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자기 개혁의 의미(갈라디아서 2:17-21)

by 【고동엽】 2023. 7. 18.
처음 목차로 돌아가기

 

자기 개혁의 의미(갈라디아서 2:17-2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 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 면 내가 나를 범법(犯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廢)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Total Woman」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건 여사의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모건 여사가 결혼을 하고 살아본즉 남편의 일상생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생활을 통해서 남편의 성격을 바꾸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침이면 늑장을 부리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서 출근을 재촉했습니다. 또한 그날의 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적어서 지시하고, 꼭 해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거듭 당부하였습니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건 여사는 자기의 성격까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부부관계가 파멸에 이를 것 같아……' 그녀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남편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스스로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전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남편이야 일어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앞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저녁에는 남편이 일찍 돌아오든 말든 자기는 자기대로 정성껏 남편의 귀가를 대비하여 준비했습니다. 혹 남편이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있어도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설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자기편에서 생각을 고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생활해 나가느라니 남편의 생활태도가 서서히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소문나 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 한 양동이를 덮어씌울 만큼 괄괄하고 사나운 여자였습니다. 스승의 이 딱한 사정을 보다못한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지내지 마십시오. 차라리 이혼하시고 다른 좋은 여자 분을 만나 사시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 나도 내 아내의 불손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수양이 부족한 사람일세. 만약 지금의 아내가 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오히려 내 마음을 닦고 수양할 기회를 잃게 되는 셈이지. 그러니 아내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일세." 요즈음 우리는 전에 없이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위한 개혁이냐, 이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개혁이 잘살기 위한 것입니까? 보다 더 풍요해지기 위한 것입니까? 도대체 개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바로 서 있지 않기에 방법도 없고, 방법이 분명치 않기에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는 철학적 해답이 분명하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개혁을 위한 개혁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혁자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지 뭐'라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자는 것입니까? 개혁을 주도할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정말로 이 사람이다 할만큼 그렇게 대단한 개혁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십보 백보요, 거기서 거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개혁의 역사를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온 국민이 높이높이 쳐다볼 수 있는 개혁 지도자가 안 보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개혁을 몇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개혁'이라 하면 당연히 부패한 정치가, 돈 많은 사람, 권력자, 지성인 등 특수층의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개혁의 대상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은 또 어느 사람이 쫓겨났나, 어느 사람이 바뀌었나, 어느 사람의 부정이 드러났나?' 하고 이것을 단순한 흥밋거리로 보고 있습니다. 온 국민에게 개혁의 의지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 의식개혁이 먼저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개혁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마다 모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개혁만을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개혁만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강요합니다.

또한 개혁의 파급효과가 없고, 그 확산효과가 적어서 문제입니다. 일단 어디선가 개혁이 시작되면, 그 개혁적 의식과 역사가 온 국민에게 그대로 확 파급되고 확산되어나가야 할 터인데, '개혁'하면 그저 몇몇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끝나버리고 어느 제한된 구역에서 맴돌고 맙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언제 온 국민 하나하나가 '개혁? 그래, 이것은 내게 있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남의 개혁만 구경하고 있고, 여기서만 멈추고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세계를 고민한다던가, 인류를 염려한다던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던가 하는 생각에서 주장하고 창출해낸 개혁이 결코 아닙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외친 구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내는 정치개혁도 이루고, 문화개혁도 이루고, 사회개혁도 이루고, 세계마저도 개혁했습니다. 본래 이 역사가 그렇듯 거창하게, 세계 지향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한 크리스찬의 진실한 신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믿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원래가 믿던 사람입니다. 더우기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생을 바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이루어진 변화가 그 인격과 그 생활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놓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죄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남자 수도원이라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렇게 죄지을만한 사건이 없는데도 수도원에 있는 루터는 죄로 말미암아 고민합니다. 언제나 '내 죄, 내 죄, 내 죄, 말씀, 말씀, 말씀……'하며 살아갑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도대체 루터가 무슨 죄를 고백했다는 것인가 하고 궁금해서, 그 옛날 루터가 고백했다던 죄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보았지만 그래보았자 뻔한 일이었습니다. 전부가 그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세상으로 기우는 죄, 특별히 시기 질투하는 죄……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루터는 그 죄가 고민이 되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아침에 가고, 점심에 가고, 저녁에 가고… 어떤 날은 20여 회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가자마자 문을 두드려 신부를 불러놓고는 "내 죄를 고백하겠습니다"하며 한참을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나중에는 신부가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가져오너라"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죄로 괴로워했습니다.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는 죄 같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고해 받는 신부가 들으면서도 "그런 것이야 죄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죄로 생각했기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마땅히 이런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요,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요, 사회의 죄가 아니요, 세상의 죄가 아니요, 세상의 부정이 아닙니다. 내 죄, 오직 내 죄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실 때에 그 법정에서 친히 올라가셨던 계단이 있습니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녀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사람들을 보내어 뜯어다가 로마에 옮겨놓았습니다. 로마의 성계단 성전에 가보면 정말 나무로 된 그 때의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을 두고는 당시 신비로운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계단이라고 해서, 여기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회개하면 죄를 깨끗이 사함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2천년 된 이 계단을, 그 당시로 말하면 천 오 백년 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면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고 내려오고, 또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러나 아무리 오르내려도 이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릎으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던 루터의 귀에 번개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정신이 번쩍 납니다. 익히 읽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됩니다. 늘 듣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뜻으로 들려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 위대한 종교개혁은 바로 이 순간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루터의 자기 개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를 다 부정한 것이요, 의롭고자 하는 많은 노력까지도 포기한 것입니다. 죄인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공로 될 수 없고, 죄인 된 관계에서는 어떠한 의도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럴 때에 그 속에서 비로소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자기개혁, 이것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은혜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는 길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이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갈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이요,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오직 긍휼로'라는 말입니다. 곧 그 은혜와 그 긍휼을 그대로 내가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평생 믿던 그리스도이지만 그 그리스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2천 년 전의 예수가 아니요 바로 오늘의 예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요, 바로 내 생명에 직결된 예수입니다. 내 죄를 감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그 엄청난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오래 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오늘 내 사건으로 여기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나는 죽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서 내 모습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십자가를 쳐다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십자가를 향한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온전히 겸손하고 온전히 온유한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어떤 교리나, 제도나, 교권적인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는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말은 마르틴 루터의 입에서 처음 시작된 말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경, 오직 말씀, 오직 성경,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새사람이 됩니다. 어떤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어떤 인간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로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이것이 만인제사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직선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서는 것입니다. 동시에 남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사람이 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별칭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신학----여기서 자기개혁을 이루게 됩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날마다 세례 받는다'----계속적으로 옛사람으로 죽고, 계속적으로 새사람으로 살고, 따라서 날마다 세례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 개혁이 먼저 있기에 루터는 개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함의 용기가 있고, 이 권세의 용기가 있기에, 교회든, 정치든, 사회든, 문화든, 어떠한 문제든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개혁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자기개혁 없이는 아무 개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개혁 없이는 아무 능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개혁 없이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에만 개혁자도 되고, 개혁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개혁운동은 세 시대를 거친다.

첫째는 조롱 받는 시대요, 둘째는 박해받는 시대요, 셋째는 성공하는 시대이다.' 여러분, 루터는 생전에 별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별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살아 역사 했습니다. 보세요. 정말로 조롱 받는 시대가 있습니다. 박해받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조급히 서두르지 맙시다. 옳은 일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를 통해서든지 그 파급과 확장은 분명 개혁의 시대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바꾸어지기를 바랍니까? 먼저 나 하나가 바꾸어지기를 조용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는 잠깐 잊어버리십시오. 나 하나의 심령이 어떻게 개혁을 이루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세상대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홀로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될 때,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자기 개혁의 의미(갈라디아서 2:17-21)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 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 면 내가 나를 범법(犯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廢)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Total Woman」이라고 하는 책을 쓴 모건 여사의 일화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모건 여사가 결혼을 하고 살아본즉 남편의 일상생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결혼생활을 통해서 남편의 성격을 바꾸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침이면 늑장을 부리는 남편을 흔들어 깨워서 출근을 재촉했습니다. 또한 그날의 해야 할 일들을 낱낱이 적어서 지시하고, 꼭 해야만 한다고 몇 번이고 거듭 당부하였습니다. 퇴근 후에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라고 다그쳤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모건 여사는 자기의 성격까지 나빠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부부관계가 파멸에 이를 것 같아……' 그녀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남편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스스로 바뀌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전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났습니다. 남편이야 일어나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기 앞의 본분을 다했습니다. 저녁에는 남편이 일찍 돌아오든 말든 자기는 자기대로 정성껏 남편의 귀가를 대비하여 준비했습니다. 혹 남편이 밤늦게 돌아오는 일이 있어도 그 이유를 묻지 않고 편안한 마음으로 집에 들어설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자기편에서 생각을 고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이렇게 생활해 나가느라니 남편의 생활태도가 서서히 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악처로 소문나 있습니다. 밖에서 돌아오는 남편에게 다짜고짜 물 한 양동이를 덮어씌울 만큼 괄괄하고 사나운 여자였습니다. 스승의 이 딱한 사정을 보다못한 제자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스승님, 그렇게 지내지 마십시오. 차라리 이혼하시고 다른 좋은 여자 분을 만나 사시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글쎄… 나도 내 아내의 불손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나는 수양이 부족한 사람일세. 만약 지금의 아내가 내 곁에 있지 않았다면, 나는 오히려 내 마음을 닦고 수양할 기회를 잃게 되는 셈이지. 그러니 아내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일세." 요즈음 우리는 전에 없이 '개혁'이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위한 개혁이냐, 이것이 분명치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개혁이 잘살기 위한 것입니까? 보다 더 풍요해지기 위한 것입니까? 도대체 개혁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 목적이 바로 서 있지 않기에 방법도 없고, 방법이 분명치 않기에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개혁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하는 철학적 해답이 분명하지 못한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개혁을 위한 개혁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개혁자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이지 뭐'라는 말입니다. 누가 누구를 개혁하자는 것입니까? 개혁을 주도할 사람이 대체 누구입니까? 정말로 이 사람이다 할만큼 그렇게 대단한 개혁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오십보 백보요, 거기서 거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개혁의 역사를 이를 수 있겠습니까? 정말로 온 국민이 높이높이 쳐다볼 수 있는 개혁 지도자가 안 보인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는 개혁을 몇 사람의 일로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개혁'이라 하면 당연히 부패한 정치가, 돈 많은 사람, 권력자, 지성인 등 특수층의 사람들을 겨냥합니다. 개혁의 대상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신문을 뒤적거리면서 '오늘은 또 어느 사람이 쫓겨났나, 어느 사람이 바뀌었나, 어느 사람의 부정이 드러났나?' 하고 이것을 단순한 흥밋거리로 보고 있습니다. 온 국민에게 개혁의 의지가 주어져야 합니다. 이 의식개혁이 먼저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개혁이라는 말을 언급할 때마다 모두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개혁만을 생각합니다. 하나같이 나 외의 다른 사람에 대한 개혁만을 생각하고, 기대하고, 강요합니다.

또한 개혁의 파급효과가 없고, 그 확산효과가 적어서 문제입니다. 일단 어디선가 개혁이 시작되면, 그 개혁적 의식과 역사가 온 국민에게 그대로 확 파급되고 확산되어나가야 할 터인데, '개혁'하면 그저 몇몇 사람에게만 한정되어 끝나버리고 어느 제한된 구역에서 맴돌고 맙니다. 그래서 문제입니다. 그래서 걱정입니다. 언제 온 국민 하나하나가 '개혁? 그래, 이것은 내게 있어야 할 일이다'라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남의 개혁만 구경하고 있고, 여기서만 멈추고 있습니다. 답답한 노릇입니다.

종교개혁은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놓았습니다. 종교개혁은 세계를 고민한다던가, 인류를 염려한다던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던가 하는 생각에서 주장하고 창출해낸 개혁이 결코 아닙니다.

종교개혁이라는 이 엄청난 사건은 세계를 지향하면서 외친 구호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침내는 정치개혁도 이루고, 문화개혁도 이루고, 사회개혁도 이루고, 세계마저도 개혁했습니다. 본래 이 역사가 그렇듯 거창하게, 세계 지향적으로 시작했던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이라는 것은, 한 크리스찬의 진실한 신앙적 고민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한 사람이 바뀌었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를 믿지 않던 사람이 믿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원래가 믿던 사람입니다. 더우기 수도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평생을 바치기로 한 사람입니다. 바로 그 사람, 마르틴 루터 한 사람의 심령 속에 이루어진 변화가 그 인격과 그 생활을 바꾸고, 나아가 세계를 바꾸어놓는 역사를 이루게 된 것입니다.

루터는 수도원에 있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수도원에서 무슨 죄를 지었겠습니까? 죄 지을래야 지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남자 수도원이라 여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그렇게 죄지을만한 사건이 없는데도 수도원에 있는 루터는 죄로 말미암아 고민합니다. 언제나 '내 죄, 내 죄, 내 죄, 말씀, 말씀, 말씀……'하며 살아갑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도대체 루터가 무슨 죄를 고백했다는 것인가 하고 궁금해서, 그 옛날 루터가 고백했다던 죄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보았지만 그래보았자 뻔한 일이었습니다. 전부가 그저 마음으로 짓는 죄입니다. 의심하는 죄, 절망하는 죄, 세상으로 기우는 죄, 특별히 시기 질투하는 죄…… 참으로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 루터는 그 죄가 고민이 되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신부를 찾아가 고해성사를 합니다. 아침에 가고, 점심에 가고, 저녁에 가고… 어떤 날은 20여 회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가자마자 문을 두드려 신부를 불러놓고는 "내 죄를 고백하겠습니다"하며 한참을 얘기하고, 또 얘기하고…… 나중에는 신부가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루터야, 죄 좀 모았다가 가져오너라"하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루터는 죄로 괴로워했습니다. 견딜 수 없어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을 때에는 죄 같지도 않은 것들입니다. 고해 받는 신부가 들으면서도 "그런 것이야 죄라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것을 죄로 생각했기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마땅히 이런 고민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민이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요,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로 다른 사람의 죄가 아니요, 사회의 죄가 아니요, 세상의 죄가 아니요, 세상의 부정이 아닙니다. 내 죄, 오직 내 죄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고민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 받으실 때에 그 법정에서 친히 올라가셨던 계단이 있습니다. 훗날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Helena)가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녀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올라가셨던 그 빌라도 법정의 계단을, 사람들을 보내어 뜯어다가 로마에 옮겨놓았습니다. 로마의 성계단 성전에 가보면 정말 나무로 된 그 때의 계단이 있습니다.

이 계단을 두고는 당시 신비로운 전설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거룩한 계단이라고 해서, 여기를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회개하면 죄를 깨끗이 사함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2천년 된 이 계단을, 그 당시로 말하면 천 오 백년 된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면서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가고 내려오고, 또 올라가고 내려오고…… 그러나 아무리 오르내려도 이로 말미암아 죄 사함의 확신을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릎으로 그 계단을 기어오르던 루터의 귀에 번개처럼 들려오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정신이 번쩍 납니다. 익히 읽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롭게 알게 됩니다. 늘 듣던 말씀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뜻으로 들려옵니다. 루터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저 위대한 종교개혁은 바로 이 순간에 비롯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 루터의 자기 개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의를 다 부정한 것이요, 의롭고자 하는 많은 노력까지도 포기한 것입니다. 죄인이 행하는 모든 선행은 공로 될 수 없고, 죄인 된 관계에서는 어떠한 의도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 의를 완전히 포기합니다.

철저하게 부정합니다. 그럴 때에 그 속에서 비로소 개혁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자기개혁, 이것은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오직 은혜라는 것을 또한 알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하나님께서 내게 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라,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시게 하는 길은 내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보여주신 길로 가는 것이다." 유명한 말입니다. 그 길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긍휼로, 오직 은혜로만 갈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말은 '오직 은혜로'라는 말이요, '오직 은혜로'라는 말은 '오직 긍휼로'라는 말입니다. 곧 그 은혜와 그 긍휼을 그대로 내가 수용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에게는 믿음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그리스도를 재발견하게 됩니다. 평생 믿던 그리스도이지만 그 그리스도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옵니다. 여러분, 2천 년 전의 예수가 아니요 바로 오늘의 예수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예수가 아니요, 바로 내 생명에 직결된 예수입니다. 내 죄를 감당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그 엄청난 자유를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20절)"라고 말씀합니다. 십자가는 오래 전 사건입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오늘 내 사건으로 여기 나타나게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나는 죽었습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 안에서 내 모습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십자가를 쳐다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십자가를 향한 마음에 새로운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온전히 겸손하고 온전히 온유한 하나의 그리스도인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루터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것은 어떤 교리나, 제도나, 교권적인 것에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듣고 말하는 '성경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하는 말은 마르틴 루터의 입에서 처음 시작된 말입니다. 그에게는 오직 성경, 오직 말씀, 오직 성경, 오직 말씀뿐이었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새사람이 됩니다. 어떤 철학이 있어서도 아니요, 오직 말씀에 의해서입니다. 어떤 인간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듣기로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홀로 섭니다. 이것이 만인제사입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직선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서는 것입니다. 동시에 남을 위하여 기도할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사람이 됩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의 신학을 '십자가의 신학'이라고 별칭하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신학----여기서 자기개혁을 이루게 됩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날마다 세례 받는다'----계속적으로 옛사람으로 죽고, 계속적으로 새사람으로 살고, 따라서 날마다 세례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개혁입니다. 그 개혁이 먼저 있기에 루터는 개혁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함의 용기가 있고, 이 권세의 용기가 있기에, 교회든, 정치든, 사회든, 문화든, 어떠한 문제든지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개혁의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자기개혁 없이는 아무 개혁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개혁 없이는 아무 능력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기개혁 없이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에 계시다고 확실히 믿을 수 있을 때에만 개혁자도 되고, 개혁도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든 개혁운동은 세 시대를 거친다.

첫째는 조롱 받는 시대요, 둘째는 박해받는 시대요, 셋째는 성공하는 시대이다.' 여러분, 루터는 생전에 별로 위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에서 별로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살아 역사 했습니다. 보세요. 정말로 조롱 받는 시대가 있습니다. 박해받는 시대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의 시대가 있는 것입니다. 조급히 서두르지 맙시다. 옳은 일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안에서 되어지는 일이라면 누구를 통해서든지 그 파급과 확장은 분명 개혁의 시대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바꾸어지기를 바랍니까? 먼저 나 하나가 바꾸어지기를 조용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변화에 대해서는 잠깐 잊어버리십시오. 나 하나의 심령이 어떻게 개혁을 이루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세상대로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 홀로 새로운 모습으로 서게 될 때,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