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위기에 나타난 십자가
레 16:21-22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
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
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지
니라.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보내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는 한 가지 아주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계신 것이 있는데 그것이 이 세상을 구원하실 마음입니다. 타락하고 죄지은 이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고 은혜주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소망이고 뜻이 선하신 마음입니다. 마치 사고를 치고 집나간 아들을 향한 부모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생각하면 괘씸하고 밉지만 또 생각하면 집나간 아들이 불쌍합니다. 그래서 도와주고 용서해주고 싶고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하나님의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 구속사상이 연연히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한강 물이 서울의 동서를 가로질러 연연히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공위성이 찍은 사진을 보면 한강 물은 저 북쪽에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흘러 마침내 서해 바다로 흘러들어 갑니다. 사진을 보면 물줄기가 마치 혈관과 같이 가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강 물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수 노릇을 합니다. 각종 에너지를 공급하고 힘을 공급하고 생명을 공급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도 이 생명의 물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물줄기 같은 혈관이 연연히 흐르고 있습니다. 이 혈관을 통해서 피가 각 지체로 흘러 생명과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공급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의 공급이 끊어지면 그 시간으로 인간은 죽게 됩니다.
성경을 보면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이 구속사상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구속사상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실 목적으로 베푸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온통 세상을 구원하실 이 마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사상이 마침내 신약시대에 와서는 마지막으로 골고다의 십자가로 표현되어 나타납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십자가 사상은 신약시대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구약시대에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창세기의 십자가
성경 창세기는 인류의 시작과 세상의 창조의 역사를 기록한 말씀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이 세상의 시작을 말씀하고 죄의 시작을 말씀하고 인류의 타락의 시작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이름이 “게네시스”(Genesis)입니다. 출처, 기원이라는 뜻입니다.
맨 먼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만드십니다. 이 두 사람은 인류의 시조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흙으로 빚어 만드십니다. 흙으로 몸을 만들어 놓고 그 몸에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눈을 뜹니다. 아담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세상의 아름다움, 꽃, 나비들, 잔잔한 호수, 새들, 고기들, 그 모습들을 보고 아마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세상,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한 이 세상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아담은 상당히 놀랐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담에게 상당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살아갈 곳을 낙원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곳이 에덴입니다. 파라다이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은 곳입니까. 그곳은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또 한번 놀랍니다. 눈을 떠 보니 눈앞에 여인이 하나가 있는데 그 여인이 하와입니다. 그 여인을 보자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너무 아름다운 여인이 곁에 있습니다. 하와도 처음 눈을 떴을 때 그렇게 놀랐을 것입니다. 눈을 떠 보니 세상이 아름답고 곁에 젊은 남자가 있는데 얼마나 잘생겼겠습니까. 더구나 온천지에 하나밖에 없는 남자 여자이니 얼마나 순간 눈에서 불이 튀었겠습니까. 에덴은 그런 뜻과 신선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서려있는 낙원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아담이 또 한번 놀랍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하는 여인 하와가 사고를 쳤기 때문입니다. 밖에 나갔다 들어와 보니 하와가 울고 있습니다. 아담은 너무나 그때 놀랐을 것입니다. 사람이 우는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왜 우느냐고 물으니 하와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그 열매를 먹었다”고 합니다. 아담은 그 대답을 듣고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러면서 하와가 하염없이 울고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하와가 그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죽을 것이다, 그러면 당신 혼자 남을 것이다”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 하와의 처지나 울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처량합니까.
여러분, 모든 남자들은 앞에서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남자들은 모두 여인들의 눈물 앞에서는 그만 약해져버립니다. 그래서 그때 아담이 생각해 봅니다. 그 여인이 없이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이 혼자 죽는 것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만 죽게 할 순 없다, 나도 함께 죽겠다”하고 아담도 먹다 남은 열매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갑니까. 이것이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발생했던 사건의 발단입니다.
인간이 창조되면서 아담과 하와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이 죄짓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주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에덴도 상실하고 그 좋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타락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하고 뺏어버리게 하고 잃어버리게 합니다. 그런데 그 열매를 먹으면 아담 부부는 죽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미 그렇게 명령되어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오시더니 아담부부를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양을 대신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양의 가죽으로 아담부부의 옷을 해 입히고 그들을 용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동기를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아담부부를 대신해서 어린양이 죽는 사건입니다. 여기서 벌써 대속의 죽음이 나옵니다. 창세기에서 벌써 대속의 제물이 등장합니다. 양이 대신 죽음으로서 아담 부부가 살아났습니다. 이것을 대속의 제물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벌써 십자가의 대속의 모형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기 죄 없이 죽은 어린양은 죄 없이 죽은 예수의 모형입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십자가의 모형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참 신비한 일입니다.
레위기의 십자가
창세기 뿐 아니고 레위기에도 이미 십자가의 모형인 그림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매년 7월 10일을 속죄일로 지켰습니다. 그날 백성들은 일년 동안의 죄를 속죄 받는 날입니다. 그 당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날 두 마리의 염소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제물로 성전에 바쳤습니다. 그리고 염소의 피는 제사장에 의해서 속죄소에 뿌려지고 고기는 제물로 드려졌습니다. 그때 대제사장은 지성소 깊숙이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밖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밖에서 초 긴장상태에서 기다렸습니다. 왜냐하면 지성소 안에서 제사 드리던 제사장들이 가끔씩 죽어나오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사장의 옷에는 방울을 달고 끈을 달아서 속죄소에 들여보냈습니다. 지성소 속에서 제사지내느라고 몸을 움직일 때 마다 방울 소리가 나면 밖에서도 안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방울 소리가 나지 않으면 안에서 제사장이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옷에 매달은 줄을 당겨서 끌어냈습니다. 그 지성소 안에는 대제사장 한사람만 들어갈 수 있고 누구도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제사장이 바친 제물을 하나님이 받으시면 지성소 안에 빛나는 광채가 비취었습니다. 그 빛을 “쉐키나 광채”라고 합니다. 백성들이 밖에서 기다리다가 지성소 안에서 환한 쉐키나 광채가 나타나면 “우리가 드린 제물을 받으셨구나”하고 안심하고 한 해 동안 죄 사함을 받음을 감사하면서 밖에서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또 한 마리의 염소는 “아사셀 염소”라고 부릅니다. 이 염소의 머리에 제사장이 손을 안수를 합니다. 그때 안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아뢰며 그 죄들을 염소의 머리에 덮어씌우는 안수입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 염소가 수난의 행보를 시작합니다.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진 염소는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예루살렘 거리를 통과해서 감람산을 지나 동쪽 요단강까지 끌려갑니다. 그리고 동쪽 요단강 넘어 광야에 버려집니다. 이 염소가 예루살렘 거리를 가는 동안 연도에 백성들이 모여 지나가는 어린 염소에게 온갖 저주를 퍼붓습니다. 침을 뱉고 돌팔매질을 하고 털을 뽑고 회초리로 때려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게 합니다. 그렇게 기진한 염소를 끌고 요단강까지 가서 마침내 강 건너 광야에 버립니다. 그러면 이 염소가 광야에서 기진하여 죽던지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맹수들에게 찢겨져서 죽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죄 사함 받음의 축제가 시작됩니다. 이렇게 해서 바쳐진 염소를 가리켜서 아사셀 염소 혹은 쉐키나 염소라고 부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의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여기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7절을 보면 “또 그 두 염소를 가지고 회막문 여호와 앞에 두고 두 염소를 위하여 제비뽑되 한 제비는 여호와를 위하고 한 제비는 아사셀을 위하여 할지며 10절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뽑은 염소는 산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지니라, 21절 “아론은 그의 두 손으로 살아있는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불의와 그 범한 모든 죄를 아뢰고 그 죄를 염소의 머리에 두어 미리 정한 사람에게 맡겨 광야로 보낼지니 염소가 그들의 모든 불의를 지고 접근하기 어려운 땅에 이르거든 그는 그 염소를 광야에 놓을 찌니라”.
여기에서 벌써 장차 나타날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의 모형이 나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 염소가 예루살렘 연도를 지날 때 뭇 사람들로부터 채이고 찢기고 상처 입은 것처럼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 거리를 지날 때 뭇사람들이 침을 뱉습니다.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돌팔매질을 했습니다. 그래서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었습니다. 그 모습을 이미 수세기 전인 레위기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마침내 골고다에 버려져서 아사셀 염소처럼 피투성이가 되어 죽으십니다. 이 모습이 벌써 레위기서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 구원의 도리, 십자가의 도가 얼마나 심오한 사상입니까. 이 구원의 정신이 성경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이렇게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그렇게 희생시키면서 까지 세상을 구원하실 뜻을 이미 창세기 때부터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참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숭고하고 너무 깊고 숙연해지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의 고난 모습 묵상
우리는 마음에 이 고난의 예수의 모습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나의 마음에 그 십자가의 모습이 새겨지는 은혜를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랑을 하게 되면 마음이 달아오르고 뜨거워지고 마음 가득히 기쁨으로 가득 채워지듯이 말입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을 하게 되면 눈을 감아도 잠을 자도 눈앞에 상대방이 어른거리듯 우리들이 깊이 마음으로 주의 고난의 모습을 묵상하게 되면 그 마음이 숙연함과 경건함으로 채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경건의 모습이 밖으로 표현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표현된 신앙의 모습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또 그 모습에서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숙한 신앙인은 사람들에게 경건한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의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는 평신도입니다. 마가는 줄곧 예수님의 행보를 눈여겨보다가 고난 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쓰면서 예수님의 고난 받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쓰기 시작합니다. 왜 고난에 초점을 맞추었는가 하면 자신들이 당시 로마로부터 핍박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 받는 모습이 위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이 핍박받는 모습을 보니까 자신들이 지금 받고 있는 핍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는 예수님의 고난과 박해받는 모습을 강조해서 마가복음을 쓰게 됩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의 주제가 고난 받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주제로 쓰인 마가복음을 읽고 가장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은 사람이 후기 바로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하는 헨델입니다. 이 헨델이 마가복음을 탐독하다가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마침내 헨델이 그 장엄한 메시야를 작곡하게 됩니다. 오늘 사람들은 헨델의 메시야를 연주할 때 헨델이 그 곡을 작곡한 의도와 동기를 모릅니다. 그래서 메시야를 연주할 때 너무 길고 지루하니까 재미없는 곡을 몇 개 뽑아내는데 대부분 비탄스러운 곡들이 들어있는 고난부분들입니다. 그리고 44번 할렐루야는 꼭 넣어 연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곡이 메시야의 하이라이트인줄 알고 그 곡이 연주될 때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이것은 헨델이 이 곡을 작곡한 의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헨델의 메시야 곡의 하이라이트는 44번이 아니고 전체 52번 중 이사야서 53장을 배경으로 작곡된 51번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 하이라이트입니다. 그 곡이 연주될 때 모두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작곡자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작곡자는 이 곡을 작곡할 때 호화스런 작곡실에서 작곡된 것이 아니고 기도실에서 금식하며 기도하며 예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이 곡을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메시야의 곡을 들을 때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또 우리들이 십자가의 예수의 고난의 모습을 묵상하게 되면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전쟁기념관에 가 보면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어야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전쟁으로 인하여 부서지고 파괴된 모습들이 너무나 끔찍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또 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가금씩 사고로 인하여 부서진 흉측한 잔해들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면 속도를 줄여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그 끔직한 고난의 모습을 생각하는 사람이 이 땅에서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고난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송구하기 짝이 없다고 말 했습니다. 오늘 예수의 고난은 복음서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시작되고 레위기에도 나타나 있다는 점을 알고 다시 한번 주님의 고난을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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