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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민수기 14:20-35)

by 【고동엽】 2024.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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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민수기 14:20-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특별히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는 쉽게 잘 이해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잘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아서 의문을 가지게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놓으셨으면 그만이지 왜 하필이면 거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놓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만들어놓으셨으면 따먹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실 일이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따먹도록 내버려두셔서 아담과 하와로 범죄하게 하시느냐입니다. 왜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에게 이렇듯 커다란 불행이 돌아오게 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평생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는 마땅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보세요.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스가 산 언덕에서 멀리 가나안땅을 바라보았을 뿐, 몸소 그 약속의 땅에 발을 디뎌보지는 못한 채 느보 산에서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이것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사람들이 왜 가나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에 그들은 그리 선하고 진실하고 착한 백성이 다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가 어언 430년입니다. 노예 중에 살았고 노예 중에 태어났습니다. 노예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사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끝까지 다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셨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전(回轉)시키십니다. 지금 저들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강 하나만 건너가면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광야길로 돌려보내십니다. 광야로 회전시키시어 40년을 그 뜨거운 사막에서 고생하도록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누누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와 모처럼 해방을 경험한 저들이 곧장 약 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 사건은 어찌되었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만으로는 자유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저들은 자유를 얻은 것 같았으나, 실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25절과 신명기 1장 21, 22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적 심판'이었다고 말입니다.

자유와 자유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얻은 자유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정치, 자유로운 경제, 자유로운 여건, 자유로운 환경----이 모든 것이 자유일 수는 있으나 그가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좋은 환경도, 자유로운 환경도 그에게는 결코 복도, 선도, 이로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돈은 확실히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합니다. 돈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의 상징이라고까지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인이 되지 못한 채, 돈의 가치를 모르고 바로 쓸 줄 모르고 제대로 관리할 줄 모르는 채 이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돈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돈으로 말미암아 더 큰 불행을 사게 될 것입니다.

한때 재산공개니뭐니 해서 돈 많은 사람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부정축재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 왜 죽을까요? 얼마나 불행했으면 죽을까요? 생각해보면 비참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다 돈이 많아 가지고, 돈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그 소중한 생명까지 끊어야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결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는 얻은 것 같으나 그실 보이지 않는 노예상태에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입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는다'--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말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를 때입니다. 어느 날 노예해방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장관들이 백악관에 나타나 링컨을 협박했습니다. "당신이 노예해방 운동을 계속한다면 우리 내각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링컨은 하루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한 뒤에 기도실에 들어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옵소서.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의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시옵소서.' 이렇게 밤새 기도하고 나서 아침에 각료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그는 말했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예해방 운동을 중단 없이 밀어붙였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자유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위에 얼마나 비참한 노예가 많습니까? 쇠사슬에 손목이 매여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칼에 목이 채여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대로 먹는 것 같은데 자유인이 아닙니다. 비참한 노예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케이 힐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을 대신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세 가지 힘이 있다. 돈과 명예와 향락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정말 비참한 사람입니다. 명예의 노예가 된 사람을 보십시오. 하찮은 명예를 위하여 허덕이는 모습, 꼴불견입니다. 명예와 체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 모양이 되어야 합니까? 양심도 팔아먹고 인격도 팔아먹고…… 눈에는 안보이는 것 같으나 이 명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향락도 그렇습니다. 향락적 습관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한 채 향락에 노예된 젊은이들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 명예, 향락--이 세 가지로부터 온전히 자유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전에는 어떤 자유스러운 여건이 주어진다 해도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이로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길로 되돌려보내십니다. 어렵게 가나안 접경까지 왔는데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하고 되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40년을 떠돌게 하십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나안땅을 탐지한 불신앙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이나 신명기 1장 22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 가까이 왔을 때에 정탐꾼 열두 사람을 보내서 약속의 그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강하게 요구하므로 모세가 그만 그대로 끌려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책망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분명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언제 저들이 일정표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저들이 계획한대로 스스로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기다렸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거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정탐꾼을 보내느냐는 말입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불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보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정탐꾼 열두 사람 가운데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하고 본대로 이르며 저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의 정탐꾼은 이와 반대로 아주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렇듯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자 온 백성이 울고불고 통곡을 합니다. 다 망했다고 울부짖습니다. 이 울음소리 속에는 전혀 신앙이 없습니다. 보세요.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렸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적으로 거역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품은 무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집단화하면서 큰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반항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안되겠다, 너희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 자유는 얻었으나 아직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생활을 좀더 해야 되겠다'하시고 저들을 광야로 되돌려보내십니다.

여러분, 사실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은 감옥에 있어야 세상이 편합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난해야 할 사람은 가난해야 세상이 편합니다. 가난해야 할 사람이 부자가 되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천해야 할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광야로 되돌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머물게 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이 원망죄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원망한다는 것은 내 주체의식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시간은 내 정체감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일의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데, 내가 주인인데,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내 가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내 실패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집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그 순간 그는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루스벨트가 말한 '3대 자유'가 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가난하다보면 밥 한 그릇을 위하여 남에게 허리를 굽히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자유인일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먹을 것은 있어야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자유가 필요합니다. 죄를 짓고 불안해서 쫓기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어느 하늘 아래서라도 그 사람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불안에 쫓기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폭력에 쫓기고, 정치적 불안과 공포에 쫓기는 사람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유의 뜻을 모르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를 위하여 주어지는 엄청난 댓가를 모르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모르면 더더욱 자유인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자유를 찾아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집을 나간 순간 그는 어두움의 종이 되었고, 타락의 종이 되었고, 죄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자유인인 것 같으나 그실 그는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22절)"------하나님을 시험하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이적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으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많은 능력과 이적을 보고도, 그 커다란 이적 가운데 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우리의 불신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이어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23절)"-- ----하나님의 능력도, 권능도, 심판도 없는 것처럼 멸시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 우리 가운데 얼마나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죄를 짓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부정하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원망죄가 가장 큰 죄가 됩니다. 철저한 불신앙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27절)" 저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하여 불평이 많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조금 불편한 광야의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시련의 길이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 순종하며 곱게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거늘 저들은 줄곧 원망을 합니다. 약속의 땅도 믿지 않습니다. 현재의 은혜도 믿지 않습니다.

원망을 할 따름입니다. 확실히 저들은 불신앙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Who I am?' 보다는 'Whose I am?'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나님께 속할 때에 비로소 나의 정체와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하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저는 북한에서 8․15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요,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권력을 잡고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일본사람들 밑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 8․15해방보다 일제시대가 더 낫다"하는 말이 종종 나돌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기로 자유인 되기를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죽더라도 자유인으로 죽어야지요. 일본사람들 밑에 있을 때를 그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때는 밥을 먹고 지금은 죽을 먹는다고 해서 그 노예시절을 그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보세요. 이스라엘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워져도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 : 3)"하고 노예근성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을 바라보십시오.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되느니 안되느니, 가능하다느니 불가능하다느니, 소망적이니 절망적이니…… 이런 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제 전공이 종말론이기 때문에 종종 미래학에 대한 책을 읽어볼 때가 있습니다. 미래가 어찌 어찌될 것이다 하고 기술된 내용 가운데 맞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다 불 신앙적입니다. 이렇듯 종말론과 미래학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 인간적 지식과 판단으로 앞날을 전망하는 것처럼 불 신앙적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지 마십시오. 또한 외부적 환경에 대하여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외부적 환경에 의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는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직 위를 바라보고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지식과 의지로 현재와 미래를 판단하고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사람을, 자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반 세기 전 8월 15일에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았습니다. 온 국민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가치를 몰랐고,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몰랐고, 방종과 자유를 혼동하고 있었기에 힘겹게 얻은 그 소중한 자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혼란과 무질서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6․25라고 하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혁명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자유인이 되는 길을 배운 것처럼 우리도 그 많은 고난과 긴 시간 동안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우리로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인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상, 교육, 언어, 이름……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도덕의식을 빼앗겼습니다. 법질서의식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십자로에 이르렀을 때에 신호등에 붉은 불이 켜지면 차는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선진 자유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 하나 이를 어기는 사람 없이 다 멈춰 섭니다.

그런데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주위를 살펴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대로 갑니다. 붉은 신호가 켜져 있는데도 뻔뻔히 그냥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은 나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는 저 제국주의자들에게 이롭도록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식민지생활에서 저절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은 될 수 있는 대로 빠져나가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거역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그것이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의식입니다. 이 식민지 문화가 알게 모르게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지배할 때에 우민정책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동네마다 술집을 만들고 유곽을 만들어서 타락시켰습니다. 결국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풍진 세상 공부해서 뭐하냐'하며 놀고먹고 마시는 데에 넋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성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세요. 술도 음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네 사람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십니다. 이것이 망국풍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망국윤리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청년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그 잘못된 습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이러한 무책임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전부가 식민지문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제 앞에 가는 자동차에서 쥬스를 마셨는지 깡통을 창 밖으로 획 내던지더군요. '차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이 탔구먼'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듯 주체의식이 없습니다. 애국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 식민지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 가운데 커다란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일본의 어느 재벌과 이야기를 나누다 "한국의 기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애국심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뼈 있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할말이 없었다고, 마음속으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하면서 그 장로님 또 우십니다. 사실입니다. 요즘 기업들 좀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이익만 된다고 하면 죄다 수입하려고 합니다. 생산해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발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돈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 망국윤리입니다. 식민지문화의 잔재입니다. 나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 참으로 낯두꺼운 무책임입니다.

해방된 것 같으나 아직도 구석구석 우리는 식민지문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노예상태에 대한 각성이 없는 이 구제불능의 인간들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 이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어디서 자유를 빼앗겼으며, 어디서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민수기 14:20-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그러나 진실로 나의 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온 세계에 충만할 것으로 맹세하노니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가 사로잡히겠다고 말하던 너희의 유아들은 내가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들은 너희가 싫어하던 땅을 보려니와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 너희 자녀들은 너희의 패역한 죄를 지고 너희의 시체가 광야에서 소멸되기까지 사십 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너희가 그 땅을 탐지한 날수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환산하여 그 사십 년간 너희가 너희의 죄악을 질지니 너희가 나의 싫어버림을 알리라 하셨다 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거니와 모여 나를 거역하는 이 악한 온 회중에게 내가 단정코 이같이 행하리니 그들이 이 광야에서 소멸되어 거기서 죽으리라

 

특별히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는 쉽게 잘 이해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잘 이해되지 않고 납득되지 않아서 의문을 가지게 하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에덴동산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해놓으셨으면 그만이지 왜 하필이면 거기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만들어놓으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왕에 만들어놓으셨으면 따먹지 못하게 조치를 취하실 일이지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왜 그것을 따먹도록 내버려두셔서 아담과 하와로 범죄하게 하시느냐입니다. 왜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에게 이렇듯 커다란 불행이 돌아오게 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이렇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참으로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는 평생을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하여 수고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모세는 마땅히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보세요.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비스가 산 언덕에서 멀리 가나안땅을 바라보았을 뿐, 몸소 그 약속의 땅에 발을 디뎌보지는 못한 채 느보 산에서 죽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모세는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까------이것이 두 번째 질문입니다.

세 번째 질문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사람들이 왜 가나안으로 다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많은 사람이 죽어야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내실 때에 그들은 그리 선하고 진실하고 착한 백성이 다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한 지가 어언 430년입니다. 노예 중에 살았고 노예 중에 태어났습니다. 노예체질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저하게 노예로 사는 그들을 하나님께서 구속하셨습니다. 큰 권능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끝까지 다 가나안땅으로 들여보내셨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회전(回轉)시키십니다. 지금 저들은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가나안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제 강 하나만 건너가면 가나안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광야길로 돌려보내십니다. 광야로 회전시키시어 40년을 그 뜨거운 사막에서 고생하도록 그렇게 역사하십니다. 보십시오. 오늘의 본문은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를 누누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와 모처럼 해방을 경험한 저들이 곧장 약 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 사건은 어찌되었든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왔다는 것만으로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해방을 누리는 것입니다.

출애굽만으로는 자유가 아닙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세요. 저들은 자유를 얻은 것 같았으나, 실은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죽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 25절과 신명기 1장 21, 22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경륜적 심판'이었다고 말입니다.

자유와 자유인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극적으로 얻은 자유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자유,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자유가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정치, 자유로운 경제, 자유로운 여건, 자유로운 환경----이 모든 것이 자유일 수는 있으나 그가 자유인이 되지 못한다면 그 좋은 환경도, 자유로운 환경도 그에게는 결코 복도, 선도, 이로운 것도 될 수 없습니다. 돈은 확실히 우리에게 자유를 줍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사고 싶은 것을 사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지게 합니다. 돈이란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자유의 상징이라고까지 일컬어집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유인이 되지 못한 채, 돈의 가치를 모르고 바로 쓸 줄 모르고 제대로 관리할 줄 모르는 채 이 경제적 자유가 주어진다면 그는 그 돈으로 말미암아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 돈으로 말미암아 더 큰 불행을 사게 될 것입니다.

한때 재산공개니뭐니 해서 돈 많은 사람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부정축재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기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많은 돈을 두고 왜 죽을까요? 얼마나 불행했으면 죽을까요? 생각해보면 비참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다 돈이 많아 가지고, 돈의 노예가 되어 가지고 그 소중한 생명까지 끊어야 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결코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는 얻은 것 같으나 그실 보이지 않는 노예상태에 있었습니다. 더 무서운 노예의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입니다.

'노예와 자유인은 공존하지 않는다'--에이브러햄 링컨의 유명한 말입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하여 남북전쟁을 치를 때입니다. 어느 날 노예해방을 전면적으로 반대하는 모든 장관들이 백악관에 나타나 링컨을 협박했습니다. "당신이 노예해방 운동을 계속한다면 우리 내각은 총사퇴할 것입니다. 그러니 알아서 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링컨은 하루만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한 뒤에 기도실에 들어가 밤새도록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해주시옵소서. 바른 길이 어디에 있는지, 의로운 길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시옵소서.' 이렇게 밤새 기도하고 나서 아침에 각료들을 불러놓고 다음과 같이 그는 말했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노예해방 운동을 중단 없이 밀어붙였습니다.

'자유와 노예가 공존하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정 자유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주위에 얼마나 비참한 노예가 많습니까? 쇠사슬에 손목이 매여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칼에 목이 채여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음대로 다니고 마음대로 먹는 것 같은데 자유인이 아닙니다. 비참한 노예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케이 힐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을 대신하여 우리를 지배하는 세 가지 힘이 있다. 돈과 명예와 향락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을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여러분, 돈의 노예가 된 사람은 정말 비참한 사람입니다. 명예의 노예가 된 사람을 보십시오. 하찮은 명예를 위하여 허덕이는 모습, 꼴불견입니다. 명예와 체면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저 모양이 되어야 합니까? 양심도 팔아먹고 인격도 팔아먹고…… 눈에는 안보이는 것 같으나 이 명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향락도 그렇습니다. 향락적 습관에 매여서 벗어나지 못한 채 향락에 노예된 젊은이들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돈, 명예, 향락--이 세 가지로부터 온전히 자유하지 못하는 한 진정한 의미의 자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진정한 자유인이 되기 전에는 어떤 자유스러운 여건이 주어진다 해도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에게 이로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모름지기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광야길로 되돌려보내십니다. 어렵게 가나안 접경까지 왔는데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하고 되돌려보내십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서 40년을 떠돌게 하십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가나안땅을 탐지한 불신앙적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4절이나 신명기 1장 22절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땅 가까이 왔을 때에 정탐꾼 열두 사람을 보내서 약속의 그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 강하게 요구하므로 모세가 그만 그대로 끌려가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얼마나 크게 책망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분명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언제 저들이 일정표를 가지고 여기까지 왔습니까? 저들이 계획한대로 스스로 길을 찾아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것도 하나님께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기다렸다가 구름기둥이 움직이거든 따라가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쓸데없이 정탐꾼을 보내느냐는 말입니다. 그 자체가 엄청난 불신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크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불신앙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의 보고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정탐꾼 열두 사람 가운데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하고 본대로 이르며 저들을 격려했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열 사람의 정탐꾼은 이와 반대로 아주 절망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그 땅에 흐르고 이것은 그 땅의 실과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이렇듯 절망적인 소식을 전하자 온 백성이 울고불고 통곡을 합니다. 다 망했다고 울부짖습니다. 이 울음소리 속에는 전혀 신앙이 없습니다. 보세요.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으며 말렸지만 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신앙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수락하지 않았습니다. 불신앙적으로 거역하고 반항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종 모세를 돌로 치려 했습니다.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라는 뜻을 품은 무리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집단화하면서 큰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반항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안되겠다, 너희는 다시 광야로 돌아가라, 자유는 얻었으나 아직 너희는 자유인이 아니다, 노예생활을 좀더 해야 되겠다'하시고 저들을 광야로 되돌려보내십니다.

여러분, 사실 감옥에 있어야 할 사람은 감옥에 있어야 세상이 편합니다. 그리고 죄송한 말씀이지만 가난해야 할 사람은 가난해야 세상이 편합니다. 가난해야 할 사람이 부자가 되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천해야 할 사람이 높은 자리에 앉으면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그렇듯이 이스라엘 백성도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이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광야로 되돌려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광야에서 40년을 머물게 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여러분, 이 원망죄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원망하는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심리학적으로 보아도 원망한다는 것은 내 주체의식을 망각한다는 것입니다. 원망하는 시간은 내 정체감을 포기하는 시간입니다. 모든 일의 책임을 내가 져야 하는데, 내가 주인인데,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내 가난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고, 내 실패의 책임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 순간 나라는 존재는 없어집니다. 이미 정신적으로 노예가 된 것입니다. 주인은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원망하는 그 순간 그는 주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루스벨트가 말한 '3대 자유'가 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그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가난하다보면 밥 한 그릇을 위하여 남에게 허리를 굽히게도 됩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자유인일 수 없습니다. 최소한의 먹을 것은 있어야 비굴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인 자유가 소중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도덕적인 자유가 필요합니다. 죄를 짓고 불안해서 쫓기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어느 하늘 아래서라도 그 사람은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불안에 쫓기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폭력에 쫓기고, 정치적 불안과 공포에 쫓기는 사람도 자유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정치적인 안정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자유의 뜻을 모르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를 위하여 주어지는 엄청난 댓가를 모르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모르면 더더욱 자유인이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탕자가 집을 나갔습니다. 자유를 찾아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어서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집을 나간 순간 그는 어두움의 종이 되었고, 타락의 종이 되었고, 죄악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자유인인 것 같으나 그실 그는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본문말씀을 보세요.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22절)"------하나님을 시험하다니,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이적에 대하여 만족하지 않고, 이미 보여주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으로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권능으로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많은 능력과 이적을 보고도, 그 커다란 이적 가운데 살면서도 거듭거듭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우리의 불신앙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이어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23절)"-- ----하나님의 능력도, 권능도, 심판도 없는 것처럼 멸시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심판이 오늘 우리 가운데 얼마나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죄값은 사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심판이 아무 데도 없는 것처럼, 죄를 짓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부정하고도 살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다.

또한 저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원망죄가 가장 큰 죄가 됩니다. 철저한 불신앙입니다. 보세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27절)" 저들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길에 대하여 불평이 많습니다. 마땅히 우리는 조금 불편한 광야의 길이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요,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시는 시련의 길이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믿어야 합니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 순종하며 곱게 따라가야 합니다. 그렇거늘 저들은 줄곧 원망을 합니다. 약속의 땅도 믿지 않습니다. 현재의 은혜도 믿지 않습니다.

원망을 할 따름입니다. 확실히 저들은 불신앙적이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자유인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만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속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Who I am?' 보다는 'Whose I am?'이 중요합니다. 내가 그리스도께 속하고 하나님께 속할 때에 비로소 나의 정체와 나의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저들은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조금만 어려운 일에 부딪혀도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하고 불평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저는 북한에서 8․15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도 잠시요, 공산주의자들이 들어와서 권력을 잡고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일본사람들 밑에 있을 때가 더 좋았다. 8․15해방보다 일제시대가 더 낫다"하는 말이 종종 나돌았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기로 자유인 되기를 포기해서야 되겠습니까? 죽더라도 자유인으로 죽어야지요. 일본사람들 밑에 있을 때를 그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그 때는 밥을 먹고 지금은 죽을 먹는다고 해서 그 노예시절을 그리워해서야 되겠습니까? 보세요. 이스라엘사람들은 조금만 어려워져도 "우리가 애굽땅에서 고기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 : 3)"하고 노예근성을 드러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앞을 바라보십시오.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되느니 안되느니, 가능하다느니 불가능하다느니, 소망적이니 절망적이니…… 이런 의식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제 전공이 종말론이기 때문에 종종 미래학에 대한 책을 읽어볼 때가 있습니다. 미래가 어찌 어찌될 것이다 하고 기술된 내용 가운데 맞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절망적인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다 불 신앙적입니다. 이렇듯 종말론과 미래학은 전혀 다릅니다. 여러분, 인간적 지식과 판단으로 앞날을 전망하는 것처럼 불 신앙적인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된다느니 안 된다느니 하지 마십시오. 또한 외부적 환경에 대하여 절망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외부적 환경에 의하여 사는 것이 아닙니다. 경제가 어떻고 정치가 어떻고는 소용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오직 위를 바라보고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지식과 의지로 현재와 미래를 판단하고는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세상을, 사람을, 자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반 세기 전 8월 15일에 우리는 정치적 해방을 맞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았습니다. 온 국민이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의 가치를 몰랐고,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책임을 몰랐고, 방종과 자유를 혼동하고 있었기에 힘겹게 얻은 그 소중한 자유를 다시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물질의 노예가 되고, 혼란과 무질서의 노예가 되어 마침내 6․25라고 하는 엄청난 전쟁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혁명을 맞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사람들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면서 자유인이 되는 길을 배운 것처럼 우리도 그 많은 고난과 긴 시간 동안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길을 깨달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은 시간 동안 우리로 자유가 무엇인지, 자유인이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사람들에게 빼앗긴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정치, 경제, 문화, 사상, 교육, 언어, 이름……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도덕의식을 빼앗겼습니다. 법질서의식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십자로에 이르렀을 때에 신호등에 붉은 불이 켜지면 차는 당연히 멈춰야 합니다. 선진 자유국가에 사는 사람들을 보면 누구 하나 이를 어기는 사람 없이 다 멈춰 섭니다.

그런데 식민지를 경험한 사람들은 주위를 살펴보고 괜찮다 싶으면 그대로 갑니다. 붉은 신호가 켜져 있는데도 뻔뻔히 그냥 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법은 나 자신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지배하는 저 제국주의자들에게 이롭도록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식민지생활에서 저절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법은 될 수 있는 대로 빠져나가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거역하는 것이 잘하는 일이요, 그것이 잘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의식입니다. 이 식민지 문화가 알게 모르게 아직도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를 지배할 때에 우민정책으로 이 땅의 젊은이들을 타락시켰습니다. 동네마다 술집을 만들고 유곽을 만들어서 타락시켰습니다. 결국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 풍진 세상 공부해서 뭐하냐'하며 놀고먹고 마시는 데에 넋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이 타락성이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세요. 술도 음식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네 사람들은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십니다. 이것이 망국풍조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망국윤리입니다. 일본사람들이 우리 청년들을 무력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놓은 그 잘못된 습성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극단적 이기주의와 이러한 무책임이 어디에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전부가 식민지문화에서 오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도 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까 제 앞에 가는 자동차에서 쥬스를 마셨는지 깡통을 창 밖으로 획 내던지더군요. '차 타지 말아야 할 사람이 탔구먼'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듯 주체의식이 없습니다. 애국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다 식민지의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저희 교회 장로님 가운데 커다란 기업을 경영하는 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그분이 일본의 어느 재벌과 이야기를 나누다 "한국의 기업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애국심이 없기 때문입니다"라는 뼈 있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할말이 없었다고, 마음속으로 한참을 울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제게 하면서 그 장로님 또 우십니다. 사실입니다. 요즘 기업들 좀 보십시오.

자신들에게 이익만 된다고 하면 죄다 수입하려고 합니다. 생산해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발전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만 돈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다 망국윤리입니다. 식민지문화의 잔재입니다. 나 하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 참으로 낯두꺼운 무책임입니다.

해방된 것 같으나 아직도 구석구석 우리는 식민지문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자유인, 그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노예상태에 대한 각성이 없는 이 구제불능의 인간들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가 얼마나 더 이 광야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까? 어디서 자유를 빼앗겼으며, 어디서 자유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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