라고요. 곧 망할 것 같은데 안 망한다나요. 밤낮 화염병에 데모에, 게다가 김일성은 저 위에 저렇듯 떡 버티고 앉아 있지, 도대체가 살아남을 수 없을 민족 같은데 지금껏 이렇듯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감사하며 우리의 길을 갈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년 간 길을 인도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을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믿음, 더 큰 은혜로 당신 앞에 나오기를 바라십니다. 여러분, 이 위대한 믿음과 함께 그 앞에 승리의 생활이, 승리의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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