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공경의 대상 (출 20:12)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오늘 온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서 예배드리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보기가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이 복이고 은혜이고 진정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낙원을 말하고 천국을 말 하는데 이것이 천국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한 의자에 앉아서 하나님께 같은 마음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이 보통 은혜입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소중한 복된 일인지를 잘 모릅니다. 세상에는 형제도 소중합니다. 자식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부모는 더 소중합니다. 어버이, 부모, 어머니, 아버지, 얼마나 소중한 단어들입니까. 그중에도 “어머니”라는 단어는 참 정감 넘치고 달콤함을 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늘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부모는 마땅히 공경 받아야 할 대상입니다. 거기에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존재들 가운데서 절대 대변하고 나서신 대상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모들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했습니다. 또 에베소서 6:1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절대 명령”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절대명령이 잘 이행되는 가정은 건전한 가정입니다. 이 절대명령이 잘 이행되는 사회나 나라도 건강하고 건전한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 그런 가정, 그런 사회는 분명 건강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이것이 잘 안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사회가 이렇게 부실하고 가정이 부실한 것입니다.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권고사항을 지키면 복을 받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하나님은 부모 공경하는 일을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도리”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삶은 기본이고 예의이고 마땅히 할 일 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도리입니다. 짐승은 새끼가 커서 힘이 생기면 어미를 물어뜯습니다. 짐승이니까 그렇습니다. 짐승에게는 그런 분별의 이성적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식이 힘이 생기면 부모는 늙어서 힘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힘이 없어진 부모를 자식이 공경하고 받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버리는 부모도 있습니다. 고아원에 버리고 집에 놓고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이이들이 눈물을 흘립니다. 길을 헤맵니다. 동심에 멍을 들게 합니다. 어떻게 자신이 낳은 어린 아이들을 길에 버립니까. 그리고 밤에 잠이 오며 밥이 목에 넘어갑니까. 참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그 부모가 복을 받겠습니까. 또 자식들이 노부모를 버리기도 합니다. 산에 버리고 노인보호소에 버리고 집에 있어도 관심두지 않고 방치합니다. 옛날에 고려장이 있었다지만 이것이 오늘의 고려장입니다. 참 말세입니다. 지극히 기본적인 도리마저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일어나고 있는 불행한 일들입니다.
엊그제 어느 노모가 버려졌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그 노모에게 이름, 주소, 전화번호를 말하라고 해도 한사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노모는 자식이 자신을 버리고 간 것을 압니다. 그런 자식이 괘씸하고 분노스럽지만 노모는 자식이 혹시 다칠 까봐 끝까지 주소도 모르고 자식도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부모입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런 노모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참 불행한 시대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기본적인 인간의 도리마저 지켜지지 않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제는 세상도 병들고 사회도 병들고 자식도 부모도 병들어버린 세상입니다. 사람이 얼마나 병들면 자신의 부모를 버리고 자신이 낳은 자식을 길에 버립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부모 공경하는 일을 계명으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명령으로 계명화 해 놓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부모 공경은 자녀의 도리입니다.
“산 교육”
부모는 최선을 다해서 공경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모공경하기를 “하나님께 하듯” 하라고 했습니다. 먼저 믿은 신앙인이 믿음 생활하는 것을 보고 후에 믿은 사람들이 그대로 믿음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 생활은 어려서부터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보고 들은 것이 있기 때문에 신앙생활의 폼이 만들어져 건전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젊은 부부가 늙으신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을 아이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은 자라면서 그 모습을 보고 자라게 됩니다. 그래야 후에 그 아이들도 자신을 그렇게 공경하게 됩니다. 그것이 교육이고 훈련이고 모범을 보이는 산 교육입니다.
그런데 오늘 젊은 부부들이 이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멀리 떨어져서 살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이 전통이 더 이상 이어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늙으면 아이들이 본 것이 없기 때문에 자신도 그렇게 소외당하고 외면당한 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들은 자신들은 그렇게 하고 자기 자식만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음도 참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내 자식만은 안 그럴 것 같지만 그것은 지나친 믿음입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인류문명은 그런 전수하는 과정을 거쳐서 예법이나 전통이나 도리라는 정신이 그대로 전수되어 전달되어 갔습니다. 부모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극진히 공경하면 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랍니다. 그러면 내 자식들은 또 후에 그대로 하게 될 것이고 또 그 손 자녀들은 그대로 본받고 자라서 그대로 행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계속되어 전수됨으로서 하나의 전통이 만들어지고 도리라는 문화와 가계가 만들어져서 그 사회의 고유한 전통으로 이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되어야 그 세상이 건전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젊은 세대는 이것을 너무 경하게 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공경은 부모공경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산 교육입니다.
“복을 받는 비결”
부모 공경하는 일에는 하나의 보상의 법칙이라는 프리미엄이 들어 있습니다. 부모 공경하는 일에 성경은 보상을 세워놓으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준 땅에서 오래 살리라”고 약속하신 것이 오늘 읽은 본문의 약속입니다. 에베소서 6:1절을 보면 “자녀들아 주안에서 너희 부모를 공경하라 이로서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약속했습니다. 부모 공경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일에 무슨 상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모 공경하기가 참 어렵기 때문에 상이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부모를 극진히 공경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어야 합니다. 충분히 상을 줄 이유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는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노부모가 치매에 걸려 자꾸만 집을 나가시는 부모를 공양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수다가 심한 노부모를 극진히 공양하는 일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심한 부모를 모시기는 더욱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부모 공경하는 일에 예부터 상이 주어졌습니다. 효자 상을 주었고 효부 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효자동이라는 동네도 탄생되었습니다.
어느 가난한 집 아들이 홀아버지를 지극히 공경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늙은 아버지가 어린 손자와 함께 자다가 어린 손자를 그만 깔아뭉개서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침 문안인사차 아버지 방에 들어가 보니 늙으신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주무시고 있고 어린 아들은 죽어 있었습니다. 늙으신 아버지가 알면 상심하실까봐 걱정하면서 죽은 어린 아들을 들고 나오면서 괜히 할아버지께 심려를 끼쳤다고 죽은 어린아이의 따귀를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죽은 어린 아들이가 그만 재채기를 하면서 깨어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이 퍼지면서 마침내 임금님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되어 나라에서 상을 크게 내렸고 사람들은 그 효자가 사는 동네를 효자동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오늘의 효자동입니다.
세상뿐만 아니고 부모를 공경하면 하늘에서도 복을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내가 준 땅에서 네가 오래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부모 공경하는 일은 하늘에서도 보시고 상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레갑의 자손이야기가 나옵니다. 레갑이라는 사람에게 요나답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여호나답이 아버지 레갑을 지극히 공양하고 후대를 위해서 교훈을 내립니다. 그래서 요나답이 자손들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욕심스럽게 땅을 사지 말고 큰 집을 짓고 살지 말라는 가풍을 만들어 전해줍니다. 그랬더니 그 후손들이 그 뜻을 받들어 자자손손이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평생 천막생활을 고집합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바알신앙이 성행했을 때 그 자손들의 신앙타락을 막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련 없이 천막을 거둬들고 피난 가서 화를 면하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그 자손들을 보시고 하나님도 그 자손들의 그 깊은 뜻을 높이 평가하셨습니다(렘 35:14).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이 레갑의 자손을 아주 칭찬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하나님은 그 자손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식이 복을 받습니다. 천하없어도 부모에게 불효하는 자식은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부모는 자식에게 공양 받고 효도하기만을 기다리면 안 됩니다.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를 공경하게 해서 복을 받게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부모의 역할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공경해서 이 약속된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는 자식으로 하여금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게 됩니다. 자식으로 하여금 불효자가 되지 않게 하려면 오늘 부모들은 적극적으로 할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것이 노년생활을 규모 있게 운영하고 유지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부모는 근검절약해서 노년에는 조그만 재산권이라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오늘은 재산이 자식으로 하여금 효자 되게 만드는 시대입니다. 자식들이 물질 없이도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오늘 이 시대는 그 원칙이 이미 깨어진 시대입니다. 하나님이 명령으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지만 오늘 자식들은 그 명령을 존중하지도 않고 지키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식들이 타락하지 않게 하고 부모를 경하게 여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부모 스스로가 자신들의 입지나 노년의 관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들이 불효자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자기관리입니다.
또 부모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일찍 물려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는 것입니다. 일찍 물려주면 자식들이 부모를 너무 일찍 잊어버립니다. 엊그제 어느 노모가 탄식을 했습니다. 아들에게 땅문서를 등기 이전해 주었더니 그날로 어머니를 대하는 태도가 돌변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자식들이 이렇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는 어느 정도 주고 나머지는 집한 칸이라도 명의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식들이 불효자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부부가 언젠가 헤어질 때가옵니다. 부부 중에 십중팔구는 남편이 먼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면 자식들이 어머니를 우습게 여깁니다. 이 자식들의 생리가 그렇게 생겨 먹었습니다. 늙은 아내가 자식들로 하여금 무시당하지 않고 살게 하려면 집문서를 아내 손에 쥐어주고 죽어야 합니다. 어머니가 그 문서를 쥐고 있는 한 자식들은 아버지가 계실 때처럼 어머니를 공경하게 됩니다. 그래야 자식들이 불효자가 되는 길을 막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무조건 자식들에게 주는 것이 자식사랑이 아닙니다. 다 주고 나면 자식들이 본의 아니게 불효자가 되어버립니다. 이것도 부모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살다 보면 어머니도 돌아가실 날이 옵니다. 어머니의 임종이 가까워 오게 되면 자식들의 효성도 극에 달하게 됩니다. 아침 조석으로 집에 찾아옵니다. 그래도 그 모습에 감동받아 가지고 있던 집문서를 자식들에게 주면 안 됩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고 사람이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면 하나님은 갈 시간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인생을 정리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때 목사님을 초청해서 그 집문서를 내 놓으십시오. 내가 임종하게 되면 이 문서로 영감과 내 이름으로 기념 예배당 하나를 지어달라고 말입니다. 오늘 어느 정도 집한 채면 기념 예배당 하나쯤 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의 종말의 모습이고 신앙인의 죽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생을 아름답게 정리했다면 죽는 순간이 얼마나 만족하고 마음 부듯하고 즐겁고 행복하겠습니까. 그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죽는 순간이 그렇게 두렵고 외롭고 떨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자식들은 그동안 헛수고 했다고 아쉬워하겠지만 그것이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자식들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부모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이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 할 일 아닙니까. 자식사랑은 무조건 주는 것만 자식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식사랑은 자식들이 부모가 죽은 후에라도 이 땅에서 계속해서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 놓는 것이 진정으로 부모가 할 일입니다.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삶이 따로 있습니다. 신앙인은 신앙인의 삶을 살다 신앙인의 죽는 모습을 따라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자식들은 그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할 것입니다. 공경과 존경은 시켜서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부모만한 후견인이 없고 부모만큼 나를 사랑하는 분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염려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내 부모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 부모님이 살아계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감격할 일입니다. 마땅히 순종하고 공경해야 할 대상입니다. 여러분, 부모는 자식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늙으신 내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창창한 인생에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일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이루며 살아가는 신앙인의 삶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 같은 은혜가 함께 주어지시길 부탁드립니다.
출처/이정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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