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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1-6)

by 【고동엽】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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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편지(고린도후서 3:1-6)

 

1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 2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 4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5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나느니라 6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편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의 편지"라 하여 편지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편지라는 것은 인류가 문자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취하게 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문자 문화의 하나의 형식입니다. 흔히들 "그 문화 수준이란 그 사용하는 종이의 분량만큼 평가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종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문화인이요, 문화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께서는 개인적으로 얼마나 많은 종이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만약 주로 휴지만 사용하는 터이라면 그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휴지 외에도 여러 가지의 용도가 있겠습니다만 그 가운데서도 편지를 많이 받고 많이 쓰고 하는 것이 문화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편지'라는 말을 써서 그리스도인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아시다시피 편지란 서로의 소식이나 용건을 알리며, 그리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여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편지는 수필이나 소설, 시와는 달리 쓰는 사람이 있음과 동시에 반드시 받는 대상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따라서 편지 속에는 보내는 사람의 인격과 구체적인 소원이며, 뜻이 숨김없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편지에는 그 대상과 목적 또는 방법에 따라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한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런가 하면 개인이나 어떤 단체가 공적으로 다른 단체에게 보내는 공동의 서한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경우에는 수신자 외에는 절대로 뜯어 볼 수 없도록 사인이나 인장을 찍어 밀봉을 한 비밀 편지입니다. 이런 편지 중 하나가 다윗 왕이 우리아의 손에 들려서 보낸 요압 장군 앞으로의 편지입니다. 만약 우리아가 자기를 죽게 하라는 그 편지의 내용을 읽어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아는 그 내용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어인이 찍힌 밀봉된 편지를 받아들고 그대로 갖다 바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즈음도 밀봉된 편지는 비싸고 개봉된 편지는 싼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편지는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서 보내는 것임에도 아예 신문 같은 것을 통하여 공개적으로 보내는 공개서한이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모든 사람이 읽고 모든 사람이 평가해 달라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후서 역시 공동 서한이면서 공개서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는 글로서 표현되는 것이기에 몇 가지 장단점의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단점으로서는, 첫째 얼굴과 얼굴을 볼 수 없는 가운데서 편지를 쓰기 때문에 생각이나 감정을 100퍼센트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무리 문장력이 좋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생각하는 것만큼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것만큼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단점은, 전해진 편지는 자기 나름대로 읽기 때문에 전해진 다음에 오해가 많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편지로는 사무적인 이야기 외에 충고나 감정적인 이야기 같은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얼굴과 얼굴을 대한 가운데 서로의 의견을 듣고 감정을 읽으면서 문제를 설명하고 이해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이 아닌 피차 일방적인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편지가 갖는 장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계속 남아 보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결국은 기억에서 사라지게 되지만 글로 쓰여진 편지는 계속 남아 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글로 쓰여 진 편지는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만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테이프 등 보다 종합적이고 편리한 매체들이 많이 있지만, 책은 자기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면서 읽을 수 있는 것이므로 여전히 중요한 것입니다.

또한 편지는 반복해서 읽고 대할 수가 있습니다. 자칫 놓치고만 문장이나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손치더라도 거듭 읽고 생각하므로 그 뜻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모든 사람이 볼 수가 있다는 점인데 이는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남는 것을 말합니다.

이에 오늘 우리도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써주었기 때문에 이렇게 귀한 본문을 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제자들이 글로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면 오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하지만 이 글이라는 것에 하나님의 말씀을 담아서 전해 주었으므로, 오늘 이 시간까지 성경을 읽을 수가 있으며 복음에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글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글이 종이가 발달되지 않았던 그 옛날에는 어디에다 쓰여 졌는가 할 때, 초기에는 주로 돌에 새겨졌으며 그 다음에는 나무에 그리고 제일 많이 사용되었던 것이 짐승의 가죽을 부드럽게 잘 손질하여 거기에 글을 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 진 것 중에는 성경책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던 것이 특별히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파피루스(papyrus)라는 갈대의 껍질을 벗겨서 엇갈리게 붙여 평면을 만든 다음 거기에 글을 썼던 것인데, 그런 이후에 여러 가지 발달 단계를 거쳐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와 같은 좋은 종이에 글을 쓰며, 또한 편지를 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편지는 먹이나 잉크로 쓴 편지가 아니며, 또한 돌 판이나 종이에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육의 마음 판에 쓴 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 판에 쓰는 아주 신비로운 편지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제 편지의 내용인 1절 말씀에 보면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며 추천서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말을 쓰게 된 것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운 여건 속에서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이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 교회였습니다. 어렵게 세운 교회이지만 교회 내에 회개하지 못한 죄가 남아 있고 보니, 분쟁이 일게 되고 그 분쟁은 장점은 덮어 놓은 채 단점을 보기에 혈안이 되어 날뛰는 가운데 마침내 사도 바울을 들추며 시비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의 인격을 건드리고 소명을 건드리며, 심지어는 그의 사도권 까지를 비판하면서 그가 어떻게 사도냐? 그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의 하나라도 된다는 말이냐?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한 그가 어떻게 사도란 말이냐?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앞장서서 핍박하며 죽이려던 자가 아니냐며, 사도 바울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하기를 내가 굳이 사도라는 추천서를 가지고 다녀야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 베드로와 야고보가 공동 사인을 한 추천서를 가지고 올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제 와서 새삼 추천서를 보낼 필요가 있겠느냐? 그리고 나에 대한 추천서는 곧 너희들 자신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있어서 고린도 교회가 세워졌고, 부흥되어 왔으며 너희들이 예수를 믿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도 내가 전도하여 된 것일진대 이제 와서 새삼스레 내가 너희 앞에 사도라는 증명서를 보여 주어야 하겠느냐? 나에 대한 추천의 글이 따로 없다. 너희 자신이 바로 나에 대한 편지요, 사도라는 증명서가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는 여기 한 어머니가 있다고 할 때에 내가 어머니라는 증명서를 가지고 다니지 않더라도 그 곁에 아들이 하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증명서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면, 서양 사람들은 처음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게 되면 우선 손가락부터 보아서 반지가 끼워져 있으면 프로포즈를 할 수가 없고, 만약 다행히 끼워져 있지 않으면 마음 놓고 프로포즈를 하여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니까 하나의 반지가 기혼자와 미혼자를 구분하는 표시가 되는 셈인데, 저는 그 보다 더 분명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린아이를 하나 낳아서 붙들고 다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 보다 더 분명하고 좋은 증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 이 얼마나 확실한 증거의 이야기입니까? 너희가 있다는 것이 바로 내가 사도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너희들은 우리의 편지인 동시에 이미 모든 사람 앞에 공개된 편지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이를 두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는 나를 통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냐는 것이며, 이미 많은 사람이 복음의 소식을 받아들여서 흡족해 하고 있는 터인데 어쩌자고 새삼스럽게 나를 두고 저 사람이 사도이냐? 아니냐며 쓸데없는 말들을 하고 돌아가느냐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점을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무를 보아서 열매를 알고 열매를 보아서 뿌리를 압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사람됨과 사도됨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 사역을 보아서 압니다. 그리고 그의 사역은 그로 인해서 전파되는 복음, 곧 그 복음 안에서 구원받는 백성들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증명서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요, 바울의 마음입니다. 따라서 바울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라는 것은 고린도 교회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1, 2학년 담임 선생님들이 말하는바에 의하면, 가정 방문을 해보지 않아도 3개월 동안만 가르치면서 지켜보면 이 아이가 부유한 가정의 아이인지 아닌지, 그리고 아버지의 직업, 어머니의 성품,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이가 좋고 나쁜 것, 동생 혹은 형이 있고 없고 등 그 아이가 어떤 가정의 아이라는 것을 환하게 알 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바로 그 부모의 편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너희가 우리의 편지라"는 것에서 나아가 이제는"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편지가 바울의 인격이나 지식, 철학 등 바울의 그 무엇을 써서 전달한 것이 아니라 그가 썼으나 그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뿐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울이 썼다고 하여 바울 자신의 경험이나 좌우명, 인생관을 쓴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바울이 쓴 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써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편지를 읽는 자가 그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가 있고 뜻과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새겼습니다. 보다 신학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케리그마(kerygma)적 신앙을 조각했다고 하겠습니다. 이 케리그마적 신앙이란 말뜻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오셨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죽으셨으며,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부활하시고, 성경에 선포된 그대로 재림하실 것이라고 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 케리그마적 메시지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 전해진 메시지이며, 오늘 여기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진 편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서 문제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만나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랬다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도 물고기를 잡겠다며 갈릴리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그 부문이 매우 언짢게 느껴지고는 하는데 성경은 거기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 바에 의하면 아마도 베드로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만 같습니다. 즉 "예수님 제가 보이지 않거든 물고기 잡으러 갈릴리로 간 줄 아십시오. 그리고 찾지 마십시오. 저 같은 것을 제자 삼았다가는 예수님 망신만 당하십니다. 어떻게 제가 다시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믿을 인간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사양하겠습니다."하고서는 갈릴리로 갔던 것이 아닌가 하고 느껴집니다.

이와 같이 오늘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편지가 된 신분을 사양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에 나올 때에도 손바닥만한 성경책 한 권 핸드백 속에 집어넣고 달랑 달랑 나오다가 누군가가 "어디가니?"하고 묻기라도 하면 "놀러 간다"하고 마니 이런 것이 다 자신이 없어서 그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상당히 겸손한사람이 있어서 "저런 것이 다 예수를 믿어"라고 할까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우선은 겸손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은 결코 아름다운 마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언제 어디서나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 보면, 십자가가 달린 목걸이도 하고 배지들도 많이 다는데 문제는 그 목걸이 그 배지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라는 말입니다. 교인들이 자동차 뒤에 '잌스투스' 라는 물고기 마크를 달고 다니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서 주면서 달라고 하여도 그것 달고는 아무데나 차를 댈 수 없지 않느냐며 싫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것을 붙이고 다닐 수 있을 만큼 자신이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따라서 어디를 가나 편지인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나타나고, 그리스도가 보이며,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위대한 그리스도인을 만난 다음에야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한 번은 예수 잘 믿는 사람을 만나야 "세상에 저런 사람도 다 있군", "나도 예수 믿어 저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인 나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육의 마음 판에 쓰여 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영적인 마음의 비석에다 썼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혼 깊이에 새겼다는 말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 영으로 썼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말씀은 영으로 받고 신령하게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영혼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설교를 듣거나 성경 공부를 할 때에도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들으면서도 저것은 어느 책에 있는 내용인가? 혹은 무슨 신학인가 하며 잡다한 생각을 많이 합니다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은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으로 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화하사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지금 내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며 한 마디 한 마디를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말씀이 내 마음의 비석에 깊이깊이 새겨져 어느 사이에 나의 믿음이 성장하고 심령이 변화되어 나의 생각, 나의 언어, 나의 행동, 나의 가치관 등 내 인격의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마침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게 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받아들이게 될 때 마음에 새겨지게 되는 것이며 그 새겨진 바는 반드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옥토에 떨어진 겨자씨가 언젠가는 반드시 싹을 내고, 그리고 자라서 열매를 맺으며 새들이 깃들이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똑하게 쓰여 진 편지, 순수하게 쓰여 진 복음의 편지가 되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좀 더 나아가서 생각할 것은 우리 개개인도 사도바울처럼 누구의 마음엔가 그리스도의 편지를 쓰는 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에게든 전도를 하고 성경을 가르치면서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편지를 써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쓰여 진 편지가 또 다른 편지를 쓰게 되고 읽혀질 수 있도록 계속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하박국 2:2 말씀에 보면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이 뜻하는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이는 큰 글자로 분명하게 써서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하게 새겨져서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우리의 얼굴을 대하는 사람들이 우리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고 만나는 것과 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저들이 우리를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구원을 얻게 되는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 수 있도록 우리 모두 살아 있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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