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최선을 다하는 교회 II 자료원 :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발행일 : 95년 01월 08일 최선을 다하는 사람만 최상의 영광을 누릴 수 있고 최선에 대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바울사도의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7에서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길을 마치 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한 구절 속에 바울의 삶의 여정이 그려져 있습니다.[싸웠다,마쳤다, 지켰다]는 세마디야 말로 그가 일생을 어 떻게 살았으며 어떤 태도로 일했는가를 설명해 주기에 넉넉합니다. 그는 싸우는 병사처럼,달리는 운동선수처럼, 성을 지키는 파숫군처럼 싸웠 고 달렸고 지키며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최선을 다한 삶이었습니 다. 흔한 일은 아닙니다만 마라톤 선수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걸어서 결승점으 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경기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달리는 사 람은 걸으면 안됩니다. 축구열전이 벌어지고 있는 운동장에서 공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선수는 없 습니다. 있다면 부상당하고 퇴장하거나 반칙으로 퇴장당하는 선수일 것입니 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운동경기로 비유했고 전투로 비유했습니다
. 최 선을 다하는 사람이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1994년 11월 9일 저녁 6시 제주공항을 떠나 광주로 이륙하던 대한항공 326 편의 비행기 왼쪽 엔진에서 갑자기 불꽃이 튀기 시작했습니다. 300명의 승 객과 승무원은 순간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습니다. 곧바로 기장은 기수를 제 주로 돌려 회항했고 다행히 불은 착륙과정에서 꺼졌습니다. 원인 조사 결과 망가진 엔진사이에 꿩이 깃털과 피가 남아 있었습니다. 활주로에 있던 꿩이 비행기에 부딪쳐 일어난 조류충돌사고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외국에서는 버드 스트라이크(Bird Strike)라고 부릅니다. 꿩 한마리 때문에 엔진부품인 팬블레이드(Fan Blade) 46개가 망가져 40억 원의 수리비를 날렸다고 합니다. 1995년부터 23년간 민항기와 군용기 73대가 새와 충동해 추락했고 138명이 사망했다고 합니다. 92년 한 해동안 전 세계적으로 5,605건의 조류 충동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꿩 한마리와 비행기, 비교도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만 그 작은 새한마리가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고 40억원의 손해를 입힐 수도 있다는 이 사건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훈은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소홀히 취급하는 사람은 큰 것에도 소홀하기 마련입니다. 그러 나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큰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느 시골에 면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자신이 면장이라는 사실에 대해 불만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공부를 못했나. 대학을 안나왔나, 얼굴 이 못생겼나, 헌데 겨우 면장이라니" 하며 면장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는 술타령을 일삼고 걸핏하면 도지사 만나 교제해야 된다며 도청소재지에 나가 살다시피 합니다. 그리고 왜 면장일을 소홀히 하느냐고 물으면 "나한 테 대통령을 시켜보라 내가 누구보다 잘 해낼거다"라며 기염을 토합니다. 이 소문이 도지사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을 댕오령 시켰겠습니까? 그 달 말로 해임되고 자리에서 쫓겨나야 마땅합니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에겐 핑계가 많습니다. 대체적으로 '나를 무시해도 분후가 있지. 이걸 일이라고 준단 말야? 다른 걸 맡겨보란 말야, 잘 해낼테 니.."라며 핑계를 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사람들은 둘을 맡겨도 다섯을 맡겨도 충성을 다합니다. 무 엇을 맡겨도 그 일에 최서을 다합니다.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취급하거나 외면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왜 최선을 다해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1. 그리스도의 일군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일군]이라는 말의 의미는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사람을 뜻합니다. 북소리에 맞춰 줄지어 앉은 채 노를 젓는 사람을 가리켜 일군(훼파레스)이라고 불렀습니다. 옛날에는 노예가 노를 젓는 일을 맡았습 니다. 어두운 배 밑창에서 비지땀을 흘리며 노를 젓는 동안 한눈을 팔거나 딴전을 피우며 꾀를 부리는 노예가 발견되면 감시원의 가죽 채찍이 날아옵 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군입니다. 한눈을 팔아도 안되고 딴전을 피워도 안되 고 꾀를 부려도 안되고 핑계를 댈 수도 없습니다. 뒷줄은 힘드니까 앞줄로 가겠다든지 기분 나쁘니까 쉬다가 하겠다느니 불평도 핑계도 통하지 않습니 다. 북소리의 리듬에 맞춰 노를 젓기만 하면 됩니다. 배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지 목적지가 어딘지에 관한 것은 선장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 살면서 모내기를 해 본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기계로 모내기를 합니다만 옛날엔 사람이 줄 지어서서 손에 한웅큼 씩 모를 들고 있다가 줄을 따라 모를 심곤했습니다. "평당 쌀이 몇가마니 나올까, 비료값은 얼마나 들까, 이 논에서 나온 쌀은 누가 가져갈까"등 그 런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어이 어이 하는 구령에 맞춰 모를 심고 일어서고 다시 모를 심곤 합니다. 바로 그것이 일군의 자세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 농부이며 하나님의 배에서 노를 젓는 노예이며 하나님의 논에서 모를 내는 일군인 것입니다. 일군의 할 일은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두기자 회견이 끝난 후 TV 토론에 참여한 어느 연사의 말이 생 각납니다. 그는 '대통령의 시정방침이나 세계화 구상이 발표됐습니다만 국 민의 할 일이 더 큰 것 같습니다. 모든 국민이 그 뜻을 따르고 협력한다면 선진화나 세계화가 이뤄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다면 대통령의 구상은 한낱 구상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군은 일해야 합니다. 떠들고 일 안하는 사람보다는 조용하게 일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의 일군입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맡은 자]라는 것은 관리자,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본래 뜻 은 오이코스노모스(Oikosnomos) 라는 것으로 집을 관리하는 자라는 것입니 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면 얼마나 신임이 두터우 며 그 책임이 중요합니까? 미국 대통령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사람가운데 검은 가방을 든 사 나이가 있습니다.
그 검은 가방은 만일의 돌발사태에 대처할 대통령의 결 정에 관한 장치가 장착되어 있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 가방을 아무에게나 맡길 수 있겠습니까.심복도 가장 신임하는 심복에게 맡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비밀스런 사명을 맡겼겠습 니까? 믿고 신임하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그 일을 맡기신 하나님을 소홀히 취급하고 과소 평가 하는 것입니다. 관청마다 벽에는 대통령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어느날 장관이 자기방에 걸려있는 대통령 사진을 떼낸 후 땅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았다고 합시다.사 진이란 인화지에 현상한 그림에 불과하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의 존재와 권위와 인격을 짓밟는 것입니다. 그 장관의 목이 붙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나한테 직분을 주셨습니까? 내가 누구의 종이며 일군이며 청지기입니 까? 하나님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주신 일 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맡았든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더구나 비밀가방을 소홀히 취급하면 그 화가 더 큰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 축복받는 비밀, 영원한 생명의 비밀,천국가 는 비밀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 비밀을 알리고 전하는 청지기 노릇을 잘 해야 합니다. 3.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13을 보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에 공력을 밝히 리니"라고 했고 4:4 끝을 보면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창조론과 종말론을 가진 종교입니다. 창조론이란 하나님이 천지 를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종말론이란 이 세상의 종말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세계가 영속된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아직도 빛이 무엇인가에 대하 명확한 개념이나 정의를 정립하 지 못하고 있습니다. 17세기 후반에 뉴톤(Newton)은 [빛은 발광체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하여 나오는 입자]라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즉, 광립자 (particulate Theory) 설이 뉴톤의 학설입니다. 그런가하면 물리학자 호이 겐스 (Huygens)는 빛은 하나의 파동이라고 하여 파동설(Wave Theory) 을 주 장했습니다. 아인슈타인(Einstein)은 빛은 에너지를 가진 입자라고 하는 광량자설 (Photon Theory)을 주장했습니다. 최근의 학자들은 빛은 파도의 파장처럼 파동성(Wave)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전자파니(electromagnetic wave) 파 장(Wave Length)이니 주파수(cycle) 니 가시광선(visible light)이라고 부 릅니다. 그러나 창세기 1;3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한마디로 빛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었습니 다. 빛은 하나님께서 혼돈과 흑암을 물리치기 위해 말씀으로 만드신 창조물 이라는 것입니다. 물리학자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동안 규명하고 연구해도 미지한 그 빛을 말 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충성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고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나리라]고 했고 [칭찬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낱낱이 심판이 있을 것이며 잘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이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 은 일군과 맡은 자들에게 요구하는 자격조건이 무엇인가를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조건은 학벌도, 가문도, 미모도, 경력도 아닙니다. 충성입니다. 다른 조건들은 충성하는데 필요한 것들이지 충성보다 그것들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제자들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베드로보다 훨씬 더 사회겨험이 나 가문이나 학벌이 출충한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습니다만 베드로를 선택하 신 것은 그의 충성심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십자 가를 지는 순교의 잔을 마셨습니다.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디모데전서 1:12에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 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내 가 문때문에,내 학벌때문에,내 경험때문에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충성되이 여 겨"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꾸짖고 계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것은 왜 공부하지 않느냐, 왜 경험이 적으냐가 아닙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느냐입니다. 바울은 최선을 다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4:4에서 '자책할 일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본 것입니 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내가 맡은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믿음으로 최선을 다합시다. 하나님이 지켜보시는 앞에서 꾀를 부릴 순 없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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