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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고자질, 그리고 음모 (요한복음 11:44-57)

by 【고동엽】 2022. 9. 21.

믿음, 고자질, 그리고 음모  (요한복음 11:44-57)

문제를 바라보는 두 가지 태도 삶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여러 가지 문제들이 도전해 옵니다. 출생, 양육, 학교, 진학, 취업, 결혼, 직장, 자녀, 퇴직, 노후... 아마 이제까지 여러분들이 살아오신 날들을 뒤돌아 본다면, 문제없는 날들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두 가지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첫째는 긍정적인 사람, 또 하나는 부정적인 사람! 긍정적인 사람은 어떤 어려움을 만나든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적극적으로 해결방법을 찾습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 미래지향적이고 희망적입니다. 지금의 이 어려움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그리고 이 어려움을 이겨내면 반드시 밝은 날이 올 것을 믿습니다. 반면에 부정적인 사람은 문제를 만나면 겁부터 먹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과거지향적이고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그 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러면서 점점 더 문제에 빠져들어갑니다. 미래를 보지 못하고, 과거를 보고, 후회만 하다가 결국 포기합니다. “난 못해. 난 할 수 없어!”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한 것 같으십니까? 예수님은 어느 편에 속하신 것 같습니까?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세 가지 명령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어느 편에 속하셨는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말씀하신 세 가지 명령을 보면 문제를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지? 아니면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과거지향적인지!
예수님의 첫 번째 명령이 무엇입니까? 39절. “돌을 옮겨 놓으라” 이 돌이 무슨 돌입니까?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을 막고 있는 돌!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장애물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기적을 가로막는 돌을 치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기적은 바라면서도 그 말씀은 안들으려고 합니다. 아무도 돌을 치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건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돌을 옮겨봐야 뭐하냐? 장애물을 치워봐야 뭐하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헛일이다! 이것이 믿음 없는 사람들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려주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 복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장애물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치워야 합니다. 여러분의 내면에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기적같은 축복을 거부하는 장애물들을 치우십시오. 쉽게 말해서 안된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예수님의 두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43절. “나사로야 나오라” 어떤 소리로? 작은 소리가 아닙니다.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음을 향해, 무덤을 향해, 문제를 향해 큰 소리로 명령하셨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죽었던 나사로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무덤 속에서 썩은 내가 나던 바로 그 문제가 기적이 되고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 문제 덩어리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믿음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야 말고 하나님이시고 생명을 주시는 부활의 주님인 것을 증거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기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나는? 믿음을 가지고 장애물만 옮겨 드리면 됩니다. 불신의 돌을 치워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 모세처럼 믿음으로 홍해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명령은 무엇입니까? 44절.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믿음으로 돌을 옮겨 놓고, 예수님의 명령을 들었더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죽었던 몸은 베로 감겨져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여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사로의 몸에 감겨 있는 베를 풀어주고, 얼굴에 수건을 벗겨서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 명령하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첫 번째 장애물을 굴리고, 기적처럼 예수님의 생명을 맛보며 예수 믿고 있지만, 세 번째 장애물, 나를 옭아매고 있는 모든 죄의 습관, 세상적인 문화, 가치관, 이 모든 것들을 풀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당당하게 이 세상을 걸어다니며 빛이 되고 생명을 주는 사람이 되고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 가지 명령을 꼭 기억하십시오. “돌을 옮겨 놓아라! 나사로야 나오라!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그리고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적극적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한계에 도전하며 기적을 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종류의 사람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어서 냄새나는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한번 여러분이 거기 있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모습이 상상되십니까? “죽은 자가 살아났다! 예수가 나사로를 살려냈다! 나사로 좀 만져보자! 나사로 맞아?”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엄청난 기적에 사람들이 다 입이 딱 벌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와~ 정말 기적이다! 예수님은 정말 대단하다! 예수님은 정말 특별하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정말 누구이신가?” 그리고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그 부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야겠다”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부활을 목격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더란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습니다. 자기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부인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세 종류의 사람들을 볼 텐데, ‘과연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인가?’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
첫 번째, 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의 사람입니다. 45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이 유대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죽은 나사로의 일로 마리아와 마르다를 위문하러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상식에는, 그들이 이제까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이성적인 판단에 의하면 결코 죽은 자가 살아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나사로는 수건을 감은 채 걸어나왔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사로야 나오라!”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이성과 상식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요? 이제까지 결코 경험해 본 적이 없는 기적을 경험했기 때문에...
사람은 처음에는 상식으로 믿습니다.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야 믿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고 연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멈춰서는 안됩니다. 반드시 그 이성의 한계를 뛰어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기적의 경험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이성의 벽 너머 무한히 펼쳐진 믿음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 믿음의 세계가 보이십니까? 그 기적의 세계가 보이십니까? 오늘 이 사람들은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의 현장을 보고, 이성과 상식에 큰 충격을 받고, 예수님을 믿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자질의 사람
두 번째, 46절.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어떤 사람들이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고 고자질하는 사람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그 기적의 현장에 생생한 증인입니다. 죽은 나사로가 걸어나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보고 나서 쪼르르 누구에게 달려갑니까? 바리새인들에게!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미워하고, 반대하고, 도전하고, 죽이려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시는 기적에 대해 불신하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을 찾아갔을까요? 바리새인들에게 호통치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분명히 알라고 경고하려고 찾아갔습니까? 아닙니다. 고자질하는 겁니다. “예수란 사람이 오늘 이러 이러한 기적을 행했다!” 그런데 정작 나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쪽으로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도 있고, 예수님에 대해 알아가고 싶은데, 또 한 쪽으로는 이 세상에 기득권을 꽉 쥐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바리새인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정말 믿을 것인가? 아니면 바리새인들 아래서 현실적인 삶을 살 것인가?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을 부인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 이제부터 예수님 믿겠다!’ 이렇게 하지도 못하는 사람입니다. 현실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는 사람들! 믿음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음모의 사람들
자, 세 번째! 47-48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어떤 사람들입니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진실과 진리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가 정말 죽은 나사로를 살렸냐?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는가? 예수님이 정말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오던 메시야가 맞는가? 여기에는 관심이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그들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란 사람이 어디에선가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사람들을 모아서 이리 저리 끌고 다닌다! 그리고 하늘에서 떡을 내리고, 병자들을 고치고, 가는 곳마다 기적을 많이 행하는데, 너무 너무 골치가 아프다’는 것입니다. 왜 골치가 아픈가? 사람들이 자기들을 따르지 않고 예수를 따르기 때문에... 그래서 이 문제를 종교적인 큰 문제로 삼고, 자꾸만 예수를 흠집 내고, 종교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사람들에게 그를 따르는 사람은 출교당할 것이라고 협박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들을 우러러보고 자기들을 따라야 하는데, 예수가 자기들이 종교적인 기득권을 지키는데 방해물이 되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실상은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을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흠집 내고,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가를 부각시키려 하고, 교회의 문제를 들춰내려하고, 기독교를 흠집 내고, 이리 저리 비리를 캐서 기독교가 마치 커다란 문제 집단이고, 이익집단이고, 자기들만 아는 독선적인 집단으로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죽이고 기독교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는 두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48절.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둘째 이유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47절에 보면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라고 했는데, 공회는 이스라엘의 최고 정치 회의입니다. 이들은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의 통치권을 위임받아서 현재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입니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 때문에 자기들이 쌓아온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생겼으니, 어서 빨리 예수를 죽이자! 이런 겁니다. 진리가 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실이냐 아니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의냐 불의냐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 예수만 사라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하나가 됩니다. “예수를 체포하자! 예수를 제거하자! 예수를 죽이자!”

여러분은 이 세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디에 속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알게 되고, 이성과 상식을 떠나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참으로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지만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겠고, 늘 부정적이고 회의적이고, 성경을 많이 알기는 아는데 믿어지지는 않고... 늘 확신이 없이 죄를 끊지 못하고, 한발은 세상에 한발은 교회에, 믿는 것 같다가도 또 세상 속에 죄악 속에 빠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회개하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두 마음을 품지 않도록 십자가를 꽉 붙들어야 합니다. 내가 누군지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 예수님만 믿으며 살기로, 순종하며 살기로, 죄악을 끊고 살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혹시 나는 음모의 사람은 아닌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예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오직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목적으로, 또는 나는 이익 때문에 예수를 핍박하고, 진실을 억눌러 버리고, 약자를 억압한다면, 이런 사람은 마음 속에 음모가 가득찬 사람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합니다. 은혜를 체험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맛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마음 속에 자꾸만 의심과 회의가 든다면 확신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사랑을 체험하고 생명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야바의 예언
이렇게 예수님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는 가운데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예언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을 통해 흘러 나옵니다. 49-50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예언은 쉽게 말해서 예수님을 죽이자는 의도에서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그대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온 세상 모든 민족, 모든 사람을 위하여 대신 죽으심을 통해 모든 민족이 망하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을 해설해 주는 51-52절을 보겠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가 그 해에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입을 통해서 자기도 알지 못하는 말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첫째, 이 말은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 둘째, 예수님이 온 민족을 위하여 대신 죽으실 것을 미리 예언한 것이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악한 일을 계획해도, 악한 음모를 꾸며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53절.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조직적으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진행되게 되었습니다.

에브라임으로 물러가신 예수님
자, 그러면 예수님은 이러한 무시 무시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분명히 아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54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음모의 중심지를 떠나 빈 들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음모에 유연하게, 또 지혜롭게 대처하셨습니다. 나약해서? 용기가 없어서 물러나신 것이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께는 십자가라는 분명하고도 중요한 목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목표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 승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뒤로 물러가기도 하시고, 홀로 산에서 기도하기도 하시고, 사람들로부터 떠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데모나 투쟁이나 혁명의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음모를 캐야한다고 선동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위대한 투쟁, 가장 위대한 혁명, 가장 위대한 복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마치 그들의 음모에 의해 십자가 위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십자가를 통해 사랑의 혁명, 용서의 투쟁, 복음의 혁명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55절부터는 예수님께서 죽으실 유월절이 가까워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고 있고, 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결코 예수님이 그립고 보고 싶다거나, 설교가 듣고 싶어서가 아니라! 57절처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잡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점점 십자가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결 론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예수님 믿는 것을 아주 하찮게 여깁니다. 교회만 세우면 부흥하던 황금기는 지나고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도전하고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붕괴시키려는 세력 앞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 어떻게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까? 첫째, 돌을 옮기는 부활신앙입니다. 둘째, 이 세상의 어떠한 도전 속에서도 결코 나의 믿음을 흔들 수 없는 체험신앙입니다. 이성과 상식,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는 세상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게 하고 복음의 능력을 맛보게 하는 체험신앙으로 강력하게 도전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며 순교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음모를 뛰어넘어 사랑의 혁명, 복음의 혁명을 위해 생명을 걸고, 목숨을 바쳐 희생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온 땅에 퍼져가는 것입니다. 부활신앙, 체험신앙, 십자가의 신앙을 소유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성기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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