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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 감사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하원식 목사)

by 【고동엽】 2022. 11. 13.

 

추수 감사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신명기 16:12-17/

(하원식 목사)

어떤 글에 보니까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보통 네 가지 대답이 나온다고 한다. 첫째는 “그럭저럭 삽니다.” 둘째는 “마지못해 삽니다.” 셋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셋째는 “죽지 못해서 삽니다.” 그러면 넷째는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그냥 살아요.” 여러분은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1) 기쁜 일이 있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2) 기쁜 일이 있을 때만 감사하는 사람, 3) 역경 중에서도 여전히 감사하는 사람이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수확을 한 후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 왜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추수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의 입었으므로 마땅히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 12절에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찌니라." 하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430년 동안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다. 피땀 흘려 농사를 지었지만 모든 소득은 주인의 것이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예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안타까운 모습과 이스라엘의 한탄을 보신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셔서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도록 하셨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힘껏 농사를 지었다. 이제는 아무도 빼앗는 자가 없었다.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셨다.

수장 절은 추수를 끝낸 다음 그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 하나님 앞에서 함께 즐거워한 축제인 것이다. 어떻게 삶의 고비를 넘겨왔든지 어떻게 오늘에까지 이르렀든지 한 자리에 모여서 잔치로 함께 연락하며 하나님 앞에서 감사했다. 1년 동안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는 절기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과거에 베푸신 축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며 즐거워 할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은 은혜를 입었다. 애굽의 억압과 같은 이 세상 죄악의 억압이었다. 이 죄악의 억압은 우리들로 하여금 영원한 형벌의 자리에 놓이도록 했다. 이러한 죄악에서 우리들이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러므로 로마서 6장 17-18절 말씀에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하셨다. 죄악에서 건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라는 말씀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감사함이 없는 마음이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감사함이 없으면 그것은 타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유를 늘리기보다 욕심을 줄이는 삶이다. 욕심을 줄일 뿐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 있는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고백할 줄 아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레23:43절에서는 초막절 기간동안 초막으로 나가야하는 이유를 출애굽기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에 거하였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 점에서 초막으로 나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명령 속에는 다음의 네 가지 교훈이 담겨져 있다고 하겠다.

1) 과거에서 오늘을 조명해 보라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웠었던 과거로 되돌아가라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사막 한 가운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며 그곳으로의 입국을 소망하였다. 그들의 믿음과 소망대로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된 생활을 하며 토지의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가나안 입국의 감격을 점차 식어지고, 그 대신 가나안의 이런 저런 불편한 점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감사절인 초막 절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과거 초막에서 지냈던 광야생활로 되돌아가 오늘을 조명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가나안 땅에 풍성한 수확을 거두었지마는 광야에서 초막에 거하던 때로 돌아가 보면 감사가 절로 나올 것이라는 거지요.

2) 하나님의 극대화로 되돌아가자는 것이다.

초막으로 나아가는 것은 광야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초막에서의 생활은 분명히 불편하고 불완전한 생활이다. 그러나 그런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언제나 함께 하셨다. 불기둥 구름기둥이 늘 그들의 진 곁에 있었으며, 아침마다 만나가 내리시고, 때로는 메추라기를 몰아오기도 하셨다. 물 없는 광야에서는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함으로 광야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기도 하셨고 사막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환경 앞에서 인간은 작아 졌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대하셨다. 강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력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었고, 자연스럽게 인간의 극대화가 대두되게 되었다. 그에 따라 하나님은 극소화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초막으로 나아감은 뒤바뀐 신앙의 우선 순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과정을 위함인 것이다.

3) 상실한 소망을 되찾자는 것이다.

광야의 초막이 의미하는 것은 잃어버린 소망으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광야를 방랑하는 기간동안 이스라엘은 비록 초막에 거하였지만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가는 희망으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적지가 있었다.

인간은 소망을 먹고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삶의 활력을 경험하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가나안에 입국하여 정착한 것은 그 동안 꿈꾸어 왔던 소망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가나안 정착이 결코 소망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소망을 위한 한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가나안 이후는 가나안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을 소유해야 한다. 초막으로 나아감은 미래의 소망으로 불타올랐던 과거 그때를 되돌아보면서 오늘의 새로운 소망을 되찾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풍족한 삶과 부를 이루었다고 그것이 소망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는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이 있다. 내가 어려울 때 가졌던 꿈처럼 감사절을 통해 더 높은 차원의 소망을 가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란다.

4)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1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초막 절을 지키게 하신 이유는 저들이 추수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복임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베풀어주신 복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 앞에 감사절을 지킬 때 그 사실을 새삼 깨닫고 기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난 중국 사천성 지진의 최대 피해지 북천시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을 때 일이다.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건물 잔해 더미 속에서 한 여성 시신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까 이 여성은 엎드려 있었는데 포대기에 100일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급하게 아이를 꺼내 보니까 다행히 아이는 숨을 쉬고 있었다. 엄마가 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죽어 가는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온 몸으로 아이를 지켜낸 것이다. 서둘러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던 의료진이 포대기 안에서 핸드폰을 발견했다.

그 핸드폰 화면에 한 줄의 문자 메시지가 떠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보배야 만약 네가 살아남으면 꼭 기억해다오. 내가 널 사랑했다고...” 이 메시지가 매스컴을 통해 중국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모두가 감동의 눈물을 쏟았다.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자식을 지켜낸 모정이 그들을 감동시킨 것이다. 이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한 가지다. 자신의 사랑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아마도 살아남은 이 아이는 평생 엄마의 사랑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문자 메시지를 평생 가슴속에 묻고 살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죽게 하셨다. 바라는 것 아무 것도 없으시다. 다만 한 가지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복음성가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란 곡이 있다. 이 곡의 배경 이야기가 있다.

작곡가 김석균씨는 뇌성마비 장애자 한 자매와 여러 해 교제했다. 한번은 그 자매로부터 감동적인 편지를 받았다.

가난한 한 집사님이 이사를 했다. 셋방살이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녀석이 둘이나 있었다. 어찌나 장난이 심한 녀석이든지 신발을 사주면 한 달을 채 신지 못했다. 신발이 그러는 데 옷이야 뭐 말할 게 있겠는가? 아무리 빨아대도 도무지 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사한 다음 날 큰 마음먹고 중고 세탁기 한 대를 샀다.

세탁기를 가지고 대문을 들어서다가 그 집 주인 부인을 만났다. 집주인이 묻는다. “웬 세탁기입니까?” “네, 중고 세탁기 한 대 샀습니다. 애들이 워낙 번잡스러워서 당할 수 있어야죠?. 아니 글쎄,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신발이 한 달을 못 가요 글쎄” 그 순간 집주인 부인이 갑자기 울면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는 게 아닌가? 당황했다. “내가 멀 잘못했나?”그때 그 집 남편이 나오면서 “아닙니다. 부인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6살 난 아이가 있는데 지금껏 걷지도 못해요. 이 아이에게 신발을 신겨 걷게 해보는 게 저희들 소원입니다”그 가난한 집사 님은 몇 번이나 죄송하다고 말한 다음 방으로 들어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이들의 신발을 빨리 닳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것을 불평한 저를 용서하옵소서”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이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죽음이나, 배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고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했다. 영국의 신학자 매튜 헨리는 "감사는 더하기(+)와 같아서 모든 것에 감사하면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더해진다. 어떤 일이든지, 어디서든지 감사하면 플러스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러나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빼기(-)와 같아서 있는 것 까지 빼앗기고 없어진다."라고 말했다.

감사와 불평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하면 할수록 더욱 불어난다는 것이이다. 불평과 불만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불만과 불평의 일들이 쌓여 가지만 감사를 하면 할수록 감사할 일들과 축복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성경에 비춰볼 때 이 얼마나 부끄럽고 초라한 모습의 신앙인가? 이제 우리는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은혜, 생존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다. 욕심에서 벗어나, 있는 것에 대해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감사절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초막 절은 모든 이웃들과 더불어 감사를 나누는 즐거운 축제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러한 즐거움과는 다른 방향에서 불편한 초막으로 나가 칠 일간을 지내라는 성경의 규정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정착하여 사는 오늘의 안정된 삶을 보다 더 선명하게 조명하기 위함이었다.

2. 어디서 이 절기를 지키라 했는가

본문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하셨다. 이 말씀의 택하신 곳이 곧 중앙 성소인 성막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 후 솔로몬에 의해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이 그 성소가 되었다. 그 후 복음이 온 세계로 전파되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가 바로 그 곳이다. 이 성전에 모여 하나님께 감사의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러한 절기가 되면 온 힘을 다해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모였다. 심지어 먼 외국에 거하는 사람들까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달려왔다.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집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성전에 계신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건물들이 있다. 호화로운 건물들도 많다. 그러나 아무도 그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진 건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움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라면 그 곳은 성전이다. 교회당은 어디에 있던 성전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용되는 집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 성전에서 절기를 지키라 하셨다. 함께 모여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참빛 가족 모두는 이 귀한 감사절을 지키기 위해 온 가족이 함께 이 성전을 찾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해방되어 가나안 복지까지 가는 동안 메마른 사막 광야에서 40년 동안 생활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이들은 이동식 천막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겼다. 이를 광야 교회 즉 성막 교회라고 한다. 이 성막은 거룩한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구분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갔던 장소다. 절기를 지키되 이 거룩한 곳에서 지키라 하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절기를 지켜야 했다. 반드시 여호와 앞에서 지켜야 했다. 이는 우리를 택하신 곳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모든 소산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며 즐거워하라고 한다. 지나간 일년 동안 소산물에 복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또 복을 주실 것을 믿으며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초막이란 임시로 허름하게 만든 간이 움막이다. 유대인의 경전인 `미쉬나`에 의하면, 초막을 만드는 일에 특별히 중요한 것은 초막의 지붕인데 초막 안에 누우면 천장을 통하여 하늘의 달과 별들이 보여야 한다. 느8장에 기록된 대로 감람나무, 버드나무, 종려나무나 화석류 나무 가지로 짓고 지붕은 얼기설기 달과 별도 보이게 지었다. 이것은 초막이 완벽한 거처가 아니라 무엇인가 불완전한 거처임을 강조한 것이다.

3. 어떻게 이 절기를 지켜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14절에 “절기를 지킬 때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한다. 그러니 추수하여 너희끼리만 좋아하지 말고 성중에 있는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눠라 는 말이지요. 여기서 두 가지 꼭 기억해야 한다.

1) 너와 네 자녀다.

여호와의 절기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 라고 한다. 이 말은 너희가 너희 자손에게 꼭 가르쳐 주어야 할 절기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부모가 자녀와 함께 초막 절을 지키면서 초막의 지붕으로 쳐다보이는 밤하늘의 달과 별을 보면서 유대민족은 별을 보고 살아 온 민족임을 교육한다. 낮에 해를 보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살아 온 민족이 아니라 애굽의 바로의 박해로부터 근세사의 히틀러의 박해까지 3300년 간 자유롭게 활동한 것이 아니라 별이 비치는 밤에만 그들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까지 인도하시고 보호해준 하나님께 감사하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지금도 이 절기에 초막에 거하면서 그들의 자녀들에게 자기의 조상들에게 베푼 역사에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케 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교육을 시도한다. 자녀와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유대인들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부자관계가 매우 엄격해서 자식들은 부모님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가 없었는데 수장 절에는 부자모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2) 성중에 거하는 레위 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라 고 한다.

초막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절기다.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수문 앞 광장에서 큰 성회를 열고 저들이 초막 절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닫고 성대히 초막 절 절기를 지킬 때 느8:10절에 [ 예비치 못한 자에게는 너희가 나누어 주라 ] 이와 같이 초막 절에는 미리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자들과 함께 명절을 즐겁게 지킬 것을 권하고 있다. 이런 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누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할 일이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절기다.

아랫사람과도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유대인들은 주인과 노비의 관계 또한 엄격했는데 수장 절에는 주의 소유물에 불과한 천한 노비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사랑이 있었기 때문인데 왜냐하면 사랑이란 계급과 신분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의 일군들과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레위 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열 한 지파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양과 소를 키우면서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예물과 희생제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먼저 받으신 다음에 그것을 레위 인에게 돌려주어 그들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이다. 추수감사절에 주의 종들과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받들어 수고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절기가 되도록 준비하시기 바란다.

나그네와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객, 즉 나그네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였다. 본질적으로 우리는 누구나 다 이 세상에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당하여 한곳에 정착할 수 없어서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을 살았다. 우리 자신이 나그네 인생임을 기억하고 나그네와 함께 하는 추수감사주일이 되도록 준비하자

어려운 이들과 함께 연락할 수 있도록 준비하자

고아와 과부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하셨는데, 이 세상에서 불쌍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은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와 남편을 잃은 부인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육신의 고아와 과부가 있고 영적인 고아와 과부가 있다는 사실이다. 이 고아들에게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함께 즐거워하는 추수감사절이 되도록 전도로 준비하시기를 바란다.

미국을 세운 청교도들은 재물에 대해 두 가지 책임을 강조했다.

1)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책임이 있고 2) 어려운 이웃에 대해 나누어야 할 책임이다. 그래서 청교도가 세운 미국에서는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 문화가 잘 정착되어 있다. 카네기 록펠러 존 워너메이커, 헨리 포드, 현재 세계적 재벌 빌 게이츠, 워렌 버핏, 등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돈 만 많이 번 부자들이 아니라 나누는 일에도 부자들이다.

1 .보임으로 감사하라

보임으로 감사해야 한다. 16절 “너의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하나님께서 모든 남자들에게 1년에 3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절기를 지키라고 하신다. 절기를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여야 할 장소가 있다. 그곳이 어디예요? 하나님의 택하신 곳이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다. 예배란 한 마디로 하나님께 나를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얼굴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인격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마음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믿음을 보이는 것이다. - 하나님께 내 감사를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보이는 것이 예배라고 할 때 우리가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리 얼굴 표정도 신경 써야 한다. 평소 우리의 인격 관리도 잘해야 한다. 우리 마음도 수시로 잘 가꿔야 한다. 그런가 하면 항상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한다. 언제나 감사, 어디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이렇게 사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고싶어 하신다.

2. 힘대로 감사하라

또 보일 때의 유의할 점이 있다고 하신다. 공수로 보이지 말라는 것이다.

공수는 빈손을 말한다.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이다. 예물을 준비하여 나아오라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예물을 준비하여 감사절 예배에 나오라는 것이다. 그럼 예물을 얼마나 준비해야 하는가? 예물은 어느 정도나 준비하는 게 좋은가? 힘대로 준비하라고 한다. 신16:17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리라"고 했다. 왜 말로 감사하고 마음으로 감사하면 되지 물건을 드리라고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다. 우리를 만드셨다. 그러니 우리에 대해 얼마나 잘 아시겠는가? 우리 맘 깊은 곳까지 다 알고 계신다. 우리의 생각까지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 우리의 약점까지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물질에 얼마나 약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 우리가 돈에 얼마나 마음이 흔들린다는 것도 알고 계신다. 결국 공수로 보이지 말라는 말은 우리 손에 있는 물질이 탐나서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을 원하신 것이다. 생각해 보세요. 만물이 주님의 것이다. 우주 전체가 주님의 것이다. 그런 분이 우리 손에 있는 물질을 탐내시겠어요? 아니요. 예물을 손에 들고 나아갈 때 마음까지 나아갈 수 있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결 론

인간과 짐승의 차이 중에 하나는 인간은 받은 은혜에 대해서 기억하고 감사할 줄 안다는 것이다. 신자와 불신자는 하나님께 감사하는가 안 하는가의 차이라면 누가 큰 믿음의 사람인가 하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는가에 달려있다. 이제는 습관적이나 형식이나 누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체면 때문이 아니라 잘살고 못 살고를 떠나서 정말 이미 받은 은혜와 구원의 축복만도 감사해서 진심으로 감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세월이 갈수록 과학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을 하여도 점차 상실되어 가는 것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감사를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감사는 은혜 입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다. 감사는 행복의 비결이다. 아무리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그의 마음속에는 불평과 불만이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감사는 복을 받는 비결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언제나 감사하는 사람에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있어서 감사하고, 건강해서 감사하고, 형통해서 감사하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결과적인 감사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 승리하게 된다. 범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란다.

사실 마음가짐이 결정적이다.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모든 것이 달라지고 마음가짐이 그대로이면 모든 것이 그대로다. 작은 것을 받아도 크게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많은 것을 받아도 감사는 인색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마음가짐 때문이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감사의 분량은 곧 행복의 분량이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고전13:13절에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가 우리 삶에 항상 있을 것이라는 말씀이 기록되었는데 나에게 한 가지 더 추가하라고 한다면 '감사'를 넣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감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감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응답이요,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표현이요, 믿음의 행위다. 진정한 감사를 할 때 많은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고, 축복의 문을 여는 것이다.

여러분, 감사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지난 일 년 동안 지켜주셨다. 힘들고 어려울 때에도 붙잡아 주셨다. 때로는 앞뒤 좌우가 꽉 막혀 캄캄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이렇게 숨을 쉬잖습니까?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뚫고 나왔습니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주님께서 힘이 되셨고, 능력이 되셨다. 주님께서 성령 님을 통해 역사 하셨다. 여러분들에게 믿음을 주셨다. 그 믿음으로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역사 하셨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사랑하셔 여러분들의 심령을 풍성하게 해 주셨다. 감사가 충만한 마음으로 다음 주일 추수감사 주일을 준비하는 여러분들에게 큰복을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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