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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제자

제자의 삶 (누가복음 9:57-62)

by 【고동엽】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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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의 삶   (누가복음 9:57-62)

유명한 교육 심리학자인 지미 도브슨은 기어 다니는 아이를 관찰하여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먼저 체념형이 있습니다. 기다리다가 장애물을 만나면 멈추어 앉아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앉는 형입니다. 이런 사람은 비관론자요 운명론자요 자탄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두 번째 형은 도피형입니다. 장애물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도피합니다. 이런 사람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인정은 받으려고 하나 그에게 주어진 책임은 지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장애물을 만나면 그 장애물을 치우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까지의 고단한 삶을 통하여 체험해 온 것처럼 우리의 삶은 가시밭길을 맨 발로 걷는 것 같은 고통의 연속입니다. 그 고통스런 삶의 무게에 짓 눌려 아예 그 인생을 비관하여 포기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삶의 무게가 이렇게 무거워서 각자가 각자에게 맡겨진 인생을 살아가는 것 자체도 벅찬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간다는 것은 제 살을 깎아 남을 주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제자’입니다.
예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십자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도중 사마리아 한 촌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사마리아 사람들의 배척으로 다른 한 촌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예수의 놀라운 이적과 권능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왔습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유형의 사람들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들에게 대답한 말씀을 통해서 참된 제자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은혜를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1. 제자가 되려면 역경과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저는 해방되기 바로 직전에 태어났습니다. 6.25가 있었던 50년대에 성장기를 거친 이 땅의 모든 어린이들이 그렇듯 저 역시 정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그 당시의 모든 어린아이들의 꿈이 ‘배터지게 먹는 것’이었듯, 저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부자’가 되어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새마을 노래)가 소원이었습니다.
우리 집의 가난은 흥부의 가난과 비슷했습니다. 흥부가 아내와 자식들의 보챔에 하는 수 없이 초라한 치장을 차리고 형님 전에 찾아가서 형님한테 욕만 먹고 쫓겨 날 때 마침 형수가 밥을 푸고 있어 여러 날 굶은 창자에 밥 냄새 맡으니 오장이 뒤집혀 형수한테 “아이고 형수씨 밥 한 술만 주오” 하고 부엌에 뛰어들어가니, 형수 또한 심보가 고약한지라 “남녀가 유별한데 어디를 들어오노”하며 밥주걱으로 흥부의 오른 빰을 때렸습니다. 흥부의 두 눈에 불이 화끈거려 빰을 만지니 밥이 볼따구에 붙어서 하는 말이, “아주머님은 뺨을 쳐도 먹여 가며 치시니 고마운 말을 어찌 다 하오리까.”
“발을 뻗으면 발목이 벽 밖으로 나갈 지경이고, 지붕 마루에 별이 보이고, 비가 오면 굵은 빗방울이 방안에 샐”(흥부전) 정도로 가난하여 장에 갈 엄두를 못 내는 우리 집인데도 어머니는 목사님이 심방 오실 때면 반드시 시내 장터에 나가 꼭 소고기와 생선을 사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결심했습니다. ‘목사가 돼야지.’
어릴 때의 저와 같은 마음에서 예수를 쫓으려는 사람이 예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께 와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쫓으리이다(57)”하며 제자가 될 것을 청하였습니다. 서기관은 어릴 때의 저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명예와 영광의 길인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은 명예와 영광의 길과는 거리가 먼 길입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예수님의 이적과 행적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반갑게 맞아들여 온갖 진미로 예수와 그들을 맞이할 줄 알았던 야고보와 요한은 도리어 예수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냉냉하게 배척을 받자 얼마나 그 충격이 컸던지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하고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에 걸 맞는 대접이 있기를 은연중에 갈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의 길은 대접 받는 길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처지를 두고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굴과 둥지로 상징되는 ‘최소한’의 세속적 안락함도 그 제자에게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제자는 그런 최소한의 세속적 안락함도 허용되지 않아서 ‘머리 둘 곳’조차도 없습니다.
이러한 ‘머리 둘 곳’조차도 없는 제자의 삶인데도 불구하고 역사를 통하여 위대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요? 죽도록 고생만 할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예수의 삶에 감동하여 그 분의 ‘제자’가 되려고 하는 것일까요?
서구 지성사에서 기독교를 가장 혐오한 사람 중의 하나가 바로 니체(Nietzsche)입니다. 그는 직선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합니다. “나는 기독교를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거짓말보다도 가장 치명적이며 유혹적인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가장 위대하며 가장 불경스러운 거짓말이다” 우리 기독교는 ‘낙심하고, 병들고, 쇠약하고, 연약하고,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줍니다. 그러나 니체가 보기에 이런 기독교의 자비는 ‘유럽 인종의 퇴보’만을 불러 왔습니다. 그가 보기에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가두는 새장을 만들었습니다. 인간을 꼼짝 못하게 가두는 새장 중의 하나가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가두어 퇴보시킵니다. 니체는 감성적이고 의지적인 인간적인 삶의 이쪽 세계를 가짜라고 멸시하고 거부하면서 이데아의 세계, 하나님 나라만을 진짜로 본 플라톤이나 기독교주의자가 바로 그 새장을 만들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래서 그는 최종적으로 ‘신은 죽었다’고 말합니다.
니체가 말한대로 낙심하고 병들고 쇠약하고 연약하고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 대한 기독교적 위로와 희망이 그들을 ‘퇴보’시켰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퇴보시켰다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는 소망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활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 나라와 그에 대한 영적인 소망이 있었기에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제자가 되려한 것입니다. ‘퇴보’된 것이 아니라 부활 안에서 ‘진보’된 것입니다. 고난과 역경에 억눌려 퇴보된 것이 아니라 부활이 주는 믿음의 희망 속에서 그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우리는 ‘진보’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들을 수동적 인간으로 만들어 그들을 무기력하고 방관적인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을 긍정하고 적극적으로 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용기와 희망을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비밀이 있습니다.

2. 제자가 되려면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매진해야 합니다.

진정한 제자 될 생각 없이 ‘마음은 콩 밭에 가 있는’ 서기관과는 달리 예수의 제자가 되려고 ‘마음먹고’ 찾아온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정말로 제자가 되려고 ‘마음먹고’ 찾아온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부친의 장례식이 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그 경황에도 시간을 내어 예수의 제자가 되려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마음먹고’ 찾아올 정도로 각오가 대단한 사람인지라 부친상을 치른 후 따르겠다는 그의 요청을 당연히 예수님은 허락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라”(60절)고 하셨습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때에 부모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하여 일을 그르친 사람이 우리 역사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관동 의병장 이인영입니다. 을사 조약 후 그 조약에 반대하여 민종식이나 신돌석 같은 수 많은 의병이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 일제에 항거했습니다. 일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각지의 의병들이 모여 마침내 1907년 말 - 1908년 초 연합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기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약 l만여 명에 이른 13도 의병들의 총대장은 이인영이었고, 허위는 군사장이었습니다. 마침내 1908년 서울로 진공하려는 차에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불효는 불충이라면서 지휘권을 허위에게 맡기고 귀향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의병 연합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은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무위로 끝나 버렸습니다.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던 조선 시대를 생각하면 이인영의 태도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효경(孝經)에 효(孝)는 덕지본야(德之本也), 즉 효는 덕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고 백덕지원(百德之源)입니다. 효는 백행지근본야(百行之根本也)이며 孝子之事親也(효자지사친야)에 居則致其敬(거즉치기경)하고 養則致其樂(양즉치기락)하고 病則致其憂(병즉치기우)하고 喪則致其哀(상즉치기애)하고 祭則致其嚴(제즉치기엄)이니라. 즉 효자가 어버이를 섬기는 것은 기거하심에는 그 공경을 다하고 봉양함에는 그 즐거움을 다하고 병이 들면 그 근심을 다하고 돌아가시면 그 슬픔을 다하고 제사지낼 때에는 그 엄숙함을 다해야 한다고 배운 이인영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하십니다. 제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가장 필수적이고 근본적이라고 생각되는 관혼상제(冠婚喪祭)가 아닙니다. 제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 전파’입니다. 제자가 먼저 구할 것은 ‘관혼상제’로 표현되는 인간의 필수적인 욕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3. 제자는 세상의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제자 지원자 중의 마지막 사람은 ‘가족’이 문제였습니다. 최소한 가족이나마 만나 본 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62) 쟁기를 잡고 뒤를 보는 것은 운전하면서 뒤를 보고 운전하는 것이나 똑 같습니다. 앞을 볼 때만이 제대로 된 이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을 염려하여 일을 그르치는 ‘가족주의적 사고’는 우리가 제자로 살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이런 가족주의적 사고의 위험성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 사람이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입니다.
제갈공명은 위나라 군사를 격파하면서 북진하다가, 기산(祁山) 벌판에서 사마중달의 20만 군대와 대치했습니다. 공명에게는 식량 보급로의 요충지인 가정(街亭) 땅의 수비가 큰 문제였습니다. 공명의 절친한 벗인 마량(馬良)의 어린 동생으로서, 재주와 능력이 뛰어나 공명이 매우 아끼던 마속이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공명은 삼면이 절벽인 가정의 산기슭을 지키라고 명한 뒤 마속을 가정으로 보냈으나 그는 적을 유인해 역습하겠다고 하면서 산꼭대기에 진을 쳤습니다. 위나라 군사가 산기슭을 포위하자, 식수가 끊긴 마속은 전병력을 휘몰아 포위망을 돌파하려 했으나 결국 참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마속 같은 유능한 인재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는 측근의 말을 물리치면서 마속의 목을 베도록 명령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적에 손무자가 천하를 제승한 것은 법을 밝게 쓴 때문이요. 이제 사방이 전쟁을 하여 교병을 하는 이 마당에 만약, 법을 폐한다면 어찌 적을 멸하겠소. 당연히 참해야 하오.”
이것이 읍참마속(泣斬馬謖)입니다. 공명은 법의 엄정함을 보이기 위해 가족과도 같은 마속의 목을 울면서 베어 사사로운 개인적인 정을 끊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군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유명한 리더쉽의 대가 스티븐 코비는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라는 책에서 “우선적인 일을 구분하는 일”을 중요하게 다루었습니다. 제자는 우선적인 일을 구분하고 그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두 번째 사람과 세 번째 사람은 그 일을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나로 먼저’ 부친 장사와 가족 작별을 하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이들은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분별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예수의 제자이며 군사된 우리가 먼저 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일입니다. 세상적인 그 어떤 일보다도 제자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자가 되려면 역경과 고난을 감수해야 하고, 우선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에 매진해야 하고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한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군사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군사는 오로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제자의 삶입니다.

출처/전병금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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