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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예배로서의 설교에 대한 이해

by 【고동엽】 2022. 3. 5.
 
 

- 원제:죤 칼빈의 설교단에서의 예배로서의 설교 -


휴즈 올리펀트 올드(Hughes Oliphant Old, 프린스톤 신학연구소 교수) / 송광택 옮김

칼빈에게는 설교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목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사실 이것은 칼빈의 설교 이해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들 가운데 하나이다. 칼빈은 설교를 예배로 본다. 성례전을 집례하는 일 만큼이나 그리고 기도 순서만큼이나 세세한 점에서, 칼빈은 하나님의 회중 가운데서 성경 봉독과 설교하는 일을 예배로 보았으며,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가장 심오한 형태의 예배로 보았다. 유감스럽게도 예배운동은 설교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오히려 근시안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아쉽게도 예배갱신은 설교 이외의 것에 더 강조를 두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칼빈의 통찰력이 오늘날까지도 가장 예언적인 것으로 남아있는 것이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려지는 성경봉독과 설교는 어떠한 것을 말하는가? 여러 가지 다른 견지에서 이에 대한 진술을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단지 두 가지 면에서 질문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예배에 대한 지혜신학(wisdom theology)의 관점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예배에 대한 언약신학(covenantal theology)의 관점에서이다.

1. 설교와 지혜

먼저 성경적 지혜신학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성경적 지혜신학은 내가 여러 글에서 자주 언급했던 바 독특한 예배신학을 의미한다. 예배에 대한 지혜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들려졌을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시편 19편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우리는 특별한 아름다움과 함께 이런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칼빈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을 기뻐하였다. 낮이 그의 말씀을 전하고 밤이 그의 지식을 알려주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영혼을 소생시키고 우둔한 자를 현명하게 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며 눈을 밝게 하였을 때 영광을 받으신다(시 19:1-8). 설교 말씀은 보배로운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며, 이로써 우리는 그 안에서 즐거워하게 된다.
이 시편 주석을 통해서 칼빈은 하나님의 지혜가 별이 반짝이는 하늘에서 발견될 뿐만 아니라 진실로 하나님의 법, 즉 성경 r속에서도 발견되었으므로 그 하나님의 지혜에 놀랐다고 적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시편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부분은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그의 작품 중에서 축하하는 부분이요, 두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지식을 그의 말씀 가운데 보다 완벽하게 드러냈음을 선포하는 부분이다.” 칼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했다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다윗은 여기서 비유적으로 빛나는 하늘의 천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상세히 보여주는 설교자로 묘사해주고 있다. 물론 그 비유는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나고 있다. 별이 빛나는 밤과 떠오르는 태양이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것처럼 성경도 하나님의 지혜를 선포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자면 칼빈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방법과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방법이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칼빈에 의하면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는 것이다.
시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다”라고 계속되고 있다. 칼빈은 이에 대해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의 지혜를 보여주기 때문에 완전하다고 주석하고 있다. “율법이 제일 먼저 받을 칭찬은 그것이 완벽(perfect)하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다윗은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적절하게 가르침을 받으면 그는 완벽한 지혜를 위해 필요한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하여 다윗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찬양을 보낼 것을 주장하였고, 그 속에 완벽하고 절대적인 지혜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지혜 학교’(wisdom school)의 관심사들에 민감하다. 하늘의 경이로움에 대해 그리고 성경 말씀에 대해 묵상할 때, 후자처럼 전자는 예배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시 9:14). 이러한 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인도된다. 그것은 예배의 본질이다. “우리가 하늘을 주목하여 바라볼 때 우리는 그것을 곰곰이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의 창조주이신 분께로 들려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칼빈은 성경의 동일한 측면을 이해하고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단순히 그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의 완벽함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배에서의 말씀의 위치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신구약 모두의 지혜신학에 깊이 기초하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말씀을 청종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다.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어 간다. 어거스틴의 신학처럼 칼빈의 지혜신학은 철저히 요한복음적이다. 이 사실은 요한복음의 서론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거기서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기 때문에 요한이 그를 “말씀”으로 부른다고 말한다. 이러한 진술은 칼빈이 요한복음의 지혜신학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에게 귀띔해 준다. 하나님의 백성이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그들은 죄로부터 구원을 받으며 새롭고 영원한 생명에로 태어난다. 또한 위로부터 태어나고 성령에 의해 새로워지기 때문에 그들은 이제 신령과 진정으로(in spirit and truth) 하나님을 예배한다(요 1:12,13; 4:23). 기독교적 예배가 신령과 진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은 칼빈의 예배 이해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참된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설교)하는 일의 중심적 역할은 자명해진다. 만일 그 예배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생겨나는” 진정한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만 예배 받으신다. 하나님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가운데 영광을 받으시고, 과연 그 말씀은 그것이 말하는 바를 성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말씀은 결실을 가져오며 이 결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다. 요한복음 1:4 주석에서 칼빈은 말하기를 “따라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말씀에 의해 그렇게 하신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거룩하게 살아가고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을 높일 때,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는 미가 4:1-4에 대한 칼빈의 설교에서 유사한 내용을 보게 된다. 그 구절은 변화된 예루살렘의 예배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선지자는 말하기를, 그 날에 땅의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배우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했다. 칼빈의 이해에 따르면, 이것은 성경을 읽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의 예배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예배의 일차적 책임이다. 바꾸어 말하면 미가는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말하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가 이제 성취되어온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기독교 예배에서 이 땅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는 것을 경청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봉독하고 선포(설교)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이러한 예배 유형은 하나님께서 율법의 첫째 판에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이다(참고. 칼빈, 기독교강요, II, 8,1-3).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기술과 상상으로 고안된 우상을 만들지 않으며, 보석과 금박으로 우상을 꾸미지도 않고, 우상을 모시고 행진하지 않으며, 그 우상 앞에서 분향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인다. 제4계명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명백히 드러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선포하고 묵상하는 것은 안식일 준수에 필수적이었다(기독교강요, II, 8, 28). 칼빈에게 있어서 율법의 첫째 판의 제4계명은 오늘날까지도 기독교적 예배의 성격을 정해야 한다(기독교강요, II, 8, 11). 물론 이 계명들은 기독교적 형식의 기독교예배를 지시하는 것이며, 그 기독교적 형식은 예수께서 주신 율법의 요약이다.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다(마 37-38) . 우리가 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을 성취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예배를 드릴 때이다. 예배에 관한 지혜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기뻐하는 것이다.

2. 설교와 언약

이제 언약적 예배신학의 관점에서 다음의 질문을 살펴보기 위해 화제를 돌리자. 어떻게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는가?
언약적 예배신학은 예배를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언약적 관계라는 점에서 이해한다. 예배 가운데서 언약은 수립되고, 유지되고,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리고 갱신된다. 예배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우리 자신을 그의 백성으로 경험한다(기독교강요 IV, 14, 13).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는 언약의 공동체 안으로 들어간다. 성찬뿐만 아니라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언약적 관계 가운데 자양분을 얻는다. 성경 봉독과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언약의 조건들을 배우고, 언약 공동체에 의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으로 인도 받는다. 설교를 통해서 언약 백성의 전통들은 전해지고 하나님의 구원의 능하신 역사는 자세히 진술된다. 성찬 집례를 통해 우리는 경건의 생명 가운데 자양분을 받는다.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예배는 이 세상에서의 잔치이며, 더 나아가 하늘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말씀은 그 언약을 선포하고 설명하며, 성찬은 그 언약을 인친다. 기도 가운데 거듭해서 우리는 언약적 사랑의 결속을 나타낸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로 향한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아뢸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언약적 약속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구한다. 구제를 하면서 우리는 매우 특별한 방식으로 언약적 책임을 수행한다. 특히 교회의 찬양 가운데, 찬송과 시편에서, 우리는 거룩한 관계에서의 경외와 기쁨을 체험한다. 우리는 감사로 그 문에 들어가고 찬양으로 그 궁정에 들어간다(시 110편).
언약의 회중 가운데서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이 어떤 기능을 하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미 우리는 말씀의 사역이 언약적 관계에 자양분을 공급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우리는 특히 이 점을 요한 복음 6장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주석은 예수께서 어떻게 오병이어로 큰 무리를 먹이심으로써 그의 가르치는 사역이 얼마나 영적으로 의미심장한지를 보여주는 표적을 주셨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이 표적은 주님의 가르침은 그의 사역의 본질적 부분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6장의 서두에서 본문은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 큰 무리가 어떻게 예수 주변에 모여들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주님의 가르침은, 모세의 가르침과 다르지 않게, 광야의 산 위에서 이루어졌다. 칼빈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광야의 산 위에서 이 가르침을 주시고 이 이적을 행하신 사실에는 어떤 섭리적 교훈이 있다. 확실히 예수의 설교사역(preaching ministry)은 모세의 사역보다 훨씬 더 위대하지만, 양자간의 유사점을 간과하기는 어렵다. 모세가 언약의 회중에게 율법을 주기 위해 시내산 앞에 그 백성을 모은 것처럼, 예수께서는 무리를 그의 주위에 모으시고 복음을 그들에게 전하셨다. 모세가 거룩한 음식으로 언약의 회중과의 집회를 끝맺은 것처럼, 이제 예수께서는 무리를 먹이셨다.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만나의 관점에서 그 음식을 설명해 주셨다. 신실한 이스라엘은 만나의 의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언제나 이해하고 있었다(신 8:3; 마 4:4, 및 병행구절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할 때 경험된다. 이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함 가운데 자양분을 취할 때, 하나님은 영화롭게 된다.
언약적 예배신학에 있어서, 예배가 은혜의 방편이라는 모든 생각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예배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에 봉사하는 것이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하게 하는 방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그의 영광을 반영하는 것이요, 우리가 그의 영광을 반영하는 방법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적 예배 이해의 기본적 원리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영광을 돌리는 것은 바로 삶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구속적인 것이요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반영될 때, 그의 영광은 확대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는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기억하고, 우리 시대에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영광을 증거하기 위해 함께 모여 장엄한 집회를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확대한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복음의 가르침은 모든 경건한 신자에게 유익을 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제자로 나서는 사람 가운데서 그 결과로 주님이 신실하고 참된 스승이 되신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Corpus Reformatorum, 75: col.146). 바꾸어 말하면 참된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데 헌신한 자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고, 귀를 기울이고,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제자의 헌신에 속한다. 만일 제자의 삶이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예전 갱신 운동의 한 유명한 지도자는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간을 위해서 하는 것만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잘못된 대조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거룩하게 할 때 이상으로 그렇게 온전하게 영광을 받으시는 적이 없다.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리라’기록 되었은즉”(요 6:45)이라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 자신께서 신자들의 교사가 되시는 길밖에는 없다. 선지자가 말하고 있는 가르침의 종류는 외적인 목소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적인 목소리, 즉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은밀한 작용을 통해서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의 마음 갚은 곳에서의 하나님의 가르침이다”(Corpus Reformatorum, 75: col.149). 성경을 읽는 것과 설교하는 것은 예배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곳에서 그 점을 상세히 언급한 바와 같이, 예배는 성부의 영광을 향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은 예배이다. 기독교 예배의 역사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확신을 잃을 때 그 말씀에 대한 설교도 힘을 잃어버린다는 사실을 거듭 보여주고 있다.
“나는 생명의 떡이라”는 본문을 주석하면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주님의 살은 그의 신성(divinity) 안에서 본래부터 거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강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생명을 주는’(vivifying 혹은 life giving) 것으로 불린다...”(Corpus Reformatorum, 75: col.152). 예수 안에서 성육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의 존재 전체로서, 그가 행하신 모든 것 가운데서 그리고 그가 전한 모든 것 가운데서 단번에 세상에 생명을 주시었다. 오늘날 교회 내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리스도는 영생의 원천으로서 임재하신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 우리가 성례전을 집례할 때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의 원천이요 거룩한 삶의 원천이라는 표적이었다. 그것은 예수께서 설교와 성찬 모두와 관련하여 예배의 본질을 밝히신 표적이었다. 그것은 성부의 집으로 들어가서 그의 은혜를 마음껏 즐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의 역사의 유익을 즐길 때 하나님은-그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므로- 영광을 받으신다.
어떻게 설교가 예배로서의 기능을 갖는가 라는 이 물음을 살피는 다른 방법이 있다. 칼빈은 회상(anamnesis)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훌륭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즉 그는 ‘기억’으로서의 예배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하신 일을 기억하고 자세히 열거한다. 우리가 안식일을 기억할 때 우리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구원의 역사를 자세히 말함으로써 안식일을 거룩하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하신 창조와 구속의 역사들을 묵상한다. 칼빈은 회당에서 전파하신 예수님의 이야기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 사실을 명백하게 밝힌다. 그 주석에서 칼빈은 회당의 예배에 관하여 언급하는데, 유대인 회당이 진리에서 멀리 벗어났다고는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예배가 읽은 구절들에 근거한 가르침과 권면이 뒤따르는 공적인 성경 봉독을 보존한 점을 말하고 있다.(Corpus Reformatorum, 73: col. 140). 이것은 안식일이 어떻게 지켜져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칼빈이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우리에게 나태의 날을 주시려고 안식일 준수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는 시간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안식일 준수를 명하셨다(Corpus Reformatorum, 73: col. 140).
이것은 또한 제4계명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기독교강요,II,8, 28-34). 칼빈이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안식일 준수 계명의 목적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율법을 듣고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하는 특정한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은 경건의 훈련을 받게 된다(기독교강요, II, 8, 28).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하신 역사를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설교에 필수적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증거하는 것이다. 언약적 예배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가장 심오한 수준의 예배이다.
물론 우리는 모두 개혁교회 예배의 안식일주의에 대하여 많은 비평이 있어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제4계명을 진지하게 준수하려는 이러한 관심은 칼빈의 예배 이해에 있어서 가장 풍부한 신학적 측면들 가운데 하나이다. 이것은 단순히 유대주의적 경향이 아니다. 예수께서 친히 우리의 예배가- 우리가 자주 예배를 행하는 만큼-주님을 기억(기념)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셨다(고전 11:24). 칼빈은 기억(기념)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아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계명은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한다. 맨 처음부터 안식일은 기억을 위한 날이었다. 그 날은 거룩한 역사(歷史)를 자세히 이야기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반복하기 위한 날이었다. 그 날은 한 번 더 율법을 읽고 그 율법의 규례에 대한 해석을 논의하기 위한 날이었다. 그 날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왔을 때 읽었던 것처럼, 또는 에스라가 예루살렘 수문(水門)에서 읽었던 것처럼, 언약의 책을 다시 읽기 위한 날이었다. 언약신학에 있어서 거룩한 전승들을 기억하는 것은 예배의 중심적인 일이었다. 그러한 기억(기념) 가운데 안식일은 거룩해졌다.
칼빈은 예배에 있어서 성경 봉독과 설교에 중심적 위치를 부여하였다. 보통 제기되는 질문은 말씀에 대해 이처럼 중심적 위치를 부여하는 것이 설교 이외의 다른 어떤 것에 많은 여지를 주었는지 어떤지에 관한 것이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제네바 교회의 예배에서 설교가 위치하였던 방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1542년의 <제네바 찬송집>(Genevan Psalter) 서문에서, 칼빈은 예배의 구성 요소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 공적인 엄숙한 기도들, 그리고 성례전의 집례이다. 때때로 이 목록에는 시편과 찬송, 율법서 낭독, 죄고백, 복음서 낭독, 신앙고백, 그리고 구제헌금을 포함되기도 했다. 칼빈은 설교보다 공예배를 아주 분명하게 보고 있다. 설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격은 이러한 다른 요소들과 관련하여 바라볼 때 특히 명백해진다. 첫째로 우리는 기도의 사역에 대한 말씀의 사역의 관계에 대해 다루고 나서, 성만찬 성례에 대한 말씀의 사역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3. 설교와 기도

칼빈은 기도가 우리의 신앙심의 주된 행사(prayer is the chief exercise of our religion)라고 본다. 이 유명한 진술은 우리가 언약적 맥락 안에서 기도를 이해할 때,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기도는 우리의 믿음을 행사하는 것이다. 기도는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에게 향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부요한 약속들을 붙들고, 그 약속들이 이루어질 때까지 믿음으로 그 약속들에 매달린다.
칼빈은 라인란트(Rhineland) 북부의 개혁교회에서 발전해 온 관습에 따라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와 더불어 성경 봉독과 설교를 시작하였다. 우리는 1542년의 <제네바 찬송집>에서 다음과 같은 예배 규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나서 목사는 한번 더 기도하기 시작한다. 그는 성령의 은혜를 위해 하나님께 구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이름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교회의 건덕을 위해 신실하게 해설되고, 그 말씀에 합당한 겸손과 순종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한다. 그 형식은 목사의 재량에 맡겨져 있다.(Calvin, Opera selecta, II, 20)

이 기도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설교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의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말씀의 설교뿐만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받는 것도 예배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전체 회중은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음으로써 하나님을 예배한다. 말씀의 사역은 혼자 하는 카드놀이나 차고 문을 향해 테니스를 하는 것 같은 혼자만의 스포츠가 아니다. 설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동시에 교회를 세운다. 설교는 기도처럼, 그리고 사실상 모든 예배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령의 사역이다. 설교는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복을 전해주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린다. 물론 여기서 우리 설교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는 점은 매우 명백히 진술된다.
이러한 기도는 설교의 ‘에피클레시스’(epiclesis, 성령강림을 구하는 기도)라고 불릴지도 모른다. 그 기도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그 말씀을 기록에 맡긴 것과 같이, 동일한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말씀의 사역자가 성경을 강해하고 회중이 그 말씀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기도(에피클레시스)는 설교가 설교자의 능력에 달려있다는 (ex opere operantis 역자주: ex opere operato(문자적 의미는 ‘from the work done’)는 ‘행위의 효력에 의하여’를 뜻하고, ex opere operantis는 '행위자(agent)에 의하여'를 뜻한다. 본래 이 표현들은 성례의 정당한 집례를 위한 조건이나 혹은 성례의 합당한 수령과 관련하여 성례전에 대해 사용되는 표현들이다.
, 문자적 의미는 from the work of the worker) 이해에 대항하여 교회를 방어한다. 그러나 한편 그 기도는 설교에 대한 펠라기우스적 이해에 반대하여 교회를 지킨다. 결국 그 기도는 설교가 인간적 사역이 아니라 신적인 사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역자들을 통해 이 일을 행하신다. 그러나 말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제자들로서 우리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우리는 주인의 말을 경청하는 것이 제자도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크리스천 회중으로서 우리는 겸손과 순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메시지를 경청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말씀으로서 그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은 바로 존경과 겸손, 사랑과 경의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서 그 자신을 우리에게 게시하신다면, 그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은 우리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성령의 조명을 위한 그 기도가 밝히고 있는 다른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곤궁에 처했을 때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로우신 은사(선물)이다. 우리가 우리의 소외된 상태와 죄와 연약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부르짖어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속적 목적과 구원의 능력과 우리의 삶을 위한 그의 뜻을 보여주심으로써 응답하신다.
죄고백의 기도는 제네바의 예배에서 앞 순서에 위치하고, 이어서 성령의 조명을 위한 기도를 한다. 두 기도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죄고백의 기도는 인간상태의 언약함에 대한 실제적 고백으로 예배를 시작한다.(Calvin, Opera selecta, II, 18) 경의를 표하면서 그 기도는 주 하나님, 곧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아버지를 부르고, 우리의 연약함과 가난과 불법을 고백한다. (Calvin, Opera selecta, II, 18) 예배자는 인간적 곤궁을 인정하면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다가간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용납 받았다는 것을 확신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설교는 기도 가운데 받아들여진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칼빈이 옛 개혁자들 위에서 건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특히 그는 스트라스부르크의 개혁자들이 발전시킨 예배 순서에 의존하고 있다. 칼빈은 그가 1542년 망명지에서 돌아왔을 때, 확신과 열심을 가지고 스트라스부르크의 예전 형식들을 제정하였다. 그가 보는 바로는 이것은 참으로 성경적이고 초대교회의 모범을 따르는 예배 순서였다. 칼빈이 보는 바로는,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제네바 교회의 예배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기도와 시편 찬송은 예배의식의 순서에서 근본적인 것이었다. <성례전의 집례를 위한 순서가 있는 기도와 찬송의 형태>라는 그의 예배모범의 제목은 바로 이 점을 충분히 말해준다. 시편 찬송은 찬양과 감사의 맥락 가운데 설교를 두었다. 이것은 특히 설교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의도를 확실하게 한다. 다시 우리는, 칼빈의 설교들이 제네바의 예배에서 차지한 예배상의 위치에서 확인될 때, 그 설교들이 가장 잘 이해된다는 사실을 강조 하고자 한다.

만일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기도에로 부르신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실이다. 칼빈의 설교들은 변함 없이 기도가 관심을 두는 것이 교회를 향해 그 날 이루어지는 성경 강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함으로써 끝낸다. 우리는 칼빈의 예레미야서 설교들에서 이러한 기도의 풍부한 예들을 특히 많이 볼 수 있다. 수 백 개의 이러한 기도문들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왔다. 각각의 기도들은 설교 끝에 행해졌다. 그리고 나서 교회의 필요를 위하여, 기독교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공직자들을 위하여, 목사들을 위하여, 모든 백성을 위하여, 온 세상을 향한 복음전파를 위하여 그리고 환난이나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는 보다 일반적인 중보기도가 뒤따른다(Calvin, Opera selecta, II, 20-23). 이 기도는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한 일반적 기도이다. 한편 설교에 이은 이 기도의 요점은 성경봉독과 설교가 우리를 기도에로 부를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기도를 조명하고 옳은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진정한 기독교적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하는 기도이다. 그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 가운데 자리잡은 기도이다. 그 기도는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기도이다. 그 기도는 먼저 하늘나라를 구하는 기도요, 더욱이 모든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기도이다.
여기 기도와 설교 사역에 대한 언약적 이해가 강하게 나타난다. 애굽에서 종으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중에 부르짖어 구원받으며, 애굽으로 자유함을 얻는 후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세움을 받았으며, 따라서 언약 책임으로서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졌듯이,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죄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리스도인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선포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다. 그리고 새언약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 자신께 연합시킨다.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 가운데 그의 율법을 기록하시고, 예배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자비의 행위들 가운데서 우리의 섬김을 요구하신다. 예배에서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하여 그의 구원의 은혜를 증거 한다. 설교의 중요한 부분은 증거함이요 이 증거는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하는 것이다. 언약신학의 관점에서 이것은 예배의 본질이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대한 고백이요 우리의 구주에 대한 증거이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강해할 때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in the service of God) 그와 같이 행하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적해야 할 다른 무언가가 있다. 즉 설교자는 회중의 신앙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으로, 무용함에서 성취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신실하시고 능하신 역사를 증거한다. 설교에서 이 증거는 세상 앞에서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회중 앞에서 이루어진다. 설교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가 위하여 기도한 구원을 베푸신 것을 공적으로 증거하는 것이다. 이 증거는 모든 사람이 우리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도록 행해진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이 있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주시어, 그의 백성이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새언약의 백성에게 복음의 약속들을 주셨다. 그는 그의 이름으로 우리가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일 때 그 중에 계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는 만일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성부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더욱이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할 책임을 주셨다. 우리가 <제네바 찬송집>에서 볼 수 있고 또한 칼빈의 설교를 받아 적은 속기사에 의해 기록된 그대로 칼빈의 기도들에서 보게되는 그 기도의 내용들은 기도의 사역에 대한 말씀의 사역의 관련성에 대한 언약적 이해가 스며들어 있다. 예를 들면, 설교에 이은 중보 기도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 하늘의 아버지시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께 드리는 간구들을 들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훈과 사도들의 가르침에 의해서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모이도록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우리 중에 임재하시며 당신께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어, 우리가 당신께 구하고자 동의한 모든 것들을 우리가 얻을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당신께서 통치자와 관리로 우리 위에 세우신 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백성의 필요와, 실로 모든 사람들의 모든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당신의 명령을 가지고 있습니다(Calvin, Opera selecta, II, 20).

언약적 약속들과 언약적 책임들이 이 기도에서 명백히 강력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언약적 예배 이해는 은혜의 복음이 우리를 섬김(service)에로 부른다는 것을 인정한다. 이러한 중보기도들에서 교회는 사랑의 연대 가운데 이웃을 섬기며, 이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한다.
말씀과 기도 사이의 이러한 변증법은 예배의 본질이다. 말씀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며, 동시에 기도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말씀은 기도를 격려한다. 즉 말씀은 기도에 능력을 부여하고 기도를 바른 방향으로 인도한다. 기도는 말씀을 심으며, 우리 마음에 말씀을 뿌리내리게 하고, 그 말씀이 꽃을 피우고 결국 열매를 맺게 한다. 그리고 이 열매는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는 것이다. 말씀이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께서는 신령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 예배를 받으신다.

4. 설교와 성찬

말씀의 사역을 성찬의 성례전 시행에 관련시킨 칼빈의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예배에서의 말씀의 위치에 대한 그의 언약적 이해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다(칼빈, 기독교강요, VI, 14, 6). 우리는 성경 봉독과 설교 가운데 복음의 선포를 듣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그분과 화해시키셨으며, 또 어떻게 우리들에게 은혜의 언약을 주셨는지를 설교를 통해 듣는다. 즉 그것은 언약이 인쳐지는 성찬에 함께 참예함으로 이루어진다(기독교강요, VI, 17, 1). 설교를 통해서 복음의 약속이 우리들에게 선포되지만, 성례를 통해서는 그 약속이 우리에게 인쳐진다(기독교강요, VI, 14, 6). 사인(sign)이 편지를 보증해주고 도장을 찍는 것이 확실함을 더해주는 것처럼, 성례전은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언한다(기독교강요, VI, 17, 4).
설교는 성례전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런데 내가 제시한 정의를 보아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성례에는 반드시 선행하는 약속이 있으며, 성례는 이 약속에 붙인 부록(appendix)과 같다. 그 목적은 그 약속을 확인하고 인치며 우리에게 더욱 명확하게 깨닫게 하며 이를테면 비준하는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VI, 14, 3) 역자주: 생명의 말씀사 역간 <기독교강요> 하권, 338쪽의 번역을 참고.
성례전은 언약적 약속들의 설교(preaching)에 달려 있다. 칼빈이 우리에게 말했듯이, 언약(covenent)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성례전은 이러한 언약의 증표요 보증이다. 약속들은 필히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약속이라는 용어는 그것들이 보증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표징(sign)에 우선하는 말씀이 없다면 그 표징은 무의미한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먼저 생각하고 결정해서 말로 발표한 언약일지라도 말이 선행할 때에는 이런 언약의 표징에 의해서 그 언약의 법은 확인된다. 그러므로 성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더욱 확실하게 믿게 만드는 의식(exercises)이다 ”(칼빈, 기독교강요, VI, 14, 6).
1542년의 <제네바 찬송집>의 성찬식 기원은 우리가 시행하려는 성례에서 우리 주 예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몸과 피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기를 기도한다. 그 기도는 계속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신앙 안에서 그 자신에게 연합시키시기를 기도하고, 또한 그가 우리 안에서 사시며 지금부터 영원까지 거룩하고 행복한 삶에로 우리를 인도하시기를 구한다. 이 기도는 성부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롭고 영원한 언약, 즉 은혜의 언약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구할 때처럼, 분명히 언약적 맥락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Calvin, Opera selecta, II, 25). 칼빈에게 있어서 성찬은 복음의 설교에서 선포된 약속들을 인치는 언약의 식사(covenent meal)이다. 복음의 약속에 대한 선포가 없다면 성례전을 지키는 것은 큰 의의가 없는 것이다(칼빈, 기독교강요, VI, 17, 39) 역자주: 기독교강요에서 칼빈은 “말씀이 없으면 성찬은 바르게 집행될 수 없다”고 말한다.
설교는 일반적으로 예배의 필수적 부분이듯이, 특히 성례전적 예배의 필수적 부분이다.
설교는 예배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우리로 하여금 언약의 식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찬식 기원은 “견고한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주님의 피를 받읍시다”라고 기도한다. 설교는 믿음에서 시작하여 믿음에로 향한다. 설교는 회중의 믿음을 표현하며, 그 믿음의 표현은 회중의 믿음에 자양분을 준다. 설교는 회중의 믿음을 세워주고 확대시킨다. 설교를 경청한 후, 회중은 더 견고한 믿음으로 성찬에 나아가고, 이로써 성찬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그가 우리 안에 거하고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는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몸과 그의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그 약속을 신자들이 믿도록 요구하는 ‘성찬의 권면’(the Communion Admonition)에서 동일한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언약의 약속들이다. 그 권면은 우리에게 분배되도록 이 식탁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의 모든 부요하심을 나타내는 구주의 무한한 선하심에 대해 신자들이 감사하도록 계속 촉구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시는 가운데 주님은 그가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라고 증거 하신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고난의 능력이 우리의 칭의를 위해 우리에게 전가되도록, 이 성례전을 하나의 증거물로서 받아들이자. 성례는 복음 안에서 선포된 언약의 약속들의 표징과 인(印)이다(기독교강요, VI, 14, 5). 복음이 선포될 때, 그 복음은 성례전에 의해 요약되고 서명되어진다.
설교는 예배다. 왜냐하면 설교는 성찬 식사에 중심적인 감사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설교는 ‘하나님의 큰 일’을 자세히 이야기한다. 다른 곳에서 나는 부활절 성찬식 이전에 행한 주님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복음서 기사에 대한 칼빈의 설교에 대해 썼다. 칼빈의 설교는 성찬식이 감사를 표하는 것을 찬양하였다. 칼빈의 설교는 말하자면 그의 성찬식 기도였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해 감사하는 것은 우리의 언약적 책무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청하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사, 우리를 우리의 슬픔과 죄와 비참함 그리고 무용함에서 구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를 돌려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으므로 마땅히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성찬 기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은 우리의 언약적 책무이다(Opera selecta, II, 25).
설교는 예배이다. 왜냐하면 설교는 회중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능하신 구원 역사에 대해 고백하는 그 증거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그의 죽으심에 대해 알린다(고전 11:26). 고린도전서 11:26에 대한 주석에서 칼빈은 신앙고백으로서의 성찬의 중요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성찬 기원은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하늘 아버지시여, 오늘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의 기념 예식을 행하고, 그의 구원 사역을 자세히 이야기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일을 행하며, 그리고 그의 죽음의 유익을 알리도록 은혜를 베푸소서.”(Opera selecta, II, 25).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이러한 고지(告知)나 선포는 공예배에서 행해지는 언약적 기념 의식의 본질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행위)에 대해 증거한다. 예배는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게 달려 있다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세상을 향해 우리 생명의 근원을 알리는 것이다.
성찬을 마치는 감사의 기도는 시행되는 성례전의 언약적 본질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고 있다. 그 기도는 우리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교제 안으로 이끌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우리의 이웃을 섬기며 사는 목적을 위해, 성례전 가운데 나타난 모든 것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새겨지기를 기도한다. 성찬식의 끝에 언급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표현은 그 모든 것의 열쇠이다. 예배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해지는 것이다: 즉, 시편을 노래하는 것, 기도를 드리는 것, 성례전 집례, 그리고 물론 성경봉독과 설교가 그것이다.

결론

자신의 신앙 행태가 고전적 프로테스탄티즘에 뿌리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지난 세기의 예전 갱신 운동은 어떤 용이한 방법론을 불러 일으켰다. 예배 갱신 운동은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않았다. 일단 그 신기함이 낡아버리자 교회 좌석은 전보다 더 비는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의 설교단-중심 교회에 대한 비판이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 같다.
설교에 대한 칼빈의 접근은 트렌트 공의회(the Council of Trent)의 접근과 매우 다르다. 트렌트 공의회는 칼빈처럼 어떤 점에서도 설교를 예배로 이해하지 않았다. 트렌트 공의회는 1546년 6월에 설교를 위한 회기를 가졌고, 두 가지 중요한 정의를 하였다. 첫째는 설교가 감독(주교)의 주요한 직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정의를 긍정적으로도 그리고 부정적으로도 볼 수 있다. 부정적인 면에서 이 정의의 영향은 설교를 전제주의(absolutism)의 손에 맡기는 것이었다. 이 경우 설교는 감독과 그가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권위를 준 자들의 고유영역이 된다. 긍정적인 면에서 트렌트 공의회의 의도는 감독으로 하여금 설교하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몇몇의 매우 훌륭한 감독 설교자들이 반(反)종교개혁 시기에 나타났다. 누구보다도 사람들은 스페인 발렌키아의 대주교 빌라노바의 토마스(Thomas of Villanova)를 생각한다. 그리고 밀란의 대주교 카를로 보로메오(Carlo Borromeo)와 남부 이탈리아의 카푸아의 대주교로 일하던 기간 중에 성실하고 헌신적인 설교자였던 로베르토 벨라르미노(Roberto Bellarmino)를 들 수 있다. 또한 프랑소와 드 살레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프랑스 바로크풍 설교 배후에서 영향을 끼친 사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그는 17세기 초에 제네바의 명의 주교(名義 主敎, 교구가 없는 직함만의 주교. 역자주)였다. 이들이 별처럼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처럼, 그들은 예외적인 사람들이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설교를 기독교예배의 중심에로 돌려놓는 일에 성공하지 못했다. 설교는 여전히 주일 오후를 위한 선택적인 경건의 연습 또는 사순절을 위해 특별히 행해지는 행사로 남아 있다.
설교와 관련된 트렌트 공의회의 다른 중요한 정의는 설교의 목적을 여러 덕목들을 찬양하고, 악덕을 비난하고, 형벌에 관한 위협을 하고 그리고 보상을 약속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규칙에 처음 나타나는 이러한 설교 정의는 트렌트 공의회에서 받아들여졌고, 반종교개혁기의 설교 지침이 되었다. 그것은 설교에 대한 보다 더 도덕적인 접근을 의미한다. 설교에 대한 이러한 정의와 더불어 반종교개혁기의 설교가 어떻게 고백성사적(penitential) 설교로 기울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아주 용이하다. 우리는 반종교개혁기의 설교가 강림절이나 사순절의 참회 기간에 제한되는 경향을 보게 된다. 성탄절, 부활절, 마리아 축일들, 그리고 몇몇 다른 날들을 위한 설교가 있었다. 그러나 덕과 악덕, 형벌과 영광에 관한 도덕주의적 경향은 반종교개혁기의 설교단에서 보편화되었다. 설교는 예배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배를 위한 준비가 되었다. 비록 교리문답적 설교와 참회적 설교가 준비적인 것이라도, 확실히 그 설교들은 예배이다. 그 설교들은, 세례가 예배인 것처럼 예배이다. 그러나 그 설교들은 우리가 앞에서 논한 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doxological) 기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설교에 대한 반종교개혁기의 이해는 확실히 예전 갱신 운동이 영향을 미쳤던 곳에서는 어디서나 여전히 그 효력을 가지고 있다.
말씀의 사역이 존재한다는 것과 이러한 말씀 사역을 행사하는 것이 예배라는 생각은 현대의 예배의 본질에 관한 작금의 논의에 대하여 존 칼빈이 크게 이바지하는 점이다. 오늘날의 기독교 예배는 음악 스타일 이상의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기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설교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다. 우리는 한국의 설교에서 그리고 더더욱 기도 생활에서 오늘날의 기독교예배를 보게 된다. 오늘날의 기독교 예배는 강해설교를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만일 20세기말의 예전 갱신이 설교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면, 예배에 대한 “현대의 기독교적(contemporary Christian)” 접근은 다가오는 제3의 천년기에서 설교의 개혁을 잘 인도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출처 : ┏♡새능력교회♡┓

 

글쓴이 : 축복의사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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