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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불가능한 교훈

by 【고동엽】 2023. 1. 13.

불가능한 교훈

 

 

 

 

 

 

 

 

                                     5:38-42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가지도 가지게 하

 

 

 

                  며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

 

 

 

                  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이제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고난 받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그 고난에 나도 함께 동참하는 마음으로 보내는 기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전 인류에게 소망이고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하시고 아픔을 당하셨지만 우리에게는 여간 고마운 고통이 아닙니다. 그 고통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은 광명이 주어졌고 소망이 주어졌습니다. 또 그 예수를 알고 믿고 그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살아가는 것이 복이고 은혜입니다. 생각하면 이 “앎”이라는 것이 큰 은혜이고 복이라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름” 이것은 저주입니다. 우리는 모두 이 예수를 앎으로 복을 받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존 트랩(John Trapp) 이라는 분이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7가지 주의사항”이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그것을 읽어보면 공감이 되고 마음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말씀이 바로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고 또 내가 이 시대에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밝히 제시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 물음을 여러분도 마음으로 되새겨 보시고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복 자체보다 복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타난 것만 보고 그 배후를 보지 않는 습성이 있습니다. 복은 좋아하는데 그 복이 어디서 주어지고 누구에게로부터 오는 것인가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용돈 잘 주고 잘 거두어주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다 부족하면 짜증부리고 원망하고 그렇습니다. 부모의 삶이나 속상함 그리고 서운한 마음이나 심정은 헤아리지를 않습니다. 그 배후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을 받기만을 좋아하지 복을 주는 분은 생각하지도 않고 관심도 습니다. 그래서 복 자체보다 복을 주시는 분을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고 왜 주시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복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은 복을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고 왜 저 사람은 복을 받고 살까, 왜 저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할까를 생각해 보면 거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왜 복을 받고 살아가는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복을 받은 후에는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에도, 신앙생활 하는데도 아주 필요한 자세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은혜를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우리나라에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나라의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은혜는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스승의 은혜, 이웃의 은혜, 친구들의 은혜도 있습니다. 이런 은혜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이 정신이 가장 모호해지고 흐려진 시대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모릅니다.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은혜가 한두 가지입니까. 그래서 복을 받은 후에는 은혜를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 번째는 “복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시험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험은 성공한 사람에게 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 옵니다. 높이 올라간 사람에게 오고 유명해진 사람에게 옵니다. 그리고 기도 많이 한 사람에게 오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오고 전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옵니다. 우리가 은혜를 입고 복을 받으면 사탄이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그것을 뺏으려고 온갖 방법으로 방해를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후에는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복을 받은 후에는 교만해지기 쉬운 함정이 있음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실패한 사람에게는 교만할 여유도 없습니다. 생긴 것이 좀 모자라는 사람은 교만해질 용기도 없습니다. 가진 것이 부족한 사람은 자랑할 내용도 없습니다. 교만은 성공한 사람에게 오고 은혜 입은 사람에게 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 오고 가진 사람에게 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후에는 교만해지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여섯 번째는 “복을 받은 후에는 더 겸손해야 주어진 복이 머물러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성공하고 많이 소유하게 되고 이름이 좀 알려지면 가만히 앉아있기가 힘들어 집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칭찬하고 떠받들고 주목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교만해지게 되고 나타내게 됩니다. 교만은 그렇게 해서 오게 됩니다. 그렇게 교만해지면 그 주어진 은혜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릇에 담겨진 물이 엎어지는 것과 같이 사람이 교만하면 순간에 이루어진 것들이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복을 받은 후에는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복을 받은 사람의 사명은 더욱 무겁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배운 사람은 역할이 더 커집니다. 가진 사람은 사명이 더 커집니다. 먼저 믿은 사람은 더 할 일이 많아집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은혜를 입고 살아가십니까. 복중의 복은 예수를 알고 살아가는 복입니다. 이 복은 근원 중 근원되는 복이고 은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꼭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이 같은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은 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일찍 부르시고 은혜주시고 자녀 삼으시고 제자 삼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삶입니다. 주님은 왜 우리에게 이 같은 은혜를 주셨습니까. 그것은 삶 때문입니다. 무슨 삶입니까. 그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도 돌려대고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도 가지게 하고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주님은 아주 우리에게 불가능한 주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지키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베드로입니까 바울입니까 이것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아주 현실성 없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께서 선언하신 교훈의 핵심이고 중심입니다. 이 말씀은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키라고 말씀 하십니다. 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삶의 내용이고 철학이고 가르침의 뼈대이자 중심입니다. 지극히 편향된 신학자들도 이 말씀을 성경 중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이 교훈이야말로 가장 권위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본문 내용을 보면 참 훌륭하기는 한데 무리입니다. 불가능한 요구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고민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불가능한 요구입니까. 할 수 있으니까 요구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교훈을 이루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의 살에서 향기가 나고 세상이 정화되고 질서가 잡힙니다. 여러분 오늘세상을 보면 악취가 납니다. 질서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요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런 용기를 가지게 되려면 몇 가지 먼저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하는 일”  입니다.

 

 

 

 

 

 

 

 

우리는 안 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에는 힘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지혜가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을 여는 열쇠입니다. 그리고 사탄의 입을 막는 자물쇠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통로입니다. 새뮤얼 차드위크는 “사탄의 한 가지 관심은 사람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은 기도 없는 성경공부, 기도 없는 봉사, 기도 없는 행사에 안심한다. 그래서 넘어지게 하고 무력하게 만들고 세상에 묻혀 아주 특색 없이 그냥 살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의 수고를 비웃고 우리의 지혜에 조소한다. 그렇지만 사탄은 우리가 기도할 때 떤다. “고 했습니다.

 

 

 

 

스코트란드의 종교개혁자 죤 낙스는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민족 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지레 겁부터 먹고 불가능을 말하는 것은 기도의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해결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문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나를 세우는 일”  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독특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입니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덱거는 다스 맨 (das man) 즉 “보통 인간“을 정의 했습니다. 그는 보통사람은 “수다 떨기를 좋아하고 모든 일에 호기심이 많고 애매하고 모호하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래서 보통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수다를 떱니다. 그리고 별것도 아닌 것에 호기심을 나타내며 살아가는 것을 보면 아주 애매모호하게 목적 없이 그날그날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보통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애매모호하지도 않고 삶에 분명한 목표가 있고 분명한 삶의 내용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살아가는데 분명한 목표도 없고 분명한 삶의 내용도 없으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도 아닙니다. 이것이 나라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나를 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 깊고 오묘하고 신비한 주님의 가르침도 내가 해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 “나”라고 하는 “나의 값”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냥 다수 속에서 묻혀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의 역할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부흥사 지망생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아브라함 같이 되게 해 주십시오” 그때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네가 아브라함같이 되고 싶으냐?, 그러면 아들을 바칠 수 있느냐” 듣고 보니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나를 모세같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또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사람을 죽을 수 있느냐” 그것도 할 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다니엘 같이 되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음성이 들려옵니다. “네가 사자굴 속에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것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듣다 보니까 이 사람이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소리쳐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누구처럼 되란 말입니까” 그때 음성이 들려옵니다. “누구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너는 너처럼 되라“.

 

 

 

 

나는 누구처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처럼 달란트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나는 나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달란트이고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생에 그 특별한 달란트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 소명이 있고 달란트가 있고 주어진 삶의 몫이 있습니다. 그것을 활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그 달란트를 활용하지 않으면 녹슬고 소멸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회가 지나가면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후회만 남습니다. 파스칼이 건강을 잃고 나서 그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게 당신을 섬기며 일하라고 건강을 주셨는데 저는 세상을 위하여 제 건강을 다 썼습니다. 이제 당신은 나를 일깨우시려고 병을 주셨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오니 용서하소서.  시간이 지나고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고유한 사명, , 달란트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살아갈 때는 작아집니다. 무력해집니다. 아주 보잘 것이 없습니다. 왜소해집니다. 용기도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살아가고 져 할 때는 힘이 주어집니다. 용기가 주어집니다. 놀라운 기운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주라고 했습니다. 속옷을 달라면 겉옷도 주라고 했습니다. 5리를 가지고 하면 10리를 가라고 했습니다. 구하는 자에게 거절치 말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서 살려면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려 힘쓰면 이것도 가능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까. 나는 부족하지만 그래도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려고 애쓰면 됩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값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는 주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삶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새벽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그분에게 그 삶이 매우 행복했습니다. 이른 새벽 고요한 시간에 묵상하며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것을 즐거운 일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마칠 때는 의례히 성경을 무작위로 펼쳤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펼쳤을 때 맨 처음 눈에 들어온 말씀을 그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고 하루 종일 그 말씀을 묵상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지혜도 주어졌고 기쁨도 주어졌고 무엇보다 그날 일이 잘되었습니다.  그것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삶의 일부분일 수 있습니다. 그날의 삶을 하나님께 순수하게 맡기고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본 어떤 분이 보니까 참 좋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그렇게 흉내 내며 살아보자 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마태복음 27:5 절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유다가 스스로 목매달아 죽은지라”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곳을 펼쳤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누가복음 10:37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서 너도 이같이 하라” 신앙생활은 흉내 내는 생활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루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순전한 삶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해야 그것이 복이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고 은혜가 됩니다. 그것이 아니고 내 뜻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끌어다 맞추려고 하면 이렇게 됩니다.  나는 아주 부족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가 주님의 뜻에 부합이 되면 아주 강하고 힘 있는 신앙인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에서 아주 무리한 말씀 그것도 아주 불가능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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