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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과 지도력 훈련

by 【고동엽】 2022. 10. 18.

워렌 리 (Sanfrancisco 신학대학원 목회학 교수)

이번 협의회에서 나에게 맡겨진 주제는 "영성과 목회지도력 형성"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내가 말하려 하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나는 다음의 세 가지 방식으로 이 주제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나는 장로교 신학의 대표적 교리인 예정설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하고자 합니다. 둘째로, 나는 이 교리를 나의 자서전적 성찰에 적용시켜 보고자 합니다. 셋째로, 나는 그 교리의 화신이라 할 수 있으며, ①감사, ②겸손, ③희망, ④자기비판 능력 등 진정한 기독교 지도력에 있어서 필수 불가결한 네 가지 자질을 소유하고 있는 세 명의 탁월한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먼저,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우리 장로교인들이 예정론 때문에 종종 조롱 거리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우리를 놀려대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흔히 경솔하게 이 예정론에 관하여 얘기를 주고받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은 이중예정(double predestination)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떠올리는 것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인류 중 어떤 사람들은 죽은 뒤 하늘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예정하셨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도록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통속적이고 판에 박힌 예정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 확실히, 그러한 생각은 하나님의 본성 일반에 관한 칼빈의 사상을 논리적으로 추론한 것일 테지만, 칼빈의 예정론이 그것만을 얘기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잠깐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주석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기독교 강요는 칼빈이 살아 있을 동안에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536년부터 1554년까지 나온 판본에서, 칼빈은 신론 부분에서 예정론을 다루었습니다만, 1559년에 발행된 마지막 판본에서는 구원론 부분에서 다루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정론은 하나님의 본성에 관한 본체론적 진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에 관한 진술, 다시 말해서, 복음을 받은 우리 인간(선민)들이 하나님의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방법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관한 신앙고백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정론은 미래를 예언하는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때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우리가 과거의 내 삶을 돌이켜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은 지금까지 우리를 사랑해 오셨고 우리가 전혀 의식하지 못할 때에도 우리의 모든 삶을 인도해 오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회고적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 있는 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볼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을 우리를 돌보아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되고, 이러한 확신은 이때 우리를 감사, 겸손, 희망, 이 세 가지로 충만하게 합니다. 칼빈이 예정론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바는 바로 이것이며, 이것을 떠나서는 예정론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믿는 사람들, 즉 선민들로 하여금 감사, 겸손, 희망, 이 세 가지의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2

이제 내 발제의 본론인 두 번째 부분으로 넘어가야겠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방금 말씀드린 예정론 해석에 비추어 내 생애를 자서전적인 방식으로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내가 이 지구에서 살아온 51년의 세월을 돌이켜볼 때, 나는 감사, 겸손, 희망, 이 세 가지 감정으로 압도당하고 충만해지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섰다고 증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왜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지, 나의 가문과 관련된 몇 가지 예화를 들어가면서 아주 구체적으로 얘기를 전개해 보겠습니다.

나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언제나 감사와 겸손과 희망의 감정으로 가득 차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나는 미국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는데,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은 수치와 당혹의 원천이었습니다. 나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2년, 미국에 한국인이 거의 없을 때에 태어났는데, 그때 이후로, 특히 내가 국민학교 학생이었을 때, 다른 아이들이 내게 "너는 어느 나라에서 왔니?" 하고 묻곤 했습니다. 그 애들의 질문은 대개 이런 식이었습니다.

"너는 중국 사람이니?"
나는 대답합니다.
"아니."
"그러면 일본 사람이니?"
"아니."
"그럼 너는 도대체 뭐니?"
"나는 한국 사람이야."
"그게 뭐니?"

나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인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말할 수 없는 열등감을 느끼면서 성장하였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흑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여러 해 동안 흑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키가 6피트 5인치밖에 되지 않았지만 농구를 좋아했고 유명한 프로 운동선수가 되고 싶은 열망에 차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에 나는 코카서스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지역으로 이사를 했는데, 거기서 나는 오랜 기간을 보내면서 성인이 되었고, 이 기간에는 백인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나는 신체적 외모를 경멸하고 심리적 열등감으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나를 낳은 부모에게 분노하였고, 내가 그토록 평범한 미국인이 되고 싶어하는 데에도 그들이 "한국인다움"을 유지하는데 대하여 수치스러웠습니다. 그 당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증오했던 것이 지금 기억납니다. 작은 키, 눈 모양, 머릿결, 심지어 내 이빨까지, 왜 그렇게 못나고 더럽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25살 되었을 때 거울을 바라보며 내가 한국인의 피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느꼈던 감정입니다. 50살이 된 지금 거울을 볼 때는 어떤 느낌을 갖는지 여러분은 궁금해하실 겁니다. 지금 나는 감사, 겸손, 희망, 이 세 가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내 머리를 예로 들어볼까요. 많은 사람들을 내가 염색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실 지 모르겠지만, 나의 부모님들은 60살이 넘어서까지 흰머리가 없었습니다. 내 치아에 대해서 말하면, 나는 27년 동안 한 개의 충치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김치 덕분이 틀림없습니다!

내가 이 예화를 통해 말하려고 하는 신학적 논점이 무엇인지를 여러분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내 머리카락과 치아 같은 것들에 대하여 감사와 겸손과 희망에 충만하여 내 과거 전체를 돌이켜 봅니다. 그러면 그 모든 것이 종교적 신앙의 문제로 느껴집니다. 아하, 나는 한국인이 되도록 예정되었구나, 하고 믿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내 부모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겸손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되도록 예정하였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찬가지로, 정말이지 진심으로, 중국계 미국인 4세인 나의 사랑하는 아내 수산과 한국에서 입양한 내 아이들, 서울에서 태어난 일곱 살짜리 조나단과 광주에서 태어난 다섯 살짜리 레베카 역시 세상이 창조될 때부터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의하여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이 되도록 예정되었다고 믿습니다.

나는 이제 내가 한국인의 피를 타고났다는 것과 관련하여, 예정론의 유효성에 관한 나의 확신이 어떻게 내 삶과 사상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나는 예정론에 관한 생각을 전혀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1987년 봄이었습니다. 나는 D-Min. 프로그램을 위하여 한국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저는 제주도에서 한라산의 봄눈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 아니라, 그 다음 너무도 아름다운 밤을 보냈습니다. 그 이야기를 더 하기 전에, 이 이야기가 내게 갖는 의미를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서 그 배경이 되는 이야기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맨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22년 전인 1970년이었고, 그 다음 1977년에 당시 79세나 된 노부모님을 모시고 그들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1987년 봄의 여행 전에 두 번 방문한 적이 있었던 탓으로, 그리고 당시는 내가 45세로 이미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겪는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한 뒤였기 때문에, 제주도에서 그 잊을 수 없는 밤에 내 호텔 방에서 일어난 일은 나를 완전히 실신 지경에 이르게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건의 의미를 절감할 수 있도록 나 자신에 관한 자서전적인 이야기를 몇 가지 더 해야겠습니다. 나는 1966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한 뒤 7년 동안 로스앤젤레스의 큰 흑인 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봉사하였습니다. 1973년 산안셀모의 산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다가 1977년 산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다시 목회를 하였는데, 거기서 내 아내 수산을 만났습니다. 1979년에는 조그만 일본계 미국인들의 교회에서 임시 목사가 되었고, 1981년에는 다시 SFTS로 돌아와서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 동안 D-Min. 프로그램의 컨텍스트에서 많은 한국인 목사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에 대해 커다란 사랑과 존경, 그리고 경애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내가 영어를 더 잘한다는 이유로, 무의식적으로, 한국인 D­Min. 학생들에 대해 우쭐해 하고 온정을 베푸는 듯한 태도를 갖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SFTS STD의 졸업생으로 나의 좋은 친구이며, 당시 서울의 D­Min. 프로그램 위원장이었던 정장복 박사는 나를 여러 번 한국으로 초대했으나, 사실 나는 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미 두 번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적 의무와 직업적 의무 때문이 아니라면 다시 한국에 올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3년인가 4년인가를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계속 미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의 초청을 거절할 수가 없어서, 1987년 봄 마침내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9일 뒤 산프란시스코로 돌아갈 때까지, 나는 마치 하나님 자신이 그 모든 여정을 계획하였고 내가 한 모든 경험은 내 생애의 모든 것을 하나로 묶기 위한 것이었다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맨 먼저 나는 여러 해 동안 한국인 목사들이 논문연구 계획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주면서 그들과 씨름한 열매를 보았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거니와, 우리 SFTS D­Min. 학생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열심히 목회사역에 복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흥미 있고 야심적일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한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예를 들 수 있겠습니다만, 가장 극적인 것은 인명진 목사(박사)의 활동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는 1987년 늦은 봄과 초여름,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대규모 시위를 지휘한 조직의 수장이었습니다. 인명진 목사가 SFTS 목회학 박사학위를 얻도록 도와주면서 나는 간접적으로 나의 동포인 한국민중이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고, 새로운 한국을 건설하는 데 미력하나마 일정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전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는 산프란시스코로 돌아가기 전날 제주도에 도착하여, 김창근 목사가 시무하고 있는 제주시의 영락장로교회에서 설교한 다음, 호텔 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지나간 8일 동안의 충격은 하나님의 계시와 같은 힘으로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나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나는 어찌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너무도 큰 기쁨에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 때 나는 세 가지의 감정이 밀물처럼 나를 뒤덮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감사와 겸손, 희망의 감정이었습니다. 그때 마치 하나님 자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 아들아, 바로 이 순간을 위하여 너는 창조되었느니라. 그 오랜 세월 동안, 나는 바로 지금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이 곳으로 너를 인도해 왔노라. 이것이 바로 내가 너를 한국인이 되도록 예정한 이유이니라."

3

이제 오늘 내 발제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으로 넘어갈 차례입니다. 나는 지금까지 감사와 겸손과 희망, 이 세 가지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내가 그렇게 길게 이야기한 것은 이 세 가지야말로 내가 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하였고 앞으로 잠깐 더 이야기하고자 하는 나머지 한 가지와 더불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들은 영적, 목회적 지도력 형성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영적 관점에서 볼 때, 산프란시스코신학교 목회학박사원(D­Min.) 프로그램 같은, 기독교 지도력 형성 및 훈련 프로그램의 궁극적 목표는 이 세 가지 자질들을 개발하고 성찰하며 육성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에 의해서도 그 중요성이 강조된 바 있듯이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네 번째 요소는 자기비판의 능력입니다. 어떤 지도자가 얼마나 유명하고, 훌륭하고, 유능하고, 세련되고, 강력한가에 상관없이 그 사람이 감사, 겸손, 희망, 그리고 자기비판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는 기독교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앞서 제시한 지도력의 정의에 부합되고, 또 그 본이 되는 세 명의 대표적인 한국인을 나의 개인적 경험 속에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로 나의 어머니입니다. 그녀는 1898년 평양에서 태어나 여성 신학교를 다녔으며, 당시 한국 장로교회의 유명한 전도부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부흥사인 김익두 목사를 따라 일제 식민지 기간에 만주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의 부모님은 1916년에 결혼을 하셨고, 나의 아버지는 192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도 결국 193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셨고, 거기서 이미 있던 세 명의 자녀 외에 세 명의 아이를 더 나은 뒤에 46세의 나이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셨습니다. 그녀는 아마 미국의 장로교회에서 치리장로로 임명된 최초의 한국 여성일 겁니다.

어머니로부터 나는 검은머리와 튼튼한 이 말고도 감사의 마음을 배웠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 그녀는 문자 그대로 매일 "다시 태어나는"경험을 하는 것과 같은 삶의 활력과 즐거움으로 매일 아침 나를 깨우곤 하셨습니다. 그녀는 "저녁에 눈물 흘려도 아침에는 기쁘리라"는 시편 30장 5절의 놀라운 말씀의 의미를 매일 되씹어 주셨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한창 때에 은사를 받은 설교자였으며, 역동적인 대중 연설가였습니다. 또한 그녀는 로스앤젤레스 재미 한인 공동체의 저명한 인사였습니다. 그녀는 한국에 남겨 두고 온 것들과 대비되는 미국에서의 생활에 대하여 실망스럽고, 씁쓰레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불평하지 않았으며, 늘 감사와 희망 속에서 미래를 내다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에 대해 "만일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이승만이 그녀를 죽이려 들걸, 만일 그녀가 돌아가면 국민들이 그녀를 대통령으로 뽑을 테니까 말야"라고 말씀하시곤 하였습니다. 그녀는 정말로 위대한 연설가였으며,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연세가 94세이신데, 나는 그녀가 아주 건강한 가운데 로스앤젤레스에서 나의 여동생과 함께 편안한 여생을 보내시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 몹시도 기쁩니다.

내가 언급하고자 하는 탁월한 한국 기독교계 지도자의 두 번째 예는 내가 자라난 로스앤젤레스에서 한인 장로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셨던 김성낙 박사입니다.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미국에서 활동하다가 1959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숭실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1920년에 그는 예일대학교 신학부와 프린스턴신학교를 다였으며, 양쪽에서 신학박사와 철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로스앤젤레스 한인 장로교회의 목사로 21년 간 봉직하면서 그는 연 1,600달러 이상의 돈을 벌어 본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나의 어머니나 이민 온 많은 다른 한국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일하면서 여섯 자녀를 키우기 위해 돈을 벌고, 또 저축했습니다.

김 박사님은 아마 내가 아는 분들 가운데 가장 교육을 많이 받은 분일 겁니다. 그는 업적이 많은 학자이자 훌륭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로스앤젤레스 재미 한인 공동체의 상징적 지도자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제 그의 생애와 목회의 의미를 되돌아 볼 때 내가 그로부터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이 다름 아닌 겸손의 가르침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부, 권력, 지위, 그리고 성공은 그에게 중요한 가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첫째로, 무엇보다도 목회자였으며, 그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1968년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당했던 나의 누이 애경의 장례식을 비롯한 많은 장례식에서 그가 슬피 우는 것은 보았습니다. 3년 6개월 전 그가 86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을 때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김 박사님의 장례식을 인도하였습니다. 나는 울었습니다.

설교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탁월한 한국 기독교 지도자의 세 번째, 마지막 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 분은 여기 계신 분들 모두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아마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존경을 받고 있는 유명한 한국의 기독교인일 것입니다. 그는 서울 영락장로교회의 설립자로, 1991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던 상을 받으신 한경직 목사님이십니다. 나의 아버지와 한 목사님은 1920년대 평양숭실전문학교의 동기동창이었습니다. 나의 전 생애를 통해 나는 그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있어서 제2의 아버님과 같은 분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고 아까 말한 것은 올해 6월 초순 그가 로스앤젤레스 영락장로교회에서 설교를 하던 도중 헤어졌던 부인, 가족과 재회를 한 뒤 북한에서 갑자기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던 로스앤젤레스 영락장로교회의 전 목사인 김계용 목사님에 대한 기억을 회상하면서 회중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시던 것을 본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분들이 한 목사님과 만났고,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셨을 줄 압니다. 그 분이 예심으로 축복을 받았던 우리 모두는 그가 오늘 내가 아주 여러 번 언급했던 감사, 겸손, 희망의 세 가지 영적인 자질의 바로 그 화신임을 알고 있습니다. 한 목사님은 이제 한국에서 종교계의 민족적 보물로서, 살아 있는 개신교계의 성자로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90세 고령이신 그분에 대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권위 있는 기독교 지도력의 네 번째 특성인 자기비판의 능력입니다. 얼마 전 그는 이것은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마 여러분 대부분은 내가 말하고 있는 사건에 대해 알고 계실 겁니다. 베를린에서 템플턴상을 수상한 뒤 6월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즉시로 100만 달러가 넘은 상금을 북한에 교회를 재건하는데 기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락교회 주최로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영예를 얻고 사람들의 아첨을 즐기는 때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러한 자리였을 겁니다. 식사를 한 뒤에 축하연설이 뒤따랐습니다. 그가 연설할 차례가 되었을 때 한 목사님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는 진정으로 다른 어떤 것을 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바로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자기비판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경이롭고, 거룩한 사람이 용서를 빌었던 것입니다. 조용히 숨죽인 가운데 그는 축하하러 모인 사람들 앞에서 그가 거의 60년 동안 비밀스럽게 간직해 오던 그의 영혼의 깊은 상처와 짐을 털어놓았습니다. 나는 그가 의식적으로 그날 저녁에 이러한 말을 하려고 의도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것이었습니다.

1935년 일제 조선 총독부는 학생과 공무원들에게 신사참배 의식에 참여할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이 법에 따르느니 차라리 교회의 문을 닫겠다 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학교와 교회의 문을 닫았습니다. 많은 외국인 선교사들이 추방되었고, 수천 명의 목회자들이 1935년에서 1938년 사이에 체포를 당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죽음으로서 순교의 길을 택한 용기 있는 목회자들까지 있었습니다. 한 목사님은 아주 많은 기독교 교우와 동료 목사들의 체포와 죽음 을 가져온 그러한 신사참배의 강요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을 하지 못했다는 깊은 죄의식을 늘 가지고 있었노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랜 뒤에 그는 이러한 숨겨 놓은 슬픔을 공개했습니다. 너무나도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 그 같은 고백을 한 것입니다. 얼마나 희생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입니까! 진정 성자만이 이러한 지극한 겸손과 심오한 자기비판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경직 목사님을 남녀노소 불문한 모든 기독교인들의 지도자가 되게끔 한 까닭입니다. 가장 고귀하고, 가장 순수하며,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신"우리의 살아 계신 주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가장 대표적인 본보기였던 것입니다.

이제 오늘 나의 발표를 결론 맺고자 합니다. 나는 한국에서의 산프란시스코 에큐메니칼 목회학박사 연구과정이 기독교 지도력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감사, 겸손, 희망, 자기비판의 네 가지 자질을 불어넣고 키우는 프로그램으로서 지속될 것은 믿고, 또 기원합니다. 이 회의에 일원으로 참석하게 된 것은 영광이고, 특권이자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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