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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과 보응의 형평성(이사야 3:8-12)

by 【고동엽】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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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과 보응의 형평성(이사야 3:8-12)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 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너희는 의 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 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 백 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한 시골 청년이 일자리를 찾으러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생전처음 떠나는 고향이요, 생전처음 가보는 대도시 런던입니다. 공부도 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겠다는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집을 떠날 날이 되자 아버지가 이 아들을 불러 등신대(等身大) 거울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머리끝서 발끝까지 다 투영되는 거울 앞에 아들을 세워놓고 말했습니다. "이 거울을 향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화나는 얼굴을 해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도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인사를 해보아라." 아들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보았습니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이 아주 밝아 보여 기분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아들을 교훈 합니다. "너는 이 세상을 살 때에 거울을 보듯이 하여라. 네가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저쪽도 네게 친절하게 대할 것이고, 네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면 저쪽도 네게 자비를 베풀 것이로되 만약 네가 남을 악하게 대하면 상대방도 반드시 너를 악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네가 앞뒤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을 했다 하자. 그 때에는 상대방의 행동을 통하여 네 자신의 모습을 보아라. 남이 네게 불친절하거든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내가 불친절했었구나,' 남에게 섭섭한 말을 듣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섭섭한 말을 했었나보구나. 그 잘못으로 인하여 섭섭함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구나,' 남에게 악한 대접을 받거든 '내가 심어놓은 악이 오늘날 악한 대접으로 내게 되돌아오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하여라."

인과율은 기독교 복음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구원론과는 상관없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죄가 있다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지 않느냐?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모든 죄를 용서받고, 크신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오직 은혜, 오직 긍휼, 오직 사랑,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이 아니겠느냐? 인과응보와는 관계없는 교리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과응보의 원리가 없다면 기독교의 십자가도 없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살아야 할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의인이 죄인처럼 죽어가야 했습니다. 살아야 할 사람이 대신 죽는 엄연한 사건이 있었기에 죽어야 할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사람이 죽는 이 엄연한 이치가 공의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공의와 사랑의 종말론적인 만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공의는 확실하고, 하나님의 의는 절대로 침해될 수 없고, 그대로 묵과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거저 보아주고, 용서한다고 해서 거저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값을 지불하고야 용서가 있고,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고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이 얼마나 단순한 원리입니까?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납니다. 이 원리를 똑바로 알고, 똑바로 깨닫고, 똑바로 믿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 화가 내게 돌아올 것이니까요. 절대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내가 또 분개함을 당해야 하니까요. 절대로 남을 쉽게 말하거나 비평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 7 : 2)"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을 꾸짖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를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니까요.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 조만간 내 눈에 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대접을 받고자 남을 대접합니다. 사랑을 원하기에 사랑하고, 믿음을 원하기에 믿고, 인내를 원하기에 참아줍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 그 안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둡니다. 조만간에 반드시 확실하게 거둘 것입니다.

어떤 신실한 선교사가 자기의 일생을 걸고 아프리카의 한 오지에서 모진 고생을 다하면서도 선교활동을 펼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일생을 걸고,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희생하고 있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보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습니까?" 선교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주머니에서 아주 낡아빠진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선교사에게 전도 받은 한 젊은 사람이 선교사 앞으로 쓴 편지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어 이렇게 아름답게 하늘나라를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귀한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새벽마다 당신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조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이 이상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전도한 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진실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신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보상을 바라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서 심고 있습니까? 어떤 가을을 기대하며 오늘도 열심히 심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거두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소홀히 여기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타이밍(timing)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선한 일을 하고 당장 내일 복을 받는다면 선한 일 하기는 참 쉽습니다. 또한 오늘 악한 일을 하고 당장 벼락을 받는다면, 그것이 무서워서라도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일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 벼락을 맞아서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보응의 지연, 이 시간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사실을 만홀히 여깁니다. 여러분, 오늘 심으면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거둘 수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농사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더 멀리, 오랜 시간 뒤에 거두게 하십니다.

또한 그 보상의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내가 여기 갑이라는 사람에게 섭섭하게 했다면 나중에 반드시 갑으로부터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동에서 죄를 지어도 서에서 보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속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속이고 배반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꼭 그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사람을 배반하지만 먼 훗날에 저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합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그저 좁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에, 자기가 생각하는 모양대로 보응이 없다고 해서 아예 없는 줄로 압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받는 보응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오래 전 나도 모르게 이미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내가 여기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원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이 이제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보상과 보응의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없는 줄로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보응'이라는 것을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 아니겠어?'라고 여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일만 가지고는 인과보응의 원리를 다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이 문제를 내세로까지 연장시킵니다. 여러분, 순교자의 거룩한 죽음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찾습니까? 이 점을 잊지 마세요. 이 세상에도 물론 인과보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이 있고 불행이 있고, 선한 자에게 행복이 있고 번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후손에게, 그리고 먼 내세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 37편 25절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잘했을 때에 그 자손에게 복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역시 이것만 가지고는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내세, 곧 죽음 다음의 세계에서 받는 인과보응이 문제입니다. 분명한 보상이 있고 생명의 면류관도 있고 그런가하면 무서운 보응도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은 형평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평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와 함께 법이념의 하나입니다. 합법성이 일반적 정의라면 형평은 구체적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의인에게 복이 있다, 악인에게 화가 있다--형평한 것입니다. 형평한 것은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고 의인에게 복이 있는 것이 형평원리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고 말씀합니다. 무슨 별도의 사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유의해서 살펴보세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10절)"------의인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11절)"----악인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잠깐의 유예기간이 있을 뿐입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고 의인에게 복이 있는 것이 형평이라고 하는 것의 확실한 실체적 정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심는 것은 자유인데, 거두는 것은 심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밭에 콩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마음이 변해서 '제발 콩 말고 팥이 나와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콩을 심었으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콩을 거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선한 종자를 심었으면 선한 열매를, 악한 종자를 심었으면 악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많이 심은 자에게 많은 추수가 있고, 적게 심은 자에게 적은 추수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추수라고 하는 결과를 내가 도중에 마음대로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심었으면 거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치가 육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에 유대인을 잡아들이기로 유명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 학살의 가장 큰 원흉이었던 그는 아주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도망 다니다가 체포되어 이스라엘 전범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형장에서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집행관은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어째서 유대교로 개종을 하려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그러면 유대인 한 명이 더 죽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흔히들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음성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평생 악했던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해서 갑작스레 선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은대로 거두니까요. 아이히만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어이 악한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짓궂게도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은 제약도 많이 받는다는데, 기왕 그럴 바에는 좀 천천히 예수 믿고, 그 동안 먹을 것 먹고, 마실 것 마시고, 놀 때는 놀다가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예수 믿으면 되잖아?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강도처럼 말이야. 숨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그저 나를 부탁합니다'라고 한마디했더니 천당에 가질 않았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야?"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평생 악하던 사람이 마지막 시간에 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거둔다는 것, 이 결과라고 하는 것은 우연사(偶然事)가 아닙니다. 추수는 절대로 우연사가 아닙니다.

Accident가 아닙니다. 알건 모르건 우리는 이미 종자를 심었고, 그것은 깊이 심기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은 하루아침에 기적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이 지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섭섭하게 여기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보응을 만홀히 여기기조차 합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코를 들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하나님이 언제 심판하시더냐?'라며 그렇게 비웃는다는 얘기입니다.

보상이 없다고, 보상이 늦다고, 보상이 적다고 불만입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좀 마땅치 않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꼭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런 악한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지 않을까? 왜 보응이 늦지? 왜 그 형벌이 적으냔 말이야"라며 불평합니다.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초조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응이 늦춰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상도 함께 늦어집니다. 혹 여러분이 조그마한 선행 하나 해놓고 나서 '하나님은 왜 내게 상을 안 주실까?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내게 복을 안주실까? '하고 조바심을 낸 적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하나님대신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죄지을 때에 그 벌도 당장 내리겠노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에 복을 안 준다고 조바심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네가 엄청난 죄를 질 때에 그 벌도 즉각적으로 내리겠다'라고 말하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차라리 복이 늦어지는 것이 낫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에게 복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늦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보상도 함께 늦어집니다. 내게 보상이 지연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이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좀더 깊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악함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마땅히 보응을 받아야 할 텐데 어쩐지 무사하고 평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보상이 늦어지고 있는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몸만 방탕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방탕했습니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13년 동안을 눈물로 살았습니다. 급기야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 집을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마음껏 방탕했습니다. 보세요. 어머니는 13년 동안 그 숱한 날들을 눈물로 지새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 왔습니다. 이 많은 희생과 수고는 어디에서 보상을 받습니까?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제멋대로 방탕하면서도 무사했고, 평안했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기회까지도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무사하다고 해서, 내가 태연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공로로 내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심은 바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거두고 있고, 그가 보상을 받지 못했기에 내가 보응을 지연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형평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뿌린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 : 7)"합니다. 이 엄연한 진리 앞에 숙연해져야 할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보상이 없다 하더라도, 보상이 지연된다 하더라도 불평하지 맙시다. 또한 내게 주신 행복과 내가 받은 추수가 결코 나를 향한 보상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와,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눈물 뿌려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또 한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남의 그 보상 없는 희생과 그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록 보상은 받지 못하나 내가 수고하고 희생함으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보응받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고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려 하고 있습니까? 이제 수확의 가을을 맞이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생활원칙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내게 가능한 모든 지력으로, 내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내게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내게 가능한 모든 시간 동안, 내게 가능한 모든 선을 다하라.' 여러분, 진정으로 선을 심고 의를 심어서 영생을 거두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보상과 보응의 형평성(이사야 3:8-12)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 하였음이라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너희는 의 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 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내 백 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한 시골 청년이 일자리를 찾으러 고향을 떠나 런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생전처음 떠나는 고향이요, 생전처음 가보는 대도시 런던입니다. 공부도 하고 열심히 일해서 성공하겠다는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이윽고 집을 떠날 날이 되자 아버지가 이 아들을 불러 등신대(等身大) 거울이 있는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머리끝서 발끝까지 다 투영되는 거울 앞에 아들을 세워놓고 말했습니다. "이 거울을 향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화나는 얼굴을 해보아라." 아들은 그대로 했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도 화를 내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인사를 해보아라." 아들은 웃는 얼굴로 손을 내밀어보았습니다. 거울에 비치는 자기 모습이 아주 밝아 보여 기분 좋았습니다. 아버지는 정색을 하고 아들을 교훈 합니다. "너는 이 세상을 살 때에 거울을 보듯이 하여라. 네가 남에게 친절하게 대하면 저쪽도 네게 친절하게 대할 것이고, 네가 남에게 자비를 베풀면 저쪽도 네게 자비를 베풀 것이로되 만약 네가 남을 악하게 대하면 상대방도 반드시 너를 악하게 대할 것이다." 그리고는 이런 말을 덧붙였습니다. "네가 앞뒤를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어떤 행동을 했다 하자. 그 때에는 상대방의 행동을 통하여 네 자신의 모습을 보아라. 남이 네게 불친절하거든 '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 내가 불친절했었구나,' 남에게 섭섭한 말을 듣거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에게 섭섭한 말을 했었나보구나. 그 잘못으로 인하여 섭섭함이 내게 돌아오는 것이구나,' 남에게 악한 대접을 받거든 '내가 심어놓은 악이 오늘날 악한 대접으로 내게 되돌아오는 것이구나'하고 생각하여라."

인과율은 기독교 복음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어질 때가 있습니다. 인과응보라는 말은 구원론과는 상관없는 듯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록 죄가 있다 해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피를 흘리셨지 않느냐? 우리는 이것을 믿음으로 구원받고, 모든 죄를 용서받고, 크신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 오직 은혜, 오직 긍휼, 오직 사랑, 그렇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 복음이 아니겠느냐? 인과응보와는 관계없는 교리가 아니겠느냐'라는 생각을 쉽게 합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또한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인과응보의 원리가 없다면 기독교의 십자가도 없는 것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는 당연히 살아야 할 사람이 죽어야 했습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의인이 죄인처럼 죽어가야 했습니다. 살아야 할 사람이 대신 죽는 엄연한 사건이 있었기에 죽어야 할 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사람이 죽는 이 엄연한 이치가 공의요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공의와 사랑의 종말론적인 만남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공의는 확실하고, 하나님의 의는 절대로 침해될 수 없고, 그대로 묵과될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거저 보아주고, 용서한다고 해서 거저 넘어갈 문제가 아닙니다. 값을 지불하고야 용서가 있고, 희생의 댓가를 지불하고야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복음의 진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이 얼마나 단순한 원리입니까? 콩을 심으면 콩이 나고 보리를 심으면 보리가 납니다. 이 원리를 똑바로 알고, 똑바로 깨닫고, 똑바로 믿고 사는 사람은 절대로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 화가 내게 돌아올 것이니까요. 절대로 분개하지 않습니다. 내가 또 분개함을 당해야 하니까요. 절대로 남을 쉽게 말하거나 비평하지 않습니다. 내게 그대로 돌아올 것이니까요. 예수님께서도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마 7 : 2)"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남을 탓하지 않습니다. 남을 꾸짖지 않습니다. 남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둔다는 이치를 아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니까요.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없습니다. 조만간 내 눈에 피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대접을 받고자 남을 대접합니다. 사랑을 원하기에 사랑하고, 믿음을 원하기에 믿고, 인내를 원하기에 참아줍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이치, 그 안에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심은 것은 반드시 거둡니다. 조만간에 반드시 확실하게 거둘 것입니다.

어떤 신실한 선교사가 자기의 일생을 걸고 아프리카의 한 오지에서 모진 고생을 다하면서도 선교활동을 펼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이 여기에 일생을 걸고,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희생하고 있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보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얻습니까?" 선교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자기 주머니에서 아주 낡아빠진 편지 한 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선교사에게 전도 받은 한 젊은 사람이 선교사 앞으로 쓴 편지인데, 그 내용은 이러하였습니다. "저는 당신으로 인하여 비로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 되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어 이렇게 아름답게 하늘나라를 지향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귀한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저는 새벽마다 당신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선교사는 조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나는 이 이상의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가 전도한 분들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진실하게 살고, 선하게 살고, 또 나를 위하여 기도해주신다니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보상을 바라고 있습니까? 무엇을 바라서 심고 있습니까? 어떤 가을을 기대하며 오늘도 열심히 심고 있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거두리라고 예상하고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리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아주 간단한 원리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소홀히 여기고, 여기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타이밍(timing)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오늘 선한 일을 하고 당장 내일 복을 받는다면 선한 일 하기는 참 쉽습니다. 또한 오늘 악한 일을 하고 당장 벼락을 받는다면, 그것이 무서워서라도 누가 죄를 짓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일이 이렇게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한 가지 걱정이 생깁니다.

이 세상에 남아 있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다 벼락을 맞아서요.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보응의 지연, 이 시간이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바로 이것 때문에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사실을 만홀히 여깁니다. 여러분, 오늘 심으면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틀림없이 거둘 수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농사는 봄에 심고 가을에 거두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더 멀리, 오랜 시간 뒤에 거두게 하십니다.

또한 그 보상의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흔히들 내가 여기 갑이라는 사람에게 섭섭하게 했다면 나중에 반드시 갑으로부터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동에서 죄를 지어도 서에서 보응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속인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내가 속이고 배반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꼭 그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이 사람을 배반하지만 먼 훗날에 저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합니다. 그것이 인과응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그저 좁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가 생각하는 시간에, 자기가 생각하는 모양대로 보응이 없다고 해서 아예 없는 줄로 압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내가 받는 보응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오래 전 나도 모르게 이미 심어놓은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내가 여기서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고로 원망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사실이 이제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보상과 보응의 방법이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해서 없는 줄로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보응'이라는 것을 '내가 죽으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하나 죽으면 그만 아니겠어?'라고 여깁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일만 가지고는 인과보응의 원리를 다 설명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도 이 문제를 내세로까지 연장시킵니다. 여러분, 순교자의 거룩한 죽음에 대한 보상은 어디서 찾습니까? 이 점을 잊지 마세요. 이 세상에도 물론 인과보응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에게 벌이 있고 불행이 있고, 선한 자에게 행복이 있고 번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다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후손에게, 그리고 먼 내세에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편 37편 25절에서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라고 말씀합니다. 부모가 잘했을 때에 그 자손에게 복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역시 이것만 가지고는 다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내세, 곧 죽음 다음의 세계에서 받는 인과보응이 문제입니다. 분명한 보상이 있고 생명의 면류관도 있고 그런가하면 무서운 보응도 있다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입니다.

본문은 형평의 원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평이라고 하는 것은 정의와 함께 법이념의 하나입니다. 합법성이 일반적 정의라면 형평은 구체적 정의가 되는 것입니다. 보세요. 의인에게 복이 있다, 악인에게 화가 있다--형평한 것입니다. 형평한 것은 당연히 그러해야 합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고 의인에게 복이 있는 것이 형평원리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보면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고 말씀합니다. 무슨 별도의 사정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유의해서 살펴보세요.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10절)"------의인에게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11절)"----악인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잠깐의 유예기간이 있을 뿐입니다. 악인에게 화가 있고 의인에게 복이 있는 것이 형평이라고 하는 것의 확실한 실체적 정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심는 것은 자유인데, 거두는 것은 심판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밭에 콩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마음이 변해서 '제발 콩 말고 팥이 나와주기를' 바란다고 해서 팥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콩을 심었으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콩을 거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선한 열매를 얻기 위하여 선한 종자를 심었으면 선한 열매를, 악한 종자를 심었으면 악한 열매를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상관없습니다. 그것이 심판입니다. 많이 심은 자에게 많은 추수가 있고, 적게 심은 자에게 적은 추수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 추수라고 하는 결과를 내가 도중에 마음대로 조작할 수는 없습니다. 피할 수 없습니다. 심었으면 거두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나치가 육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에 유대인을 잡아들이기로 유명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 학살의 가장 큰 원흉이었던 그는 아주 잔인하고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도망 다니다가 체포되어 이스라엘 전범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형장에서 사형을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집행관은 마지막으로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유대교로 개종하고 싶습니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어째서 유대교로 개종을 하려 하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담담하게 "그러면 유대인 한 명이 더 죽는 결과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더랍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입니다. 흔히들 새가 죽을 때에는 그 음성이 슬프고, 사람이 죽을 때에는 그가 선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평생 악했던 사람이 죽을 때가 되었다고 해서 갑작스레 선한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은대로 거두니까요. 아이히만은 죽는 순간까지도 기어이 악한 말을 하고 죽었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심은 대로 거두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짓궂게도 이런 말을 합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은 제약도 많이 받는다는데, 기왕 그럴 바에는 좀 천천히 예수 믿고, 그 동안 먹을 것 먹고, 마실 것 마시고, 놀 때는 놀다가 죽기 바로 며칠 전에 예수 믿으면 되잖아? 예수님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강도처럼 말이야. 숨넘어가기 바로 직전에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그저 나를 부탁합니다'라고 한마디했더니 천당에 가질 않았어?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야?" 여러분, 정말 이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심은 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평생 악하던 사람이 마지막 시간에 선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거둔다는 것, 이 결과라고 하는 것은 우연사(偶然事)가 아닙니다. 추수는 절대로 우연사가 아닙니다.

Accident가 아닙니다. 알건 모르건 우리는 이미 종자를 심었고, 그것은 깊이 심기어져 있다가 오늘에 와서 결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은 하루아침에 기적같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추수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상과 보응이 지연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섭섭하게 여기기도 하고, 불평하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보응을 만홀히 여기기조차 합니다. 만홀히 여긴다는 말은 코를 들고 비웃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어? 하나님이 언제 심판하시더냐?'라며 그렇게 비웃는다는 얘기입니다.

보상이 없다고, 보상이 늦다고, 보상이 적다고 불만입니다.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고, 좀 마땅치 않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꼭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런 악한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보응하시지 않을까? 왜 보응이 늦지? 왜 그 형벌이 적으냔 말이야"라며 불평합니다. 원망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초조하게 생각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깊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보응이 늦춰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상도 함께 늦어집니다. 혹 여러분이 조그마한 선행 하나 해놓고 나서 '하나님은 왜 내게 상을 안 주실까? 내가 이렇게 좋은 일을 했는데 왜 내게 복을 안주실까? '하고 조바심을 낸 적이 있습니까? 죄송하지만 하나님대신 제가 대답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죄지을 때에 그 벌도 당장 내리겠노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당장에 복을 안 준다고 조바심하는 사람에게 '그렇다면 네가 엄청난 죄를 질 때에 그 벌도 즉각적으로 내리겠다'라고 말하면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차라리 복이 늦어지는 것이 낫지요. 안 그렇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때로는 선한 사람에게 복이 늦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주 늦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늦어질 수밖에 없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악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보상도 함께 늦어집니다. 내게 보상이 지연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또 다른 은총이라는 것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좀더 깊은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악함이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마땅히 보응을 받아야 할 텐데 어쩐지 무사하고 평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보상이 늦어지고 있는 사건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라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했습니다. 어머니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방탕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는 몸만 방탕한 것이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방탕했습니다. 그럴수록 어머니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13년 동안을 눈물로 살았습니다. 급기야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만류도 뿌리치고 집을 떠나 로마로 갔습니다. 거기에서 마음껏 방탕했습니다. 보세요. 어머니는 13년 동안 그 숱한 날들을 눈물로 지새우며 하나님 앞에 기도해 왔습니다. 이 많은 희생과 수고는 어디에서 보상을 받습니까? 어머니의 희생이 있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제멋대로 방탕하면서도 무사했고, 평안했고, 하나님 앞에 돌아올 수 있는 기회까지도 주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무사하다고 해서, 내가 태연하다고 해서, 그것이 내 공로로 내 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 심은 바가 있었기에 지금 내가 거두고 있고, 그가 보상을 받지 못했기에 내가 보응을 지연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형평원리가 있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마세요. 뿌린 것은 반드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 : 7)"합니다. 이 엄연한 진리 앞에 숙연해져야 할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에 감사합시다. 보상이 없다 하더라도, 보상이 지연된다 하더라도 불평하지 맙시다. 또한 내게 주신 행복과 내가 받은 추수가 결코 나를 향한 보상이라고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오히려 십자가의 은혜와, 누군가가 나를 위하여 눈물 뿌려 희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또 한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남의 그 보상 없는 희생과 그 은혜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비록 보상은 받지 못하나 내가 수고하고 희생함으로 나 아닌 그 누군가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보응받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고 있습니까? 심은 대로 거둡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거둘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두려 하고 있습니까? 이제 수확의 가을을 맞이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요한 웨슬레는 그의 생활원칙을 이렇게 세웠습니다. '내게 가능한 모든 지력으로, 내게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내게 가능한 모든 사람에게, 내게 가능한 모든 시간 동안, 내게 가능한 모든 선을 다하라.' 여러분, 진정으로 선을 심고 의를 심어서 영생을 거두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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