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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제자

설명이 붙어있는 제자들 (마가복음 3:16-19)

by 【고동엽】 2022.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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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붙어있는 제자들  (마가복음 3:16-19)  

지난주에 제자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자다운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영적 수준을 높이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열 두 제자의 이름 중 설명이 붙어있는 제자를 살피겠습니다. 특별한 설명이 붙은 제자들입니다. 마가복음만의 독특한 것이기도 합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셨고”

그 하나가 시몬인데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주셨습니다.
16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요한복음 1장에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또 마태복음 16장에서도 그의 이름의 의미를 보여주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는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아니 평범 이하의 사람, 보통 이하의 사람일지 모릅니다. 갈릴리에서 물고기 잡으며 사는 주목받지 못하던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4:13에 의하면 학교를 다닌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이 적당하지 않았지만 주님은 이 이름을 주시면서 그의 앞날을 열어주셨습니다.

결국 시몬은 그 이름에 맞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어디서나 가장 먼저 언급되는 훌륭한 제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름처럼 반석 역할을 하는 제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비전을 주십니다. 그런 비전 때문에 놀라운 일을 하게 하십니다. 제자란 그런 것입니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주님 만나 제자로서 훈련을 받으면 큰일 할 수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주님 만나니 비전이 생기고 소망이 커지고 꿈이 생깁니다. 주님 안에서 반석 같은 중요한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고”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도 이름을 하나 붙여주셨습니다.

17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보아너게는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왜 이런 이름을 붙여주셨는지 궁금합니다.

누가복음 9장 51-56절에 보니 주님이 사마리아 촌에서 배척을 당했을 때 이 형제는 주님께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다 태워버리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이런 자들이었습니다.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고 말할 만큼 과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레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덧붙여주시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런 제자들이 변합니다.

요한과 야고보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중요한 제자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제자는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 세 사람 뿐입니다.

우선 야고보는 사도행전 12장에서 제자 중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면서 주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을 보여준 사람이 됩니다.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3장에서 등장하면서 최초의 표적을 행하는 자가 될 뿐 아니라 사랑의 사도가 됩니다. 요한은 그의 서신에서 사랑을 강조한 제자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사랑만을 설교하는 제자였으며 제자 중 가장 오래 산 분입니다.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릴 만큼 과격한 성품의 소유자들이 이렇게 변화될 수 있음을 깨우쳐줍니다.

이런 변화에는 부모님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우선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임을 복음서는 보도합니다. 주님께 부름 받을 때도 아버지와 함께 물고기를 잡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들은 아버지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가 주님의 부름 앞에 아들들을 그냥 보내드렸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이야기도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20:20이하에서 어머니는 아들들을 위해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우레의 아들로 불릴 만큼 아들들이 부족함을 잘 아는 어머니는 자식들을 위해 주님께 나와 특별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물론 이 어머니의 간구는 주님의 마음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주님께 부탁드리는 이 뜨거운 자식 사랑은 귀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 어머니의 기도와 주님께 아들들을 부탁하는 열정은 후륭한 아들들이 되게 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질, 우리의 원래 생겨먹은 것은 문제가 많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레의 아들 같은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을 제대로 만나 제자로서의 훈련을 받을 때 놀라운 일을 하게 하십니다. 부모의 기도와 사랑이 또한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마지막으로는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그냥 “예수를 판 자”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19절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세 개의 복음서가 동일하게 예수를 판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제자로 시작했으나 실패자요, 배교자요, 배신자로 이름을 남기고 만 사람입니다. 이렇게 끝나는 제자, 실패자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유일하게 유다 출신이었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갈릴리라는 변두리 출신이지만 이 유다만은 가룟이라는 유다 지방 출신입니다. 예루살렘 서쪽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출신지도 괜찮은 사람입니다. 또 재정출납을 담당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신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로서 살기는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는 돈 몇 푼에 양심과 신앙을 팔아버리고 실패자가 됩니다.

성공 가능성이 누구보다 높은데 실패할 수 있습니다. 너무 잘나서 너무 다 가지고 있기에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러기에 아무 것도 없어도 좌절할 일 없습니다. 모든 것 다 가지고 있어도 교만하고 자신감 넘치게 살 수 없습니다. 너무 잘난 것은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길 것 같은 사람이 지고 질 것 같은 사람이 이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모습 그대로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오히려 강하게 사용하실 주님을 기대하십시오.




설명이 붙어있지 않은 제자들




이 네 제자 외에는 이름만 나옵니다.

이들은 가치없는 제자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붙어있지 않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훌륭한 제자로서의 삶을 살았습니다. 단지 성경이 이들 모두를 기록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이들이 있었기에 초대교회는 든든히 섰고 주님은 이 유명하지 않은 제자들을 통해 큰일을 도모하셨습니다.

유명해지는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얼마나 많은 유명하지 않은 분들이 귀하게 그 삶을 가꾸며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기여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몇몇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움직이는 매우 중요한 힘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많은 성도들입니다.

기도의 자리 묵묵히 지키고 계신 분들, 봉사의 손길이 필요한 때마다 그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조용히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귀하게 사용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분들을 존경합니다.

제자들, 그 이름만으로도 귀한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들의 삶과 흔적에 어떤 설명이 따라다닐지 생각해 봅시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따뜻한 기억으로 남을 수 있는 그런 제자의 삶을 살면 좋겠습니다.

출처/김관선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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