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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악한 종(누가복음 16:1-9)

by 【고동엽】 2024.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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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악한 종(누가복음 16:1-9)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을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히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사람은 지혜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유와 행복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위와 평안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혜와 행복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꼭 지혜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가 많다고 반드시 그가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지위가 높다고 평안이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들을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솔로몬 왕은 스물 한 살에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답답한 중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이러한 참 귀한 기회에 솔로몬은 오직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 지혜를 구한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원수의 성도 장수도 건강도 그 많은 물질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혜를 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혜가 가장 귀하다고 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으로부터 지혜를 배웠습니다. 잠언 6:6 이나 30:24 이하를 보면 개미에게서 부지런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사반에게서 배우고, 메뚜기에게 배우고, 도마뱀으로부터도 배우라고 말씀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부터 지혜를 배울 뿐 아니라 악한 사람으로부터도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순하기와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 지혜는 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서는 뱀이란 악의 상징입니다. 악한 자로부터도 지혜는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오해하기 쉽고 또 난해한 성경 본문입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겸손히 상고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오묘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살아 가게 되었고, 또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겠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한 예만 들지 않았고 악한 사람으로부터도 지혜를 배우는 비결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선한 모델만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주로 악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도 계속 지혜는 배워 나가야 한다는 그런 높은 차원의 지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청지기를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결코 이 청지기가 선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악이 정당화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이 악한 청지기로부터 지혜, 그것만은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청지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서 청지기를 둡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주인의 수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수하에 많은 종을 거느리고 일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대신 관리하는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율성도 있고 타율성도 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행실이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악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주인은 찾아와서 "이런 소문이 들리니 어찌 됐느뇨? 네 청지기 직분을 여기서 중지시켜 빼앗겠으니, 그 동안 네가 한 일을 결산하라. 셈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지혜롭습니다. "자, 이제 와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했습니다. 그것도 늘 파던 사람이 파는 것이지, 안 하던 일 하기가 어렵다 하는 얘기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했는데 그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좋겠는가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짜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옳지 않은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결국 주인이 칭찬한 것은 그 지혜뿐입니다. 이 청지기가 선하다든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악하지만 지혜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그 지혜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다시 복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혜만은 칭찬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인의 돈을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일을 생각했는데, 남은 시간과 남은 기간을 잘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서 빚진 사람들을 다 오라고 해 놓고 "너 얼마나 빚졌느뇨?" "기름 백 말입니다." "빨리 앉아서 증서에 오십 말이라고 써라." 했습니다. 이건 공문서 위조입니다. 그 다음에 "너는 얼마나 빚졌는냐?"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아, 그래? 이제 팔십이라고 써라." 20퍼센트를 탕감해 주는 겁니다. 이것은 횡령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아주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뒤에 자기가 쫓겨날 때 덕을 준 사람들이 도와 줄 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로운 바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과거의 잘못을 곧 시인했다는 점입니다. 사실을 시인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가 문제입니다. 기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때로 보면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아서 사업은 망한 지 오래되어 재산을 계산하면 자기 돈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장입니다. 여전히 큰소리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벌써 일은 끝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패한 것은 실패한 대로 사실을 시인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청지기에게는 그 지혜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없고도 있는 척, 안되고도 된 것처럼 구는 것은 쓸데없는 노릇입니다. "벌써 떠났어요, 벌써 끝났어요, 벌써 죽었어요." 이 사실은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이 청지기는 지혜로웠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자기 나름으로서는 그래도 한 마디쯤은 변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주인이 심판해 주시는 대로 시인하고 맙니다.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 그러하니 이런 일은 있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놓고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따먹었느냐?" 하니 아담은 대답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따먹으래서 따먹었습니다" 고 핑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또 하와에게 묻기를 "너는 왜 따먹었느냐?" 하니 "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고 핑계했습니다. 정말 주체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구 말을 들었다는 얘기,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는 먼저 죄짓는 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죄를 계속하는 죄가 있습니다. 첫 번 범죄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 내친걸음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변명하는 죄가 있습니다. 죄가 아니라고 이래저래 변명을 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는 죄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층으로 죄는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 때문이다"라고 하거나 "뭐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주인이 "네가 잘못 했다" 하는 순간에 "맞습니다"고 즉각적으로 시인해 버립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잘못된 것이지요. 구구한 얘기가 무엇이 필요합니까? 대개 보면 "잘못 되었습니다만" 하고 나서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이것부터가 필요 없습니다. 잘못 됐으면 잘못된 것으로 말은 간단히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어떻고" "환경이 어쩌고" 하는 이것이 당초에 잘못된 것이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을 보면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했습니다. 알았다는 말은 원문 그대로 보면 순간적인 결정입니다. 즉각적인 시인입니다.

"내가 잘못 했다"에 "맞습니다"고 그대로 시인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또한 그는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청지기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요, 주인의 심판에 따라서 언젠가는 끝이 온다 그 말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졌습니까? 이 재물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건강이 있습니까? 아무리 위생을 지켜도 언젠가는 이 건강도 없어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내가 앉은 회전 의자에 항상 앉아 있는 것이 아니요 언젠가는 내려앉아야 됩니다.

어느 헬라의 장군은 큰 성을 점령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자기가 점령한 성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외쳤다는 겁니다. "다음에는 누가 이 성을 점령할 것이냐?" 내가 점령한 이 성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점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살던 집에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이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끝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빼앗기게 됩니다.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될 것입니다. 종말을 아는 지혜, 이것이 이 사람이 가졌던 귀한 지혜였습니다.

기독교인의 고난관으로 말하면 이 고난도 잠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해도 잠깐 지나갑니다.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몸뿐이요 결코 마음은 아닙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받을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앞에 있는 영광과 오늘에 당한 고난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각입니다. 끝은 옵니다. 반드시 끝은 있고 그 뒤에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또 한가지 지혜가 뭐냐 하면 남은 것을 생각한 점입니다.

남은 시간, 남은 기회를 선용했습니다. 없는 중에도 남은 것, 끊어진 중에도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절망하는 것을 봅니다. 의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누구나 90퍼센트가 제 명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아직도 의학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 하면 곧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몸으로서는 더 살 수 있는 사람인데도 "이제 죽는다" 하면 미리 절망해서 거꾸러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어도 아직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다"는 뜻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갔다가 상은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피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가진 바가 있습니다.

없는 중에도 있는 것이 있고, 모르는 중에도 아는 것이 있고, 다 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아직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악한 청지기는 "네 보던 일을 셈하자" 하는 선언을 받는 순간 끝이 왔습니다. 그는 끝을 시인합니다만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 셈을 끝낼 때까지는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최대한도로 이용합니다. 남은 시간, 남은 정력, 남은 가진 것, 그 남은 바를 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까? 후회라는 것보다 큰 낭비는 없습니다. 미래의 환상에 젖어 있습니까? 이것은 더 큰 낭비의 출발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결론을 맺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이 말은 불합당하고 불의한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문맥에 의해서 의역하면, 이 청지기가 벌어들이는 돈이 불의한 재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해도 되겠습니다. "어차피 없어질 재물이니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선행이 별것 아닙니다. 어차피 재산은 남에게 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남의 것이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살아 있을 때 남에게 주면 선행입니다. 영원히 가지고 누릴 그러한 것을 가지고 남에게 주라는 얘기가 아니요, 어차피 남의 것이 될 것을 미리 주라 그것입니다. 어차피 빼앗길 것이니 빼앗길 바에야 내가 주라는 이것뿐입니다.

무슨 대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잃어버릴 건강, 어차피 없어질 건강인데 힘껏 일해봅시다. 어차피 남의 것이 될 재물인데, 그저 좋은 일에 함 번 듬뿍 써 봅시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인데 있는 동안 보람있게 살 마음 없습니까? 이게 바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끝은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유가 있습니다. 단지 남은바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1976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 파사디나에서 감격적인 피아노 독주회를 가 보았습니다. 생전에 그런 광경은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피아노라 하면 누구나 두 손으로 치는 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른손은 없고 왼손 하나뿐입니다. 왼손 하나 가지고 독주회를 합니다. 참 굉장합니다. 그가 땀을 흘려 가면서 피아노 치는 것을 보고 정말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한 손이 없는 게 아니라 한 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한 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하고 한달을 입원해 계셨습니다. 퇴원한 다음에 만났는데 병문안을 못 가서 좀 멋 적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병원에 한달 동안 가 있으면서 뭘 배웠소?"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그 동안에는 그저 무슨 책을 쓸까? 무슨 연구를 할까? 어디 가서 얼마 동안 있으면서 연구를 할까? 하는 식으로 뭐 할까, 뭐 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있자니까 이제 내 생을 어떻게 끝내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더군"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철났구만" 그랬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언제 철이 날 것입니까? 한계는 눈앞에 왔습니다.

석양이 기울어집니다. 이제 남은 바를 굳게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니 악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후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종말적 지혜 하나만은 꼭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악하고 불의한 청지기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이 됩니다. 여러분 이제 시인하고, 이제 끝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기도 :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지만 된 것이 있는 것처럼 속고 속이고 살아오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불충한 지난날을 이대로 시인하며, 주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을 주시옵소서. 주여 끝을 아는 지혜를 주시고, 그리고 남은 날을 아는 지혜를 주시고, 남은 시간, 남은 정력, 남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혜로운 악한 종(누가복음 16:1-9)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을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히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사람은 지혜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지식과 지혜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소유와 행복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위와 평안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혜와 행복과 평안이 있는 것입니다.

지식이 있다고 꼭 지혜가 함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유가 많다고 반드시 그가 행복한 것도 아닙니다. 지위가 높다고 평안이 따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것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들을 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의하면 솔로몬 왕은 스물 한 살에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답답한 중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간절히 기도했고,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들었습니다. "너는 내게 구하라, 내가 네게 무엇을 줄까?" 이러한 참 귀한 기회에 솔로몬은 오직 지혜를 구했습니다. 이 지혜를 구한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원수의 성도 장수도 건강도 그 많은 물질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 "나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이렇게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지혜를 구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혜가 가장 귀하다고 하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모든 것으로부터 지혜를 배웠습니다. 잠언 6:6 이나 30:24 이하를 보면 개미에게서 부지런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사반에게서 배우고, 메뚜기에게 배우고, 도마뱀으로부터도 배우라고 말씀하는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선한 사람으로부터 지혜를 배울 뿐 아니라 악한 사람으로부터도 지혜를 배웁니다.

예수님께서는 "순하기와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 지혜는 뱀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개념으로서는 뱀이란 악의 상징입니다. 악한 자로부터도 지혜는 배우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은 오해하기 쉽고 또 난해한 성경 본문입니다. 그러나 어렵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겸손히 상고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오묘한 말씀입니다.

본문의 초점은 예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 이 죄악 많은 세상에 살아 가게 되었고, 또 여기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겠으니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한 예만 들지 않았고 악한 사람으로부터도 지혜를 배우는 비결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선한 모델만을 따라 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주로 악한 것들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도 계속 지혜는 배워 나가야 한다는 그런 높은 차원의 지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는 악한 청지기를 비유로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결코 이 청지기가 선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악이 정당화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이 악한 청지기로부터 지혜, 그것만은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어떤 청지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돈 많은 사람이 자기의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서 청지기를 둡니다. 그래서 청지기는 주인의 수하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기 수하에 많은 종을 거느리고 일을 맡게 됩니다. 그리고 돈을 대신 관리하는 그러한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율성도 있고 타율성도 있습니다. 이것이 청지기입니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행실이 좋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악했습니다.

그리고 주인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주인은 찾아와서 "이런 소문이 들리니 어찌 됐느뇨? 네 청지기 직분을 여기서 중지시켜 빼앗겠으니, 그 동안 네가 한 일을 결산하라. 셈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생각하는 것이 아주 지혜롭습니다. "자, 이제 와서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했습니다. 그것도 늘 파던 사람이 파는 것이지, 안 하던 일 하기가 어렵다 하는 얘기입니다. 또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했는데 그것도 맞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면 좋겠는가 생각하다가 하나님의 지혜를 짜내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옳지 않은 청지기의 지혜입니다.

결국 주인이 칭찬한 것은 그 지혜뿐입니다. 이 청지기가 선하다든지 잘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록 악하지만 지혜는 있었다는 말입니다. 주인은 그 지혜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모름지기 다시 복직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지혜만은 칭찬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런 것입니다. 주인의 돈을 낭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와서 어떡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일을 생각했는데, 남은 시간과 남은 기간을 잘 이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인에게서 빚진 사람들을 다 오라고 해 놓고 "너 얼마나 빚졌느뇨?" "기름 백 말입니다." "빨리 앉아서 증서에 오십 말이라고 써라." 했습니다. 이건 공문서 위조입니다. 그 다음에 "너는 얼마나 빚졌는냐?" "밀 백 섬을 빚졌습니다." "아, 그래? 이제 팔십이라고 써라." 20퍼센트를 탕감해 주는 겁니다. 이것은 횡령입니다.

그는 이런 식으로 했습니다. 아주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뒤에 자기가 쫓겨날 때 덕을 준 사람들이 도와 줄 것이 아니냐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지혜로운 바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과거의 잘못을 곧 시인했다는 점입니다. 사실을 시인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좋으냐 나쁘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냐가 문제입니다. 기분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이 무엇이냐가 중요합니다.

때로 보면 이미 빚더미에 올라앉아서 사업은 망한 지 오래되어 재산을 계산하면 자기 돈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사장입니다. 여전히 큰소리칩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벌써 일은 끝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아는 것은 아는 대로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실패한 것은 실패한 대로 사실을 시인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구구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대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청지기에게는 그 지혜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사실과 진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모르고도 아는 척, 없고도 있는 척, 안되고도 된 것처럼 구는 것은 쓸데없는 노릇입니다. "벌써 떠났어요, 벌써 끝났어요, 벌써 죽었어요." 이 사실은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이 청지기는 지혜로웠습니다. 변명이 없습니다.

자기 나름으로서는 그래도 한 마디쯤은 변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주인이 심판해 주시는 대로 시인하고 맙니다.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올 때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일이 그러하니 이런 일은 있어야 할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경우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하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어 놓고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따먹었느냐?" 하니 아담은 대답하는 말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저 여자가 따먹으래서 따먹었습니다" 고 핑계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또 하와에게 묻기를 "너는 왜 따먹었느냐?" 하니 "저 뱀이 따먹으라고 해서 따먹었습니다" 고 핑계했습니다. 정말 주체 의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누구 말을 들었다는 얘기, 이것이 문제입니다.

죄는 먼저 죄짓는 죄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죄를 계속하는 죄가 있습니다. 첫 번 범죄가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습니다. 내친걸음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세 번째는 죄를 변명하는 죄가 있습니다. 죄가 아니라고 이래저래 변명을 하려고 합니다. 네 번째는 죄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죄가 있습니다. 이렇게 네 층으로 죄는 점점 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 때문이다"라고 하거나 "뭐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주인이 "네가 잘못 했다" 하는 순간에 "맞습니다"고 즉각적으로 시인해 버립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잘못된 줄 알았으면 잘못된 것이지요. 구구한 얘기가 무엇이 필요합니까? 대개 보면 "잘못 되었습니다만" 하고 나서 어쩌고저쩌고 합니다.

이것부터가 필요 없습니다. 잘못 됐으면 잘못된 것으로 말은 간단히 끝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때문에 어떻고" "환경이 어쩌고" 하는 이것이 당초에 잘못된 것이요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이 사람을 보면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했습니다. 알았다는 말은 원문 그대로 보면 순간적인 결정입니다. 즉각적인 시인입니다.

"내가 잘못 했다"에 "맞습니다"고 그대로 시인해 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합니다. 또한 그는 끝을 아는 사람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청지기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고로 이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요, 주인의 심판에 따라서 언젠가는 끝이 온다 그 말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재물을 가졌습니까? 이 재물도 언젠가는 없어질 것입니다.

건강이 있습니까? 아무리 위생을 지켜도 언젠가는 이 건강도 없어질 것입니다. 언젠가는 끝날 것입니다. 내가 앉은 회전 의자에 항상 앉아 있는 것이 아니요 언젠가는 내려앉아야 됩니다.

어느 헬라의 장군은 큰 성을 점령하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자기가 점령한 성을 내려다보면서 이렇게 외쳤다는 겁니다. "다음에는 누가 이 성을 점령할 것이냐?" 내가 점령한 이 성을 언젠가는 다른 사람이 점령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살던 집에 언젠가는 또 다른 사람이 살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끝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빼앗기게 됩니다. 언젠가는 남의 것이 될 것입니다. 종말을 아는 지혜, 이것이 이 사람이 가졌던 귀한 지혜였습니다.

기독교인의 고난관으로 말하면 이 고난도 잠시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난이 심해도 잠깐 지나갑니다.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몸뿐이요 결코 마음은 아닙니다. 고난은 잠깐이요 받을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앞에 있는 영광과 오늘에 당한 고난은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각입니다. 끝은 옵니다. 반드시 끝은 있고 그 뒤에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또 한가지 지혜가 뭐냐 하면 남은 것을 생각한 점입니다.

남은 시간, 남은 기회를 선용했습니다. 없는 중에도 남은 것, 끊어진 중에도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리 절망하는 것을 봅니다. 의사들의 기록에 의하면 누구나 90퍼센트가 제 명을 살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하면 아직도 의학적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아이쿠 이제 죽었구나" 하면 곧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몸으로서는 더 살 수 있는 사람인데도 "이제 죽는다" 하면 미리 절망해서 거꾸러지고 만다는 말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았어도 아직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일본 사람이 쓴 소설 중에「아끼루」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산다"는 뜻입니다. 노벨상 수상 작품 후보로 들어갔다가 상은 받지 못했지만 중요한 작품입니다. 그 소설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25년 동안이나 시청에 근무하던 어떤 사람, 아주 몸이 건강하던 사람인데 이 사람이 병원에 가서 진찰을 했더니 위암입니다. 의사는 말하기를 6개월 산다고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고민을 합니다.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물론 직장에도 가고 싶지 않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술집에 가서 술을 마셔도 재미없고, 누구를 만나도 재미가 없습니다. 그는 아주 절망하고 삽니다.

그러다가 어떤 꽃 피는 불쌍한 어린애하고 앉아서 얘기를 합니다.

말동무가 됩니다. "나는 6개월밖에 남지 않았다"고 그는 슬픈 얘기를 합니다. 이 철없는 어린애의 대답이 "그래도 6개월은 있잖아요" 합니다. 아, 그 말이 맞단 말입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립니다. "6개월밖에 없다"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있다" 이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새로운 용기를 얻어 가지고 6개월 동안 "내가 뭘 할까" 하며 그는 가능한 일을 하게 됩니다. 귀중한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가진 바가 있습니다.

없는 중에도 있는 것이 있고, 모르는 중에도 아는 것이 있고, 다 할 수 없는 것이면서도 아직은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악한 청지기는 "네 보던 일을 셈하자" 하는 선언을 받는 순간 끝이 왔습니다. 그는 끝을 시인합니다만 아직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 셈을 끝낼 때까지는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기회를 최대한도로 이용합니다. 남은 시간, 남은 정력, 남은 가진 것, 그 남은 바를 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를 후회하고 있습니까? 후회라는 것보다 큰 낭비는 없습니다. 미래의 환상에 젖어 있습니까? 이것은 더 큰 낭비의 출발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결론을 맺습니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이 말은 불합당하고 불의한 재물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문맥에 의해서 의역하면, 이 청지기가 벌어들이는 돈이 불의한 재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설명해도 되겠습니다. "어차피 없어질 재물이니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어라."

선행이 별것 아닙니다. 어차피 재산은 남에게 줄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다음에 남의 것이 되면 어리석은 사람이고, 살아 있을 때 남에게 주면 선행입니다. 영원히 가지고 누릴 그러한 것을 가지고 남에게 주라는 얘기가 아니요, 어차피 남의 것이 될 것을 미리 주라 그것입니다. 어차피 빼앗길 것이니 빼앗길 바에야 내가 주라는 이것뿐입니다.

무슨 대단한 얘기가 아닙니다. 어차피 잃어버릴 건강, 어차피 없어질 건강인데 힘껏 일해봅시다. 어차피 남의 것이 될 재물인데, 그저 좋은 일에 함 번 듬뿍 써 봅시다. 어차피 떠나야 할 세상인데 있는 동안 보람있게 살 마음 없습니까? 이게 바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끝은 알았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여유가 있습니다. 단지 남은바 시간을 어떻게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저는 1976년에 미국 로스엔젤레스 파사디나에서 감격적인 피아노 독주회를 가 보았습니다. 생전에 그런 광경은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피아노라 하면 누구나 두 손으로 치는 줄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은 바른손은 없고 왼손 하나뿐입니다. 왼손 하나 가지고 독주회를 합니다. 참 굉장합니다. 그가 땀을 흘려 가면서 피아노 치는 것을 보고 정말 감격했습니다. 여러분, 한 손이 없는 게 아니라 한 손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한 손이 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지혜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친구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해서 수술하고 한달을 입원해 계셨습니다. 퇴원한 다음에 만났는데 병문안을 못 가서 좀 멋 적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병원에 한달 동안 가 있으면서 뭘 배웠소?" 했더니 그가 하는 말이 "그 동안에는 그저 무슨 책을 쓸까? 무슨 연구를 할까? 어디 가서 얼마 동안 있으면서 연구를 할까? 하는 식으로 뭐 할까, 뭐 할까 하고 생각했는데, 병원에 있자니까 이제 내 생을 어떻게 끝내나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되더군" 합니다.

그래서 제가 "철났구만" 그랬습니다.

정말이지 우리는 언제 철이 날 것입니까? 한계는 눈앞에 왔습니다.

석양이 기울어집니다. 이제 남은 바를 굳게 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날을 돌이켜 보니 악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후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마지막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종말적 지혜 하나만은 꼭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악하고 불의한 청지기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인정이 됩니다. 여러분 이제 시인하고, 이제 끝을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기도 : 아무 것도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면서 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 것도 된 것이 없지만 된 것이 있는 것처럼 속고 속이고 살아오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 앞에서 불충한 지난날을 이대로 시인하며, 주님의 심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을 주시옵소서. 주여 끝을 아는 지혜를 주시고, 그리고 남은 날을 아는 지혜를 주시고, 남은 시간, 남은 정력, 남은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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