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그리스도 없는 세상 (로마서 3장 9절~18절)
곽선희 목사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이미 우리는 유대인의 죄에 대해서, 또 그 다음에는 이방인의 죄에 대해서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과 유대인의 다 같이 죄를 범하고 죄 아래에 있다고 하는 바울의 선언을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는 유대인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인간이라고 하는, 인류라고 하는 종합적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장10절)"라고 강하게, 확실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죄를 선언하고 또 죄인 됨을 인정하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나는 죄인이다-이것을 확실하게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절대로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성경공부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죄인입니다"하고 가르쳤더니, 앞에 앉은 여집사님 한 분이 "무슨 말씀이에요? 나는 죄인이 아닌데요. 평생동안 거짓말 한번 해본 일이 없어요"하더랍니다. 그래서 이 목사님은 "그래요? 그러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참 훌륭합니다"라고 칭찬했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따라 그 집사님댁에 심방갈 일이 있었답니다. 그래 성경공부를 마치고 몇몇 사람과 함께 갔는데 그 집사님은 '식구들이 방을 잘 치워놓았나?'하고 걱정하며 목사님을 바로 안으로 모시지 않고 일단 문밖에 세워놓고는 혼자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서 보니까 아이들끼리 한바탕 싸우고 온 물건을 둘러 엎어놓고, 그야말로 방안이 난장판이었어요. 조용히 하라고 해도 지금 한창 싸우는 터라 한 아이는 씩씩거리고 있고 또 한 아이는 울고불고 야단입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밖에 거지 왔다. 조용히 해라." 그러니까 아이들이 뚝하고 그치더랍니다. 졸지에 목사님이 거지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있어요. "사람은 다 죄인인데 죄인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생각하는 죄인이고 또 하나는 나는 의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둘 다 죄인이다. 이 두 가지 죄인이 있을 뿐, 의인은 없다." 이렇듯 사람은 철저하게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할 때에만 은혜가 은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혹 여러분이 마음 가운데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대하실까? 왜 다른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내게는 안 주실까? 내가 이렇게 바로 살아보고자 애쓰는데 왜 내게는 형통하게 길을 열어주시지 않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내게 이렇듯 인색하실까?'하는 원망이 있습니까? 혹 병들었을 때나 사업이 어려워질 때나 다른 여러 면으로도 그런 생각을 합니까? 여러분, 불만이 있을 때에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내가 철저한 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고 하니, 지금 내가 사는 이만큼도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도 은혜입니다. 불행하다고 생각한 그것도 은혜예요. 전부가 은혜예요. 절대적 은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죄인임을 긍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를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죄를 비판해나가다가 끝에 가서는 자기 죄까지 말씀합니다. 자신까지 비판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9~24)"라고 말씀합니다. 온 인류의 죄를 비판한 것만이 아니예요. 누구누구의 죄를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니예요. 자신까지도 다 죄인이에요. 원하는 선은 행할 수가 없어요. 자기 마음에까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리고 나서야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맥락입니다.
그런고로 철저하게 회개해야 됩니다. 스스로 철저하게 죄인임을 인정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습니까? 저들은 스스로들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저들은 다른 사람보다는 내가 낫다고 생각했어요. 저 세리보다야 내가 낫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을 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그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적 관계 때문에 절대적 관계를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적 의식 때문에 절대적 의식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같이 지내면서 '이 사람보다는 내가 조금 낫다'라고 생각을 하다가 그만 하나님 앞에까지도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어버려요. 어느 사이에 '내가 이만큼 의로운데 왜 내게 복을 안주십니까?'--이런 식으로 나오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우둔한 생각입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한 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건강한 자, 병든 자-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다, 그것은 그래요. 건강한 사람이 의사 찾아갈 일이 없지요. 그러나 병자라고 다 병원에 갑니까? 아픈 줄 알아야 가는 것이지요. 죽을병에 걸렸어도 아픈 줄 모르는 사람은 가지 않아요. 더구나 가봐야 소용없다고 합니다. 또 믿음 없는 사람도 안가요. 그러니까 병들었다고 다 병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다 의원 찾아가는 것이 아니예요. 겸손한 사람이라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안가요. 뿐만 아니라 자기가 병들어 죽어간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 아픈 줄도 모르는 사람도 병원에 안가요. 절대 의원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바리새인은 의인이고, 세리는 죄인이다'하는 뜻에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세리와 마태, 또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와서 구원을 받았지만 죄인이면서도 자기가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병들었으면서도 자기가 건강하다고 생각한 바리새인, 서기관,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오지 않았고 물론 회개도 할 수 없었기에 결국 저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철저하게 죄인 됨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리고 유대사람이든 이방사람이든,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먼저 믿었든 나중에 믿었든, 그런 것은 생각하지 마세요. 다 죄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이렇게 강하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9절)." '죄 아래 있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휴퍼하말티안'이라고 합니다. '휴퍼'라는 말은 '~밑에'라는 전치사이고, '하말티안'이라는 말은 '과녁이 빗나갔다'라는 말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제일 보편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초점이 있어요. 거기서 조금만 빗나가도 그것은 죄인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기독교인은 무엇보다도 죄관(罪觀)이 분명해야 합니다. 죄관이 분명해야 은혜관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어요. 특별히 현대인들, 또는 지성인들에게 죄가 많아요. 그것은 자기의 생각, 자기의 논리로 죄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실제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관념으로 생각하려고 합니다. 죄는 생각하지 않고 죄의식만 생각해요. 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죄의식이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신학적으로도 중요하고, 심리학적으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죄를 단순한 심리현상으로 보는 거예요. 그래서는 무언가 마음이 꺼림칙하고 죄의식이 생기면 '이것이 문제다. 이 죄의식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껏 한다는 것이 술에 취해서 고민을 잊어버리자 합니다. 심지어는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 아니냐?' 혹은 '증거인멸로 완전범죄를 해버리고 말겠다'는 등 별생각을 다 해요. 이런 것들이 다 엄연한 잘못입니다. 엄청난 과오입니다.
여러분, 죄의 실체를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생각하기 나름이다'--죄라고 생각하면 죄고, 아니면 아니지, 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죄와 벌」이라는 소설을 읽어보셨지요? 거기서 말하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변명을 해도 안 되는 거예요. 이런 사람은 쓸모없다 하고 죽여버린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예요. 절대로 정당화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혹은 죄라는 질서를 깨뜨리는 일이다, 하고 생각해요. 그러나 질서 문제가 아니예요. 혹은 정신적으로 가책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생각의 리듬의 역행을 말한다, 혹은 생각 습관의 파괴, 관념의 혼란… 이런 식으로 생각해요. 전부 다 정신적인 문제로 돌리려고 해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의 실체, 좀더 나아가서는 죄의 인격체를 말씀합니다. 죄를 인격화해서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보면 "죄 아래 있다"합니다. 또한 로마서 7장 23절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죄가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나를 붙들고 있어요. 죄가 나를 노예화하고 있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느끼고 있어요. 죄의 힘은 엄청난 것입니다. 무릇 가장 무서운 힘이 사망의 권세요, 그 다음 권세가 죄의 권세입니다.
죄에 한 번 붙들려서 노예가 되면 헤어날 길이 없어요. 자유가 없습니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 도다"-이것이 바울의 죄관입니다. 본문에 '휴퍼'라고 하는 말은 능력 아래 있다, 지배 아래 있다는 말씀이에요. 죄의 권세 하에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8장 9절에 보면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남의 밑에 있다는 것이 이런 뜻입니다.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았을 때에는 죄가 붙들고 있고 죄에 지배를 받아서,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런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죄에 노예된 상태가 물리적인 것이냐 정신적인 것이냐, 사상적인 것이냐 감정적인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보다 더 훨씬 근본적인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주장할 수 없는 선까지 들어가는 거예요. 죄라는 것은 단순히 의가 모자란다는 것이 아닙니다. 의에 대한 정면적 도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에 노예상태가 될 때에는 자기의 몸, 구조, 의식, 판단, 지혜가 다 죄한테 붙들리고 마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며칠 후에 한번 다녀오려고 합니다마는 일전에 제가 북경에 갔을 때에 북한에서 젊은 사람 두 사람이 와 있었습니다. 요새 중국으로 망명한 북한사람들이 꽤 많아요. 이 사람들은 만경대 출신이에요. 만경대라는 것은 북한에서도 가장 공산주의사상이 투철한 사람들의 자제들만 다니는 학교예요. 특권층입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대학에 다니면서 거기에서도 데모를 하는지 아무튼 그런 일에 조금 가담했다가 감옥에 가게 됐어요. 가만히 보니 이제 감옥에서 자기가 나가도 사람구실 못하겠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 특권층의 자녀라서 어떻게 길이 있었던지 도망을 해가지고 두만강을 넘어서 북경에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북한정부가 싫어서 중국으로 온 거예요. 비판하는 말을 들어보니까 "북한은 뭐가 잘못됐고…" 하더라고요. 그러고나서 맨 끝에 "어떻게 하면 좋지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남북통일이 되지요? 어떻게 해야 내가 다시 고향에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하고 물어요.
그래서 제가 대답했지요. 그 때가 김일성이 죽기 전이었습니다. "뭘 그래? 어버이수령이 죽어야지." 그랬더니 식사하다말고 벌떡 일어나면서 "무슨 불경한 말씀을 하십니까? 수령님이 죽다니요?"라며 대듭니다. 아니, 김일성이 싫어서 거기까지 와놓고 김일성이 죽는다니까 당장에 얼굴이 변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앉아. 그리고 다시 한 번 냉철하게 생각해보게. 김일성이도 사람인데 나이 많으면 죽지 안죽겠나?" 그러니까 가만히 있더니 "하긴 그렇지요"라고 대답합디다. 자, 얼마나 교육을 받았는지 '수령님'은 안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보세요. 분명히 김일성은 죽었어요. 아직까지 북한이 버티고 있는 것은 지금도 그 망령이 좌우하기 때문이에요. 김일성은 죽었지만 저네들의 마음속에서는 아직 안 죽었어요. 북한의 질서가 그래서 유지되고 있는 거예요.
자,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한번 이렇게 깊이 노예가 되면 그 생각 속에, 습관 속에, 세계관 속에 확 붙들려 있게 됩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대로 죄에 노예가 된 것은 느껴지지 않아요. 신앙대로 살려고 애쓰다가도 어떤 때에는 행동이 거칠게 나오기도 하고 엄청나게 무서운 생각을 할 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때면 스스로도 깜짝 놀라지요. '어떻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나. 어떻게 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었나. 어떻게 내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나'하고 말입니다. 바울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죄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를 붙들어서 이렇게 하는 것이다, 하고 로마서 7장에서 말씀합니다. 죄를 인격화하고 죄의 권능을 인정하고 있어요. 그런고로 우리 스스로는 절대로 여기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12절)"-이제는 무익하게 됐어요. 한계를 넘었어요. 이제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어요. 이제는 죄가 주장하는 대로 질질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 능력으로는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오늘의 성경말씀대로 '깨닫는 자도 없고 다 무익하게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 뱀이 아주 많지 않습니까? 얼마 전에 제가 '동물의 세계'라는 프로그램을 보니까 뱀이 새를 잡아먹어요. 새는 날아다니고 뱀은 기어다니는데 어떻게 잡겠느냐 싶겠지만 어떻게 하느냐, 뱀은 먼저 나뭇가지에 가만히 올라가 있어요. 그러다가 새가 한 마리 날아온다든가 하면 눈을 보는 거예요. 눈과 눈이 딱 마주치면 이상하게도 새가 꼼짝을 못해요. 그렇게 해서 정신을 쏙 빼놓은 다음에 천천히 잡는거예요. 그 장면이 그렇게 놀라울 수가 없었어요. 죄가 그렇습니다.
죄가 우리를 포로로 했을 때에 우리는 죄의 눈초리 앞에서 꼼짝을 못해요. 자유가 있는 것 같아도 어림도 없어요.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고… 후회하고 뉘우치면서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왜요? 죄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죄의 권능을 절대로 과소평가 하지 마세요. 죄의 능력은 무서운 것입니다. 여기서 스스로 빠져나갈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쓸모없는 자가 됐다, 마치 노아의 홍수 때에 많은 사람이 육체가 되어버린 것처럼 쓸모없는 인간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은 찾아볼 길이 없다, 양심도 인성도 다 지나치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능력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다'합니다. 그 결론이 결국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10절)"입니다. 특별히 저는 바울의 기억력을 참 놀랍게 생각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있는 말씀은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14편 1절로 3절, 시편 5편 9절, 시편 140편 3절, 이사야 59장 7, 8절, 그리고 시편 36편 1절 등 여러 곳에 있는 말씀을 놀랍게도 그대로 암기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주욱 인용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죄의 무서운 능력을 인정하세요.
그 다음에 의인은 없다는 것도 인정해야 합니다. 좀더 실제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 자신에게는 의가 없습니다. 의는 존재하지를 않을 뿐더러 의롭고자 하는 노력마저도 소용이 없어요.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내가 의롭고자 하는 그것도 죄다.' 사실입니다. 가만히 보면 의롭게 산다는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사실은 교만죄 하나 더 짓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내가 하나님을 찾아보겠다고, 그리스도 없이,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성경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아보겠다고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요. 그러나 그들이 찾는 것은 우상일 뿐이에요. 어느 사이에 우상 섬기고 있어요.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 없는 세상,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 과거에도 없었고, 오늘도 없고, 미래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좀더 깊이 말씀드리자면 스스로 의롭고자 하는 생각마저 포기해야 합니다. 내게는 아무 의도 없습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우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대로 살고자 애씁니다. 그리고 주의 일을 한다고 열심을 내요.
그렇게 열심을 내다가보니까 어느 사이에 자기를 알아달라고 그래요.
하나님 앞에도 불만이 많아요. 이렇게 했는데 왜 복을 안주십니까, 합니다. 저는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얘기까지 들었습니다. "거리에 나 다니는 것이 좀 겁이 납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어떤 교인들은 저를 만나면 '목사님, 십일조 바치면 복 받는다고 했지요? 그래서 제가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쳤는데요. 복이 오지 않습니다. 도로 물어주세요'하는 거예요. 그러니 이것을 어떡하면 좋아요? 그뿐 아닙니다. 선금 십일조까지 바쳤다는 거예요." 소망교회 교인들은 모릅니다마는, 선금 십일조란 천만 원 벌기 위해서 미리 백만 원을 바치는 거예요. 빚내다가 바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벌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을 믿고 미리 바치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했는데 장사가 안되고 돈이 안 벌어진다고 자기가 이미 바친 것을 도로 달라는 거예요. 목사님을 붙들고 돈 내놓으라는 거예요. 이러니 그 목사님 다니기가 어렵게 됐지요.
이 사람은 좀 지나친 것 같습니다만 그 비슷한 교인은 많아요. 하나님 앞에서 원망합니다. 나는 왜 복을 못 받습니까, 합니다. 그뿐입니까? '왜 교회에서 나를 알아주지 않습니까?'합니다. 이게 다 무슨 꼴입니까? 가장 무서운 것은 명예입니다. '내가 이렇게 수고했는데 왜 내게 명예가 돌아오지 않느냐'라고 원망합니다. 어느 사이에 이렇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좋은 뜻으로,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한다고 하다보니까 어느 사이에 벌써 이렇게 되었어요. 그것이 바로 죄의 놀음이에요. 악에 노예된 상태에서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실 선한 일 한 것이 아니예요. 그 동기가 선하지 않았어요. 자기도 몰랐어요. 스스로 속았어요. 내 속에 이렇게 무서운 악이 있는 줄 몰랐어요. 그래서 대개 교회일 한다고 힘쓰다가 섭섭하다고 그래요. 섭섭하기는 무엇이 섭섭해요? 누구를 위해서 한 일입니까? 누구를 위해서 종을 울린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한 일이면 그것으로 끝난거예요. 사람들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인사가 없고, 목사님이 쌀쌀하고… 무슨 상관이에요? 뭐가 좋다는 얘기예요? 도대체가 말이 안됩니다. 보세요. 이런 생각이 어디에서 왔느냐-아직도 철저하게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뒤에서 지금 달리 조종이 되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의인은 없다, 내게는 의가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시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안이 아니면 전혀 나 스스로는 의로울 수 없다-이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를 지었으니 죄지요. 죄를 계속하니 죄지요. 죄를 변명하고 있으니 죄입니다. 때로는 죄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 모르고 행하니 죄입니다. 더 무서운 죄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빠지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야 내가 낫다 합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고 아시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사람 속을 어떻게 압니까? 진실을 어떻게 알아요? 누가 더 잘 믿는지 물질로 평가할 수 있어요? 그런데 어느 사이에 저 사람보다 내가 좀더 잘 믿는다, 저 사람보다 내가 좀더 의롭다, 하고 생각을 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렇게 상대적인 의에 빠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는, 절대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에 "나는 죄인입니다" 하다가도 누가 "집사님 실수하셨어요. 잘못한 거예요"하면 당장에 두 마디의 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당신은 죄가 더 많지 않느냐"합니다. 꼭 이렇게 나와요. 못됐지요.
이게 바로 문제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해서 나는 죄인입니다, 했으면 문밖에 나갔을 때에 누가 나에게 돌을 던져도, 내 얼굴에 침을 뱉어도 절대로 섭섭하다든지 반항하는 마음이 생겨서는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니까 사람 앞에도 죄인이지요. 죄인을 죄인이라고 하는데 뭐가 나빠요? 뭐가 잘못됐어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입니다. 하다가도 사람들로부터 죄인이라는 말을 들으면 절대 못 참아요. 이게 어떻게 회개입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또하나, 최선을 다했다고 변명하려고 해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까? 히브리서에 보면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를 흘리기까지는 하지 않았다'하고 말씀합니다. 사실이에요. 정말로 최선을 다한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속고 있는 거예요. 나는 이럴 수밖에 없었다. 최선을 다했노라고 말입니다. 정말로 최선을 다했더라도 그것이 의가 될 수는 없어요. 죄는 죄입니다.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것으로써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스스로 속고 있는 거예요.
또하나, 이제는 갚았다고 생각을 해요. 죄와 비교해서 공의적으로 처리해가지고 '이만큼 고생했으면 이젠 사죄됐을 것이다'합니다. 그런데 아니예요.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내가 뉘우친다고 해도 뉘우치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치는 것이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내가 한평생 고행을 한다고 해도 내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과의 관계니까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상했느니 혹은 갚았느니, 이런 생각을 하며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나의 죄인 됨을 내가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는 평생 이루어도 의인은 못됩니다. 그러나 죄는 한번만 지어도 죄인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런 분들을 봅니다. 나라를 위해서 한평생 일했어요.
젊었을 때부터 오로지 나를 위해서 일을 많이 했어요. 그렇다가도 끝에 가서 혹 무슨 부정이 있다든가 하면 감옥에 가지 않습니까? 한평생 나라를 위해 일했다가 해서 그만한 잘못은 봐준다, 그런 것 없어요.
죄인은 죄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그런고로 우리가 아무리 의를 이룬다고 치더라도, 그리 할 수도 없겠지만, 의를 이룬다고 해도 결코 의가 되지 못합니다. 한번 죄를 지었든 얼마를 지었든 죄는 죄로 남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내가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 말입니다.
그래 오늘의 성경은 논리적으로 죄를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품에 있어 짓는 죄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18절)." 또 모두가 다 모르게 되어버렸다, 깨닫는 자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성품적으로, 성품 자체가 죄를 짓고, 죄스러운 성품이 되고보니까 하나님을 깨달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것은 이미 죄에 물든 성품이 됐기 때문입니다. 또, 깨닫지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무관심해졌고, 하나님을 찾을 수 없게 됐어요. 좀더 나아가서는 죄에 대한 고통도 없어요. 심각해하지 않습니다.
걸핏하면 '보통 있는 일이지'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본디 배고픈 사람의 코가 예민하다.' 배고프면 멀리서 굽는 불고기 냄새도 기가막히게 맡아요. 코가 아주 예민해집니다. 그러나 배가 두둑하게 불러 있으면 냄새에도 둔해져요. 그래서 대개 보면 출세하고 돈많은 사람들은 좀 둔해요. '세상이란 원래 그런 거야' 해버립니다. 가난한 사람이 예민하지요. 배부르면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통증도 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통증이 없다고 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죽지 않는 게 아니예요. 의식과는 관계가 없어요. 죄의식 정도의 죄만이 죄가 아니예요. 죄의식이 없는 죄도 죄라는 말입니다. 그실 더 무서운 죄예요. 그래서 마비 상태에 있고, 불감증 상태에 있고, 괴로움도 없어요. 하나님도 두려워할 줄 몰라요.
이것이 결정적인 죄입니다. 더 무서운 죄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 보니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7절)"라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살 것인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것인가--그것도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예수님께서 감람산 언덕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울며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가 평화에 관한 길을 알았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네 눈에 숨겨졌도다.' 이제 다 끝났어요. 그런고로 평화의 길, 생명의 길조차도 알지 못해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어요.
그러니 다 끝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본문은 언어의 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의 죄입니다. 그래서 목구멍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13절)." 이 언어, 말이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나오는 거예요. 말은 마음의 창문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쩌다가 불쑥 내 입에서 욕이 나오거든 회개하세요. 무슨 생각을 했기에 속에 있던 것이 나오는 것입니까? 없는 게 나오는 게 아니예요. 그런고로 파괴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부정적인 언어가 있습니다. 남을 괴롭히는 언어가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꼭 갈고리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어요. 남들이 좋다 할 때에 같이 좋아하면 되는데 꼭 '별 것 아니구만'하고 초치는 사람이 있어요. 못됐지요. 좌우지간 남들이 다 좋다고 하면 나도 좋다고 해주면 좋겠는데 말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간혹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습니까? 좀 못생겼어도 신랑 신부 예쁘다고 거짓말 좀 하는 것, 죄가 안 된답니다. 그런데 꼭 결혼식에 가서 못된 말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신랑이 첫 번째 결혼이 아닌 것 같아…" 별소리를 다합니다. 그 입방아가 아주 문제예요. 참으로 말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는 말은 파괴적입니다. 독사의 독이 있어요. 칼로 찔러야만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예요.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는 거예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언젠가 아이가 가출했다면서 저한테 달려와 울며 하소연하는 어머니가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물어보았지요. "혹시 아이한테 그럴 바에는 아예 집을 나가라고 얘기한 일이 없습니까?" 그랬더니 "나가라고만 한 게 아니예요. 나가서 죽으라고도 했지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제가 "말조심하세요. 아직 죽지는 않았으니까 효자이지요"했더니 본인도 울다가 웃습디다. 생각해보세요.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것인데요. 자기도 잘해보려고 애썼어요. 그러나 잘 안되어서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거기다가 칼로 찌르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겉으로는 조용한 것 같으나 이게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말이란 백번이고 생각한 다음에 내뱉으세요. 성경은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혀에는 속임수가 있다, 그래서 입을 열고 보면 그것은 마치 무덤과 같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속에는 썩은 것이 있다, 그래서 입만 열면 썩는 냄새가 난다는 거예요.
그런가하면 성경은 행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14~27절)"-파멸이 있다, 피 흘리는 데 빠르다 함은 남을 해하는 데 빠르다는 것입니다. 파멸이, 잔인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제 성품이 그렇고, 언어가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행동이 그렇고…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거예요. 구제불능이에요. 전적으로 타락했어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재창조적 능력이 나타나야만 구원받을 수 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죄인이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사람이라야 어떤 형편에 살든지 그에게 모든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은혜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회개의 깊이 만큼 은혜의 높이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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