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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고린도전서 7:20-24)

by 【고동엽】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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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고린도전서 7:20-24)

 

20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2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어느 때 미국의 시카고에서 미술품 경매가 있었습니다. 값비싼 미술품들이 다 경매된 뒤에 오직 하나의 그림이 남았습니다. 이름 모를 작가의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어서 싸게 14불 75센트에 팔렸다고 합니다. 뒤에 알고 보니 이 그림은 희랍 화가인 미네르바의 「애굽으로 가는 거룩한 민족」이라고 하는, 아기 예수께서 애굽으로 피난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으로서 아주 유명한 그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탈리아에서 17세기에 잃어버린 것인데, 시카고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마침내 그 그림은 다시 5만 불에 팔렸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다. 5만 불도 넘는 이 귀한 그림을 14불 75센트에 산 사람이나 판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그 가치를 모르는 자는 그것을 소유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깨달음에 있습니다. 번쩍인다고 해서 다 금이 아닙니다. 웃었다고 해서 다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깊은 곳에 있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가치란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유라고 하는 것은 내 손으로 움켜쥐고 있다고 하는 것, 즉 그런 물리적 현상이 소유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 값을 똑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자유, 그 값은 엄청난 것입니다. 자유는 생명보다 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자유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린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값이란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 후자를 생각한다면 그것을 위해서 지불한 내 수고와 정비례하는 것이 주관적 가치입니다. 자유는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아는 자에게만 귀합니다. 그럼 누가 가치를 아느냐, 이것은 책상머리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명상해서 배울 수 있는 진리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했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피눈물 나는 뼈아픈 수고를 한 사람만이 압니다.

37년 전 우리나라가 해방될 때 그 기쁨은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공짜로 얻은 사람들은 공출해서 모아 놓은 쌀이나 갖다 먹고 그리고 방탕 하는 것이 자유인 줄 알았습니다. 오직 감옥에 있던 분들, 이 날의 자유를 위해서 많이 수고를 한 그 분들만이 그 날의 기쁨을 진짜로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유, 그것은 그것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고 피를 흘린 자만이 그 값을 압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 분만이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요, 그 외에는 자유의 값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더욱이 자유를 모르는 사람, 자유를 누릴 생각조차 빼앗긴 사람, 즉 그런 의식의 자유마저 잊어버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모릅니다.

노예 상태란 단순한 육체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문화적인 것이요, 정신적인 것입니다, 노예 상태가 그러하듯이 자유 또한 그렇습니다. 단순한 정치적 자유만이 자유가 아닙니다.

의식 구조 속에 아직도 식민지 근성이 있고 노예 의식이 있다면 그는 결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인 자유도 빼앗겼지만 마침내 종교적, 신앙적, 양심적 자유마저 빼앗겼단 말입니다. 이 보이지 않는 노예,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훈계를 하면서, "한국 사람들은 본래 두 사람만 모이면 싸움을 잘한다. 한 사람을 놓고는 좋은데, 두 사람만 모이면 화합을 못하는 좋지 않은 민족성을 가졌다" 고 했습니다. 이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은 왜정 하에서 공부한 사람입니다.

해방은 됐는데 교장 선생님의 머리가 아직도 멀었단 말입니다. 어느 민족이 분열을 따로 좋아하고, 어느 민족이 화합을 따로 좋아하겠습니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그대로 교장 선생님이 외우고 앉았습니다. 이런 답답한 사정이 어디 있습니까? 머리 속에, 의식 속에 노예가 자리잡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앙적 자유, 양심의 자유, 이것이 가장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귀중한 것입니다. 좀 어렵지만 꼭 알고 터득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먼저는 종이 됨을 아는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아주 소중한 말씀입니다. 먼저는 과거에 우리가 비참하게 종 되었던 자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포로라고 하는 것은 의식의 자유도 없습니다. 사상의 자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죄와 사망과 사탄과 율법의 종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깊이 종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과거에 얼마나 비참한 노예 상태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리고 신앙적으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둘째는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자유로움이 내 스스로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총으로 얻어진 것이고 은혜로 얻어진 것입니다. 내 스스로 자유롭지 못함을 아는 것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기본자세입니다.

간혹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자유가 별것이겠느냐, 마음먹기에 달렸지."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의 문제입니다. 가령 내가 많은 빚을 졌는데 이것 때문에 압박을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마음먹기 달렸다고 해서 잊어버린다고 빚이 없어져 버립니까? 그렇다고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겁니까? 내가 병들었습니다. 마음먹기 달렸다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이 낫는 것입니까? 잠깐 잊어 버릴 수야 있겠지요. 그런고로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하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결코 나는 스스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이며 행동은 물론 내 생활 전반에 내 자유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께서 자유롭게 하시는 역사가 없고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속량하심으로 우리가 자유 함을 받았습니다.

셋째는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이것을 위해서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치적 자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가 값을 지불했습니다. 비싼 값이 지불되었습니다. 영적으로는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고 그리고 오늘의 내 자유가 주어진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만사에는 원리가 있지 않습니까? 지불된 것이 없이는 자유 할 수 없습니다. 이 소중한 댓가, 지불된 값을 우리는 그때그때 재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재벌 2세가 문제가 됩니다. 그 돈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돈이 자기를 이롭게 하지 못합니다.

구제 받지 못할 죄인이 오늘 구원받았다면 의인이 죄인처럼 죽어 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가 엄청난 값을 지불함으로 우리에게 자유가 주어졌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구제 불능한 우리 죄인이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자유의 길입니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 즉 자유 없는 자유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또 다른 노예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곧 자유입니다. 사랑의 노예, 은혜의 노예, 바로 이것이 자유의 의미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사랑에 매이는 것이 큰 자유요, 진리에 매이는 것이 최대의 해방이며, 의의 종이 된다고 하는 것이 가장 큰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유는 방종이요, 자유는 허무로 빠지는 함정이 되고 맙니다. 자유는 상태가 아니라 존재임을 알아야 하며, 또한 형식이 아니라 의미요, 제도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매우 오묘한 말씀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노예 제도가 있을 때에 주신 말씀입니다. "노예로 있는 자가 부름을 받았느냐? 너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으로서 부름을 받았느냐? 너는 그리스도의 종이다. 받은 그대로 지내라." 이 얼마나 오묘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이 말은 노예 제도를 옳다고 인정하는 그런 얘기는 아닙니다. 이 말씀의 깊은 뜻은 자유란 형식이 아니라 의미의 문제란 말입니다. 이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 제도나 구조에 관심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존재의 문제입니다. 노예도 예수를 믿으면 자유인입니다. 주인도 죄를 지으면 노예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인생관을 다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신분의 고하, 유식 무식,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따로 나누어 보려고 하는 것은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기독교의 세계관은 그렇지 않습니다. 있는 자와 없는 자, 그들은 둘 다 죄인입니다. 있어도 자유인이 아니요, 없어도 노예가 아닙니다. 진정한 노예는 비굴함에 있는 것이지 물질적 가난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지위에 있느냐 낮은 지위에 있느냐는 자유와는 무관합니다. 이것이 오늘 성경이 말해주는 귀중한 의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때린 자는 잠을 못 자고, 맞은 자는 발을 펴고 잔다." 때렸으니 자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불안합니다. 맞은 사람은 이미 맞았으니 두 다리 쭉 펴고 좀 아프긴 하지만 잡니다. 어느 쪽이 자유인입니까?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 가운데 어느 편이 자유인인 것 같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의 종, 그가 비참한 사람입니다. 지배자냐 피지배자냐, 가졌느냐 잃었느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정치적인 자유면 자유가 끝난 줄 알았습니다. 천만에요, 경제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자유를 얻었으면 이제 자유인인 줄 알았습니다. 천만에요, 이제는 방종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진정한 자유가 정치,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의 문제요, 양심의 문제였다는 것을 미처 몰랐습니다.

참 해방이 어디에 있습니까? 참 자유가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자유, 믿음의 자유, 양심의 자유, 이 순수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부탁하십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됩니다. 가책에 매이고 형벌 의식에 매입니다. 또 다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에 매입니다. 또한 죄를 혹은 의를 분간하지 못하는 그런 무의식 상태에 매입니다. 죄가 체질화됩니다. 평화를 알 수 없는 그러한 인간이 되어 버립니다. 보세요, 이것이 죄의 종입니다. 이제는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기 의에 매이지 말고 자기의 교만과 자기의 절망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소유나 물질에 매이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있는 물질에도 매이지 말 것이고 없는 물질에 매이지도 말 것입니다. 생을 양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나아가서는 약체화되는 일에 매이지 말아야겠습니다. 정욕에 매여서 육체의 요구를 따라 떨어져 가는 불쌍한 심령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때 교회에 가 보면 미국 사람들의 교회는 우리와 달라서 예배당만 나서면 그곳 마당에서 담배를 많이 피웁니다. 그래서 예배당 앞에 있는 재떨이가 가득 쌓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담배를 피우는데 어떤 사람은 안 피웁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 보았습니다. 저 사람들은 다 피우는데 당신은 왜 안 피우느냐 했더니, 어떤 분이 저에게 참 좋은 얘기를 한 마디 해 주어서 지금까지 오래오래 기억합니다. "창조주가 주신 고귀한 자유를 하찮은 담배에게 빼앗길 수 없어서지요." 이렇게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담배란 내 마음대로 피우는 것 같지만 담배 피우는 사람들은 담배의 노예입니다. 완전히 노예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니 창조주가 주신 고귀한 자유를 그것에 빼앗길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있는 자유, 그 고귀한 자유를 나약함에, 게으름에, 사치에, 명예에, 교만에, 일에 빼앗겨 얼마나 고생들하고 계십니까?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인간적인 것에 종이 되지 말 것입니다. 인정의 종이 되지 마십시다.

자유하려면 사랑을 해야 합니다. 미워하면 노예입니다. 사랑하므로 자유인입니다. 받으면 노예입니다. 이제 주어야 자유인입니다. 또한 매이면 노예입니다. 자율적으로 행함으로만 자유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식민지 근성이 따로 없습니다. 노예의 근성이 여기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소련 공산 치하의 생활이 너무 역겨워서 탈출하여 미국에 귀화해서 미국 시민이 된 소련 사람은 정치적으로는 망명해서 자유를 얻었지만 의식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넓은 벌판에 십자 거리가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는데 빨간 불, 노란 불, 파란 불이 번갈아 켜집니다.

빨간 불이 탁 켜져도 휘휘 둘러보고 아무도 없고 차도 없으면 붕 하고 지나간답니다. 이 소련 사람이 미국 사람을 볼 때 그들은 대체로 아무리 넓은 벌판에 십자 거리가 있어도 빨간 불이 탁 켜지면 차가 그대로 섭니다. 그 이유는 미국 사람 편에서 볼 때 모든 법은 우리 자신을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은 자유인이요, 법을 자율적으로 지킵니다. 이것은 나를 위한 것이니까 내가 지키는 겁니다. 그런데 소련 사람이 생각하는 법이란 백성을 괴롭히기 위한 법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빠져나가는 것이 수입니다. 어쨌든 빠져나가는 것이 이로운 것입니다. 이런 의식 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소련 사람들은 망명해서도 이 노예근성을 못 버리더라는 얘기입니다.

죄송한 말을 하겠습니다. 저는 차를 타고 다닐 때에 앞 차가 가는 것을 보곤 합니다. 대부분의 차는 순경만 없으면 그저 뺑뺑 돌아서 제멋대로 갑니다. 자살하려면 혼자 할 것이지 왜 남까지 죽이려 하는지 모릅니다. 누구를 위한 법인데 내가 어겨야 합니까? 왜 우리는 법을 지킬 때마다 노예가 끌려가는 것처럼 억지로 지켜야 합니까? 왜 세금을 낼 때마다 이것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것처럼 해야 합니까? 이것이 다 식민지 근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도 노예 상태에서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자율적으로 이 법은 나를 위한 법이요, 이 세금은 나를 위한 세금이라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준법하고 자율적으로 행하는 것이 자유인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주인 의식이 없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노예근성을 버려야 할 것입니다. 주인은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내 것이니까 말입니다. 주인 의식을 가져야 주인이 됩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사람은 주인도 목적도 중심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셔야 받고 또 엄청난 값을 지불하여 오늘의 내 자유가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5:1에 주신 말씀처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양심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바로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무지와 무력과 의심과 나약과 어리석음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 :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주님의 귀하신 은혜를 감사합니다. 자유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바로 간직하지 못한 저희들을 또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간구하옵나니 이 자유의 고마움을 알 뿐더러 이 자유를 지켜 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와 같이 진리와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이 되고, 결코 허무와 불안과 죄의 종이 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의 종이 됨으로 미움에서 자유하고, 의의 종이 됨으로 불의로부터 자유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소서. 끝까지 이 자유의 수호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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