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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목양 단상[1,073]〓/성경 교육 지침

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by 【고동엽】 2022. 3. 4.

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존 스토트의 생애> 로저 스티어 지음, 이지혜 옮김, IVP
<제자도: 변함없는 핵심 자질 8가지> 존 스토트 지음, 김명희 옮김, IVP



똑같이 한 사람의 생애에 대해서 그리기는 하지만, 자서전을 읽을 때와 전기를 읽을 때 느낌이 다르다. 내밀한 고백이 있고 없고의 차이도 있고, 사건들의 중요성을 평가하는 시선도 다르다. 특히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것들 중 어떤 것을 글에 포함시킬지에 대한 판단 또한 다르다.

존 스토트가 직접 자서전을 써 준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고, 이제 우리는 티모시 더들리 스미스의 <존 스토트: 탁월한 복음주의자>에 이어 로저 스티어의 <존 스토트의 생애>(이하 <생애>로 표기)를 통해 그의 삶과 사역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복음주의자들이 교황을 선출한다면 아마도 존 스토트를 지목할 것이다’(이 유명한 언급은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2004년에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실 데이비드 브룩스는 그 칼럼에서 마이클 크로마티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16세기 유럽 개혁주의자들 이후로 존 스토트에 견줄 사람이 없을 것 같다’(존 스토트가 <타임>에서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된 후 빌리 그레이엄이 한 말)고 추앙받은 사람의 삶은 우리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스미스가 쓴 전기가 너무 두꺼워서 읽다가 포기했다는 사람이 많았을 뿐 아니라 책 자체도 절판되어 있던 차에, 적절한 분량으로 스토트의 다양한 면목을 흥미진진하게 소개해 줄 책을 만나 반갑다.



바로 몇 달 전에는 스토트가 쓴 <제자도: 변함없는 핵심 자질 8가지>
(이하 <제자도>로 표기)라는 책이 나왔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것은 내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88세의 연로한 스토트는 이 책이 자신의 고별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전한다.
스토트가 저술한 50여 권의 책들 가운데 <제자도>가 연대적으로 마지막 작품이 될 거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제자도>는 전기가 아니지만, 그의 생애 말년의 고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생애 전체에 대한 회고와 소망이 담겨 있는 그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일 수 있다.
<생애>는 (영국에서) 원래 2009년에 출간되었고 <제자도>는 2010년에 출간되었기에,
존 스토트의 탈고 과정을 생각한다면 <제자도>가 그의 최종적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두 책은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
가령 <생애>에서 2006년에 스토트가 옷을 갈아입다가 의자에 걸려 넘어져서 엉덩이뼈가 다치는 이야기가 간략하게 지나가듯 나오는데, <제자도>의 ‘의존’이라는 장에서 스토트는 그때의 체험을 좀더 자세하게 서술하고 느낀 것들과 깨달은 것들을 전달해 준다.




그렇다면 아마도 <제자도>를 통해서 <생애>에 관한 스토트 자신의 직접적인 발언을 들을 수 있을 것이고, <생애>를 통해서는 <제자도>에 있는 스토트의 발언의 깊이와 배경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짤막한 서평에서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제자도>에 있는 각 장의 주제를 간략하게 요약하고(거의 문자적 요약이지만, 가독성을 위해서 인용 표시는 하지 않겠다), 이어서 <생애>에 있는 각 주제와 관련되는 삶의 내막들('Inside Story', <생애>의 원제)을 이야기해 보려 한다.


급진적(철저한) 제자도
스토트는 자신이 ‘급진적 제자’(The Radical Disciple, <제자도>의 원제)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선택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철저한 제자도를 회피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님이 주님이시기에 우리에게는 복종할 영역들을 취사선택할 권리가 없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포괄적이고도 철저해야 함을 이야기하는 스토트는 그 생애를 통해서 비록 “발은 늘 뻘밭에 빠져” 있었지만(<생애> 19쪽) 그리스도의 급진적 제자란 무엇인지 드러내 주었다. 그는 평생 한결같이 최선과 충성을 주님께 바쳐 왔으며, 영국의 다수 그리스도인들이 잊기 쉬웠던 사회에 대한, 가난한 약자들에 대한, 환경에 대한, 제3세계 그리스도인에 대한 온전한 성경적 관심을(그래서 균형을) 강조하기 위해 애썼다. 존 스토트의 생애는 바로 한 급진적인 제자 이야기다.


1장 불순응
스토트는 <제자도> 1장에서 제자의 첫 번째 특성으로 ‘불순응’을 꼽는다. 기독교는 도피주의도 아니고 순응주의도 아니다. 기독교는 문화 속의 반문화라는 것이다. 기독교가 맞서야 할 현대의 풍조로 스토트가 지적하는 것은 다원주의, 물질주의, 윤리적 상대주의, 나르시시즘이다. 그 각각에 대한 반대로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옹호하는 진리의 공동체, 검소한 순례자의 공동체, 순종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생애>에는 스토트의 불순응 이야기가 여럿 나온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스토트는 자신의 성직자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생적 평화주의자로서, 군복무를 하라는 부모님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병역을 애써 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책에는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 속에서 참으로 쉽지 않은 선택이었는지가 잘 나온다. 한국 상류층의 이기적 병역기피와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그는 오른쪽으로는 로이드존스 목사의 복음주의 분파 설립에 대한 요구에 불응하고, 왼쪽으로는 자유주의자들의 각종 비판에 맞서 역사적 성경적 신앙을 충실히 방어했다. 빌리 그레이엄이 로잔 기구의 ‘최고 대표’가 될 뻔했을 때, 스토트는 그레이엄과 직접 만나 그 일을 철회시키기도 했다. 스토트는 신앙 양심의 고집을 지닌 사람이었다. 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기 뜻을 굽힐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고자 하는 스토트의 고집을 <생애>는 잘 보여준다.


2장 닮음
스토트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물론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바로 그것이 평생의 순례 길 끝자락에서 자신이 도달한 결론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은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한 과정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을 때라야 복음 전도는 정말로 효력이 있을 것이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그것을 이루어가고 계신다.
닮는다는 이야기는 변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스토트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그가 십대 중반에 에릭 내쉬를 만나 회심하게 된 일 자체이겠지만, 그는 평생에 걸쳐 꾸준히 성경에 순종하고자 했고 다른 그리스도인의 말을 경청하며 자신을 기꺼이 변화시켰다. 예를 들어, <생애>에 보면 올소울즈 교회의 한 부제의 충고를 따라 현대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그 세계에 적실한 메시지를 설교로 전하기 위해서 회심 후 중단했던 연극과 영화 관람을 다시 시작하는 장면이 나온다. 스토트는 교회의 삶에, 즉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것과 교인들이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에 관심을 쏟았고, 이를 위해 ‘런던현대기독교연구소’를 세우기도 했다. 연구소 홈페이지에 가보면 그 연구소의 사역을 “세상 속에서 삶의 전 영역의 제자도를 위해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구비시킨다”고 설명한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구체적 성숙을 향한 그의 열심을 보여 준다.


3장 성숙
세계 전역의 경이로운 교회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깊이 없는 성장’이라는 준엄한 평가를 받는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선하고 참된 시각이 필요하고,
각자 그러한 놀라우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을 성숙시키는 것을
교회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스토트는 성숙의 핵심으로 우리가 어떤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지를 더 깊이 성찰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깊은 인식과 교제를 통해 스토트는 우리 시대 교회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발견했다.
그는 복음주의자의 확신을 지니고서 성경과 복음의 진리에 깊이 헌신하는 한편,
온전한 제자도를 주창하기 위해서 실천했다.
사실, ‘로잔 대회’라고 흔히 부르는 제1차 세계복음화국제대회에서 ‘복음 전도’라는 주제에다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대회임에도 불구하고 사회 참여와 복음 전도의 균형을
로잔 언약이라는 선언으로 이끌어낼 수 있었던 데는 스토트의 숨은 섬김이 컸다.
스토트는 로잔 언약을 입안했을 뿐 아니라,
대회 이후의 상임위원회에서의 끊임없는 회귀적 반발에도 불구하고
세계 교회의 성숙을 위해(본질적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기 위해)
로잔 언약의 기본 정신이 계속 유지되도록 고투한 이야기가 전기에 실려 있다.


4장 창조 세계를 돌봄
무시되고 있는 급진적인 제자도의 몇몇 측면 중 하나가 바로 창조된 환경을 돌보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자연이 신격화되어서도, 또 착취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된다.
사람은 자연의 책임 있는 청지기로서 자연을 돌보아야 한다.
그러한 돌봄을 통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표현되도록 해야 한다.
급격한 세계 인구 증가, 지구 자원의 고갈, 쓰레기 문제, 기후 변화 등은
지구의 심각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지표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선교의 성경적 개념에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을 시급하게 포함시켜야 한다.
스토트는 물론 성경적인 관점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강조했지만,
또한 그 자신이 무척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웨일즈에 있는 스토트의 휴식처 훅시스가 그에게 제공한 평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가장 두드러지게는 그의 ‘새 관찰’에서 이러한 점이 드러난다. 아버지에게 배운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은 이후 그가 탐조를 취미로 가지면서 더욱 개발된다. 스토트는 전 세계 곳곳에서 사역을 펼치는 동안에도 새를 관찰하는 시간을 꼭 가졌고, 한곳에 처박혀 연구와 집필에 몰두할 때에도 책상 위에는 새를 바라보기 위한 쌍안경이 꼭 놓여 있었다. 그가 여든 살 때 거의 죽음에 다다른 적이 있었는데, 그 발단은 인도를 방문한 스토트가 ‘목 주변이 파란 물총새’를 발견하고 뒤쫓다가 경계석에 부딪혀 강둑에 나동그라진 것 때문이었다(새를 쫓아 뛰어가는 여든 살 할아버지의 열정을 떠올려 보라!). 그는 자연을 하나님의 창조 세계로 깊이 사랑하고 책임감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5장 단순한 삶
‘단순한 삶에 대한 복음주의 언약’이 발표된 적이 있다.
로잔 언약에 표현된 “단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결의를 좀더 깊이 살펴보기 위해 모인 대회에서 발표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가치관과 기준과 삶의 모습을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가 되어야 하고,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도 세계의 굶주린 자들에 대해 인식하며 반응해야 한다.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한 국제적인 개발이 필요하고, 정의와 정치 영역도 불의한 상황을 바꾸기 위한 중요한 영역인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 전도라는 증인의 사역과 단순한 삶이 깊이 연결된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이 재림하실 때 가장 작은 자를 섬김으로써 주님을 섬긴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생애>의 추천사를 보면 스토트의 단순한 삶을 보여 주는 그의 허름한 하늘색 양복 이야기가 여러 번 나온다. 개인적으로 나도 1993년 원주에서 열린 IVF 전국수련회에 참석해서 그 양복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확인한 적이 있다. 그의 투명한 피부처럼 얇은, 닳고 닳은 양복이었다. 스토트는 자신이 사역하는 지역과 전 세계의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항상 기억하며 살았다. 그가 올소울즈 교회에서 부제로 일하고 있을 때에는 가난한 노숙자들의 생활을 직접 겪어 보기 위해서 노숙자로 변장하고 길거리에서 잠도 자고 구호소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다. <제자도>의 저작권료는 랭햄문서사역에 기부되는데, <생애>를 보면 가난한 나라에서 기독교 도서를 출간하기 위해 일하는 그 단체의 출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세계 각국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랭햄 장학금에 대해서도 나온다. <제자도>뿐 아니라 존 스토트 저서의 인세 대부분이 그렇게 사용된다.


6장 균형
교회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스토트는 베드로전서에 나오는 교회와 관련된 구절들을 살펴보면서,
교회는 개인적으로 성장하는 일과 교제하는 일에 균형을 잡아야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과 세상에서 증거하는 일에 균형을 이뤄야 하며,
이 땅의 거룩한 순례자이자 또한 시민인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누구인지 기억할 때 이러한 제자의 포괄적인 정체성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스토트는 그 무엇보다도 목회자와 설교자로서 교회를 섬긴 사람이었다.
<생애>의 중반부까지의 이야기들은 그가 목회자로 성장하고 또 교회를 말씀으로 온전히 섬기기 위해 애쓰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교구의 각 집들을 방문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교인을 돌보았고 특히 소외받기 쉬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친절히 대했다. 스토트가 머물 곳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자기 방을 내주었던 일은 흔한 일이었다고 <생애>는 밝힌다. 스토트는 교인을 사랑했고, 교회를 사랑했다. 균형 잡힌 교회, 성숙한 교회에 대한 그의 열망은 그가 오랫동안 섬긴 올소울즈 교회 이야기를 통해서, 그리고 그가 동료 목회자들에게 권면한 내용을 통해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7장 의존
스토트는 자신이 다쳐서 병원에 가고 다른 사람을 의존하게 된 체험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의존하는 자들이고 특히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그런 연약한 자임을 기억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하는데,
바로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겸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의존은 자립으로 균형을 이루어야 하지만,
예수님이 성육신으로 의존의 모습을 보여 주셨듯이 의존은 제자 영성의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짐이 되도록 설계되었다.”
<제자도>의 백미는 어쩌면 이 ‘의존’이라는 장과 다음의 ‘죽음’이라는 장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이 시점에 이르러서 더욱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스토트는 영국인으로 자랐고 영국인으로 살았다.
중년 이후로 그가 지닌 권위 때문에 사람들이 스스로 어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생애>에 나온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살았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위해 쉴 새 없이 수고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섬김받음에 대해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생애>에는 55년간 스토트의 비서로 일한 프랜시스 화이트헤드 여사와
또 그의 여러 연구 비서들로부터 도움받은 이야기들이 나온다.
결국은 연약함이 우리의 특징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우리의 중요한 지점임을 스토트는 이야기한다.


8장 죽음
스토트는 급진적인 제자의 마지막 특징은 죽음이라고 말한다.
성경이 약속하는 생명은 죽음을 통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는 우리에게 주어진 과소평가할 수 없는 생명의 영광이 담겨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죽음이 우리를 생명으로 안내하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죄에 대해,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자아에 대해, 타문화권 선교를 통해 야망에 대해, 박해와 순교를 경험하며
안전에 대해,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을 준비하며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죽음의 과정이고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이들”이다.


<생애>를 읽고 나서 <제자도>를 읽으면, 마치 <생애>의 바로 뒷부분을 읽는 느낌이 든다.
두 책 모두에서 스토트가 이제 주님의 품에 안길 것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제자도>의 ‘죽음’이라는 장은 스토트가 현재 어떤 관점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 있고,
또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스토트는 여러 차례 위험한 사건을 겪기도 했고(아마존 정글에서 길을 잃은 적도 있다!),
색전증으로 한쪽 눈 시력을 잃었고, 1999년 이후로는 몇 차례 건강이 악화되어 죽을 뻔하기도 했다.
책에는 스토트 부모님의 죽음, 누나의 죽음, 또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가깝고 확실한 죽음 앞에서 스토트는 신앙의 눈으로 죽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죽음 속에 있는 생명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그 복음주의자
어떤 사람들은 스토트가 너무 급진적이라고 비판하기도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스토트가 너무 보수적이라고 제쳐놓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생애>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복음주의자의 표준이 될 만한 사람 한 명을 발견한다.
물론 스토트는 자신을 이런 분류 기준이 되는 것을 꺼려할지 모르지만,
존 스토트보다 보수적인 사람을 우파 복음주의자라 하고
급진적인 사람을 좌파 복음주의자라고 하면 적절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스토트는 그의 사상과 발언을 통해서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기준을 제시한다.
복음주의의 특징을 서술하는 방대하고 정교한 책 대신에,
존 스토트라는 인물로 복음주의의 기준을 세운다면
우리는 보다 풍성한 정의를 보다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한계 내에서 ‘복음주의’라는 지형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존 스토트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은 아주 유익한 문제 해결 방식이 될 것이다.
스토트는 그의 삶과 사역으로 우리에게 복음주의 신앙이 얼마나 성경적이고 풍성하고
(가슴 뛰는) 모험에 찬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올해 10월 16~25일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는 제3차 로잔 대회가 열린다.
그곳에 모일 세계의 복음주의자들은 어떻게 자기를 규명하고 어떻게 우리 시대의 과제를 설정할지 궁금해진다(이번에는 크리스토퍼 라이트가 선언의 초안을 잡고 있다고 한다).
아마 스토트는 지금도 그 대회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며 남은 힘을 쏟고 계실 것이다.
그가 수많은 책들뿐 아니라 삶으로도 우리에게 도전과 격려가 되어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우리의 사랑하는 ‘엉클 존’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길 바란다.

출처 : 서소문 선교와 교육
글쓴이 : sain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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