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설교 작성법
장두만 목사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교수)
본문의 선택, 중심 내용의 파악, 본문의 연구 등이 끝나면, 청중의 필요를 발견하고 그에 맞는 설교의 목적을 결정해야 한다.
A. 청중 분석
설교학자나 스피치 학자가 흔히 사용하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수수께끼가 하나 있다. "만일 숲 속에서 나무가 큰 소리를 내면서 쓰러질 경우 아무도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 나무는 소리를 낸 것인가, 안 낸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소리는 오직 귀에 들릴 때에만 소리이고 그 전까지는 오직 '소리의 가능성'(potential sound)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51)
설교는 산천초목을 대상으로 외치는 것도 아니고, 허공을 향해 부르짖는 것도 아니다. 아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설교는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하고 말 것이다. 설교는 특정한 장소에 특정한 목적을 위해 모인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설교자가 그의 청중과 그들의 필요를 더 잘 알면 알수록, 그의 설교는 청중에게 더 잘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자가 흔히 이 면을 간과(看過)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면을 데이비스(Ken Davis)가 잘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흔히 설교를 잘 하는 데에만 너무 집중한 나머지 커뮤니케이션의 나머지 절반 팀, 즉 청중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다. 그들이 없이는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다. (설교에 성공적이기 위해서) 설교자는 청중을 움직여야 한다.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그들이 많이 연관되면 될수록 청중은 설교에 더 민감할 것이고 그만큼 그들이 들은 것을 더 오래 기억할 것이다. 52)
그렇기 때문에 설교에 있어서 청중을 제대로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하겠다. 필자가 달라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교수들로부터 귀가 아프게 들은 말 중의 하나는 "본문을 석의하기 전에 청중을 석의하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본문 석의가 먼저냐, 청중 분석이 먼저냐를 말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본문 석의 못지 않게 청중 분석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청중 분석의 중요성에 관해서 플루하티와 로스(George W. Fluharty and Harold R. Ross)는 이렇게 갈파한다:
청중 분석을 정확히 한다는 것은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설가는 그 일을 시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분석 없이 연설을 한다는 것은 진단도 없이 약을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환자라는 환자에게는 모조리 아스피린을 처방해 주는 의사가 과연 성공적일 수 있겠는가? 청중에 대한 지식 없이 연설하는 연설자가 성공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에 불과할 것이다. 53)
어떤 요소는 모든 청중에게 공통적으로 다 해당되지만, 어떤 요소는 청중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의 설교를 듣는 청중이 여타의 청중과는 어떤 다른 특성이 있는지 잘 알아야만 된다. 그래서 길먼(Wilbur E. Gilman)과 앨라이(Bower Aly)와 라이드(Loren Reid)는 그들의 공저(共著)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중을 분석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이중적인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정도로 그들이 서로 유사하며 어느 정도로 서로 다른지를 발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54) 담임 목회를 할 경우에는 설교자가 그의 청중을 대체로 잘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특별히 외부의 어떤 모임에 초청 받을 경우에는 특히 신경을 써야 한다.
설교자가 설교 초청을 받을 경우 어떤 때에는 초청자가 설교자에게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설교자가 그의 설교를 들을 청중에 관해서 자세히 물어서 가능하면 많은 정보를 얻도록 해야 할 것이다.
설교자가 분석해야 할 부분은 크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다.
(1) 외적 요인
외적 요인(external factors)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우(occasion)이다. 다시 말하면, 어느 교회의 창립 예배인지, 창립 몇 주년 기념 예배인지, 누구의 결혼식 설교인지, 장례식 설교인지, 어떤 성도의 개업 예배인지, 아기의 돌잔치인지, 누구의 회갑연인지 등을 잘 알아야 그 경우에 맞는 설교를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쉬운 예로, 회갑연에서 할 설교를 아기의 돌잔치에서 한다면 그것은 엄청난 희극이 되고 말 것이다.
청중의 규모(size)도 고려해야 될 외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5-6명이 모이는 집회인지, 20-30명이 모이는지, 아니면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이 모이는지에 따라서 음성의 크기나 몸의 움직임, 손의 움직임 등이 달라야 할 것이다.
집회의 장소나 분위기 등도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외적 요인에 속한다. 장소가 옥외인지 옥내인지, 분위기가 아늑한지 소란한지 등도 알아두어서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내적 요인
내적 요인(internal factors)은 외적 요인보다 더 중요한데, 청중 분석시 고려해야 될 내적 요인으로서는 우선 청중의 연령층을 들 수 있다. 청중이 중·고등 학생인지, 청년인지, 장년인지, 노년인지 등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노인 대학 같은 데 초청을 받았는데 거기서 중·고등학생들에게나 알맞는 설교를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청중의 성별도 고려해야 될 내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여자대학교에서 설교하는지, 아니면 남자들만의 모임에서 하는지, 남녀 혼성의 모임인지 등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청중의 사회적 신분이나 지적 능력, 교육 정도 등도 고려해야 될 중요한 내적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청중이 중상류 층인지, 중하류 층인지, 시골 사람들인지, 대학생들인지, 목사나 전도사의 모임인지, 국회의원이나 어느 특정 그룹의 회원의 모임인지, 전반적인 지적 수준이나 교육 수준이 아주 낮은지, 보통인지, 아주 높은지, 아니면 뒤섞여 있는지 등을 사전에 자세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어떤 설교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다 할 수 있지만, 어떤 설교는 그렇지 못하다. 빈민촌에서나 적합한 설교를 부촌(富村)에 가서 한다면 청중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청중들의 신앙 상태도 반드시 고려해야 될 내적 요인 가운데 하나이다. 청중의 대부분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대부분이 불신자인지 알아야 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청중 분석을 제대로 못해 크게 당황한 적이 한 번 있었다. 어떤 목사님으로부터 자기 교회에서 이틀 동안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집회를 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필자가 이해하기로는 그 교회에 늘 출석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해서 말씀을 증거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날 집회를 위해서 그 교회에 가보니 '중·고등학생 전도집회'라는 현수막이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적잖게 당황했다. 전도집회라니? 아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필자는 신자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생각하고 그에 맞는 설교를 준비했고, 설교 원고도 딱 하나만 가지고 왔는데 불신 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도 집회라니!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곰곰히 생각했지만 결론을 쉬이 내리지 못하고 강단에 올라갔다. 약 300명의 학생들이 모였는데, 사회자가 처음 나온 학생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나 약 200명이 손을 들었다. 청중의 2/3가 불신자인데 그래도 신자를 위해서 준비한 설교를 그대로 해야만 되는가? 그 경우 약 200명은 설교와는 별 상관이 없어지고 말고,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설교를 바꿀 수도 없고 하니 참으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하고 기도해 봐도 필자가 준비해 온 설교를 그대로 해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얻고는 강단에 앉아서 설교를 하나 만들기로 했다. 필자가 과거에 해본 적이 있는 설교 가운데 전도 집회에 적합한 것을 하나 생각해서 대충 원고 구상을 하고는 온전히 주님께 맡겼다. 그 때만큼 절박하게 주님을 의지했던 경우는 그 이후에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게을러서 설교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설교 정리를 한 후 성령님께 온전히 의뢰했더니, 그 다음날 제대로 준비해 간 설교보다 주님께서 더 축복해 주셨고, 예수 믿겠다고 손을 든 학생도 그 다음 날보다 더 많았던 것을 본 적이 있다. 참으로 좋은 경험이었지만 진땀 나는 경험이기도 했다.
청중을 분석하는 동안에 설교자는 한 가지 질문을 그의 마음 속에 간직한 채 분석해야 한다. 즉, "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 필요가 직접적으로 표면에 잘 드러나 있어 청중이 그들의 필요를 잘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필요는 청중이 구체적으로나 직접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잠재적인 것일 수도 있다. 설교자는 표면에 드러난 필요는 물론 잠재적 필요까지도 발견해서 그것을 채워 주어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청중의 필요(need)와 청중의 욕구(want)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양자가 다 일치한다면 별 문제가 안되겠지만, 양자가 다를 경우에는 어떠해야 하는가? 그런 경우에는 청중의 욕구 중심이 아니라 필요 중심이라야 된다. 청중의 욕구에만 영합한다면 삯군이 되고 말 것이다. 비록 청중이 듣기 원치 않는 것이라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담대하게 전해야 한다. 예를 들면, 죄나 회개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전혀 없을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한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청중의 기호(嗜好)에 영합하지 말고 전해야 할 것이다.
B. 설교 목적의 결정
청중을 분석해 그들의 필요를 발견한 후 또는 그와 동시에 설교 목적을 정해야 한다.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같은 동전의 표리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설교의 목적이란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설교의 결과로 청중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변화라고 할 수 있겠다. 55) 리차드(Ramesh Richard)에 의하면, 설교 목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짐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했다. 즉, "본문의 중심 내용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청중이 무엇을 이해하고 무엇을 순종하기 원하시나? " 56)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가 청중의 필요(need)를 제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지 아닌지에 관해서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야만 된다. 청중의 필요와 설교의 목적이 괴리될 때 그 설교는 허공을 치게 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목적은 본문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 청중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 본문을 왜곡시켜서도 안되고 본문에 없는 것을 억지로 갖다 붙여도 되지 않는다. 설교의 목적은 본문의 가르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 나와야 된다.
설교에 있어서 확실한 목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목적이 없는 설교는 설교할 만한 가치가 없다. 리차드는 분명한 설교 목적의 필요성을 여섯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그것은 설교 서론의 초점을 분명하게 해준다.
2. 그것은 설교 본론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제외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게 한다.
3. 그것은 설교의 결론과 적용에 영향을 미친다.
4. 그것은 예화 선택에 도움을 준다.
5. 그것은 설교의 성공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방법을 제공한다.
6.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의 목적이 분명할 경우 중심 주제가 어떤 형태를 취해야 할지를 알게 해 준다.57)
목적이 없는 설교는 비유컨대 목적이 없는 운동 경기와 같다고 할 수 있다.58) 예를 들어, 축구 경기를 한 번 보자. 두 팀이 시합을 한다면 거기에는 패스(pass)도 있고, 드로우 인(throw in)도 있고, 프리 킥(free kick)도 있고, 코너 킥(corner kick)도 있다. 갖가지 활동과 묘기가 백출하겠지만, 왜 그렇게 하는가? 목적은 단 한 가지, 즉 상대방 팀보다 득점을 많이 해서 시합에 이기는 것밖에는 없다. 이러한 확고한 목적이 없이 시합한다면 그것은 연습에 불과하다.
그러면 설교자는 왜 설교하는가? 설교의 목적에는 일반적인 목적과 특정한 목적이 있는데, 일반적인 목적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으며, 일반적인 목적 내에 많은 특정한 목적이 포함된다.
(1) 설명
이것은 일반적인 성경의 어떤 교리나 가르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하기 위한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설교 목적이라 할 수 있겠다.
일반 연설의 경우에는 어떤 사실의 설명이나 정보(information) 제공을 위한 연설이 상당히 많이 있겠지만 설교의 경우에는 순전히 설명이나, 정보 제공의 목적만으로 설교하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2) 설득
이것은 설명의 단계에서 진일보(進一步)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성경의 어떤 교리나 가르침을 사실(또는 진리)로 받아들여 믿게 하려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설교 목적이라 하겠다.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진리로 받아들여 믿게 한다든지,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었음을 믿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다 설득을 목적으로 하는 설교라고 하겠다.
(3) 행동 촉구
이것은 설득의 단계에서 진일보하여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자가 기대한 어떤 목적에로 향해 행동하게 하려는 경우에 있을 수 있는 설교 목적이라 하겠다. 어떤 목표를 향해 청중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 예비 단계로서 설명(또는 정보 제공)과 설득이 필요하겠지만, 행동 촉구를 목적으로 하는 설교는 설명이나 설득으로 끝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는 설교이다.
예를 들면, 청중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게 한다든지, 주의 종이 되도록 헌신하게 한다든지, 십일조를 하지 않던 성도로 하여금 십일조를 하도록 하는 경우에 가능할 것이다.
설교의 목적 결정은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용이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상당히 고심한 결과로 나올 수 있음을 알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본문의 경우에는 본문의 중심 내용을 바르게 파악하면 별로 힘들이지 않고 설교의 목적을 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문의 중심 내용을 아무리 잘 파악해도 목적 결정이 그리 쉽지 않을 경우도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자. 가령, 베드로전서 3:1-6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한다면 본문의 중심 내용은 "아내의 순종은 내적인 아름다움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로 나타난다"라고 할 수 있겠고, 설교의 목적도 이와 유사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경우 설교의 목적은 "아내들로 하여금 마음으로부터 남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 라든지 이와 유사하게 정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야고보서 3:13-18을 본문으로 할 경우, 중심 내용은 "위로부터의 지혜는 풍성한 영적인 열매로 나타난다"라고 할 수 있겠고,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위로부터 지혜를 추구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두 가지 경우는 본문의 중심 내용을 찾는 일이나, 설교의 목적을 정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게 보인다. 그러나 만일 본문을 마가복음 16:1-4로 한다면, 중심 내용을 파악하기도 힘들고, 설교의 목적을 정하기는 더 힘들 것 같이 보인다.59)
먼저 중심 내용을 찾아보도록 하자. 우선 본문을 읽어보면,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 앞에 있는 돌을 어떻게 해야 굴러버리고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를까 하고 염려하면서 와 보니 돌은 이미 굴려지고 없음을 발견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큰 어려움 없이 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중심 내용이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고, 더구나 이런 본문으로는 어떤 목적의 설교를 성도들에게 할 수 있을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먼저 본문의 주제부터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선 쉽게 떠오르는 주제는 '예수님의 무덤에 온 여인들' 또는 '예수님께 향유를 바르려고 온 여인들' 같은 식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다소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냥 '여인들'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의 상태인 것 같이 보인다. 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그들의 마음은 염려 때문에 무겁기만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를 '예수님의 무덤에 온 여인들의 염려'라고 정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그러면 이 주제에 대한 술어는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이 여인들이 무덤에 왔을 때 무거운 돌은 이미 굴려져 버리고 없었고 그들의 염려는 완전히 기우에 불과했음을 발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술어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되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그래서 중심 내용은 "예수님의 무덤을 찾던 여인들의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불필요하게 되어 버렸다"는 식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보편성이 없고, 과거 시제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던 여인들의 염려'는 '우리의 염려'나 '그리스도인의 염려'라고 바꾸어서 표현해야 될 것이고, 또 술어에 나타난 과거 시제는 현재 시제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중심 내용은 "우리(또는 그리스도인)의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극복된다"든지 "우리의 염려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는 불필요하게 된다"는 식으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이쯤 하면 설교의 목적을 정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설교의 목적을 무엇이라고 정해야 할는지 참으로 난감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제 중심 내용을 파악하고 나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하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설교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염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든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염려하는 대신에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로 정하면 크게 틀림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골로새서 1:15-18을 본문으로 할 경우를 한 번 보도록 하자.60) 본문의 중심 내용은, "예수께서 만물보다 위에 계신 이유는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 피조물과의 관계, 교회와의 관계 때문이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면 설교의 목적은 무엇이라고 정해야 할까? 만일 "예수께서 만물보다 더 우월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청중의 필요와는 별 관계가 없어지고, 따라서 아무런 흥미나 관심이 없는 설교가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본문의 가르침과 동떨어져서도 안 되지만, 청중의 필요와 괴리되어서도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만물보다 더 우월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는 설교 목적은 적합하지가 못하다. 사실 조금만 더 묵상을 하면 아주 적절한 목적을 발견해 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만물보다 더 우월하시다면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 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우월한 자리를 차지해야 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의 목적도 이러한 방향으로 정해야 할 것이다. 즉, "성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활의 모든 면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설교의 목적은 본문의 가르침과도 조화를 이루고 청중의 필요에도 부응할 수 있게 될 것이다.
Ⅴ. 본론의 전개 방법 결정
단일한 사고 단위를 가진 본문을 선택해 그 중심 내용을 파악하고 본문의 각 부분을 깊이 연구해 청중의 필요에 부응하는 설교의 목적을 정했으면 이제는 본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까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될 단계이다. 여기서는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취급하고자 한다. 한 가지는 석의적 대지와 설교적 대지는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한 가지는 본문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방식에 관한 것이다.
A. 설교적 대지와 석의적 대지
많은 설교자들이 석의적 대지(exegetical outline)와 설교적 대지(homiletical outline)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설교를 하는지 석의를 하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非一非再)한 것이 한국 교계와 한국 목사들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석의(exegesis)와 강해(exposition)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데 기인하는 것 같다.
설교자가 강해 설교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석의를 해야 한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본서 제3장 제3절('본문 연구')에서 자세히 취급했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석의에서 설교로 넘어가는 과정이 제3장에서는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취급하고자 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석의(釋義)는 주어진 본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주안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과거 지향적이고, 따라서 보편성이 없다. 어떤 설교자들은 석의의 결과만 가지고 그대로 설교를 하는데, 때때로 석의 결과만 가지고도 설교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석의적 대지와 설교적 대지가 사실상 동일한 경우에는 그렇게 해도 별문제가 안될 것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런 설교는 바람직하지 않다. 본문 석의의 결과만 가지고는 주석을 만드는 데는 충분하겠지만 설교로는 부족하다. 석의의 결과를 설교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하고 석의만으로 설교하려는 설교자는 효과적인 설교자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석의의 결과를 그대로 사용한 석의적 대지와 석의를 설교화한 설교적 대지는 어떻게 다른가? 양자간의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은 설교의 대지를 만들 때에는 물론 중심 내용의 표현이나 적용 등에 모두 필요하다. 이를 도표로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이제 두 대지를 구체적으로 비교해 보도록 하자. 61)
석의적 대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둑질하는 것을 금하셨다.
설교적 대지: 하나님은 도둑질을 금하신다.
위의 두 대지에서 전자는 과거 지향적이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후자는 보편적이고 , 따라서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다음의 예를 보자.
석의적 대지: 바울 사도는 교회에서 여자들이 남자들의 지도력에 복종해야 한다고 가르 쳤다.
설교적 대지: 여자들은 교회에서 남자들의 지도력에 복종해야 한다.
이제 창세기 4:1-15을 중심으로 하여 석의적 대지와 설교적 대지를 비교해 보도록 하자. 62)
먼저 본문의 석의적 대지를 구성해 보도록 하자.
I.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열납이 안 되고 아벨의 제사만 열납된 것을 보고 분노했다 (vv.1-7).
A. 아담과 이브의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각각 다른 직업을 가졌다(vv.1-2).
1. 이브는 두 아들의 출생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했다(vv.1-2a).
2. 가인과 아벨은 농부와 목동이 되었다(v.2b).
B. 아벨의 제물은 열납되고 가인의 제물은 거절되었다(vv.3-7).
1. 가인은 농산물을 제사로 드렸다(v.3).
2. 아벨은 양의 첫 새끼로 제사 드렸고 그것은 열납되었다(v.4).
3.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거절되는 것을 보고 오히려 분노했다(vv.5-7).
II. 가인은 자신의 제물이 거절되자 그 동생을 죽이고 말았다(vv.8-9).
A. 그들이 들에 있을 때 가인은 아벨을 살해했다(v.8).
B.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책임을 묻자 가인은 회피했다(v. 9).
III. 살인은 가인에게 징계를 가져왔고, 가인은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vv.10-15).
A. 하나님은 비옥한 땅으로부터 가인을 추방하셨다(vv.10-12).
B. 가인은 형벌이 너무 심하다고 하나님께 항변했다(vv. 13-14).
C. 하나님은 가인의 보호를 약속하셨다(v.15).
이제 위에서 예로 든 창세기 4:1-15을 본문으로 해서 설교적 대지를 한 번 구성해 보도록 하자.
위의 석의적 대지에서는 전체 주제가 무엇인지 언급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본문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해 보면 아벨의 신앙에 대비된 가인의 불신앙이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가인에게 초점을 맞춘다면 본문의 주제는 불신앙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본문의 주제를 "불신앙의 비극"이라고 하고 싶다(이 주제는 설교 제목으로 그대로 사용해도 좋음).
이제 "불신앙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설교적 대지를 구성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본문: 창세기 4:1-15
제목: 불신앙의 비극
중심내용: 불신앙은 비극을 초래한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불신앙의 자세를 버리고 바른 신앙적 자세를 갖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많이 있지만 서로 믿지 못하는 것만큼 불행한 일도 없을 것이다.
2.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없다(예: 버스 탈 때)
I. 불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vv.1-7).
A. 아담의 두 아들은 각각 다른 길을 갔다.
1. 아담과 이브 사이에 가인과 아벨이 태어났다.
2. 이들이 성장해서 가인은 농부의 길을, 아벨은 목동의 길을 갔다.
3. 때가 되어 둘 다 제사를 드렸다.
① 가인의 제사는 거절되었다.
② 아벨의 제사는 열납되었다.
B. 그러면 가인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나?
우선 그것은 제물이 농산물이냐 짐승의 고기냐 하는 문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 가인의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1. 가인은 가장 좋은 것을 드리지 않았다.
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양의 첫 새끼가 가장 소중하다는 생각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cf. 잠 3:9,10; 출 13:2,12).
② 그러나 가인의 제물에 관해서는 그런 언급이 없다.
가인은 그냥 의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만족했음을 알 수 있다.
③ 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는가?
내게 있는 가장 좋은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가, 아니면 의무감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가?
2. 가인의 또 다른 문제는 믿음이 없이 드렸다는 것이다.
① 히브리서 11:4에 의하면,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다. 그러니까 가인은 믿음이 없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하나님은 믿음이 없는 제사, 마음의 자세가 바로 안된 형식만의 것을 가증히 여기신다(cf. 사 1:10-14).
③ 요즈음 말로 하면, 교회에 출석도 하고, 찬송도 하고,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외형은 진짜와 비슷하지만 마음의 자세가 바로 안 되어있다는 말이다.
④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멀리 가 있는 것이다.
⑤ 이게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닌가? 이왕 예수를 믿을 바에야, 이왕 예배를 드릴 바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자세로 해야 할 것이 아닌가?
3. 가인의 마지막 한 가지 문제는 회개가 없었다는 사실이다(vv.5-7).
① 그는 자신의 제물이 거절되자 화를 내었다. 이것은 화를 낼 문제가 아니라 회개할 문제다. 자신의 제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다.
② 사실 하나님은 가인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vv. 6-7)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분노하느냐?"
"죄가 사나운 짐승같이 문에서 너를 기다린다. 더 큰 죄에 빠지지 않 기 위해서 돌이키라" 그러나 그는 회개하지 않았다.
③ 회개 없이는 참 신앙 없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 하면서 참 회개를 해 본 적이 없는 사람 많다. 그런 믿음은 올바른 믿음이 아니다.
II. 불신앙은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vv.8-15)
A. 그것은 살인을 가져왔다(vv.8-9)
1. 불신앙을 회개하지 않을 때, 그것을 계속 마음에 간직할 때, 무서운 죄를 가져왔다.
2. 자신의 친동생까지도 죽이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3. 그리고서도 양심의 가책도 없이 뻔뻔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v. 9).
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거짓말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② 오히려 하나님에게 도전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B. 그것은 무서운 저주를 자초했다(vv.10-15).
1. 죄를 감추려 하고 하나님을 속이려 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었다(v.10).
2. 그는 비옥한 땅에서 추방당해야 했고, 늘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살 수 밖에 없었다 (vv. 11-14).
3. 하나님의 보호로 생명은 가지고 있었지만 불안과 초조 가운데 매 순간을 살 수밖에 없는 불쌍한 인생이 되었다 (v.15).
C.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다.
1. 불신앙은 또 다른 불신앙을 낳고, 죄는 더 큰 죄를 낳는다.
① 죄의 바퀴 속에 한번 깔리기 시작하면 빠져 나오기 어렵다.
② 비극적인 결말을 보고서야 끝이 날 수 있다(예, 도박).
2. 그 뿐만이 아니라 죄는 우리의 마음에 쉼이 없게 한다.
① 끊임없이 도망하며, 끊임없이 방황하게 한다(cf. 마 11:28-30).
②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우리에게는 참된 안식이 없다.
* 설교적 대지에서는 석의적 대지에 나타난 II, III을 하나로 합쳤다. 그 이유는 양자의 성격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설교적 대지를 만들 때 연관성이 있으면 하나로 묶는 것이 설교하기에 좋다.
B. 구성의 방식
본론을 전개하는 방식은 본문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굉장히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모든 방식을 다 취급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중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고찰해 보도록 하겠다.
(1) 대조형
이 구성법은 본문의 구조가 허락하면 어떤 종류의 장르(genre)에도 다 사용할 수 있는 구성법이다. 이 경우는 대개 설교가 2대지로 구성된다. 1대지에서는 부정적인 측면을, 2대지에서는 긍정적인 측면을 다루는 방식이 될 수도 있고, 1대지에서는 나쁜 면을, 2대지에서는 좋은 면을 다루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63)
야고보서 2:14-26을 예로 들어보자. 야고보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는 책이다. 참된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올바른 행실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 야고보서 전체의 큰 흐름이다. 그러면 본문은 어떤가? 본문은 참된 믿음을 강조하는가, 아니면 행함을 강조하는가? 본문 14절, 17절, 18절, 20절, 22절, 26절 등에 주목해 보면 본문이 가르치려는 바는 산 믿음 또는 온전한 믿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산 믿음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것은 바로 행함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본문의 중심 내용은 "산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 "온전한 믿음은 행함과 병행한다"와 같이 표현하면 될 것이다.
이제 본문의 설교 아웃라인을 한 번 구성해 보자.
본문: 야고보서 2:14-26
제목: 살아있는 믿음
중심내용: 산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난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믿음에 상응하는 행함이 있게 하기 위해
서론
1. 우리 시대는 말의 홍수 시대다.
2. 그래서 말로 전도하고, 말로 신앙적 영향을 미치기는 굉장히 어렵다.
3. 말도 좋지만, 그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행동이 동시에 필요하다.
I. 믿음에는 죽은 믿음이 있다(vv.14-19).
A. 말만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vv.14-17).
1. 말은 돈 들이지 않고 생색낼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2. 나는 어떤 형제나 자매를 위해서 단돈 1,000원 한 장도 쓸 의사가 없으면 서 말만 번지르르 하게 늘어놓는 사람들이 많다.
3. 이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4. 요일 3:17-18
5. 오늘 나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 아닌가?
B. 지식만의 믿음은 죽은 것이다(vv.18-19).
1. 귀신-- 천사장 루시퍼와 함께 타락한 천사들로서, 사탄의 졸개들이다.
2.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귀신을 많이 쫓아내셨다.
① 귀신도 하나님 살아계심을 안다.
② 귀신도 지옥이 있음을 안다.
③ 귀신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안다.
3. 그러나 귀신은 구원받지 못한다.
4. 지식만 가지고는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5. 나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II. 믿음에는 산 믿음이 있다(vv. 20-26)
A. 그것은 행함이 따르는 믿음이다.
B. 두 가지 예
1. 아브라함: 그의 믿음은 한 마디로 말하면 희생적인 믿음이다. 독자까지도 드릴 수 있는 믿음이다.
2. 라합: 듣기만 하고서도 믿고 행하는 믿음이다.
C. 오늘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하다.
(2) 설명형
성경의 중요 교리나 진리를 청중에게 이해시키려 할 때 설명의 방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각 대지는 단계적으로 중심 내용을 설명해 나가게 된다. 이 방식은 주로 교훈 문학을 본문으로 택할 경우에 주로 쓸 수 있는 방법이다.
본문을 마태복음 6:1-4로 해서 한 번 생각해 보자. 본문의 주제가 '구제'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중심 내용은 "올바른 구제는 은밀한 중에 해야 한다"로 잡으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제 이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 구성을 한 번 해보자.
본문: 마태복음 6:1-4
제목: 왼손도 모르게
중심내용: 올바른 구제는 은밀한 중에 해야 한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동기와 방법으로 남을 도울 수 있게 하기 위해
서론
1.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광경 가운데 하나는 구세군의 자선 냄비이다.
2. 이렇게 모아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3. 우리 주위에는 구세군의 자선 냄비같이 기독교의 간판을 내걸고 행해지는 선행이나 구제 사업도 있고, 기독교와 상관없는 것도 있다.
4. 그러면 기독교의 간판을 내걸고 어떤 단체나 개인이 선행을 하면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냐?
5.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행은 어떤 것이냐?
I. 선행은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서 해야 한다(vv. 1-2).
A. 먼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의'(=선행)를 행해야 한다.
1. 그리스도인은 개인적으로든 교회적으로든 선을 행하며 남을 도우며 살아 야 한다. 약 4:17 "---선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다."
2. 오늘날 교회가 잘못 되어서 교회에서 성도간에 돕는 것이나 남을 돕는 것 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수백 억을 들여 으리으리한 예배당을 짓고, 이태리제 대리석으로 장식하고, 수십 억씩 하는 오르간을 갖다 놓고 하면서 남을 돕는 일에는 인색한 경우가 많다.
3. 초대 교회는 그렇지 않았다.
4. 우리 교회도 그래야 된다.
① 교회 내에서 성도간에 돕는 일-조금은 되고 있다. 지목 헌금을 통해서 어려운 형제 자매 돕는 것은 참 좋다. 서로 간에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일은 정말 좋은 일이다.
② 교회 밖을 향한 우리의 손길은 아직 너무 약하다. 교회 헌금의 50% 이상을 교회 밖을 위해 쓸 수 있게 기도하자. (우리는 반드시 선을 행해야 한다.)
B. 선행을 하되 하나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해야 한다.
1. 선행의 초점은 결국 누구를 기쁘게 하느냐 하는 것이다.
① 하나님이냐, 자신이냐?
② 다른 말로 하면, 선을 행하는 동기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과도 중시하지만 동기도 중시하신다.
2. 선을 행하면서 나팔 불고 광고하고 떠벌이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리새적인 선행이다. (예) 행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
3. 우리는 바른 동기로 하나님만 기쁘게 하기 위해서 선을 행해야 된다.
4. 그렇지 않으면 이미 상 다 받았다. 사람의 칭찬 받기 위해 떠벌이고 나팔 부는 자는 '외식자'이다. '외식자'( )-가면을 쓰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 행세하는 배우를 가리키는 단어다. 자신은 슬프지 않은데도 대본 때문에 울어야 한다. 자신은 기쁘지 않은데도 대본 때문에 웃어야 한다. 자신은 착하지 않은데도 대본 때문에 착한 척 해야 한다. 외식자의 선행을 해서는 안 된다. 잘못된 동기로 해서는 안 된다.
II. 선행은 은밀하게 행해야 한다( vv. 3-4).
A. 그것은 나 자신에게도 숨겨져야 한다.
1. 나팔을 불거나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2.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선전하지 말아야 한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①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② 주님께서 의도하신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하고 완전히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③ 어떤 형제에게 신발을 사주고, 어떤 자매에게 고기를 사주고, 어떤 자 매에게 쌀을 사주고 했을 때 수첩에 적고, 일기장에 적고, 머리 속에 새겨서 늘 자신을 과시하고 그것 통해 기쁨을 얻어서는 안 된다.
④ 분명히 기억하자: 내가 기록 안 해야 하나님이 기록하신다. (구제는 자기 자신에게도 숨겨져야 할 뿐만 아니라)
B. 그것은 은밀하게 행해져야 한다.
1. 선을 행하되 근본적인 동기가 올바르면 은밀히 할 수 있다.
2. 사람이 인정해주든 안 해주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하면 은밀하 게 할 수 있다.
① 많은 사람이 목사의 칭찬 받기 위해 한다. 목사가 하나님 아니다. 목사 를 하나님 자리에 놓지 마라.
② 하나님의 칭찬을 구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선행이 드러나 사람에게 칭찬 받게 되면 오히려 화를 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상급을 빼앗기 때문에.
3. 우리 가운데는 은밀한 구제가 행해져야 한다.
① 교회 올 때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나 살펴 보라.
발가락이 나온 운동화 신고 오는 사람, 겨울인데도 여름 신발 신고 오 는 사람, 같은 옷을 주일마다 계속 입고 오는 사람, 모습이 초췌하고 파리하게 보이는 사람들 도움이 필요하다.
② 은밀한 구제를 통해 하나님 높이자.
(3) 문제 해결형
이 방식은 1대지에서 어떤 문제를 먼저 제시하고 그 다음 대지에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이 구성법은 '질의 응답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본문의 성격이 문제 제기와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내용이라면 본문의 문학 장르와 관계없이 어떤 본문에도 이 구성법이 사용될 수 있을 것이나 이런 성격의 본문이 그리 많지는 않다.
본문을 야고보서 4:1-12을 중심으로 해서 생각해 보자. 이 본문은 다른 방식으로도 구성이 되겠지만 문제 해결형으로 하면 좋을 것 같다.
본문: 야고보서 4:1-12
제목: 다툼을 종식시키려면
중심내용: 다툼을 종식시키려면 다툼의 원인과 해결책을 바로 알아야 한다.
설교목적: 성도들이 다툼 대신 서로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의 마음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큰 차이가 없다.
① 자녀가 한 명이면 문제 안 된다.
② 그러나 둘 이상이면 문제 생긴다.
서로 다투고, 사이좋게 안 지내면 보기 싫고, 속이 상한다.
서로 아껴주고 위해 주면 너무 사랑스럽고 예쁘게 보인다.
그래서 시133:1-"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교회도 마찬가지다.
① 우리는 육신적으로 모두 남남이다.
② 그러나 주안에서는 한 형제이다. -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형제요 자매다.
3. 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육신의 형제간에도 다툼이 있고 갈등이 있듯이, 영적인 형제 사이에도 그런 것이 있을 수 있다.
4. 왜 다툼이 생기나? 그리고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다툼을 종식시키려면" 이란 제목으로 상고하자.
I. 다툼의 원인은 무엇인가(vv. l-5)?
두 가지 원인 있다.
A. 개인적인 욕심 때문이다(vv. 1-3).
1. 욕심은 분쟁의 원인이 된다.
① 국가와 국가 사이에도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다툼이 생기고 여러 사람 을 불행하게 한다.
(예) 히틀러 - 한 사람의 욕심 때문에 온 세계가 전쟁에 휩싸였다.
김일성의 욕심 - 수백만 명 죽였다. 산초 초목이 초토화되었다. 전쟁의 고통은 지금도 남아 있다.
② 회사와 회사간에도 서로 일등을 하려는 욕심 때문에 다툼이 생긴다. 그래 서 산업 스파이가 활개친다
③ 개인과 개인간에도 욕심은 문제 일으킨다.
(예) 과외 - 내 아이만 잘되게 하겠다는 욕심 때문에 국가 전체가 흔들린다.
공교육비보다 사교육비가 훨씬 많이 든다. '과외 망국론'도 나온다.
2. 심지어 영적인 것조차 욕심으로 한다.
① 기도도 욕심으로 한다. - 그러니 응답이 안 된다.
② 여기서 우리는 기도에 관해서 사람들이 크게 잘못되고 있음을 본다.
기도는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내가 드려지는 것이 기도다.
③ 이것을 잘못 이해해서 내 욕심 채우기 위한 도구로 기도하니 응답될 리 가 없다.
3. 우리는 영적인 일에도 항상 육적인 것이 개입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① 영적인 일 속에 포함된 육적인 독소를 바로 알아야 한다.
② 독(毒) - 한꺼번에 많이 마시면 즉사한다.
그러나 조금씩 먹으면 금세 표가 안 난다.
조금씩 쌓여서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치명적이 된다.
4. 우리는 주님일을 욕심으로 해서는 안 된다.
① 내 이름 드러내자. 내가 좀 유명해지자.
② 내가 좀 인정받자. 내가 좀 칭찬 받자. 이런 생각이 다툼의 원인이 된 다.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썩게 만든다.
그 반대로
① 나는 죽어지자
② 나는 드러나지 말자
③ 주님만 드러나자는 자세가 필요하다
왜 다툼이 생기나? 개인적 욕심 때문에 생긴다.
또 한 가지 이유 있다.
B. 세상과 벗이 되기 때문이다(vv. 4-5).
1. '간음하는 여자' -- 영적으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 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의미한다
2. 세상과 친구 되는 것이 간음하는 일이고,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이다.
"세상" 이란 게 뭐냐?
John Wesley--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식어지게 만드는 것이 세상이다."
3. v 5 --'성령의 시기' --뭐냐?
사랑하면 상대방을 온전히 요구한다.
(예) 남편 - 아내 사랑하면 아내가 다른 남자와 사귀도록 허락 안 한다.
아내 - 남편 사랑하면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사귀도록 허락 안 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100% 요구한다.
4.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를 100% 요구하시는데 우리의 마음은 자꾸 세상으로 빼앗긴다.
① 세상은 화려하게 보인다.
② 세상은 재미있게 보인다.
③ 세상은 멋있게 보인다.
④ 구원받은 사람도 자칫하면 세상에 시선 빼앗긴다.
5. 세상 바라보고, 세상 사랑하고, 세상과 짝하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자꾸 어두어져서 형제를 못 본다.
① 형제가 아파하는 것도 못 본다.
② 형제가 슬퍼하는 것도 못 본다.
③ 형제가 괴로워하는 것도 못 본다.
그래서 상처를 준다. 형제간에 서운함을 주게 된다. 다툼이 된다.
6. 세상과 벗되면 개인적인 신앙이나, 성도간의 관계는 뒤죽박죽이 된다.
세상에서 눈 떼야 일이 풀린다.
II. 해결책은 무엇인가(vv. 6-12)?
3가지가 제시되어 있다.
A. 겸손으로 마귀 대적해야 한다( vv. 6-7).
1. 마귀와 교만은 오랜 인연이 있다.--찰떡 궁합이다.
천사장 루시퍼--교만 때문에 타락해 사탄이 되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다가 마귀가 되고 말았다.
2. 그렇기 때문에 사탄은 지금도 한이 맺혀 있다.
그래서 한풀이하려고 한다.
지금도 우리 속에 교만을 심어서 자기와 한 패거리 만들려고 한다.
교만을 심어서 성도간에 다툼을 일으키려 한다.
3. 마귀를 대적하는 가장 좋은 길은 겸손이다.
① 낮아지면 된다.
② 상대방을 높이면 된다.
③ 남을 섬기는 자리로 납작 엎드리면 된다.
(예) 곰의 공격을 받을 때-- 맞붙어 싸우면 죽는다.
납작 엎드려 숨도 안 쉬고 죽은 것 같이 하면 곰은 지나간다.
사탄이 분쟁을 일으키려 하고, 사탄이 나를 공격할 때 납작 엎드려 남 을 섬기는 위치에 서 버리면 "이 친구 다 버렸군" 하고 가버린다.
B.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한다(vv. 8-10).
1. v. 8a --어떻게 가까이 가는가?
말씀에 바로 서서 기도로 가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써는 하나님께 가까이 못 간다.
2. 하나님은 늘 우리가 그분께 가까이 오기 원하신다.
그러나 억지로 하지 않으신다. 기다리신다.
3. 내가 먼저 가야 한다. 무릎으로 가야 한다.
가까이 가면 내 죄를 본다.
v. 8 - 손-행위로 하는 죄
마음 - 내 속의 죄
4. 그러할 때 애통할 수밖에 없다.
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추한 모습 본다.
② 다른 형제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 본다.
③ 내 속의 욕심을 본다.
④ 마음 속에 있는 좋지 못한 동기를 본다.
마 5:4--애통하는 자-- 위로 있다.
5. 그때 우리의 죄가 정결하게 된다.
죄의 장벽이 제거된다.
그러면 내 눈이 밝아져 다른 형제가 경쟁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의 대상임 을 보게 된다.
그러면 모든 다툼은 끝이 나 버린다.
C. 형제 비방을 중지해야 한다(vv. 11-l2).
1. 우리는 모두 죄의 성품을 물려받은 자다.
2. 다른 사람이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내 마음을 아프게 하면 "언젠가는 갚 아주겠다"는 앙큼한 마음이 있다.
① 가시 돋힌 말을 한 마디 던져야 직성이 풀린다.
② 내가 받은 상처에다가 이자까지 보태서 갚아 주고 싶은 마음이 있다.
3. v. 11--비방하지 말라--피차에
① 비방하고 싶을 때 중단해야 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이다.
② v. 12--내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밖에 없다.
③ 억울한 일, 속상한 일을 주님께 맡겨라. 서로 비방하지 말자.
서로 헐뜯지 말자. 갈 5:15
(4) 증명형
이 방식은 설교의 중심 내용을 증명해 나가는 방식으로서, 이 경우에 설교자는 중심 내용을 변호하는 입장이 되고, 각 대지는 중심 내용을 증명해 주는 이유나 증거가 된다.
고린도전서 15:12-19이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64) 여기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신앙에서 육체적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의 중심 내용은, "육체의 부활은 우리의 신앙을 의미 있게 만든다"고 하면 좋을 것 같다. 이 경우에 설교의 목적은 물론 "청중으로 하여금 육체적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진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라든지, 이와 유사하게 정해야 될 것이다. 이제 이것을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본문: 고전 15:12-19
제목: 부활이 없다면
중심내용: 육체적 부활은 우리의 신앙을 의미 있게 만든다.
설교목적: 청중으로 하여금 육체적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진리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서론
1.
2.
Ⅰ. 부활이 없으면 복음은 그 내용을 읽게 된다(vv. 12-14).
A.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
B.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으면 복음은 하나의 망상에 불과하다.
C. 복음이 망상에 불과하다면, 신앙은 실체를 상실한다.
Ⅱ. 부활이 없으면 설교자는 거짓말쟁이가 된다(v. 15).
A. 부활이 없으면 부활을 전파하는 설교자는 거짓 증인이 된다.
B. 부활이 없으면 부활을 사실이라고 전파하는 설교자는 사기꾼이 되고 만다.
Ⅲ.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잃게 된다(vv. 16-19).
A.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부활도 없고, 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성취하지 못한다.
B. 부활이 없으면 죽은 성도도 망하고 만다.
C. 부활을 기대하는 그리스인은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
(5) 원리 적용형
이 방식은 설교자가 서론이나 첫째 대지에서 원리를 제시하고 나머지 대지에서는 그 원리를 하나씩 적용시켜 나가는 방식이다.
베드로전서 2:11-3:9은 원리 적용의 방식으로 본문을 구성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65) 본문의 중심 내용은 "인간의 제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는 순종이어야 한다" 또는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라고 할 수 있겠고, 설교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권위에 대해 순종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본문: 벧전 2:11-3:9
제목: 순종하는 삶
중심내용: 그리스도인은 인간의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
설교목적: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권위에 대해 순종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2.
Ⅰ.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인간의 제도에 순종해야 한다(2:11-12, 21-25).
A. 순종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 방법이다(2:11-12).
B. 예수님께서 순종에 대한 본을 보이셨다(2:21-25).
Ⅱ. 순종의 원리는 우리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원리여야 한다.
A. 국민은 정부에 순종해야 한다(2:13-17).
B. 피고용자는 고용주에게 순종해야 한다(2:18-20).
C.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3:1-6).
(6) 귀납적 구성법
이 방법은 서사문학(narrative literature = 이야기식으로 된 부분)에서 본문을 택할 경우 흔히 사용하는 방식인데, 귀납적 구성법을 취할 경우 아웃라인은 다음과 같은 형태가 된다.
즉,
Ⅰ. 이야기
Ⅱ. 원리
Ⅲ. 적용
누가복음 10:38-42을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66) 본문의 중심 내용은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관심의 초점에 두어야 한다"로 하고, 설교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라고 정할 수 있겠다. 이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다.
본문: 눅 10:38-42
제목: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심내용: 그리스도의 제자는 그리스도를 관심의 초점에 두어야 한다.
설교목적: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게 하기 위 해서
서론
1.
2.
Ⅰ. 마리아와 마르다는 관심의 초점이 서로 달랐다.
A. 마리아와 마르다는 각각 다른 모양으로 예수님을 대했다(vv. 38-40).
1. 마리아는 모든 관심을 오직 주님에게만 쏟았다(vv. 38-39).
2. 마르다는 음식 마련하는 일에 관심을 쏟았다(v. 40).
B. 주님은 마르다를 책망하시고 마리아를 칭찬하셨다(vv. 41-42).
1. 주님은 마르다의 문제가 무엇인지 지적하셨다(v. 41).
2. 주님은 마리아의 선택을 더 좋은 것으로 인정하셨다(v. 42).
Ⅱ. 제자도의 관건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A. 손님을 맞는 주인으로서의 마르다의 사역도 역시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B. 그러나 마르다는 더 중요한 일을 게을리했다.
C. 마리아는 가장 중요한 일에 초점을 맞추었다.
D.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 이다.
Ⅲ.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관심의 중심에 두어야 한다.
A. 우리에게 유익하고 중요한 것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B. 그러나 우리는 항상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의 관심의 초점으로 삼아야 한 다.
귀납적 구성법은 위와 같은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약간의 변형도 가능하다. 이 경우에는 전체 이야기를 몇 가지 구성 요소로 분해해서, 각 요소를 위에서 언급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설교이다. 이를 간단히 표시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Ⅰ. 원리
A. 이야기
B. 원리
C. 적용
Ⅱ. 원리
A. 이야기
B. 원리
C. 적용
Ⅲ. 원리
A. 이야기
B. 원리
C. 적용
마태복음 8:18-27을 본문으로 해서 생각해 보자. 본문의 내용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희생적인 순종과 불굴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라고 할 수 있겠고, 설교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순종과 불굴의 신앙이 필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라고 정할 수 있겠다. 이를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본문: 마 8:18-27
제목: 그리스도를 따르려면
중심내용: 그리스도를 따른 자는 희생적인 순종과 불굴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설교목적: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희생적인 순 종과 불굴의 필요함을 알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2.
Ⅰ.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희생적인 순종이 있어야 한다(vv. 18-22).
A. 서기관과 제자의 태도는 주님을 따르기에 합당하지 않았다.
1. 서기관은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사람이었다 (vv. 18-22).
2. 제자중 하나는 그리스도보다 더 우선하는 것을 갖고 있었다(vv. 21-22).
B. 주님을 따르는 자는 온전한 순종을 필요로 한다.
C.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를 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온전한 순 종이 있어야 한다.
Ⅱ.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불굴의 신앙이 있어야 한다(vv. 23-27).
A. 제자들은 풍랑으로 인해 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B. 주님을 따르는 자는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C. 오늘 우리도 주님을 바로 따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환경이나 여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
신명기 1:19-38을 예로 들어보자.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아에서 실패한 역사적 사건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영적 실패"라고 할 수 있겠고, 또 그들이 영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 때문이므로 이것을 술어로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따라서 중심 내용은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실패는 그들의 불신앙에서 연유했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성이 없으므로, 이것을 보편적인 진리의 형태로 표현하려면 '가데스바네아'나 '이스라엘'이라는 단어가 포함되지 않아야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중심 내용은 "영적인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한다"고 해야 될 것이다.
이 경우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부단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태도를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정하면 좋을 것이다. 이제 본문을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해 보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본문: 신 1:19-38
제목: 영적 실패
중심내용: 영적인 실패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에서 연유한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늘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
서론
1. 배경 설명
2. 과거의 대한 희고(vv. 19-25).
Ⅰ. 환경에 눈을 돌릴 때 우리는 영적으로 실패한다(vv. 26-28).
A. 사람들이 우리를 낙심케 할 수도 있다(vv. 26-28a.).
B. 환경이 우리를 낙심케 할 수도 있다(v. 28b).
Ⅱ.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 위해 하신 잊어버릴 때 우리는 영적으로 실패한다 (vv. 29-31).
A.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크게 역사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이것을 망각해 버렸다.
B. 오늘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Ⅲ.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실패한다(vv. 32-38).
A.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았으므로 실패했다(vv. 32-35).
B.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vv. 36-38).
C. 오늘 우리도 갈렙과 여호수아와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
(7) 연역적 구성법
서사 문학에서 본문을 택해 설교할 경우 귀납적 구성법과 함께 연역적 구성법도 많이 쓰이는데, 이 방법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다.
즉,
서론
Ⅰ. 원리
Ⅱ. 이야기
Ⅲ. 적용
역대하 18:1-34을 본문으로 해서 연역적 구성법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본문의 중심 내용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역대하 17장에서는 여호사밧이 영적으로 승리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음에 반해 18장은 그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부귀와 영화가 극에 달하게 됨에 따라(대하 18:1) 그의 신앙은 점점 해이해 지고 죄와 타협하게 되고, 그 결과 그는 엄청난 패배를 맛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중심 내용은 "신앙의 타협은 신앙의 패배를 초래한다"라고 하면 되겠고,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겠다. 이제 본문을 아웃라인 형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본문: 대하 18:1-34
제목: 영적 타협
중심내용: 영적인 타협은 영적인 실패를 초래한다.
설교목적: 성도들로 하여금 타협하지 않는 신앙을 갖게 하기 위해서
서론
1.
2.
Ⅰ. 영적인 타협은 영적인 패배를 가져온다.
Ⅱ. 여호사밧이 그러했다.
A. 그는 죄에 대해 점점 관대해지기 시작했다(vv. 1-3).
B. 영적인 타협이 계속됨에 따라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기가 점점 힘들어 지게 되었다(vv. 4-28).
C. 타협의 결과는 엄청난 패배였다(vv. 29-34).
Ⅲ. 오늘 우리도 영적인 패배를 맛보지 않기 위해서는 타협하지 않는 신앙이 필요 하다.
(8) 기타 방법
본론 전개 방식은 위에서 언급한 것 외에도 많이 있다. 변증법적 구성법, 원인-결과식 구성법 등도 있고, 몇 가지 방식을 결합한 방식도 있을 수 있다. 어떤 설교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느냐 하는 것은 본문의 성격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구성법에 대한 이해와 본문의 철저한 연구만 있으면 크게 어려움 없이 본론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Ⅳ. 아웃라인의 작성
이제 본론 작성의 맨 마지막 단계로서 아웃라인을 작성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아웃라인은 건축에 있어서의 청사진과 같다. 건축가가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청사진으로 만들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설교에 있어서도 그렇다. 지금까지의 여러 단계는 사실상 아웃라인을 만들기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논의한 다섯 가지 단계는 아웃라인으로 총결산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건물이 좋은 청사진에서 나오듯이 훌륭한 설교는 훌륭한 아웃라인에서 나온다.
A. 아웃라인의 기본 형태
설교자마다 아웃라인의 형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필자는 다음과 같은 형태가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본문..........................................
제목..........................................
중심내용...................................
설교목적...................................
서론
1. ........................................
2. ........................................
(경과구:................................)
I. 첫째대지
A. 첫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3. 소소지
(경과구
Ⅱ. 둘째 대지
A. 첫째 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경과구
Ⅲ. 셋째 대지
A. 첫째 소지
B. 둘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C. 셋째 소지
1. 소소지
2. 소소지
(경과구
결론
1.
2.
B. 아웃라인의 목적
아웃라인은 왜 필요한가? 좋은 아웃라인은 어떤 가치가 있는가? 그 중요한 것 몇 가지를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67)
첫째, 아웃라인은 설교에 통일성을 주어 설교자로 하여금 횡설수설하지 않게 한다.
둘째, 아웃라인은 설교를 명쾌하게 해주어 청중이 설교의 흐름을 잘 따를 수 있게 해 준다.
셋째, 아웃라인은 설교자에게 설교 각 부분 상호간의 관계를 한 눈에 보아 알 수 있게 해주며, 또한 중요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게 한다.
넷째, 아웃라인은 설교 준비시 좀더 깊이 연구해야 될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쉽게 구별할 수 있게 해준다.
C. 아웃라인 작성의 원칙
좋은 아웃라인은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몇 가지 원칙이 있다. 68)
첫째, 각 대지나 소지, 소소지에는 반드시 하나의 내용만 포함해야 한다. 아웃라인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각 부분간의 상호 관계를 보여 주는 것이기 때문에 한 대지나 소지 안에 두 개 또는 그 이상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으면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 대지에는 하나의 내용만 포함시켜야 한다.
둘째, 한 대지는 다른 대지와, 한 소지는 다른 소지와 구별되어야 하며, 따라서 유사한 대지나 소지는 만들지 말아야 한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두 개의 대지가 어떤 설교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자.
Ⅰ. 참된 사람은 지속적이다.
Ⅱ. 참된 사랑은 변함이 없다.
이 경우에 두 대지는 서로 내용이 유사해서 그 차이가 무엇인지 사실상 구별이 잘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식의 대지는 피해야만 된다.
셋째, 가능하면 같은 형태의 표현을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할 때 청중이 기억하기 쉽고, 또 그 기억은 오래 지속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각 대지나 소지가 서술형이면 서술형으로, 의문형이면 의문형으로 해야지 여러 자지를 뒤섞어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대지를 한 번 보자.
Ⅰ.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Ⅱ. 당신은 참으로 헌신적인가?
Ⅲ. 서로 용서하라.
이 대지는 서술형, 의문형, 명령형 등 세 가지 다른 형태의 종지형(終止型)을 사용하고 있어서 좋지가 못하다.
넷째, 각 대지는 완전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소지도 가능하면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단어나 구(句)만으로는 완전한 뜻을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 대지나 소지는 독립적으로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문장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다섯째, 번호는 일관성 있게 사용해야 한다. 모든 대지는 항상 같은 번호로, 또 소지는 대지와는 다르게, 그러면서 모든 소지는 똑같은 번호로 표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뒤범벅이 되어서 아웃라인은 그 존재 이유를 상실해 버리고 말 것이다.
여섯째, 설교에서 모든 부분이 다 동일하게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나 포괄적인 부분은 대지가 되고, 대지를 뒷받침 해주는 부분은 소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을 것이다.
Ⅰ. 첫째 대지: 중심 내용을 뒷받침한다.
A. 첫째 소지: 첫째 대지를 뒷받침한다.
B. 둘째 소지: 역시 첫째 대지를 다소 다른 각도에서 뒷받침한다.
Ⅱ. 둘째 대지: 중심 내용을 첫째 대지와는 다른 면에서 뒷받침한다.
A. 첫째 소지: 둘째 대지를 뒷받침한다.
1. 첫째 소소지: 첫째 소지를 뒷받침한다.
2. 둘째 소소지: 첫째 소지를 뒷받침한다.
B. 둘째 소지: 역시 둘째 대지를 다소 다른 측면에서 뒷받침한다.
일곱째, 연구하고 묵상하여 수집해 놓은 자료 가운데 설교에 포함시키기에 부적당한 것이나 설교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과감히 잘라 버리고, 이런 것은 아웃라인에 아예 포함시키지도 말고 설교할 때 언급하지도 말아야 한다. 어떤 구절은 해석상의 어려움으로 서너 가지 견해가 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설교자가 개인적으로 연구할 때는 각 견해를 다 검토해야 되겠지만 아웃라인을 작성하기 전까지는 어느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결정을 내리고, 아웃라인에서나 실제 설교에서는 이 견해만 언급해야 할 것이다. 설교는 학교 강의가 아니기 때문에 설교자의 연구 과정이나 결론 도출 과정을 실제 설교할 때 다 언급할 필요가 없고, 오직 그 결과만 체계적으로 제시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본문 중 어느 한 절 또는 한두 절이 전체 주제와 방향이 다소 다를 경우가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어차피 설교자는 자신의 본문 한 절 한 절에 똑 같은 비중을 둘 수 없다. 아무래도 어떤 구절에는 좀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가 택한 본문 전체를 관통하는 분명한 주제가 있으면서도 일부 구절이 다소 이질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그런 구절은 다소 가볍게 취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덟째, 각 대지와 소지는 가능하면 간단 명료해야 한다. 길고 복잡한 문장보다는 간단한 것이 기억하기에 쉽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그 대지를 중문(重文)이나 복문(複文)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단문(單文)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다.
아홉째, 한 대지에서 다음 대지로 넘어갈 때, 그리고 때로는 한 소지에서 다음 소지로 넘어갈 때, 경과구(經過句)를 사용해야 하고, 또 경과구는 아웃라인에서 괄호 안에 묶어서 표시해야 한다. 여기서 경과구(transition)에 관해서 좀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69) 한 대지에서 다른 대지로, 때로는 한 소지에서 다른 소지로 넘어간다는 것을 청중으로 하여금 알게 하고, 또 그 과정을 부드럽고 무리 없이 처리하기 위해서 경과구를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설교자는 눈앞에 아웃라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각 부분 상호 간의 관계를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지만, 청중은 그렇지가 못하다. 설교자가 아무리 준비를 많이 하고 좋은 아웃라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청중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효과는 반감되지 말 것이다. 청중이 설교의 흐름이나 각 부분 상호간의 관계를 잘 이해하여 설교자가 가지고 있는 설교의 구조를 그대로 따라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경과구가 필요한 것이다.
경과구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이것을 대별(大別)하면 세 가지 유형이 될 것이다.
첫째는 부가적(附加的) 형태이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말한 것에다 새로운 것을 덧붙이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지금까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이 하나님 보실 때에 어떤 가치가 있나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둘째로 이 보혈이 어떤 효능을 갖는지, 우리 개개인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와 같은 것이 부가적 형태가 되겠다.
둘째는 추론적 형태이다. 이것은 앞에서 취급한 내용이나 주장으로부터 어떤 논리적 결과나 원리 같은 것을 추출해 낼 때 사용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피 값으로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같은 것이 추론적 형태에 속한다고 하겠다.
셋째는 대립적 형태이다. 이는 앞에서 취급한 내용과 반대되는 것을 도입할 때 사용하는 형태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1절로부터 3절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할 때 어떻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두 번째로 4절부터 6절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어떻게 되는지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가 대립적 형태에 속한다고 보겠다.
위의 세 가지 유형을 설명할 때 든 예를 주의 깊게 살펴보면, 설교자가 앞에서 취급한 내용을 한두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한 후 이것을 새로 도입할 부분가 연관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약 - 예고> (summary-preview) 방식이 가장 일반적이고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에 어떤 설교자라도 조금만 유의하면 사용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앞에서 취급한 내용을 간단히 복습해 청중의 기억을 새롭게 함과 동시에 다음 부분과의 자연스런 연결을 가능케 한다는 이중적 목적을 성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D. 아웃라인의 전달
설교자가 설교의 아웃라인을 단순하고 명쾌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아웃라인을 청중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설교자는 자신의 아웃라인을 직접 보고 있기 때문에 어느 것이 대지인지, 어느 것이 소지인지, 그리고 대지와 소지가 어떻게 연관되고 있는지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청중은 오직 귀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교자의 아웃라인을 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아웃라인을 명쾌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만든 아웃라인을 청중에게 잘 전달하는 것도 똑 같이 중요하다. 그러면 아웃라인을 제대로 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경과구를 잘 사용하면 대지와 소지의 변화를 청중에게 어렵지 않게 보여줄 수 있다.
예를 들면, 본서의 부록 2에 실린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의 대지는 다음과 같다.
1대지: 우리는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한다(v. 1 b).
1 소지: 무거운 것을 벗어야 한다.
2 소지: 죄를 벗어야 한다.
2대지: 우리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한다(v.1 c).
3대지: 우리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경주해야 한다(v.2).
위의 설교에서 1대지와 2대지 사이에 다음과 같은 경과구를 넣어보자: "우리는 어떠한 태도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까?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고 경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되지 않습니다. 본문 1절 하반 절에 보면 또 하나의 자세가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과구는 1대지에서 2대로 바뀐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가 되기 때문에 청중이 아웃라인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둘째, 열거를 제대로 하면 대지의 변화를 어렵지 않게 전달할 수 있다.
위에서 예로 든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에서 전달해야 될 최소한의 아웃라인은 3개의 대지와 1대지에 속한 2개의 소지이다. 여기에서 '첫째, 둘째'라는 말을 마구 써 버리면 그 '첫째'가 1대지를 가리키는지, 1대지의 1소지를 가리키는지 구별이 안되어 청중을 혼란 속으로 몰아 넣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려면 요령이 있게 사용하여야 한다. 가령 '첫째, 둘째'라는 표현은 대지를 나열할 때 사용하고, 1대지에 속한 2개의 소지는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열거하는 것이다. "우리가 벗어야 할 방해물 가운데 한 가지는 무거운 것입니다. ...우리가 벗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의 방해물은 죄입니다"라는 식으로 하면 '첫째, 둘째'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1대지에 속한 두 개의 소지를 열거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셋째, 대지나 소지의 숫자를 예고하는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든 '믿음의 경주'라는 설교의 서론이 끝날 무렵에 "....오늘 우리는 방금 읽은 히브리서 12:1-2에서 신앙의 경주를 하는 자는 어떤 자세로 해야 하는지를 세 가지로 정리해서 상고하고자 합니다"라고 하면 오늘 설교는 대지가 셋인 것을 청중에게 미리 알려주기 때문에 청중이 아웃라인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E. 아웃라인 작성 연습
이제 위에서 언급한 아웃라인 작성의 원리를 실제에 적용시키는 연습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연습 1> 다음 각 항을 아웃라인 형식으로 빈칸에 채워라.
제목: 퓨리태니아의 최근의 상황 I. .................
1. 매년 평균 학교 선생의 수가 2,000명의 증가되었다. A. ............
2. 퓨리태니아는 동 그라우스타크와 대사를 교환했다. B. ............
3. 민주적 제도가 도입되었다. C. ............
4. 국영 오케스트라가 명성을 떨쳤다. II. .................
5. 동 그라우스타크와 평화 조약을 맺었다. A. ............
6. 양원제 의회가 활동을 개시했다. B. ............
7. 대외 관계가 향상되었다. 1. ........
8. 작년 1억 3천만 불이 학교 건물 신축을 위해 사용되었다. 2. .......
9. 퓨리태니아는 범 보스포러스 상호협력 기구에 가입했다. III. ...............
10. 6년간의 의무교육이 제도화되었다. A. ...........
11. 보통선거가 성공적으로 실시되었다. B. ............
12. 교육 및 문화의 수준이 향상되었다. C. ............
13. 퓨리태니아와 동 그라우스타크와의 국경분쟁이 해결되었다. D. ...........
14. 새로 발족된 문화공보부의 주관하에 많은 진보가 이루어 1. ......
지고 있다. 2. ......
15. 혁명후의 독재정치는 10년전에 붕괴되었다.
16. 예술 및 음악을 위한 특별 기금이 조성되었다.
* 퓨리태니아와 그라우스타크는 가상적인 나라이고, 보스포러스는 가상적인 국제 기구임
<연습 2> 다음 각 항을 서론, 본론, 결론의 형식으로 배열하라.
제목: 매연 방지책
1. 경제적이고도 효과적인 매연 방지책이 고안되었다.
2. 극심한 매연은 태양 빛을 흐리게 한다.
3. 매연은 대중에서 해를 끼친다.
4. 매연으로 인해 야기되는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많은 대도시에는 매연 방지책이 강구되었다.
5. 가정에서는 석탄 대신 가스나 전기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6. 매연은 해롭지만 방지가 가능하기 때문에 매연 문제에 대한 긴급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7. 매연의 해독을 바로 인식하고 그 방지를 위해 노력하면 매연방지는 효과를 거둔다.
8. 매연은 통풍을 방해한다.
9. 대도시에서의 매연방지는 의무적으로 시행되어야 한다.
10. 전기 기관차가 중기 기관차 대신으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11. 석탄은 허파를 오염시킨다.
<연습 3> 다음의 성경 본문을 사용해 본서에서 언급된 형태대로 설교의 아웃라인을 만들어 보라.
1. 출애굽기 15:22-27
2. 여호수아 1:1-9
3. 아모스 5:18-24
4. 마태복음 6:19-24
5. 누가복음 1:5-25.
6. 누가복음 2:13-35
7. 요한복음 6:1-13
8. 요한복음 6:39-45
9. 고린도전서 1:4-17
10. 히브리서 12:1-8.
주(註)
1) William N. Brigance, Speech: Its Techniques and Disciplines in a Free Society, p.35.
2) A. Duane Litfin, Public Speaking, p. 80.
3) Ibid., pp. 80-83.
4) Haddon W. Robinson, Biblical Preaching, p.35.
5)Alan M.Stibbs, Expounding God's Word: Some Principles and Methods, p.40.
6) Lloyd M.Perry, Biblical Preaching for Today's World, pp.47-48
7) cf. J. Daniel Baumann, An Introduction to Contemporary Preaching, pp. 123-28; James Braga, How to Prepare Bible Messages, pp. 113-35; John A. Broadus, On the Preparation and Delivery of Sermons, pp.45-48; Litfin, pp.78-83; Robinson, pp. 39-44; Craig Skinner, The Teaching Ministry of the Pulpit, pp. 162-64.
8) Charles R. Swindoll, "Pastor and His Pulpit," A Message Delivered at Sixtieth Anniversary Pastor's Conference, Dalla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 라너(Rahner, Karl, 1904.3.5-1984.3.31) (0) | 2022.03.04 |
---|---|
예배의 요소와 순서 (0) | 2022.03.04 |
공감적 책읽기 (0) | 2022.03.04 |
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0) | 2022.03.04 |
하나님의 뜻 (0) | 2022.03.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