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에 맞는 자리에 서 보라 요8:1~11, 레14:2~4
오늘 본문말씀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현장에서 붙잡힌 간음한 여인이, 돌에 맞아 죽을 상황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건져내신, 아주 유명한 성경의 기사입니다.
'이 본문으로 어떤 설교를 해야 될까?' 하고 깊이 생각하는 중에
지난 수요일에 새벽기도 가려고 교회를 올라오는데
갑자기 제 마음에 "돌에 맞는 자의 자리에 서 보라" 그런 마음이 아주 강하게 들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보는 관점을, 저에게 명확하게 해 주셔서
이 본문이 주는 메시지를 깨닫게 하신다... 그런 느낌을 제가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그 점에 초점을 두고 여러분과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저희 교회는 해마다 따로 부흥회를 하지 않고
정기적으로 1년에 두 번, 성경 66권 중에 한 권을 택해서 <말씀 기도회>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기도회를 통하여,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고 삶의 변화를 간증을 하세요.
유명한 강사님이 오신 것도 아닌데,
그저 성경만 읽으며 말씀 붙잡고 기도한 건데..
어떻게 그런 역사가 일어나는지요!
그 이유는, 우리가 성경속으로 들어간 겁니다.
그냥 성경을 읽기만 하는 게 아니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서 말씀으로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난 거죠.
에스더서를 읽을 때는 '나는 에스더입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을 때는 '내가 느헤미야입니다'
호세아서를 읽을 때는 '내가 고멜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말씀을 보았기에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역사를 경험하게 된 겁니다.
▲제 아내가 <말씀 기도> 강의를 하면 *성경 말씀 붙들고 기도하기
늘 하는 그런 강의 내용이 하나 있는데
레위기 14장을 가지고 '말씀 기도' 했던 이야기입니다.
이 레위기 14장은 57절로 된 굉장히 긴장입니다.
'나환자가 깨끗하게 고침을 받은 경우
어떻게 제사장이 그가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 줄 것이냐?' 그 내용이에요.
그 세세한 규례가 그렇게 복잡하고 깁니다.
그런데 '말씀 기도회'를 인도하는 입장에서는 참 답답해요.
이 긴 성경 본문을, 나환자가 깨끗하게 되는 과정을 규례로 정한 것을 놓고
'그 중에 무슨 구절을 붙들고 도대체 기도를 해야 하나?' 난감하더래요.
근데 그때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네가 나환자 심정으로 읽어보라!' 하시더래요.
나환자 심정이 되어 보니까, 말씀이 주는 의미가 확 다르더래요.
나환자가 오늘 제사장을 통해서, 내가 깨끗하게 되었다는 판정을 받은 날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설레겠어요.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규례, 그 판정 과정이 굉장히 지루할 정도로 길어요.
근데 그게 (나환자 입장에서는) 다 은혜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나환자가 집으로 돌아갈 경우에
나환자 자신도 '내가 돌아가도 되나?' 이런 걱정이 될 수도 있죠.
'이게 또 전염되는 거 아니야?'
가족들도, 또 동네 이웃들도, 이 나환자였던 사람이 이제 돌아온다는데
'그냥 맞이해 들여도 될까, 진짜 고침 받았을까?'
그런 마음에 우려가 있었지 않았겠어요?
그런데 그 나병 환자가 고침받았다는 확정 규례가 굉장히 까다롭고 깁니다.
그 규례를 다 지켜서 결국은 '당신이 깨끗하다' 이제 그런 판정을 받았다면
나환자 입장에서도 '아~ 이제 내가 진짜 고침 받았구나'
가족이나 이웃들도 그런 규례를 거쳐서 판정을 받은 사람이니까
그러면 얼마든지 함께 살아도 되겠구나..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나환자 입장에서는, 그 긴 '나환자가 치유되었다는 판정을 받는 과정'이
절대로 길다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죠.
하나 하나가 너무 감사하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그렇게 깨달아 지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레위기 14장을 읽어보니까
하나 하나가 다 그렇게 새롭더라는거죠.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알던 성경이지만
"성경있는 자리를 분명히 하고 읽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간음하다가 그 자리에서 붙잡혀 온 여인이에요.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이 상황을 아주 만들어 놓고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 넣는 사건이었습니다.
하여튼 꼬투리를 잡아야 예수님을 죽일 텐데
마땅하게 예수님을 죽일 죄목을 못 찾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예수님앞에 끌고 온 거예요.
'이 여인을 어떻게 할 거냐?'
예수님이 늘 말씀을 전할 때, '죄인을 용서해라, 사랑하라!' 하셨는데
그러면 이 여자도 용서하라 사랑하라고 할 텐데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하다가 붙잡힌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이 여자도 용서해라' 그러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거잖아요.
그리고 음행을 조장한다고 뒤집어 씌울 수도 있잖아요.
이런 아주 살벌한 분위기에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도 그 상황을 아셨어요.
그렇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죽이려고 올무를 놓는 상황이지만
그 상황을, 저와 여러분과 이 성경을 잃은 모든 사람에게
'도대체 죄에서 용서받는 구원의 은혜가 뭔지?'
그걸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으셨어요. 그래서 이 사건을 놀랍게 쓰시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아주 통쾌하게, 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 이런 스토리로만 성경을 잃는 것은
구경꾼의 입장에서 보니까 그런 거예요.
나와 실질적인 상황은 아무것도 관련이 없는 거죠.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있는 그 자리가
저와 여러분이 서 있어야 할 자리라는 거에요.
그러면 주님을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확하게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인지,
내가 받은 은혜가 뭔지.. 깨닫게 돼요.
실제로 우리는, 내가 알고 지었던/ 모르고 지었던
사실 드러나기만 하면, 얼굴 들고 있을 수 없을 만한 죄를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이 죄가 다 드러나는 순간에
우리는 정말 기절하는 줄 알 거예요.
죄는, 아주 흉악한 그런 죄목으로 교도소에 있는 사람들만 짓는 게 아닙니다.
멀쩡하게 평범한 그런 삶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도
사람들 앞에 드러내 놓을 수 없는 그런 죄를 다 가지고 있어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이 얼마나 놀랐겠어요, 얼마나 부끄러웠겠어요?
다 우리가 겪을 일이에요.
교회에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아요.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 들어가서, 나라가 너무 걱정스러워
나라를 위하여 기도하다가, 그가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근데 하나님을 만난 순간에, 이사야 선지자는 기절하는 줄 알았어요.
자기 모습이 얼마나 더러운지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그는 자기 입을 부여잡고 성전에서 데굴데굴 굴렀어요.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렇게 훌륭한 선지자이며 제사장인데
나라 위해서 그는 걱정했지, 자기를 위해서는 그는 걱정이 없었어요.
그런데 하나님을 딱 만나는 순간에 '내가 그동안에 무슨 말을 하고 산거야?'
그게 그렇게 두려워서 그는 고꾸라졌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겪을 일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친구가 제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나는 너무 더러워, 그런데 너는 너무 깨끗하잖아!'
제가 그 친구한테 '무슨 그런 말을 다 하냐?' 그랬지만
속으로는 '맞는 말이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살 거면 저 친구는 왜 신학교에 들어왔지?
본인이 그걸 아니까 다행이다..' 저는 그렇게만 생각을 했죠.
그런데 제가 회심하는 날, 그 일이 생각이 나요.
주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 친구는 정직한 친구이다! 근데 너는 가증하다..'
저는 모범생 같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바리새인 같이
겉하고 속이 다른 존재였더라고요.
저는 감추고, 누르고, 숨기고.. 그렇게 살았어요.
그게 잘사는 건 줄 알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내 허물과 내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사는 것이,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고, 목사의 아들이고,
그리고 신학생이고, 전도사이고, 목사인 줄 알았어요.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겉으로는 착하지만 속으로는 악하고
겉으로는 온유하지만 속으로는 성질이 많고
겉으로는 인내하지만 속으로는 안달하고... 매일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끝까지 사람을 속이고 삽니까?
결혼해서 제 아내를 만나고, 그리고 아이들을 낳아서 아버지가 되고 보니까
나 자신을 속이고 살 길이 없어요.
▲요즘도 저에게 돌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를 잘 몰라서 오해해서, 곡해해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저는 변명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진짜 제 육신적인 모습을 보고는, 돌을 안 던질 사람이 누가 있겠나?'
그런 마음이 드니까요.
더 힘든 건, 다른 사람이 제게 돌을 던지는 것보다 더 힘든 건,
제가 저 자신에게 던지는 돌이에요.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제가 설교해도 됩니까? 제가 설교할 자격이 있습니까?'
설교할 자격이 없다고 느껴져요.
그래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내가 설교를 해도 되는지?'를
묻고 또 물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저는, 돌에 맞을 자리에 서 있는 이 여인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아요.
그 두려움, 그 수치스러움, 그 절망감.. 그게 이해가 되더라고요.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 서 보니까
주님이 정확하게 보이는 거예요.
예수님은 어떠신 분인가.. 그게 정확히 보이는 겁니다.
이 여인이 '이제는 돌에 맞아 죽었구나!' 그러고 있는데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이 말씀을 듣고 그 바리새인들, 율법학자들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말을 하실 줄 몰랐어요.
'죄가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그래서 나이 많은 사람부터..
왜 나이 많은 사람부터 입니까?
오래 살았으니까 더 잘 알지요. '나는 돌을 던질 자격이 없다. 나도 죄가 있어!'
그것을 깨닫고 하나 둘, 돌을 내려놓고 가버렸다는 거잖아요.
그러나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그 여인이었을 거예요.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의 의미가 이해가 다 되지 않았겠지만
그는 갑자기 속에서 뭔가 확 치밀어 오르는 게 있었을 거예요.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세요. 그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저도 똑같은 의미의 주님의 말씀을 들은 것 같아요.
저는 밤새도록 울고 회개했어요.
정말 다 잊어버린 것 같은.. 아무도 모를 것 같은 저만의 죄가
그날 밤에는 하나같이 다 생각이 나더라고요.
이 정도쯤 가증한 놈이면 버림받은 놈이죠.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시고, 저를 다시 쓰시겠다고 하시니
그 때는요, 돌에 맞아도 좋겠더라고요.
사람들로부터 어떤 돌을 맞아도 상관없겠더라고요.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고, 주님이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더라고요.
그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도 똑같은 심정이었을 거예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확 일어났을 거예요.
▲여러분, 돌에 맞는 자리에 서 보셨나요?
만약에 '나는 뭐 그렇게 돌에 맞을 만큼 죄가 없습니다.'
그런 분들은 아직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기를 보는 눈도 안 뜨였고, 죄를 깨닫는 것(죄책)도 안 되니까 그런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영적으로 잠이 든 상태인 것처럼.. 그렇게 믿는거에요.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겠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모르겠고
구원의 감격이라는 것도 모르겠고, 거듭난 삶이 안 되는 건 말할 것도 없고요.
정말 주님을 만나려면, 여러분이 서 있는 자리가 정확해야 합니다.
내 죄로 인하여 내가 돌에 맞아 죽을 그 자리에 서 봐야
비로소 나를 향한 주님의 은혜가 뭔지,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를 알게 돼요.
예수님의 십자가 오른 편 강도, 그는 자기 죄로 죽을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보니까
그 마지막 순간에 그는 구원받을 수 있었거든요.
▲유명한 소설가 정연희 씨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공부도 많이 했고 굉장히 지성적인 분이에요.
그는 예수를 믿었지만, 온전히 거듭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친구의 전도로 교회를 나오는 정도였죠.
어느 날 그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크게 다쳐서 수술도 하고 했는데
자기 얼굴에 난 상처, 그리고 얼굴이 찌그러진 모습이 고쳐지지 않는 거예요.
병원에서 수술을 해도 회복이 안 되는 거죠.
이런 얼굴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게 절망감이었어요.
그때 그분이 '아 그렇게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는 기도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그때 당시에 한얼산 기도원이라고 유명했습니다.
'나도 한번 기도원에나 가볼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는 짐을 꾸려가지고
한얼산 기도원에 한 주간 동안 올라갔어요.
그런데 가 보니, 난리인 거예요.
예배를 드리는데 찬송을 하는데, 막 북을 치고, 손뼉을 치고
'주여!' 라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건 완전히 미친 사람들인 거예요.
광란의 도가니 같은 거예요.
'여기는 교양 있는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곳이 아니구나'
그래서 짐을 싸가지고 기도원에서 내려왔어요.
그런데 걸어서 언덕 길을 내려오는 중에
'내가 지금 이러고 내려갈 상황이 아니잖아!'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이렇게 그냥 아무 기도응답의 역사도 없이 내려가는게, 지금 내 처지가 아니잖아!'
그러니 집회에 은혜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집으로 가려니, 그럴 형편도안 되고...
그래서 일주일 내내 엉거주춤 기도원 예배당 제일 뒤편에 앉아서 구경만 했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저 사람들은 미쳤나봐!
야 어떻게 저렇게 광신도처럼 저러나?
여기는 진짜 이상한 사람들만 모였나봐!'
그리고 통성기도를 하면, 사람들은 예배당 천장이 떠나가도록 '주여 주여!' 하고
방언으로 기도하고 하는데,
자기는 그냥 조용히 그냥 기도하고.. 그리고는 한 주간이 다 지났습니다.
마지막 저녁 집회가 끝나고, 이제 내일은 내려가야 돼요.
그러니 그날 마지막 저녁 집회에 참석하는데 마음이 너무 비참하더래요.
'이게 뭐야? 한 주간 기도원에 왔는데..
여기는 기적도 일어나고, 병자가 고침도 받는다는데..'
자기는 아무 은혜의 역사도 체험하지 못했거든요.
근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더래요.
'내가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해 봤나?'
'기도하라면 기도하고, 손을 들려면 손을 들고..
뭐 주여 부르짖으라면 부르짖고 했나?'
자기는 하나도 시키는 대로 한게 없더래요. 그냥 구경만 한 거죠.
'이래가지고는 무슨 역사가 네게 일어나겠나?' 그런 생각이 불쑥 들더래요.
그래서 그날 저녁에는 '사람이 죽으면 자존심도 뭐가 있겠으며,
사람이 죽으면 시키는 대로 못할 것도 뭐가 있겠나?
여기도 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데, 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했다는데
그래, 오늘 저녁에는 진짜 내가 죽었다 생각하고, 시키는 대로 한 번 해 보자!'
그렇게 자기 마음을 정리하고 보니까, 마음 자세가 달라지더래요.
그래서 예배실 맨 앞자리에 나왔습니다. 거기에 않았어요.
'오늘은 뭔가 진짜 주님께 내 마음을 다해서 기도도 하고 순종도 해야 되겠다.'
강사님이 나와서 찬송을 인도하고
그리고는 두 손 들고 큰 소리로 '주여!' 세 번 부르짖고 기도하자 그러는데
그냥 마음을 딱 정리를 했으니까, 진짜 두 손 들고
자기 평생 처음으로 그렇게 소리를 질러서 '주여, 주여!' 하고 소리를 지르는데
성령이 임한 거예요.
갑자기 하나님이 믿어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지금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사랑하신다..'
그게 너무 강하게 믿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도 주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그게 믿어지는 것뿐만 아니고
'내가 너무 교만했구나, 내가 진짜 교만하구나
내가 뭐라고 내가 너무 고집이 세지?
내가 너무 위선적이구나..'
그러면서 너무 마음이 애통하고, 그리고는 그날 기도하는 내내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깨달아지니까 감사하고
내가 얼마나 가증하고, 교만하고, 고집 세고 악한지 깨달으니까 또 회개가 되고..
그렇게 그냥 기도를 하고, 그날 저녁 집회가 끝나고
숙소로 들어와서 세면대에 가서 이제 세수를 하는데.. 보니까 얼굴이 기적적으로 다 돌아온 거에요.
그분의 간증(책)에서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정말 주님께 내 모든 것, 내 자존심, 내 계획, 내 생각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났다고...
▲여러분 '돌에 맞는 자리에 서보라!'
이것은 정말 놀라운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을 어디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구경꾼으로 보는 사람들,
-진짜 돌에 맞는 그 간음한 여인의 심정에서 주님을 만난 사람들,
주님의 용서를 정말 체험하려면,
여러분이 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이 여인과 같은 심정으로
내가 주님을 바라봐야 돼요.
그러면 여러분 속에 그동안 그렇게 끊어야 되겠다, 고쳐야 되겠다, 버려야 되겠다..
그런데도 안되던 게 그냥 한순간에 됩니다.
간음했던 여자가 그 사람들 앞에 끌려왔을 때
그가 얼마나 살려달라고 했겠어요? 이제 죽으러 가는 거예요.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근데 끌고 오는 사람들이, 그 여인이 막 살려달라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던 말이
하나도 믿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어떤 동정도 안 했을 거예요. 왜?
'이런 여자는 못 고쳐! 한번 이렇게 죄지은 여자는 결국 그렇게 가는 거야!'
실제로 그 여자도 얼마나 마음으로 그동안에
'내가 이렇게 살면 안 되지..'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무서우니까, 이제 죽을 자리에 가는 거니까.. 막 살려달라고만 하는 거지요.
자기도 안 믿어지고, 주변 사람도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돌을 들고 던지려는 사람들은 다 없어지고
예수님은 그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시고
그 여자는 마음에, 그냥 완전히 뒤집어지는 은혜를 경험한 거예요.
'다시는 죄 짓지마!'
그런데 여인은요 그 순간에
그냥 눈물만 막 쏟아지면서
더 이상 죄 짓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는 거예요. 진짜 회개가 터지는 거죠.
진짜 회개는, 죽도록 매를 맞아서 회개가 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을 진짜 만났을 때,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그 사랑에
진짜 내 가슴이 딱 부딪힐 때
그때 갑자기 나도 모르게 죄는 다 싫어져요.
▲간음한 여인을 치려고 돌을 들었던 사람들,
주님의 말씀에 마음에 가책을 느끼고 다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마음에 죄책감을 느꼈어요. '나도 죄인이지..'
그러면 이 간음한 여인 옆에서 그 자리에 같이 무릎을 꿇어야죠.
'나도 죄인인데, 이 여자나 나나 똑같은데..
주여, 나도 이 여자랑 똑같은 죄인입니다.' 이러고 나왔어야죠.
어떻게 돌을 내려 놓고 가버립니까?
오늘도 저는 마음이 안타까운 것이
그저 '그래, 나도 죄인이지..' 이러고 집에 갈 교인이 있을 것 같아서요.
돌을 내려놓기는 했어요. 반드시 다시 돌을 들 날이 옵니다.
진짜 회계가 안 된 사람!
정말 예수님을 만나고 뒤집어지지 않는 사람은요,
반드시 돌을 들 날이 와요.
저도 저도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로
누군가를 정죄하고, 판단하고, 비난하는 저를 발견할 때가 있어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어? 어떻게 저런 목사가 있어?
어떻게 저런 사람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어? 저건 사람도 아니야!'
이런 마음이 들 때도 있어요. 배신감을 느낄 때도 있고,
속이 정말 뒤집어지는 경우도 있어요.
근데 그 때마다, '아~ 내가 이 간음한 여인처럼
돌에 맞아 죽을 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어버린 순간이에요.
그걸 잊어버리니까 돌을 또 드는 거예요.
▲여러분, 진짜 무서운 죄는
내가 죄인이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돌을 들려고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우리가 누구를 비난할 거면, 누구를 정죄할 거면 반드시 전제가 있어요.
내게 죄가 없으면 그렇게 하라는 거예요.
죄가 있으면 그게 무서운 죄가 돼요.
자기도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의 죄에 돌을 던진다?
특히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았다고 믿는 사람이,
내 죄는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받아놓고,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돌로 쳐요?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가장 무서운 죄는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했던 죄입니다. 왜?
나는 엄청난 은혜를 받아놓고, 예수님이 나 때문에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셨는데
그런 은혜를 받아 놓고, 나는 다른 사람을 돌로 치다니요.
제가 어느 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그 목사님과 마지막에 식사를 하는데
그 목사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유 목사님, 이번 부흥회 때, 제 마음에 들었던 돌을 다 내려놓았어요.'
너무 감사하더라고요.
교인 중에 한 사람이 그런 은혜를 받아도 귀한 일이죠.
근데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이번 부흥의 기간 동안
내가 마음에 누구 교인들을 향하여, 다른 목사님을 향하여
돌을 들고 있었던걸 다 내려놨다고... 그게 진짜 은혜거든요.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경험하는 가장 놀라운 기적은
죄인을 사랑하게 되는 거죠.
우리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이나, 이런 재난을 당한 사람은 얼마든지 품을 수 있어요.
그들을 위해서 헌금도 하고.. 그런데 죄인은 못 품습니다.
특히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은 품고 사랑할 수가 없어요. 사람의 본성은 그렇게 안 돼요.
그런데 내가 나에게 죄지은 사람,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 이건 기적이 일어난 거예요. 기적!
그리고 이게 바로 예수를 믿은 사람인가/ 아닌가를 구분해주는 거예요.
이 사람이 진짜 예수를 믿은 사람인가/ 아닌가?
그건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서부터 갈라지는 거예요.
▲여러분 속죄함을 받는 것과, 원수를 사랑하는 게
어떤 게 더 어려운 일일 것 같습니까?
속죄함을 받는 게 훨씬 어려운 일이에요.
죄를 내가 지었는데, 그 죄를 다 사함 받았어요.
내가 죄를 지었는데, 그 죄가 다 씻김을 받았어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될 만한 일이에요.
그런 속죄함을 우리가 받은 거라니까요.
원수를 용서하는 것, 사랑하는 것
그것도 어려운 일이긴 하죠.
근데 속죄함을 받은 것과는 비교가 안 돼요.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느냐?
예수님께서 1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와 1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로 설명하셨어요.
하도 우리가 돈 계산에 밝으니까, 아주 쉽게 돈으로 계산을 해주셨어요.
5조원에 해당되는 빚과, 1천만원 정도의 빚을 진 사람의 차이입니다.
속죄함을 받은 은혜는 5조원 정도의 빚이고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1천만원 정도의 빚이에요.
둘 다 어렵지만, 이건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속죄함의 은혜를 받았어요.
그런데 원수는 사랑을 못한다면, 그건 딱 하나의 경우에요.
자기가 진짜 속취함의 은혜를 누리고 있지 못하는 거죠.
받은 게 없으니까 내가 뭐 남에게 줄 것도 없는 거죠.
줄 게 없다는 것은, 받은 게 없다는 뜻이죠.
돌에 맞는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는 거죠. 그러니까 은혜를 경험을 못한 거죠.
▲간음했던 이 여인이, 그 다음에 누군가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상상이 안돼요.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누구를 정죄해요?
우리야말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은혜로 용서받은 사람이에요.
우리가 누구를 도대체 비난할 수 있어요?
도대체 우리가 누구를?
예수님이 나 위에 죽으셔서 내가 용서받았는데...
저는 이 간음한 여인이 오히려 부럽기도 해요. 왜?
이제는 뭐 감출 것도 없잖아요. 온 동네에 다 소문났어요.
이제 뭐 다 공개된 이야기에요.
그러니 간음한 여인이 뭐 누르고, 참고, 숨기고 그럴게 뭐 있어요?
사람들이 다 아는데..
그러니까 그 여인은 교만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수준이 높다' 뭐 이렇게 꾸밀 것도 없다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한테 돌을 던질 엄두도 못 내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를 못합니다.
체면때문에, 자기 위치 때문에..
그러니까 누르고 숨기고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 은밀한 죄에 종노릇 해요. 부끄럽게는 생각해요.
근데 사람들이 자기 죄를 몰라요. 그러면 여전히 또 그런 죄를 반복해요.
결국 하나님 앞에 갈 때 드러나요.
물론 마귀가 노립니다. 진짜 무서워요.
마귀가, 우리가 은밀한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마귀도 다 압니다.
일단 내버려 둬요. 그러다가 결정적인 때 터뜨립니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자기 죄가 드러나지 않고 죽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 다행일까요? 천만의 말씀!
주님 앞에 가서 그게 다 드러났을 때,
차라리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고
여기서 창피당하고, 여기서 부끄럽고, 여기서 너무 괴롭고..
그래서 여기서 회계하고 돌이켰으면 다행이죠.
그런데 회개할 기회도 없이 죽었어요. 끝장이죠.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그 비참함은 말할 수가 없을 거예요.
▲여러분 마귀가 진짜 무섭게 노리고 있다는 걸 알아야 돼요.
마귀가 노리는 건 두 가지예요.
-은밀한 죄, 간음죄를 짓고 사는 거죠.
-또 하나는 그러면서도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사는 겁니다.
이 두 가지는 꼼짝없이 우리를 얽어매요.
제가 어릴 때 교회에서 자라면서 보니까, 한번은 어느 남자 집사에게 여자가 생겼습니다.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그게 알려졌어요. 교회에 난리가 났습니다.
제가 그때, 죄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봤어요.
그 남자 집사는, 거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온 교인들에게 소문 나고, 동네에 다 소문나고..
더 이상 가정을 꾸려서 살 수도 없고..
'와~ 간음죄가 이렇게 무서운거구나!' 그게 그렇게 느껴지더라고요.
근데 더 무서운 건, 그때 죄인을 향하여
얼마나 사람들이 살벌한가? 하는 거였어요.
하여튼 이 간음을 저질렀다.. 사람 취급을 안 해요.
교회에서도 그런 분위기더라고요.
여러분, 우리도 똑같아요.
은근히 은밀하게 죄 짓고 살면서도
다른 사람이 죄 지은 것이 드러나면
나는 전혀 죄 안 지은 사람처럼 무자비하게 돌을 던집니다.
여기서 구원받을 길이 뭐죠?
여러분이 돌에 맞을 자인 것을 진짜 인정해야 돼요.
그리고 거기서 주님을 바라봐야 돼요.
이 간음한 여인이 어떻게 예전처럼 살았겠어요?
진짜 구원의 삶, 진짜 회개의 삶, 완전히 죄와 결별된 삶,
무엇보다 절대로 남에게 돌 던지지 않는 사람으로.. 그렇게 되는 거죠.
오늘 이 시간도 여러분 마음에
'주님 제가 완전히 예전 삶을 청산하고 거듭난 삶을 살기 원합니다.
그리고 이 간음한 여인처럼, 내가 돌에 맞는 그 자리에서, 거기서 주님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렇게 정말 진심으로 원하고
정말 그게 기도제목이신 분은 일어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만나기를 정말 원합니다.
주님, 제가 진짜 주님을 만나고 은혜의 삶을 살고, 변화되길 원합니다.'
오늘 주일 예배시간이 워낙 짧으니
여기서 깊은 기도의 시간을 따로 못 가져도
여러분의 기도는 주님이 받으실 것입니다.
반드시 주님께서 여러분을 개인적으로 만나 주시고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을 바꾸는 역사를 주실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님 제가 돌에 맞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바라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의 그 입장에서 제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저를 긍휼히 여겨 주소서. 제 눈을 떠서 주님을 보게 하소서.
다시는 죄에 묶여 살지 않게 하시고, 그리고 더 이상 남에게 돌 던지는 자가 되지 않게해 주옵소서!'
우리 다 같이 '주여!' 부르짖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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