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Jonathan Edwards(1703-1758)
주도홍 교수(기독신학대학원)
에드워즈의 주요 저작들과 신학사상들
에드워즈의 본격적 저술활동은 23년의 열정적 노쓰햄톤 교회 목회를 정리하고 인디언 선교사로서 체류했던 1750년 이후 보다 여유로운 스탁브리지의 6년동안에 이루어졌다. 이 기간은 에드워즈의 55년 동안의 전생애를 두고 볼 때 1758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끝자락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그의 사상적 탁월성과 독특성을 보여주는 저작들이 대부분 이 기간에 세상에 나왔다. 1754년에 「의지의 자유」, 1755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종말에 관하여」와 「진정한 덕의 본성」이 그리고 1758년에 「원죄」가 쓰여졌다.
에드워즈를 지성과 감성이 균형있게 갖추어진 독특한 사상가로 평가케 한 결정적 저작 「신앙과 정서」가 1746년에 노쓰햄톤 목회시절 쓰여진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또한 그의 전생애가 글을 쓰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일관되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벌써 19살 되던 해 석사논문 「존재에 관하여」을 시작으로 그는 일기를 그리고 그외 많은 저술활동을 본격화하였다. 20살에 「거미에 관한 연구」를 내어놓았고 또한 「계시록에 관한 글」을 시작하였다. 22살에 「우주의 아름다움」을, 25살에 「거룩한 것들의 이미지」를, 34살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신실한 설명」을 당시 일어난 부흥운동을 변호하기위해 계몽주의적 비판에 맞서 저술하였다. 이러한 저술활동은 목회사역에서 행해진 다양한 설교집과 더불어 끊임없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저술들을 내용별로 보면, 먼저는 신학적 내용 그리고 개인적 관심에 의해서 쓰여진 다른 주제의 사적 내용으로 크게 분류될 수 있다. 신학적 내용에 해당되는 것으로는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설교들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며, 그 다음에는 교리를 주제로 한 저작들과 아울러 에드워즈의 탁월한 신학적 사고(思考)의 진수를 보여주는 신학적 저술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중 「의지의 자유」는 알미니안주의가 가지는 잘못된 자유의지에 대한 이해를 겨냥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지나친 칼빈주의(Hyper-Calvinism)가 갖는 비복음적 운명론적 태도를 공격한다. 「원죄」는 테일러 박사(J. Tayler)와 논쟁하면서 2천년 전통의 거대한 기독교 교리를 확신있게 변호한다. 또한 「은혜론」은 「신앙과 정서」그리고 「의지의 자유」의 자매작품의 성격을 띄고 있지만 약간은 다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사적 관심에 의해 쓰여진 글들이란 물론 대부분 성경적이고 교리적이며 신학적이기도 하지만 출판과 공개를 염두에 공개성을 띤 작픔은 아니었다. 사적 경건과 헌신을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을 담고 있다. 「일기」, 「삶의 결단들」, 성경을 묵상하면서 그때 그때 기록하였던 「메모들」 그리고 13권 분량의 「잡기들」이 여기에 해당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 자신을 점검하고, 각오를 새롭게 하면서 에드워즈는 인생의 지표 70가지를 설정하였다. 1722년에는 24가지를, 1723년에는 34가지의 생의 지침을 완성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생의 지침을 죽음에 이르는 일주일 전까지도 점검하였다. 특히 인상깊은 19살 때 시작된「잡기들」(The Miscellanies)은 목회생활 전반을 포함하여 35년동안 그때 그때 상황을 진솔하게 숨김없이 기록한다. 미국의 위대한 사상가요, 목회자이며, 신학자였던 그가 어떻게 발전하였으며, 영적 성숙을 향해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였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숨소리와 함께 들려주고 있으니 그 어찌 보배롭지 않으리요! 에드워즈 목사를 친히 만나는 착각을 들게하는 생명감 넘치는 글들임이 분명하다. 마감하는 20세기가 18세기의 에드워즈를 만나는 타임머신은 바로 이러한 저술들이 아닐까.
에드워즈가 모으고 읽었던 책들
이제 역사에 부여된 특권을 가지고 18세기 에드워즈의 서재를 부담감없이 마음껏 들여다 볼 것이다. 그의 일기장을 들추어본다 할지라도, 역사가의 마땅한 할 일로 존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의 일기장을 들추는 일을 할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가 모으고 사랑하고 읽었던 책들이 어떠한 책들이었고, 또한 얼마나 큰 기쁨과 애착을 가지고 책수집과 책읽기를 즐겨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또다른 이름들인 '독서광', '책벌레' 그리고 '수집광'은 과연 얼마정도의 타당성을 갖는 것일까?
책 모으기에 최선을 다했던 에드워즈의 모습을 자신의 편지들은 적나라하게 말해준다. 1737년 8월 8일 그는 원하는 책을 갖고저 무척이나 간곡한 편지를 한번도 아닌 두 번이나 썼다: "존경의 마음을 품고 편지를 드립니다 ... 저는 용기를 얻어서 전에 「의회판 백과사전」을 보내주십사고 요청했었고, 송구스러운 마음이지만 다시 한 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조심스럽게 저의 요청이 수락되었는지 아니면 거부되었는지를 매우 알고 싶습니다. 만약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셔서 제가 겨울이 오기 전에 받아볼 수 있을거라 기대해도 된다면 편지배달부에게 말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조금은 다른 내용이지만 1748년 8월 31일 에드워즈는 책선물을 받은 후 큰 기쁨과 함께 감사가 넘치는 편지를 동료 목사인 어스킨(J. Erskine)에게 보냈다: "저는 테일러의 책 두권을 얻게 되어 매우 기쁨니다. 원죄에 관한 테일러의 책을 전에 빌려 읽은 적이 있었는 데, 제 것이 생기니 너무나 기쁘군요. 당신께서 그 책을 보내주시지 않았다면 제가 그것을 구하기가 쉼지 않았을 것입니다 ... 살아있는 한 이 책들은 제게 유용하게 사용될 것입니다." 마치 원하던 책을 받아들고 기뻐 어쩔줄 모르는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함을 연상케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당시로서는 책구하기가 오늘날처럼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에드워즈가 욕심쟁이처럼 그저 책수집 자체에만 목적을 두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광적이라 할 정도의 집착어린 책수집 배경에는 숨길 수 없는 진리의 보물을 찾아해매는 에드워즈의 열정적 독서열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을 사무엘 홉킨스는, "그는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있는 데 특히 신학서적을 읽었으며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고, 그의 지식추구에 있어서 독서를 통해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 그러므로 그의 생전에 모든 나날은 바쁜 벌과도 같이 활짝 핀 모든 꽃에서 꿀을 수집하듯, 실제로 달콤한 지식 더미를 저장했다. 그리고 해가 더하고 지식이 더함에 따라 그는 진보를 더했고, 그럴수록 그의 펜은 점점 더 바빠졌고, 그의 손은 갈수록 더 빨리 원고를 써내려갔다"고 묘사했다. 참으로 에드워즈는 독서의 유익을 그 누구보다도 확신하여 깊은 독서에 빠졌으며, 그 독서에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보다 깊이있는 신학과 사상에로 그리고 폭넓은 목회사역에로 인도되었던 것이다.
그의 서재에는 과연 어떠한 책들이 자리잡고 있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500개의 항목으로 분류된 43쪽 분량의 그의 책 카타로그는 가로 세로 약 20CmX16Cm의 크기로 되어있는 데, 주제뿐 아니라, 제목, 저자, 논평 그리고 메모와 묵상이 첨가되고 있다. 여기에 등장되는 책들중 에드워즈에게 친숙했던 몇몇 저자들을 일컬어 보면, 종교 개혁자 요한 칼빈을 위시하여 마틴 루터, 윌리암 에임즈, 리차드 박스터, 토마스 굳윈, 휴고 흐로티우스, 토마스 홉즈, 존 로크, 찰스 오웬, 존 오웬, 윌리암 퍼킨스, 리차드 십스 그리고 초대교회의 터툴리안, 요셉푸스, 그리고 어거스틴도 보인다. 그의 손떼묻은 서재에는 당시로서는 결코 적지않는 천권 가까이의 책이 꽃혀있었다.(97.8.9, Seoul)
그의 부인 사라와 가정
에드워즈 부부는 새로이 결혼을 준비하는 많은 젊은 남녀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대설교자 조지 휫필드가 아직 총각시절 에드워즈 부부를 방문한 후, 영국으로 돌아온 즉시 결혼을 작정하였다. 참으로 축복받은 정겹고 사랑스러운 에드워즈 목사의 부부를 바라보며, 휫필드는 그의 감격을 억누를 수 없었다. 특히 사모 사라의 모습은 휫필드로 하여금 축복된 아내의 만남을 생각하며 자신의 결혼을 준비케 하였다. 휫필드의 말을 들어보자:
"그들은 지금까지 세상에서 보지 못했던 정다운 부부였다 ... 그녀는 온유하며 조용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 다감하면서도 확신있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자기 남편에게도 그런 내조자였으며 나로 하여금 여러 달 동안 기도를 드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지금의 내 아내 아브라함의 딸을 얻을 수 있도록 용기를 주었다."
물론 타국 먼길을 오랫동안 홀로 여행을 해야만 했던 부흥사 휫필드는 때때로 파도처럼 밀려드는 외로움을 하나님의 은혜로 참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도 거룩하게 서로를 정숙하게 사랑하고 존경하는 에드워즈 부부를 볼 때,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어떠한 것인지를 더욱 실감났던 것이다. 이러한 격찬은 휫필드에게서만은 아니었다. 작가 사무엘 홉킨스(Samuel Hopkins)도 에드워즈의 가정을 방문하고 나서 "그들이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고, 온전한 화목을 이룬다는 사실"에 경이로운 찬탄을 숨기지 아니했다. 이러한 거룩하고 축복스러운 가정과 부부애는 에드워즈의 수고도 크겠지만, 탁월한 사모 사라의 역할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오래전 20세의 뉴헤이븐에 거주하던 대학생 조나단이 13세의 소녀 사라를 보며 묘사하는 말은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당시 대학생 조나단이 사용했던 헬라어 문법책 앞 페이지에 기록되어 있는 소녀 사라를 향한 한편의 시는 거룩한 느낌까지를 갖게 한다:
"그녀의 머리에는 남모르는 향기로움이, 그녀의 가슴에는 하나밖에 없는 순결이 있어 그녀의 행위가 지극히 올바르고 양심이 선해, 온 세상을 전부 준다해도 그릇된 일이나 죄된 일을 하도록 설득할 수 없으리 ... 그녀가 때때로 즐겁게 노래부르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언제든지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치는 것같이 보이나 어느 누구도 무엇때문인지 모른다네. 그녀는 들판과 숲속을 걸으며, 홀로 있기를 즐겨하며, 기쁨과 환희에 심취해 있으며, 항상 대화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분을 모시고 있는 것 같도다."
하나님과 깊은 영적 교제를 생활화하고 있는 어린 소녀 사라를 향한 청년 조나단의 시선은 남달랐고 많은 기대로 가득찼던 것을 실감하게 된다. 4년 후 조나단이 24세, 사라가 17세 되던 어느 날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한 쌍의 젊은 남녀는 결혼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고상한 인격을 소유한 젊은 숙녀였다.
에드워즈 목사부부는 세아들과 여덟명의 딸을 낳았다. 그러니까 11명의 자녀를 포함해 총 13명의 대식구가 함께 사랑 안에서 오손도손 살았다. 에드워즈의 사위로서 전기작가이기도 했던 드와이트(Dwight)는 그들 가정의 다정다감했던 모습을 아름다운 대화의 신앙공동체로 묘사하고 있다. "저녁 식사 후 거실에 앉아 약 한 시간 동안 힘든 공부에서 벗어나 자녀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으며 즐겁고 다정한 대화로 긴장을 풀었다. 자주 위트와 유모어가 폭발하며 흥겨운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다시 공부하러 들어가기 전에 점점 진지해져가는 대화를 나누며 큰 관심과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구원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있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둔 아름다운 성도의 가정을 충분히 그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위트와 함께유모어가 폭발하는 여유를 목사의 가정에서 잃지 않으며 아울러 깊은 신앙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던 에드워즈 목사의 가정이야말로 오늘의 성직자의 가정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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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설교자 - 조나단 에드워드
죠나단 에드워드 Jonathan Edwards(1703-1758)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주의 이스트 윈저에서 출생했다. 그는 11자녀 중 외아들이었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드는 이스트 윈저의 회중교회 목사였다.
죠나단 에드워드는 어린 시절에 회심했다. 많은 지적재능을 가진 그는 12세에 예일대학 입학하였다. 그는 1720년 예일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비록 자신의 구원에 확신이 없었지만 에드워드는 복음 사역이 그의 소명임을 확신하여 1720년 10월에 신학수업을 위하여 예일로 돌아갔다. 6년 후 에드워드는 그의 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가 시무하던 교회의 강도사 직을 수락하였으며 그 교회는 메사추세츠주 노드햄턴에 있었다. 그는 1727년 2월15일에 회중 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같은 해, 그는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하는데 그녀의 부친은 목사로서 예일대학의 설립자중 한 분이었다.
1729년 에드워드는 노드햄턴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734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 " 에 대한 그의 설교는 코네티것 리버 벨리 지역에 영적 부흥을 가져왔고, 1740년 일어난 영적 대각성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1750년, 에드워드는 성찬식 참여자의 자격에 대한 교회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노드햄프톤교회에서 해임되었고, 1751년부터 스톡브릿지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철저한 칼빈주의자인 에드워드는 원죄, 예정론, 거듭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설교인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은 회개하지 않은 죄인들이 지옥에서 맞이하게 될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노드햄턴교회에서는 에드워드의 설교에 의해 많은 회심자가 생겨났고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변화되었다. 1734-1735년과 1740-1742년에 일어난 그 유명한 부흥운동 이후 본 교회에서는 그에 대한 배척운동이 일어나 마침내 투표에 의해 축출되고 말았다.
그 후 에드워드는 인디안 선교사로서 여러 해를 일했다. 1758년 에드워드는 뉴저지 대학(지금의 프린스톤대학교)의 총장직에 취임하였으나 취임 5주 만에 천연두로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천재로, 최고의 설교자로, 많은 저술을 통해서 미국 역사상 큰 영향을 미친 가장 유능한 개혁 신학자로 알려졌다.
지옥에 관한 설교중 가장 특이한 것은 요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엔필드(Enfield)에서 행한 것일 것이다. 그 제목은 '노하신 하나님 수중의 죄인들'이었고, 본문은 "그들의 발이 미끄러질 그 때에 내가 갚으리로다"(신32:35)였다. 가장 극적인 용어들로 에드워드는 지옥 구덩이 위에 인생의가느다란 끈에 매달려 있는 불신자들을 묘사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에드워드의 지옥 묘사가 과장되었다고 하나, 그의 동기는 정당했다. 에드워드는 이 영원한 문제가 위기에 놓였음을 알았다.
그는 이런 말로 그 설교를 맺었다 : '이것은 무서운 주제입니다! 이 설교가 믿지 않는 영혼들을 깨워서 그들의 위기를 깨치기를 바람니다! 틀림없이 하나님의 진노는 이 백성 위에 임하고 있으며, 교회의 많은 신자들에게도 임했습니다. 소돔에서 천사가 롯에게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창19:17)'
1758년 초에 천연두가 뉴저지에서 발생하여 일대에 널리 퍼졌다. 그리고 프린스톤에서도 만연하여 위험하였다. 에드워즈는 접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실시되고 있을 때였던 2월 초에 접종받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최선의 방법이었다고 생각하였다. 왁친주사는 아주 만족할 만큼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기 때문에 위험한 일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번째 발열은 에드워즈의 연약한 몸이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에 3월 22일 54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말을 남겼다.
"내 아내에게 전해 주시오. 오랫동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신비한 연합은 내가 믿은 대로 영적인 성질의 것이었으므로 영원히 계속될 것이오."
에드워드의 딸 수잔나(Susannah)가 프린스톤에 있었던 언니 에스도에게 보낸 편지는 자기 아버지가 스탁브리지를 떠나가시던 모습을 상기시켜 준다.
「아버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알고 계셨던 것처럼 하고서 교우들과 가족들 곁을 떠나가셨다. 그 주일 오후에 '우리에겐 불변의 도시란 없으니 천성을 바라봅시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봉독한 본문은 사도행전 20장이었다. 이 얼마나 적절한 내용인가!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아버지께서 문 밖으로 나와 돌아서서 '하나님께 여러분을 맡깁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버지처럼 돌보아 주실 것을 의심치 않는다. 」
대각성 운동(Great Awakening)의 조나단 에드워즈는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시작시킨 인물이었다. 그는 1703년 목사 가정의 다섯 째로 태어났다. 신앙과 사상 그리고 근면한 삶의 터전은 아버지 디모데 에드워즈와 어머니 에스더의 영향이었다. 그는 13세 때 예일대학에 입학, 1720년에 졸업하고 계속 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는 25년 동안 노댐프턴에서 목회를 했는데 이 시기에 대각성 운동이라는 부흥 운동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대각성 운동이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하였다. 대각성 운동의 결과, 많은 영혼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대각성 운동은 미국 해안 지방에 복음주의적 기독교를 심었다. 초기의 노예 제도 반대 운동은 계속되었고 인디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증가하였다. 대각성 운동은 교육 부문에서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브라운 대학 등은 대각성 운동의 결과로 생겨난 의의 깊은 학교들 중 일부이다.
또한 대각성 운동은 교파의 벽을 허물고 관용의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도 이바지하였다. 교회사가 윌리스턴 워커도 말하기를 “문화적 혼란의 와중에서 발생한 이 운동은 미국의 교회 생활에 막대한 충격을 주었다”라고 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진리의 횃불을 밝히며 의의 길을 열어준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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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화(榮光化)의 논리(The Logic of Glorification):
조나단 에드워드의 종말론 연구 / 장경철 교수
목차
1. 서론
2.하나님의 영화의 위대한 계획
2.1.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의 종말론의 위치
2.2.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
2.3. 하나님의 나라와 인간의 참여
2.4.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
3.성도 개인의 영화
3.1. 영화의 계속적 진행으로서의 죽음
3.2. 영혼의 불멸
3.3. 분리된 성도의 축복
4.인간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
4.1. 천년왕국의 역사
4.2. 역사와 하나님의 나라
4.3. 천년왕국과 하나님의 나라
4.4.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5. 하나님과 성도의 궁극적 영화(榮化)
5.1. 영광의 시대
5.2. 하나님의 영광의 공적인 드러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부활
5.3. 최후의 심판
5.4.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중요성
6.영원한 생명의 성격: 새 하늘과 새 땅
6.1.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제 안에서의 지복의 비전
6.2. 새 땅의 비전: 육신적 차원의 중요성
6.3. 천국 행복의 역동적인 비전
7. 결론
1.서론
기독교 신학에서 20세기는 종말론의 관심이 새롭게 일어났던 시기이다. 물론 19세기의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나라 등과 같은 종말론적 개념을 사용했으나,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본질적으로 이 세계적인 개념이었을 뿐이며, 따라서 그들 신학의 중심 개념은 종말론이기보다는 윤리나 교회론이었을 뿐이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세계적인 하나님 나라를 향한 과정에서 위대한 예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종류의 세계 내적인 예수 이해, 하나님 나라의 이해에 대항하여 우선 성서신학의 분야에서 초월적인 종말론 이해가 전개되었다.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 있어서 종말론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요하네스 바이스(Johannes Weiss)가 강조한 이후로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등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종말론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만일 기독교가 전적으로 종말론이 아니라면, 그 가운데는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련성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말론은 기독교 신학의 한 부록이 아니라, 기독교 소식의 전 부분을 관통하는 열쇠와 같다고 본 몰트만(J. Moltmann)의 견해는 옳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단지 부록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기독교는 종말론이며, 희망이며, 앞을 향해 보고, 앞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기에, 그것은 또한 현재를 혁명화하고 변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론은 기독교 교리의 오직 한 부분만이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종말론적인 전망은 모든 기독교 선포와, 모든 기독교 실존, 그리고 모든 교회의 특징이다. 기독교 종말론은 역사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일 뿐 아니라, 역사의 핵심에서 움직이는 역동적인 힘이라는 점이 또한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학에서 이러한 종말론의 재발견으로 인하여, 새로운 종말론적 자각이 싹트게 되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자각으로 인하여, 기독교 신학에서 종말론의 근본적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된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종말론의 이러한 강조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으로 기독교적 종말을 다루는 내용들은 아직도 추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음을 지적할 수밖에 없다. 요셉 라칭거에 따르면, 종말론의 부흥에도 불구하고 "그저 미래의 신학과의 대화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닌 종말론을 쓰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론의 형식적 강조 가운데 종말론의 고전적 주제들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는 아직도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려는 기독교적 시도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 입장에 의하여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 첫째는 인간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부인하는 입장으로서 계몽주의 이후로 성경의 종말론적 희망을 무지한 두려움의 산물로만 치부하는 입장이다. 이러한 영향 가운데, 근대 신학의 종말론 이해는 "기독교 교의학의 결론에 추가된 짧고, 전적으로 무해한 한 장(章)"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인간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만을 배타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인간의 책임을 외면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성경의 종말론적 선포를 소위 성서적 종말 날짜 산정을 위한 자료들로서 간주하는 가운데, 종말론을 세계의 멸망에 대한 단순한 예측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종말론적인 비전이 기본적으로 이원론적 세계 이해에 근거해 있기에, 그들의 종말론적 의식은 세계의 책임으로부터의 도피에 불과한 것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예에서 보이듯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 이해는 제대로 발견되지 않는다. 첫째 입장은 역사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는 있으나, 역사의 종말론적 차원을 외면하고 있다. 둘째 입장은 역사의 묵시적,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댓가로 운명론을 선택하고 있다. 또한 이 입장에서는 종말론적 시각이 역사로부터 사라지고,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다니엘 밀리오리는 자신의 책에서 기독교 종말론의 중심적 문제들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인가, 아니면 인간이 그들의 노력으로 그 나라를 이루어 가는가?" 여기서 우리는 종말론적 비전을 전개함에 있어서 하나님 차원과 인간의 차원을 균형적으로 강조하는 종말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점에서 이 논문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성서적으로 건강한 종말론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귀중한 시각과 자료들을 제공한다는 확신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인간의 마지막 일들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차원과 인간의 차원,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을 균형적으로 전개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려고 한다.
특히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 성도들의 운명에 우리의 촛점을 맞추는 가운데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의 차원과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균형 있게 조화하고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은 도피주의적, 개인주의적, 정적인 관점에서 살펴질 수 없다. 종말을 향하여 나아감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 곧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 속에 더 심층적으로 참여하고, 공동체의 삶 속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나님의 풍성함을 누리는 보다 역동적인 생명을 부여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을 분석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榮化)로서 이해하며,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에드워즈 종말론의 중심 개념으로 이해한다.
여기에서 전개되는 에드워즈의 종말 이해는 종말론뿐만 아니라 에드워즈 해석 분야에 있어서도 작은 공헌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에드워즈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이며, 정적이고, 영혼 중심적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공동체로서 이해되며, 그 가운데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광이 실현되는 장(場)으로 여겨진다. 에드워즈의 신학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의 종말론적 비전을 둘러싼 날카로운 논쟁이 있어 왔는데, 특히 그의 후 천년설을 둘러싼 해석은 매우 날카로운 대립을 보여왔다. 한 편으로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해석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와 성취적 요소를 강조한 흐름이 있다. 예를 들어, 알랜 하이머트(Alan Heimert)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최고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초월적 차원을 강조한 흐름이 있는데, 예를 들어 대롤 브라이언트(M. Darrol Bryant)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관심을 인간의 시도를 향한 원동력으로서 이해하고자 한 하이머트의 시도에 도전하였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인 목표"를 향한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향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초역사적이며 영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를 둘러싼 이러한 논쟁은 오직 에드워즈의 신학적, 종말론적 비전을 전반적으로 분석함을 통해서만 그 결론이 얻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우리의 주장은 에드워즈가 최종적 상태에 대한 균형적인 시각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시각 가운데 에드워즈는 자신의 신학의 중심 특징인 하나님 중심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최종적 목표는 분명히 인간의 고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화(榮化)에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하나님 중심적 특성은 인간 책임의 외면을 뜻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위대한 계획은 모든 만물의 회복과 완성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 역사의 변혁과 모든 성도들의 영화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완성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 역사의 변혁이라는 종말론적 주제들은 서로 균형 가운데 존재한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 세계 가운데 책임적인 존재가 되는 것을 막지 않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시각은 이 세계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성을 더욱 강화시키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자신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성도들의 운명이 하나님 자신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인간의 운명을 하나님의 최종적 운명과 연관시킨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화는 성도들의 영화를 포함하는 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을 성취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의 선을 완성하려는 위대한 계획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목표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을 고찰하는 것이므로 이 논문의 범위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마지막 단계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는 인간 영혼의 문제, 중간상태의 문제, 천년왕국의 문제, 그리고 최종적 완성의 문제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사역이 개별 신앙인들과 인간 역사를 통하여 완성되는 모습을 살펴본다는 것이다.
2.하나님의 영화의 위대한 계획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토대가 되는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을 살펴볼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는 그의 독특한 성향론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은 현실태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세계에 대하여 전적으로 우선하여 존재하는 분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영원히, 불변하게, 그리고 독립적으로 영광스러운 분이며, 또한 완전한 분"이며, "피조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거나, 피조물로부터 어떤 이득을 받거나, 피조물로부터 받을 어떤 것이 있는 분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자존성, 자기충족성 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이 세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 존재하는 분임을 뜻하거나, 이 세계의 역사와 아무런 관련을 맺지 않는 분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복에 대하여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자기 충족성, 독립성, 불변성 등으로부터 비롯된다.
하나님의 영광과 행복은 그 자신 안에서, 그 자신으로부터 존재하며, 또 그것은 무한하고 덧붙여질 수 없으며, 또 전적으로 모든 부분에서 변화될 수 없기에 하나님은 피조물로부터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다음의 내용이 추론 되거나 그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닌데, 곧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상대적인 자신의 행위나 자신의 전달 가운데, 또는 자신이 피조물 안에 일으키는 결과들 가운데 그 어떤 참되고 본래적인 기쁨, 즐거움, 또는 행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 사실인 것은 아니다. 즉, 에드워즈는 이렇게 완전한 현실태로 존재하는 하나님의 역동성에 대하여 말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본질에 있어서 성향적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통하여 서구 신학의 실체론적 하나님 이해를 넘어서서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고 있다.
성향적 하나님 이해는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자신의 내적인 존재를 확대하는 경향성을 가진 분임을 뜻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충만한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그러한 현실태를 계속 반복하며 그러한 반복 가운데 자신의 영광을 피조물의 세계를 향하여 전달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이해를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 이해를 통하여 보다 명료히 서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즉 피조물의 공헌이나 피조물의 존재가 없어도 하나님은 이미 하나님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가 아직도 생성 가운데 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점에서 에드워즈의 신론은 과정신학의 신론과는 구분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이 실존하기 위하여 세계를 창조할 수 없으며, 또는 그러한 속성, 완전성, 본성을 가지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를 창조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위나 계획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현실태와 초월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에 관하여(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라는 논문에서,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과 영생 이해에 대한 신학적 초석을 놓고 있다. 여기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 개념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창조와 구속의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에드워즈 신학의 핵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 인간이 참여하는 것에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화의 틀 속에서 개인적 종말, 인간 역사와 공동체의 종말,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이 모두 이해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내적인 존재와 영광을 외적으로 드러내고 전달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가장 뛰어난 존재이기에 그 자신보다 열등한 존재를 자신의 창조의 목표로 삼을 수 없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계의 창조 이전에 이미 하나님이기에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창조의 목표로도 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헤겔이나 과정신학의 하나님과 달리, 에드워즈의 하나님은 세계사의 과정을 통하여 그 존재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의 주로서 이미 자존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양자택일의 곤경을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내적인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라는 틀로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하나님은 내적인 삼위일체로 이미 완전한 하나님으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이 세계의 창조와 구속과 완성을 통하여 의도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실현이 아니라, 이미 내적인 충만한 하나님 존재의 외적인 전달이며 반복이다. 이러한 하나님 영광의 외적인 반복은 에드워즈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 곧 성향적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이미 현실태로서 존재하는 하나님이지만, 하나님의 충만한 현실태는 또한 성향으로서 존재한다. 즉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이 끊임없이 하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영화는 하나님의 내적인 지식, 사랑, 행복이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에게 전달됨으로써 그들이 또한 하나님 밖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내적인 교제를 반복하고 증가시키는 과정 속에서 성취된다.
즉, 내적인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존재하며 향유 되었던 하나님의 지식, 사랑, 행복이 외적으로 피조물을 통하여 반복될 때 하나님이 더욱 영광을 받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유출과 회귀의 신적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emanation and remanation)이라는 에드워즈의 이해를 만나게 된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알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기뻐하며, 또 찬양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며 인정되며, 하나님의 충만성은 수용되는 동시에 또한 되돌아온다. 여기에 유출이 있으며 회귀가 있다. 그 광채는 피조물 위에, 또 피조물 속에 비추어지며, 또한 빛을 발하는 발광체에게로 되돌아간다. 창조와 구속의 목표를 하나님의 영화로서 이해하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원리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함축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자기 영광화라는 궁극적 맥락에서 펼쳐지는 것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저 다가오는 미래,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의 하나님만이 아니다. 스타인이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는 종말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의 촛점 아래 위치시키며, 동시에 땅의 차원과 하늘의 차원의 균형을 맞추어 놓는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종말론적 기대란 미래의 알려지지 않은 추상적인 사건들의 예측에 그 촛점이 있지 않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하나님의 영화의 궁극적인 실현에 있으며, 이것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화라는 궁극적인 차원에 미달하는 것은 에드워즈의 희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라는 이러한 맥락은 그저 일원적이며 단선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는 반드시 피조물의 완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면에 피조물의 완성은 또한 하나님 자신의 영광 받으심을 함축하고 있다. 그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영광과 창조주의 영광을 매우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기에, 피조물의 완성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의미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은 피조물의 완성을 통하여 더욱 영광 받으시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인식론적인 확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확산되고 증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운명을 하나님의 운명과 동일시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화는 피조물의 선이 없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불완전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기서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 또는 자신의 최종적 목표로 삼는 것과, 하나님이 피조물을 위하여 행동하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져서는 안되며, 또는 서로 어긋나는 것의 반대 부분들로서 여겨져도 안된다. 오히려 그것들은 서로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져야 하며, 다른 것 안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개인적 종말론과 일반적 종말론 사이의 구분을 가지고 있는데, 개인적 종말론이란 개개인의 성도들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인 반면에, 일반적 종말론은 인간의 전 역사와 관련하여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한다. 비록 에드워즈가 이러한 구분을 두는 것은 사실이지만, 에드워즈는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두 가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라는 큰 틀 안에서 통합되고 있다. 두 측면의 종말 이해를 다룸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전자(前者)의 계획을 후자(後者)의 계획 안에 위치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성도 개개인의 영화는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라는 커다란 틀 속에서 살펴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화라는 위대한 계획은 인간 몇몇의 구원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로 확장되는 것인데, 이는 인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가 파괴되었고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종말론적 성취의 영역에서 우주적 실재를 배제하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 하나님 나라 이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의 말에 따르면, "모든 하늘과 땅이 전복되었기에",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회복하는 것, 말하자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몇몇 개인들의 구원이나 또는 영혼만의 구원으로 이해될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로서 이해되며, 따라서 모든 우주의 완전한 새롭게 됨이며 이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된다. 개인의 영화는 인간 역사 전체의 영화의 틀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우리는 여기서 에드워즈 종말론의 특징을 하나 지적하고자 한다.
즉, 여기서 에드워즈는 인간과 인간 역사의 영화가 심지어는 하나님 자신의 영화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지적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개인의 구원과 인간 역사의 변혁과 완성이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건이 단지 피조물 자신의 운명과 관계되어 있기만 하여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이 "영광스러운 피조물 존재의 사회"에 전달될 때, 하나님의 영광은 반복되면서 또한 증대한다. 따라서 피조물의 영화는 피조물 자신의 영화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영화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심지어 피조물의 완성과 영화를 통한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을 "하나님 자신의 충만과 완성"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이 절(節)의 내용을 요약하도록 하자: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가 전개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 곧 영원 전부터 영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가진 영화의 틀 속에서 전개되고 있음을 보았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틀은 그의 독특한 하나님 이해에 근거한다. 에드워즈는 삼위일체 하나님 이해와 성향적 하나님 이해를 결합함으로써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전개하며, 그에 상응하여 역동적인 세계의 종말 이해를 전개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화의 과정 속에서 피조물은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 받는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기 충족성, 자존성, 주권 등이 철저하게 강조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하나님 중심적이다. 하지만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중심성은 이 세계의 최종적 완성의 과정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이 무시되고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는 인간 삶과 인간 역사의 최종적 순간을 하나님의 영화의 역동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는데, 이러한 역동적 과정이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역할이 있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피조물의 차원의 진정한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는 가운데 종말에 대한 하나님 중심의 비전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주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참여의 진정한 공헌을 긍정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인간 역사의 상대적이나 진정한 공헌을 강조하고 있다.
3.인간 역사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진보
우리는 이전 항목에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화에 있으며, 하나님의 영화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표현이며 반복에 있음을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은 이미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충만하고 완전하게 실현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반복하는데 그 영광을 계속 실현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이러한 외향적 실천은 피조물의 존재를 향하여 계속해서 나아가며, 또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온다. 하나님의 영광의 외적인 유출과 회귀라는 이러한 영원의 운동 속에 피조물의 선은 자리를 잡는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선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의 실현 안에 포함되어 있게 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궁극적 영광화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실현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궁극적인 영광이 충만하게 드러나고 실현되는 최후의 공동체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는 역사의 최종적 순간에 완성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러한 궁극적 공동체가 이 세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의 최종적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비록 잠정적인 모습이기는 하지만, 참으로 성취된다. 이 항목에서 우리는 역사와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를 살펴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역사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신념과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에드워즈는 적극적인 역사이해를 펼치는데, 이에 따르면 역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장(場)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은 그 나라의 시간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를 고양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이 역동적인 역사 이해에 공헌한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의 후천년설에 나타나는 것이다. 역사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의 내적인 영광의 외적인 반복으로서의 하나님의 영광화는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이것은 또한 구속의 역사가 지향하는 바이다.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실현되고 있으며, 천년왕국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한 단계임을 강조하고 있다. 먼저 에드워즈는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인간 역사를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는데, 곧 그리스도 이전의 시대, 그리스도의 시대, 그리고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이다. 이 시대 구분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그리스도 이후의 시대는 모두 종말로서 간주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세계의 종말"로서 불릴 수 있는데, 그것은 "이 모든 시대가 사물을 위대한 목적에로 마무리하는" 단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로 세계의 종말에 이르는 단계는 하나님 나라의 건설로 특징 지워진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는 그 속에서 자신의 아들을 위한 나라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를 하나님 나라가 점진적으로 실현되는 영역으로 파악하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미래 역사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희망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교회를 위한 진정한 미래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는 전천년설이나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낙관적인 인간 이해에 그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음을 지적해야 한다. 인간의 실상에 대해서 에드워즈만큼이나 현실적인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인간의 죄악된 실상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하는데, 그의 역사 이해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믿음과 자신의 내적인 영광을 외적으로 실현하는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비롯된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은 천년왕국설에 대하여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개혁자들의 비판은 천년왕국설이 미래에 대한 세상적이며, 육체적인 기대를 꽃피웠고,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성격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빈은 천년왕국적인 사고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한다. 천년왕국에 대한 칼빈의 비판은 중요한데, 그것은 칼빈의 비판이 주요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천년왕국설이 기독교 희망의 진정한 내용을 가난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그것을 비판한다. 칼빈에 따르면, 천년왕국설은 기독교 희망의 거짓된 시간화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에드워즈를 변호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브라이언트는 천년왕국적인 기대가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브라이언트에 따르면, 에드워즈는 자신의 생애의 말기에 후천년설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대한 하이머트의 해석을 비판하면서, 브라이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분명히 "초월적인 목표"에 놓여 있었고, "지상의 나라"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브라이언트에 의하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창조의 목표는 "초역사적이며 영적인" 것으로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브라이언트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데, 에드워즈는 "역사적인 과정을 이 세계 내적인 하나님의 나라로서 이해하는 종말론"을 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라이언트의 이러한 에드워즈 해석은 진리의 반쪽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가 역사의 미래에 일종의 황금시대로서의 천년왕국을 기대하였음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이러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이 과연 기독교 희망의 궁극적 차원을 약화시키는가의 문제이다. 칼빈이 비판하고 브라이언트가 변호할 때에 가정하고 있듯이,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빈곤하게 만드는가? 역사에 대한 후천년설적인 에드워즈의 해석은 그 자신의 근본적, 신학적 주장과 정말로 모순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답변할 수밖에 없는데,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기독교 희망의 내용을 오히려 풍성하게 만들며, 또한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전달적 측면을 강조하는 에드워즈의 근본적, 신학적 틀에 전적으로 합치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 이해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초역사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천년왕국과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보다 자세히 고찰해 보도록 하자. 자신의 구속의 사역의 역사에서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개념을 보다 포괄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하는 틀 속에 통합시키고 있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궁극적 대상은 천년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임은 분명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초월적인 실재로서 오직 역사의 마지막에만 실현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에드워즈는 또한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성격도 역시 강조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이 그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정적인 실재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계의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가시성(visibility)을 추구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드러남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그 초월적 실재를 이 세계 속에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궁극적 실현은 이 세계의 마지막에야 충만히 실현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주기적으로 완성에 다다르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 이해를 그리스도의 나라의 네 차례의 도래의 틀에서 설명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하나님의 나라는 네 차례에 걸쳐서 다가온다. 그 가운데 세 번째 도래로부터 천년왕국이 시작된다고 보았다. 천년왕국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라는 틀에서 파악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중요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천년왕국의 제한적인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천년왕국은 역사 속에서 성취되는 하나님 나라의 궁극 이전의(penultimate) 실현으로서 이해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역사의 진보 가운데서 예기적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나라가 단지 먼 미래에만 의미 있는 실재가 아니라, 바로 역사적이며, 세계적인 차원에서도 의미 있는 실재하는 성서적 확신을 긍정하고 있다. 이러한 면에서 천년왕국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필수적이기까지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란 그저 추상적이고 초역사적인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개념으로서 이 역사 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실현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내재적 차원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천년왕국을 건설함에 있어서 인간 참여의 실질적 중요성에 대한 강조로 이어진다. 에드워즈는 제1차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부흥운동을 강조하였다. 부흥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단순히 영혼을 모으는 개인주의적, 영혼주의적(spiritualistic) 동기로부터 출발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부흥운동은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 발전에서 그 중요성을 찾는다. 에드워즈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하여 누차 경고한다. 자신의 후천년설을 통하여, 에드워즈는 세계에 대한 도피주의적 태도를 거부하고, 인간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를 전개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적인 희망은 이 세계에 대한 책임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부흥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 이해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역동적인 이해와 그러한 영화의 과정 속에 대한 인간 참여의 강조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절(節)의 내용을 정리하도록 하자: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에 대한 논의를 통하여, 우리는 에드워즈가 역사 속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공동체적이며 구체적인 이해를 전개하고 있으며, 따라서 천년왕국에 대하여 개인주의적이며 영혼주의적인(spiritualistic) 이해를 거부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천년왕국이란 인간의 영혼에 대한 그리스도의 영혼적인 지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천년왕국에 대한 영혼주의적 견해를 거부함으로써,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의 신체적, 구체적 차원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천년왕국에 대한 이해 속에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에 대하여 균형적인 이해를 전개한다. 인간 역사의 궁극적 완성의 차원을 외면하지 않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 내적인 실현의 중요성을 또한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을 구원의 역사의 궁극이전의 완성으로서 이해하는데, 이러한 이해는 역사에 대한 적극적인 태도로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천년왕국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궁극적 비전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역사의 최종적 목표는 언제나 새 하늘과 새 땅을 지향하는데,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드러나는 최종적 완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천년왕국 속에서 인간 역사의 잠정적인 목표를 발견한다. 비록 천년왕국이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닐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으로서의 천년왕국은 이 세계 내적인 희망의 구체적 목표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인간 역사의 최종적 완성의 측면을 간과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비록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성취에도 주목하고 있으며, 이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성취에 있어서 인간의 참여가 상대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의 종말에서 실현될 초월적인 실재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계 내적인 역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적 실재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역사의 시간적 차원과 관련을 지음으로써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도 하나님 나라의 내재성은 주의 깊게 그 의미가 밝혀져야 하는데, 그것이 인간의 소유 가운데 있거나 또는 인간 역사와 동일시된다는 의미에서의 내재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실현은 언제나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 있는 것이므로,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강조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인간의 소유로 돌려놓지 않는다.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 실현은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 실현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실현과 반복임을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살펴본 파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역사 속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죄와 악의 세력에 대항하여 승리할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전달적인 속성에 대한 강한 신념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 나라의 점진적인 진행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였다. 미래는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보다 충만하게 드러낼 영역이므로, 에드워즈는 역동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와 함께 적극적인 역사 이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적극적 역사 이해는 교회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의 구체적인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권면한다.
4.영원한 생명의 성격:
새 하늘과 새 땅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제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성찰에 있어서 매우 소중한 주제이다. 에드워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격을 묵상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모습에 대해서 무엇인가 구체적인 것을 말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경주하였다. 먼저,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구속의 사역의 목표로서 여겨지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이전의 모든 혁명의 목표, 그들[성도들]의 수고와 고난의 최고의 보상, 그리고 세계의 이전 부분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섭리의 이러한 놀랍고 이어지는 모든 경륜의 궁극적 목표"로서 이해된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이전의 모든 혁명들의 최종적 목표로 여겨지기에, 지상에서 교회가 누렸던 모든 영광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된 영광에 비하면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부활 이후의 영광에 비하면 이전 시대의 영광은 "아무런 영광이 아니다." 부활 이후의 상태는 "완성의 상태"인 반면에, "하늘과 땅 모두에 있어서, 이전 시대의 교회의 영광은 자라 가는 상태에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하나님의 충만함의 참여로서 요약될 수 있는데, 성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의 외적인 반복 가운데 참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철저하게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전개되고 있다. 에드워즈의 용어로 표현해 보자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회 속에 용납 받게" 된다. 그리스도는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하여 성부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권속 안에 포함시키게 하며, 따라서 그들은 말하자면 한 사회, 한 가족이 된다.
그리하여 그의 백성들은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의 신성 안에 있는 세 위격의 사회 속으로 용납된다. 기독교 신앙(Christian Faith)에서 베르코프(H. Berkhof)는 영원한 생명을 "세계의 마지막"이나 "시간의 종말"로서 이해하기보다는 "진정한 삶의 시작"으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착상을 전개하고 있다. 베르코프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그의 인간 피조물을 이러한 잠정적이며 소외된 형식의 삶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고향 속으로 인간을 데려갈 때, 마침내 삶이 참으로 시작된다." 베르코프의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에도 적용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모든 만물의 마지막"은 "어린 양의 결혼잔치"인데, 이것은 곧 영생의 시작이기에, 영생이란 진정한 삶, 참된 삶의 점진적인 전개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를 살펴보기 위하여,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지복의 비전, 새 땅의 비전, 그리고 천국에서의 행복의 역동성 등의 주제를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세대의 신학자들은 영생의 성격을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전통적으로 영생은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으로 여겨져 왔다.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서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도 역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중요한 표상으로 간주한다. 영원한 축복의 삶에 대한 가장 흔한 정의는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the beatific vision of God)이다. 많은 고전적인 신학자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비전을 영생의 핵심으로서 간주하고 있다.
신의 도성(City of God)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늘에서 ... 우리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비물질적 하나님을 볼 것이다."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도 역시 지상의 비전과 지복의 비전을 구분한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지복의 비전은 하나님에 대한 보다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비전으로, 오직 하늘의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것이다. 칼빈도 요한일서 3장 주석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때에 가려지지 않고 명확한 가운데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볼 것이며, 이것은 새롭고 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전적으로 거룩한 양식의 비전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복의 비전은 현대에 와서 여러 모로 비판을 받아왔다. 지복의 비전에는 세계와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한 강조점이 거의 없음이 지적되어 왔고, 따라서 이것은 개인적이며 수동적인 비전으로서 여겨졌다.
또한 이것은 사변적인 개념으로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피할 수 없는 경계를 무시하고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영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의 본질적인 면을 다루고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버카워가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서적 증언 가운데 포함되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늘나라의 주요한 축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에드워즈는 이러한 시도 속에 수반된 한계를 잘 알고 있다. 종말이 아직 다다르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것들[즉, 마지막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게다가,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논하면서 언어의 불충분성에 대해서 말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우리의 가장 뛰어난 수사(修辭)를 통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도 분명한 진리 그대로의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한참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을 기술하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성도들이 현재 누리는 행복과 전적으로 불연속적인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의 본질적 행복은 구속 받은 성도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존재론적 교제의 완성이지 그 부정(否定)이 아니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 이해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의 맥락 속에서 전개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은 성도가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교제 속에 참여함으로 맛보게 되는 것이지, 인간의 지성적인 한 기능이 하나님화(化) 함으로써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참여로 인하여, 성도들은 하나님이 내적인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누리는 지식, 사랑, 행복에 참여하게 된다. 따라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의 본질적인 성격은 지적인 투시와 시각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인 교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순전히 지적인 투시와 시각이기보다는 존재론적인 교제와 참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여기서 성도들은 인간학적인 고양(anthropological elevation)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가운데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기독론적인 관계(christological relationship)에 의하여 하나님의 공동체 안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지복의 비전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비적 합일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하나됨은 피조물의 고양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관계적 역사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성도들은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면에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천국의 성도들은 자신의 모든 행복, 자신의 모든 거룩함, 그리고 자신의 모든 빛에 있어서 지상의 성도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지상에서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모든 것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으로 가득차 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인간의 피조물 됨을 부인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 천국의 완성된 삶이란 인간의 유한성의 폐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간의 피조물 됨을 완성하며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피조물은 하나님의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이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과 피조물이 하나의 의식이 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상호관계로 남는 것이다. 이에 대한 헨드리의 언급은 적절하다. 하나님의 영광의 주권에 대한 그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이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을 하나님이 아닌 것과 관계지우는 영광으로서 간주한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에의 회귀 가운데 있는 영광의 완전성에 대하여 사고하였을 때, 에드워즈는 이러한 완전성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폐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러한 창조주-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더욱 고차적으로 완성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피조물과 자신 사이의 무한하도록 완전한 하나됨"을 지향한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덧붙임으로써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혼돈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나 "그 하나됨이 이제 무한하게 완전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특정한 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지복의 비전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그의 계시 이해와 일맥 상통하는 것으로, 이는 지복의 비전이 계시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전달의 종말론적 실현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계시란 하나님에 관한 어떤 한 교리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전달이다.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과 탁월성에 해당하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늘나라의 주요한 행복은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에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복의 비전이 성도들의 궁극적 행복으로 여겨지나,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 제외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궁극적 영화에 대한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다른 궁극 이전의 기쁨들에 대한 여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그의 사변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생의 육신적 차원을 또한 포함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마지막 상태는 단순한 영혼주의적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의 완성은 육체를 벗고 영혼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기술함에 있어서, 에드워즈는 새 하늘의 차원뿐만 아니라 새 땅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은 곧 그가 육신적, 공간적 차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이해는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영생에 대한 이해가 부분적이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통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생의 실재를 무시간적이며 무공간적인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영역으로 이해한다. 이러한 새 땅의 측면에 대한 강조를 통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총체적이며 우주적 차원을 강조하기를 원한다. 하나님 나라의 실재는 몇몇 사람들의 영혼에 대한 사역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이 전 우주의 완전한 구속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범위에 대한 관점과 상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성도의 최종적 상태를 생각함에 있어서 새 땅의 측면을 간과한다면, 영생에 대한 성서적 가르침은 축소되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드워즈가 전개하는 새 하늘과 새 땅 이해의 역동적인 측면에 대해서 고찰해 보자.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국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며, 여러 시기가 있어서 그 속에서 새롭게 영광스러운 진전이 있다. 그리고 그 행복은 구속의 역사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자신의 현현(顯現)을 보는(BEHOLDING) 것 가운데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의 행복은 이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구속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 가운데 특기할 만한 점은 이러한 천국 행복의 점진적 성격은 단지 역사적 과정의 영역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영역에도 적용되는 데에 있다. 즉, 에드워즈는 영생의 삶 가운데서도 시간적인 요소가 있음을 지적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에드워즈가 말하는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완성에 다다르는가?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가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진행되어 왔음을 살펴보았다. 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계속 진행된 그 영화의 과정은 천국에서 그 완성에 이르는가? 에드워즈는 이 문제를 구속 역사의 완성과 그 열매라는 시각에서 답하고 있다. 일단 구속의 역사는 천국에서 그 종말에 이른다. 구속의 역사는 무작정 진행만 되고 그 결말이 없는 역사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말한다: "구원의 사역은 영원한 사역이 아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사역은 언제고 계속되기만 하면서 결코 완성되지 않는 사역은 아니다." 하지만 에드워즈는 곧 바로 덧붙인다: "하지만 이 사역의 열매는 영원한 열매이다." 즉 마지막 시대는 "만물의 궁극적이며 가장 완전한 상태의 시작"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더욱 풍성하게 드러낼 것이며, 성자의 영광이 더 풍성히 드러날 것이며, 따라서 성도들의 영광도 더욱 증가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구속의 사역이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속(救贖)의 현실태의 영속적인 증대는 계속될 것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과 피조물의 영화의 시작을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비유하는데, 이 혼인은 영원한 영광의 오직 시작일 뿐이다.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 혼인날은 결코 그치지 않을 것이다. ... 혼인의 기쁨은 영원토록 지속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은 점진적(progressive)이기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변화가 없는 것이며, 새로운 경우에 새로운 기쁨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는 견해는 하늘나라의 행복에 대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하늘나라 그 자체는 어떤 사악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지 않으며, "그것을 파괴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변화들"을 넘어서서 존재한다. 성도의 영화는 변화 없는 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무한한 정도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변화와 진보의 종말이 쉽게 오는 지상의 행복과 천국의 행복을 대비하면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지상의 연인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발견함에 있어서 어찌나 빨리 그 마지막에 다다르고 마는가! 그들은 너무도 빨리 서로의 모든 것을 보며, 너무도 빨리 하나되어 결국에는 서로가 누릴 수 있는 교제의 마지막에 다다르고 만다! ... 그런데 이 모든 것에서 영원한 진보가 있는 그 사랑은 얼마나 행복한가! 그 속에서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계속적으로 발견되며, 더욱 더 큰 사랑스러움이 또한 발견된다. 그 가운데 우리 자신은 아름다움 가운데 영원토록 자라갈 것이다. 우리가 영원토록 점점 더 사랑스러운 표현을 발견하고 또 주고받을 수 있게 될 때, 우리의 하나됨은 더욱 가까워질 것이며, 우리의 교제는 더욱 친밀해질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일종의 새로운 역사로서 보는 견해를 전개한다.
즉,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의 이면에는 시간과 영원에 대한 그의 견해가 자리잡고 있다. 기독교 종말론의 영역에서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는 시간과 영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을 단순히 시간과 상반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를 거부한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시간적 차원의 중요성은 심지어 영원한 삶 속에서도 상실되지 않는데, 이는 천국의 행복이 가장 역동적인 하나님의 내적인 삶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가운데 피조물의 존재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된 성도의 삶은 시간성을 포함한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새로운 역사로 이해함으로써 자신의 영원 이해를 보다 풍성하게 만든다. 이 지상에의 과거의 삶의 기억과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사랑의 지속적인 성장에 대한 미래의 희망은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원한 삶의 본질적 특성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서는 인간의 현재의 역사 가운데 발견되는 것과 같은 과거, 현재, 미래 사이의 분리나 모순은 없을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따르면, 상호 조화를 이루는 시간적 차원은 영원한 삶 속에서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영화롭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천국 행복의 미래적 차원을 포함한다. "그들(성도들)이 완전한 행복을 누린다는 사실은 모든 증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모든 희망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램지(P. Ramsey)가 지적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천국 행복 이해는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부터 훨씬 더 행복한 '완전함'으로의 운동"으로 기술될 수 있다. 영원한 삶의 시간성에 대한 강조는 에드워즈로 하여금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강조하게 한다. 전통적인 천국 이해는 영원한 삶을 다분히 정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으나, 에드워즈는 영생을 매우 역동적으로 이해한다.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는 창조에서의 타락 이전의 상태의 단순한 회복 이상을 지향하고 있음이 강조되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섬김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펼쳐질 것이며, 이에 따라서 성도의 행복도 무한히 진보할 것이다. 영원한 생명을 새로운 역사로서 이해함으로써,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영생에 관한 잘못된 견해 가운데 한 가지를 수정한다. 영생을 묘사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 사용된 표상 가운데 하나는 영원한 휴식의 표상이다. 인간 삶의 완성의 이러한 측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구절에도 나타난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오며,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우리의 마음은 평화를 누릴 수 없읍니다." 히브리서 4:9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목표는 "안식할 때"이다. 영생의 이러한 측면은 때로 인간 삶의 일종의 은퇴로 잘못 이해되기도 하였으며, 따라서 권태라는 감정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특히 현대인들은 영원한 휴식의 개념을 지루함이라는 개념으로 냉소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에드워즈에 따르면, 권태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의 모습을 기술하는 데에 전혀 관계가 없는 단어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에드워즈의 역동적인 비전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의 삶이 지루하다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이다. 물론 에드워즈 자신도 영원한 생명을 기술함에 있어서 휴식의 표상을 사용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할 것이며, 새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 모든 사람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인데, 이 안식에 비하면 이전까지의 모든 안식은 그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천국은 분명히 휴식의 장소이다. 그러나 천국에서의 영원한 휴식은 천국의 일에의 능동적인 참여와 결코 모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휴식은 무위(無爲)와 모든 행동의 중단에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모든 괴로움, 모든 수고, 모든 지겨운 일의 중단만을 의미한다.
가장 완벽한 휴식은 계속적으로 일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늘나라에 이르면, 실업자(失業者)가 되어서 아무 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는 지상의 성도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며 활동적인데,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되 모든 무익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케 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기 때문이다. 영광 가운데 있는 성도들은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적인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성도의 삶은 정적이거나 지루한 삶일 수는 없다. 에드워즈가 말하듯이, "하나님 자신도 무한한 행복을 즐기고 있다. .. 하지만 하나님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그 자신의 본성 가운데 하나님은 완전한 행위이며, 또한 계속적으로 일하고 계신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하늘나라에서 성도가 누릴 "거룩함의 원리"는 "가장 활동적인 원리"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에서의 성도의 삶에 비교해 보면, 지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매우 단조롭고 지루한 것이며, 따분하며 활발치 못한" 삶이다. 이 세계 속에서 성도들은 매우 지루한 가운데 있어서, 따분하며 활발치 못하였으나, 이제 그들의 타오르는 불과 같다. 그들은 단지 수동적이 아니라, 활동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작용을 받는 대상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행동하며, 이러한 행동과 재-행동(re-action)에 하늘나라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영생을 하나님의 지식과 사랑 가운데 영원토록 역동적으로 자라 가는 것으로 간주한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교제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인 삶 가운데 끌려 들어가기에, 영생은 결코 정적이며 변화 없는 상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삶이 끝없이 피조물을 향해 펼쳐질 것이며, 피조물은 또한 하나님 지식과 사랑 속에서 무한한 진보를 경험할 것이다.
5.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종말에 대한 에드워즈의 비전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분석 가운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그의 삼위일체론적 하나님의 영화의 틀 위에 토대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근본적으로 삼위일체론적인데, 그것은 그가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의 참여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최종적 운명은 이 세계적인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와 역사 안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피조물의 삶과 역사의 영화는 오직 그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삶과 역사 가운데 포함될 때, 이루어진다. 이러한 삼위일체론적 틀에서 살펴볼 때,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몇 가지 특성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차원을 가진다. 우리는 이미 에드워즈의 개인적 종말 이해가 역사적 차원의 종말 이해의 틀 속에서 전개됨을 지적하였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영생이란 고독한 개인적 실존이 끝없이 확장되고 연장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영생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공동체 가운데 성도가 참여하는 것이기에 근본적으로 공동체적인 특성을 지닌다. 맥대널(C. McDannell)과 랭(B. Lang)은 개혁자들의 영생 이해와 하늘나라 이해가 다분히 개인적인 용어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들의 하나님 중심의 전망에 보조를 맞추는 가운데, 개혁자들은 영생을 일차적으로 성도 개인이 하나님과 최고의 교제를 가지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새 하늘과 새 땅 이해는 이러한 유혹에 빠지지 않는데, 이는 그가 성도의 행복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공동체적 삶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들은 "삼위일체의 사회 속에 들어가도록 허락된다." 이러한 점에서 개인주의적 종말 이해는 그 시작에 있어서 배제된다. 에드워즈는 고독한 자아의 끝없는 연장 속에서 영생의 삶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영생의 본질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함 가운데 발견되고 획득되는데, 이러한 공동체는 곧 하나님의 나라이다. 영생에 대한 에드워즈의 공동체적 이해는 개인의 종말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죽음 이후의 성도의 운명은 보다 확장된 성도들의 공동체 속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죽음의 이후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 가운데 있음으로 인하여 성도들의 보편적 공동체 속에 참여한다.
둘째, 우리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역동적인 차원을 간과할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원한 삶이란 무시간적이며 정태적인 삶이 아니라, 역동적인 삶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시간적인 운동에의 참여이기 때문이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운명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는데,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 자신의 영화의 운동 가운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삶은 시간과 역사 안에서 반복되고 있으며, 성도는 바로 이러한 반복 가운데 참여하기에, 영생은 시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이러한 영생의 시간적인 성격에 근거하여, 에드워즈는 천국의 행복이 무한히 진보할 것임을 주장한다.
천국에서의 삶이 지루하고 반복적인 삶일 것이라는 우리의 기우(杞憂)는 영생에 대한 참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기보다는, 노동과 삶에 대한 우리의 왜곡된 이해를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다음과 같은 베르코프의 견해는 에드워즈의 역동적 종말 이해의 특성을 잘 설명해준다. 완성(Consummation)이란 과거와 미래의 연속을 다시 한 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곧 과거가 우리에게 있어서 축복으로 움직이며, 또 미래가 현재를 통하여 그 빛을 발하는 방식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피조물, 특히 인간의 참여의 차원을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종말론적 비전을 삼위일체론적 하나님 영화의 틀에 위치지음으로써, 인간의 참여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인간이 창조된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는 영화의 운동(the divine movement of glorification)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결과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지각 능력이 있는 존재를 창조하였고 그들은 의지력이 있고 능동적인 주체들 또는 매개체들로서 창조되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능동적으로 촉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영생이란 이 세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며,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삶에의 능동적 참여, 곧 이 역사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 구원의 사역에의 심층적인 참여를 뜻한다.
자신의 종말론 이해에서의 성도의 운동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성도의 운명에 관한 그의 이해 속에서 드러난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의 죽음은 이 세계로부터 저 세계를 향한 후퇴가 아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성도로 하여금 희미했던 구원의 역사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도우며, 또한 새로운 방식으로 이러한 영화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도록 만든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긴밀한 연합 가운데, 죽음 이후의 성도들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보다 강한 관심을 가지고, 또 참여하게 된다. 성도의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그의 후천년설적인 역사 이해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을 고찰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성도의 참여가 대단히 중요함을 살펴보았다.
먼저, 에드워즈의 신학적 비전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임이 지적되어야 한다. 하지만 에드워즈 신학의 하나님 중심성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그가 강조하는 인간의 책임과 양립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에 있어서의 지속적인 주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화에 있어서 차지하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강조이다.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청 받고 초대 받으며, 이것은 개인적 차원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차원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표가 하나님 자신의 궁극적 영화이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목표와 과제는 이러한 삼위일체적 영화의 과정 속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그의 확고한 신념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확고한 신념으로 인하여, 에드워즈는 인간의 참여에 강한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고찰하는 가운데,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적 희망과 이 세계에 대한 기독교적 책임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바르트가 말한 바 "위대한 의"에 대한 시각을 놓치지 않으면서, 성도들은 인간 역사의 변혁 가운데 참여하는 것이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도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이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것 가운데 참여하는 것을 통하여 성취된다. 인간의 참여에 대한 에드워즈의 강조점은 영생 이해에서도 약화되지 않는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영생이란 인간 삶의 은퇴가 아니라 새로운 삶, 진정한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영화롭게 된 성도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삶 가운데 참여하기에, 그들의 삶은 이곳 성도들의 삶보다 훨씬 더 활동적이 된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서론에서 우리가 지적하였던 에드워즈 해석에 관한 쟁점을 올바로 평가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종말론적 비전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는 참으로 초월적인 실재인데, 브라이언트는 이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초월적인 실재로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성취를 넘어서서 있으며, 일차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적인 선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이머트가 주장하는 바와는 달리,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의 목표는 "최고도로 뛰어난 기독교 국가"의 실현에 있지 않았으며,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확립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광의 신학자였으며, "경건한 옷을 입은 이념주의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한 브라이언트의 논지는 옳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초월적 실재는 그저 공허한 선물(Gabe)로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또한 과제(Aufgabe)로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또한 지적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현실로부터의 도피로 이해되어서는 안되는데, 그것은 에드워즈가 초월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역동적인 영화라는 틀에서 이해하고 있고, 이것은 브라이언트가 말하는 바와 같은 이 세계적인 책임성으로부터의 후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에드워즈가 이해하는 바 하나님 나라의 타자성(otherness)은 하나님 나라의 타세계성(otherworldlines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한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 세계의 역사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말하고 있는데, 바로 이 점에서 하이머트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이 가지는 이 세계적인 성격을 올바로 지적하고 있다. 역사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러한 논의는 우리로 하여금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관한 마지막 요점에 대해서 주목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생 이해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윤리적인 함축성을 지니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종말론)과 이 세계에 대한 책임성(윤리) 사이에 내재적인 관련성이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영광을 역사의 최종적 목표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계에 대하여 무책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에드워즈에 따르면, 성도의 궁극적인 희망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언제나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성도가 그저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 실현을 기대하는 가운데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은 그러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실현에 대한 기대와, 그것에의 능동적 참여를 더욱 고양시키는 것이다. 지나친 도피주의는 에드워즈의 종말론적 비전에 있어서 그 자리를 발견할 수 없다.
성도들은 역사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부름 받고 있는데, 그것은 영원한 삶이란 세계의 마지막까지 그저 숨겨져 있는 미래의 실재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예기적인 실현은 이미 지금, 여기에서 주어져 있는데,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화라는 이러한 시간적인 운동 가운데 참여하고, 또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도록 이미 초대받고 있다. 우리는 성도의 참여가 신앙인들 자신에게만 의미 있는 주관적인 체험이 아님을 아울러 지적한다. 하나님 나라의 확장의 운동의 참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성도들의 행복이 증가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된다. 사실상 이 땅에서의 성도들의 참여에 의하여 더 영화롭게 되는 것은 단지 피조물만의 운명이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운명이기도 한데,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도 인간의 참여로 인하여 더욱 그 영광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참여는 갱신의 사역과 천년왕국 이해에도 나타나고 있는 바와 같이 구원의 전 역사에 있어서 계속되는 중요성을 가진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인간의 참여는 성도 개인의 삶과 인간의 역사를 넘어서는 보다 심층적인 중요성을 가지는데, 그것은 자신을 확대하고자 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운동이 바로 인간의 참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의 사역 가운데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재를 보다 영광스럽게 만드는 데에 공헌하는 것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삶이 그저 피조물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삶의 반복과 확대에도 의미가 있는 것임을 주장한다. 성도의 활동이 하나님과 피조물의 궁극적인 영화의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기에, 에드워즈의 윤리에는 강한 종말론적인 논조가 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 내적인 점진적 실현과 드러남에 참여함으로써, "하늘나라의 즐거움과 기쁨의 전조"를 경험하게 되며, 그 가운데 그들은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한 자신들의 여정 가운데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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