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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여호와의 구원의 손(이사야 59장 1절~8절)

by 【고동엽】 2024.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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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구원의 손(이사야 59장 1절~8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헬라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이 안 보인다는 말이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오." 장님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이 꺼진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등을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위험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불이 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 되어질 줄로 알고, 아직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안다고 여기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8절)." 모두가 평안을 원하고 안전을 원합니다마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젊은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이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뜻밖에도 유방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조기진단이 중요하다고 늘상 강조하는 의사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 아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몰랐습니까?" 남편 대답인즉 자기 아내는 한 번도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본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산다고 해서 건강한 게 아닙니다. 의사라고 해서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이 유방암으로 죽는다면 이 얼마나 난센스 같은 일이겠습니까? 보세요. 이런 환경 속에 있으면 뭔가 다 되는 줄 압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있으면 뭔가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유익해도 내가 문을 열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진찰을 받고, 내가 치료를 받고, 내가 생각을 해야지요. 나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데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누가복음 19장 4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얼마 전에 감람산 기슭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셨습니다. 탄식을 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 평화에 관한 일, 평강의 길이 여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이 숨겨졌습니다. 알 길이 없어요. 이러고 나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헛된 것입니다. 평강의 길을 모르고, 평강의 길을 찾지 못하고 쏟아 붓는 그 모든 노력과 수고라는 것은 허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라는 것은, 먼저 외적 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환경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자유를 빼앗기는 수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고통을 당합니다. 흔히들 정치적 고통이라고 말하는, 이러한 고통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한번 정치가 잘못되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제가 동독과 서독을 가보았습니다.

지금은 통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 동독과 서독은 서로 갈라진 채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독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사십 년 동안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동독의 어느 기차역에 들어가 보고 놀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귀신은 못봤습니다만, 꼭 이런 곳에 귀신이 나올 것만 같더라구요.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창고같이 지저분하게 되어 있는지 말도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온 백성이 사십 년 동안 굉장한 고생을 했습니다. 정치적 고통, 이것 참 대단한 것입니다. 정치를 잘하면 이렇게 자유롭게 잘살 수도 있는데, 똑같은 사람을 놓고도 정치를 잘못하면 외적 강압에 의해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평양에 갔을 때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것을 보면서 '내가 만일에 피난을 못갔더라면 나도 이렇게 될 뻔했구나, 큰일날 뻔했구나'하고 아찔했습니다. 뭐, 도리가 있습니까? 정치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불행은 절대빈곤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경제문제 또한 중요합니다. 요사이 우리는 다 잊어버렸습니다마는, 그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요. 배고프고 헐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세 번째 불행은 사회적 고통, 혹은 교육적 고통입니다.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듣지 못한 것입니다.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불쌍한 것입니다. 제가 북녘 땅에 가서 참 마음 아팠던 것이 있습니다. 제 라디오를 가져가서 들어보니까 여기 남한 방송이 다 잘 들립니다. 오히려 잡음 없이 더 깨끗하게 잘 들립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라디오가 없어요. 다만 집집마다 작은 나무상자로 된 스피커를 하나 매달아놓았더군요. 유선 방송을 들을 수 있게 설치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상자에는 스위치가 없어요.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고 켜지도 못해요. 그래, 나오는 방송은 고스란히 다 들어야 됩니다. 그것만 들어야 됩니다. 또, 신문도 없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만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제가 아는고 하니, 북한의 어느 시골에 갔을 때에 그곳의 공산당원한테 제가 가지고 있던 노동신문을 주려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는 것이예요.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당원인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것은 아무나 보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원 세상에…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저희들 공산당원끼리도 신문을 볼 사람이 있고 못 볼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못 듣고 못 보는 것이지요. 그 나무상자에서 나오는 소리 외에는 들은 게 없어요. 저를 만나러 평양에 왔던 제 조카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마을 밖으로 나온 것이 25년만이라고요.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그곳 공산당원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뭐 왔다갔다할 것이 있나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수령님을 모시고 이렇게 만족하며 사는데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랍니까?" 합니다. 그것, 말이 됩니다.

자, 그러니 가장 불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못 듣고 못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요.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따라서 가장 불행은 길들여진 생활입니다. 다른 것은 못 듣고 못보고, 어떤 것만 보고 어떤 것만 생각하도록 완전히 길들여졌어요. 사실은 가장 불행하면서도 만족한 줄로 알고, 지상낙원에 사는 줄로 알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틀에 길들여진 생활 -- 이것이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생각해보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저는 늘 기도하는 제목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땅이 가난하고 부하고는 상관없어요. 전쟁이 있건 없건 상관없어요.

제 일생의 소원 하나는 온 세상 누구든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좋아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행도 괜찮아요. 복음이 받아들여지도록 마음 문을 열기 위해서라면 폭탄이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문제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은 세상에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토록 많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또한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 원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망적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이 또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려요. 내가 나빠진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가난한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무식한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심지어는 내가 성격파탄자가 된 것은 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전부 남에게 돌리고, 일생을 두고 원망하며 사는 원망 체질의 인간 -- 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인간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고 바라셨던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광야에 데려다 놓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면서 그들에게 바라셨던 것 -- 하나님의 소원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을 원하시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 없다, 하는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은 내게 어려움이 있지만 happy end를 믿습니다. 장차는 잘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잘될 것입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10년 후에든 20년 후에든,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내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 이런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개의치 말아라, 내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마지막(end)은 내 손에 있느니라, 오직 그것만을 믿어라 -- 종말론적 약속을 단단히 믿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고로 현재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약속 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적이고, 이것은 사랑이고, 이것은 말씀이고, 이것은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보다 더 온전케 하는 것이고, 이것은 내게 유익한 것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여기에 다소간의 불행이 있다면, 그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난이 있어도 그 원인은 내게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어도 그것은 '나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기 위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교육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불행의 원인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있다, 내게 고쳐야 될 것이 있고 내게 버려야 될 것이 있기 때문에 있어지는 사건이다 ---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이 논쟁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은가, 하나님께서는 듣지 못하시는가'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짓궂은 사람은 '인구가 너무 많은데 각자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도 바쁘셔서 그 기도를 다 들으실 수 없으시다'하고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마다 전부 따로따로 구하고 있으니까요. 어느 미국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농담을 참 잘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게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의 비서가 어떤 쪽으로 하나님께 결재를 올려야 될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왜요? 믿는 사람들의 기도도 다 그 모양이니까,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무튼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사야 1장 5절에 보면, 징계하다 지친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유하여 계시하십니다. 자식이 잘못해서 아버지가 그를 때렸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아직 상처를 싸매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또 죄를 짓습니다. 또 때려야 합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지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다, 온통 새로 맞은 흔적뿐이요 그것을 싸매지도 못했거늘 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최소한 악을 중단하기라도 해야 매를 멈추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때리다가 지친 아버지의 뜨거운 정열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뵐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은가' --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가'--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버렸는가'--아닙니다. 성경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내게 이 아픔과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아닙니다.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특별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가'--들으시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문제를 전부 하나님의 능력 탓으로 돌립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지혜의 문제요 좀더 나아가서는 사랑, 진노적 사랑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안정을 원하고 평안을 원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문제에서 평안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평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2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죄에 가리웠다 함입니다. 왜입니까? 죄가 두 사이에 틈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담장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수가 없고,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죄에 대해서 일일이 죄목록을 들어가며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먼저는 인격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손에 피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는 남을 상해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그런 인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에도, 칭찬에도, 징계에도, 교훈에도 언제나 악이 있고 독이 담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을 평해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의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4절)"--도대체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믿습니다. 보세요, 오직 기술과 과학주의, 내가 가진 돈 얼마…… 이것을 믿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정말 믿어 볼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역력히 심판하고 계십니다.

또한 문화적인 죄가 있습니다.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6절)"--행동이 반복되면서 습관화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그런 죄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자연히 앞차가 어디를 가는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참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담배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을 그냥 밖으로 내던집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하필이면 제 앞에서 문을 열고 침을 뱉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하는 일인지, 잘하는 일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습이 되어버리고 문화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5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완전히 미국사람들하고만 같이 살다가 고국에 돌아와서 우리나라사람들하고 만났는데, 함께 식당에 가보니 참 괴롭습디다. 옛날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음식을 먹을 때에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마치 돼지가 먹는 것도 같고, 개가 먹는 것과도 같이 여겨져서 정말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이것도 습관입니다. 또, 우리네는 소리를 내면서 먹어야 참 맛있게 먹는다고 여기거든요. 이게 잘못된 것인 줄 전혀 모릅니다. 이게 얼마나 실례인지 생각도 안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잘못된 것이 그만 행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악이, 죄가, 부도덕함이, 부정함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근간에 우리 나라가 사정(司正)을 한다, 바로 한다 하며 한참 부정부패를 엄하게 다스리더니 요새는 '도루묵'입디다.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차라리 서로 돈을 주고받으면서 처리해야 무엇이 좀 되겠는데,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니까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니, "아, 조금씩 주고받아 가면서 일을 해야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적당히 주고받으면서 일을 해야 술술 잘 넘어가는데, 왜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혀 가지고 힘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화화된 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사상적 죄가 있습니다.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7절)"--악을 정당화합니다. 악을 합법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정당하게 고소하는 사람도 없고 정당하게 재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합리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화의 길을 모른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1장 16, 17절을 보세요.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씻어야 됩니다. 회개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공하셨습니까? 찬송하세요. 실패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세요. 뜻대로 되었습니까? 감사하세요. 뜻대로 안되었습니까? 깊이 생각하세요. 알고 있습니까? 찬송하세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까? 이제는 엎드려 회개하세요. 네 죄사함받았느니라, 하시는 말씀이 들릴 때까지 회개하세요. 또 한번 깊이 회개하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는 말씀이 들릴 때까지--회개하세요. 전부 깊이깊이 기도하세요.

내가 당한 불행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특별한 사랑임을 깨닫는 그 시간까지, 그리하여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여, 이 불행을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그 만큼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 말씀이 계십니다. 위기와 현실은 하나님의 통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지혜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구체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전쟁이 터진다고 사재기할 것 없습니다. 위험을 느끼거든 무릎을 꿇으세요.

요한 웨슬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사랑이 고통 중에 저의 평안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사랑이 약함 중에 저의 힘이 되게 하옵소서. 인생의 격랑이 멈추는 날, 그 중대한 순간에, 삶에서와 같이 죽음에서도 저의 안내자가 되시옵소서.

주여, 저를 구원하여주시옵소서."*  

여호와의 구원의 손(이사야 59장 1절~8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웠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발함이라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리대로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잔해를 잉태하여 죄악을 생산하며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쳐졌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곳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헬라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습니다. 어떤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인 것을 알기에 길을 가다가 누구하고 부딪칠 것만 같아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는 필요도 없는 등불이지만 눈뜬 사람들이 그의 등불을 보고 비켜갈 수 있도록 등불을 켜서 들고 밤거리를 나섰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떤 사람과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눈도 없소?" 장님이 소리치자 상대방은 어리둥절합니다. "어두워서 보지를 못했습니다." "내 등불이 안 보인다는 말이오?" 그제야 그 사람이 자세히 살펴보니 장님은 불꺼진 등을 들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꺼진 등불을 들고 있지 않습니까? 어디, 직접 한번 만져보시오." 장님이 등을 만져보니 정말 싸늘했습니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이 꺼진 것도 모른 채 그대로 등을 들고 밤거리를 돌아다닌 것입니다.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위험을 의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불이 꺼진 지는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무엇인가 되어질 줄로 알고, 아직도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고. 혹은 안다고 여기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끝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8절)." 모두가 평안을 원하고 안전을 원합니다마는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얼마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젊은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이 진찰을 받았습니다. 진찰 결과는 뜻밖에도 유방암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가 막혀서 남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조기진단이 중요하다고 늘상 강조하는 의사가 아닙니까? 그런데 어째서 당신 아내가 이렇게까지 된 것을 몰랐습니까?" 남편 대답인즉 자기 아내는 한 번도 병원에 가 진찰을 받아본 일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산다고 해서 건강한 게 아닙니다. 의사라고 해서 건강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산부인과 의사의 부인이 유방암으로 죽는다면 이 얼마나 난센스 같은 일이겠습니까? 보세요. 이런 환경 속에 있으면 뭔가 다 되는 줄 압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있으면 뭔가 다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에게 다 유익해도 내가 문을 열지 아니하면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와의 관계입니다. 내가 진찰을 받고, 내가 치료를 받고, 내가 생각을 해야지요. 나 자신이 의식하지 않는데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성경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누가복음 19장 4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얼마 전에 감람산 기슭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에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우셨습니다. 탄식을 하셨습니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 평화에 관한 일, 평강의 길이 여기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길이 숨겨졌습니다. 알 길이 없어요. 이러고 나서 되어지는 모든 일은 헛된 것입니다. 평강의 길을 모르고, 평강의 길을 찾지 못하고 쏟아 붓는 그 모든 노력과 수고라는 것은 허사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불행이라는 것은, 먼저 외적 조건과 관계가 있습니다. 환경에 의하여 강압적으로 자유를 빼앗기는 수가 있습니다. 원치 않는 고통을 당합니다. 흔히들 정치적 고통이라고 말하는, 이러한 고통이 있습니다. 정말이지 한번 정치가 잘못되면,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전에 제가 동독과 서독을 가보았습니다.

지금은 통일이 되었지만 그 전에 동독과 서독은 서로 갈라진 채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독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사십 년 동안 그곳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동독의 어느 기차역에 들어가 보고 놀란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귀신은 못봤습니다만, 꼭 이런 곳에 귀신이 나올 것만 같더라구요. 얼마나 더럽고 얼마나 창고같이 지저분하게 되어 있는지 말도 못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정치를 잘못하는 바람에 온 백성이 사십 년 동안 굉장한 고생을 했습니다. 정치적 고통, 이것 참 대단한 것입니다. 정치를 잘하면 이렇게 자유롭게 잘살 수도 있는데, 똑같은 사람을 놓고도 정치를 잘못하면 외적 강압에 의해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평양에 갔을 때에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이 아주 가난하고 어려운 것을 보면서 '내가 만일에 피난을 못갔더라면 나도 이렇게 될 뻔했구나, 큰일날 뻔했구나'하고 아찔했습니다. 뭐, 도리가 있습니까? 정치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두 번째 불행은 절대빈곤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경제문제 또한 중요합니다. 요사이 우리는 다 잊어버렸습니다마는, 그 배고픈 설움이 얼마나 컸는지 몰라요. 배고프고 헐벗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더 나아가 생각해보면, 세 번째 불행은 사회적 고통, 혹은 교육적 고통입니다.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듣지 못한 것입니다.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불쌍한 것입니다. 제가 북녘 땅에 가서 참 마음 아팠던 것이 있습니다. 제 라디오를 가져가서 들어보니까 여기 남한 방송이 다 잘 들립니다. 오히려 잡음 없이 더 깨끗하게 잘 들립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라디오가 없어요. 다만 집집마다 작은 나무상자로 된 스피커를 하나 매달아놓았더군요. 유선 방송을 들을 수 있게 설치한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상자에는 스위치가 없어요. 마음대로 끄지도 못하고 켜지도 못해요. 그래, 나오는 방송은 고스란히 다 들어야 됩니다. 그것만 들어야 됩니다. 또, 신문도 없습니다. 신문이라는 것은 공산당원 중에서도 특별한 사람만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실을 제가 아는고 하니, 북한의 어느 시골에 갔을 때에 그곳의 공산당원한테 제가 가지고 있던 노동신문을 주려 했더니 다들 깜짝 놀라는 것이예요. 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도 당원인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그것은 아무나 보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원 세상에…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저희들 공산당원끼리도 신문을 볼 사람이 있고 못 볼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가장 큰 불행이 무엇입니까? 못 듣고 못 보는 것이지요. 그 나무상자에서 나오는 소리 외에는 들은 게 없어요. 저를 만나러 평양에 왔던 제 조카가 분명히 말했습니다. 마을 밖으로 나온 것이 25년만이라고요. 이것은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그곳 공산당원들은 이 사실을 그대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뭐 왔다갔다할 것이 있나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수령님을 모시고 이렇게 만족하며 사는데 이 이상 무엇을 더 바랍니까?" 합니다. 그것, 말이 됩니다.

자, 그러니 가장 불행한 것이 무엇입니까? 못 듣고 못 보는 것입니다. 성경이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어요. 이 얼마나 불행합니까? 따라서 가장 불행은 길들여진 생활입니다. 다른 것은 못 듣고 못보고, 어떤 것만 보고 어떤 것만 생각하도록 완전히 길들여졌어요. 사실은 가장 불행하면서도 만족한 줄로 알고, 지상낙원에 사는 줄로 알고,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어떤 틀에 길들여진 생활 -- 이것이 가장 큰 불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생각해보면,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 저는 늘 기도하는 제목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이 땅이 가난하고 부하고는 상관없어요. 전쟁이 있건 없건 상관없어요.

제 일생의 소원 하나는 온 세상 누구든지 복음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복음이 전해지기 위해서라면 전쟁도 좋아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기 위해서라면 어떤 불행도 괜찮아요. 복음이 받아들여지도록 마음 문을 열기 위해서라면 폭탄이 떨어져도 상관없어요. 문제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밝은 세상에 단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이 이토록 많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입니까?

또한 더 깊이 생각해보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 자기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나님 원망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원망적으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면 이 또한 불행한 사람입니다. 내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려요. 내가 나빠진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가난한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내가 무식한 것은 저 사람 때문이고…… 심지어는 내가 성격파탄자가 된 것은 남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책임을 전부 남에게 돌리고, 일생을 두고 원망하며 사는 원망 체질의 인간 -- 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인간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원하시고 바라셨던 바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고, 광야에 데려다 놓으시고, 그들을 가르치시고 훈련하시면서 그들에게 바라셨던 것 -- 하나님의 소원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믿음을 원하시는고 하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걱정 없다, 하는 믿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지금은 내게 어려움이 있지만 happy end를 믿습니다. 장차는 잘될 것입니다. 마지막은 잘될 것입니다. 틀림없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까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10년 후에든 20년 후에든, 요단강을 건너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가나안 땅은 내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까 -- 이런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은 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개의치 말아라, 내가 약속하지 않았느냐, 마지막(end)은 내 손에 있느니라, 오직 그것만을 믿어라 -- 종말론적 약속을 단단히 믿고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런고로 현재 내가 당하는 어려움은 약속 하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육적이고, 이것은 사랑이고, 이것은 말씀이고, 이것은 우리를 깨닫게 하는 것이고, 이것은 보다 더 온전케 하는 것이고, 이것은 내게 유익한 것이라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지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여기에 다소간의 불행이 있다면, 그 원인은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난이 있어도 그 원인은 내게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어도 그것은 '나로 하나님의 사람 되게 하기 위한' 확실하고도 구체적인 교육적 의미를 가진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불행의 원인은 언제나 나 자신에게 있다, 내게 고쳐야 될 것이 있고 내게 버려야 될 것이 있기 때문에 있어지는 사건이다 ---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서 이 논쟁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의 손이 짧은가, 하나님께서는 듣지 못하시는가'라고 말씀합니다. 어느 짓궂은 사람은 '인구가 너무 많은데 각자가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도 바쁘셔서 그 기도를 다 들으실 수 없으시다'하고 말을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저마다 전부 따로따로 구하고 있으니까요. 어느 미국사람이 이런 말을 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농담을 참 잘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이 너무 복잡하게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의 비서가 어떤 쪽으로 하나님께 결재를 올려야 될는지 모른다고 말입니다. 왜요? 믿는 사람들의 기도도 다 그 모양이니까, 한 마음 한 뜻이 되지 않았으니까 그렇습니다. 아무튼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사야 1장 5절에 보면, 징계하다 지친 아버지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유하여 계시하십니다. 자식이 잘못해서 아버지가 그를 때렸습니다. 피가 흐릅니다. 아직 상처를 싸매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자식이 또 죄를 짓습니다. 또 때려야 합니다. 마침내 아버지는 지쳐서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하느냐, 머리에서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다, 온통 새로 맞은 흔적뿐이요 그것을 싸매지도 못했거늘 어찌하여 더 맞으려고 하느냐'--최소한 악을 중단하기라도 해야 매를 멈추지 않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때리다가 지친 아버지의 뜨거운 정열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뵐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은가' --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한가'--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떠나버렸는가'--아닙니다. 성경은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왜 내게 이 아픔과 고통이 있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는가'--아닙니다.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 때문에 특별한 고통이 있는 것이다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지 아니하시는가'--들으시기 때문에 이 사건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문제를 전부 하나님의 능력 탓으로 돌립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것은 지혜의 문제요 좀더 나아가서는 사랑, 진노적 사랑의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마다 안정을 원하고 평안을 원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문제에서 평안을 원합니다. 그러나 그 평안의 근본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2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죄에 가리웠다 함입니다. 왜입니까? 죄가 두 사이에 틈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담장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실 수가 없고, 우리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은 죄에 대해서 일일이 죄목록을 들어가며 심각하게 말씀합니다. 먼저는 인격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손에 피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우리는 남을 상해하고 남을 해롭게 하는 그런 인격이 되어버렸습니다. 입술은 거짓을 말하고 말에는 독이 있습니다. 웃는 얼굴에도, 칭찬에도, 징계에도, 교훈에도 언제나 악이 있고 독이 담긴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격을 평해주는 것입니다.

또하나는 의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4절)"--도대체 무엇을 믿고 사는 것입니까? 믿을만한 것이 못되는 것을 믿습니다. 보세요, 오직 기술과 과학주의, 내가 가진 돈 얼마…… 이것을 믿어보겠다고 아등바등합니다. 정말 믿어 볼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믿습니다. 이것을 역력히 심판하고 계십니다.

또한 문화적인 죄가 있습니다.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6절)"--행동이 반복되면서 습관화해버렸습니다. 이제는 자연스럽고 평안하게, 그런 죄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면 자연히 앞차가 어디를 가는지 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때에 보면 참 답답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담배에 불이 붙어 있는 것을 그냥 밖으로 내던집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은 하필이면 제 앞에서 문을 열고 침을 뱉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이것이 잘못하는 일인지, 잘하는 일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행습이 되어버리고 문화화 되어버렸기 때문에 내가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5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했습니다.

완전히 미국사람들하고만 같이 살다가 고국에 돌아와서 우리나라사람들하고 만났는데, 함께 식당에 가보니 참 괴롭습디다. 옛날 선교사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음식을 먹을 때에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지 않습니까? 그 모습이 마치 돼지가 먹는 것도 같고, 개가 먹는 것과도 같이 여겨져서 정말 참기가 힘들었습니다. 이것도 습관입니다. 또, 우리네는 소리를 내면서 먹어야 참 맛있게 먹는다고 여기거든요. 이게 잘못된 것인 줄 전혀 모릅니다. 이게 얼마나 실례인지 생각도 안 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잘못된 것이 그만 행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악이, 죄가, 부도덕함이, 부정함이 당연하게 되었습니다.

근간에 우리 나라가 사정(司正)을 한다, 바로 한다 하며 한참 부정부패를 엄하게 다스리더니 요새는 '도루묵'입디다. 가끔 이런 말을 듣습니다. 차라리 서로 돈을 주고받으면서 처리해야 무엇이 좀 되겠는데,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으니까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요. 그래서 제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겠소?"라고 물으니, "아, 조금씩 주고받아 가면서 일을 해야 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제가 목사라는 것은 생각도 안하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사이에 이렇게 되어버렸습니다. 적당히 주고받으면서 일을 해야 술술 잘 넘어가는데, 왜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혀 가지고 힘들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화화된 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사상적 죄가 있습니다.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7절)"--악을 정당화합니다. 악을 합법화합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는 대로, 정당하게 고소하는 사람도 없고 정당하게 재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똑같습니다. 합리적으로 죄를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평화의 길을 모른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남은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이사야 1장 16, 17절을 보세요.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씻어야 됩니다. 회개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성공하셨습니까? 찬송하세요. 실패하고 있습니까? 기도하세요. 뜻대로 되었습니까? 감사하세요. 뜻대로 안되었습니까? 깊이 생각하세요. 알고 있습니까? 찬송하세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까? 이제는 엎드려 회개하세요. 네 죄사함받았느니라, 하시는 말씀이 들릴 때까지 회개하세요. 또 한번 깊이 회개하세요.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하시는 말씀이 들릴 때까지--회개하세요. 전부 깊이깊이 기도하세요.

내가 당한 불행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특별한 사랑임을 깨닫는 그 시간까지, 그리하여 이 불행을 통하여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을 때까지, '하나님이여, 이 불행을 감사합니다'라고 할 수 있을 때까지--그 만큼 회개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과 경륜, 말씀이 계십니다. 위기와 현실은 하나님의 통첩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지혜가 여기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구체적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전쟁이 터진다고 사재기할 것 없습니다. 위험을 느끼거든 무릎을 꿇으세요.

요한 웨슬리의 기도가 있습니다.

"주의 사랑이 고통 중에 저의 평안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사랑이 약함 중에 저의 힘이 되게 하옵소서. 인생의 격랑이 멈추는 날, 그 중대한 순간에, 삶에서와 같이 죽음에서도 저의 안내자가 되시옵소서.

주여, 저를 구원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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