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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 계명 새 사람(요한복음 13:31-35)

by 【고동엽】 2023.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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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 새 사람(요한복음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들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국민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시력이 좋지 않았던 터라 콘택트 렌즈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 놀다가 어느 순간에 콘택트 렌즈가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렌즈를 찾기 위하여 자기가 놀던 운동장 주변을 몇 시간이나 헤매면서 샅샅이 뒤졌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울먹이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콘택트 렌즈를 잃어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그가 놀던 곳으로 가더니 대번에 조그마한 플라스틱 물체를 찾아서는 "이것이 그 콘택트 렌즈가 아니냐" 하며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소년이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여기 떨어져 있는 것을 저는 왜 못 찾았을까요?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렌즈를 껴야 하는 어두운 눈으로 아무리 찾으면 무엇 하느냐?" 중요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새 세상, 새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각,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세속화하고 오염되었습니다. 본래 가졌던 밝은 눈도 깨끗한 마음씨도 없어지고, 그 처음 마음도 그 처음 사랑도 어느 사이에 시들고 병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새해를 맞이하고, 이대로 새 이야기를 해보았댔자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옛날로 돌아갈 뿐입니다. 새 시간, 새 환경이 새로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인식입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일종의 변화입니다. 죽은 생명에 있어서는, 변화란 죽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서 썩는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진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썩을 뿐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변화란 시간과 더불어 자라고 더 높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란 살아 있는 존재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생명을 논할 필요도, 새것을 운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피조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꾸는 존재입니다. 만물을 개혁하고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만물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보십시오. 가정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웃이 잘못되었습니까, 물질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곤두박질쳐도 상관이 없고, 수없이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심령은 내 것입니다. 오히려 내 심령이 건강하고, 내 심령이 온전함으로 세상을 개혁하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로, 환경의 산물로 이루어지는 마음씨나 성품은 옛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옛사람입니다. 환경을 향하여 도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개혁적 존재----이를 가리켜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콜럼버스 광장에서 한 공산주의 옹호자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직장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집을 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독실한 기독교인 청년 하나가 듣다못해 정면으로 나서서 응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옷 입을 사람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구조가 되고, 새로운 사회가 되고,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도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새로운 인간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야말로 한낱 물거품 같은 꿈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조용하게 외칩니다. 환경 문제도 아니요 세상 문제도 아니요 사회구조 문제도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제쳐두고 먼저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그 사람이 중생해야 한다------기독교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변화해야 환경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십니까? 기대하지 마십시오. 변화하여봤자 별것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밤에 제자들을 앞에 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곧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끌려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빌라도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요, 가룟 유다가 나를 배반할 것이요,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시다. 이것이 이 절박한 환경에, 이 절박한 시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것은 세상이 준 것과 다르니라 너희는 다 나를 떠날 것이나 나는 혼자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몇 시간 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 절박한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듯 평안하고 고요하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그실 새 계명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흔해빠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유행가의 노랫말도 보십시오. 온통 사랑타령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병들었기에 문제입니다. 성경말씀 보십시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4)"-그 주제가 모두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앉혀놓으시고 새삼스럽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어찌 새 계명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새 계명입니까? 사랑이라는 말은 같으나 그 의미가 다릅니다. 사랑의 동기가 다릅니다. 사랑의 자세가 다릅니다. 사랑의 운명이 다릅니다. 사랑의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뜻이 달라질 때에 참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 계명은 사랑이란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것,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 것,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물질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나를 중심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옛 생활이요,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것은 새 생활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억울해하고 한에 맺혀 사는 것이 옛 생활이요, 사랑하고 감사하고 환희에 넘쳐 사는 것이 새 생활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실의와 절망----이것이 옛것이요, 감사와 기쁨과 환희----이것이 새것입니다.

특별히 노예생활과 같이 억지로 하는 것, 죽지 못해서 하는 것, 짜증스러워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옛것입니다. 하나남의 자녀된 긍지와 자랑과 기쁨과 벅찬 감격, 이것이 바로 새것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은 옛것이요,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생활은 새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천신지(新天新地), 하나님의 세계요 신령한 세계요 영원한 세계요 거룩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인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구속의 대사역, 재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렇듯 새 계명은 창조적이요 소망적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개념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받고 싶어하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사랑을 주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사람이 됩니다. 받기 위하여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줌으로써 끝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완전히 상대방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온전히 바뀌는 순간에, 사랑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에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날을 새 날로 믿고 싶습니까? 그렇거든 사랑의 개념을 바꾸어보십시오. 지금까지 못 받아온 사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주기만 할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그토록 안달하고 질투하고 별 짓을 다해봤댔자 아직까지 못 받아온 사랑을 새삼스레 받겠습니까? 잊어버리세요. 이제는 깨끗하게 사랑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의 뜻으로, 깨끗한 사랑의 개념으로 온전히 바꾸어보십시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중생(重生)한 자의 계명---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보세요.

살인하지 말라---이것도 사랑이요, 간음하지 말라---이것도 사랑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주시는 그 모든 말씀이 다 나를 향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새 계명은 어느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한 것입니다. 계명은 억지가 아니요 구속이 아니요 속박이 아닙니다.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정도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깃든 거룩한 사랑을 내가 받았습니다. 주님께로서 받은 사랑의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건 상관없습니다. 주님께로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여러분, 예수님께 발씻김을 받았다는 감격이 아니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로서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을, 그 벅찬 감격을 가지고라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새 계명이요, 바로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나아가 새 계명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생명력 있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할 때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날 죽이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작용을 합니다. 무릇 사랑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맹랑하고 감성적이어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생명력이 바로 이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사랑의 뿌리를 두고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그것이 힘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적인 사랑이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성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대상을 논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이제는 이 환희 안에서 절대적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오전 7시에서 8시까지의 성경강해를 마치고 조반을 먹고 나오는데 거기에 참석한 회원 가운데 한 사람, 아주 잘생긴 어른이 제게 가까이 오더니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좀 별스러워요.

대뜸 "우리 가족은 특별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책을 쓴 것이 있는데, 한 권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봉투를 건넵디다. 궁금해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잡지가 한 권 있더군요. 얼핏 한 페이지를 펴보니 그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디다. 먼저 큰 활자로 뽑아진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데 '우리 부부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해'라고 비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본즉,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부부는 어렸을 때부터 한 고향에 살면서 꽤 오랫동안 연애한 뒤에 결혼해서 30년을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다른 부부들과는 달리 이들은 특별히 1년에 한 번씩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고 합니다.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다시 한 것입니다. 사진도 찍고, 신혼여행도 가고…… 이렇게 30년 동안이나 꾸준히 해왔답니다. 30년 동안 매년 결혼식 올린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앨범에 담아놓았습니다. 바로 그 앨범이 자신들의 재산목록 1호임을 자랑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늘 새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부부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할만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 가정만 이런 새로움을 누려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합니까? 왜 그 소중한 날들을 그렇듯 허비하고 살아야 합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 가운데 밤낮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는 분이 있습니다. 심방갈 때면 "남편은 좀 나아졌습니까?"하고 묻습니다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져만 간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같이 사나 싶어서 물어보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어떻게 그런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 집사님 대답이 걸작입니다.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서야 무슨 사랑의 응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저가 누구인지, 저가 내게 어떻게 하는지, 세상이 어떠한지, 그런 것을 묻지 맙시다.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서로를 사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화할 때에 비로소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새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귀로 듣고, 사랑의 마음으로 만물을 대합시다. 새해에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합시다. 이렇게 출발할 때에 비로소 이 날이 우리에게 또 다른 새 해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여기에 새로운 창조의 길이 있습니다. *  

새 계명 새 사람(요한복음 13:31-35)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들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국민학교에 다니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시력이 좋지 않았던 터라 콘택트 렌즈를 하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년은 친구들과 정신없이 뛰어 놀다가 어느 순간에 콘택트 렌즈가 빠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렌즈를 찾기 위하여 자기가 놀던 운동장 주변을 몇 시간이나 헤매면서 샅샅이 뒤졌지만 도저히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울먹이면서 사정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콘택트 렌즈를 잃어버렸어요.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요." 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그가 놀던 곳으로 가더니 대번에 조그마한 플라스틱 물체를 찾아서는 "이것이 그 콘택트 렌즈가 아니냐" 하며 아이에게 보여줍니다.

소년이 어머니에게 묻습니다. "여기 떨어져 있는 것을 저는 왜 못 찾았을까요? 그렇게도 애를 썼는데……"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렌즈를 껴야 하는 어두운 눈으로 아무리 찾으면 무엇 하느냐?" 중요한 교훈이 담긴 이야기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습니까? 세상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시간이 흘러간다고 새 세상, 새해가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문제입니다. 알게 모르게 우리의 시각, 우리의 마음이 어두워지고 세속화하고 오염되었습니다. 본래 가졌던 밝은 눈도 깨끗한 마음씨도 없어지고, 그 처음 마음도 그 처음 사랑도 어느 사이에 시들고 병들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새해를 맞이하고, 이대로 새 이야기를 해보았댔자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옛날로 돌아갈 뿐입니다. 새 시간, 새 환경이 새로움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새로운 시각과 새로운 인식입니다.

사람이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새로워진다는 것은 일종의 변화입니다. 죽은 생명에 있어서는, 변화란 죽음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계속해서 썩는 것입니다.

생명이 끊어진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썩을 뿐입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반면에 살아 있는, 생명력 있는 존재에 있어서는, 변화란 시간과 더불어 자라고 더 높이 성장하는 것입니다. 생명력이란 살아 있는 존재에만 있습니다. 따라서 죽은 존재에 대해서는 생명을 논할 필요도, 새것을 운위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을 가리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피조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입니다. 또한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꾸는 존재입니다. 만물을 개혁하고 창조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에 만물을 새롭게 하고, 만물을 창조하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보십시오. 가정이 잘못되었습니까, 이웃이 잘못되었습니까, 물질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잘못되었습니까? 세상이 곤두박질쳐도 상관이 없고, 수없이 뒤바뀌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내 심령은 내 것입니다. 오히려 내 심령이 건강하고, 내 심령이 온전함으로 세상을 개혁하기도 하고, 세상을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로, 환경의 산물로 이루어지는 마음씨나 성품은 옛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옛사람입니다. 환경을 향하여 도전하면서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는 개혁적 존재----이를 가리켜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뉴욕의 콜럼버스 광장에서 한 공산주의 옹호자가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있었습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에게 새로운 옷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직장을 줄 것입니다. 새로운 집을 줄 것입니다." 이를 지켜보던 독실한 기독교인 청년 하나가 듣다못해 정면으로 나서서 응수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새 옷 입을 사람을 만드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구조가 되고, 새로운 사회가 되고, 새로운 인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공산주의는 새로운 환경도 만들지 못했을 뿐더러 새로운 인간도 만들 수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야말로 한낱 물거품 같은 꿈이었습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사라지게 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조용하게 외칩니다. 환경 문제도 아니요 세상 문제도 아니요 사회구조 문제도 아니다. 이런 것은 다 제쳐두고 먼저 사람이 달라져야 한다,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 그 사람이 중생해야 한다------기독교는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이 변화해야 환경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회가 변하기를 바라십니까? 기대하지 마십시오. 변화하여봤자 별것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바로 전 날밤에 제자들을 앞에 하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이 이제 곧 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끌려가 십자가에 죽으실 것임을 예언하십니다. 빌라도가 나를 십자가에 못박을 것이요, 가룟 유다가 나를 배반할 것이요,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십시다. 이것이 이 절박한 환경에, 이 절박한 시간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합니다. "내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것은 세상이 준 것과 다르니라 너희는 다 나를 떠날 것이나 나는 혼자가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몇 시간 뒤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그 절박한 시각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듯 평안하고 고요하게 말씀을 전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바로 그 절박한 순간에 예수님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절)"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만, 그실 새 계명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말처럼 흔해빠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유행가의 노랫말도 보십시오. 온통 사랑타령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병들었기에 문제입니다. 성경말씀 보십시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레 19:18)"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골 3:14)"-그 주제가 모두 '사랑하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앉혀놓으시고 새삼스럽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어찌 새 계명입니까? 어떤 의미에서 새 계명입니까? 사랑이라는 말은 같으나 그 의미가 다릅니다. 사랑의 동기가 다릅니다. 사랑의 자세가 다릅니다. 사랑의 운명이 다릅니다. 사랑의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 사람이 됩니다. 사랑의 뜻이 달라질 때에 참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새 계명은 사랑이란 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속한 것, 하나님의 자유에 속한 것,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이 새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하늘나라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물질에 속한 것은 옛것이요, 신령한 세계에 속한 것은 새것입니다. 나를 중심해서 이기적으로 사는 것은 옛 생활이요, 하나님을 중심해서 사는 것은 새 생활입니다. 미워하고 증오하고 억울해하고 한에 맺혀 사는 것이 옛 생활이요, 사랑하고 감사하고 환희에 넘쳐 사는 것이 새 생활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짜증과 실의와 절망----이것이 옛것이요, 감사와 기쁨과 환희----이것이 새것입니다.

특별히 노예생활과 같이 억지로 하는 것, 죽지 못해서 하는 것, 짜증스러워하면서 하는 것이 바로 옛것입니다. 하나남의 자녀된 긍지와 자랑과 기쁨과 벅찬 감격, 이것이 바로 새것입니다.

율법적인 생활은 옛것이요, 하나님께 구속함을 받은 생활은 새것입니다. 이것이 곧 신천신지(新天新地), 하나님의 세계요 신령한 세계요 영원한 세계요 거룩한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세계인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구속의 대사역, 재창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렇듯 새 계명은 창조적이요 소망적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개념도 늘 새로워져야 합니다.

여러분, 지난날을 생각해보십시오. 사랑을 받고 싶어하며 살았습니까? 이제는 사랑을 주며 살아갈 것입니다. 사랑은 결코 받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의 개념이 바뀔 때에 새사람이 됩니다. 받기 위하여 주는 사랑이 아닙니다.

줌으로써 끝내야 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사랑은 완전히 상대방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이 온전히 바뀌는 순간에, 사랑의 개념이 바뀌는 순간에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날을 새 날로 믿고 싶습니까? 그렇거든 사랑의 개념을 바꾸어보십시오. 지금까지 못 받아온 사랑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이제부터는 사랑을 주기만 할 것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고자 그토록 안달하고 질투하고 별 짓을 다해봤댔자 아직까지 못 받아온 사랑을 새삼스레 받겠습니까? 잊어버리세요. 이제는 깨끗하게 사랑하고 희생할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의 뜻으로, 깨끗한 사랑의 개념으로 온전히 바꾸어보십시오.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중생(重生)한 자의 계명---이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보세요.

살인하지 말라---이것도 사랑이요, 간음하지 말라---이것도 사랑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주시는 그 모든 말씀이 다 나를 향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새 계명은 어느 누구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자유한 것입니다. 계명은 억지가 아니요 구속이 아니요 속박이 아닙니다.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여러분, 여러분의 사랑의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어느 정도나 사랑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슴속에 있는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깃든 거룩한 사랑을 내가 받았습니다. 주님께로서 받은 사랑의 감격으로 살아갑니다.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건 상관없습니다. 주님께로서 엄청난 사랑을 받았으니 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8절)" 여러분, 예수님께 발씻김을 받았다는 감격이 아니고는 남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로서 받은 그 엄청난 사랑을, 그 벅찬 감격을 가지고라야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새 계명이요, 바로 이런 사람이 새 사람입니다.

나아가 새 계명에서 말씀하는 사랑은 생명력 있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할 때에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순교하는 순간에도 날 죽이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생명력이 작용을 합니다. 무릇 사랑에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맹랑하고 감성적이어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생명력이 바로 이 십자가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렇듯 십자가에 사랑의 뿌리를 두고 사람들을 사랑할 때에, 그것이 힘있는 사랑인 것입니다. 누구라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계속적인 사랑이요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할 것입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랑의 성격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대상을 논하지 말고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이제는 이 환희 안에서 절대적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얼마 전, 어느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일입니다. 오전 7시에서 8시까지의 성경강해를 마치고 조반을 먹고 나오는데 거기에 참석한 회원 가운데 한 사람, 아주 잘생긴 어른이 제게 가까이 오더니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좀 별스러워요.

대뜸 "우리 가족은 특별한 가족입니다. 그래서 책을 쓴 것이 있는데, 한 권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봉투를 건넵디다. 궁금해서 돌아오는 차안에서 봉투를 열어보았더니 잡지가 한 권 있더군요. 얼핏 한 페이지를 펴보니 그분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습디다. 먼저 큰 활자로 뽑아진 제목이 눈에 들어오는데 '우리 부부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한번 나와보라고 해'라고 비어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자세히 읽어본즉,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그 부부는 어렸을 때부터 한 고향에 살면서 꽤 오랫동안 연애한 뒤에 결혼해서 30년을 살아왔답니다. 그런데 다른 부부들과는 달리 이들은 특별히 1년에 한 번씩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고 합니다. 면사포를 쓰고 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다시 한 것입니다. 사진도 찍고, 신혼여행도 가고…… 이렇게 30년 동안이나 꾸준히 해왔답니다. 30년 동안 매년 결혼식 올린 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앨범에 담아놓았습니다. 바로 그 앨범이 자신들의 재산목록 1호임을 자랑합니다.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 아닙니까? 늘 새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새롭게 살아가고자 하는 것이니, 정말 문자 그대로 '우리 부부보다 더 다정한 부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할만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이 가정만 이런 새로움을 누려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은 왜 이렇게 못합니까? 왜 그 소중한 날들을 그렇듯 허비하고 살아야 합니까?

제가 아는 집사님 가운데 밤낮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는 분이 있습니다. 심방갈 때면 "남편은 좀 나아졌습니까?"하고 묻습니다만,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심해져만 간답니다. 그러고도 어떻게 같이 사나 싶어서 물어보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시 "어떻게 그런 남편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니, 그 집사님 대답이 걸작입니다.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사랑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이렇게 살아서야 무슨 사랑의 응답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저가 누구인지, 저가 내게 어떻게 하는지, 세상이 어떠한지, 그런 것을 묻지 맙시다. 다시 한번 십자가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좇아 서로를 사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화할 때에 비로소 새 사람이 될 것입니다.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새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사랑의 눈으로 보고, 사랑의 귀로 듣고, 사랑의 마음으로 만물을 대합시다. 새해에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합시다. 이렇게 출발할 때에 비로소 이 날이 우리에게 또 다른 새 해 새 날이 될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여기에 새로운 창조의 길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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