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요소와 순서
예배는 예배 공동체의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된 순서를 따라 진행되어야 한다. 공통된 예배 순서를 따라 어떻게 드리느냐에 따라 예배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더욱 정확하게 표현하고 많이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공통된 예배 순서가 어떤 요소들로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예배의 요소가 절대적인 것이며 상대적인 것인지를 구분하고 그 요소들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해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초대교회의 예배로부터 회복할 수 있는 것은 사도행전 2:42-47에 나오는 예배의 4중 구조--날마다 모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떡을 떼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세상으로 나가는--이다. 초대 교회는 예배를 하나님에 의해 부름을 받은 공동체의 모임으로 이해하였다. 첫째, 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일 때 하나님의 백성들로 아버지의 집에 초청되었다. 둘째,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함께 행할 것을 깨달았다. 셋째, 그들은 함께 떡을 뗌으로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 연결됨을 경험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은 예배를 통해 최고의 사도 공동체가 되어 성령의 능력을 받아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세상으로 보내졌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배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으로부터 그리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들로서 그의 증인이 될 것을 다짐하였다. 이처럼 예배는 다양한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그리스도의 지체로 변화시켜 공동체를 만든다.
다음에 소개하는 예배의 요소와 순서는 예배의 4중 구조--모이는 공동체, 말씀 듣는 공동체, 응답하는 공동체, 파송 받는 공동체--에 기초한다. 예배 공동체는 예배의 4중 구조의 각 부분으로부터 예배자들이 기대하는 경험과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1) 기쁨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공동체, 2) 묵상하는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 3) 성만찬을 통하여 축제를 경험하는 공동체, 그리고 4) 세상으로 파송되는 공동체. 이 기본적 예배 구조는 다양한 예배들 배후에 있는 공통성을 보여준다. 이 기본적인 예배 구조를 중심으로 개 교회의 특성에 맞는 예배 형태를 제시할 수 있다.
모이는 예배(The Gathering)
"모이는 예배"는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가는 예배의 시작 부분으로 우리의 개인적인 생활로써의 예배로부터 공동체(교회) 생활로써의 예배로 넘어가는 문지방과 같다. 우리가 모일 때, 우리의 개인적인 예배가 공동체 예배로 바뀌면서 자기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 옮겨간다. 결국, 모임의 예배 성격은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늘의 보좌, 영원한 예배의 장소, 하나님 나라의 영역, 하나님이 계신 곳의 영광을 향하여 여행하는 것처럼 위를 향한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곳에 항상 계신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는 동안 그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약속하셨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 18:20). 이런 이유로,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곳에로 들어가는 내적 경험을 일으키는 "모이는 예배" 부분의 내용과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모임의 예배가 넓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는 기능을 가지며, 좁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도록 준비시키는 기능을 가진다. 모임의 예배에서 개인적으로 모인 자들은 자신들이 더 큰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정체성을 경험하는 기회를 가진다. 모임의 예배에서 회중들은 자신들이 세례를 받았을 때 그리스도의 몸인 신앙 공동체의 일원(교회의 지체)이 된 정체성을 다시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임의 예배를 위해 필요한 순서들은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누는 인사, 경배찬양, 그리고 기도이다. 이 기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치료와 용서의 말씀을 듣는 예배 행위를 포함하여 종종 다음 단계인 "말씀 받는 예배"의 순서에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어떤 교회들은 찬양 전에 고백 순서를 둔다).
1. 모임 찬양(Gathering Songs)
예배는 항상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올라감을 경험하는 "모임 찬양"으로 시작한다. 예배에서 올라간다는 예배 형식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전으로 올라갈 때 부른 시편 찬송에서 표현된 것처럼 예루살렘에로 들어간다는 구약성경의 형식에서 유래한다. 세상에서 지내다가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동체로 한 곳에 모여 그 분으로부터 오는 위대한 힘을 재발견하여 새로워지려는 성도들에게는 시편 95편이 모이는 교회를 위한 한 본보기가 된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편 95:1). 이 시편 기자가 말하듯이, 모이는 교회(구원받은 자들의 공동체)는 각자의 삶의 현장으로부터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노래부르며 한 곳에 함께 모인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예배자들은 구원받은 자들로서의 기쁨을 서로 나누며 여호와께 노래할 수 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변화된 생활을 보여주는 하나님 백성들의 "즐거운 함성"은 같은 성도들뿐만 아니라 처음 만나는 자들에게도 즐겁게 감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모임 찬양의 중요성이 결코 간과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시편 찬송은 모임 찬양으로 매우 적합하다. 많은 시편들은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른 신앙인들의 찬송이었기 때문이다. 각자 세상에서 흩어져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해 예배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함께 모이는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시편을 읽거나 시편송을 부르는 것은 예배의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자연스러운 예배 준비가 될 수 있다. 이 때 교회력에 맞춘 성서일과로부터 시편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모이는 예배"에서 모임 찬양을 위해 시편을 사용하기 때문에 "말씀 듣는 예배"에서 시편봉독은 생략할 수 있다.
예배를 준비하는 시간은 10-15분이 적절하다. 모임 찬양의 순서를 인도하는 자는 먼저 시편을 읽고 그 주일 예배의 주제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초청을 받아 다양한 삶의 현장으로부터 한 곳에 모인 회중이 서로 하나님의 가족으로 느끼도록 한다. 시편은 세상과 교회를 연결하며 회중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모인 것을 경험하도록 한다. 시편의 주제, 즉 예배의 주제를 살리는 찬송이나 복음송을 부름으로 자연스럽게 예배안내를 한다. 모임 찬양을 진행하는 동안 그 주일 예배의 필요에 따라 교회소식, 인사, 환영사, 묵상기도, 그리고 찬송 미리 부르기 등을 함께 진행할 수 있다. 모임 찬양의 분위기는 성도의 교제와 환영과 같은 순서들로 밝고 명랑하게 시작하여 전주나 침묵기도와 같은 순서들로 예배 준비를 마무리한다. 모임의 찬양을 마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은 말로 예배의 시작을 선언할 수도 있다: "이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우리의 하나님께 예배를 시작하겠습니다."
모임송들은 회중이 성전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예배를 준비하는 동안 불려진다. 회중이 들어올 때 자동적으로 모임송을 부를 수 있도록 분위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런 이유로 모임송은 누구나 외워서 부를 수 있는 쉬운 곡이어야 한다. 이 때 간단한 움직임과 함께 다양한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할 수 있다. OHP 또는 액정 비디오 등을 사용할 수도 있다.
1) 인사와 환영(The Greeting & Welcome):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로를 환영하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가 영적인 집(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 그리고 하나님에게 찬양의 제사를 드리려는 예배자들이라면, 서로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환대는 필수적이다. 그래서 세상에 흩어져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버지의 집에 즐겁게 모이는 경험을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시편 95:2).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인사하고 환영하는 시간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감사와 찬양하는 시간으로 흘러갈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모이는 것은 위대하신 권능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서로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2) 전주(Prelude): 우리는 이미 예배를 시작할 때의 전주에 익숙하다. 그러나 예배 장소로 모여들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자들의 대화가 종종 전주에 방해가 된다. 이것은 우리가 전주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전주(prelude)는 예배 도입부를 위한 연주, 행위 또는 사건임으로 예배 시작 전에 추가된 준비 찬송과는 매우 다르다. 전주는 그 주일의 주제나 분위기에 맞는 곡으로 약 2분 정도의 짧은 것이 가장 좋다. 전주는 예배에서 첫 번째 말이나 첫 번째 찬송 직전에 진행된다. 또는 교회소식이 예배 시작 전에 진행된다면, 예배를 조용히 준비하는 시간과 연결되거나 그 대신으로 사용될 수 있다.
전주를 효과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몇 가지 방법들이 있다. 전주에 사용되는 곡이 그 주일 예배의 중심이 될 찬송들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며, 전주와 함께 중세기의 채색 유리창과 같은 시각 자료를 사용하여 예배에서 무엇이 진행될 것인지에 관심을 갖고 묵상할 기회를 주거나, 짧은 드라마를 전주와 같이 보여 주거나, 어린이들의 노래, 또는 리듬 악기를 연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와 같은 전주를 통해 회중은 가장 의미 깊고 조용한 시간을 가지며 엄숙히 제단 앞으로 나아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품안에 있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체험할 수 있다. 입례 순서가 없는 경우에는 예배위원이나 성가대가 전주하기 전이나 또는 전주를 하는 동안 조용하게 그리고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옆쪽으로부터 들어가서 의자에 앉는다.
2. 입례 찬송(The Entrance Hymn with Procession)
많은 교회들의 경우 예배위원과 성가대원이 전주와 함께 또는 전주에 이어 첫 찬송을 부르며 입례송 순서를 가진다. 입례송의 역사적 기원은 주후 5세기에 로마의 시민관들이 법정 안으로 들어갈 때 취한 예식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교회는 이 예식을 채택하여 성직자가 성경을 봉독대(lectern)에로 가져가는 데에 사용하였다. 성직자가 성가대원과 함께 입례하는 의식은 19세기 영국교회에서 시작되었다. 입례 순서가 예배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지만, 매 주일 진행할 필요는 없으며 특별한 예배를 위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다.
축제적인 입례 순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인 공동체로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선언하는 다양한 기독교의 상징을 나타낸다. 예로, 잘 준비된다면 축제적인 입례 순서로 십자가, 예배의 주제에 따른 기, 세상의 빛인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촛불, 성가대, 성경(바로 세워서 성경이 읽혀질 강단이나 봉독대에로 들고 들어가지만 성찬상 위에 올려놓으면 안 된다) 등의 순서로 담당자들이 앞서 입장하고, 그 다음에 성경 봉독자와 예배위원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자가 따라서 입장한다. 어린이가 십자가, 기, 또는 성경 등을 들고 입장하게 할 수도 있다. 입례 순서를 맡은 자들은 군인같이 절도 있는 입장을 흉내낼 필요는 없지만 똑같은 거리를 두고 같은 속도로 들어감으로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에 어울리는 품위와 은혜를 표현한다. 입례 순서가 없다고 해도 예배를 시작하기 직전에 성경을 봉독대에로 가져갈 수도 있다. 입례 순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준비와 연습을 필요로 한다.
교회력에 따라 특별한 주일이나 절기에는 다양하게 입례순서를 진행할 수도 있다. 예로, 성탄절 전야에는 촛불로 입장하는 예배를, 사순절 첫 번째 주일에는 침묵의 입장으로, 종려주일이나 교회의 중요 기념일에는 회중들이 함께 교회 밖 한 곳에 모여 있다가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예배 장소에로 입장할 수도 있다.
입례찬송은 예배위원들의 입례행렬과 함께 진행됨으로 본 예배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한다. 입례찬송은 하나님의 임재에로 나아가는 내적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무게와 내용이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합창곡이나 복음송은 입례행진을 위해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 곡들은 찬송의 무게와 내용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입례찬송은 다음과 같이 찬송가에서 선택하는 것이 좋다: 9장(거룩 거룩 거룩), 21장(다 찬양하여라), 29장(성도여 다 함께).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나아감을 충분하게 표현한 것이라면 현대의 곡(복음송)들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3. 인사(The Greeting)
최근에는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가 인사(예배 인도자가 회중에게 하는)와 함께 이루어진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예배 부름과 같은 성격으로 진행한 인사(Greeting; Salutation)에 근거한다. 그러나 항상 인사가 예배에로의 부름보다 앞서 진행된다. 많은 교회들이 종종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간단한 대화 인사 직후 회중을 예배에로 부르거나 그 주일에 적절한 성경을 읽는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예배에서 인사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는 첫 번째 순서이다. 사회적인 모임이 시작될 때 자연스럽게 인사하는 관습을 가진 시대에서는 더욱 형식을 갖추어 예배를 여는 인사순서가 예배의 독특한 성격을 강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안녕하세요"와 같은 일상적인 인사는 교회 소식이나 예배 안내와 준비를 시작할 때에 적절할 것이다.
예배 인사는 서로가 이해할 수 있도록 짧고 단순한 형식을 취한다. 이 때 인도자가 성경 구절을 읽거나 성가대가 입당송(introit; 첫 송영)을 부르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다. 예배에로의 부름은 간단하게 회중을 향하여 "우리 함께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시다" 또는 "이제 우리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우리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립시다"라고 초청하거나 적절한 성경 구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인사와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는 인도자와 회중 사이의 대화로 진행되었다.
모든 회중이 착석한 뒤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따뜻하고 생동감이 넘치도록 그러나 자연스럽게 환영하면서 대화로 주고받는 인사가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예배에서 인도자는 여러 다양한 구슬들을 하나같이 이어주는 줄처럼 예배의 일치감을 주어야 한다. 이런 인도자의 역할은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예배일수록 더욱 중요하게 된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나누는 인사는 예배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인사를 교환하는 순서이기 때문에 예배 준비를 위한 모임 찬양에서 회중들의 인사 교환과는 다르다. 이 인사 교환은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일어서서 간단한 인사말을 나눌 수도 있으나 친숙한 말들을 적절하게 상호 교환할 수도 있다. 모임의 예배 순서 전체와 함께 인사는 간단하면서도 가능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인도하는 것이 좋다.
입례송을 부르면서 입례를 한 후, 예배 인도자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강단 중앙, 설교단, 성경 봉독대, 또는 성찬상에서 인사한다. 인도자는 마치 회중을 감싸듯이 손바닥을 편 채로 회중을 향하여 두 팔을 벌리면 더욱 온화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있다. 대화식 인사에서 회중이 응답할 때에는 사회자는 두 팔을 접는다. 인사는 여러 가지의 형식으로 진행될 수 있다. (1) 인도자는 회중을 예배에로 부르면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시다"라는 말과 함께 적절한 성경구절을 사용한다. (2) 인사나 예배에로의 부름 순서가 없을 때는 시편이나 찬송으로 시작한다. (3) 전주에 이어 예배에로의 부름을 진행할 때는 적절한 전주가 자연스런 예배에로의 부름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입례 순서가 없을 때는 예배 인도자와 성가대는 눈에 거슬리지 않게 조용히 옆 통로를 통해 들어가서 전주가 끝나기 전에 자리를 잡는다. 인도자가 회중에게 인사하기 위해 일어설 때까지는 회중이 일어 설 필요는 없다. 서로가 일어서서 인사를 나누는 행위에서 이 인사 순서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인도자와 회중이 서로 서서 인사를 나누는 것은 새로운 손님이 방에 들어온 것을 맞이하는 것처럼 그리고 순서 진행에 대한 존경을 표하는 것처럼 서로의 예배 참석을 인식하는 것이며 예의와 환대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성경의 보기(겔 2:1, 신 18:5)는 서 있는 것이 다양한 목회를 인정하는 한 방법으로 제시한다. 회중이 일어서는 순서를 위해 주보에 표시를 한다. 인도자가 회중에게 일어서기를 요구하는 행위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인 경의를 요청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예배에서 사용되는 첫 대화(opening dialogue)로 불리는 인사는 모든 회중에게 예배에서 자신들의 다양한 역할을 확인하는 기회를 준다. 고대 교회에서 사용된 사도들의 인사에서 사회자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성령의 교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때 회중은 "주의 종(목사님)과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라고 응답한다. 이와 같이 기독교의 유산인 고대 교회의 인사를 사용하는 것은 우리들의 예배 이해를 확대시킬 수 있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는, 예배에 참여한 우리는 우리 이전에 참석하여 여러 세기를 통해 신앙의 증언을 제공해 온 신앙인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다.
인사는 교회력이나 그 주일의 주제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부활절의 인사로 할렐루야를 말할 수 있다 (전통적으로는 사순절에 할렐루야를 후렴 즉, 인사에 대한 회중의 응답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인사를 주보에 실어 너무 문자에 의존하는 것은 눈과 눈이 마주치는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는 인사를 상실할 수 있는 단점이 있다. 인사가 매 주일 동일할 때 암기된 회중의 응답은 서로를 공동체로 묶어 주는 증거가 되며 다양한 연령층의 참석자들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4. 예배 부름(The Call to Worship)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모인다. 교회사를 통해 모임의 예배 순서들이 주기적으로 변화되어 왔으나 항상 하나님의 임재에로 들어가는 특징으로 이해되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행위는 인간의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예배 공동체에 의해 주문되거나 만들어질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늘 보좌에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초월적 타자성의 눈부신 빛 속으로의 여행을 명령하신다. 여기에서 예배 공동체는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는 천사들에 둘러 싸여 있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초월적 타자성을 깨닫게 된다. 그때 그리고 그때만이 모인 예배 공동체가 하늘의 무리들과 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위엄을 잘 나타내는 찬양을 부른다.
예배 부름은 예배 공동체를 부르는 행위이다. 이 부름은 하나님의 임재에로 이끌림을 받는 행위를 표현한다. 그래서 예배 부름은 예배자들의 경험 속에 예배 공동체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예배 부름을 위한 말은 모임송들과 관련되어 사용될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회중이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인 것을 선언할 수도 있다. 때로 모임송을 합창으로 부를 때는 합창 부분은 후렴 같이 같은 구절이 되어야 한다. 예배 인도자는 예배 부름의 말을 읽기보다는 외울 필요가 있다. 또한 예배 부름을 OHP나 슬라이드 등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1) 인도자: 저와 함께 주께 영광을 돌립시다.
회 중: 우리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높입시다.(시 34:3)
(2) 인도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회 중: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인도자: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함 께: 여호와에게서로다. (시 121:1-2)
(이 예배 부름 후에 찬송 23장[만 입이 내게 있으면]을 부를 수도 있다.)
1) 예배 부름을 준비할 때: 예배 부름은 익숙한 노래나 그 주일의 성경 본문, 특별히 시편과 같은 자료들로부터 선택하여 주보나 OPH에 적을 수 있다. 예배 부름을 준비할 때 다음의 지침이 도움이 될 것이다: 1) 예배 부름은 부름과 응답의 구조를 가져야 한다. 2) 간단한 형식으로 준비하되 지시가 아니라 환호가 되도록 한다. 3) 창조적인 예배 부름이 되도록 찬송이나 복음송, 또는 합창곡 등을 같이 사용한다.
2) 예배 부름을 노래로 진행할 때: 성가대나 찬양팀이 하나님의 임재를 향한 간구를 노래할 수도 있다. 그런 간구가 회중에 의해 불려질 수도 있다.
5. 기원(The Invocation of Gathering Prayer)
예배 인도자가 드리는 기원은 일반 기도와는 성격과 내용이 다르다. 이 기원은 예배 속에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현존으로 예배에 임하는 성도들을 성결하게 해 달라는 것과 우리의 부족한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아 달라는 매우 짧은 기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기원의 내용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아주옵소서라는 기원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정결하게 하옵소서라는 기원이다.
6. 경배찬송(Hymn of Praise)
일반적으로 입례송이 없다면 경배찬양은 집례자의 인사나 예배 부름 다음에 위치한다. 이 때 회중이 부르는 경배찬송(Sursum Corda; "마음을 드높이는" 찬송)은 예배 부름에 대한 응답을 나타낸다. 경배찬송은 첫 번째의 찬양 행위로 참석자 모두를 더욱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한다. 이 찬양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인사말로서 이해되기 때문에 이 찬양으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인사와 경배할 뿐 아니라 교회력의 계절까지 적절하게 반영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것들에 집중하기보다 찬양과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품성에 집중한다. 이 첫 찬송은 가사와 곡이 모두 강하고 쉽게 불려지는 곡으로 회중이 하나님에게로 "함께 나오는 것"을 돕는다.
찬송 번호가 주보에나 찬송가 번호 판에 적혀있다면 사회자가 그 번호를 말할 필요는 없다. 부를 찬송을 말로 알리는 것은 예배의 흐름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부를 찬송은 충분한 전주와 주보를 참고로 간단히 알려질 수 있다. 잘 알려진 곡을 위한 전주는 전 곡을 다 연주할 필요는 없다. 회중이 부를 곡의 전주는 자유로운 형식으로 그 곡의 멜로디 부분을 소개하고 곡의 정신을 알릴 수 있다. 전주곡의 빠르기에 관한 두 가지 주장들이 있다. 한 쪽은 곡의 빠르기가 원래의 속도와 같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또 다른 한 쪽은 찬송의 속도를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주곡의 빠르기가 회중으로 하여금 함께 찬송을 부르게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해도 찬송의 속도를 의심 없이 따를 때 우리는 찬송을 가장 잘 부른다.
7. 고백과 용서(Confession and Forgiveness)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예배자는 눈부시고 신비로운 빛에 의해 비춰진 자신이 의존적인 피조물, 창조주를 거슬리는 자녀, 상처받고 깨지고 죄 많은 인간임을 발견한다. 이 때 유일하게 적절한 반응은 전능하신 분을 거슬린 피조물로서의 겸손한 고백뿐이다. 그 이후에 하나님은 말씀을 들으려는 마음에 용서와 치료에 관한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이런 행위들이 한번 일어나면 기도(Opening Prayer)가 모임의 예배로부터 말씀을 듣는 예배에로 적절하게 넘어가도록 한다.
모임의 예배에서 드리는 기도는 이 부분을 결론짓고 말씀의 예배에로 직접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많은 교회들이 죄의 고백과 용서의 확인을 개회기도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 기도 순서는 권면, 참회, 용서, 그리고 영광송으로 이어짐으로 길어지거나 복잡하여 말씀을 듣는 순서에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
1) 권면과 침묵회개(Call to & Silent Confession): 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은 순서들과 함께 연결성을 가진 예배 행위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확인시키는 말들을 근거로 고백하기를 권면하는 형식의 초청; 그 다음 예배자들에 의한 고백기도; 개인적 고백을 위한 침묵; 자비송; 용서의 확인; 그리고 찬양이나 영광송. 소리를 내어 함께 고백하는 기도에는 특정한 죄들을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개인적 실수들을 들어내지 않는 일반적인 내용이 가장 적합하다. 특정한 죄들은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완전히 깨달아진다고 생각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선포된 말씀을 통해 밝혀지는 어떤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교회와 세계의 죄들에 대한 후회를 표현한다;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로 인도하는 은혜를 요청한다. 개인적 죄들을 침묵으로 고백할 수도 있다. 고백 순서의 길이 때문에 예배자들이 앉아서 진행하고 찬양을 위해서는 일어선다. 각자가 약 1분 정도의 회개의 기도를 할 때는 침묵으로 진행하여 직접 하나님에게 고백하는데 어떤 소리(사회자나 악기연주까지도)도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매 주일 고백기도를 모임의 예배 순서에 넣을 필요는 없다. 고백기도가 참회하는 기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데 적절하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시편기자가 말하듯, "이 날은 주가 지으신 날일세;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또는 "사람이 네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122:1). 고백기도는 주일 예배의 다른 순서에서 진행할 수도 있다. 목회기도에서 그리고 설교 후에 고백 순서를 포함하거나 봉헌하기 전에 고백하고 바로 후에 서로에게 용서와 화해의 행위로 평화의 인사를 교환한다.
참회의 계절인 대림절과 사순절에는 고백기도를 특별히 고백적인 행위와 함께 예배를 시작하는 것이 적절하다. 성탄절과 부활절(그 후의 주일)의 주된 분위기가 찬양임으로 고백은 다른 예배에 포함시킬 수도 있다.
2) 자비를 구하는 기도(Kyrie): 자비를 구하는 기도 "끼리에"(Kyrie)는 다음과 같이 전통적으로 연도(連禱; litany)나 응답기도(responsive prayer)로 이루어졌다:
인도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회 중: 그리스도여, 자비를 베푸소서.
인도자: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구하는 기도는 고대 유대인의 예배 형식에서 나왔다. 그 이름 Kyrie는 "주는 자비로우시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Kyrie eleison"의 줄인 말이다. 문둥병자들을 고치는 누가복음의 이야기에서 문둥병자들이 멀리 떨어져 서서 예수에게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친다(누가 17:12이하). 이 말은 "지금 우리를 구하소서"를 의미하는 아람어의 "Hosanna"와 비교된다. 끼리에는 4세기 예루살렘에서 주기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교회를 통하여 중보기도의 간구에 대한 하나의 응답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드려진 일반적인 기도라기보다는 예수에게 직접 드려진 특별한 기도이다. 그 기도는 다양하게 3회, 6회 그리고 9회 반복되는 형식의 기도이다.
끼리에는 말로나 노래(자비송)로 표현할 수 있다. 자비송은 교회와 회중에 따라 다양하다. 집례자가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한 후 곧 이어 자비송을 부르도록 소개한다. 자비송은 성가대, 회중, 또는 독창이나 회중과 함께 교창으로 부를 수도 있다.
3) 용서의 확인(Assurance of Pardon): 사회자와 회중이 기도를 하는 동안 머리를 숙이는 반면, 사죄의 확인을 위해서는 서로의 눈과 눈이 마주치는 것이 좋다. 사회자는 전체 회중을 대신하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용서를 선언한다. 확인의 말씀은 사회자와 회중이 함께 제창이나 대화 형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예배에서 우리가 말하는 사죄의 확인은 우리가 먼저 행한 것에 따르는 조건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우리의 의지보다 이전에 먼저 존재한다. 용서의 말씀은 기꺼이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에 관한 성경적 확인에 주로 의존하거나 기도의 형식이 될 수도 있다. 그 후에 회중이 용서받았음을 선언한다. 조건적인 은혜에 관한 한 예를 포함하여 용서에 관한 확신들은 많다: "그리스도 예수는 죄인들을 구하러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하나님]는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또는 다른 가능성도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 자매 여러분, 복음의 기쁜 소식을 믿으세요."
8. 찬양(Acts of Praise)
고백기도와 용서의 확신 뒤에 나오는 찬양의 순서로는 영광송, 찬송, 또는 성가대의 찬양이 불려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영광" 또는 "찬양"이라는 말들은 노래 가사에 나오는 단어들이었을 것이다. 이 때의 찬양으로는 하나님의 존귀와 영광을 찬양하는 (누가복음 2:14에 나오는 천사의 노래와 같은) 곡들이 회중에 의해 불려지거나 성가대의 영광송이나 찬양으로 대치할 수도 있다.
특별한 예배에서는 이 찬양 순서 다음에 행사에 대한 설명이나 손님 소개가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수, 취임, 추대, 장립 등의 예식에서는 후보자를 소개하는 시간이다.
9. 기도 또는 목회기도(Opening Prayer; Prayer for Illumination)
예배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임으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음악도 찬양으로 소리를 내는 목소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도록 만드는 쪽으로 변해야 한다. 이런 분위기 변화는 회중이 말씀 듣는 것을 돕는 묵상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
말씀의 예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한 곳에 모인 예배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다시 한번 경험하게 된다. 어떤 까다로운 문제들이 예배자들 각자를 갈라놓을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우리의 공동 목적에 의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전자 올갠의 익숙한 소리와 삐걱거리는 의자, 설교단, 세례반, 성만찬상, 십자가와 같은 상징물들, 사회자와 다른 예배위원들의 말들과 우리의 찬송 소리, 위엄 있는 행동과 따뜻한 기도 등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연합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모을 준비가 되어 있다.
설교 전에 하는 기도는 성경봉독과 설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열어주도록 간구하는 기도이다. 시편 19:14은 설교하기 전의 기도로 적절하다: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말씀 듣는 예배(The Hearing)
예배의 4중 구조에서 두 번째 부분인 "말씀 듣는 예배"는 첫 번째 부분인 "모이는 예배"와 매우 다르다. 이 두 번째 부분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에로 들어가는 단계로부터 그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단계로 옮겨진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 로비(lobby; 현관의 홀)에서 그 분의 거실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용되는 주된 예배행위는 대화로 하나님께서 설교(말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다음 그 주신 말씀에 대해 우리가 응답한다.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대화 내용은 성경 자체로부터 나온다.
말씀의 예배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말씀)를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의 예배 구조는 모임의 예배에서와 같은 과정이나 여행이 아니라 말씀선포와 응답의 신학에 근거한 대화이다. 또한 이 구조는 마치 거실에서 나누는 주인과 손님들 사이의 대화처럼 하나님과 예배자 사이의 대화 나눔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사람들이 응답한다. 그러므로 말씀의 예배는 수세기 동안 말씀을 선포하고 이에 응답하는 구조로 이루어졌다. 말씀 선포와 응답의 구조는 다음과 같이 짝을 이룬다:
말씀선포 응답
1. 구약성경 봉독 2. 시편송(또는 말씀송)
3. 서신서 봉독 4. 할렐루야송(또는 말씀송)
5. 복음서 봉독 6. 찬양(성가대)
7. 설교 8. 응답송(결단찬송 또는 사도신경)
9. 응답기도(또는 묵상기도)
10. 평화의 인사
(성만찬이 없을 때는 8, 9. 10은 응답/감사하는 예배 속에 포함된다)
예배를 이루는 두 가지 중요한 부분들 중 첫 번째가 성경을 봉독하고 해석하는 것이다(두 번째 부분은 성만찬 예식이다). 고대 유대인 회당에서 진행된 안식일 예배는 성경, 시편, 성경에 대한 해석과 기도 형식을 가진 응답으로 구성되었다. 예수는 이런 예배 중의 하나에 참석하여 누가복음 4장에 나타나는 대로 성경을 읽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초대 기독교인들이 안식일 말씀 중심의 회당예배를 성만찬 중심의 주일예배와 결합시켰을 때, 각 예배가 본질적으로 손상되지 않고 보존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중 첫 번째를 말씀 예배라고 부른다.
말씀 예배는 성경봉독, 성경을 해석하는 설교, 그리고 설교에 대한 응답을 포함한다. 우리에게 설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성경봉독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 두 순서 모두 하나님에게 찬양하고 섬기는 행위이다. 그 두 순서 모두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말씀 예배는 성경봉독으로부터 설교에로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성경봉독은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표현하고 설교는 우리의 상황과 시대를 위해 그 읽은 성경을 해석한다. 전체 예배 순서에서 성경봉독이 중간에 위치하고 설교가 마지막에 위치하면 이와 같은 자연스런 예배의 흐름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 두 순서를 서로 멀리 위치시키는 것은 고속도로를 가운데 두고 두 쪽으로 나누어진 공원의 이 쪽에서 다른 반쪽을 즐기기 위해 복잡한 고속도로를 건너가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이처럼 간격이 넓은 두 순서 사이에서 말씀을 해석하는 시간이 되면 이미 앞에서 읽은 성경말씀은 종종 잊혀지게 된다 (때로는 설교자가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성경봉독과 설교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예배 순서상 서로가 가까이 위치하는 것이 가장 좋다. 두 순서 모두 함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게 하며 그래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 의지가 우리에게 나타난다.
예수 당시 회당 예배는 성경봉독과 설교 다음에 청중의 응답이 따랐다.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말씀의 예배는 응답 순서를 가질 수 있으며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은 뒤에 진행되는 성만찬 예배에 대한 응답과 매우 다르다. 설교는 이미 우리의 삶에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응답을 요구하기 시작하였다. 그 응답은 다양한 형식을 취하여 (예로, 세례예식) 필히 설교와 대화를 해야하는 목회기도(설교자의)에서 결론이 난다. 이 기도는 우리가 들어 온 복음("기쁜 소식")의 빛에 비추어 우리의 상황을 보며 세계, 교회, 지역사회와 개인적인 요구들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표현한다.
1. 성경봉독(Scripture Lessons)
"말씀 듣는 예배"에서 잘 준비되어 봉독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들이나 성경 본문들이 다시 봉독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할 수 있다. 성경이 잘 봉독될 때 각 단어는 다양한 강조, 고저, 그리고 속도를 가진 음악처럼 분명하고 특별하게 들린다. 우리가 귀기울일 때 그 단어들은 살아나게 된다. 하나님이 과거에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셨던 사건들을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경험하게 된다. 이런 사건들에 대한 증언들을 통해 하나님은 오늘날 계속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신다. 그 증언의 말씀들은 귀하게 여겨져 후대의 우리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스스로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는 사람들 즉, 성경의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에서 강단용 성경은 대체로 크며 예배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 예배 공동체의 책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성경은 극적인 제스쳐를 쓰지 않고, 암기되거나 극적으로 표현할 필요 없이 봉독된다. 성경을 봉독하고 그것을 직접 듣는 것은 우리의 예배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다. 그러므로 성경봉독 순서는 예배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3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한다: 구약성경(율법과 예언자들의 기록), 복음서(예수의 삶, 사역, 가르침에 관한 기록), 서신(바울과 다른 사도들의 편지). 한 예배에서 이 세 가지 본문을 읽는 것은 고대 기독교와 현대의 에큐메니칼 예배 모두를 나타낸다.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는 복음서에 비중을 두어 구약, 서신, 복음서의 순서이다. 때때로 우리는 이 전통적인 성경봉독의 순서에 담겨있는 의미를 잊어버리고 그 순서를 바꾸려고 시도한다. 복음서가 설교에 제일 가깝게 봉독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시편은 원래 노래로 이해되어 보통은 성경봉독의 순서에 포함되지 않고 오히려 구약봉독에 대한 응답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예배 갱신의 하나로 성서일과로부터 3가지 성경(구약, 서신, 그리고 복음서)을 봉독하거나 2가지 성경(구약과 신약)을 봉독하는 것은 고대 기독교(6세기의 서구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다. 봉독된 성경들을 설교의 본문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 예배자들이 단순히 봉독되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몇 개의 성경 본문들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하나의 단순한 본문으로부터 오늘날의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을 찾으려는 위험을 막는 안전장치가 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교회 목회의 하나이다. 성경봉독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된다. 설교가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성경봉독도 잘 읽혀지고 들려지기 위해 잘 준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성경봉독자는 성경을 읽는 기술이 있어야 하며 준비를 위해 시간을 드려야 한다. 교회(예배위원회)는 교인들 모두에게 균등하게 기회를 주는 것보다는 정기적으로 평신도 가운데서 성경봉독에 은사가 있는 몇 명을 선택할 수도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도 성경봉독 순서를 담당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남녀노소의 다양한 목소리로 읽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다양한 회중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는 특별히 성경봉독을 위해 성도들을 훈련시키고 또한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책임을 맡긴다. 이 훈련에서 중요한 부분은 정기적인 성경공부 그룹을 통해 다가오는 주일 예배에 읽을 성경본문을 다루는 것이다. 성경봉독 훈련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자료는 성서일과이다. 현재 세계 교회들은 예배 갱신운동의 산물인 성서일과를 사용하고 있다. 이 성서일과는 교회력에 맞추어 성경 전체를 3년 주기로 구약, 시편, 서신, 복음서의 4부분으로 나누어 매 주일 예배에서 읽도록 만든 것이다. 한국의 주요 교단들은 예식서를 통해 성서일과를 소개하고 있다. 예배 안내위원들과 봉사위원들을 위한 목회처럼, 성경봉독자들을 위한 목회도 교회 안에서 중요한 목회로 생각하고 예배에서 표현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시각 중심의 사회에서 구두로 표현된 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러므로 회중이 인쇄된 글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노력하는 것 보다 그들의 듣기 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성경봉독자들을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예배는 여러 감각들과 관계가 있는데 성경봉독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 가를 보고 듣는 감각에 의존한다. 바람직한 성경봉독을 위하여 좋은 장비가 필수적이기 때문에 마이크 장치가 방해가 되지 않는 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각 장애자를 위한 준비도 갖추어야 할 필요도 있다.
또한 각 성경본문을 봉독한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해 묵상을 하도록 간단한 침묵의 시간을 가지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을 봉독할 때 나타나는 모든 면들은 어떤 나이의 사람들에게도 말할 수 있다: 봉독자의 태도와 몸짓, 봉독대 또는 설교단 위에 놓인 성경의 가시적 상징, 하나님의 말씀이 빛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가능한 성경을 빛(촛불)이 비취는 곳에 두는 것, 품위 있게 읽는 것, 그리고 침묵의 시간 등.
만일 성경의 본문 외에 추가로 성경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다면, 다음의 3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1) 말씀과 직접 관련이 있는 찬송과 유사하게 성경 본문에 대한 한 반응으로, 2) 설교 본문의 부분으로, 또는 3) 설교에 대한 반응의 부분으로. 그러나 추가로 읽는 성경이 원래의 본문을 대신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므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성경봉독의 주된 목적은 성경을 읽고 듣는 것이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본문이 암기되거나 연출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변화는 한 사람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읽는 부분을 분담해서, 또는 어떤 부분을 회중에게 할당하는 등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방법이 본문에 대한 해석으로 구성된다면 본문을 대신한 것보다 더 좋은 성경봉독이 될 것이다. 또한 성경봉독은 경우에 따라 영화, 슬라이드, 춤, 무언극, 또는 노래 등을 동반할 수 있다.
성경봉독은 강단용 성경이 위치한 곳 즉, 설교단으로부터 또는 봉독대와 설교단이 있는 경우에는 봉독대로부터 진행된다.
2. 성가대 찬양(Canticle 또는 Anthem)
이 성가대의 찬양은 서신과 복음서 봉독 사이에 위치하는 응답송이다. 짧은 예배를 위해서는 응답송을 생략하고 직접 서신봉독에서 복음서봉독으로 진행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다른 두 성경본문을 읽는 것을 나타내도록 봉독자도 다른 두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떤 교회는 찬양대신 춤을 추기도 한다. 춤이 예배의 한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찬송이나 봉독과 함께 진행하거나 그 춤이 봉독에 대한 응답이 될 수 있다.
만일 회중의 찬송으로 응답송을 대신한다면 반드시 성경본문의 주제와 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럴 경우 회중 찬송은 성가대의 찬양과 같이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도록 도울 수 있다. 그 주일의 찬송이 있다면 성경 본문의 주제에 맞는 새로운 찬송을 부를 수도 있다. 회중은 그 주일의 찬송을 성경공부 시간이나 집에서 준비할 수 있으며 예배 준비시간에 소개받을 수도 있다. 복음서를 봉독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는 것의 선례를 3세기에 시편을 노래로 부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교회력에서 대림절과 사순절을 제외한 모든 계절에 할렐루야를 후렴으로 부를 수도 있다.
기도서 송가(canticle) 또는 "작은 노래"는 시편이 아닌 성경 구절을 음악에 맞춘 것이다. 이것은 성가대나 회중에 의해 불려질 수 있다. 이런 노래들 중에는 마리아 송가(Magnificat; 눅 1:39-56)와 시므온 송가(Nunc Dimittis; 눅 2:29-32)가 있다. 아직 한국 교회의 찬송가에는 기도서 송가가 소개되어 있지 않다. 전통적으로 기도서 송가는 성만찬 예배에서 불려지지 않고 아침이나 저녁 기도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잘 준비된 성가대 찬양(anthem; 성가)은 성경본문이나 교회력에 직접 연결된다. 그러므로 성가대 찬양은 음악적인 우수함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예배의 주제와 관련이 있도록 선택되어야 한다. 성가(anthem)는 "대답하는(sounding or answering back)" 의미를 지닌 그래서 응답하는 교창(antiphon)에서 온 말이다.
3. 설교
개신교의 예배는 성경을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성경 본문은 해석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사건" "일어난 일" 또는 "행위"로 잘 이해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쓰여 있는 말들과는 다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성령의 도움으로 회중이 그것을 들을 때 그들의 삶 속에 살아 움직이는 말들을 말한다. 그래서 각 예배는 그 말씀이 육신이 된 것, 성육신을 축하하는 것이다. 좋은 설교는 자신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투자하는 설교자와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청중들 모두에게 달려있다.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교를 들을 때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만날 것을 기대하며 들어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설교 사역은 전통적으로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한 안수와 훈련을 전제로 한다. (최근에는 말씀과 성례전 뿐 아니라 목회 상담에 대한 안수를 말한다.) 사실, 미국의 대학들은 교회에 의해 말씀과 성례전 사역을 위해 목회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세워졌다. 설교의 목적은 이해를 통해 신앙을 양육하는 것(faith-seek-understanding)이다. 설교는 고대의 문화와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성경 본문을 택하여 최초의 청중들에게 주었던 같은 생명력을 가지고 오늘에로 가져오는 것이다. 성경의 각 절들은 서로 격리된 상태로가 아니라 각 절과 연결된 맥락 안에서 그 의미를 나타낸다.
설교의 권위는 마태복음 마지막에서 모든 나라를 제자로 만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설교로 전하는 것은 그리스도이다. 이런 권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전통적으로 설교가 복음서를 봉독한 직후에 진행되기 때문이다. 성경봉독이 복음서에서 절정을 이룰 때 설교는 오늘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것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다. 복음서가 설교의 본문이 아니라도 구약, 서신 복음서로 진행되는 성경봉독의 순서는 동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관해 이해하는 대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하게 된다.
성경이 읽혀지고 해석되는 것이 필수적이지만 봉독된 모든 성경의 본문이 해석될 필요는 없다. 단순히 성경을 듣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설교를 위해 하나의 본문만을 취급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교는 회당에서 기원되어(눅 4:16이하; 행 13:14이하) 초대교회에 의해 채택되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떡을 떼기 전에 설교하였다. 복음서들이 나오기 전에는 설교를 위한 자료들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사용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편지들이 예배에서 읽혀지기를 원했으며(고전 16: 22- 24) 그래서 설교 자료가 되었다.
초기의 설교는 다양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모든 기능들이 예배에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어떤 기능들은 기독교를 모르는 자들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진 복음전도나 선교적인 설교였다(행 10:42). 어떤 설교의 기능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자들을 양육시키기 위한 것이었다(예로, 히브리서). 그리고 어떤 기능은 기독교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설교가 항상 예배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중세기에 잘못 이용될 때까지는 정기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이 중세기 동안에도 도미니칸 수도승들의 위대한 설교들에 의해 설교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다. 개신교 종교개혁자들도 설교의 중요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하였다. 많은 종교개혁자들이 예배의 의식적인 순서와 가시적인 요소들을 거부한 결과로 거의 말씀 중심의 예배를 낳았다.
설교는 많은 기능들을 가지고 초대교회로부터 온 유산 가운데 강한 부분을 이룬다. 20세기에 와서 설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기독교의 교리나 교훈을 전하는 교리적 설교, 성경 본문 때로는 각 절을 다루는 강해설교, 그리고 특별한 주제나 개념을 성경적 이해에 근거하여 발전시키는 주제설교 등. 부분적으로 우리의 자유로운 강단 전통은 설교자가 읽을 본문뿐 아니라 설교의 방법까지도 결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70년대에 개신교의 설교에 새로운 형식으로 등장한 성서일과 설교(lectionary preaching)는 설교의 본문 선택을 광범위하게 만드는 수단이 되었으며 또한 설교를 성서적으로 이끄는데 일조를 하였다.
설교는 성경봉독과 다르다. 성경봉독 순서에서 우리는 봉독되는 성경의 단어들에 귀 기울인다. 설교(sermon/ homily)의 원래 의미는 강화나 대화이다. 설교는 책으로부터 온 것보다는 책을 읽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다. 설교는 대화에 필요한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 다양하고 표현력 있는 목소리,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 충분한 음량, 눈과 눈의 마주침, 몸짓. 상자형의 강단은 설교자의 몸을 가로막기 때문에 설교가 지니는 물리적인 영향을 감소시키는 경향이 있어서 최근에는 강단 앞으로 나와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들도 있다.
한국 교회에서 설교자들이 가운이나 예복을 입도록 강요받지는 않지만 가운이나 예복 착용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설교자가 가운을 착용해야 하는 이유의 하나는 설교 시간에 초점이 되는 것은 사람으로서의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의 직무이기 때문이다. 가운이 목사 안수의 표시는 아니다. 스톨(stole)을 가운 위에 입는다. 스톨은 가운과 함께 입도록 만들어진 것임으로 거리 복장 위에 입을 수 없다.
설교의 길이는 10분에서 30분 정도로 다양하다. 최근 예배 갱신의 한 결과는 설교 이외의 다른 순서들이 전통적으로 설교로부터 기대되는 것의 얼마를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예로, 추수감사절의 기도). 설교 중심의 예배에서 그리고 설교가 마지막 순서로 나오는 예배에서 설교가 약하면 예배 전체가 약해질 수 있다. 그러나 예배가 설교에 의해 덜 지배받는 경우에는 다르다. 예배의 다른 순서들이 메시지를 전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간단한 설교가 약한 설교는 아니다. 사실, 간단한 설교가 잘 준비된다면 더욱 강한 설교가 될 수 있다. 긴 설교보다 좋은 짧은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더 어렵다. 그 이유는 오늘날 회중이 집중할 수 있는 평균 시간이 12분이나 13분이기 때문이다. 설교가 더욱 짧아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결코 설교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다. 루터(Martin Luther)가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viva vox Dei)이라고 부른 설교의 말씀은 예배에서 절대 필요한 부분이다. 설교에서 우리는 믿음으로 부름을 받아 우리의 믿음이 계속 양육되고 새로워진다.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만찬에서와 같이 설교에서도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임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응답하는 또는 감사하는 예배
(The Responding/Thanksgiving)
점차 세계 교회는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는 주일 예배는 적절하지 못한, 충분하지 못한, 또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만찬 없이 진행된 주일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충실한 표현으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렸다. 비예전의 전통으로 이어진 한국 교회들은 설교를 하나님의 이야기가 충분히 제시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성만찬 없이 말씀을 중심으로 드린 예배는 성만찬 이전에 행해진 예배(ante-communion)로 불려진다. 이 말은 성만찬까지 축하해야 충분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가 매주일 성만찬을 축하하지 않기 때문에 많은 교회들은 성만찬을 대신하여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에 대해 하나님에게 다양한 감사를 표현한다. 많은 교회들은 다음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 성만찬을 대신하여 감사를 표현한다.
첫째, 말씀 초청에 대한 응답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초청, 세례예식, 목회자 헌신, 또는 치유집회를 진행한다.
둘째,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기억나게 하는,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응답찬송을 여러 곡 부른다.
셋째, 중보, 감사를 위한 응답기도나 통성기도를 진행한다.
넷째, 말씀을 듣고 은혜 받은 것을 간증한다.
다섯째, 선교(전도) 또는 지역사회에 대한 봉사 등의 행동으로 응답한다.
위와 같이 예배에서 설교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바로 다음에 따라오는 적절한 순서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일반교회에서 실천 가능한 몇 가지만 소개한다.
사도신경, 찬송,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 신앙갱신, 간증,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등이 있다.
1.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
성경봉독과 설교는 회중 속에 있는 우리 각자에게 다르게 영향을 준다. 우리는 거의 들을 수 없을지 모르는 한마디의 말이 암으로 고생하는 자에게 새로운 희망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없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한 이웃에게는 들어보지도 못한 것일 수 있다. 중보기도는 말씀 선포를 통해 그리스도를 만난 것에 대한 우리의 응답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보기도는 성경봉독과 설교에 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나 사회자보다는 심방이나 선교 목회를 대표하여 성도들의 생활을 잘 아는 평신도 대표나 평신도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 좋다. 이 점에서 중보기도는 목회자에 의해 인도되는 목회기도와 다르다. 중보기도는 교회밖에 대한 관심으로 성도들이 목회상담이나 세계선교에 관한 훈련을 시작하는 것이 될 수 있다.
어떤 교회들은 중보기도 대신 목회자가 인도하는 목회기도(pastoral prayer)를 순서로 넣었다. 목회기도는 묵상을 인도하는 형식과 영적 향상을 위한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목회기도는 종종 매우 깊은 목회적 관심을 나타내어 목회자가 성도들의 모든 생활에 깊이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성도들은 종종 자신들의 관심이 목회기도 속에 표현되는 대로 알려진다고 느낀다. 목회기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그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시간일 수 있다. 이 기도의 성공은 종종 목회자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 목회기도의 위험은 그 기도가 성도들의 관심을 사로잡는 기도라기보다는 또 하나의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 후에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기도를 하는 것은 2세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기도는 점차 중보기도의 형식을 갖추어 성도들의 응답으로 끼리에(Kyrie)와 함께 장로에 의해 인도되었다. 나중에 중보가 사라지고 끼리에만 남았다. 종교개혁자들은 예배 속에 중보기도를 회복하려고 하였다. 장로교 예배의 뿌리를 형성한 1664년의 웨스트민스터 교리(Westminster Directory)는 이 기도를 설교 앞에 위치하였다. 이 기도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5쪽을 할애하였다(예, "우리의 어두운 생각, 굳은 마음, 불신앙, 완고함, 안일함, 무미건조함, 초라함을 애통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고백으로부터 고상하고 잘 선택된 언어로 모든 것을 위한 간구와 중보로 움직인다(예, "우리의 기도에 은혜가 넘치도록 응답하심으로 용기를 주시어 은혜의 보좌에로 가까이 이끄소서"). 이 기도는 종종 성경 구절로 가득 차 있다. 목회기도의 길이는 다양하지만 3분에서 5분 정도가 이상적이다.
중보기도의 내용으로 간단한 죄 고백과 용서를 위한 기도(설교가 특별한 어떤 것을 제시하였다면) 그리고 특수한 축복에 대한 감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감사의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성만찬 예배에서 나타나기 때문에 중보기도의 주요 내용은 중보(intercession)이다. 중보기도는 특별히 다음의 영역들에 주목하면서 관심과 감사를 표현한다: 세계, 하나의 교회, 지역 공동체, 도움이 필요한 자들과 죽은 자들(이런 영역들은 설교를 위해서도 중요한 주제가 될 수 있다).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하여 다양한 면들이 다루어질 수 있다. 회중은 직접 기도제목을 제시할 수 있고 기도를 준비하고 진행할 때 소개될 수 있다. 짧은 기도나 간구로 이루어지는 기도(litany)는 교독문(versicle)과 다음과 같은 응답들과 함께 사용될 수 있다: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하소서", 또는 "우리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 이런 응답들은 말이나 노래로 이루어질 수 있다.
중보기도는 회중이 참여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이고 자발적인 순서가 될 수 있다. 중보기도에는 각 개인의 관심들이 침묵이나 큰 소리로 표현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런 관심들이 매우 특수한 것일 수 있으나 간단해야 한다. 그 관심들은 하나님께서 해야 하시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도 단순히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큰 교회에서는 이런 관심들을 기도요청 카드에 적어 성전 입구에 비치된 기도함에 넣도록 하거나 광고 시간에 적어 내도록 할 수도 있다. 이렇게 모여진 기도요청 카드들의 일부를 크게 읽을 수도 있다. 작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자신들의 관심을 침묵이나 소리를 내어 제시할 수 있다(각자가 자신의 기도 제목을 "하나님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와 같은 교독문 끝에 이어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가 자신의 기도를 표현할 때까지 기다릴 때 침묵이 필요한데 그 길이는 성도들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해야 한다(최소한 1분). 기도는 인도자가 마지막으로 모든 기도 제목들을 하나님에게 위탁하고 성도들이 "아멘"을 말할 때 끝난다. 이런 기도의 종류는 교회의 모임에서 진행된다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로가 기도를 나눔으로 친근하게 된다.
이 중보기도를 인도하는 자는 봉독대나 세례탕을 바라보며 복도 중앙에 서거나 머리를 숙일 수 있다. 그것은 기도가 성도들의 생활과 필요로부터 나온 자신들의 것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특별한 경우에는 우리 기도의 관심들을 가시화하는 묵상적인 방법을 제공하기 위해 영상자료들을 사용할 수도 있다.
2. 침묵기도
각 성경봉독 후에 진행하는 것처럼 설교 바로 다음에 나오는 간단한 침묵은 들은 말씀에 대한 묵상을 가능하게 한다. 침묵이 우리의 예배에서 매우 자주 무시되어 왔지만 침묵의 중요성은 하박국에 의해 언급되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 지니라(합 2:2)." 우리가 말로 표현하는 것이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그림 표시로 응답할 수도 있다. 침묵의 시간은 성령으로 하여금 비언어 또는 언어가 사용되기 이전의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도록 만든다. 위대한 곡이 소리와 침묵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예배도 그 두 가지가 함께 짜여짐으로 이루어진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가 침묵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텔리비젼과 함께 사는 우리들은 종종 침묵을 죽은 시간으로 말한다. 예배에서 우리는 침묵의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을 음악으로 채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시골에서 도시로 올 때는 얼마나 소리에 압도당하는지, 반대로 도시에서 시골로 갈 때는 어떻게 듣는 방법을 다시 배워야 하는지를 경험한다. 침묵이 효과를 나타내도록 회중은 교육을 통해 잘 준비할 필요가 있다.
3. 신앙고백(사도신경)
설교가 공동체를 대표하는 해석이 되도록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는 개인의 해석이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 위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 설교에 신앙고백은 공동체성을 주어 회중과 연관시킨다.
1세기의 교회에서 매주 행하는 성만찬 전에 드리는 긴 기도(성찬기도 또는 대감사기도로 알려진)가 신경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신경의 내용은 그리스도에 관한 필수적 신앙을 요약하여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에 대해 감사하는 유대인의 감사 형식을 따랐다. 별도의 신앙고백이 없었다. 신경 특별히 니케아신경(Nicene Creed)을 암송하는 것은 4세기의 이단에 대처하기 위한 주요 교리적 논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신경은 기도가 아니라 성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경을 암송하는 것이 11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일반적인 예배 순서가 되지 않았다. 사도신경은 세례에 관한 신앙선언으로, 세례 예식에서 말하는 "예수는 주이시다"와 같은 초기의 고백적 선언으로부터 나왔다. 여하튼 사도신경은 특별히 세례 예식과 갱신을 다짐하는 예배에서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적절하다.
가장 충분하게 동시대의 신앙을 표현한 것은 성찬기도들에서 나타난다. 각 성찬기도는 새 신자들을 위한 성경공부를 위한 기초를 제공하였다. 신경을 암송하는 순서의 위치는 성만찬이 집행되지 않는 예배나 다양한 교회 그룹들이 활동하는 예배에서 가장 적절할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표현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혹은 다른 나라에서 나온 과거의 신앙 표현이라는 이유로 사도신경을 주일 예배순서에서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는 이유는 이단을 바로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동의 신앙고백 행위 즉, 우리를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연결시키는 공식적인 신앙 선언으로 사용되는 "고백"을 하기 위함이다. 루터가 한 것처럼 신앙고백을 곡으로 부를 수도 있다.
4. 찬송
설교와 그 다음에 부르는 찬송과의 밀접한 관계는 오랜 전통이 되었다. 설교 전에 부르는 찬송과는 달리 이 찬송은 설교의 주제와 관련하여 헌신에 초점을 두게 된다. 이 때 예배를 준비하는 순서가 있다면 새로운 찬송이나 익숙하지 않은 찬송을 부를 수 있다.
5. 제자도에로의 초청/ 세례와 신앙갱신
제자도에로의 초청은 세례와 신앙갱신(신앙의 확증, 고백, 재확인)과 같은 의식을 포함할 수 있다. 세례는 후보자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기독교 공동체의 성만찬을 받는 회원으로 가입하는 유일한 의식이다. 세례 의식은 유아와 성인 세례뿐만 아니라 견신(confirmation)과 신앙고백(profess-ion of faith)을 통해 각 개인과 회중의 세례 신앙을 갱신하도록 한다. 그러므로 이 때의 예배는 기독교의 입회의식(initiation)들--세례, 견신, 첫 성만찬--을 재결합한다.
물론 세례는 유일회의 의식이지만 세례신앙의 갱신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견신(confirmation)을 일생에 한 번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한국 교회에는 자주 갖는 신앙갱신을 위한 의식이 비교적 생소하다. 신앙을 갱신하는 의식은 여러가지 경우에 이루어질 수 있다. 다양한 이유로 개인들은 세례서약을 갱신하고 축복을 받을 기회를 환영한다: 성인식, 졸업, 장기간의 출타(군입대, 유학, 외국근무 등), 교회 이적, 결혼, 출산, 은퇴 등. 모든 회중은 기념식에서 자신들의 세례신앙을 갱신할 수 있으며 그 때 자신들의 사명선언(mission statement)을 채택하거나 공동체 계약을 갱신할 수도 있다.
6. 간증
예배의 첫 부분은 객관적인 경향이 있다. 그러나 말씀으로 은혜를 받은 후에는 예배가 더욱 주관적인 분위기를 띤다. 이런 이유로 간증은 설교 후에 진행하는 것이 적절하다.
복음주의 계통의 교회들은 개인의 신앙을 간증하는 순서를 진행해 왔다. 특별히 작은 교회의 예배에서는 즉흥적이거나 계획에 의해 간증할 수 있는 기회가 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예배가 계획되고 형식을 갖추는 대형교회에서는 간증이 잘 준비될 필요가 있다. 간증이 설교에 포함될 수도 있다. 주일 오전에 신앙간증을 위한 특별 예배를 계획할 수도 있다. 이런 특별예배는 주로 찬송, 간증, 기도로 이어지는 형식을 취하여 일반 예배의 구조와 다르게 진행될 수 있다.
7. 회중의 생활과 일에 관한 광고
광고가 들은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설교 후에 위치할 때는 회중의 생활과 일을 드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순서는 회중(광고위원)에게 맡겨 공동체의 생활 속에 회중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진행한다. 이 때 다음 순서인 중보기도(prayers of the people)를 위하여 개인적 관심을 모을 수도 있다.
그러나 광고가 설교 후에 진행되면 예배의 흐름을 깰 수도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가 자유로우며 자발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예배의 흐름과 통일성(말씀과 성만찬 예배)을 깨뜨리며 여러 가지 도움을 요구하는 광고 순서를 원하지 않는다. 광고를 지루하지 않게 진행한다면 회중의 생활과 일을 대표하는 순서가 될 수 있다.
성만찬이 없는 예배에서는 응답하는 예배 순서들로 위와 같은 순서들 다음에 평화의 인사, 봉헌, 광고가 진행될 수 있다.
파송하는 예배(The Sending-forth)
최근에 주일 예배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예배의 마지막 부분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의 선교적인 기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 교회의 주보는 이 마지막 부분을 "말씀을 따라 열매를 맺기 위해 세상으로"라는 표제를 붙였으며 또 다른 교회의 주보는 교회의 직원(staffs) 명단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제일 먼저 "목회자: 모든 교인들"로 시작하고 그 밑에 담임목사, 목사, 장로, 고용인 등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어떤 교회는 교회 출구나 주차장 출구에 "당신은 지금 선교 현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붙여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에게 파송되고 있음을 기억나게 한다. 이런 노력들은 교회와 예배의 현장에 대한 이해가 선교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배자들에게 세상은 선교의 현장이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인 "파송하는 교회"는 간단하고 목적이 분명하다. 이 부분의 순서들은 예배 전체를 결론짓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예배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가도록 위임하는 성경 말씀을 기억한다. 이런 순서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고통을 알고 믿음을 실천함으로 우리의 예배가 계속된다는 것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파송하는 예배의 성격은 롬 12:1에 잘 나타난다. 바울은 로마의 교인들에게 예배로부터 위임받은 것의 본질을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바울의 이해에 의하면 예배는 생활이다. 예배가 교회의 문을 나오기 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생활 여러 곳(가정, 직장, 여행)에서 계속된다.
만일 파송의 예배가 예배자들에게 더욱 의미를 부여하기를 원한다면 먼저 다음의 간단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파송 순서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주로 파송은 하나의 축복이다.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릴 때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송축(축복)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송축(축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지닌 능력과 역사를 선포하며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찬양과 경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송축할 때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어떤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하나님을 인정하고 섬기는 것)을 행함으로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실 때는 그 분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의로움과 거룩함에로 부르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는 것은 하나의 선물 즉, 실제적으로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축복을 부어주신다는 의미가 민 6:24-26에 잘 나타난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과 성경의 다른 모든 축복 말씀들의 핵심은 27절에 있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축복을 하실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분의 이름을 부여하신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매일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
파송의 예배는 공예배를 끝내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들의 생활 속에서 예배를 계속하도록 파송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 파송의 내용을 완성시키는 3가지 예배행위가 있다: 축복, 찬송, 파송. 파송의 예배는 축복기도(하나님의 축복), 파송의 찬송(사명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파송하는 찬송이나 복음송), 그리고 파송의 말씀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찬송, 파송, 축복의 순서로 진행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각 순서의 의미를 고려한다면 파송이 마지막으로 예배 장소를 떠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 순서로 적절하다. 회중이 세상에서 교회로 부름을 받았음을 먼저 알리기 위해 파송(위임) 순서를 축복 앞에 둘 수도 있다.
1. 축복(Benediction/Blessing)
하나님에게 제단을 잘 쌓았던 아브라함이 세상에서 만나는 자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되었던 것처럼 모든 예배자들은 예배의 마지막 순서에서 세상에서 축복이 되기 위해 먼저 축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축복 또는 축도는 예배 공동체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선언하는 것이다. 축복하는 성직자는 회중을 바라보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두 손을 펼쳐 들고 손바닥을 약간 아래쪽을 향한다.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축복 의식이 교회에 나타난 것은 대다수의 회중이 성만찬을 받지 못하고 교회를 떠날 때이었다.
회중이 곧 세상에서 생활하고 일할 것을 암시하는 의미로 광고 순서를 파송의 예배에 포함할 수도 있으나 어디까지나 첫 번째 파송의 예배순서는 축복이나 축복기도이다. 오늘날 예배갱신 운동은 축복기도의 참 의미를 재 이해함에 강조를 하고 있다. 축복이 선언될 때 예배자들은 그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의식적이고 개인적인 축복선언으로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도록 요청을 받는다. 어떤 목사들은 축복기도에서 생활의 특별한 부분들에 대해서도 언급함으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 계신다는 것을 기억나게 한다. 축복 다음에 세상으로 파송되는 것에 관한 찬송이나 노래가 따라온다. 이 때 섬김, 선교, 또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룬 위임에 관한 찬송을 부르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복음송이나 폐회송도 어울린다.
2. 파송의 찬송(A Commissioning Hymn)
파송의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함께 모인 교회(하나님의 백성)로서의 회중은 세상에서 계속 교회가 되도록 위임받는 것을 확인한다. 예배가 끝난 후 특별한 축제 행사를 계속할 경우에는 파송의 찬송은 예배 후에 다시 들어올 예배 위원들과 성가대를 위한 폐회송으로 부를 수도 있다. 입례송을 부르며 입례하는 것처럼, 오순절에는 전 회중이 세상으로 나가는 교회를 상징하여 예배 후에 성전으로부터 교회 앞뜰로 나가는 폐례식(閉禮式; 폐회행진)을 가질 수 있다. 대림절이나 사순절과 같은 참회하는 절기에는 침묵이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것보다 더욱 적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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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파송의 말씀(Commissioning Words)
파송(sending forth) 또는 위임(commissioning)은 집례자(성직자)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가시오" 또는 "주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평안히 가시오"라는 말을 하는 순서이다. 이에 대해 회중은 "하나님께 감사를"하고 응답한다. 원하는 경우에는 파송사와 응답을 노래로 할 수도 있으며 이미 곡으로 된 위임사가 사용될 수도 있다.
폐회송(또는 성가대의 송영)을 부르는 동안 예배 인도자들은 가능한 성전의 뒤쪽으로 나가는 것이 좋다. 전통적으로 폐장 순서는 입례 순서와 동일하다: 1) 십자가, 2) 기, 3) 성경봉독자, 4) 성가대, 5) 목사(설교자, 사회자) 이 폐장 순서가 의미하는 것은 폐회송을 부르는 동안 목사들은 성전 뒤쪽에 모여 마지막 찬송을 인도한 다음에 파송의 말씀으로 예배의 결론을 내린다. 이 파송의 말씀이 교회에서의 예배 경험을 종결하고 그 예배를 세상에서의 예배자들의 삶과 연결시킨다. 일반적인 폐회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마지막 찬송(또는 성가대의 송영) 2) 목사, 예배위원, 성가대원은 성전 뒤쪽에 선다 2) 목사가 두 손을 들고 "이제 모두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십시오"라고 외친다. 3) 그 다음 회중은 "할렐루야!" 또는 "아멘!"으로 힘있게 응답한다.
4. 후주
최근의 예배에서 후주는 전형적인 순서가 아니다. 어떤 회중은 후주를 듣지만 다른 회중은 후주를 배경 음악으로 여기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후주가 끝날 때까지 회중이 자리에 앉아서 듣도록 주보나 성가대를 통해 알릴 수 있다. 후주를 듣도록 하는 또 다른 방법은 성도의 교제 및 교회소식을 진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새로운 찬송을 배우거나 간단한 연주를 진행할 수도 있다. 파송을 받는 자들로서 교회를 떠나기 전에 기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오르간 연주를 제시하는 것도 좋다.
담당과목: 현대교회의 예배와 설교, 성서일과와 설교,
예배학, 예배갱신론, 예배와 목회상담, 설교와
커뮤니케이션, 설교연구, 예배의 이론과 실제,
설교기법, 한국교회의 예배, 실천신학개론,
교회예식, 설교강해론, 목회신학
"당신은 복음을 설교하는데 자유함을 누립니까?" (Are you free to preach the gospel?) 이 질문은 1963년 바르트(Karl Barth)가 1963년 바젤(Basel)을 방문한 남아프리카의 독일 개혁교회 목사 스미스(Nico Smith)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바르트의 질문은 수년 동안 스미스에게서 떠나지 않았고 그의 설교 사역의 방향을 새롭게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질문은 오늘 설교 사역을 위해 헌신한 모든 이에게 적용된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복음을 설교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인 우리가 복음이 무엇인지, 설교에서 복음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복음을 설교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바로 알고 나면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 자유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면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의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충실해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자.
설교의 건강과 힘은 복음을 바로 이해하는데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의 설교에서 복음과 그 중요성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지닌 문제 중의 하나이다. 많은 청중들은 설교가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문제들을, 그리고 매우 정치적인 것들을 피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런 문제들에 대한 자신들의 주장이 도전을 받을 때 심하게 반대한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성도들이 그 시대의 사회, 경제, 정치 문제들에 관하여 들으러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으러 온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것이냐 또는 저것이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설교가 개인적인 변화나 사회적인 변화 둘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개인적 삶의 문제들을 다루며 돕는 세계적인 치료전문가의 한 분으로 표현한다. 우리가 정말로 무엇을 설교하는지에 관한 위튼(Marsha Witten)의 보고에 따르면, 오늘날의 설교에서 "하나님은 개인 남녀의 심리적인 부담들을 완화시켜 주는 도구의 하나가 된다." 하나님은 "죄책감과 자기의심의 고통을 덜어주고...가족들에게 견고한 '가정'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무엇을 선택할 지에 대한 우유부단함을 제거해준다." 이런 설교들은 앞으로의 세상이 지금보다 더 많은 문제들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이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돕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오늘의 설교에서 이와 같은 치료전문 중심은 매우 깊은 문제가 된다. 그 이유는 성서의 하나님께서 단순히 사람들이 어려운 세상에서 살아 남도록 도우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 속에서 분명히 정의로운 사회와 세계를 다시 만드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치료전문가인 하나님은 종종 우리 자신들이 느끼는 필요를 반영하는 그 이상이 아니다. 치료를 전문으로 삼는 설교는 쉽게 하나님을 그런 이미지로 만든다. 이와 같이 많은 설교자들이 복음을 오늘의 문화 속에 스며들고 있는 치료중심의 관심사에 맞추어 복음이 개인주의와 심리적인 경험으로 축소되어 버린다.
새로운 시대와 복음
우리는 한 천년의 문을 닫으며 동시에 새로운 천년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 현재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는 격한 한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이전의 어떤 교회도 오늘의 교회처럼 많은 도전들--정치, 사회, 경제, 인구, 철학에 관한 이슈들--을 직면한 적이 없다. 새로운 세기에 일어날 많은 변화와 새로운 문제들이 지금까지 사회에 대하여 영향력을 발휘하던 교회의 안정과 역량을 위협할 것이다. 이처럼 새로운 세기가 우리에게 줄 변화들은 새로운 도전들을 가져다 줄 것이며 아울러 새로운 형태의 사역을 하도록 문을 열어 줄 것이다.
흔히들 21세기를 위한 설교를 생각할 때 먼저 새로운 세기를 위해 무엇이 새로워져야 할 것인지를 질문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고 해도 설교신학의 주제는 변하지 않는다.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설교의 역할과 위치는 무엇인가? 어떻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과 앞으로 올 시대에 사는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설교할 수 있을까? 또한 설교신학은 설교를 통하여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다: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에 어떤 기대를 할 수 있는가? 설교의 미래를 여는 어떤 방법이 있는가? 21세기를 위한 설교는 어떤 형태인가?
교회의 복음 전도가 세상을 구원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일부인 한, 설교는 어떤 형태로든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설교가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지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어떠하든지 미래의 설교 형태와 설교학은 현재와는 다르게 형성될 것이다. 만일 새로운 세기를 위해 우리가 자신들의 설교를 어떻게 갱신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먼저 현재 점진적으로 우리의 설교와 청중을 형성하고 있는 몇 가지 서론적인 관찰이 필요할 것이다. 설교는 문화가 설교자와 청중의 삶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항상 포함하는 문화적인 사건이다. 그러므로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신학을 형성하는 새로운 종류의 접근 방법은 먼저 다음 세기의 설교를 위하여 지금 형성되고 있는 상황을 규정짓는 방법에 의존한다. 21세기를 위한 설교의 의미와 실제, 그리고 그 형태에 관한 기본적 이해에 대한 몇 가지 도전들이 새로운 상황으로부터 일어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강단은 설교의 중심 내용인 복음과 설교의 기초와 방향을 제시하는 설교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찾고 있다.
최근에 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 주된 2가지 변화들이 설교의 방향을 정하는데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첫째, 점차적으로 교회는 기독교의 미래가 사회적 관심을 가진 복음전도에 달려있음을 깨닫고 있다. 전통적으로, 교회의 본질에 관한 서구적 이해는 교회가 사회의 중심적인 기관으로 안정된 상황 속에서 주로 목회 상담과 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어 왔다. 바너(George Barna)가 지적한 것처럼, 20세기에는 "도덕적 가치관, 사회적 행동, 문화 활동, 가정의 발달, 생활 방식, 그리고 심지어 정치적인 결정 사항까지도 종교적인 관점과 영적인 감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신들의 사회를 매우 기독교적으로 간주하여 그 속에서 사는 자들을 위해 교육 목회와 목회 상담을 강조하던 서구의 교회들은 이제 그리스도인들이 다원적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마주치는 새로운 선교적 상황 출현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선교적 관심에로의 큰 변화가 지금 전도가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많은 새로운 이해를 필요로 한다. 즉 복음 선포가 개인들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그들이 살고 있는 상황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는 단순히 신경성 공포, 억압, 걱정과 싸우는 변화의 시대만이 아니라, 정사와 권력에 대항하는 선한 싸움의 시대이다. 심리적 개인주의보다 사회적 의식의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하여 혼란을 치를 것이다. 지금보다 더욱 복잡한 세계적이고 제도적인 문제들이 기독교 신앙에 중요한 도전을 줄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선언할 때, 그들이 단지 앞으로 받게될 보상이나 지금 깊이 느끼는 내적 평안을 강매할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복음과 구원의 약속은 내적 충격들로부터 단순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포로로 붙잡는 제도, 사회적 태도, 습관, 그리고 억압들로부터 해방되는 희망을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기쁜 소식으로서의 복음과 약속으로서의 구원이 사회적이고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이기 때문이다.
둘째, 20세기의 마지막에 서 있는 우리는 이전 어느 때보다 더욱 많이 성경에 관하여 설교하였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아직도 성경에 무지하며, 결국 교회력에 따른 설교(Lectionary Preaching)가 점차 최선책으로 등장했으나 교회들은 아직도 비고 있다. 해석되지 않은 성서주의는 생명력 있는 삶을 위해 불충분하다.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요구한다. 우리가 이제까지 해 온 성경 공과(교훈) 중심의 설교는 성도들을 신학적 사고에 필요한 견고한 기초가 없는 자들로 만들었다. 그 결과로 우리는 실제적으로 세속적 의미의 삶 속에 분산되어 영향력을 잃은 성서적인 생각들을 가진 자들을 양산하여 왔다. 아마도 그런 교인들을 세속적 형식의 신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을 위한 설교는 신학적 작업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에 관한 지식들을 찾고 있다. 지금 강단이 갖는 임무는 21세기의 의식 속에 신학적 의미를 형성하는 것이다. 다음 세기를 위한 설교는 단순히 성서의 본문을 해석하지 않게 될 것이다. 설교는 의미를 주는 목회이다. 우리의 혼돈된 세계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것은 확실히 설교단이 갖는 사명이다.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장래의 전투를 대비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대리자로서의 책임을 부여받은 자들로 살도록 영적 토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 만일 설교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적 원리에 근거한 생활철학을 따라 살도록 준비시키며 앞으로 올 것을 해석해야 한다면,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설교신학과 복음
우리가 복음을 설교하는데 자유함을 누리지 못하거나 충실하지 못하다는 말은 우리의 설교가 신학에 근거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강단이 신학적인 생각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설교에서 사회적인 문제들을 신학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 그 설교가 분명한 목적과 초점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혼란 되고 불확실한 강단은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상실하게 된다. 신학은 공적인 영역을 다루는 설교까지를 포함하여 설교를 강하게 한다. 신학에 기초를 둔 설교는 공적이다. 우리의 설교는 공적인 문제에 대해 권위 있는 말씀이 되어야 하는 주된 신학적 임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듀크 대학의 설교학 교수 라이셔(Richard Lischer)가 주장하는 것처럼, 현대 설교학은 전반적으로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차원에서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을 구체화해야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다. 콥(John B. Cobb Jr.)은 믿음을 구하며 이해하는(Faith-Seeking-Understanding) 진지한 행위로서의 신학이 많은 교회들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슬퍼한다. 그의 지적에 의하면 설교가 주로 인기 있는 심리학과 상식에 근거함으로 그것들을 재확인하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마련될 뿐, 복잡한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하도록 격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이스빌 장로교신학교의 설교학 교수 맥클루어(John McClure)는 현대 설교자들이 생각해야 할 것을 지적한다: "19세기의 후천년설을 주장하는 설교와 20세기의 진보적 복음주의 설교에서 나타난 것처럼 현재 장로교의 설교는 지속적이고도 분명한 신학적 메시지가 부족하다."
신학이 무시된 시대에서 우리의 설교는 주로 목회적 돌봄, 교육, 훈련 또는 상담과 같은 개인적 이상주의나 실리주의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설교의 주된 사명은 목회적 돌봄이나 성서적 교훈이 아니라 신학적 의미이다. 이런 이유로 밴더빌트의 설교학 교수 버트릭(David Buttrick)은 오늘의 설교자들이 다시 한 번 신학에로 돌아가서 신학적으로 생각할 것을 요청한다:
설교는 단순히 성경의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 다; 설교는 의미를 부여하는 사역이며 우리가 사는 혼돈된 세상에서 의미를 주는 것이 진정 강단의 사 명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시대를 분별하도 록 도와야 한다. 신학은 신앙을 현대 언어로 그리고 현대의 사고 구조 안에서 설명한다. 만일 설교가 무 엇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해석해야 한다면, 그 때는 설교가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해 신학적으로 생각해 야 한다.
이제까지 20세기 설교의 자취를 평가해본 대로, 우리의 설교가 세계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영향을 끼치지 못한 이유가 설교사역에 대한 전망과 일련의 우선 순위 없이 노력하는 조각난 조직체로 전해졌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효과적인 설교를 위해서 설교신학의 관점에서 다시 강조해야 할 설교사역의 우선 순위를 사려 깊게 결정하는 것이 시급하다. 21세기를 앞에 두고 우리의 설교는 너무 많은 사회와 세계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죄책감과 무능력의 와중에 있는 덫에 걸렸다. 우리는 외치고 싶다. 또한 우리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와 변화를 일으킬 설교의 방법을 찾고 있다. 어떻게 사회적인 현실을 다루는 설교가 오늘의 교회에서 다시 들려질 수 있는가? 어떻게 복음에 충실하고 세상에 대해 열린 설교를 할 수 있는가?
찢어지는 복음
교회는 이중적 사명을 가진다. 우리는 복음을, 즉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에 관한 기쁜 소식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았다. 동시에 우리는 옛 질서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관한 표시가 되어야 하며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새로운 피조물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 속에 있는 교회는 항상 찢어진다. 한편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면 문화와 접촉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대에 관한 표시를 보여주기 위해 우리 자신들을 세상으로부터 구별시켜야 한다. 한 쪽은 세상과 연결되도록 충동하며 또 다른 쪽은 세상을 거부하라고 충동한다. 그러면 어떻게 세상과 대립된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우리가 보존하려는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복음은 항상 찢어진 채로 전해지며 그래서 항상 왜곡된다. 우리의 설교에서 그리고 성경에서도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순수한 복음은 없다. 흔히 어떤 설교는 개인적인 필요나 문제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 다른 설교는 공적인 이슈나 사회, 국가에 대한 관심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개인과 사회 두 종류의 주제 모두를 다루어 설교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개인적인 문제가 마치 사회적 맥락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듯이 복음은 격리된 개인들에게 한 말을 정치 세계나 사회적 체계에 대해 말할 때 다른 언어로 바꾸어서 말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복음이 총체적인 인간의 삶에 대해 말하며 그들 자신의 삶과 다양하고 복잡하게 상호 연관을 맺고 있는 상황 속에서 신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설교자가 다양한 청중에게 균형 있는 복음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의 필수적인 목적은 항상 복음 선포이다. 설교자는 본문에 신실하게 복음을 선포할 의무가 있다. 각 시대는 복음을 삶에 적절하게 새로운 방법으로 전할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더욱 호감을 갖도록 우리가 복음을 재 포장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 이유는 교묘한 마케팅과 신앙의 타협이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 요구하신 진리를 축소하지 않고 오늘날의 상황과 긴장 속에서 아주 적절한 방법으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일차원적인 경험이 아니라 모든 사고와 행동과 경험에 스며드는 다각적인 삶의 방법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려면, 강단은 새로운 방법으로 복음을 탐구하라는 도전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인생의 모든 면에 대한 복음의 적절함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난, 정의, 차별, 낙태, 성적 혼음 같은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복음을 적용할 수 있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때때로 이러한 문제들이 신학과 복잡하게 얽혀 있어 설교자들을 진퇴양난의 상황에 봉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복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설교자는 교회 안에서 논의를 통해 자신과 청중들의 신앙을 공적 문제들에 진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이끌고 갈 수 있다. 이처럼 복음의 적절성에 대한 반응은 설교자와 그의 청중이 사랑, 평등, 정의에 대해 얼마나 진지한가를 알아보는 척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개인이나 사회, 일반적 상황이나 특수한 상황, 그리고 현재나 미래 중 어느 하나만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개인과 세계의 영적 상태와 사회적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가 왜 복음의 균형을 믿으며 그 믿음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욱 강조해야 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을 세상적인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이해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사회가 하나님의 말씀에 젖어 있다하여도 사람들의 의식을 꿰뚫으려면 믿음을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 교회의 형식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주일 예배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세상에 나가서 다른 사람들과 사회에 봉사하고 참여하는 태도, 경건과 엄숙 대신에 기대와 기쁨 그리고 실천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살아가는 방법을 바꾸어 비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참여하고 봉사해야 함을 의미한다. 복음의 균형을 유지하는 설교는 청중이 자신들의 인생 목표를 경건한 시각에서 다시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포괄적인 인생철학의 개발이 될 것이다. 복음의 균형을 되찾는 설교를 통해서 인생의 기본 목표가 바뀔 수 있으며, 자신에 대한 사랑이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고, 안락함을 위한 노력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는 것으로 변화되며, 안전에 대한 추구가 신앙으로 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복음의 균형에 대한 종교적 경험이 사고의 체계 또는 생활 양식의 본질을 변화시킨다는 의식을 일반화시켜야 한다.
브루기만(Walter Brueggemann)은 "설교의 임무와 가능성이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적절한 설교양식으로 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단이 종종 힘과 타당성이 부족하게 보이는 이유는 설교의 형식이 단순하기 때문이 아니라 설교의 변화를 요구하는 복음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강단으로부터 복음이 들려지지 않을 때는 그 시대의 문제들로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들을 하나로 묶을 것이 없어진다. 만일 설교자들이 복음을 설교해야 한다면 그들의 메시지는 청중들이 깊게 관심을 갖는 실제의 상황에 대해 말해야 한다. 이 실제의 상황은 항상 사회, 경제, 정치적 상황으로 얽힌 그물과 같다. 설교자들이 복음의 균형을 되찾는 설교를 할 때 이 모든 것들에 도달된다.
목사는 기쁜 일들을 장려하는 자보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 설교 사역의 주된 임무가 교회 관리가 아니라 사건들과 문제들에 대한 신학적 의미를 해석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은 설교자의 자아상이 교회 행정가로부터 예언자와 신학자로 변화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말하도록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성직자로서 자신의 신앙의 본성과 구조, 즉 설교의 역할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설교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설교자의 신학과 필수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설교자의 신학이 복음으로부터 생명을 끌어내지 못할 때 청중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교회를 가르치고 이끌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래서 설교와 관련된 설교자의 신학(신앙)과 공적 문제들(실천)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설교자의 복음 이해
설교의 필수적인 목적은 항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학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에 관한 기쁜 소식에 대해 생각함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신학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설교 신학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를 준비할 때 그리고 그 설교에서 어떻게 신학화 하는가를 말한다. 복음의 균형에 대한 캠벨(Ernest T. Campbell)의 신학적 이해가 그의 설교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소개함으로 이 질문에 답하려 한다.
우리가 설교에 관한 우리의 신학적 관점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 제일 먼저 언급해야 할 것은 어떻게 개인과 공동체 모두에 관해 균형 있는(총체적인)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있다. 설교자의 신학적 사고는 복음을 경험한 것에 근거한다. 설교자는 복음 메시지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데 관심이 있다. 신학적 사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행위와 우리 자신의 실존 사이의 교차점을 찾는 인식과 상상의 과정이기 때문에 설교자의 신학은 복음에 대해 생각할 책임이 있다. 설교에 대한 설교자의 신학적 생각은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복음의 전체적인 의미, 그리고 복음과 인간 실존 사이의 전체적인 관계--전체적이다.
복음이 단편으로 나누어질 수 있음으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복음의 균형을 상실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함을 원하신다.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주인이 준비한 정식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를 주문하는 식으로 복음에 접근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설교는 그 날의 문제들이 주는 위기에 대해 단순하게 설교학적으로 반사적인 반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가 자신이 좋아하는 복음의 부분이나 자신의 성격과 경험에 가장 잘 맞는 부분들만을 설명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단순히 자신이 선택하는 옥타브(범위) 내에서만 오르락내리락 연주만 할 것이 아니라 진리의 키보드에 다른 열 개의 옥타브들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설교자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주문하듯 설교를 한다면 그의 상상된 선택이 늘어남에 따라 복음에 대한 헌신은 좁아지는 경향이 생긴다. 개신교의 종교개혁 이전이나 그 이후의 교회는 지나친 개인주의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천주교가 행한 엄격한 교회의 억제에 반대하면서 지나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교정하였다. 그 결과가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고르고 선택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 것이다. 교회의 주된 기능의 하나는 모든 사람들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충분히 전파하는 것이다. 충분히 전파되는 복음, 즉 균형을 지닌 복음은 "도전과 위로, 심판과 은혜, 그리고 명령과 약속"을 동시에 전한다. 이것이 설교자의 주된 책임이다. 처음부터 교회의 사명은 전 세계에 거주하는 자들에 대한 사명이었다. 우리는 전세계로, 즉 "수평적으로 어떤 나라도 남기지 않고 그러나 또한 수직적으로 모든 사회의 계급, 조건, 수준, 질서와 계층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전세계로 가라는 명령 아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다른 비판적 기능은 복음에 대한 충분한 반응을 발전시키고 조정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우리는 목회의 목적이 사람들이 내적으로 바라는 것과 그들의 일시적인 필요들을 모두 전하는 복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복음과 사회적인 복음의 대칭 구조는 잘못된 이해와 분열로부터 발단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스런 구원의 행위에 근거하며 이 세상과 다음 세상에서 살도록 부름 받은 우리의 모든 삶에 적절한 하나의 복음만이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그리고 동시에 세계 공동체의 진보적인 사람들에게도 진실할 수 있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와 세상에서의 봉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 같지만 어떤 회중이라도 이것과 저것 중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필요는 없다. 하나의 복음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어서 생각과 마음이 순수한 신앙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에서 개인에 대한 복음전도와 복음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재결합시켜야 한다. 이와 같이 설교에서 균형을 이룬 복음을 전하려는 설교자의 관심은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ch)에게서 이미 나타났다.
인간의 생활에는 두 가지 위대한 실체, 즉 인간의 영혼과 육체가 있다. 그런데 종 교는 이 두 가지를 모두 구해야 한다. 영혼은 의와 영생을 구해야 하며 육체는 의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한다.
라우쉔부쉬의 말처럼, 설교자는 독특한 복음의 구조 안에서 사회적인 행동과 영적 중생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설교 사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항상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어떤 균형의 형태를 전제해야 하기 때문에 항상 위험한 일이다. 우리의 설교에서 가장 자주 나타나는 문제는 "믿을 수 없는 복음, 값싼 복음, 그리고 타당성이 없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전투적인 교회는 종종 잠자는 교회가 된다. 우리는 인간을 갈라놓는 주된 문제들에 관하여는 아주 여리게(피아노시모) 말하는 반면, 개인적 죄에 관하여는 매우 강하게(포르테시모) 말할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침묵과 타성에 의해 우리들은 공적인 영역을 제쳐놓고 상황이 더 좋아지지 않았음을 이상히 여기는 만용을 부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지난 수년동안 복음의 개인적 의미보다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거나 모든 사람들과 기쁜 소식을 나누라는 명령을 무시한 불균형을 고쳐야 한다.
한국교회는 아직도 복음이 개인적인지 사회적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는 위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총체적인 신앙의 말(馬) 위로부터 이쪽이나 저쪽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각 지역 교회들은 "영적이다" 또는 "세상적이다"라는 불균형의 꼬리표를 달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 안 된다고 믿으며 다른 사람들은 복음이 세상과 관련을 맺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목소리들은 바로 교회 안과 밖에서 널리 들려오는 두 가지 견해를 대표한다.
복음주의자들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을 거절함으로 복음을 제한하며 복음선포를 막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교회와 국가가 분리되어야 하며 그래서 교회와 국가는 각각 그 자신의 일에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에 의하면, 교회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죄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만일 교회가 이 일에 전념한다면 다른 어떤 것에 간섭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설교에서 그 시대의 사회적 문제들을 소개하는 것에 화를 낸다.
복음주의자들과는 달리, "밖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수평적 차원인 복음의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의미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직적 차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교회를 정치 경제 사회적 변화를 위해 일하는 기관으로 이해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들에게 중요한, 구원하는, 살아있는 분으로 이해되는 것에 대해 무감각하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 인간의 변화를 위한 노력만으로는 충분히 철저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제도의 변화를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복음의 균형을 찾는 자는 복음이 항상 개인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임을 믿는다. 어느 쪽도 다른 한쪽 없이는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증언을 할 수 없다. 설교 사역에서 중요한 사명과 목적의 일치는 오직 그 둘의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늘의 기쁨과 땅의 관심을" 동일하게 추구할 때에만 성취될 수 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온전한 대표로서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주려면 수직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으며 수평적으로는 사람들과 그들을 괴롭히는 모든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설교에서 균형 있는 복음을 위한 우리의 관심과 위치를 표현하면서 복음의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요소들의 종합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균형을 설교하면서 우리의 관심은 청중들을 더 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더 의미 있는 역사 참여에로 이끌어야 한다. 그 이유는 복음에 관한 설교가 깊이에 있어서는 개인적이며 참여에 있어서는 공동적이기 때문이다. 복음에 관한 이해는 설교자의 전제를 성서적이고 신학적인 근거로부터 시험하도록 용기를 준다. 우리의 설교가 균형 있는 복음을 지향하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 역사, 성경, 그리고 개인과 사회에 대한 신학적 이해를 통해 우리의 강단의 방향을 다시 조준할 필요가 있다.
개인과 세계의 주
첫째, 복음의 균형은 설교자가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세계의 구주로 모든 삶에 주가 되신다고 해석할 때 나타난다.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는 청중을 더 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에로 일깨운다. 수 세기동안 교회는 인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 사역의 개인적 성격을 강하게 심어왔다. 그러나 신약성서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점차 그리스도의 우주적 가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너무 많은 세월 동안 너무 작은 그리스도를 보았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한함으로 그의 통치를 우습게 만들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되심을 해석할 때 그의 우주적인 의미를 보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남녀 개인들을 위한 의미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세상을 위한 의미도 가지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구조와 질서의 힘, 즉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보이지 않는 세력에 대해 승리하셨다 (골 1: 16 -17).
우리는 현재의 그리스도의 통치를 개인의 마음이나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신앙인들의 고립된 집단에 편리한대로 제한시켜 그의 위대함을 약화시키는 신학을 조심해야 한다. 그런 신학은 그리스도를 일정한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지역구 대표로 제한시킨다. 예수가 개인의 구주 되심이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되심을 무시할 때, 즉 그리스도가 의미하는 모든 것을 무시하게 만들 때 복음은 왜곡되고 그리스도인의 삶은 책임감 있는 윤리적 행동으로부터 멀어져 쉽게 특권 의식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감사한 마음으로 개인의 구주로 영접한 분을 우주의 구주로 섬기며 그에게 순종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이처럼 설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균형 있는 주되심을 회복하는 것은 교회와 강단이 자체의 갱신을 위해 물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균형 있는 복음이 선포되거나 받아들여질 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의 주이시라는 기독교의 신앙을 강하게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삶과 교회의 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역사의 주이시다. 그러므로 복음에 관한 설교는 장밋빛 꿈이나 현실 도피를 위한 복음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설교에서 한 분 위대한 실체를 아는 유익과 함께 사물의 공통적 실체에 직면한다.
현실적이며 초월적인 역사
둘째, 균형 있는 복음을 향한 설교는 역사를 진지하게 이해해야 한다. 바람직한 역사관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초월적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주이시라면, 이것은 역사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하여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 비록 강단을 통해 설교자가 생활과 말로 그리스도는 모두의 주와 구세주라는 기쁜 소식을 선언하도록 특별한 명령을 받았지만 이 사명에 대한 충실함은 우리를 역사 속 깊이 던져 놓아 우리가 역사에 참여하지 않음에 대해 변명을 구하지 못하도록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의 의미이다 (마태 23:23).
대체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진지하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우리들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초월적인 견해를 취하거나 그 역사를 구원에 관한 인간 경험이 일어나는 단순한 배경으로 간주한다. 이런 부분적인 역사 이해는 실제적으로 세상 속에서 종교를 "착색 유리로 덮은 참호같이 제한시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넓은 영역으로부터 떠나 그들 개인적 이야기를 이루는 소규모의 일들에 집중하여 자주 가족과 직업과 같은 개인적인 목표를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세상이 불타고 있는 동안 교회가 삶의 현장에 대해 무관심하여 사소한 윤리적 문제에 집중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관심사인 빈곤, 전쟁, 불평등과 같은 문제들에 열정을 쏟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영역, 삶의 모든 조건을 포함하는 내세와 영원, 정치의 세계와 기도의 세계, 자연의 질서와 은혜의 질서, 사랑과 정의, 또는 개인과 제도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져야한다. 그 이유는 각 영역이 다른 영역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개인적 삶의 사적인 과정뿐 아니라 역사의 공적인 과정에 관해서도 많은 관심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의 대상인 세상의 모든 이에게 말하기 위해 자신들의 주둔지에서 기꺼이 철수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기쁜 소식이 가장 잘 전달될 때가 바로 그것이 듣기에 힘든 소식일 때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복음이 가장 설득력 있을 때는 복음이 "교회에 관한 페이지"로부터 빠져 나와 현재 진행중인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페이지에서 발견될 때이다. 교회와 국가를 분리시키려는 이유가 필연코 둘 사이에 서로에게 피해를 주는 상호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두 가지 영역에 모두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전혀 빛을 비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약 성경으로부터 그 두 영역에 대한 연결을 찾는다: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베풀라...정의 없는 사랑은 그 둘을 모두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정의에 대한 진지한 헌신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복음을 듣게 된다. 만일 우리가 약자들을 계속 억누르고 인간 이하 취급을 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해 그들을 돕고 그들을 위해 외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우리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우리에게 정의를 회피하는 모든 형태의 사랑을 생각나게 된다. 그러므로 보존의 질서에서 주된 미덕은 사랑이 아니라 정의이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설교자는 청중을 역사 속에 더욱 진지하게 참여하도록 깨우쳐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불의한 일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구약과 신약의 말씀
셋째, 균형 있는 복음을 위한 설교는 구약과 신약성경 모두에 근거를 둔다. 그런 설교는 인권, 전쟁과 평화, 빈곤, 인구억제, 환경보존 등과 같은 공동적 관심에로 향한다. 교회가 사회적 문제들에 관여하는 것을 염려하는 설교자들은 공동의 책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들의 청중들로 하여금 개인적 도덕성을 뛰어넘도록 인도하지 못한다. 이런 불균형적 이해는 주로 개인의 신앙과 책임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확립된 정의를 위한 공동의 신앙과 책임의 중요성도 함께 강조하고 있는 구약과 신약성경을 진지하게 이해하지 않는데서 나타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설교 사역은 두 성경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균형 있는 복음에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떤 설교자들은 균형 있는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목소리를 약화시키거나 지워버림으로 성서적 종교를 전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만든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약성경이 기본적으로 정치적 참여와 사회적 행동에 대해 비판적이라고 주장한다. 더구나 그들은 신약의 윤리적 교훈이 주로 인간의 상호 관계와 영혼에 관한 내적 미덕에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엡 4장, 골 3장). 그러나 우리는 신약이 침묵하고 있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분명히 하나의 소수집단이었다. 그들은 숫자상으로 매우 하찮은 자들이었다. 어느 곳에서든지 그들의 65%에서 85%가 사회의 하층 계급에 속하였다. 바울은 언젠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집단이 될 때 그리고 그들이 민주적 질서 속에서 참정권을 가지고 역사 속에 참여할 권리를 가지고 살 때가 올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약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실들이 변하였다. 오늘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신약에서와 같이 무시당하는 소수집단이기 보다는 오히려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해 말하고 변화시키고 도전할 힘을 소유한 집단이다. 그러므로 공동 생활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들에 건설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성경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의 관심이 각 개인의 구원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창조, 그 창조의 보존뿐만 아니라 남녀의 구원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관심을 이해하는 설교자는 그 두 가지 관심을 동시에 말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현재 교회가 누리는 상당한 물질적 힘, 영향력, 설득력을 가난한 자, 약한 자, 밀려난 자들을 위해 사용하도록 선포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자체의 생명 보존만을 위해 그 자원들을 사용하고 확장한다면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잘못 사용한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껴야 한다.
개인과 제도의 변화
마지막으로,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는 설교는 개인들과 그들의 사회 제도들 모두를 위한 변화의 힘을 강조한다. 우리는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개인들에게만 한정될 수 없고 그들이 살고 있는 환경에 대한 변화도 포함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사회의 변혁뿐만 아니라 개인의 구원에도 관심을 가지신다. 하나님은 설교자들이 전해야 할 복음의 원대한 능력을 과소평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서 성경을 진지하게 다루어 지체없이 인간의 본질과 제도 모두를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믿기를 원하신다. 설교자는 정치적 사회적 정의뿐 아니라 또한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설교는 복음을 인간의 모든 조건과 연결하려는 총체적 설교 사역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목회 현장에서 오랜 기간 사역한 자는 누구든지 목양적인 면(하나님의 사랑)과 예언적인 면(사회 정의)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깨닫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경험한다. 복음이 충실하게 선포되고 정직하게 받아들여지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든 개인들이 기꺼이 변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을 위안하기 위해 의존하는 한 가지 환상은 개인들이 충분히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한다면 세상을 혼란시키며 위협하는 대규모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문제들이 조속히 해결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런 확신의 이면에는 회심한 개인들이 충분한 숫자가 될 때까지는 계속 주의를 강력히 요구하는 문제들에 대해 거의 대책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인의 영혼을 변화시키는 일은 부분적으로 정치적 사회적 실체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너무 자주 많은 설교자들이 죄는 절대적으로 개인에게 거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과 싸우는 것을 꺼려한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공동체를 희생시키면서 개인들을 높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이 제도 속에도 숨어 있으며 하나님이 개인과 사회 제도에 모두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믿는데 매우 느리다. 그들은 사회 구조가 개인들에 의해 형성되며 또한 개인들에 의해 변형되고 파괴되고 개조되거나 지지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는 중요한 책임을 기피한다.
그러므로 상담의 과정에서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개인의 문제들이 사회적 기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는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는 사회 구조들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굶주리고 갈하며 집이 없으며 벌거벗고 갇힌 자들을 생산하는 그 구조들을 변화시킴으로 하나님의 작은 자들을 섬기려고 노력해야 한다 (마 25:35-36). 실제로 사회의 구조들이 개인들에게 상처를 준다. 우리가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불완전한 제도 속에서 우리의 개인적인 사랑의 노력을 기울일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려는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밖에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을 위해 사회 구조들을 변화시키며 이런 종류의 싸움을 경멸하지 말아야 하며, 계속 개인적인 사랑의 행위와 사회에 대한 봉사 이 두 가지 모두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기독교는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영적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사회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경험하지 않고 진정한 개인의 회심 경험을 가질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균형을 찾는 설교는 항상 인간을 더욱 인간되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균형 있는 복음을 전하려는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청중들을 형성하고, 그 공동체를 균형 있는 복음에 의해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며, 또한 균형 있는 복음에서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견한다. 예수께서는 가르침과 모범을 보여줌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사람들의 관심의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강력하게 옮겨 놓았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나란히 간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강한 자들과 가진 자들에 의해 쉽게 희생당한 이 땅의 작고 약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셨다는 것을 믿는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 사역에서 도움을 요구하는 자들을 위한 열정을 가져야 한다.
복음 선포의 실제
지금까지 설교자가 충실해야 할 복음의 내용들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한 가지 더 다루어야 할 것은 어떻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제적인 방법이다. 물론,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나타낼 것은 복음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복음을 전할 때 전통적인 기존 교리들과 그와 관련된 신학과 연관해서 설교해야 한다. 즉, 말씀의 입장에서 사건을 성경적으로 연관시켜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설교자의 이미지, 이야기, 아이디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하나의 수단이며 효과적인 방법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역할이 "복음의 광선을 펼쳐 주는 프리즘"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이다. 설교학적 순환에 의하면, 처음에 말씀이 들려지고(heard), 그 다음에 들은 말씀으로 믿게되며(believed), 하나의 고백(confession)을 일으키어 다시 그 말씀 선포에로 돌아가게 된다. 비록 실제 생활에서 그 순환이 정확하게 순서를 따라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순서의 기본적 리듬은 옳은 것이다. 복음선포 즉,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위해 행하신 것에 관한 현재시제의 선언은 사람들에게 신앙적 반응을 불러일으키어 말씀과 성만찬에로 다시 모이도록 인도하며 여기에서 다시 동일한 기쁜 소식(복음)이 새롭게 들려진다.
복음 선포의 문법
첫째, 현재 시제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현재시제의 활동이다. 설교자는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을 위해 말하도록 부름 받는다. 설교에는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신 능력을 말하기 위한 설교문의 공간과 원칙이 있으나 이처럼 하나님에 관하여 회상적으로 말하는 것은 우리가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직접 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둘째, 복음의 주체인 하나님, 그리스도, 또는 성령의 활동을 능동적 동사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늘 말씀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 활동적인 단어들을 사용한다. 날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개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고, 이들을 신앙으로 이끌고, 성령의 은사들로 생기 있게 만들고, 생활의 시련들을 견디도록 격려하며,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활동적이다.
셋째, 1인칭을 2인칭으로 표현하라. 복음을 직접 말할 때는 1인칭("나")에서 2인칭("너")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방법이다. 신학적으로 설교에서 전해지는 말은 용서의 복음("내가 너희에게 너희의 모든 죄에 대한 전적인 용서를 선언하노라") 또는 축복의 복음("주께서 너에게 복주시며 지키시기를 원하노라")과 다르지 않다.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너를 위하여"라는 분명한 성격이 있다.
복음선포의 형태
첫째, 특별한 인간의 문제나 상황을 다루어라. 복음을 직접 말할 때는 인간의 문제나 상황을 언급한다. 이것은 설교에서 복음을 말하는 것을 예전형식에 갇힌 선포와 다르게 만든다. 염려하거나 낙심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은 아프거나 죽어 가는 자들을 위한 기쁜 소식과 다르게 이해된다.
둘째, 확신을 가지고 말하라. 복음을 직접 말하는 것은 확신 있게 말하는 것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죄를 용서하고,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 이런 신앙을 일으키는 약속은 확신에 차서 말해진다.
나가는 말
21세기를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설교자들은 복음의 균형에 대한 신학적 이해로부터 급변하는 사회에서의 설교 사역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설교자들은 그 어떤 방법보다 설교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설교자들은 자신들의 설교에서 전인적(몸, 마음, 영혼) 목회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요구하는 모든 인간의 제도와 또한 개인의 문제들을 기독교화 하려는 목적을 반영하기 위해 특별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강단은 인간의 영적 필요를 인간의 육체적 필요와 함께 조화시켜야 한다. 모든 설교에서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차원을 함께 다루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복음을 개인적이고 내적이며 개인주의적인 방향이나 아니면 사회적이고 외적이고 단체적인 방향에서만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브루기만(Walter Brueggemann)이 지적한대로,
보다 광범위한 공적인 세계에 대한 어떤 책임이나 기여함이 없이 그저 자기 가정이나 개인적인 영역 에만 머물러 있기를 원하면서 사적인 세계를 구축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종의 주관성으로부터 좋 은 설교가 방해를 받는 경향이 있다. 우리 가운데 널리 만연되어 있는 속임수는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 같지만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인간됨을 형성하는 거대한 공적인 주제들을 포기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자의적으로 개인적 범주와 사회적 범주로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청중들의 삶의 전 영역을 복음과 만나게 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의 설교가 목양적 색조를 또는 예언적인 색조를 짙게 띠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분명한 종류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복음의 균형, 인간의 모든 삶의 조건을 포함하는 총체적 복음에 대한 충실한 증언을 침묵시키려는 어떤 경향에도 맞서 계속해서 싸워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성경 본문으로 들어 갈 때부터 우리 주위의 환경을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한다. 그래서 그 대가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균형 있는 복음, 즉 온전한 복음을 끝까지 증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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