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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Rahner, Karl, 1904.3.5-1984.3.31)

by 【고동엽】 2022. 3. 4.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예수회의 수사(修士).

국적 독일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독일 프라이부르크
주요저서 《사명과 은혜:Sendung und Gnade》(3권, 1966)


프라이부르크 출생. 1934~1936년 프라이부르크대학의 M.하이데거에게 서양철학을 배우고, 1949년 오스트리아의 인스부르크대학 신학교수를 시작으로, 1964년 독일의 뮌헨대학 교수가 되었다. 뮌헨대학에 있으면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실존주의적(實存主義的) 해석을 하였으며, 교회일치운동의 가톨릭측 실무자로 활약하면서 신학교육의 개혁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公議會:1962.10~1965.12) 때는 공의회 고문(peritus)으로 활약하였는데, 고문 신학자 중에도 가장 영향력이 컸다. 그는 비단 그리스도교의 교파들만이 아니라, 여타 종교 ·사상과의 대화 ·교류를 통하여 현대 사회가 안고 있는 복잡한 과제들을 해결하려는 입장을 취하였다. 편저 《신학논총(神學論叢)》(13권, 1957~1969), 저서에 《사명과 은혜:Sendung und Gnade》(3권, 1966)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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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너의 신체험과 니시타니 케이지의 공체험

 

 

이찬수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그 존재의 뿌리는 허무이다. 니시타니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선험적이면서 객관적인 원사실이다. 모든 인간은 허무 위에 놓여 있고 허무의 체험에 노출되어 있다. 현상 세계는 그 근저에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채 현상 세계 그대로 존재한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육도에 윤회하는 세계 내 존재 그 자체야말로 세계 내 존재를 세계 내 존재답게 해주는 궁극적인 진실상이 아닐 수 없다. '세계 내 존재성(性)'을 있는 그대로 실존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내존재성'을 있는 그대로 실존적으로 경험한다는 말은 세계 내 존재를 떠받쳐주는 어떤 근거나 원리란 아무 것도 없다는, 글자 그대로 허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가령 "지금 불이 타고 있다"는 말은 "불을 태우는 불이란 없다"는 자기 부정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 "불은 불을 태우지 않고 물은 물을 씻지 않으며 눈은 눈을 보지 않는다." "불은 나무를 태움으로써 자신을 태우지 않고, 자신을 태우지 않음으로써 나무를 태운다." 나무를 태우는 것으로 보이는 불의 실체성은 자신을 태우지 않는다는 불의 비연소성(非燃燒性) 위에서만 성립된다. 한 마디로 불의 자기동일성은 무자성(無自性)에서만 성립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현상 그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그 현상 자체가 아닌 근거나 자아의 부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허무 위에 있다. 그 허무에 의해서만, 즉 근거나 자아의 부정에 의해서만 새로운 생성이 이루어지고 유한한 시간을 무시무종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허무의 자각 속에서 세계 내 존재는 다른 것이 아닌 바로 그 세계 내 존재로 체인된다. 허무의 자각을 통해 그 허무를 극복하는 것이다.

 

그 허무와 만나는 것은 말하자면 철벽으로서의 신과 만나는 것이며, 신의 절대 부정성......과 만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그 허무에도 불구하고 만물이 현재 있는 바와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신앙자의 입장에서 보면 허무를 깨뜨리고 존재를 만물에게 주고 또 보전하는 신의 은총과 힘을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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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종교 신학

 


이찬수(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초월론적 신학\'(transcendental theology)으로 하느님과 온 인류의 원천적인 연결성을 설명하고, 그 신학의 자연스런 산물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론으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의 관계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규명한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종교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라너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종교간 다원성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지 검토함으로써 현종교 상황에 대한 한 가지의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우주 중심적 세계\'(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중심적 세계\'(안셀모, 토마스 데 아퀴노)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로의 전환을 이룬 근대의 상황을 반추하면서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이 신학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에 선행하여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온 인류에게 자신을 이미 내주셨다는, 즉 은총을 베푸셨다는 선험적 진리를 인간의 주체성 안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전하면서도 조건 없이 자신을 인간에게 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실존론적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분, 종파에 관계없이 하느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디모 2,4) 하느님의 보편적 인간 구원 의지의 구체적 표현이다.

 

라너는 하느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 만일 이 구원 의지가 널리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전체 인류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여전히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느님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보통의 평균적인 인간에게도, 보기에 시야가 놀랄 만큼 좁고 인생을 고생스럽게 겨우 연명해 나가는 사람에게도, 고생스럽게 긴박한 생활고로 시달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 마당에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너는 묻는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아주 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수히 많은 형제들(고생물학은 이들의 지평을 계속 확대시키고 있다.)은 물론 현재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무수한 형제들의 무리가 원칙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충만한 삶으로부터 제외되고 영원히 무의미성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이 한시라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스스로를 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또 구조론적으로 아무런 차별 없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의 이와 같은 상태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했다. 그리스도교적이긴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이다.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묘사하려 들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 불려야 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시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과소평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오롯이 보전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형제적인 자세로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너는 생각한다.

 

 


3. 그리스도론

 

이와 같은 논의는 \'초월론적 신학\'의 자연스런 결론이다. 라너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칙적인 연결성,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밝히기 위해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주신다. 하느님을 받아 모신 인간은 신적인 본성으로 성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본성상 반드시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자 한다. 인간의 초월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역사적으로 중개된

 

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의 육화\'이다. 라너에게 \'육화\'란 말씀의 외적 표현이며,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주시는 수단이다. 이런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개들 가운데 라너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본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며 살고 있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이고도 논리적인 완성이며, 인간 존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의 실현이자, \"인간 실재의 본질이 전적으로 현실화한 유일하고도 최상인 예증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말씀의 육화의 전형을 예수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를 앞당겨 실현한, 결정적인 말씀의 육화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고, 그렇게 고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대립되지 않을 뿐더러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가능한 형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맏이이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궁극적이면서 명백한 완성\", 즉 예수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루어진 완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아우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시되고 예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고 라너는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참사랑이자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근본적 단일성을 성립시켜 주는, 그러한 사랑의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예증이므로 라너에게 이 하느님 사랑, 예수 사랑, 인간 사랑은 동일한 뿌리를 가지면서 서로를 조건 짓는다.

 

 


4. 교회론

 

이런 인간 규정은 그의 교회론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속이고...우리 역사 내에서의 그의 영원한 가시적 현존이며.... 세계 안에서의 그의 계속적인 역사적 현존\"이다. 한마디로 교회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신비\'인 탓에 유형적 틀로 제한될 수 없고, \'구체화\'인 탓에 우리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다. 교회란 제도도 아니고,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가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공동체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으로 표현되는데, 건물 자체에 제한되지도 않고 제한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의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사실상 별의미가 없다. 교회의 안과 밖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교회의 범위도 정확히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교적상으로나 인습상으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종교 사회학적으로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두 부류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종교 사회학적인 우연한 요인에 있으며 신학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는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

 


이 마당에 가시적 교회 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뭐 그리 결정적이랴. 그보다는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bona fide)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일 수 있다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교회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도 타당하고,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5.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교회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성,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타종교인에게 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가? 이런 문제들을 두고 여러 학자들이 라너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한다. 가령 한스 큉(Hans Ku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폴 니터(Paul Knitter)나 존 힉(John Hick)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왜 신실한 타종교인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는 수구적 의미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런데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그리스도\',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서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등의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교회 안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시키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람들을 가시적, 유형적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될 뿐더러, 만일 그러고자 했다면 굳이 \'익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리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라너는 교회의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과제는 단순히 인간들의 \'그리스도인화\'에만 결부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의 교회의 여러 제도-이들이 아무리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밖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교회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아 파견된 바 있다고 해서 교회의 가견적 형태 밖에는 구원이란 없으며 세계의 점진적 구원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새로운 그리스도를 얻는 일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뜻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기보다 세계 도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인에게 뚜렷이 밝혀 주는 증인들을 얻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과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코 타종교인들을 가시적 교회 안으로 몰아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휩싸여 사는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모시고 사는 고귀한 존재임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바, 보다도 무한히 더 큰 존재임을, 가이없는 자유와 행복을 지니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인간임을\" 밝혀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불교에서 중생이 부처라는 선험적 원사실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세파에 휩쓸려 때에 찌든 중생이 그 자체로 부처라는 말씀을 두고 도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 미천한 것을 어떻게 거룩한 부처님과 동등하다 할 수 있느냐 따진다면, 그것은 온갖 분별지를 타파하는 불교적 진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라너도 이미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온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줌으로써, 종파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본래적 고귀함, 원천적 하느님의 자녀됨을 교회안에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범위를 줄여서 그리스도교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넓힘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려는 라너의 신학적 노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6. 종합적 반성

 

하느님의 은총은 특정 종파에 속한 의인에게만이 아닌, 절대적으로 모든 이의 구체적 실존에 현존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신적인 생명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바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 하느님 자신이 언제나 인간의 일상 안에, 인간의 깊은 자아 안에 머물러 계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구체적인 역사의 범주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일상사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무리 일상의 언어 안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는, 언제나 더 넓고 깊은 분이다. 하느님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비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에는 우리의 개념, 언어가 너무 짧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 하느님 체험을 표현할 때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는 저렇고\"내지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 역시\"와 같은 상호 보완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라너는 지적한다. 심지어는 대립적인 개념들마저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표현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

 

데는 언제나 긴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마당에 서술된 것보다 언제나 넓고 깊은 하느님과 그에 대한 표현을 혼동할 수 없으며, 또 표현 자체에 얽매일수도 없다. \'익명\'이란 말마디에, 라너가 선험적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말 자체에 매여,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서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불교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주는 예수는 대자 대비한 보살의 다른 표현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교인\'이라고 명명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건데 \'불자\'(佛者)라는 낱말 자체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생생하게 살려 내려는 것일 뿐 불자, 모슬렘, 힌두인이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수용해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야말로 종파에 관계없이 이미 신화(神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타종교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익명의 그리스도인(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나 가능한, 그리스도교에만 적용되는 표현이지,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일반 규정은 아니다. 비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신학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종교들을 깎아 내린다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며 라너에게 가한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종교를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전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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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신학을 만나고


전 철

 


나는 칼 라너를 학부 2학년 여름방학에 몰트만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만 났다. 당시에 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이 개혁신학의 흐름과 어떻게 조우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 을 가지고 개혁신학의 과제를 현대적으로 새롭게 조명한 몰트만의 신학세계를 탐독하기 시작하였다. 일단 내가 처음 접했던 몰트만의 <창조 안에 계신 하나님>은 화이트헤드의 <과정>과 <창조성>의 정신이 더욱 더 그의 자연신학 안에서 드넓게 재편되어 새롭게 전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하였다. 물론 몰트만은 ― 이는 틸리히와 유사한 자리에 서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되어지지만 ― 과정성과 창 조성이 궁극적으로는 신의 본질을 온전히 침해하지 못한다는, 모종의 한계를 그어놓는다는 그 미묘 한 점에서 화이트헤드와는 사뭇 다른 신학적 면모를 그려 나아간다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이후 몰 트만의 그리스도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길>에서 나는 칼 라너의 <자기 초월>을 접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학적 개념 하나 하나가 새롭게 나의 신학적 사유의 지평을 건들 었을 때이니 만큼, 칼 라너의 <자기초월>이라는 개념은 매우 강렬한 의미와 지워지지 않는 인상으 로서 두고 두고 나의 마음에 남게 되었다. 동시에 많은 물음이 열리게 되었다.

 


신학의 궁극적인 물음은 유한과 무한의 관계에 대한 물음에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삼위일체>와 <예수그리스도>는 무한과 유한의 접점을 성실하게 해명하려 한 신앙공동체의 전통과 유산이다. 그 리고 그 유한과 무한의 영원한 길항관계는 여전히 오늘의 신학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서 해명 의 과제에 있다. 칼 라너의 신학적 촉수도 바로 유한과 무한, 내재와 초월의 관계를 자신 안에서 새 롭게 해명하려는 데 길게 드리워저 있었다. 몰트만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만난 칼 라너는, 일단 <자 기초월>이라는, 유한한 존재가 자신을 넘어서는 무한성과 신성에 관여함으로서, 유한과 무한의 긴장 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명하고 있었다. 이는 화이트헤드가 현실적 존재의 성격을 <주체>subject와 <자기초월체>superject라는 내재적이며 초월적인 양가적 국면으로 전개하였음을 회상케 한 대목이었 다. 이런 의미에서 라너와 몰트만과 화이트헤드는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성을 향하여 그 전통의 언어를 새롭게 표명한 사상으로서 나에게 다가오게 되었다. 유한과 무한, 내재와 초월의 관계가 전통 방법론이 기획하는 방식으로는 결코 온전하게 해명되거나 설득력 있게 이해되지 못하리라는 자각 속 에서, 이들은 이 양자의 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실로 유한과 내재는 무한과 초월의 영역으로 일방적으로 환원될 수 없다. 세계의 깊이는 무한을 향한 일방적인 환원의 폭력을 부당하다고 외칠 만큼 성숙해졌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유한성과 내재 성 안에 관여하고 있는 무한하고 초월적인 접점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새로운 신학적 착상을 사상의 밑변에 담고 있다. 결코 이데아의 그림자로서 언제나 구원의 빛을 요청하는 자리로 현실세계 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구원을 향한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 <성숙한 세계>를 새 롭게 신학적으로 조명하는 것이고, 더욱 더 간절한 희망과 온 인류의 구원을 향한 새로운 활력을 이 현실의 대지 위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더욱 구체적으로 <자기초월>은 어 떠한 핵심적인 정신을 간직하고 있는가? 혹은 자기초월이 자칫 자행할 수 있는 인간학적 오만과, 신 성의 폄하는 어떠한 방식으로 극복되고 있는가? 더 나아가서 인간의 자기초월은 하나님의 자기초월 과는 도대체 어떠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머리 속에서 맴돌고 있을 때, 시간은 빠른 속도로 지나갔고, 몰트만과 라너에 의해서 촉발되었던 그 뜨거운 여름의 신학적인 물음은 하염없는 망각 속으로 사라져 가게 되었다.

 


까마득하게 잊고만 지내왔던 물음도 때가 되면 다시 고개를 들게 되는가. 망각은 상실을 의미하지 않는다. 망각은 자기자신의 시간이 다가올 때 회상으로서 새롭게 사유의 물음으로 부각된다. <철학 적 신학>은 몇 년 전의 아련한 물음으로 남아있던 칼 라너의 <자기초월>을 본격적으로 회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첫째, 라너의 <하나님의 자기양여>는 모든 존재가 결코 그 자체에 근원적인 뿌리를 둘 수 없는 운명임을 깨닫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양여라는 사건이 없이 모든 존재는 결코 자존할 수 없다 는 것을 의미한다. 즉 인간은 선험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덧입혀진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사건은 모든 존재의 사건보다 더욱 근원적인 사건이다. 그 사건에서부터 인간의 자 기초월과 자기구현은 출발하게 된다. 이는 인간 존재의 출발점을 그 내부에서부터 정립하고자 하는 프로메테우스의 인간관과 인간 존재보다 더욱 원천적인 외부의 가치에서부터 자신을 정립하는 헤르 메스의 인간관 사이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존하는 여타 종교관과 다양한 실재관과 그리스도교 실재관이 다양한 방식으로 대화하고 교감할 수 있을 지언정, 그리스도교 실재 관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관점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신학적 사유의 가장 깊은 통찰은 무엇이라고 해도 바로 인간의 삶과 운명이 <은총>에 잇대고 있다는 점이기 때문 일 것이다. 한 인간의 삶은 결코 자존적일 수 없다. 그의 삶은 가까이는 부모의 크신 사랑으로부터 멀리는 이웃, 사촌, 그리고 수천 대의 조상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랑과 의지의 결실로서 지금 피워 내는 아름다운 꽃이지, 결코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는 근본적으로 우리의 삶과 생명이 하나 님의 사랑과 은총에 의해서 지금 드러나는 것임을 직시하게 한다. <하나님의 자기양여>는 결국 하 나님의 사랑 속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그의 고유한 가치를 구현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최초이자 최고 의 사건을 의미한다.

 


예전에 만났던 카발라의 짐줌이론과 몰트만과 화이트헤드의 창세기에 관한 논의에서 풍겨나는 뉘 앙스와는 달리 라너의 하나님의 자기양여는 더욱 풍부하고 경험적인 요소가 깊이 녹아 있는 듯하다. 어쩌면 이러한 라너의 신학적인 향기는, 글자 그대로 평생을, 홀로 독신으로, 자신의 온 삶을 다 바 쳐 오늘날의 인류와 그리스도교 교회를 향한 지난한 신학적인 정열이 그의 문장과 사유에 묻어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샤르뎅이나, 라너를 포함한 카톨릭 서클의 사유는 전우주적인 스케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흐르는 시니피앙은 개신교 사유와는 사뭇 다른 정갈함과 청순함이 서려 있다는 느낌을 진하게 받는다.

 


둘째, 라너의 <자기초월>은 카톨릭과 개신교의 기본입장을 더욱 분명하게 구분하는 개념일런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라너의 <자기초월>이 결코 무한한 하나님의 신성을 침해하고 인간학적 인 가치를 중시하려는 기획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동시에 개신교가 강조하는 <인간 의 전적인 타락>이 인간고유의 진정한 가치를 무시하려는 의도에서 형성되어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라너의 <자기초월>이 말하려 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신은 인간이 단순한 인간이 아니 라 그는 신적으로 고양될 수 있는 가능성을 그 안에 내함하고 있다는 것을 지시한다는 것이다. 프란 시스와 도미니칸의 논쟁이 하나님과 인간이 접촉하는 방식이 <감성>이냐 <이성>이냐 하는 것을 다 룬 주요한 시사점이라고 하였다면, 부르너와 바르트의 논쟁은 하나님과 인간이 온전히 접촉할 수 있 느냐 없느냐 하는 것을 다룬 논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라너의 <자기초월>은 내가 속한 프로테스탄트 신학 서클에서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영역이라 할 지라도, 도대체 프로테스탄트에서 끊 임없이 강조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파기>가 얼마나 중요한 내용을 배경에 함축하고 있는 가를 본격적으로 대조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이다. 부르너에 의해 은밀하게 지지되어지는 듯한 라너의 신학을 우리가 개신교 신학자인 바르트를 대신하여 비판할 필요도 없고 그럴 가치도 나는 느 끼지 못한다. 나는 단지 파니카의 <종교내의 대화>가 시사하듯, 개신교가 끊임없이 놓치지 않으려 하는 하나님과의 관계파기, 인간의 철저한 죄성에 대한 강조가 카톨릭의 전통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 님과 인간의 긍정적 관계 설정이라는 큰 지류가 해명할 수 없는 그 고유한 '영역'을 어떠한 방식으로 강조하고 밝혀내는지를 진지하게 탐구해보고 싶은 마음 뿐이다.

 


인간은 결코 그 투명함을 회복할 수 없는 음울한 청동거울인가, 아니면 자신이 자신을 언젠가는 온전히 투명하게 볼 수 있는 존재인가는 앞으로도 깊이 숙고해야 할 과제이다. 모든 신학이 궁극적 으로는 선택의 몫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는 저 갈림길은 우리의 사변으로서 남는 영역이 아니라 악 의 현실성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려는 노력의 과정 을 통해서만 한 신학적 실존이 판단할 수 있기에, 이는 내적인 사유의 훈련과 아울러 외적인 존재의 체험을 요청한다. 이렇게 몇 년 전에 잠시 만났고, 올해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라너의 <자기초 월>은 나 자신의 <자기초월>의 가능성을 새롭게 열어주면서, 그 가능성 ―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랑 을 의미하리라 ― 을 몸소 실현하면서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한계를 직시할 수 있도록 나를 순간 순간 다그친다.
 

 


앞으로의 주요 탐구 과제

1. 라너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유한과 무한의 관계

2. 칼 라너와 니시타니 케이지의 비교연구 ―이찬수 박사논문을 중심으로

3. 인간 고난(苦難)의 형태적 유비로서의 하나님의 자기비움에 대한 탐구

4.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 함의하고 있는 종교다원론 연구

5. 라너의 죽음 이해 ― On the Theology of Death를 중심으로

5. 자기초월의 궁극적인 현전인 <사랑>에 대한 현상학적인 고찰


1998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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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너의 초월론적 체계와 인간학

 

남성천

 

 

1. 라너는 누구인가?


그의 말년에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든 말든, 무신론자라고 생각하든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런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고 定義한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es Christentum」이라는 개념으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3.05∼1984.3.30)는 금세기 선도적 신학자들 중의 한 사람이다. 가톨릭의 학자이자 신부이기도 한 라너는 프라이부르크(Freibrug im Breisgau)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여기에서 줄곧 살다가 1922년 4월 예수회에 입회한 후, 다시 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해 호넥커(Martin Honecker)와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문하에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2차대전이 끝나자 학자로서의 본격적인 임무를 시작한 라너는 당시 가톨릭 신학이 너무나 자주 '신비'라는 이름으로 신학적 사유를 그치는 데에 반대해 "더 나아가는" '합리성'을 추구하였다. 1949년부터 15년간 인스브루크에서 교수생활을 한 후, 뮌헨에서 잠시 그리스도교 세계관과 종교철학 강좌를 열고, 뮌스터로 가서 거기서 1971년 은퇴할 때까지 교의학과 교회사 교수로 재직하였다. 라너의 신학 저술은 다양한 주제와 풍부한 착상을 담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신학과 자연과학 사이의 대화, 그리스도와 타 종교들과의 관계성, 그리스도교와 무신론 혹은 맑스주의와의 대화는 특기할 만하다.

 

 

 

2. 초월적 체계


칼 라너(Karl Rahner)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n von Aquinas), 더 정확히 말하면, 새로운 토마스주의(Thomismus)의 바탕 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열망"을 그 근본 주제로 삼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을 향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어떤 형태로든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향해 손을 뻗는다. 이것은 피조물로서의 그의 본질 안에 각인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을 함께 말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에 관해서도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중심적인 지향성"을 갖는다. 그래서 신학자도 인간 실존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바로 그러므로 라너도, 예를 들면, 그가 칸트의 정신적인 발자국을 따라 "초월적"(선험적: transzendental)인 방법으로 생각할 때, 다시 말하면, "가능성의 조건들"을 질문할 때, 단숨에 인간의 행복과 그의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고 애쓴다. 이와 동시에 라너는 하이덱거(Heidegger)와 함께 인간을 자기 자신에 대한 살아 있는 질문으로, 앞을 향해 항상 자신을 항상 넘어서는, 바로 그래서 또한 언제나 이미 하나님을 추구하고 있는 존재로 파악한다. 그의 본질적인 존재가 미래적으로(zu-künftig: -에게 오고 있는) 자신 앞에 있는 한, 하나님도 그 앞에 있다.

 

라너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초월적인 출발점을 사용한다. 바로 이 출발점으로써 그는 자신의 체계까지 세운다. 모든 교의학적 주제를 다룰 때마다, 그는 인식론적으로 인간의 정신의 속성 안에서 이 주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인들을 추구한다. 이런 맥락에서 라너는 "범주적(kategorial: 개념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계시"로서 인간에게 명시적인 의식을 제공하기 전부터 "암시적인 의식"의 영역 안에서 움직이는 "초월적인 계시"에 관해 말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그리스도이든 비그리스도이든, 혹은 심지어 인간적인 무신론자이든, 그에게 항상 은밀하게 다가가는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바로 이 길, 즉 표명되지 않은 것에서 표명되는 것으로, 희미하게 감지된 것에서 분명히 의식되는 것으로, 반성(反省) 이전의 것에서 반성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자신을 알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즉, 하나님의 범주적인 자기 계시를 분명하게, 감사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신인식(神認識)의 "전역사"(前歷史)는 모든 조건들을 자신 안으로 통합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의 "최상의 사례", 참 인류와 참 인간성의 절대적이고 역사적인 봉우리일수록, 이러한 승리의 인식론은 인간 정신의 가능성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래서 초월적인 출발점은 인간론과 그리스도론, 신론을 다함께 성찰하고 체계화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교회론과 그 '부록'인 성사론(성례전에 관한 이론)도 역시 이런 방법으로 체계 안으로 수용될 수 있다.

 

신앙과 사랑과 소망의 사람이 자신을 실현하려고 가는 길은 존재론적으로(다시 말하면,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한) 초월적인 인식의 길에 상응한다. 여기서 "초월"이라는 개념은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초월은 항상 자신을 넘어서서 미래로 나아가려는 정신적 존재의 행위이다. 비록 "원죄적 상황"이 장애물처럼 인간 앞에 드리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실존적인"(즉 실존의 불가피한 구성 요소인) 존재인 그의 존재가 그를 괴롭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로운 자기 전달은, 그를 "초자연적인 실존"으로 만들고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돕기 위하여, 그에게 강력히 제공된다. 이리하여 은총을 경험한 인간은 자기 앞에 활짝 열린 길을 갖게 된다. 그는 의미있게 자신을 계획하고 실현할 수 있다. 토마스의 말을 빌리면, 은총은 자연을 높인다.

 

이런 종류의 교의학에 대한 가치판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라너의 획기적인 공로를 객관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신스콜라주의가 새롭게 등장하여, 철저히 역동적이고 대화적인 사고 방법을 발전시킨다. 만약 라너가 교회의 공식적 주장들, 명제들, 사고 과정들, 개념들을 정당화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고 한다면(그는 분명히 성서적인 근거에 비교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것이다. 즉 그는 "원죄", "화체설", "실체적 연합"과 같이 매우 어려운 주제들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리하여 라너는 신스콜라주의적으로 경직된 교리 체계들을 안으로부터 개혁하였으며, 비기독교적인 정신 사조에 이르기까지 초교파적인 대화를 가능케 하였다.

 

 

 


3. 초월론적 인간론


3.1. 문제제기


라너는 인간의 경험에 집중한다. 이 분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었다" 등의 전통적인 신앙 진술을 직접적으로 표명하는 것은 현대인의 인간 실존과는 상관없는 단순한 신화가 될 뿐이라고 여겼다. 전통적인 신앙 진술들의 고유한 의미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위해서는 현대의 의식지평 위에서 재전개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비신앙적이며 지적 다원주의가 만연한 인간중심의 시대 상황에서는 인간의 경험과 실존을 분석하는 인간학을 기점으로 신학을 전개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라너는 인간의 경험을 분석하여 그 경험 안에서 비명제적으로(unthematisch) 의식되는 인간 실존의 요소를 밝혀내고, 이를 통해 신학의 주제들을 전개시켜 나가려 했다.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 시대의 요청에 따라 신학은 인간학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으며, "인간에 대한 질문과 대답은 교의학 전반에 걸친 내용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3.2. 필요근거


라너는 이런 신학적 전환이 필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밝히고 있다.

 

첫째는 사실의 본질에 따른 이유인데, 신학적인 것은 물론이고 정신적인 인식의 본질에서 비추어 보아, 인식 대상에 대한 물음은 곧 인식하는 주체의 본질에 대한 물음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오늘날의 새로운 상황이 초월론적 인간학의 문제설정과 그 방법론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칸트, 독일 관념론에서부터 근대 현상학,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초월론적 인간학 - 이 말은 조금 뒤에 다룰텐데 - 으로 방향전환을 한 상황을 거스를 수 없다. 이런 정신사적 상황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학은 인간 중심주의를 거부할 수 없다고 라너는 전환의 필요성을 말한다. 셋째로,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은 호교론적 측면에서 요청된다. 현대인은 신학적 진술들을 신화로 여기며 이를 더 이상 신중히 믿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 계시 진리의 신비를 직접적으로 긍정하면서 전하는 것은 현대인에게 거부감을 줄 따름이다. 그래서 호교론적인 효과를 거두도록 신학을 전개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본성과 은총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가능하다. 본성과 은총의 관계 재정립이란 이것이다: 본성 안에는 은총을 이해할 수 있는 은총이 이미 부여되어 있다. 라너는 이런 세 가지 이유로 신학의 인간학적 전환이 현시대에 요구된다고 주장한다.

 


3.3. 인간


3.3.1. 신비

 

인간의 경험을 살펴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월해나가는 초월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인식, 사랑 등에 대한 경험을 할 때, 동시에 인간은 인식하고 사랑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그리고 더불어 자신의 인식과 사랑이 한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의식한다. 이런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들은 모든 인간 경험에 동반되고 또한 인간 경험의 조건이 되는데, 라너는 이와 같은 근본적인 경험을 초월론적 경험(transzendentale Erfahrung)이라고 한다. 초월론적 경험은 인간이 자신의 범주적 대상을 넘어서 존재 일반에 개방되어 있다는 원초적인 경험인데, 그 목표는 신비 자체이신 하나님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지향하며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신 신비 자체가 인간에게 전달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라너는 신비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미지의 존재라는 통념으로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게서 신비란 엄연히 존재하지만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 또한 신비이다. 라너에게 인간은 그 본질에서 보아 부족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이해하며 무한한 충만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이렇듯 어떤 정식으로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자각하며 하나님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정의내릴 수 밖에 없다. 다시금 인간이 하느님을 지향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신 신비 자체가 인간에게 양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3.3.2. 은총

 

그러므로 라너에게는 "인 간자체가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전달(Selbtmitteilung) 사건"이다. 인간의 자각, 초월론적 경험, 존재의 선취는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한 덕분이다. 하지만 라너는 은총이 외부에서 다가온다는 은총-외입주의에 반대한다. 은총은 인간에 지속적으로 내재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총은 인간과 세계에 이미 스며들어 있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 그의 인식과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스스로를 초월한다. 이 은총은 하나님의 행동일 뿐 아니라,인간에게서 존재하는 하나의 실재이며,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이다.

 

 

4. 초월적 그리스도론과의 관계

 

라너는 인간의 초월론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그리스도론을 전개한다. 인간의 본질 실현은, 하나님을 향한 텅빈 지향성인 인간이 자신을 충만한 신비에게 넘겨주어 자신을 비우고 포기하여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 될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로고스가 인간 본성을 취할 때 발생하였다. 곧 육화는 인간의 본질이 최고도로 실현된 사건, 곧 충만한 구원 사건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라너가 전개하는 그리스도론은 '초월적 그리스도론'(transzendentale Christologie)이다. 이는 인간의 존재 구조에서 출발하여 그리스도 신비를 해명하고자 하는 그리스도론이다. 라너의 초월론적 그리스도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1) 초월론적 경험이 가능한 것은 인간에게 이미 인식과 사랑을 위한 선험적인 지평이 주어져 있기 때문인데, 이 지평이야말로 절대 존재인 하나님이시며, 나사렛 예수를 통해 만나는 하나님이다.

 

2) 하나님은 모든 경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지평으로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며, 인간은 이 지평 위에서 그리고 이 지평을 향하여 자기 자신을 넘어선다.

 

3) 인간의 기본적인 존재 구조는 하나님의 자기 전달과 인간의 자기 초월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두 가지 운동이 최고로 실현된 모범이다. 이처럼 라너는 그리스도론을 인간학의 관점에서 전개하면서, 인간학적으로 전환된 그리스도론이야말로 현대의 의식 지평에 부합한다고 강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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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타종교관에 대한 비평

 

문상철<선교학•전임강사>

 


I. 서론

 

칼 라너(Karl Rahner)는 그의 제2차 바티칸 공회에서의 역할로 인해 20세기 로만 카톨릭 교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로만 카톨릭 신학계 뿐만 아니라 개신교 신학계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 그는 특별히 그 포괄주의적인 타종교관으로 인해 신학계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시도했다.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그의 포괄주의적인 신학의 핵심에 속하는 사상이다. 이 개념은 인간의 초월적 본성과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라는 신학적 명제들 위에 세워졌다. 이 개념은 라너 자신이 인정한대로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 신학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주장이었다.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의 신학적 입장과는 다른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너는 교리의 발전이라는 개념을 통해 교리적 입장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논리적인 변호를 한다.

 


이 글은 이상과 같은 라너의 세가지 주요 명제들에 대해서 성경신학적 및 철학적 신학의 관점에서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 비평하려고 한다. 이것은 포괄주의뿐만 아니라, 다원주의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그의 신학적 토대에 대해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는 궁극적으로 타종교들에 대해 사도적 전통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나아가서 무엇이 진정한 성경적 구원론인가를 생각하는 데도 통찰력을 제공해주리라고 생각한다.

 

 


II.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

 

칼 라너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했던 제 2차 바티칸 공회에서의 가장 논란이 되는 교리는 다른 종교들에서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방법으로” 가능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새로운 교리의 배후에는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현대 로만 카톨릭 신학뿐 아니라, 기독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특별히 이 개념은 신학자들 사이에 포괄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사상을 자극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바티칸 II는 명시적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특별히 Lumen Gentium(교회에 대한 교리적 헌장)에 그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Lumen Gentium 2:16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사유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 교회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은혜에 의해 감동을 받아, 그 행동에 있어서 양심의 작용을 통해 아는 대로 그의 뜻을 행하려고 한다면, 그들 역시 영원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고 분명히 천명하고 있다. Nostra Aetate에서도 카톨릭 신자들은 “신중하고도 관용적으로 다른 종교의 신자들과 토론하면서 협동할 것”을 요청 받고 있다. 이러한 조항의 목적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과 삶의 방식을 증거하면서 비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발견되는 영적 및 도덕적 진리들을, 또한 그들의 사회적 삶과 문화를 인정, 보존, 격려하도록 하는 것이다.” 라너 역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의 개념이 공회의 가르침과 호환된다고 보았다.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있어서 라너의 주된 논지는 “기독교가 비기독교적 종교의 신자들을 단순히 비기독교인으로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으로 간주될 수 있고, 간주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차후에 다른 조항에서 더 조심스럽게 설명되고 있다. 이에 대한 나중의 조항들을 읽으면 우리는 그가 독자들로 하여금 이 용어의 자체적 의미보다는 이 용어가 실제로 의미하는 바에 따라 판단하기를 원한다는 느낌을 준다. 이러한 노력 가운데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이 용어에 의해 의미하지 않는 것을 정리하였다.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조심스런 설명을 더하고 있다:
“모든 사람을, 그가 은혜를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사실이다. 그 자신의 기본적 결정에 있어서 그의 존재가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것을 진정으로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사람, 결정적으로 자신의 구체적 존재에 대항하도록 자신을 설정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유신론자,’ 심지어 익명의 ‘유신론자’로 간주될 수 없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지만, 모름지기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만이 그렇게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를 전체적으로 균등히 정당화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그 종교들 사이의 혼란과 무질서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보는 종교 상대주의의 태도, 혹은 다른 종교들 사이의 변환과 강조점의 차이가 전체적으로 볼 때 비본질적인 것들과만 관련되어 있다고 보는 태도”를 취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는 또한 오해로 말미암아 선교의 중요성이 약화되지 않도록 주의하기도 했다: ‘익명의 기독교’에 대한 이 논의가 선교, 설교, 하나님의 말씀, 세례 등의 중요성을 경감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 될 것이다” 고 하면서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오해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오해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념에 아무런 변경도 가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붙들린 바 된 사람은 모든 의미에 있어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 오늘날 어떤 경우에도 비기독교적인 종교가 여전히 개인의 구원을 위해 긍정적인 기능을 할 것이라는 것은 완벽하게 납득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이 자유로운 행위, 혹은 은혜에 의해 고양된 그리스도에 대한 근본적 관련성에 있어서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또 숙고는 없더라도 그의 영의 이 움직임의 기본적 최종성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진정한 신앙 행위를 하는 것인데, 이 최종성은 이미 계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 그는 말한다. 동시에 그는, “이 초자연적 최종성이, 명백한 숙고는 없지만 자유롭게 받아들여진다면, 거기에는 우리가 ‘익명의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사상을 기독교 인간론으로부터 끌어낸 두 가지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첫째 전제는, “지식과 자유에 있어서 인간 정신의 무제한적 초월적 본성의 교리”이며, 둘째는 “직접적인 하나님에 대한 소유에서 그들의 ‘초자연적 숙명’에 도달한 가능성 속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되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효과적 의지의 교리”이다. 첫번째 전제는 소위 “초자연적 실존”(supernatural existential)의 개념과 상관이 있으며, 둘째 전제는 “신적 자아 수여”(the divine self-bestowal)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이 두 개념은 기본적으로 라너가 발견한 기독교 인간론에서 끌어낸 것이다. 이 두 관심 영역 외에도 겉으로 보기에 성경 외적 사상의 출현이 정당화 되어야 한다. 그는 ‘교리의 발전’의 개념을 통해 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개념 또한 성경의 빛 속에서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라너 신학의 한 특징은 그것이 인간론적 전제들에서 출발한다는 데 있다. 라너는 주장하기를,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련성 속에서 절대적 초월자로서 이해되는 순간, 신학에 있어서 ‘인간 중심성’과 ‘신중심성’은 반대 개념들이 아니라 두 측면에서 본 한 개의 같은 개념이라고 한다. 따라서 라너에 있어서 철학적 신학과 계시 신학은 모두 초월적 인간론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우리는 신학적 논의의 결과가 성경적 기준에 의한 평가로 이어지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여러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바대로, 이러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라너 신학의 특징일 뿐 아니라, 종교다원주의를 표방하는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될 수 있다. 따라서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포괄주의적 사상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평가는 ‘초자연적 실존’과 ‘신적 자아 수여’의 두 개념들을 면밀히 검토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이 두 개념에 대한 비평은 자연스럽게 현대 종교다원주의의 근본 사상에 대한 비평이 될 것이다.

 

 

 

III. 인간의 초월적 본성의 개념

 

라너에게 있어서 인간은 “무제한적인 지식과 자유의 초월성을 소유하는 존재”이다. 인간의 초월성에 대한 이 일반적 전제는 내적 동력, 매개, 의식적 인지, 도덕성의 개념 속에서 효과적으로 설명된다.

 

첫째로, 그는 인간의 내적 동력이 절대 존재, 절대 희망, 절대 미래, 선 자체, 무조건적인 옮음,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에게로 향한다고 설명한다.

 


둘째로, 그는 범주적 대상을 통해서 일어나는 매개는 종교적인 개념일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달리 말하면, 이 물질이 자유롭게 완전한 책임성과 자아의 결정성의 입장에 도달하는 한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 관련성은 일상적이고 세속적이며 물질적인 매개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지적 능력의 일부인 사고는 반드시 초월적 본성을 규정하는데 있지 않다. 이 때문에 명백한 무신론자는 그 본성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이른 바 “무주제적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개념 외에 다름 아니다.

 


넷째로, 이 초월성을 가진 인간은 그의 긍정적인 도덕적 결정에 있어서 양심의 무조건적 부름을 인정할 때 익명의 유신론자가 될 수 있다. 무조건적 양심의 작용으로 인해 열리는 궁극적 가능성의 조건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존재와 관련된다. 라너에 있어서 이 도덕성은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자유로운 인간성의 절대적 가치와 절대적 존엄성에 기초해서 세워진다.

 


다섯번째, 초월적 본성을 지닌 인간은 역사적 정황에 개입되어 있다. 즉 인간의 이러한 영적 존재로서의 초월성은 역사적 정황을 넘어선 인간 삶의 분리된 부분으로 남지 않는다. 그것은 역사적으로 구성된 초월적 하나님 경험이다.

 


여섯번째, 모든 인류에 현존하는 초자연적 실존은 그 동력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불가변적 정점을 향한다. 달리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인으로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부여하심에 있어서 으뜸적이고 클라이맥스적인 정점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의 본질적 존엄성은, 그가 하나님 자신을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에 대해 자신을 열 수 있고 열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있다.

 


일곱번째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그들의 양심에 충실하다는 점에서 교회의 영 속에서, 그들에게 연장된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연합되어 있다.
초월적 인간론의 이러한 측면들은, 비록 지식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상호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라도, 인간이 주체이며, 객체나 사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초월적 인간론에서 인간은 스스로 계획하고 개방된 미래를 기대하는 존재이며, 희망하고 하나님에 의해 모든 절대적 미래를 포용하도록 능력을 부여 받은 존재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의 이러한 본래적 본성은 “인간 삶의 전적인 성취”를 추구하는 모더니티에 호소한다. 이것은 세계가 분명히 인간의 처분에 달린 측면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 주체의 개념에서 다른 주체들과의 인격적 의사소통 속에서 존재하는 주체의 자유 개념이 일어난다.

 

이 초월적 인간론은, 라너의 가장 체계적이면서도 시적으로 쓰인 최후의 저작에서 절대적 신비의 현존 속에서의 인간의 개념에 의해 강화된다. 그는 신비를 초월 속에 거하는 거룩하고, 명명할 수 없고, 무한한, 처분된 속성으로 묘사한다.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 존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하나님은 스스로 모든 것의 기초를 놓은 어디 곳에서나 존재한다. 다른 한편으로, 세계는 하나님의 초월적 토대와 하나님의 심연 속에서의 궁극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라너의 초월적 인간관은 확실히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두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인간의 영적 만남 속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이해를 증진하였다. 초월성에 대한 그의 논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적 조명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는 적절치 못한 부분이 있다. 그의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인간의 본성에 있어서의 죄성의 효과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인간의 본래적 초월성이 모든 인간의 원죄와 그 효과, 사단의 공격 앞에서의 인간의 무력감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측면을 등한시 하는 인간론은 모두 나이브하다고 할 것이다.

 


라너는 그의 기독교 신앙의 토대(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에서 초월적 인간론에 대해 2장을 할애 한 후 인간의 죄악된 본성에 대해 다루면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항해서 결정을 내릴 가능성에 대해 토론한다. 그 세부적 내용에서 라너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의 힘에 대해 온전히 인식하지 못한다. 그의 논리는 미묘하게 죄의 효과를 극소화하는데, 그는 “자유의지의 하나님에 대한 부정은 하나님에 대한 초월적이며 필수적인 긍정에 기초하고 있으며, 다른 방식으로는 일어날 수 없다고 본다. 여기서 자유의 부정적 결론의 초월적 가능성은 그 필수적 긍정에 의해 타당성이 인정된다. 모든 지식과 자유 행위는 초월적 용어와 근원으로 인해 활성화 된다. 이러한 입장은 신학적 중심 주제인 초월성의 개념과 함께 가능해지는 일종의 형식 논리의 결과이다. 이런 논리적인 논증 속에서 그의 죄에 대한 낮은 관점은 계속된다:

 

우리는 먼저 세상에는 진정으로 주관화된 악의 가능성이 강하고도 위협적으로 존재해왔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지만, 이 가능성이 실체가 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자유에 대해 치명적이고, 인류의 발전 속에서 일어나야 하는 불행한 상황들이 낮은 데서 시작되어 위를 향하는 발전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않았으며,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가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라너는 또한 원죄가 그 도덕적 질에 있어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되는 것을 부인한다. 그는 원래의 자유 행위로부터 비롯된 개인적 죄책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없다고 보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거나 인간에 반대되는 개인적 초월성에 대한 존재론적 부정이기 때문이다. 원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의 개인적인 견해라기보다 카톨릭 신학의 입장이다. 그는 원죄를 비유적인 의미로 받아들이지만, 명료한 단일적 의미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선재 은총에 대한 의도적인 강조와, 죄와 원죄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로 말미암아,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통해 인간으로 하여금 자유롭고 선한 의사 결정을 하기 이전에 성화시키는 특질을 부여하도록 한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금 이러한 라너의 주장들이 과연 성경적인 교훈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된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바울의 언어는 라너의 관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고 말한다 (롬 3:23). 또한 그는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다” 고 말한다(롬 5:14). 나아가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고 말한다. 이러한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라너는 인간론에 있어서 지나치게 낙관적임을 알 수 있다. 인간론에 있어서 우리는 비관적일 필요도 없으며 낙관론 일색일 수도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죄성 사이에서 성경적인 균형을 가질 필요가 있다.

 

 


IV.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의 개념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의 두 번째 중요한 사상적 토대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이다. 그것은 보편적이고 초자연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기 원하시므로 다른 종교 속에서도 구원을 받을 사람들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원죄와 개인적인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의 보편적 구원을 의도하시기 때문에 삶의 어떤 정황에서도 인간은 구원을 얻게 될 진정한 가능성을 가진다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이 구원 의지는 초자연적 은혜의 전파에 의해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 은혜는 진정한 구원 행위와 신앙 행위의 조건을 바꾸는 변형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라너는 두 가지 요소를 다루고 있다.

 


첫째, 이 은혜는 인간 자유의 지속적인 가능성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칭의 자체의 형태로 표현되거나 칭의를 가져다 오는 수용으로 표현되거나, 아니면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거부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실존적 실체에 대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의지 속에서 개인에게 지금 주어지고 효과적으로 부여되는데, 그 으뜸가는 원칙 속에서 그리고 더 개발되어야 하는 씨로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은혜는 인간의 의식을 변형시킨다. 그것은 인간 정신의 자연적 행위의 범위를 벗어나 존재하는 형식적 대상을 가져온다. 따라서 반드시 하나의 대상이나 온전히 생각되어진 것으로 인식되지 않을 것이며, 의식적으로 알려진 인간 자체의 무제한적 초월성의 근본적 본성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위의 두 가지 측면 외에도 다른 중요한 내용들이 관련되어 있다. 셋째로, 신적인 자기 부여는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뿌리, 영적 본성의 가장 깊은 곳에까지 관통하며, 거기서부터 인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이러한 본성의 방향을 바꾸어 하나님의 가까운 임재를 향하게 한다. 즉, 그것은 이 본성에 내적 동력과,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 경향, 즉 은혜를 부여한다.

 


넷째로, 모든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로 인해 모든 개인은 긍정적인 구원의 방편을 가져야 하는데, 적어도 인간에게 초자연적 구원을 소유할 가능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구약 성경 밖에 존재하는 종교들이 인간적인 숙고나 인간의 사악함에 대한 인식에서 한 종교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들인 결과라기보다, 자아 의지적인 결정의 일환으로 종교를 결정한 결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다섯번째로, 비기독교적인 종교들은 원칙적으로, 그리고 그 자체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오심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의해 추월되고, 쓸모 없게 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팽창이 다른 종교들의 적절성을 폐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논의는 상호 호환성이 없는 두 명제들 사이의 딜레마를 나타낸다. 라너가 강조하는 첫번째 측면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모든 인간이 구원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두번째 측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 구원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두 상반되는 관점 가운데서 그는 출구를 발견하려고 한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인간이 교회의 구성원이 될 수 있어야 하며, 이 능력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점과 순전히 논리적인 가능성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적이고 역사적이며 구체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너무 단순하게 본다는 것이다. 라너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모두를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딤전 2:4); 하나님께서 홍수 후에 노아와 맺은 화평 언약은 결코 폐지된 적이 없다: 그 반대로, 하나님의 아들은 그의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비견할 수 없는 권위로 모든 인간을 포용하면서 그것을 완성하셨다.

 


라너는 이 구절들을 석의함에 있어서 균형을 잃고 만다. 디모데전서에서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는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 인한 자유의지의 잘못된 기능 및 사용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이 논의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구절들은 얼마든지 더 있다. 에베소서 1:4,5은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하나됨의 개념을 가지고 예정에 대해 감사하다는 입장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 예정의 은혜의 수혜자로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선택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윗, 12 사도들, 바울과 다른 많은 제자들은 하나님의 선택된 그릇들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언약적 관계 역시 선택적으로 발전된다.

 


라너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개념에는 또한 논리적 오류가 있다. 그것이 그야말로 보편적이려면, 하나님의 구원의지는 사람이 아무리 완악하고 죄악되더라도 인간이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라너가 원한 만큼, 폭이 넓다면 비도덕성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종교들을 폐지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기독교가 전파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된다. 그의 철학적 신학은 여기서 한계를 보이고 있다.

 

 


V. 교리적 발전의 개념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사도 시대에는 교회에 없던 내용이다. 많은 점에서 그 개념은 전통적인 로만 카톨릭 신학을 뒤집어 놓은 것이다. 라너는 이러한 일관성의 결여에 대해 설명을 해야 한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라너는 표면적으로 대치가 되는 교리들의 조화를 꾀하고 있다.

 


마리아에 대한 교리로부터 예를 들면서, 라너는 그 교리가 역사적 이야기 속으로 나중에 들어와야 했던 점을 부각시킨다. 처음 복음이 전해졌을 때 이 교리는 현재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나중 교회가 새로운 교리를 발전적으로 전개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교리에 대한 관점은 정적이라기보다 동적이다. 그의 ‘교리의 발전’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우선적으로, 라너는 계시된 진리는 항상 그대로의 내용이며, 정확하게 진리로 남는다. 즉, 그것은 실체를 가리키며 항상 구속력이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계시는 사도 시대의 종말과 함께 종결된, “최종적이며, 능가할 수 없는 계시”이다. 이런 주장과 함께 그는 역사적 상대주의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둘째로, 모든 인간적 주장은, 심지어 신앙이 하나님의 구원 진리를 표현한다는 주장까지도 유한하다. 이것은 그 주장들이 전체적인 진리를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신앙이 표현되는 모든 공식이 그 진리를 보존하는 동안에도 원칙적으로 다른 진리 주장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내용은 또한 역사적 사실 속에서 전해진 것이며, 사도들이 구두로 선포한 내용이기도 했다. 이 진리들이 기독교 신앙의 토대와 어떤 관련성 속에서 대두되느냐 하는 “진리의 계층 구조”의 개념은 그 자체의 한계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단번에 영원히 선포된 계시 진리의 정점을 중심으로 진화하고 회전하는 신학에 대해서 우리는 의문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의 발전뿐만 아니라 교리의 발전이 있으며, 신학의 역사뿐만 아니라 (같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 이후에도) 신앙의 역사가 있음을 인식한다.

 


넷째로, 계시는 하나의 구원적 사건이다. 오직 그 시점에서만,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만 진리들이 전달된다. 구원 역사의 이 지속적인 대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능가할 수 없는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확실히 세계에 주셨다. 라너는 계시의 본성과 관련하여 이 개념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계시는 단순히 유한한 것들의 합이 아닌 것이다.

 


다섯번째로, 교리의 결정은 교회의 신앙에 속하며, 교회는 자신을 사실상 단순한 “편의성”의 고려에 의해서,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정적 지식을 완전히 소유한 것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교회는 “권위 있는 교육 기능”과 함께 수직 계층적으로 구성된 교회를 의미한다. 교회는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인식의 기관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관에 따라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단순한 인간의 숙고의 결과 이상인, 신학적 행위의 결과로 등장하는지 말할 수 있다.

 


여섯번째로, 계시의 즉각적인 명제들 속에 단지 가상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종료의 지식은 ‘계시’로 불릴 수 있고, 그렇게 불려야 한다. 또한 그 결과 교회에 의해 엄격한 의미에서의 신적 신앙의 대상으로서 선포될 수 있다. 그러나 카톨릭 신학에 있어서 다수 의견은 “추론된” 명제들은 단순히 인간적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곱번째로, 원래적인 명제들과 교리적 발전의 결과로 도달한 것들 사이의 관련성은, 한 명제 속에서 공식적이거나 가상적으로 암시되는 것과, 성령의 지원과 빛 속에서 진행되는 논리적인 절차에 의한 명시적 설명 사이의 연관성으로 구성될 수 있다. 교도권의 기능은 보존하고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도권은 성령의 지원에 의존한다.

 


요약하면, 라너는 성령과 말씀, 성경과 전통의 조화로운 역사 속에서 교리의 진화의 개념을 설명한다:
성령과 말씀은 모두 원칙적으로 사도들의 것과 같은 경험의 영원한 능동적인 잠재성으로부터, 비록 전통 속에서 전해져 내려온 사도적 말씀에 따라 지지되어 사도들의 경험에 의존하며 그것을 연장하는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말씀, 성례, 권위의 전승을 통해 사도들과 연결된 것에서 끊어진다면 역사적인 뿌리의 상실로 인해 결코 계속해서 살 수 없을 것이다.

 


라너의 결론은 발전된 교리가 성령의 인도함 아래에서 사도들과 성경의 권위만큼이나 구속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류가 없는 것은 교회라는 결론 속에서 로만 카톨릭의 전통적인 교회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라너의 이러한 관점은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 대해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개신교의 관점과는 거리가 있는데, 특별히 개신교의 오직 성경 주의와는 상반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복음주의적인 관점에서 볼 때 교리의 발전 개념은 시대와 문화를 넘어선 사도적 복음 이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어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다.

 


먼저, 라너는 두 교리 혹은 교도군 사이에서 모순의 가능성에 대해 적절히 다루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로만 카톨릭 교회가 개신교회를 “이단”으로 정죄한 트렌트 공회와, 같은 신학적 입장을 가진 집단에 대해 화해적 제스처를 하면서 이들을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한 제2차 바티칸 공회 사이의 모순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트렌트 공회는 종교개혁자들이 주창한 칭의론을 분명히 거부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두 교회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에큐메니컬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분위기의 변화”로 치부할 수 없는 근본적인 변화인 것이다. 따라서 교리의 발전이라는 이 개념은 어떻게 명백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교리가 변경 가능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지를 설명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둘째로, 라너의 성경과 전통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는 모호성 혹은 모순이 있다. 그는 성경의 말씀이 항상 살아 있는 교회의 말씀이라고 보면서, 이 말씀이 계속해서 교회의 살아 있는 자체적 전통에 의해 지탱된다고 본다. 간단히 그 말씀은 이 교회의 자체적인 전통의 살아 있는 증거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라너는 이렇게 말한 다음 다른 논리로 전통의 우선성을 주장한다:

 

한편으로, 성경은 그 자체로서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이 재생되고 교회 안에서 전해지는 전통의 결과이며 양식이다. 그것은 또한 하나의 전통의 양식이며, 전통의 객관화의 양식이기도 하다. 그것은 항상 교회의 전체적 과정, 심지어 구전 전통의 과정에 덧붙여져 있다.

 


만약 이 주장들이 상호 호환성이 있는 것이라면, 철학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신학의 한계만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우리는 성경의 권위와 관련하여 모순된 결론으로 연결되는 논리적 전개의 적절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베드로전서 1:24, 25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VI. 결론

 

칼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회의 주된 엔지니어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현대 신학에서 포괄주의는 물론 다원주의적인 사상을 시작한 인물이다. 그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순수하게 성경 신학적 토대 위에 세워졌다기보다 철학적 명제들 위에 세워졌다. 여러 전제들 가운데서 세가지 명제들에 대해서 이 논문은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라너 자신이 밝혔듯이 인간의 초월적 본성과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라는 두 가지 명제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에 초석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교리의 발전 혹은 진보의 개념은 모순되어 보이는 교리적 차이에 대한 그의 대답으로 주어지기도 했다.

 


인간의 초월적 본성에 대한 교리는 긍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 즉 죄의 효과를 소홀히 여기는 점에서 오류가 있다. 라너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지나치게 낙관적임에 틀림없다. 바울의 자신의 죄성에 대한 탄식은 우리의 복음 이해와 인간관에 있어서 핵심을 이룬다.
하나님의 구원 의지에 대한 교리 또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입장으로 비판 받아 마땅하다. 이 교리에는 성경적 자료들과의 충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체의 논리에 오류가 있다. 하나님은 인류에 대한 그의 관계에 있어서 보편적이기도 하시지만, 구체적이시다. 특별히 구속 역사와 언약적 관계에서 하나님은 항상 거룩한 그의 백성을 일방적 기준에 의해 선택하셨다.

 


발전된 교리의 개념은 많은 비성경적 명제들에 대한 적절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현대 로만 카톨릭 교회의 변경된 교리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사도적 전통의 계승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반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라너는 이 개염을 통해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그의 노력은 그의 교리적 입장을 더욱 모호하게 할 뿐이다.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이 교회 전통이나 교도권과 충돌할 때 종교 상황의 변화에 따른 신학적 변화라는 입장은 충분한 설득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이 개념에 대해서도 그는 견고한 교리적 토대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칼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의 개념은 성경적 자료에 의해서 지지되지도 않고, 논리적으로도 타당성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있다. 이 개념에 대한 자세한 분석의 결과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적 실체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 자극적이지만 비성경적인 개념은 성경의 계시의 말씀과 사도적 전통에서 벗어났으며, 성경과 성령의 일관된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교리이다.

 

VII. 참고 문헌란


1. 1차 자료들


Flanner, Austin, O.P., General Editor. Vatican Council II: The Conciliar and Post Conciliar Documents, Northport, NY: Costello Pub. Co., 1987.
Rahner, Karl. “Christianity and the Non-Christians” in Hick, John and Brian Hebblethwaite eds. Christianity and Other Religions.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0. Originally the Notes of a Lecture Given on 28 April 1961 in a Meeting, 1961.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 God, Christi, Mary and Grace. Tr. By Cornelius Ernst. Baltimore: Helicon Press, 1961.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I- Man in the Church. Tr. By Karl-H. Kruger. Baltimore: Helicon Press, 1963.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V- More Recent Writings. Tr. By Kevin Smyth. Baltimore: Helicon Press,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6.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VI- Concerning Vatican Council II. Tr. By Karl -H. and Boniface Kruger. Baltimore: Helicon Press, London: Darton, Longman & Todd, 1969.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IX- Writings of 1965-67 1. Tr. By Graham Harrison.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2.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 Writings of 1965-67 2. Tr. By David Bourke. New York: Herder and Herder, 1973.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VI- Experience of the Spirit: Source of Theology. Tr. By David Morland. New York: The Seabury Press, 1979.
. I Remember. Autobiographical T. V. Interview Material, 1985.
. Theological Investigations. Vol. XXI- Science and Christian Faith. Tr. By Hugh M. Riley. New York: Crossroad, 1988.
. Foundations of Christian Faith: An Introduction to the Idea of Christianity. Tr. By William V. Dych. New York: Crossroad, 1989.
Schroeder, H. J. O.P. Canons and Decrees of the Council of Trent. St. Louis: B. Herder Book Co., 1941.

 


2. 참고 문헌

Berkouwer, G. C. The Second Vatican Council and the New Catholicism. Tr. By Lewis B. Smedes. Grand Rapids, MI: William B. Eerdmans, 1965.
Hick, John. The Metaphor of God Incarnate: Christology in a Pluralistic Age. Louisville, Kentucky: Westerminster/John Knox Press, 1993.
Knitter, Paul F. No Other Name?: A Critical Survey of Christian Attitudes Toward the Word Religions. Maryknoll: Orbis, 1985.
Runia, Kaas, “Justification and Roman Catholicism” in D. A. Carson ed. Right With God: Justification in the Bible and the World. Published on Behalf of the World Evangelical Fellowship by the Paternoster Press and Baker Book House,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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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의 계시이해

 

 

1. 머리말

 

그리스도교는 자연종교(自然宗敎)가 아니라 계시종교(啓示宗敎)라고 자처하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일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시작된 역사적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연적 종교심에 입각해서가 아니라, 인간 외부로부터 다가오는 하느님의 계시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개념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는 데에서 열쇠 역할을 하는 일차적 기초개념이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그리스도 신앙은 계시를 전제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성취는 하느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 신앙세계 속에서 이토록 중요한 실재로서의 계시가 하나의 주변현상이 된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근세이래 급격하게 일기 시작한 종교비판은 계시비판을 포함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절대종교성을 근본으로부터 의문에 처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 안에서조차 계시란 단어가 성대한 양식으로 사용되기는 하지만 공허하게 느껴지기조차 하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계시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게 요청되고 있다.

 

계시개념은 중세신학 안에서 비로소 전문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중세신학의 계시개념은 지성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구원은 인간의 최고 능력인 이성을 위한 선(善)으로 나타났으며, 구원은 인식 가능한 세계를 지성적으로 직관하는 속에서 추구되었다. 계시가 구원의 인식을 가지고 오고 구원으로서의 인식을 가능케 한다는 계시관이 형성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지성주의적 계시관은 교시적 계시(敎示的 啓示) 모델로 이끈다. 교시적 계시 모델 속에서 계시는 구세사 안에서의 하느님의 가르침의 내용애 국한되는 양상을 띤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계시개념이 구세사의 정보적이고 교리화되는 이론 부문에로 국한되기에 이른다. 여기서 계시는 자연적 실재이거나 초자연적 실재에 관한 하느님으로부터의 가르침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교시 이론적 계시관 안에서 한편으로는 계시개념의 협소화가 발생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계시사가 내적으로 유기적인 가르침으로 파악된다. 이 교시 이론적 계시관도 근세 이래 신앙의 신비를 초자연적 지성의 신비로 파악하는 데로 이끌었다. 신앙의 신비가 초자연적 지성의 신비로 규정되었으며 신앙이란 자연적 지성능력으로 파악되지 않는 계시된 진리를 순명으로 진리라고 간주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그래서 계시란 초자연적 가르침인 교리의 전수로 파악되었으며 계시의 경위는 하느님에 의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지성적 개념으로 파악된 진술 명제로 해설되었다. 근세적 계시비판은 이렇게 교리화된 계시개념에 가해졌으며, 오늘날 계시의 문제가 새로운 각도에서 처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계시관의 새로운 전기를 이룩하였다. 이 공의회는 구세사의 교시부분만이 아니라 전 구세사건을 하느님의 계시로 파악함으로써 계시개념을 그리스도 신앙이 입각하고 있는 포괄적 기반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계시 밖에서는 어떠한 구세사도 존재하지 않음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계시가 어구상의 내용 전달이나 인간이 접근 불가능한 내용에 관한 하느님의 교시로서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실제적인 인격적 자기 전달로 규정된다. 계시가 개념적인 지성주의적 진리계시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 구원실재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도록 한다. 이러한 계시개념은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를 교시적 계시관과는 다르게 파악하도록 이끈다.

 

독일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계시의 주제를 그의 종교철학적이고 신학적 사상 속에서 깊이 있게 구명하였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인간 존재의 특정부문만이 아니라 전 차원을 규정하는 실재이다. 그런데 하느님은 인간을 외부로부터 규정하는 실재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심층부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실재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계시와 인간 규정이 라너에게서 독특하게 이해되고 있다. 그런데 라너의 계시이해는 ‘인간학적 전환’을 신학 안에로 이끌어 들이려는 시도의 산물인 그의 초월 신학사상의 이해를 통해서 올바로 파악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라너의 신학사상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으며 그 속에 그의 계시관에 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글에서는 모든 신학적 주제의 근거와 기초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한 신학 주제인 계시가 라너에게서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이를테면 이 글은 선행하는 연구 결과 중에서 계시와 관련된 내용을 확대 부언하여 한 편의 논문으로 작성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겠다.

 

이글에서는 먼저 라너의 활동 초기인 1940년대 초에 발표된 종교철학서 안에 담긴 계시 규정의 실상을 서술하낟. 이어서 라너의 계시관의 핵심부분이라 할 수 있는 초월적 계시와 그 역사적 중재의 파악 경위를 서술할 것이다. 끝으로 구약과 신약의 성서적 계시사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가 라너에게서 어떻게 파악되는가를 구명할 것이다.

 

 

2. 종교철학적 계시 규정

 

라너는 1941년에 발간된 종교철학서 「말씀의 청자 H rer des Wortes」안에서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자유로운 계시의 사실성과 함께 인간의 계시 수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라너의 계시 발생의 제시경위는 존재에 대한 질문(Frage nach dem Sein)을 제기해야만 필요성의 형이상학적 분석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라너의 후기 신학작품에서 부연되고 있는 초자연적 계시 규정의 초기 형태를 대하게 된다.

 


2.1 라너에 따르면 인간이 존재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야만 하는 필요성은 그의 유한성을 단적으로 제시한다. 인간은 자신의 원의와는 상관없이 세계에 피투된 존재이면서도 단순히 현전하지(vorhandensein) 않고 현존한다(dasein). 인간은 그의 인식행위를 성취할 때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대상들을 넘어서 존재(sein)를 지향하는 초월을 이룩한다. 그런데 존재, 절대존재 자체는 자신을 인간 인식의 직접적 대상으로 제시하지 않고 지성의 본질로서의 전취의 절대폭(絶對幅, absolute Weite), 지평(地平, Horizont)으로서만 제시할 뿐이다. 전취는 인간이 세계 안에서 만나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개별 대상을 유한한 것으로 파악하고 이 개별 대상의 하성(何性, quidditas : Washeit)을 추상해 내는 지성적 가능성이다. 이 전취는 매 인식작용 속에서 개별대상을 능가하여 존재를 지향하는 초월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별 대상의 유한성 인식은 존재의 지평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라너는 인간의 매 주체작용마다, 존재를 지향하는 전취 속에서 하느님의 존재가 함께 긍정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식의 필연적이고 따라서 항상 이미 성취된 조건으로서 이 전취 속에…절대존재의 실존이 함께 긍정되고 있다. 가능한 대상으로서 전취의 폭에 맞닿을 수 있는 것이 함께 긍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절대존재가 전취의 폭을 남김없이 채울 것이다. 이러한 의미,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말할 수 있다. 전취는 하느님을 지향한다.” 여기서 인간의 절대존재에 이르는 통로는 그가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을 통해서만 주어져 있다. 세계 안에서 만나게 되는 개별 존재자는 전취가 지향하는 절대폭을 채우지 못하는 속에서 유한한 것으로 인식되는데,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절대존재는 절대폭을 남김없이 채움으로써 인식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라너는 전취의 지향점으로서의 절대존재는 유한한 존재자의 부정 속에서 추후적으로 반성된다고 본다. 인간은 유한한 대상에 항상 내포되어 있는 제한성·부정성을 전취 속에서 명시적으로 만듦으로써만 절대존재를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이 모든 유한성을 부정하면서 유한성의 피안을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만 무한성 속에서의 하느님을 인식하게 되기 때문에 하느님의 무한성 자체는 인간의 유한한 정신에 은폐되어 머문다고 보고 있다.

 


2.2 하지만 라너는 단순히 인간의 유한성과 하느님의 은폐성을 제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기본구조를 보다 깊이 분석하려는 의도하에 하느님의 자유로운 현시성을 제시하고자 시도한다. 존재에 대한 질문이 역시 고찰의 출발점이 되기는 하지만 정신의 또 다른 기능인 ‘의지(Will)’가 명시적으로 분석과정에 등장한다.

 

라너는 존재에 대한 질문을 제기해야 하는 필연성에서부터 유한한 현존재 자체의 피투성의 필연성을 이끌어 낸다. 그런데 라너는 현존재의 피투성의 필연적 긍정을 인간이 자기 현존재 자체를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다. “그(인간)는 자신의 피투성(Geworfenheit)을 필연적으로 긍정하는 가운데 자신의 피투성 속에서 그리고 피투성에도 불구하고 자기 현존재를 절대적으로 긍정한다.” 인간이 세계 안에서 현존하고 있다는 우연적 사실의 긍정이 불가피하게 필연적이기 때문에 인간 현존재의 우연성 속에서 절대성이 현시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실존은 자기 준재의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가능성을 자체적으로 배제한다는 것을 라너는 말하려 하고 있다.

 

이 점은 라너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유한하고 피투된 현존재와 필연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의 절대 존재에로의 초월도‘오로지’비필연적인 우연한 존재자에 대한 관계의 필연성 속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말이다.

 

라너는 우연한 현존재를 절대적으로 정립하는 요체를 ‘의지’속에서 보고 있다. 이러한 정립은 단순한 정적(靜的) 이해일 수는 없고 의지 작용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우연한 것의 인식적 정립의 근거는 우연히 인식된 것 자체에 놓여 있지 않고 정립(定立, Setzung)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식적 정립의 근거는 의지이다. 여기서부터 인간의 본질을 구성하는 존재일반에로의 초월이 결국에 가서는 의지를 통해서 작용된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서 라너는 의지를 인식의 내적 소인으로 규정한다.

 

라너는 우연한 현존재를 의지적으로 긍정하게 되는 필연성에서부터 절대적 존재의 수용과 존재일반의 조명성을 추론해 내고 있다. 라너에 의하면 우연한 현존재의 절대정립은 필연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자에게서 나온 것이고,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 처신은 자유로운 정립의 추성취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통찰에서 존재와 인식을 동일시하는 초월철학적인 존재관이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라너의 논증양식은 이 관찰을 확인해 준다. 우연적인 현존재의 이 절대정립이 우연적이라면 존재 자체의 원칙적 조명성이 지양될 것이다. 우연한 것의 정립의 필연성이 자유롭지 않다면, 이 정립이 “어둠에 찬 자기 자신에 대하여 모르고 있는, 조명되지 않은 근거에서 나오는 것임에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에서부터 라너는 의지를 ‘자유로운 정립의 정립된 추성취(der gesetzte Nachvollzug einer freien Setzung)’라고 규정한다. 라너는 인간의 저 의지적 정립은 하느님의 정립이라고 추론해 내고 있다. “인간인 현존재의 이 자유롭고 본원적인 정립은…절대존재의 정립, 하느님의 정립일 수밖에 없다.”

 

라너에 의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인간의 필연적이고 절대적 처신은 자유로운 창조주를 긍정함을 내포한다. 인간이 자기의 피투성을 필연적으로 긍정해야만 하는 자신에 대한 처신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유로운 의지적 정립으로 긍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 존재가 순수 존재의 자유로운 힘에 의하여 지탱된다고 알고 있다.” 이에 의하면 하느님은 자유로운 의지력으로 유한한 존재자를 지탱하여 준다. 하느님은 자유롭고 강대한 인격체이다. 이어서 그는 창조를 ‘절대자 자신으로부터 발해진 자유로운 말씀’이라고 규정한다.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자유로운 인격체로 제시하면,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개현의 가능성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자유가 모든 인격체의 특징을 드러낸다면, 한 인격체는 의지 행위를 통해서만 자기 자신을 다른 인격체들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인간은 정신으로써 자유로운 강대한 인격체인 하느님과 대치하여 있다. 그런데 라너에 따르면 유한자의 자유로운 정립은 하느님의 자유로운 창조력에 온전히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적 창조는 결코 하느님의 자유로운 행위의 방향에 대한 명료한 전 결정(前決定)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의 초월 속에서 개현된 가능한 대상들의 지평은 직접적인 하느님의 관조가 아닌 모든 것보다 원칙적으로 광범하다. 여기서부터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이기는 하나 아직 궁극적으로 충만되지 않은 추우러 속에서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서기 때문에 그는 그의 일차적인 존재에 대한 질문 속에서 이미 하느님이 그와 함께 자유로이 행동하실 가능성 앞에 서고 이처럼 가능한 계시의 하느님 앞에 선다고 추론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자신의 기본태세의 힘으로 항상 하느님 앞에 서기 때문에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인간은 정신이나 자유로서, 하느님이 계시할 것을 요청하지 않으나 그의 침묵이나 이야기를 듣는다. 인간은 자신을 드러내거나 침묵하는 하느님 앞에 선다.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가능한 말씀을 필연적으로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신학적 의미에서의 계시는, 하느님이 자기를 개현하거나 아니면 폐쇄하거나 하는 자유로운 결단으로서가 아니라, 당신의 은폐된 본질의 사실적 개현으로서 발생한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바로 이러한 계시는 인간 기본태세의 힘으로 인간이 필연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없다. 신학적 의미에서의 게시는 인간에게 부채(負債)가 아닌 순수한 선물로 머문다. 결국, 하느님의 절대존재는 유한한 존재에 대하여 자유로운 존재이다.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기 개현으로서 계시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려는 시도는 인간 현존재의 구조를 보다 상세히 분석하려는 결의하에서 착수되었다. 그런데 분석 결과는 중요하다.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초월이 오로지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처신 속에서 성취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는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다. 개별 대상에 대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가 결국에 가서는 인간 자신의 자기 구정이 되기 때문에 인간은 많은 개별적인 결단 속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자기 자신과 하느님께 대해 처신하고 있다.

 


2.3 「말씀의 청자」에서 라너는 인간의 역사성(歷史性, Geschichtlichkeit)을 인간의 기본태세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여기서부터 ‘역사(歷史, Geschichte)’의 형이상학적 규정을 연역해 낸다. 인간의 역사성 연역은 하느님의 계시가 발생하는 장(場)을 규정하는 것과 내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라너는 다시 한 번 인간의 인식구조 분속에 임하였다. 분속 결과로 역사성이 인간 정신의 고유성으로 제시되기에 이른다.

 

라너는 인간의 역사성을 시공간을 형성하는 인간의 육신성(Leiblichkeit)으로부터 연역하였다. 그런데 그느 질료적 육신의 고유성에서부터 연역된 역사성을 논하는 이외에 진정하고 필연적이며, 넓은 의미에서의 자유로운 행위가 역사적이라는 것을 밝힌다. “인간이 자유로운 행동자인 한, 하느님 지향의 초월에서까지, 즉 절대자에로의 그의 관계 규정 속에서도 자유로이 행동하는 한, 그는 역사적이다. 이 소인은 인간의 역사성에로 자명하게 본질적으로 속하여 있다.” 여기서 역사성이 자유의 유일회성과 비예견성 속에서 비로소 발생한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역사성이 인간들의 자유로운 상호 주체적인 관련 속에서만 소여되어 있다는 점을 라너는 명백히 지적하고 있다. 이로써 역사성이 인간 현존재의 본질적 고유성으로 규정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역사적 정신’이라는 인식에서부터 가능한 계시가 발생할 장(場)도 규정될 수 있다. 라너는 애당초부터 이 장을 ‘인간의 역사’라고 지적한다. 여기서 역사는 설계 가능하고 계산 간으한 일반적 법칙성에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역사 안에서는 지금까지 발생하지 않았던 것이 새롭게 발생한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성으로 규정된 구조가 아니라, 특수한 것, 새로운 것, 예기치 못했던 것, 아직 있어보지 않았던 것이 발생하는 장이 역사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인간 전체를 관통해야 하는데, 인간의 본질은 유한한 정신으로서 바로 역사적이기 때문에 계시가 역사 속에서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는 자유로운 행위로서 역사적 존재인 인간에게 역사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계시는 개인적 인간 역사의 모든 개별적 순간들 속에서 동일하게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 계시를 파악하기 위해서 자기자신의 역사의 특정한 시점을 향해야 하는 의미에서 역사적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계시의 역사성은 인간의 전체 역사의 범위내에서 시공간적으로 고정된 사건으로 기대할 수 있다.

 

개별적인 인간은 전인류의 지체인 한, 역사적 존재로서 이 인류의 역사를 향해야 한다. 인간은 역사에의 정향을 인간 정신의 역사성을 통하여 이미 취하고 있다. “인간은 정신이기 위해서 자신의 정신적 본성의 힘 때문에 본질적으로 역사에 정향되어 있다.”

 

하느님의 게시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다. 이로써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 역사 안에서 발생하는 하느님의 계시를 청취하여야 한다고 규정되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자유 속에서 가능한 계시의 자유로운 하느님 앞에 선 취득적 정신성의 존재자이다.…인간은 그의 역서 속에서 자유로운 하느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자이다.” 인간은 “가능한 자유로운 계시를 위한 순종적 가능태이다.”

 

 


3. 초월적 계시 규정

 

라너는 초기 저서인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이 하느님 지향의 초월자로서 항상 하느님 앞에서 생활하며 이러한 의미에서 계시가 인간에게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단정하였다. 그런데 신학자로서 라너는 하느님을 지향하는 인간의 초월성은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서의 은총을 통해서 이미 초자연적으로 들어 높여진 초월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라너에게서 은총을 통해 고양된 인간 존재의 기본처지성은 ‘초자연적 실존(das bernat rliche Existential)’개념으로 표현되고 있다. 라너는 바로 이 ‘초자연적 실존’이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를 동반한다고 보고 있다. 여기서 라너가 말하는 계시는 초자연적 계시의 초월적 국면, 또는 ‘초월적 계시(transzendentale Offenbarung)’로 지칭되고 있다.

 


3.1 하느님이 계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이 세계 안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서 도착하며 또한 인식될 수 있는 지점은 인간의 초월이다. 인간 이하의 실재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그대로 수용하고 인식할 수 없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이 한 사람의 예외없이 구원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인간은 누구나 실재-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신화(神化, Verg ttlichung)되어 있다고 규정된다. 라너가 신학에 도입한 ‘초자연적 실존’개념은 모든 인간이 실재-존재론적으로 은총을 입고 있는 처지를 뜻한다.

 

라너는 ‘실존(實存, das Existential)’이라는 개념을 하나의 인격적 행위보다는 존재론적으로 선행하면서 이를 가능케하고 규정하는, 유한한 정신 인격의, 지속적으로 존속하는 구조성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인간은 당신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창조 이래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고 있기 때문에, 이 ‘능력’은 dslrks 존재의 가장 내면적인 것, 본연의 것, 중심이며 연원(淵源)인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수용할 수 있는 인간의 중추적이며 지속적인 실존을 초자연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인간 안에는 항상 …현재의 질서 속에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에나 주어져 있으며 상실할 수 없는 초자연적 목표에의 내적 정향성이 있다. 이 정향성을 우리는 ‘실존’이라고 부른다. 이 ‘실존’은 인간을 초자연적 목표에로 배열하기도 하고 채무적이 아니기 때문에 초자연적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 형성된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은 라너에 따르면 대상적으로 직접 인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비대상적 선험적 규정성이다. 이 초자연적 실존은 인간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인과 친교를 이룩하고 세상만물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이들에 대해서 하게 되는 반성적 사유에 선행하여 ‘초자연적 형식대상’을 지닌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인간이 은총을 통하여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으며, 그에게는 순전한 자연행위를 통해서 도달될 수 없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이 선험적으로 소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너는 여기서 인간의 인식과 자유의 선험적 지평의 작용을 본연의 계시라고 지칭하는 것이다. 그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의미를 구명하는데 있어 토마스 데 아퀴노의 학설을 원용하고 있다.

 

한 인식의 형식대상이란 시간과 공간 속에서 구체적으로 대상적으로 주어져 있거나 사유를 통하여 다른 개별 대상들과 구별될 수 있거나, 또는 다른 대상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개별적 대상에 대한 인식이 성취되기에 이르는 지평 자체를 뜻한다. “형식대상이란 지식의 한 대상도 아니요 단순히 많은 개별 대상의 공통적인 것을 추가적으로 추상(抽象)한 총합(總合)도 아니다. 형식대상이란, 함께 의식된 선험적 지평으로서 이 지평하에서 본연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모든 개별 대상의 인식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하여 실재-존재론적으로 들어높여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식과 자유의 형식대상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두가지 경우의 개별적인 질료대상(質料對象)은 동일하다 하더라도 형식대상(形式對象)은 구별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인간이 은총에 힘입어 존재론적으로 높여지면서 그가 자신의 현존재를 성취하게 되는 지평이 또한 변모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인식과 자유가 성취되는 지평이 변화한다는 것은 라너에게 있어서는 동시에 인간 의식이 변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은총을 통한 인간의 고양은 실재-존재론적 규정이기 때문에 그의 초자연적 형식대상이 인간에 의해 체험될 수 있고 체험되어야 한다고 라너는 주장한다. 다음의 진술은 라너의 견해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나의 행위가 존재적으로 높으면 높을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많이 ‘자기에게(bei sich)’있으며 더 많이 의식된다.”

 


3.2 그러나 라너는 초자연적 형식대상은 대상적 사유의 직접적 대상으로 체험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은총으로 들어높여진 인간 초월의 체험 가능성과 또한 인식과 자유의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체험 가능성이란 직접적인 사유를 통해 명료하게 객관화되고 주제화되는 하나의 체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인간이 자신의 현존을 성취하게 되는 초월적 지평이 변모함을 뜻한다는 것이다. 라너에 의하면 인간은 그의 초자연적 실존 속에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초월체험, 즉 초자연적 은총체험을 하게 된다. 인간이 이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은총이란 순전히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는, 수용되었거나 또는 적어도 하느님에 의하여 제공된 의식의 피안에 위치하는 처지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은총은 의식적이요, 정신적이며, 인격적 실재인 지평이다. 각 인간은 이미 항상 이 지평의 테두리 안에서 생각하고 경험하며 고난을 겪는다. 인간이 이 지평 자체에 대하여 사유하지 않고 거저 주어진 은총으로 파악하지 않을 때에도 그러하다.” 이 은총체험이란 인간이 삶 속에서 타인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게 되는 모든 범주적 체험 속에서 이미 항상 비주제적으로 함께 주어져 있는 초월적 체험이라는 것이다.

 

라너는 이 초월적 체험이 자체적으로 하느님의 계시개념을 현실화한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삶 속에서 다채롭게 발생하는 이 체험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와 구원시키는 하느님의 부름을 계시한다고 보고 있으며 초자연적 형식대상의 전달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시로 규정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유롭게 수용된 인간 초월성이 은총에 의해 들어높여짐은 그 자체가 이미 계시이다. 이와 함께 주어져 있는 선험적이면서 필연적으로 사유되지 않은 인간 정신의 성취의 형식대상은 어떠한 자연적 정신능력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기 전달인 은총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하느님 친히 당신의 자기 전달을 통하여 인간의 형식대상이 됨으로써,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성취할 때마다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적어도 비주제적으로 초자연적 계시가 발생한다.

 

라너는 「말씀의 청자」 안에서 계시가 하느님 지향의 절대초월로서의 인간의 기본구조성에 입각하여 필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제는 신학자로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를 강조하고 은총을 하느님의 자기 전달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계시의 발생을 말하기에 이른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과 계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요 동일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선사하면 계시가 발생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자연적 실존이 계시를 동반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이 개별 인간이나 세상 사물과의 만남 속에서 하게 되는 범주적 체험 속에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발생하는 은총체험이 ‘초자연적 초월적 계시’로 규정된 것이다. 이 초월적 계시는 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초자연적 계시이다. 라너는 이 초월적 계시를 근본적이고 혁신적인 계시로 간주하기 때문에 이 초월적 계시의 모든 개념적 객관화는 초월적 계시 자체에 비해서 이차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초월적 계시는 역사적 계시를 통하여 대상적 내용이 전달되는 것보다 논리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앞서 현존한다고 라너는 말한다.

 

 

 

4. 초월적 계시의 역사적 중재

 

라너는 인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체험의 역사를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다. 라너는 인간의 ‘초자연적 실존’이 동반하는 ‘초월적 계시’를 이 계시역사와 유대시키려 한다. 그는 하나의 초자연적 계시가 이중 국면, 즉 초월적 소인과 역사적 소인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 계시의 이중 국면을 정신과 육신의 단일 결합체로서의 인간의 현존재 구조로부터 요청하고 있다. 말하자면 라너에게서 계시의 역사성은 인간 초월의 역사성과 관련되어 규정된다.

 


4.1 라너는 그의 종교철학서 「말씀의 청자」에서 인간을 ‘역사적 정신’으로 규정한 바 있다. 라너는 인간의 육신성으로부터 유출되는 역사성과 정신의 초월성이 인간의 실존 속에서 하나의 내적 단일성을 형성하고 있음을 제시하면서 인간 본질을 역사적 정신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한 인간의 역사성과 초월성은 상호 제약하며 규정하기 때문에, 두 소인은 늘 함께 나타나며, 이러한 단일성에도 불구하고 두 소인 중 한 소인이 다른 소인에로 환원될 수 없게 되어 있다. 인간의 초월성은 그의 역사성에 입각하여 항상 역사적으로 중재되어 있으며 그의 역사성은 그의 초월성에 입각하여 항상 초월적으로 중재되어 있다. 인간은 구체적으로 다른 인간들로부터 그리고 전체 역사로부터 유래한다. 이것은 인간의 초월성 또한 인류의 역사 안에서 그리고 이 역사로부터 받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가 인간 실존의 초월성과 역사성의 단일성에 상응하여 필연적으로 역사적으로 중재되어 있다고 본다. 그에게서 하느님은 역사의 피안에서 머무는 역사의 초월적 근거만이 아니다. 그는 인간의 역사(役事)가 개입하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적 구원행업이란 도대체 존재하지 않으며, 계시를 역사적으로 청취하는 인간의 신앙 속에서가 아니고는 달리 존재하는 계시란 없다고 보고 있다.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는 항상 세상적으로, 범주적으로 중재되어 있으며 인간 삶의 역사적 처지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비대상적 초월적 계시는 항상 대상적 인식성 안에서 중재되어 주어져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는 필연적으로 인간이 시공간 속에서 유형적(類型的)으로 이룩하는 실존성취 속에서 발생한다.

 

러너는 인간의 범주적 역사를,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의 본질성취를 구성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이고 객관화된 자기 주석으로 파악한다. 그는 초월체험이 인간이 시공간 속에서 인간을 만나고 사물을 이용하는 속에서 하게 되는 범주적 체험 속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이말은 바로 초월적 계시가 역사적으로 중재된다는 것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초자연적으로 들어높여진 인간의 초월성의 구조, 은총에 힘입은 것이면서도 항상 어디서나 작용하며, 거절의 양식으로조차 여전히 현존하는 실존, 절대적이며 용서하는 하느님 임재의 초월적 체험이 있다. 이 체험은 누구나 그리고 자의로운 양식으로 대상적으로 객관화될 수는 없어도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지속하는 실존인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초자연적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성, 대상적 객관화가 있다. 이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성은 하느님의 초월체험과 함께 전 역사를 구성한다.”

 


4.2 라너에 따르면 초월적 계시의 역사적 중재는 나름대로 자신의 역사를 지닌다. 그런데 초월성의 역사란 생성의 의미에서의 본질 역사가 아니라 인간 기반 속에 있는 하느님의 초월적 은총 전달의 자기 현시화를 뜻한다. 이는 역사 속에서의 하느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짐을 뜻한다. 이것은 바로 역사적 구현과 중재를 지향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의 약동성을 뜻하며 이 중재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계시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중재 역사는 은총 안에서의 하느님 계시의 역사성에서의 내적 소인이라는 것이다. 이 은총 자체가 자신으로부터 본연의 대상화에로의 약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은총 자신이 전 차원에서의 피조물의 신화원리(神化原理)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월적 계시는 필연적으로 인류의 행위와 생각의 역사 안에서 실현된다. 그러한 한에서 초월적 계시가 자체만으로는 존재하지 않고 구체적 역사가 바로 개별적으로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이다.”

 

인간의 초월체험의 역사적 중재는 인간 역사의 범주적 실재들을 통해서 어디서나 성취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삶이 이루어지는 세계의 역사적 장이 당신 자신을 전달하는 하느님께 이르는 중재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래서 구세사와 계시사는 전체 인류 역사와 공존한다고 규정된다. 인간이 하느님과 늘 관련되는 가운데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그의 역사는 구세사이자 계시사인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특별한 성역이 역사의 장(場) 속에서 별도의 장으로서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외견상 분명히 세속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대상물이 초월적으로 고양된 체험의 중재가 되기에 충분하며 그것이 하느님의 계시가 될 수 있다. 라너에 따르면 역사란 필연적으로 객관화된 초월체험의 자기 주석으로 존재하며, 초월적 계시의 역사란 다름아니라 원천적 초월체험의 역사적 자기 주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너는 인류의 구체적 역사 일반을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그는 객관화된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만을 계시사 일반으로 동일시하는 통속적인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 계시사는 개별적·집단적으로 인간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곳 어디서나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범주적 역사는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인간이 하게 되는 초월체험의 역사적이고 객관화된 자기 해석이라는 사실로부터, 인간의 본질성취는 구체적 역사적 삶의 과정과 병행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역사적 삶의 과정 안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주석은 이렇게 인간의 전 역사(全歷史)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라너는 문화·사회·국가·예술·종교 등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해석이 이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인간의 역사―범주적 자기 해석은 실제적인 진정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라너는 바로 계시의 역사내적 범주적 해석이 초월적 계시의 진정한 역사라고 보고 있다. 그는 모든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자기 전달의 범주적이고 시공간적이며 사회적 사유의 역사 자체를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한 소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렇게 라너는 구체적인 인간 역사가 이루어지는 데에서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역설한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로서 삶 속에서 타인에게 의존하고 있으며, 그들의 역사와 체험에 의지하고 있다. 이렇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계시역사를 구성하는 소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역사가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류 역사와 공존한다고 강조되는 것이다.

 

라너는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을 통해서 드러나는 범주적 계시사를 초월적 하느님 체험의 역사적 중재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의 역사는 인류의 포괄적인 자기 해석을 향하는 역전될 수 없는 의미선상에서 발생하는 역사로 드러나게 되고 더 나아가 더 강렬하게 초자연적 하느님 체험의 명시적인 종교적 자기 해석으로 드러나리라는 견해를 피력한다. 명시적으로 종교적인 범주적 계시사는 라너에게서 일반적·범주적 계시사의 한 형태이며 초월적 계시의 필연적 자기 주석의 성공한 경우로 파악되어 있다.

 


4.3 여기서 말하는 범주적 계시사의 개념은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 개념과 부합되지 않는다. 협의의 범주적 계시사가 성서 안에서만 주어져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필연적으로 자신을 역사적으로 주석하고 범주적 계시사를 형성하며, 이 범주적 계시사가 어디에나 주어져 있다는 말은 이 계시사가 구약과 신약성서권 이외의 생활권에서도 발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적어도 개인적인 구세사 안에서 작용한다. 그리고 초월적 하느님 체험의 자기 주석의 정당성이 확실한 개별적 구세사 안에 역사의 소인들이 있다는 분명한 근거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구세사 외부에서 발생하는 인류의 집단적 역사 안에서도 이러한 범주적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입장이 성립된다. 물론 라너는 구세사와 세속사는 구별된다고 말한다. 세속사는 전체적·일반적으로 구원과 비구원에 대해서 명료한 해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서 구세사와 세속사는 판결받은 역사와 판결받지 않은 역사처럼 구별된다.

 

이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어떠한 처지에 있거나 간에 근본적으로 이 성서적 계시사 외부에서의 일반적 구세사이자 계시사가 존재한다는 가능성은 논란될 수 없다. 일반적 계시사의 존재는 하느님의 진실한 구원의지 때문에 부인될 수 없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하느님으로부터 발해져 역사적 인간에게 주어져서 진정한 역사를 형성하며, 이 역사의 구체적 진행경위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로부터 선험적으로 추출될 수 없고, 인간의 다른 역사적 자기 해석처럼 역사 자체 안에서 체험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을 뿐이다.

 

라너는 구체적인 종교사 속에서 계시사의 명시적 부분을 보고 있다. 그에 따르면 각 종교 속에서 본시 비사유적이며 비대상적인 계시를 역사적으로 중재하고 사유하며 주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이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형성된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초월적 관계의 중재와 인간의 자기 사유의 개별적 소인들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초월적 체험이 구체적인 종교들 속에서 가장 선명하게 가시적이 되고 주제화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종교들 속에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관계가 개념적으로 객관화되고 있다. 라너는 종교역사 일반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대화 역사를 명시적으로 주제화한다고 본다. 라너는 성서외적 비그리스도교적 종교사를 단순히 인간의 종교적 행위의 역사이거나 종교를 설립하려는 인간적 가능성의 결핍된 현상으로만 파악하지 않는다. 종교 안에서는 원천적이며, 비사유적이고 비대상적 계시를 반성하고 명제적으로 주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모든 종교 안에서는 이렇게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게 된 자기 사유, 반성과 성공한 개별소인들이 발견된다. 이 자기 반성을 통해서 하느님이 인간의 대상성, 구체적 역사성의 차원 속에서 인간에게 구원을 이룩하게 된다. 그는 비스리스도교적 종교사 안에서도 성서적 계시의 하느님이 역사하는 현상들을 관찰하고 묘사하며 분석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인류의 역사와 종교적 현상 안에서 비구원의 역사를 분명히 보고 있다. 온갖 유형의 과실이 집단적이고 사회적 인간의 차원 안에서 어둡게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계시사 안에서도 이러한 과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 계시사는 오류와 그릇된 해석과 과실과 남용과 거의 불가분리적으로 혼합되어 발생하며 의로운 역사와 죄의 역사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바로 여기서 참으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과실의 역사와 구세사가 하느님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분리할 수 없이 서로 스며드는 데에서 의인이면서 동시에 죄인이라는 말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조되는 이 두 가지 성격은 계시가 당신을 전달하는 하느님의 행위와 이에 자유롭게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를 내포한다는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지평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성취하며 자신의 역사 속에서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수락하거나 거부하면서 의인이면서도 죄인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의 대상화된 자기 주석의 역사는 부분적으로만 성공하며 아직 미완(未完)의 역사 속에 위치하며, 오류와 현혹과 객관화와 혼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해서 형성된 하느님과 인간의 초자연적 관계를 인간이 그릇해석하는 수가 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사 안에 오류와 비리 등이 존재한다. 종교사는 하느님에 의해 전달되어 수용과 거부의 양식으로 존재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제정되거나 가능하게 된 인간의 종교사라는 것이다.

 

라너는 인류사의 상이한 지역과 시간 속에서 발생한 다양한 종교의 역사들은 선명한 하나의 방향으로 쉽사리 통합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류의 역사는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라너는 동시에 수다한 종교들의 역사 속에서 하나의 구세사와 계시사의 단일구조와 명백한 발전법칙을 인식해 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시인한다. 오늘날 구세사와 그리스도교적 계시가 이전의 계시사의 내용은 장구한 인류 역사의 과정 속에서 극히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내용에 불과하다.

 

라너는 성서 내용을 통해서 종교역사 안에서의 일반적 계시사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시도가, 분명한 결과로 이끄는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성서에 따르면 인류의 전역사가 하느님의 구원의지와 계약의지 아래서 이루어지며 동시에 인간의 과실로 점철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 특히 신약성서는 인류사와 종교사의 극도의 실추를 말하고 있다. 신약 안에서 인류사와 종교사는, 원초의 순수상태로부터 벗어나 하느님의 인내와 분노, 그리고 심판 하에 존속하면서 암흑과 과실의 상태 속에서 그리스도의 준비시간으로 존속한다고 간주되고 있다.

 

라너에게서 구체적인 세계사와 인류사는 세계와 인류를 향한 하느님 자기 전달의 현시이며 중재이고, 또한 자유로운 조물을 통한 하느님 자기 전달의 수용의 현시이자 중재로 파악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은 세계사와 인류사의 절대정점이기 때문에 세계 안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은 이 그리스도 사건과 관련을 맺고 있는 사전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 파악된 것이다.

 

 


5. 일반 계시사와 특수 계시사

 

라너는 성서 계시 영역의 외부에서 발생하는 계시사를 일반적 계시사로 파악하면서 성서적 계시사와의 관계를 초월신학적으로 규정하려고 한다. 그는 여기서 현대의 진화적 세계관을 신인(神人) 그리스도 사건과 연관시키는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정립한다.

 


5.1 라너는, 인류의 역사가 2,3백년 전의 인간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엄청나게 장구한 역사라는 것을 밝힌 현대의 학문적 탐구결과를 구세사 및 계시사 개념을 이해하는 데에서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낙원에서의 원초계시-아브라함·모세·이스라엘의 역사 등-로 분할되는 재래의 계시사 및 구세사의 시기 구분으로는 장구한 인류 역사 속에서 발생하는 계시사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인류사와 공존하는 계시사가 역사적 아브라함과 더불어 시작된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라너는 성서에서 증언되는 성조역사(聖祖歷史)를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된다고 보고 있다. 사실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전 성서 계시사는 역사의 전과정 속에서 현재로부터 가깝게 위치하는 짧은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라너는 성서 이전의 계시사와 구세사는 구조를 거의 파악할 수 없는 어두운 과거로 머문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명시적으로 주제화되고 있는 비성서적 종교들의 전례, 사회적 제도, 이론, 복고나 개혁운동 등에 대한 인식이 오늘날에는 상당히 많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너는 종교사적 지식이 본래의 성서적 계시사와 관련될 때에 거의 명료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성서 이전의 계시사와 구세사의 구조를 파악하고 역사적 진행 속에서 각 단계의 상위성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라너는 세속 역사의 의미를 인간을 위한 자유와 사랑, 그리고 희망의 역사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데, 이러한 역사관으로부터 구체적으로 발생한 역사의 구조를 파악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라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구약과 신약의 계시사로부터 전체 역사를 관조하면서 성서 시간을 그리스도 출현 이전의 최종 순간으로 볼 수 있는 권리와 의미를 지닌다고 말한다. 실제로 성서 계시사는 그리스도 사건의 준비를 위한 짧은 역사적 소인에 지나지 않는다. 라너에 의하면 구약성서의 성조시대는, 대표적 성조들에 대한 신상 파악이 정확한 자료에 입각하여 실제로 이루어질 수는 없으나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고 있다. 즉 구약의 계약사는 일반적 계시사와 구세사로부터 유래하며 계시사의 연관성을 보전한다는 사실을 말하며, 이 계시사가 계시의 절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직접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모세 이전의 성조시대는 특수한 구세사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5.2 라너는 하느님이 친히 조정하는 초월적 계시의 자기 주석이 이루어지는 데에서 특수 계시사나 교도권적 계시사가 발생하며 구약의 성조시대 이래 이러한 특수하고 교도권적인 계시사가 발생한다고 보고 있다. 종교사상 인식의 순수성이 하느님으로부터 보증되고 보증된 것으로서 사유되는 데에서 이러한 공적 계시사가 온전하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원천적 계시의 담지자(擔持者)들은 예언자들이라고 지칭된다. 이들 안에서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범주화된다. “하느님을 통해서, 개별 실존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인간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계시의 대상화가 이룩될 때에, 우리가 종교적 예언자이며 다른 사람들을 향한 계시 담지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안에로의 ‘통역’이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짐으로써 이 계시의 대상화가 순수하게 머물 때, 그리고 이 대상화 안에서의 계시의 순수성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정당화될 때, 우리 자신의 소명이…대상화된 계시를 통해서 정당화 될 때, 공적이고 교도권적이요 교회적으로 구성된 계시와 계시사를 가지게 된다.” 라너에게서 예언자란 하느님의 개인적 의지를 인식하고자 하는 사람과는 달리 공적인 교도권적 계시의 담지자로서 자기 자신의 초월체험의 범주적 면이 하느님으로부터 원해지고 정당성이 보증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들 안에서 초월적 하느님 체험이 생각과 말과 행위로 범주화된다는 것이다.

 

라너는 이러한 ‘교도권적’계시사가 구약 속에서 발견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이전 인류사의 전승의 핵이 구약 성조 역사 안에 이미 소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런데 라너는 구약성서가 계시 가능성과 관련해서 애매모호성을 지닌다고 간주한다. 구약이 하느님의 진술과 역사(役事) 자체라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인 해석기준도 없고 이 주장이 환상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한 권위있는 해답을 소유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종교적 체험과 견해에 고나한 명석성과 확실성을 추구한다. 그는 이러한 명석성과 확실성을 인류의 역사적 자기 주석, 특별히 예언자들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종교적 체험의 궁극적 명석성과 확실성은 구약 속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 라너의 견해이다.

 

라너는 구약성서가 1천 년에 걸친 완만한 생성경위와 다양한 신학입장으로 말미암아 자체적으로 단일적 개념으로 통합되지 않는다고 본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비로우면서도 심판하는 하느님의 반려자라고 자각하면서, 자신의 역사가 미지적이거나 구원적 미래에로 개방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라너에 따르면 구약성서 안의 구체적 내용이 이 역사를 계시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반려성(伴侶性)의 사건이며 개방된 미래에로의 경향으로서의 역사가 이 역사를 구세사로 만든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국면이 외적으로 이 역사에 다가오는 해석들이 아니라 해석된 것에서의 역사적 소인들이다. 라너는 바로 이 해석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계시사로 구성한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역사는 비단 이스라엘 안에서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의 역사 안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며 실제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구체적으로는 하느님으로부터 이탈의 역사이며, 과실의 역사이고, 원천적으로 종교적이었던 것이 율법적으로 경직화되어 가는 역사였기 때문에 라너 자신의 견해는 타당하다는 것이다. “하나의 구체적인 역사적 종교현상으로서의 구약안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원해진 올바른 것과 그릇된 것, 오류적인 것, 변질된 것과 타락된 것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 안에는 권위있게 그리고 항상 확실하게 개인의 양심을 위해 구체적 종교 안에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과 인간적으로 타락하는 것과의 사이에서 판정을 내릴 수 있는 지속적이고 제도적인 요체란 없다.” 라너는 성서가 근동 민족의 종교사안에서 부분적 계시사의 지속성과 구조성의 인식을 허용하는데 비해서 다른 민족의 종교사 안에서는 계시의 지속성과 구정성의 인식 가능성을 확실하게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견해를 시인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라너는 구약의 계시사를 다른 구세사로부터 분리시키고 유리시킬 수 없다고 본다. 다른 민족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적 관계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5.3 라너는 모세와 예언자들을 포함하는 본래의 구약성서적 계시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역사의 최종단계의 짧은 순간이라 규정하고 있다. “구약성서적 역사는 그리스도의 최종적이며 직접적인 사전역사(事前歷史)일 뿐이다.” 구약성서의 내용과 구조의 성서적 기반은 그리스도로부터만 단일적 해석을 허용할 뿐이라고 라너는 주장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초월적 관계의 명시적이고 종교적인 주제화가 구약 속에서 하느님에 의해 친히 역사 안에서 신임을 받고 정당화되는데, 이러한 특수하고 교도권적인 계시사가 그리스도 안에서 비로소 궁극적으로 ‘종말론적 정점’에 이르게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의 주석이 적당한지 여부를 가리는 유일한 ‘기준’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라너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직접적 사전 역사로서의 구약의 계시사는 그리스도인들 자신의 계시사와 전승으로서의 종교적 의미를 지닌다. 라너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대적 유형의 계시사의 시작과 충만을 보고 있으며 그리스도 사건을 세계사와 공존하는 종교사의 절대정점으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서술할 수 있는 세계는 장구한 인류사 안에서 상대적으로 짧은 과도기로 파악할 수 있다.

 

라너는 구체적 인류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위치 역시 이 안에서 공존하는 종교사 안에서만 올바로 이해할 수 있고 수천 년 동안 지속되었던 기준과 상관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라너는 이 시기에 인류가 명시적인 자의식(自意識)에 이르게 되며, 내성적 사유, 예술과 철학 안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주변환경에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기투하는 양상을 드러낸다고 말한다. 라너는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하느님의 계시와 관련시켜 해석한다. 세계와 피조물인 인간처럼 하느님의 자기 전달 역시 자신의 역사를 지닌다. 이 자기 전달을 세계와 인류의 최종 의미와 목표로서 처음부터 역사를 지탱한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바로 이 속에서 자신의 역사를 지니며, 역사 속에서 범주적으로 점점 더 명료하게 현시되며, 더 이상 추월할 수 없고 되돌이킬 수 없는 절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생하게 된다. 일반 종교사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 애매모호한 양식으로 주제화되고 있는 데 비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인간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해석된 양식으로 주제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 전달이 위격적 일치(unio hypostatica)를 통하여 예수의 인간적 존재에로 육화되는 속에서 온 인류를 위해서 더 이상 추월할 수 없는 절정에 이르게 될 때에 계시사가 절정에 이른다고 보고 있다.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육화 속에서 전달된 실재로서의 하느님 자신이 인간 예수와 절대적으로 일치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자기 전달과 육신적이고 사회적 차원 안에서의 범주적 자기 해석이 절정에 이르렀으며 계시 바로 그 자체가 되었다. “이 계시사에서 이미 발생했고 유일무이하고 궁극적인 절정에서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초월적 자기 전달과 그것의 역사적 중재성의 절대적이고 취소할 수 없는 일치가 한 신인(神人) 속에서 계시되어 있다. 이 신인은 전달된 분으로서 하느님 자신이 이 전달의 인간적 수용이면서 이 제공과 수용의 궁극적인 역사적 현시인 것이다.”

 

그리스도 사건은 보편적 계시사와 구세사 안에서 유일무이하게 파악 가능한 절정으로 규정되고 있다. 일반적 계시사 안에서 하느님의 초월적 계시와 그 범주적 중재성이 대소의 간격을 지닌 채 작용하고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불가해소적으로 온전하게 유대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보편적 게시사 한가운데에서 특수한 교도권적 계시사의 구별을 위한 규범적 기준이 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 계시는 역사 속에서 인간이 자기 존재의 심층 속에서 이미 항상 비반성적으로 체험하는 초월적 계시의 반성적 진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5.4 라너는 그리스도 계시사건을 보편적 종교사와 인류사의 과정안에로 명백히 편입시키면서 동시에 이 과정의 종말론적 절정으로 파악한 것이다. 여기서 역사 속에 등장한 신인 예수 그리스도가 궁극적이고 진정한 인간 존재를 구현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그리고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 속에서 발생한 초월-종교적 체험의 시초부터 소여되어 있는 원초 자료의 역사적 중재이자 대상적 객관화로 파악되어 있다. 라너는 그리스도 교회를 역사 속에서 지속하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파악하면서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모든 계시사를 교회 자신의 사전 역사로 규정한다.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자신을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하느님과 그 은총의 절대적 구원실재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대적 구원실재는 이러한 자기이해를 통하여 어디서나 주어져 있는 집단적·개인적인 구세사를 배제시키지 않고 자기 자신의 전역사이자 은총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세계 어디서나 발생하는 구세사는 그리스도교와 교회 안에서 궁극적이고 능가할 수 없는 역사적 객관화를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전체 인류사의 가장 내면적이요 신화(神化)하는 약동성으로서, 이 전체 인류사로부터 벗어나지는 않았다.”
라너에 따르면 인류는 그리스도 사건 이래 단지 초월적으로만 자신의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그는 인류사가 이제는 범주적으로도 자신의 목표 안에로 들어서서 궁극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과정 안에서 자신을 능동적으로 조종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역사 안에 인류가 지향하는 바 목표로서의 신인 그리스도가 이미 주어져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시작단계의 초월성 안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말론적 역사 속에서 자기 현존재의 신비에로 도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간의 충만이라 지칭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시간의 충만이 지금은 완성의 구성으로가 아니라 시작의 양식으로 주어져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라너는 “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근거와 규범이 역사 자체 안에 소여되어 있으며 현시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라너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의 종말론적 궁극성을 규정하면서 여기서부터 교회의 무류성을 추출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하겠다. 라너에게서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른 하느님의 계시가 사회적 구조성을 지니고 명시화된 실재이다. 교회는 이를테면 종말론적 절정에 이른 하느님 계시의 역사적 현존이다. 그런데 라너는 교회 안에서 현시되는 하느님의 계시진리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실제로 주어져 있는 궁극적 진리인 한, 교회는 무류적 진리 요청을 내세울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절대적 자기 현시의 진리가 궁극적 진리인 한, 즉 이데올로기적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면서 실제로 소여되어 있는 승리하는 진리인 한, 교회는 자신의 진리 요청 속에서 무류적 교회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대상적이고 실제적인 하느님의 계시를 현존케 하는 교회의 고백이 절대적 투신 속에서 성취되는 데에서 교회는 소멸할 수도 오류를 범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의 계시진리의 무류성이 교계제도적으로 구성된 교회의 진리의 무류성인 한, 교회의 교도권은 ‘무류적’직무를 수행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늘 새로운 역사적 현재를 위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현실화하고 전개함으로써 이 진리를 지속적으로 현존케 하는 데에서 교회 교도권의 과제를 보고 있다.

 

라너가 이처럼 그리스도 교회의 무류성과 더 나아가 교회 교도권의 무류지권을 인정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 밖에서 발생하는 일반 계시와 교회 안에서 발생하는 특수 계시 사이에 개재하는 본질적 차이를 강조하고 있음은 중요한 사실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성서적 그리스도 교회 밖에서도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가 발생한다고 강조하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계시를 종말론적 계시로 규정하고 이에 입각해서 역사적 실재로서의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의 무류적 계시로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 교회의 절대성을 기초 신학적으로 정립하고자 한 것이다.

 

 


6. 맺음말

 

오늘날 신학 안에서 일차적 기반개념이자 그리스도의 자기 주석에서의 열쇠개념으로 간주되고 있는 계시개념이 칼 라너에게서 어떻게 파악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 계시개념이 라너의 ‘초월신학’체계 안에서 기초를 형성하고 있음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서 계시는 바로 인간과 세계의 구원실재로서의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전달로 파악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의 이러한 계시이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과 부합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반포된 ‘계시헌장’의 내용은 많은 수정작업을 거쳐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라너가 바로 공의회에 참여한 전문 신학자로서 계시헌장의 수정작업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음은 사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본회의의 토의를 위해서 마련되었던 초안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인간의 생활 속에서 이성과 자연의 영역만을 인정하려고 한 합리주의와 자연주의를 거슬러 하느님의 구원과 계시의 초자연성을 강력하게 옹호하였다. 자기 방어적 입장을 취했던 이 공의회에서 계시가 하느님의 자기 계시라고 규정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규정의 의미는 초자연적 인식의 현시의미로서 파악된 것이 사실이다. 계시 사건이 ‘신적신비’, ‘계시된 진리’, ‘신앙교리’나 ‘계시된 가르침’을 중재하는 ‘교시사건’의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헌장은 계시 자체를 하느님의 인격적 자기 전달로 규정하면서, 계시를 개념적-지성주의적 언어계시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구원론적 실재계시로 파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이 당신 자신을 인간의 인식에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실재로서의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전달하여 당신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실제로 형성되도록 만드신다는 것이다.

 

라너의 계시관은 이러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치밀하고 일관성 있게 부연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라너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된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의 실상과 그로부터 추출되는 결과들을 그의 필생의 작품인 ‘초월신학’체계 안에 수렴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계시개념은 웅대한 사상적 체계를 지탱하는 기초로서 드러난 것이다.

 

라너의 계시관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한, 비판의 여지를 발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입장에 가해지는 비판은 서구 그리스도교계에 의해 전적으로 주도되다시피 하는 교회의 공식 입장에 대한 비판으로 그대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라너가 계시를 초월적이고 범주-역사적 국면으로 구별하면서 구체적 인류 역사를 계시사로 원칙적으로 규정한 것은 정당하다. 그리고 그가 종교사를 범주-역사적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음도 정당하다. 그런데 그가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약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 교회의 역사를 타종교 역사와 구별하면서 ‘공정이고 교도권적 계시사’로 규정하고 더 나아가 ‘무류적 계시사’로 파악하고 있는 점은 실제로 발생한 실증적 교회사와 교회와 교회들의 현실에 직면하여 논란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여기서 시사된 문제점은 오늘날까지 그리스도교계 안에서 주변세력에 지나지 않는 소위‘제3세계’속한 교회가 중심 역할을 수행하게 될 ‘제3교회’의 시대에 달리 해결될 수 있다고 전망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라너의 계시관의 한계는 그가 속한 서구 그리스도교계의 한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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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교수의 논문 "칼 라너의 종교 신학"에 대해

 

주만성교수

 


논자는 이 글을 통해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라 할 수 있는 칼 라너의 신학에 나타나는 종교 다원주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논자는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현재의 다원적 종교 상황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라 분석하고 이 글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 전개 방식은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먼저, 논자는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제하에 칼 라너의 견해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라너는 하느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고 라너는 묻는다... 물론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시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보전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형제적인 자세로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너는 생각한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논자는 거의 라너의 신학적 입장을 따라가고 있으며 예수와 그리스도를 구분하는 파니카의 'unknown Christ' 개념이나 라너의 'anonymous Christian' 개념이 별 반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라너에게 있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함으로 라너의 기독론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라너의 신학에 대해 특별한 비판을 가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라너의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을 통해 보이는 교회를 무시함으로써 개혁자들이 강조한 교회의 표지를 무시하는 라너의 교회관을 비판치 못하고 있다. 논자는 라너의 그와 같은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것이라는 여러 학자들의 비판을 소개하면서도 여전히 라너에 대해 변호적이다.

 

다시 말하면 한스 큉(Hans Ku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하고 있고 , 폴 니터(Paul Knitter)나 존 힉(John Hick)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논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그리스도',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서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등의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교회 안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시키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람들을 가시적, 유형적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될 뿐더러, 만일 그러고자 했다면 굳이 '익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리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서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을 뿐인 것이다.

 


물론 논자가 말하는 라너의 이와 같은 입장이 구원의 길은 많으나 규범은 하나라는 모델을 말하고자 했다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그리스도 중심에서 신 중심으로의 전환을 통해 기독교를 상대화하는 시도로서 이런 시도는 결국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유일성이라는 걸림돌을 회피하고자 하는 시도에 불과하며 결과적으로 그 주장하는 하나의 규범도 무너지게 되고 말 것이다. 구원과 관련 된 라너의 신학이 바로 비판되려면 논자와 같이 단순히 기독론적으로 접근하여 그것을 교회론에 접목시켜 이해 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적 접근을 통하여 신론, 기독론, 성령론이 성경적으로 바로 세워질 때 칼 라너를 비롯한 종교다원주의의 신학을 바로 비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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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너의 종교신학

이찬수(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1. 머리말

 

이 글에서는 '초월론적 신학'(transcendental theology)으로 하느님과 온 인류의 원천적인 연결성을 설명하고, 그 신학의 자연스런 산물인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론으로 그리스도교와 타종교들의 관계를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규명한 독일의 예수회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의 종교 신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금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톨릭 신학자라 할 수 있는 라너의 신학에서는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종교간 다원성의 문제가 어떻게 해소되고 있는지 검토함으로써 현종교 상황에 대한 한 가지의 그리스도교적 해결책을 도모해 보려는 것이다.

 

 


2.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와 익명의 그리스도인

 

칼 라너는 '우주 중심적 세계'(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신 중심적 세계'(안셀모, 토마스 데 아퀴노)에서 '인간 중심적 세계'(데카르트, 칸트, 마르크스)로의 전환을 이룬 근대의 상황을 반추하면서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이 신학을 통해 하느님이 인간의 본성에 선행하여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수용하면서 온 인류에게 자신을 이미 내주셨다는, 즉 은총을 베푸셨다는 선험적 진리를 인간의 주체성 안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알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어 있다.

 

하느님이 인간의 자유를 보전하면서도 조건 없이 자신을 인간에게 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온 인류가 처한 실존론적 상황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분, 종파에 관계없이 하느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성화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의 깨달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는"(디모 2,4) 하느님의 보편적 인간 구원 의지의 구체적 표현이다. 라너는 하느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보편적 구원 의지'를 갖고 계시다는 사실을 중시하면서, 그것을 신앙적 명제로 받아들인다.

 

만일 이 구원 의지가 널리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전체 인류와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소수였고 여전히 마찬가지인 그리스도인에게만 하느님의 구원이 허락된다는 뜻이되고, 또 하느님의 은총을 제한시키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원칙적으로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없다. "보통의 평균적인 인간에게도, 보기에 시야가 놀랄 만큼 좁고 인생을 고생스럽게 겨우 연명해 나가는 사람에게도, 고생스럽게 긴박한 생활고로 시달리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도"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런 마당에 명시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여 비구원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을 상정이나 할 수 있겠는가? 라너는 묻는다.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아주 먼 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무수히 많은 형제들(고생물학은 이들의 지평을 계속 확대시키고 있다.)은 물론 현재와 우리 앞에 놓인 미래의 무수한 형제들의 무리가 원칙적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충만한 삶으로부터 제외되고 영원히 무의미성으로 떨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그리스도인이 한시라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는 원칙적으로 아무도 제외시키지 않는다. 하느님은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냐 아니냐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지 않으신다. 스스로를 내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이미 존재론적으로 또 구조론적으로 아무런 차별 없이 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추고 있고, 누구나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라너는 인간의 이와 같은 상태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명명했다. 그리스도교적이긴 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는 상태,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적 가치를 살고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복음 선포를 듣지 못해서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부를 수 있는 처지에 있지 못한 사람의 상태이다. "스스로 그리스도교적이라고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묘사하려 들지 않을지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고 또 불려야 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인간 =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키려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심지어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진리를 탐구하며 자시의 도덕적 양심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는 자를 일컬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양심을 따르고 있는 사람이라면 굳이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혹은 그 반대로 생각하든 상관없이, 그는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에 의하여 받아들여져 있는 사람이요,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교 신앙의 목표로 고백하고 있는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간쪽에서 보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무신론자일 수 있어도 하느님쪽에서 보면 엄연한 하느님의 아들"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 설령 무신론자라 할지라도 그들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진지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인간을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과소평가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에만 하느님의 은총과 진리를 오롯이 보전할 수 있음은 물론 다른 종교인들을 얕보거나 무시하지 않으면서 형제적인 자세로 개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라너는 생각한다.

 

 


3. 그리스도론

 

이와 같은 논의는 '초월론적 신학'의 자연스런 결론이다. 라너는 하느님과 인간의 원칙적인 연결성, 온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을 밝히기 위해 초월론적 신학을 전개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인간에게 내주신다. 하느님을 받아 모신 인간은 신적인 본성으로 성화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존재론적으로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하느님의 자녀됨'은 본성상 반드시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고자 한다. 인간의 초월성이 역사 안에서 작용하고 역사적으로 중개된

 

다는 것이며,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가 역사적, 사회적으로 구현된다는 것이다. 이른바 '말씀의 육화'이다. 라너에게 '육화'란 말씀의 외적 표현이며, 하느님이 스스로를 내주시는 수단이다. 이런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이 다양한 전개들 가운데 라너는 전통적인 신앙을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 따라 예수를 통해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를 가장 완전한 것으로 본다.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의 은총을 수용하며 살고 있는 인간 본성의 자연적이고도 논리적인 완성이며, 인간 존재가 지닌 최고의 가능성의 실현이자, "인간 실재의 본질이 전적으로 현실화한 유일하고도 최상인 예증이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말씀의 육화의 전형을 예수에게서 보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의 실존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바를 앞당겨 실현한, 결정적인 말씀의 육화이다. 그래서 예수는 그리스도가 되고, 그렇게 고백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에 의하면, 예수는 그리스도이지,

 

다른 인간과 원칙적, 배타적으로 구분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은 대립되지 않을 뿐더러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가능한 형체"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맏이이다. 인간은 "자기 실존의 궁극적이면서 명백한 완성", 즉 예수를 통해 명시적으로 이루어진 완성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아우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동일시되고 예수 사랑은 하느님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 된다고 라

 

너는 말하기도 한다. 예수는 참사랑이자 인간 사랑과 하느님 사랑이 근본적 단일성을 성립시켜 주는, 그러한 사랑의 구체적이고 절대적인 예증이므로 라너에게 이 하느님 사랑, 예수 사랑, 인간 사랑은 동일한 뿌리를 가지면서 서로를 조건 짓는다.

 

 


4. 교회론

 

이런 인간 규정은 그의 교회론으로 이어진다. 그에게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비의 연속이고...우리 역사 내에서의 그의 영원한 가시적 현존이며.... 세계 안에서의 그의 계속적인 역사적 현존"이다. 한마디로 교회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라는 것이다. '신비'인 탓에 유형적 틀로 제한될 수 없고, '구체화'인 탓에 우리의 역사를 충실히 반영한다. 교회란 제도도 아니고, 단순한 사람들의 모임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준 가치가 구체적으로 실현되는 곳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처음부터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는 공동체로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이다. 이 교회는 역사적이고 가시적인 차원으로 표현되는데, 건물 자체에 제한되지도 않고 제한될 수도 없다. 따라서 가시적 교회의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사실상 별의미가 없다. 교회의 안과 밖은 별개로 구분되지 않고, 교회의 범위도 정확히 확정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교적상으로나 인습상으로 교회에 속해 있지 않은 사람들도 종교 사회학적으로 교회 내에 있는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 두 부류의 차이를 이루는 것은 종교 사회학적인 우연한 요인에 있으며 신학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두 부류는 동일하게 보아도 무방하다."

 


이 마당에 가시적 교회 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뭐 그리 결정적이랴. 그보다는 하느님의 은총 위에서 선의의 양심(bona fide)을 가지고 온 힘을 다해 객관적인 실천 규범을, 객관적으로 주어진 도덕 상황을 지향하는 곳은 어디나 교회일 수 있다는, 교회의 보편성에 대한 강조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교회에 속해야 구원된다는 말도 타당하고, 인간이 구원되는 곳은 어디나 교회라는 주장도 가능하다고 할 것이다.

 

 


5. 타종교인에 대한 태도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교회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이러한 교회관은 교회의 역사성, 사회성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신비의 구체화란 도대체 무엇이며, 또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 있고 싶어하지도 않는 타종교인에게 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딱지를 함부로 붙이는가? 이런 문제들을 두고 여러 학자들이 라너에 대해 비판을 하기도 한다. 가령 한스 큉(Hans Kung)은 익명의 그리스도인론을 두고 신학적 기만이라고 혹평하면서 교회의 사회성, 역사성은 전부 어디로 갔느냐고 반문한다. 폴 니터(Paul Knitter)나 존 힉(John Hick)등은 다른 종교를 과연 그리스도교의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느냐며 진보적인 시각에서 비판하기도 한다. 왜 신실한 타종교인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느냐는 것이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는 수구적 의미에서의 비판도 있다. 그런데 라너의 신학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면, 이와 같은 비판들은 사실상 '익명', '그리스도', '교회' 등의 용어 자체에 집착해서 라너가 본래 말하려는 바를 간파하지 못한데서 오는 오해임을 알 수 있다. 라너가 '익명의 그리스도'등의 표현을 쓰면서 본래 의도했던 것은 그리스도교의 독특성을 보전하면서도 하느님의 보편적 사랑과 구원, 하느님의 자기 전달을 통한 인간과의 본래적인 연결성, 결국 '하느님은 온 인류가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기본 원리의 확립에 있었다. 다른 종교들을 무시하거나 낮게 평가하려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인간을 교회 안에 쓸어 넣음으로써 '그리스도인화'시키려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사람들을 가시적, 유형적 건물 안에 끌어들임으로써 '그리스도인화'하는 것을 교회의 과제로 삼아서는 안될 뿐더러, 만일 그러고자 했다면 굳이 '익명'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까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리고 표현할 이유가 없었으리라는 것이다. 라너는 교회의 구체적 과제를 제시하면서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아닌 남을 위한 실존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과제는 단순히 인간들의 '그리스도인화'에만 결부되어 있는 일이 아니다.... 세계는 사실상 대부분의 교회의 여러 제도-이들이 아무리 하느님의 뜻에 의한 것이고 정당한 것이라고 해도-밖에서 하느님의 은총에 의하여 구원될 것이다. 교회가 만인에게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아 파견된 바 있다고 해서 교회의 가견적 형태 밖에는 구원이란 없으며 세계의 점진적 구원화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교회의 새로운 그리스도를 얻는 일이 일차적으로 지니고 있는 뜻은 길 잃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있다기보다 세계 도처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느님의 은총을 만인에게 뚜렷이 밝혀 주는 증인들을 얻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교회의 과제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행하신 본래적 구원을 이웃으로 하여금 알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결코 타종교인들을 가시적 교회 안으로 몰아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에 휩싸여 사는 현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자신을 모시고 사는 고귀한 존재임을, "직접 파악할 수 있는 바, 보다도 무한히 더 큰 존재임을, 가이없는 자유와 행복을 지니고 계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인간임을" 밝혀주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불교에서 중생이 부처라는 선험적 원사실을 선포하는 것과 같다. 세파에 휩쓸려 때에 찌든 중생이 그 자체로 부처라는 말씀을 두고 도대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 이 미천한 것을 어떻게 거룩한 부처님과 동등하다 할 수 있느냐 따진다면, 그것은 온갖 분별지를 타파하는 불교적 진리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라너도 이미 초자연적으로 고양되어 있는 온 인류의 실존론적 처지를 밝혀 줌으로써, 종파를 초월한 모든 인간의 본래적 고귀함, 원천적 하느님의 자녀됨을 교회안에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종교들의 독특성을 무시하고 범위를 줄여서 그리스도교 안으로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를 가능한 넓힘으로써 인간의 참된 본질을 드러내려는 라너의 신학적 노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6. 종합적 반성

 

하느님의 은총은 특정 종파에 속한 의인에게만이 아닌, 절대적으로 모든 이의 구체적 실존에 현존한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최고의 신적인 생명이자 신앙의 대상이다. 바로 하느님 자신인 것이다. 이 하느님 자신이 언제나 인간의 일상 안에, 인간의 깊은 자아 안에 머물러 계신다.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은 구체적인 역사의 범주 안에 제한되지 않는다. 언제나 유한한 인간의 개념을 넘어서고 일상사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아무리 일상의 언어 안에 담으려 해도 담기지 않는, 언제나 더 넓고 깊은 분이다. 하느님은 간접적으로, 다시 말해서 '유비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 분인 것이다. 하느님에 대해 말하기에는 우리의 개념, 언어가 너무 짧다. 그래서 하느님 신앙, 하느님 체험을 표현할 때는 "한편으로는 이렇고, 다른 편으로는 저렇고"내지는 "이것뿐 아니라 저것 역시"와 같은 상호 보완적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라너는 지적한다. 심지어는 대립적인 개념들마저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표현될 수 없는 신비를 표현하

 

데는 언제나 긴장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그런 마당에 서술된 것보다 언제나 넓고 깊은 하느님과 그에 대한 표현을 혼동할 수 없으며, 또 표현 자체에 얽매일수도 없다. '익명'이란 말마디에, 라너가 선험적 차원에서 전개하고 있는 '그리스도', '교회'라는 말 자체에 매여, 그것이 의도하는 바를 놓쳐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라너 자신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는 얼마든지 반박될 수 있으며, 따라서 그보다 더 적절한 용어가 있으면 얼마든지 새로운 용어로 대치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의 이유로 해서 자신도 얼마든지 '익명의 불교인'으로 비칠 수 있다고까지 말한다. 불교인의 내적 논리에 따르면, 하느님의 은총에 근거해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면서도 이웃을 향해 자신을 내주는 예수는 대자 대비한 보살의 다른 표현이라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까닭에, 그런 예수의 정신대로 살려는 그리스도인을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불교인'이라고 명명한다고 해도 불교적으로, 또 그리스도교적으로 전혀 거리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 보건데 '불자'(佛者)라는 낱말 자체에는 '그리스도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은 까닭에 신실한 불자를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 의지를 생생하게 살려 내려는 것일 뿐 불자, 모슬렘, 힌두인이 본래의 자아를 포기하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수용해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의 본래적인 자아야말로 종파에 관계없이 이미 신화(神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그리스도교적 사회에서 타종교를 표현할 수 있는 최선의 그리스도교적 언어로 '익명의 그리스도인(교)'을 선택했다. 그런 점에서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란 말은 그리스도교 입장에서나 가능한, 그리스도교에만 적용되는 표현이지, 비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승인을 얻어야만 하는 일반 규정은 아니다. 비그리스도교를 그리스도교의 언어로, 신학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므로,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다른 종교들을 깎아 내린다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킨다며 라너에게 가한 비판은 설득력을 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타종교를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보전하며, 그리스도교를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독특성과 절대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는 하느님의 은총, 구원 의지를 종파를 초월하여 온 인류에게 가능한 한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설명함으로써 다양해진 오늘의 신학들과 종교들을 그리스도교의 언어 안에 포섭하려고 했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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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라너와의 대화

 

 

신학을 가르치는 자를 존경한다는 것은 그가 먼저 제기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대화를 받아들이고, 이를 더 진척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중점을 두어야 하는 것은 그의 인격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하여 그의 삶을 바친 그 일이다. 그렇게 되면, 그의 인격이 지닌 지혜와 선함도 역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신학적 대화를 받아들이게 되면, 실로 하나님의 더 큰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이해력이 한계를 갖는다는 것도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거울을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 우리의 최상의 사상이라는 것도 아직 다 파악하지 못한 전체의 불완전한 조각들이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름다움의 모호한 투영이다. 이 사실이 우리의 사상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이것은 우리의 사상이 갖는 최상의 존엄성이다. 위대하고 거의 완전한 신학적 총람과 체계도, 이것이 이해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을 바라볼 때는, 파편에 불과한 것이다. 바로 우리의 사상이 틈을 갖는 그곳에서, 계산이 잘 되지 않는 지점에서, 체계 모순의 자유가 엄청나게 커지는 지점에서, 우리의 사상은 더 위대한 것과 오고 있는 것을 지시하기 때문에 빛나기 시작한다. "개념들은 우상숭배를 창조한다. 오로지 놀람만이 그 무엇을 이해한다"고 언젠가 닛싸의 그레고리가 말한 적이 있다. 라너의 저작들 가운데서 사고하는 놀람은 결정적인 곳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것을 많은 제자들은 칼 라너에게서 배웠다. 신학체계를 완성한 많은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의 장점은 그가 그의 전제로부터 사고하고 말해야 할 것을 모두 생각하고 말한 다음에 뒤로 물러나 침묵하고 내용이 스스로 말하도록 하는 바로 그곳에 놓여 있다. 여기서 나는 하나님 앞의 신학적 겸손의 표현만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그 이전의 사람들과 또 그와 나란히 같은 길을 걸어갔고 또 걸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신학적 사귐을 나누는 몸짓도 발견한다.

 

나는 이 논문에서 칼 라너와 하나의 대화를 갖고자 하며, 가능하다면, 그가 몇 년 전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주목받을 만한 테제를 가지고서 열어 놓았던 대화를 진척시키고자 한다. 그 테제의 신학적 근거설명으로서 나는 그의 논문 중에서 "인간화(人間化)의 신학에 관하여(Zur Theologie der Menschwerdung)"을 덧붙인다. 나는 관심을 이 두 논문에 국한시키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가 의도하는 것은 라너 사상의 포괄적 설명이 아니라 그것에 관한 논의이기 때문이다.

 

 

 


1.그리스도교의 보편성 주장, 교회의 특수한 존재 및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적 현실

 

"자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주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하거나, 하잘 것이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여기서 라너는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다원적인 사회와 세계의 서로 다른 문화들과 종교들의 다원주의 안에서 구원의 보편성 주장을 단지 상대적으로 그리고 특수하게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교회의 더 깊은 당혹감 안으로 이 주제를 끌어간다.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 절대성을 내세우던 교회의 옛 주장은 사라졌다.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 4장 1항은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세계관적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교 신앙을 하나의 "종교적 실존해석의 가능한 형태"로 삼고 있다. "동일한 권리 때문이든, 심지어는 더 큰 약속 때문이든 간에, 다른 형태들도 나란히 함께 존재하고 있다." 교회가 다른 많은 세계종교들 중의 한 종교가 되어가면 갈수록, 그리고 교회가 아시아의 오래된 문화권에 발을 들여놓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자신만이 유일한 종교를 대변한다고 내세우던 교회의 주장은 사라져 간다. 물론 교회는 모든 민족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개가 주변적인 소수로 존재할 따름이다. 서양에서조차도 교회는 "작은 무리"로 줄어드는 것같이 보인다.

 

사회와 종교의 외적, 내적 다원주의 안에 있는 교회의 이러한 시대사적 문제의 뒷면에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됨의 더 깊은, 즉 본질적인 문제가 숨어 있다. 절대적인 것, 무한하고 영원한 하나님이 어떻게 상대적인 것, 유한하고 제한적이고 인간적인 하나님의 백성에 의해 일반적으로 설명될 수 있겠는가? 보편적인 것, 하나님의 나라와 그 안의 참 인간됨이 어떻게 특수한 것, 그리스도인됨에 의해 일반적으로 대변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에 의해, 보편적인 것이 특수한 것에 의해 설명되고 대변될 수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되더라도 어떻게 절대적인 것이 절대적인 것으로, 상대적인 것이 상대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이 보편적인 것으로, 특수한 것이 특수한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있고, 전자와 후자의 대리적(代理的) 동일성이 해체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비단 교회의 당혹감만이 아니고 이미 이스라엘의 당혹감이기도 하다. 선택받은 한 백성이 어떻게 그 자신의 선택을 미화하지 않으면으서도, 모든 민족들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영광을 증언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또한 오늘 날의 이른 바 "세계열강"의 이데올로기적 딜렘마이기도 하다. 미국이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자유와 인권"을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아메리카의 서양패권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소련연방의 "최초의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가 "전 인류의 공동체"라는 사회주의를 대변하면서도, 어떻게 이것이 소비예트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제기하는 문제는 실로 많은 문제영역들을 갖고 있으며, 단지 교회 내부만의 문제는 아니다. 만약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면, 이 해결은 교회와 그리스도교를 넘어서 오늘 날 형성되어 가는 중에 있는, 그리고 생존에 필수적인 범세계적 인류 공동체를 위해 의미를 갖는다.

 

 


2. 인간의 자기초월과 하나님의 자기전달


모든 보편성 주장처럼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보편성도 역시 "이 길 밖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다른 길이 없다"는 배타적 요구에 근거해 있다. "인간이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확신하고 있다." 라너는 이러한 종말론적 주장을 교회론적 주장과 결합시키기 위하여 "하나의 참된 교회에 속해 있어야 함"에 동의한다. 옛 고백서가 말하듯이, "실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결론이 이로부터 생겨난다. 하지만 그의 교회전통과는 달리 그는 "하나의 참된 교회"에 대해 말하지만, 이것을 "로마-카톨릭 교회"라고 분명히 말하진 않는다. "참된 교회"는 성령에 의해 설립된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이런 규정은 당연히 로마-카톨릭 교회를 배제하지 않지만, 동시에 정통주의적, 개신교적 교회규정에 대해서도 열려 있다.

 

라너가 확신하듯이, 인간에 대한 결정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라는 고대의 문장은 "그리스도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Christum nulla salus)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신앙되는 곳에는 교회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존재하고 신앙된다는 의미에서, 전자는 후자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구원주장의 이러한 배타성은 이제 포괄적 보편성과 대립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시기"(딤전 2, 4)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 그의 현재와 다가오는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무리의 그의 형제들이 무조건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들의 삶의 실현으로부터 배제되고, 영원한 무의미로 심판받는다"고 그리스도인은 믿을 수 있는지 질문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고,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지체들이 될수있다"고 믿어야 한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될 수 있다)"이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것은 "사람이 단지 익명적 '유신론자'만이 아니라 익명적 그리스도인도 될 수 있고(그렇게 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실로 "이 익명적 연관성이 분명히 보여질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라너는 다음과 같은 과제를 제기한다: "하지만 인간의 그러한 연관성은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는가?"

 

라너가 대답을 주려고 하는 신학적 자리는 스콜라 신학의 "자연과 은총"의 구조이다. 우리는 먼저 대답이 어떠한지 보고난 후, 중세기의 상황과는 본질적인 차이점을 갖는, 앞에서 설명한 오늘 날의 상황에 걸맞는 대답을 주기에는 이 구조가 너무 협소한 것은 아닌지를 묻고자 한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하듯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의 덕분에 생존하고 생존할 가능성을 갖는다고 믿는 피조물의 자유로운 자기전달을 전제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 피조물에게는 확실히 "자신을 넘어서 계시 속에서 완전히 새로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주어져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라너는 인간을 "무한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무제한적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고 부른다. 그에게서 "열려 있음(개방성)"은 한 편으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定義 不可能性)"을 의미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하나님의) "영", 즉 "무한한 신비", "파악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존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존성은 "이 하나님의 세계초월성과 인격성"에 대한 지식 안에서 드러나며, "숨어 있는 그 하나님의 새롭고 가능한, 말씀을 듣는" 능력의 근거가 된다. 전제된 그의 자연으로부터, 그리고 그에게 주어진 초자연적 가능성의 힘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향하게 되어 있다. 인간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을 향하는 이러한 경향성을 라너는 "익명적 유신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토마스의 자연적 욕구(desiderium naturale) 이론과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러나 토마스는 인간의 이 욕구가 지성 안에 자리잡고 있다고 본 반면에, 라너에 의하면 이것은 전 인간의 운동을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경향성은 인간이 된 하나님, 그리스도와의 결속성(結束性)을 포함하는가? 라너는 긍정적으로 대답하지만, 한 편으로는 양자가 자동적으로 함께 결속된다는 사고를 배제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양자가 순전히 우연히 결합된다는 표상도 배제한다. 그리스도는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또한 "가장 중요한, 그리고 가장 분명히 인간과 관련된 현실성의 사실이기도 하다." 라너는 이러한 연결사를 결합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입장에서부터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 불신앙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명하고 나타낼 때, 인간은 진정한 인간이 된다. 인간의 입장에서부터 말한다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파악할 수 없는 신비에 자신을 맡길 때 자신으로 돌아오는 존재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님의 인간화는 "전 인간의 본질실현의 유일회적인 최상의 사례" 이다.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자기초월은 하나님의 자기전달 안에서 성취되며 완성된다. 하나님의 인간화 안에서 인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게로 나아간다. 라너에 의하면 이 두 관점, 즉 인간 현실성의 본질실현과 하나님의 인간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헌신과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인간의 헌신은 하나의 동일한 과정이다. 그러므로 라너는 이 두 측면을 "내면적이면서도 외형적으로", "익명적이면서도 명시적으로" 서로 관련시키며, "인간이 자신의 초월 경험 안에서 ... 이미 은총의 선물을 경험하며, 그리스도 안의 말씀 계시는 ...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명시적으로 그리스도교적인 계시는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다"라고 말한다.

 

모든 인간에게 제공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최상으로 성취된 "하나님의 자기전달"은 "창조 전체의 목표"이다. 이것은 배타적 관점에서 인간이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고 성취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포괄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된 인간이 된다는 것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비주의적 신학으로부터 유래한, 항상 거듭 우리를 놀라게 하는 사고의 전환 속에서 라너는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즉 자기 자신의 본질에 이르는,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인간은, 알든 모르든지,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참으로 온전히 받아들일 때 이미 이 계시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계시는 이미 그 안에서 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긍정 속에서 우리에게 철저히 가까이 다가오는 신비의 은총을 수용한다."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는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의 깊이에서 항상 이미 자신의 가장 본래적인 본질의 실현으로서 경험하는 바로 그것을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로부터 다음의 두 명제가 생긴다. 1. 인간은 그의 가장 본래적인 가능성 안에서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다. 2. 그리스도인은 그의 참된 현실성 안에서 명백한 인간이다.

 

 

 


3."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있는 열려진 질문들

 

우리는 먼저 라너가 자신의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는 "자연과 은총"의 구조 안에 머물면서, 몇 가지 비판적인 반문을 제기하고자 한다.

 


1. 라너의 인간정의(人間定義), 즉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온 정의 불가능성", "자기초월" 그리고 "하나님의 무한한 존재에 대한 무제한적인 개방성"은 보편화할 수 있는 것인가? "아시아의 고대 문화"의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인간"의 정의가 아니라 유럽적이고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하나의 인간이해다. 이미 하이데거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근본조건을 이해한 것이 아니라 1920년대의 중앙 유럽의 시각에서 인간을 이해한 것처럼, 라너의 존재론적 인간론 안에서도 역시 유럽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실존의 이상(理想)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불안한 마음 (Cor inquietum)은 물론 창조로부터 주어진 인간의 성향이지만, 그에게서 그리고 그 이후로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항상 아브라함의 탈출, 이스라엘의 탈출 그리고 히브리서의 순례하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성서 이야기를 통해 규정되어 왔다. 외적으로 내적으로 균형을 이루어 왔던 수 천년 이전의 종교들, 도교와 힌두교와 불교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종교,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의 미래지향적인 불안을 낯설고도 놀랍게 여긴다. 이러한 불안이 어디서나 모든 시대에서 모든 인간의 본질을 이룬다는 주장을 전자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시도로 이해할 것이며, 분명히 유럽적인 이질화(異質化)로 생각하여 거부할 것이다.

 

실로 라너의 인간규정은 보편적으로도 동의할 수 있는 것인가? 이 규정은 인간의 정의 불가능성의 규정처럼 가능한 한 가장 큰 자유이다. 왜냐하면 이 규정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정의들을 포함하고 능가하기 때문이다. 긍정에 고착되는 것보다는 불분명하게 부정하는 것이 차라리 동의를 얻기 더 쉽다. 너무 빨리 반박을 자극하는 발언보다는 무한한 신비 앞에서 침묵하는 것에서 더 큰 사귐이 이루어진다. 이와 꼭 마찬가지로 공통적인 보편성을 규정할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객관적인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규정을 다른 규정들에 맞추려고 하는 주관적인 권리이다. 만약 공통적인 인간성이 있다고 한다면, 만약 하나의 인간적인 세계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면, 누가 그리고 어떤 기구가 이 조건들을 제시하고 이를 위한 법률들을 공포할 권리를 갖는가?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라너는 그의 논문에서 일반적인 인간을 분명히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규정하기에, 바로 이와 동시에 인간 안에 "익명적 그리스도인"이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을 말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보편적인 이면(裏面)과 같아 보인다. 그렇지만 거꾸로 자신이 유일하고 정통한 인간해석이라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인간의 본성을 올바로 규정하고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교회의 보편적인 요구가 다시금 이로부터 생겨나지 않는가?

 


2. 다른 한편으로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우리가 항상 이미 은총으로부터 누리고 있는 것의 명시화"이고, "인간이 그의 존재의 깊이에서 이미 항상 반성없이 경험하는, 은총에 의한 계시의 반성적인 표명"이라고 하는 라너의 정의는 그리스도의 계시가 갖는 탁월한 새로움과 특수함을 정당하게 인정하는가? 물론 라너는 그리스도의 사실(Faktum)을 "가장 자유로운,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가장 우연한 현실성의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이 사실이 어느 정도로 "가장 명백하게 인간과 관련된" 사실인지만을 해석한다. 인간과의 관련성은 인간 안에 항상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이미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의 "명시화"라고 표현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계시는 실제로 새로운 것을 가져다 주지 않고,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하나님의 신비의 불가해한 가까움으로서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할 수 있는 것만을 드러내고, 표현하고, 명명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계시는 완전히 이러한 "은총에 의한 계시"와 관련되고, 이 계시는 완전히 인간의 피조성과 관련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를 통하여 마땅히 되어야 할 바로 그 존재가 된다. 그는 하나님에게 나아감으로써 자기 자신에게 나아가며, 자기 자신에게 나아감으로써 하나님에게 나아간다.

 

라너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철저히 실존적인 해석이다. 루돌프 불트만도 그렇게 보았다: "예수 안에서 나타난 빛은 창조 안에서 이미 항상 빛나고 있었던 그 빛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구원계시의 빛 안에서 이해하는 자신은 그가 창조와 율법 안의 계시 안에서 이미 항상 이해했던 것, 즉 하나님의 피조물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계시가 단지 인간성의 진리를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리스도교 신앙도 인간 안에 있는 은밀한 하나님의 은총의 각성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으로 현실화된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일반적인 인간성의 드러냄, 각성 그리고 그 단순한 확인이 됨으로써, 그 특수성은 이러한 인간성 안에서 사라질 위험에 처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의 특수성이 인간성의 진리라고 강변된다. 이것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까지도 완전히 성취할 수 없다고 깨달을 수 밖에 없었던 낡은 절대주의적 주장이 아닌가?

 


3. 만약 인간이 된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전제로 이해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이 인간이 된다는 사실의 표현과 실현으로 이해된다면, 이러한 사고는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쉽사리 순환구조에 빠진다. 즉 확인되어야 할 사실이 미리 전제되고, 전제된 사실이 차후에 확인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과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마치 그림과 그 그림에 맞춘 틀처럼 서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인간이 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특수한 존재의 일반성이 되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일반적인 존재의 특수성이 된다. 그렇지만 이로 인하여 이 특수성과 보편성은 배타적으로 서로 관련된다. 세계관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갖는 국가에서의 종교적 자유의 다원주의와 지구 상의 세계종교의 다원주의를 위한 여지는 사실상 아무 것도 없게 된다. 자연과 은총이라고 하는 중세기의 구조는 현대적으로 해석되지만 변경되지는 않는다. "은총은 자연을 전제한다."(Gratia praespponit naturam): 은총은 스스로 수동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자연을 전제한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완성한다."(Gratia non destruit, sed praesupponit et perficit naturam): 그리스도의 인간화는 창조의 목표이다. 그러므로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고 그리스도인은 인간성의 완성이다.

 

이러한 중세기의 구조는 물론 자연과 초자연이라는 존재론적 단계와 자연과 은총의 구원사적 관계와 직접 관련된다. 하지만 이 구조는 교회가 세계에 대하여 자신을 "사회의 왕관"과 완전한 사회(Societas perfecta)라고 주장하던 지배권을 반영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주장은 오로지 그리스도교적 제국 안에서만 주장될 수 있었다. 6대륙에서 선교해야 하는 열린 상황 안에서는 이 주장이 전혀 고수될 수 없다. 근본적으로 이 주장은 교회에게 항상 너무 큰 부담을 안겨 주었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천년왕국론과 같이 교회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4."자연과 은총"의 구조의 확장

 

신학 전통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중적이며 이분법적인 사고를 선호해 왔다. 신학전통은 "창조와 구원", "자연과 은총", "필연과 자유", "몸과 영혼" 등에 관하여 말해 왔다. 이 이원론의 맥락 안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명제가 만들어졌다: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이를 전제하고 완성한다".

 

나는 이 기본 명제가 첫 마디에서는 옳다고 생각하지만, 둘째 마디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은총과 영광, 역사와 창조,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 그리스도인됨과 완성된 인간됨 사이를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구분은 충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이 기본 명제는 항상 다시금 종말론적 열광주의에 근거한 승리주의로 귀착된다. 즉 은총 안에는 자연을 완성하는 영광이 이미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계약 안에는 이미 창조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안에는 이미 인간성의 완성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열광주의는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늘 지나치게 강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왜냐하면 은총, 교회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아직도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신학적인 기본 명제의 두 번째 마디를 삼중적인 변증법으로 새롭게 표현한다: "은총은 자연을 완성하지 않고, 영원한 영광을 위하여 자연을 미리 준비시킨다. 은총은 자연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세상의 메시아적 준비이다"(Gratia non perficit, sed praeparat naturam ad gloriam aeternam. Gratia non est perfectio naturae, sed praeparatio messianica mundi ad regnum Dei). 이 기본 명제는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 안에서 계시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여, 그의 부활은 영광의 나라에 이르는 세계의 새 창조의 시작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아직까지 창조의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리스도는 바로 이를 위하여 왔다. 바로 이로부터 자연과 은총 그리고 자연과 은총의 관계가 항상 하나님의 미래의 관점 안에서 말해져야 한다고 하는 결론이 나온다. 이 하나님의 미래는 자연만이 아니라 은총도 완성하며, 그러므로 역사 안에서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만든다. 더 나아가 역사적 계약이 아니라 역사적 계약을 통하여 약속되고 보증된, 오고 있는 영광의 나라가 "창조의 내적 근거"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은 인간성의 명시화, 진리, 완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은 미래의 공동적인 인간실현으로 나아가는, 가능한 유일한 메시야적인 길이라는 결론이 이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메시야적인 길 위에서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해방되고 영화롭게 된 인간과 하나님의 정의 안에서 일치된 인류에 대한 동일한 희망의 동료와 증인으로서 자신 외에도 유대인을 발견한다.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을 억압하지 않고 그에게 의존하며, 그와의 역사적인 사귐 안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본래적인 약속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은 세계 안에서 다른,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을 발견한다. 아마도 그는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을 발견하기 보다는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병자들 그리고 사로잡힌 자들의 익명성 안에서 현존하는 다가오는 심판의 심판자(막 25장)를 발견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존재한다. 교회는 또한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일하게 대변한다는 주장을 갖지는 않는다. 물론 이러한 인식은 교회가 "다원주의적인 사회" 안에서 종교적인 신앙의 임의성(任意性)으로 해체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고, 도리어 세상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 안으로 확고히 들어간다는것,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들과의 유대와 억눌린 자들을 위한 그 "일차적 당파성"을 의미한다.

 

중세기의 유대교에서는 이방인들을 복음화하는 그리스도교가 -예를 들면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이방세계의 "메시야적 준비"(praeparatio messianica)로 간주되고 존중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유대적-신학적 평가를 수용하며, 이방세계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까지 이를 확장한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에게 주어진 희망의 능력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은 하나님의 미래를 위해 미리 준비되고 개방된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메시야적인 운동 안에서 사고한다면, 큰 신학적 이원론은 그 단순한 대립으로부터 해방되고, 다가오는 더 큰 것을 향해서 상대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이원론은 더 이상 상대방에 대한 상호부정에 의해 정의되지 않고, 그 다양한 상관관계 안에서 공통적인 삼자(三者)를 향하도록 결정될 것이다. 그리하여 은총과 자연, 계약과 창조, 그리스도인됨과 인간됨의 역사적 중재는 더 정확히 인식되고, 더 자세히 이해될 것이다.

 

 

 

5. 창조, 인간화 그리고 영광의 나라

 

"자연과 은총"의 구조를 이렇게 확장하는 이유를 들라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지적이 유용할 것이다.

 

1.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창조의 목표"는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활동으로부터 물러나 "쉼으로써", 그의 창조를 완성한다. 그래서 그는 일곱 째 날을 축복하고, 거룩하게 한다. 하나님의 이 안식일은 "창조의 축제"이며, 창조의 축제로서 또한 "완성의 축제"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창조가 끝난 즉시 자신으로부터 물러감으로써, 안식일에 자신 안으로 되돌아가며, 안식 안에서 다시 자신으로 되돌아온다. 그의 안식 안에서 그의 모든 특별한 말씀과 활동은 끝난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임재한다. 자신의 안식으로 돌아옴으로써, 그는 그의 피조물을 있는 그대로 놓아둔다. 그의 얼굴 앞에서, 그의 임재와 그의 안식 안에서 피조물은 마땅히 되어야 할 존재가 되고, 자신의 자유 안에서 자신을 전개시킨다.

 

창조주는 창조된 모든 것을 무로부터 존재케 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무의 위협을 받는다. 모든 것은 다시 무로 되돌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위협이 미치지 않는 장소와 시간을, "안식처"를 불안하게 추구한다고 우리는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히 4, 9 이하).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대로, 단지 인간의 마음만이 "당신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불안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고 만들어진 모든 피조물들은 이러한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첫 창조보도에 따르면, 피조물들이 자기 자신과 기쁨으로 되돌아가는 "안식"은, 영지주의와 신비주의가 가르치듯이, 하늘과 피안적인 하나님의 안식이 아니라 창조 안의 하나님의 안식이다. 하나님의 안식하는 직접적인 임재 안에서 그의 모든 창조물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게 되며, 무의 위협 앞에서 영원한 보호를 받는다. 안식은 모든 창조물들과 모든 창조의 사귐을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의 복으로 채운다. 칼 라너가 그의 모든 논문에서 파악할 수 없지만 너무나 가까운 하나님의 신비라고 그처럼 확신있게 설명한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안식의 가까움의 조용함과 휴식이 아닌가? 이 안식 안에서 하나님은 말이 아닌 침묵을 통하여, 행위가 아닌 현존을 통하여 자신을 알린다.

 

2. 그리스도안의 하나님의 인간화는 단지 타락에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태초에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실에도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보이는 형상이라고 불리고 있고, 인간이 많은 형제들 중의 맏아들인 그리스도를 "본받게 될"(롬 8, 29) 때,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결정된 그 진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것을 단지 타락과 태초의 창조에만 뒤로 연결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미래에도 연결시켜야 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 17).

 

만약 성육신이 그리스도론의 중심에 놓여지면, 그리스도론의 이러한 종말론적 연관성은 너무 쉽게 시야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상의 고난과 죽음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헌신,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그의 부활, 그의 새로운 몸의 영광스러운 변모로부터 시작하면, 그리스도론의 종말론적 지평은 즉시 빛난다. 이러한 종말론적 지평이 저 태초론적 지평과 일치하지 않다는 것도 분명해진다. 왜냐하면 창조의 구원과 영광스러운 변모는 태초의 창조의 회복과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새 창조"는 "태초의 창조"에 비해 새롭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간됨에서 이미 인식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규정된 점을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인간의 이러한 태초의 규정의 회복으로 간주될 수 있고, 그 참되고 완성된 본질실현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영광의 나라에서의 창조의 변모를 주목할 때,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하나님의 본성에의 완성된 참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간됨을 원초적 성례전(Ursakrament)으로 볼 수 있다. 토마스주의의 성례신학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회상의 표지(signum rememorativum)이고, 인간이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과 관련된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또한 기대의 표지(signum progosticon)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종말론적 안식일에서의 궁극적인 영화와 관련된다. 두 전망의 통일성 속에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은 역사 안에 있는 현재의 인간들을 위한 은총의 표지(signum gratiae)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간됨이 태초의 일반적인 인간됨을 소급하여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됨의 확실한 완성으로 여겨질 수 있듯이,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자신을 넘어서 모든 인간들을 위한 위대한 미래를 지시하고, 이러한 관점에서 하나의 길과 통과지점이다. 즉 그리스도는 세계를 위한 하나님의 성육신한 약속이다.

 


3. 만약 우리가 이러한 다양한 상관관계를 주목한다면, 인간됨을 그리스도인됨의 전제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됨을 인간됨의 완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됨은 벌써 그 자체로서 인간됨의 완성이 아니라, 인간됨의 완성을 향해 가는 역사적 길이고 약속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일반적이고 참된 인간됨은 인류의 기원 안에서 가설적으로 추구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으로 역사의 미래에 놓여 있다. 즉 그것은 인간다운 세계 공동체 안의 인간다운 인간이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인간론적으로 전개된 것은 실제로 인류의 공동적인 미래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되고자 하는 기획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존재하지만, 하나의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인간다운 인간들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마도 더 현실적인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이 존재하는 목적은 하나의 인류 공동체가 생겨나서, 이 공동체의 일원들이 자신을 참으로 인간다운 인간들로서 이해하는 데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 유대인들 그리고 이방인들은 이러한 인간다운 미래를 향한 약속과 길로서 간주되어야 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실상 이제 "... 은총과 교회의 신학도, 그리고 우리의 현재를 냉정하게 고찰하는 정직한 목회신학도 실로 자체의 긴급성을 회피할 ... 수는 없는" 바로 그 주제를 이미 다소 다르게 평가한 셈이 되었다. 인간됨의 보편주의, 그리스도인됨의 특수주의 그리고 종교들의 다원주의, 이 삼각(三角)은 그 어떤 한 각(角)으로 해체될 수 없다. 이제 종말론적 신학에 따라 교회의 불가피한 특수주의가 인간됨의 보편주의와 종교들의 다원주의를 포용하고 정당화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설명해야 한다.

 

 

 


6. 역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1. 우리가 역사적 은총과 종말론적 영광의 차이를 문제논의 안으로 진지하게 끌어들인다면, 역사적 교회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차이도 강조되어야 한다. 교회는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안에는 성전도 없고, 그래서 교회도 더 이상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만유 안에서 만유가 되기" 때문이다. 교회가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면, 역사적 교회는 보편성을 띠고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속성도 주장하거나 용인할 수가 없다. 보편적인 것은 새 창조의 나라이지 교회가 아니다. 이 점은 교회와 유대교, 회당과의 관계의 내적인 문제에서 바로 분명해진다. 만약 교회가 자신의 의도와 경향성에서 보편적이라고 한다면, 자신과 나란히 존재하는 유대교를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유대인들의 유일한 미래는 세례와 교회입회가 될 것이다.

 

교회사 속에서 너무나 오랫 동안 대변되고 실천되어 온 이러한 개선주의(凱旋主義)는 로마서 9-11장의 증언에서 이미 좌초하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교회와 나란히 여전히 그의 구원소명을 갖고 있으며, 교회와 함께 영광 중에 메시야가 올 날에 대한 공동의 희망을 갖고 있다. 유일하게 참되게 "보편적이다"고 말할 수 있는 하나님의 저 미래 안에서 교회와 이스라엘의 특수한 실존은 멈춘다. 왜냐하면 이들의 특별한 선택은 특별한 봉사를 위해 실현될 것이 때문이다.

 


2.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차별, 억압과 착취가 존재하는 비인간적인 세계에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사도적 복음은 예수의 이름 안에서 당파성을 취한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그 위(位)에서 내리쳤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空手)로 보내셨도다"(눅 1, 51 이하). 이 점은 교회 공동체 자체에서도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 하며, 문벌(門閥) 좋은 자가 많지 아니 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 26-29). 부자들, 강한 자들과 높은 자들에 맞서서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사도적 복음의 당파성은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사도의 길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폭력적인 세계 안에서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구체적으로 증언될 수 없다.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비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인의 당파성은 보편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는 일에서 필수적인 형태이다. 예수는 의로운 자들, 건강한 자들과 경멸하는 자들도 구원하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죄인들, 병든 자들과 문둥병자들의 편으로 향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길에서 이스라엘도 구원하기 위하여 이방인 선교사가 되었다.

 

만약 이른 바 교회의 특수주의가 오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이름으로 가난한 자들의 편을 드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당파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 보편적인 구원주장 때문에 그것을 나무랄 수는 없다. 오늘 날의 세계에서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는 다원주의 사회 안에서 보편적인 구원을 주장하는 자신의 특수하고 주변적인 실존이 아니라, 사회가 이데올로기적-종교적으로 "다원주의적"이든지 단일한 형태를 갖든지, 폭력적인 사회 안에서 가난한 대중의 편을 드는 교회의 당파성이다.

 

만약 교회가 특수성 안에서 자신의 보편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한다면, 이 세계의 가난한 자들, 약한 자들과 억눌린 자들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늘 따르려고 할 것이다. 교회는 심판과 하나님의 나라를 통하여 이 세계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임재를 발견하고, 이 임재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라너가 제기한 주제의 물음으로 되돌아간다. 이 세계에서 그리스도교 밖에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가?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바로 마태복음 25장의 가난한 자들, 굶주리는 자들, 목마른 자들, 병든 자들 그리고 옥에 갇힌 자들이다. 이들이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든, 그리스도는 이들을 자신의 "형제들과 자매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신앙하든 신앙하지 않든, 이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하는 마태복음 18장의 어린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자비와 공의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도 역시 "익명적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한다.

 

 

 

하나님이 함께 고난받는다는 것과 고난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질문


(1) 칼 라너


"한번 더 십자가의 신학에 대하여 말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제 죽음의 기본개념 일반에 관해서 단순히 지적하는 것 이상으로 뭔가를 말해야 한다면, 나의 비(非)-십자가의 신학, 나의 십자가의 신학의 미흡함이 어디에 있는지 더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이제 공격을 하려고 한다면,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Hans Urs von Balthasar)만이 아니라 아드리엔네 폰 스파이어(Adrienne von Speyr)에게서도(물론 이 사람에게는 훨씬 더 그렇지만), 그리고 또 이들과는 무관하게 몰트만에게서도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을 구상하는 현대적인 경향성(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론이 아니라 경향성이다)이 존재한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이 신학은 근본적으로 영지주의적인 것같이 여겨집니다. 한 번 원초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오물과 진흙더미와 절망에서 헤어 나오기를 원한다고 하더라도, - 한 번 더 거칠게 말한다면 -, 하나님이 바로 오물 속에 계신다는 것이 내게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물론 알고 있고 또 실로 이미 강조해 왔던 사실대로, 고대의 성육신 이론, 즉 실체적 연합의 신학을 샅샅이 살펴보면, 내가 부인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는 하나의 의미있고 진지한 이론, 즉 하나님이 죽었다는 이론이 존재하고 있으며, 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그렇다고 성부수난설로 타락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하나님이 자기 자신의 역사인 이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면, 또 그런 한에서, 하나님이 실로 나와는 다른 방법으로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사실은 내게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 만약 이 말이 대체로 하나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면 - 참되고 진정한 그리고 나를 위로하시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Deus impassibilis), 움직이지 않는 하나님(Deus immutabilis)이신 반면에,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몰트만과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는 하나의 절대적인모순과 성부수난설의 신학, 아마도 하나님 자신 안으로 분열, 갈등, 무신성(無神性)을 투사(投射)하는 하나의 쉘링적 신학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여기에서 먼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정확히 알 수 있습니까? ... 그리고 두 번째로 다음과 같이 묻고 싶습니다. 정말 그 말을 뜻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내게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P. Imhoff/H. Bailonowos, Karl Rahner im Gespr ch Ⅰ, M nchen 1982, 245f.)

 

 


(2) 위르겐 몰트만


사랑하는 라너 신부님께

 

나는 너무 늦게 이 인터뷰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돌아가신 후에 대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갖는 신앙의 근본문제에 관하여 당신과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가 믿는 대로, 만약 죽음과 함께 공간과 시간 속의 유한성으로부터 벗어난다면, 당신의 생애의 제한된 시간보다는 하나님의 면전에 계신 이 순간에 당신은 내게 더 가까이 존재하실 것입니다.

 

당신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에 관한 인터뷰에서 단지 지나치는 말로 저를 언급하셨습니다만, 나의 신앙과 나의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신학의 핵심을 찌르셨습니다. "오로지 고난당하시는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다"고 디트리히 본회퍼가 게쉬타포의 감옥에서 썼습니다. 1945년에 내가 오물투성이의 포로수용소 안에서 시련을 겪고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아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졌을" 때, 하나님에게서 버림받고 죽어 가는, 시련받는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나를 도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는 뜻에서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당신의 반대진술은 나의 마음을 동요시켰습니다. 나는 위로와 무감정 사이를 전혀 연결시킬 수가 없으며, 그래서 당신의 하나님 체험과 자기 체험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식대로 우리의 수난사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수난사 아래 오신 것은 비자발적인 것이 아닙니다. 고대교회의 신학자들에게는 오로지 피조물의 비자발적인 고난과 하나님의 본질적인 무감정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셋째 대안이 있었으니, 그것은 곧 사랑받는 자에 대한, 그리고 사랑하는 자 때문에 겪는 사랑의 자발적인 고난입니다. 하나님이 유한한 피조물이 생각하는 바와 같은 방식으로 고난당하시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분은 자신 안에서 무조건 고난당할 수 없는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고난당하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본질은 자비입니다. 나는이 점을 나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1972년, 214쪽 이하)에서 상세하게 밝혀 놓았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도 없거니와 느끼실 수도 없습니다. 동정은 그분에게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간들을 위로할 수도 없습니다. 함께 느끼는 자만이 동정적입니다. 감정적인 자만이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본질 상 감정적인 자만이 위로할 수 있지, 무감정한 자는 그리할 수 없습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을 나는 인격적인 뜻에서 위로하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내게 너무 차갑고 시멘트처럼 무뚝뚝하게 생각됩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동요시키고 놀라게 했던 것은 당신 자신의 진술입니다: "나는 처음부터 이러한 참혹함 안에서는 몸이 시멘트처럼 굳어 버렸습니다." 이것은 잔인하고 찢겨지고 분리되며 운동불가능한 삶처럼 여겨집니다. "시멘트처럼 굳어졌다"고 생각되는 자에게는 어떤 것도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며, 그는 누구에게도 다가가지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할 수 없는 생명과 같습니다. 실로 그것은 차갑게 식어 버리고 딱딱하게 굳은, 그리고 이미 죽은 생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독신제도가 하나님을 열광적으로 따르는 젊은이들에게 부과한, 자연적인 생활관계로부터의 격리가 주는 고통입니까?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것"은 예수회 사람들이 항상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세상의 의무를 완전히 부정하는 그러한 특별한 경험입니까? 아니면 그것은 육체적 생활이 점점 더 고달파진 한 늙은이의 생활감정일 뿐입니까? 그러나 부유하고 모든 면에서 축복받은 생활의 마지막에 누가 이 생활의 "참혹함"만을 바라보고, 그의 깨어지기 쉬운 미(美)와 유한한 선(善)도 역시 보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단 한번 자신의 결단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면, 누가 이 제자도(弟子道)의 대가(對價)에 대해 불평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한 것이 배후에 있습니다. "처음부터"라고 당신은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분명히 인간의 이러한 생활 전체와 당신과 함께 우리 모두에게 지워진 그 어떤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악한 세상입니까, 아니면 숙명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자신입니까? 우리는 "이 지구 상에서 저주받은 사람들"에게 속해 있지 않기에, 그것은 당신이 표현 한대로 하나님이 내리신 파멸 덩어리(massa perditionis)라는 저주로부터 느끼는 지옥감정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합니다. "처음부터"라는 어법은 이를 주목하는 모든 독자들의 영혼을 짓누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너무나 절망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위로받을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위로하는 뜻에서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에게 아무런 애통도, 아무런 슬픔도, 아무런 부르짖음도 더 이상 없다는 것, 우리가 애통과 슬픔과 부르짖음 가운데서 하나님 안에 있는 구원을 갈망한다는 것을 뜻하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고난불가능성과 그분의 부동성(不動性)과 그분의 사랑받지 못하는 무사랑 안으로 그 나름대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다는 뜻은 분명히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들은 도대체 무슨 권리로 하나님은 "불가능하시다"고 말하는 겁니까? 우리가 부정적 신학(否定的 神學)의 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시멘트처럼 굳어 버리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러하다면, 시멘트처럼 굳어지는 개인의 자기 경험과 고난당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경험은 정확히 서로 일치합니다. 그렇다면 부동성과 고난불가능성 안으로 시멘트처럼 굳어져 있는 하나님이 자신의 생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이 표현하신 대로, 하나님도 실제로 우리처럼 "바로 오물 속에 있는" 셈이 될 것이고, 하나님도 인간도 영원히 위로를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생각을 끌어가지는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제 그 당시보다, 그리고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이 아실 것입니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존경하고, 당신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으며, 이제는 당신 때문에 깊은 충격을 받고 있습니다.

 

위르겐 몰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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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L RAHNER'S PHILOSOPHICAL UNDERSTANDING OF THE TRINITY

 

Jung S. Rhee, Dr.theol.

Associate Professor of Systematic Theology at Fuller Theological Seminary, Pasadena

 

 

Karl Rahner(1904-1984), one of the most influential Roman Catholic theologians today, represents a new direction in post-Vatican II Roman Catholic theology. Though whether he correctly represents it is disputable, it is undoubtedly true that Karl Rahner dominated and shaped the Second Vatican Council, as a major theological force, with a strong support of the German Church.1) Therefore, his evaluation of the Council is absolutely positive and full of praise, while his critics devaluated it as a victory of modernist heretics. Frankly, Rahner accepted his critic's charge as true, for he believed that the Vatican II accepted the spirit of modernism:

Surely the Council has offered to theology an intensified awareness of problems and a greater leeway for free theological investigation...the Council has begun to see, to recognize the spirit of today's world, that is, of a world which is pluralistic, scientific, technological, of tremendous scope and diversity in knowledge and direction, a world of shattered Christianity, of many religions, a world of a tremendously projected future.2)

Understanding the Second Vatican Council as the official permission of liberal and modemist theology, Rahner advocated "the courage to change" not only church laws but also doctrines and morals to adapt to the spirit of today.3)

Criticism of Traditional Trinitarianism

Unfortunately, what troubled his mind most was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because he thought that it has been so scholastic and meaningless even though the doctrine of the Trinity is supposed to be fruitful and practical as the most central, comprehensive, and ultimate doctrine in the whole Christian system of faith. So, he strongly insisted a liberation from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Any attempt today to present the Christian doctrine of the Trinity must involve a 'liberation' of the usual traditional propositions from their 'splendid isolation', in which they have been encapsulated in scholastic theology.4)

Therefore, his doctrine of the Trinity begins with a sharp criticism of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with a purpose of liberation from it. As a whole, he charged that it failed to make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 reality in the concrete life of the faithful," suggesting "the fact that, despite their orthodox confession of the Trinity, Christians are, in their practical life, almost mere 'monotheists'."5) Further, he insisted that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has no ability to appreciate the distinct peculiarity of each person in the Trinity. As evidence, he asks a test question: "Could each of the divine persons(if God freely so decided) have become man?" Of course, his answer is No, while he believes that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has answered Yes.6) In his mind, he is deeply dissatisfied with the tradition which simply stated that God became man, without a strong exclusivistic emphasis that Logos became man, as if which person became man is not so important. But, it is his intentional misleading that the tradition did not pay attention to the fact that Who became man is 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God the Son, though it humbly confessed that the mysterious divine decree is the reason why the Second Person came to the world to save us and the factor of the Son's obedience--neither destiny nor necessity--is one of the most important element in his incarnation of grace.7) Moreover, he exaggeratively contends that "Our Father" is addressed indifferently to all three divine persons.8) But, these negative criticisms aim at the conclusion that indifference of persons in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has wrongly molded Christian spirituality as monotheistic, not trinitarian.

His Grundaxiom of Trinity Doctrine

However, those charges are simply untrue, except the fact that the traditional doctrine of the Trinity does not teach that only the Second Person could and should become man, because it is not a biblically warranted idea. Though, why and how dare Rahner insist that? His purely hypostatic proposition that only the Second Person could and should become man is grounded upon his groundless Grundaxiom of the Trinity that "The economic Trinity is the immanent Trinity, and the immanent Trinity is the economic Trinity."9) From the biblical point of view, it is groundless and therefore hardly acceptable. But, his idea of "absolute identity"10) has many followers today.11) There must be some attractive and persuasive elements in this idea. Rahner's own explanation seems rather evangelical: a redemptive-historical approach to the doctrine of the Trinity that the Trinity seen in the salvation history (the economic Trinity) is the real Trinity (the immanent Trinity), and that's all, nothing else. The traditional distinction between the economic and immanent Trinity is, he pointed out, the main source of trinitarian confusion and the principal reason for making the doctrine of the Trinity purely conceptual.12) This is partly true because the total denial of their inter-connection results in the trinitarian agnosticism that we are unable to know anything about the triune God Himself and whatever we know about God is not real but only temporarily functional and fictitious. Then, we cannot know even that God is three-personal, and all of our beliefs in God will be confused and shaken.

However, what I cannot agree with Rahner is his radical idea of exclusively absolute identity between the economic and immanent Trinity. The redemptive-historical approach is fine, but it does not necessarily entail the idea of their absolute identity. Rather, a biblical redemptive-historical approach has to humbly recognize the limitation of our ability and accomodation of divine revelation, both of which are logically consistent. But, he rejects not only the incomprehensibility of God, but also any possibility of unrevealed mystery about God. Simply assuming that the agnostic idea that "The dogma of the Trinity is an absolute mystery which we do not understand even after it has been revealed"13) is the traditional position, he disagrees with it.(His intentional polarization--absolute mystery or no mystery-is not fair, because the traditional position is rather a middle one that we can know God as much as revealed by Himself but it is limited due to our humanity and divine revelation, and therefore there is still much of mystery about God.) To him, "the mystery of the Trinity is the last mystery of our own reality."14) It means that, when it is revealed, it will finally break down all the walls of seperation between two worlds of God and man and then open up a new age when there will be no longer any mystery to us and about us. Therefore, he rejects any distinction between the economic and immanent Trinity, which is based on the humble belief that, due to our creaturely humanity, our knowledqe of God has a definite limitation and therefore God revealed only as much as we need and be able to understand, because he believes that now the Trinity is completely revealed and there is no more unrevealed element about the triune God. Therefore, what we know now is everythinq about the triune God Himself. So, he advocated "a theoloqy of knowledqe" instead of the traditional theology which humbly recognizes its limitation and much mystery still unknown to us, and therefore insisted their absolute identity.15)

Transcendental Anthropology

However, until we find out his stronq philosophical motif behind this, our explanation is incomplete. Rahner's general approach to theoloqy is a philosophical reconstruction of traditional theoloqy rather than its biblical reflection.16) From the Reformed point of view, his theological methodology is outrageous. He scarcely refers to the Scripture, while his dependence on philosophy is excessive. Indeed, he confesses his "almost superstitious respect for philosophy."17). Originally, he wanted to become a professional philosopher. Even though his failure in the pursuit of philosophy changed his career to theology18), it is generally agreed that his philosophy called Transcendental Thomism--especially transcendental anthropology-became the structural foundation and methodological principle for his whole theology.19)

Moreover, it is the doctrine of the Trinity and Christology upon which this transcendental anthropology made its most decisive influence.20) This philosophical anthropology is based upon the belief in the transcendental ability of the human being, that is, human capacity to go beyond human limitation.21) Philosophically, it elevates man to the level of the transcendent God, for its starting point is the presupposition of "Man as Transcendent Being."22) This transcendental method was developed by Kant against the traditional idea that 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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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bloomy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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