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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츨(Albrecht Ritschl, 1822.3.25~1889.3.20)

by 【고동엽】 2022. 3. 4.

리츨 [Albrecht Ritschl, 1822.3.25~1889.3.20]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이자 자유주의 신학의 거두이다.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데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있다고 강조했다.

국적 독일
활동분야 신학
출생지 독일 베를린
주요저서 《경건파의 역사》(3권, 1880∼1886)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본문


베를린 출생. 본대학의 강사 ·교수를 거쳐 1859년 본대학 정교수가 되고, 1864년 괴팅겐대학 교수가 되었다. 처음에는 바울이 지도하는 튀빙겐학파에 속하여 교회사가(敎會史家)로 출발하였으나, 점차 거기서 이탈하여 주저 《의인(義認)과 속죄(贖罪):Die christliche Lehre von der Rechtfertigung und Versöhnung》(3권, 1870∼1874)를 발표한 이후로는 조직신학으로서 독자적 신학사상을 전개, 많은 추종자를 모아 리츨학파를 형성하였다.


그의 사상의 특색은 신학으로부터 형이상학을 배제하고 종교적 인식을 이론적 인식과 다른 가치판단으로서 특징지었으며, 경건주의 ·신비주의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에서의 역사적 계시를 강조하였던 점, 특히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느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시키는 데 그리스도교의 사명이 있다고 강조하여 하나의 윤리적 또는 문화적 그리스도교를 제창한 점에 있다.


리츨학파에 속한 사람으로는 W.헤르만, J.카프탄, A.하르나크 등이 있었다. 주요저서에 《경건파의 역사:Die Geschichte des Pietismus》(3권, 1880∼188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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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리츨 (Albrecht Ritschl,1822-1889)사상연구


정승원 합동신학대학 교수(조직신학)

 

알브레히트 리츨 (Albrecht Ritschl, 1822-1889)

 

슐라이어막허에 이어 현대 신학에 큰 영향을 준 리츨은 계몽주의와 과학의 발달로 영향력을 잃어 가던 기독교를 다른 차원에서 해석했다. 그는 신학과 과학 사이에 발생되는 갈등은 단지 '과학적' 지식과 '종교적' 지식이 따로 있음을 바로 구분하지 못한데서 생겼다고 주장했다. 과학적 지식이란 순수 이론적 객관성에 근거하고 종교적 지식은 실재(reality)에 대한 가치 판단들로 이루어진 것이라 그는 믿었다.

 

달리 표현하면 과학적 지식은 다만 사물의 존재 양식에 관한 것인 반면, 종교적 지식은 항상 사물이 어떠한 모습이 되어야 할까 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역사적 사실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그러한 사실들 속에 인지(認知) 할 수 있는 가치에 관한 지식이라는 것이다.

 

리츨에게 가치(value)라는 것은 단지 어떤 윤리적인 것만 아니라 실재의 주어진 사실 혹은 관점의 의미도 들어 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신학적 교리는 기독교인의 삶의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럼 간단히 리츨의 신학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리츨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오직 우리의 관계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은 자연과 도덕의 원리이고 그의 근본적 성품은 모든 자를 사랑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그 하나님의 인격이나 속성은 오직 우리를 통해서야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하나님은 슐라이어막허의 개념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그 하나님은 존재하시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존재가 되고마는 것이다. 또한 리츨은 죄를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유의 오용 혹은 이기심으로 보며 자유와 도덕적 가치에 방해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죄나 의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다고 한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율법적인 것에 얽매 일 수가 없다고 한다.

 

기독론에 있어서도 '가치'의 개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리츨에게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그의 가치'가 중요한 것이다. 즉 '어떻게 그리스도가 나를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또한 리츨은 그리스도가 영원전부터 선재하셨다는 전통적 교리는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러한 것은 우리에게 실제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영원성이나 신성의 가르침은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와 멀어지게 하는 것이요 우리로 그를 본받는데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가 신성하다고 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임무에 극도로 충성했기 때문이요, 그가 우리를 위한 고유하고 특별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말은 예수도 우리처럼 순간 순간 그의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는 것이 전제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을 수 있고 우리도 그리스도의 신성의 특징을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차원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구원의 차원에서 중요하다고 말한다.

 

리츨이 말하는 구원이란 모든 사람에게 있는 도덕적 성숙의 가능성을 현실화 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 속 깊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또한 믿음이란 예수의 과거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즉 그가 오늘날 우리안에 갖도록 하는 도덕적-윤리적 가치에 근거한다고 한다. (이렇게 모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사람안에 내재하는 도덕적 가능성을 강조하는 리츨의 구원관에는 전통적 대속의 교리나 제한적 속죄의 교리가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그의 신학의 중요한 개념중 하나인 '하나님 나라'란 '인간과 하나님의 공통적 도덕적 목적을 이루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안에서 사랑의 동기와 상호적 행동 연합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리츨의 신학의 문제들 중 두가지만 논한다면 첫째, 그의 가치의 개념이다. 리츨은 마치 과학적 지식은 어떤 가치 판단 없이 순수하게 객관적이라 믿고 있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예를 들어, 가설(hyposthesis)이나 과학적 제안(proposition) 역시 가치 판단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또한 종교적 지식에는 리츨이 주장하듯이 역사적, 객관적 지식이 결여되고 가치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가치가 들어 있는 역사적 지식인 것이다. 그리고 리츨이 말하는 종교적 지식에서의 가치란 (비록 하나님 나라의 가치, 복음의 가치를 말하지만) 성경을 떠난 가치요 인간의 자율적인 가치에 불과하다.

 

또한 리츨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인간과의 관계에서 말하지만,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모든 인류가 따를 가치가 주어질 수 있겠는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면 굳이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리츨이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신적 가치란 그가 바라는 인간의 이상적 모습일 뿐이다.
둘째로, 리츨의 신학 역시 칸트의 본체적/현상적 이원론적 세계에 근거한다.

 

그가 말하는 '가치'란 바로 칸트의 본체론적(noumenal) 세계에 속한 개념이다. 역사나 경험(현상적 세계)과는 거리가 멀지만 실천적 필요에 의해 주어지는 '가치'의 개념인 것이다. 또한 리츨의 하나님 나라란 인간의 자율성을 극대화하고 인간의 자유를 완전 보장화하려는 일종의 바벨탑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리츨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서는 언급을 회피한다. (사실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는 알 수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단지 하나님의 내재성, 즉 인간과의 관계만을 강조한다. 비록 하나님의 초월성을 전제하지만 별의미 없는 초월성이고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초월성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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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리츨과 고전적 자유주의
Albrecht Ritschl, 1822-1889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제1장 서론


역사적으로보면, ‘자유주의’는 금세기 초 개신교의 학문적 신학을 장악했던 어떤 특정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처음 독일에서 슐라이어마흐와 헤겔의 제자들과 추종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으며 알브레히트 리츨의 학파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가장 뚜렷한 대표자는, 곧 알브레히트 리츨과 아돌프 하르낙(Adolf Hamack) 그리고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ch) 이 세사람으로 드러난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리츨을 주로 다룰 것이다.

 

 


제2장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


슐라이어마흐와 마찬가지로, 이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속에서 일어난 몇몇 발전들을 기독교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고 그것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다.


자유주의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개개 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넷째,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다.


끝으로, 아마 무의식 중에 앞에서 말한 특징들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특징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에 의하여 시작되고 19세기 초의 위대한 독일 사상가들에 의해 지속된 바,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계몽주의 이전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거룩하시고 초월적인 하나님과 죄악되고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분리를 강조했고, 성육신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큰 틈에 다리를 놓은 극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계몽주의에서 시작되고 자유주의에서 그 절정에 다다른 신학자들은, 예컨대, 합리적이고 직관적이며 또는 도덕적인 능력과 같은 것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으로부터 신학을 세워 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를 이 죄악 세상에 진주(進駐)한 그리스도로 보기보다는 모범적 인간으로 보았다.

 


제3장 알브레히트 리츨의 삶과 경력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인물은 알브레히트 리츨이다. 1875년부터 1925년까지 미친 영향력 때문에 알브레히트 리츨은 1822년 프러시아 개신교회의 한 주교(主敎)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음악의 소양을 보였고, 유년기부터 대단한 지적 능력을 보였다. 청년 리츨은 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튜빙겐과 할레 대학 등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종래 학문적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본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슐라이아마흐, 칸트 그리고 헤겔의 영향을 받은 신약학자 바우르(F. C. Baur)의 영향을 받았다.


리츨은 1846년 본에서 처음 강사직을 얻었고, 1864년에 괴팅겐으로 이주하여 1889년 죽을 때 까지 거기에 남아 있었다. 25년 간 괴팅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독일의 지도적 신학자라는 명성을 확립했다. 당대의 개신교 목사들과 교사들의 한 세대 전체가 그의 강의와 저술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70년에서 1874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출간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 교리』(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라는 제목의 세 권짜리 논문이었다.

 

 

제4장 리츨의 신학적 방법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리츨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보통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한 얼마간의 논의를 섞어 넣는다. 리츨은 신학이 형이상학에 기대려고 하는 어떠한 의존도 맹렬히 배격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증명들은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을 성취하도록 도움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에서만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발견된다는 집단적 가치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 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가치 판단에 근거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요약하면, 리츨에게 있어서 신학은 단순한 외적 형태나 표현들과 구분되는, 기독교의 진정한 정수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교리들을 그들을 통어하는 힘인 그 핵심과의 조직적인 관계 속에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무엇인가? 리츨에 따르면, 그것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건전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하여 결정된 ‘사도적 사상 체계’(apostolic circle of ideas)이다. 리츨의 신학적 방법은 칸트 철학과 뚜렷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칸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을 견지하는 한편 그의 회의론을 개량하고자 했던, 괴팅겐의 철학자 헤르만 로츠(Hermann Lotze)를 통하여 리츨에게 전수되었다. 리츨은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삭제하고 종교를 가능한 한 윤리학과 밀접히 연관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칸트를 따랐다. 그러나 리츨은 하나님이 그가 행한 일을 통하여 정말로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칸트와 달랐다. 칸트에 대한 대안으로서, 리츨은 로츠에게 크게 의존하여 어떤 사물은(이 경우에는 하나님) 그것이 이룬 결과(이 경우에는 계시와 구원)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상을 지지했다.

 

 

제1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리츨의 신론은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러한 결과들에 부응하는 가치판단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주된 긍정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는 덧붙이기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일 것과 초월적인 분 혹은 ‘세속을 초월 하신 분’(supramundane)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이 나라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신앙이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이다. 이것 외에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선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자신의 최고 목표이며 선이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신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강조는 역사를 초월하는 그의 초월성보다는 역사 안에 계신 신의 내재성으로 기울었다.

 

 

제2절 죄와 구원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죄론과 구원론이 가지는 내적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최고의 선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신학은 죄를 그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는 일차적으로 이기성이다. 죄는 물려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리츨의 신학적 저작 전반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종교적인 초점은 하나님이 죄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구원의 순간, 곧 칭의이다. 윤리적 초점은 하나님이 그와 화해된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라고 부르신다는 주장에 있다. 리츨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 두 가지 초점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적인 종교가 아니라 사랑에 감화된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세계를 변혁시키는 종교이다.

 

 

제3절 기독론


칼케돈 신조(chalcedon, AD 451)를 따르는 고전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인격으로서 구별되는 두 성품, 곧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현재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신조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는 그것은 종교적이기보다 과학적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진정한 종교적 평가는 그의 역사적 행위, 종교적 확신 그리고 윤리적 동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그가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나 능력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구현이 되도록 주셨던 독특한 ‘소명’-그는 이 소명을 완전하게 성취했다-이라고 해석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와 그의 사역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히 아신 바 되고 그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만 ‘선재’한 것이었다.


리츨 신학에서 중심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의 성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리츨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소명적 순종’(vocational obedience)의 개념을 소개한다. 리츨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비록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로 삼는, 여하한 속죄의 교리도 명백히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제5장 평가

지속적 중요성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라는 리츨의 명성은 20세기 중반에 주로 신정통주의 사상가들인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와 같은 이들의 비평 때문에 위축되어 한풀 꺽여 버리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비평가들은 리츨이 탈(脫)계몽주의 시대의 과학, 철학과 갈등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그 불필요한 갈등으로부터 구해주었고 리츨이 신학적 연구를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국한시켰던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예컨대, 그러한 제한을 가지고 있으면 신적 초월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초월의 문제에 덧붙여서, 리츨이 신학을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제한했던 것은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공의 성질에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리츨의 신학은 주관주의라는 비난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고대 기독교 교리를 그토록 명백히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내어버릴 수 있었을까? 부분적이겠지만 그 이유는, 이미 확인한 바대로, 그가 부당하고 비일관적인 방법으로 존재론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사물의 외양과 결과 (또는 영향) 이면에 있는 본질 혹은 존재에 관한 논의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바르트를 위시한 그 밖의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리츨에 대하여 ‘문화적 개신교’라고 하는 다소 혹독하지만 그렇게 불려 마땅한 꼬리표를 붙여 주었다.


그의 견해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이상으로 환원시켰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설명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리츨의 설명은, 신약 성경 자체로 소급되는 바, 교회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보는 기독론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참고문헌)


14) Ibid., pp. 33-34.
그는 힘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 모든 것을 그의 평생의 중심적 관심을 의인론과 화해론에 모았다. 따라서 1870년 그의 대작 『의인론과 화해론』의 출판을 가능케 했다. 그가 방대하고 급진적인 영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주로 그 저서가 출판될 때부터였다. 그는 항상 파당 정신을 불찬성하지만 지금 학파의 특징을 지우기 시작한 동기들의 협력관계를 자극하였다. 헤르만, 하르낙, 카프탄, 그밖에 많은 사람들과 같은 상승적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5) 이정배 저, op. cit., p. 75.
슐라이어마흐가 새롭게 태동하고 있던 당시의 자연과학의 낙관론적 세계상에 직면하여서 목적론적 세계관을 대변하고 있었던 반면에 19C 후반부에 이르른 신학은 경험적 자연주의, 실증주의, 그리고 유물주의 등의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을 통하여 커다란 곤경에 빠져 이었다.


16) 바나드 램 저, 최기서 역, op. cit., p. 200.
키에르 케고르는 죄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보다는 오히려 어떤 인간적이고 유한한 것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인간이 그의 자유를 사용하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17) 목창균 저, 『현대신학논쟁』, op. cit., pp.118-119.
리츨은 기독교 복음이 로마 카톨릭주의, 신비주의, 경건주의, 주관주의 등에 의해 변형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것을 칸트와 슐라이어마흐의 사상체계에 근거하여 종교개혁적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리츨은 인간 경험을 강조하는 자유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자유주의 신학의 선배들과는 달리, 종교의 감정적이며 신비적인 면보다 윤리적인 면을 강조 했다. 따라서 리츨은 역사적 사실, 즉 신약성서에서 진술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계시에 기초하여 자신의 신학을 전개했다.


18) 이정배 저, op. cit., p. 76.
리츨은 자연개념을 역사적 예수신앙의 실천적 가치 즉, 하나님 나라라는 역사이해를 위한 필요한 수단으로서 통찰한다. 철저한 이원론적 분리가 수행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19) H. R. 매킨토쉬 저, op. cit., p. 156.
철학안에서 신학의 기반을 발견하려는 이상주의적 합리주의 주장에 반대하여 리츨은 특별히 그리스도교적인 하나님 지식은 계시에 의하여 환기된 가치 판단 안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모든 본질적인 교의학적 확인은 ‘가치 판단’ 위에 서 있다는 이 신념 대한 긍지가 리츨 학파들을 오래동안 전체적으로 통합하게 하였으며 또한 뚜렷한 비판의 대상으로 되게 한 것이다.


20) 폴 틸리히 저, op. cit., p. 267.
종교의 전체적인 메시지, 다시말해서 역사적 사건으로서 기술되어야 했던 예수의 메시지는 인간의 안팎의 자연의 압력으로부터 인격을 해방시키는 메시지다. 구원의 기능은 자연에 대한 情神의 승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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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의 맥락으로 본 천국비유와 이적의 관계

 

1. 치유이적


치유이적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일부로서 또한 복음 전달자에게 부여되는 능력으로서 그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주어진다. 예수의 사역에서 치유이적과 복음선포는 거의 항상 동시에 행하여졌다.(눅4:40; 마1:21ff) 본문에는 여섯 개의 치유이적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중 백부장 하인의 치유와 두 소경치유를 제외한 나머지는 마가복음에도 실려 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 이적기사 뒤에 이적을 본 사람들의 놀라워 하는 반응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 그에 비해 마태는 사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예로서 문둥병자의 치유에서 마태는 문둥병자가 그의 치유사실 퍼뜨린 사실을 설명하는 마가의 본문과는 달리 모세가 명한 예물을 드릴 것에 대한 당부로 끝맺고 있다. 이것은 사건의 정황보다는 사건의 의미에 치중하고 있음을 말한다.

 

치유이적은 특히 이적과 믿음과의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치유이적기사에는 거의 대부분 믿음에 대한 확인이 내용의 중요한 부분으로 서술된다. (믿음)과 (믿는다), 이 두 낱말은 대부분 치유이적과 관련된 기사 가운데 나타나며, 대개 그 내용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의 확인으로 끝을 맺는다. 본문에서도 문둥병자의 치유와 베드로 장모 치유를 제외하고는 믿음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치유하실 때에도 예수는 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하신다.(9:2) 혈루병 여인에 대해서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시며 치유가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밝히신다.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신 사건에서는 믿음과 천국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누가복음에 있는 병행구절과는 달리(눅7:2-10) 본문에는 천국에 관한 예수의 부가적인 언급이 첨가되어 있다.(8:11, 12) 여기서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중요한 자격요건으로 제시된다. 본문에 나타난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와 신뢰였으며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인식하고 절대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환언하면 치유이적은 하나님의 통치를 전제로 할 때 가능한 것이며, 동시에 치유이적은 천국이 성립된 결과로서 가능한 것이다.

 

둘째, 치유이적은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일부로서 죄의 사유를 확증하는 기능을 갖는다.
셋째, 치유이적은 바리새인과의 논쟁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중풍병자의 치유에서는 그의 사죄행위와 치유행위에 대해 공개적인 반박이 나타난다. 백부장의 하인을 치유하신 후에 한 예수의 언급은 나라의 본 자손, 곧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시작되었음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경고의 성격을 띈다. 이 대립적 상황은 축귀사역을 통하여 한층 더 심화되고,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의 책망도 한층 더 강화된다.

 


2. 축귀이적


본문에는 두 번의 축귀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첫째, 가다라 지방에서 귀신들린 자 둘을 고쳐주신 사건에서는 무엇보다도 귀신들을 제어하는 예수의 절대적 능력이 드러난다. 귀신들은 예수의 신적 권위와 신분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의 능력과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 자신들의 권세가 매우 제한적인 것임을 인정하는 귀신의 자세는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고 능력으로 임한 현재적 천국에 대한 예수의 선포(마12:22ff)와 일치한다.

 

둘째,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친 이적은 그와 유사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마12:22ff)를 고친 이적과 연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두 경우 모두 예수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 병을 고친다는 바리새인의 비난이 뒤따르는데 9장에서와는 달리 12장에서는 천국의 현재적 도래를 선언하는 예수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 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라는 예수의 선언은 이적의 의미에 대해 직접 언급한 유일한 구절이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앞의 두 개의 이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사탄의 세력은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 매우 위축된 활동을 하고 있다. 예수는 질병을 통하여 나타난 사탄의 압제적 통치를 발견한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신 질서의 일부가 아니었다. 때문에 혈루병 여인의 치유의 경우에서 처럼 예수나 마태에게 있어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오늘날처럼 내적인 또는 사법적인 의미로 이해되는 관념화된 개념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를 통하여 나타난 사탄의 속박에서 실제적인 해방의 의미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축귀는 예수의 구속사역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사탄의 세력은 오직 천국의 통치자이신 메시야의 왕권에 의해서만 분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천국도래의 표징이 된다. 또한 이 권세는 제자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부여됨으로써 천국의 확장작업이 계속 이어진다. 가서 천국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의 위임령과 함께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라는 명령이 반드시 뒤따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3. 소생이적


공관복음에는 두 번의 소생사건이 나온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소생사건(막5장, 마9장, 눅8장)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소생 사건(눅7장)이 그것인데 마태복음에는 '한 직원'의 딸로서 전자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건은 구약에서 엘리야가 행한 소생이적을 연상시킨다.(왕상17장)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엘리야가 이 세상에 다시 와서 종말을 알리는 표징적 역할을 할 예언자로 기대하였다. 따라서 예수의 소생이적은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고 종말에 죽은 자에게 소생의 길이 열리게 됨을 알리는 표징으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이 이적기사에 대한 신학적 논쟁은 '소녀가 자고있다'고 한 예수의 표현에 집중된다. 마가의 본문에 근거하여 그 소녀가 혼수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합리주의적 해석도 있으나 마태의 본문은 '방장 죽었다'(9:18)고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누가는 '죽은 것을 알고'라고 첨언하였다. 합리주의적 해석은 사람들이 그 소녀가 아직 숨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 예수는 이를 알아차리고 하마터면 생매장 될 뻔한 소녀를 죽음으로부터 구할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물론 이러한 상황이 실제로 발생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그러나 그것을 본문의 상황에 적용한다면 예수는 단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비범한 인물이며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돕는 두터운 인간애를 가진 인물일뿐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역사의 한 가운데로 하나님의 나라를 몰아오는 메시야가 될 수 없다. '소녀가 잔다'고 했을 때 예수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통찰력으로 소녀의 상태를 파악한 것이 아니라 죽음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의 능력은 죽음조차도 무위로 돌리는 것이며 그 생명력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현세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적이 보여주는 천국의 역동성을 통하여 우리는 천국복음 전하는 예수의 사역의 절정을 발견한다.

 


4. 자연이적


일반적으로 8:23 - 27의 광풍진압 이적은 앞에 있는 두개의 제자직에 관한 교훈과 연관시켜 이해한다. 예수를 따르기 위해서는 예수가 어떤 분이지를 잘 알아야 하고, 위험한 순간에도 예수와 동해할 각오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광풍 자체는 예수를 따르기 위한 개인의 실존적 결단에 방해가 되는 직접적인 요소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여타 이적과 같이 천국사상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풍랑에 대한 침묵명령이 축귀이적에 나타나는 장면과 유사하다고 해서 이를 직결시켜 설명하는 것은 무리이다. 풍랑을 잠잠케 한 사건, 오병이어 사건 또는 무화과 나무를 고사시킨 사건 등의 자연이적들은 구약에서의 '하나님 현현'과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는 바, 이 이적들은 일종의 여호와의 현현의 표식이 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이 현세에 적용됨을 증거한다.


본문에서도 치유이적에서와 같이 '믿음'에 대한 강조가 나타난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믿음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제자들은 예수가 자신들의 배에 동승하였으므로 예수를 통하여 역사하는 창조주의 권능이 자신들을 보호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했다. 본문은 피조물인 자연계를 다스리는 창조주의 통치가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천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D. 이적과 천국


1. 천국복음 선포와 이적사역


이적은 '하나님의 종말적인 징조(proxy)로서의 행위'이며 '마지막 날의 빛이 어두운 세상 위에 비친 사건'이다. '오실 그 분이 당신입니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해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는 예수의 구약인용은(사35:5-6; 61:1)그가 자신의 이적을 구원시대의 징표로서 이해하였음을 말해준다. 종말의 사건이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현재에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이적은 단순히 예수의 정체에 대한 증거로서 그 기능을 다하는 것이 아니며, 그의 말에 사람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의도된 신비한 사건도 아니다. 역사비평적 해석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적은 설화에 의하여 표현된 영적인 진리도 아니며, 예수의 위대성을 선양하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여 선의로 신화적 요소를 첨가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천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언어적 선포에 동반된 행동적 예시로서 천국의 현존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4:23)라고 한 마태의 묘사는 이러한 관계를 전제하여 천국복음와 이적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이 불가분의 관계는 천국의 도래가 필연적으로 사탄통치의 종결을 가져온다는 사실에서 설명된다. 이적의 본질적인 의미는 이 갈등의 상황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2. 이적에 나타난 사탄왕국의 파멸


이적은 사탄통치의 종식을 의미한다. 반대로 사탄의 통치 안에서는 예수의 이적은 불가능하다. 급식이적은 우리에게 빈곤과 육체적 한계에 종속되어 있어야 하는 곤고함과의 결별을, 치유이적과 축귀이적은 모든 죄로 인한 탄식, 고난과 슬픔이 제거됨을 예고한다. 또한 소생이적은 사탄통치의 결말인 사망이 철폐됨으로써 영원한 하나님의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에는 이와 같이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여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난다.
마12:28의 선포는 축귀이적이 천국의 현재적 실재가 사탄의 왕국과의 대립하는 상태를 보여준다. 예수의 공생애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1:15)라는 선포와 함께 시작되는데, 여기서 '때가 찼다'는 것은 사탄 시대의 종말을 의미한다. 사탄의 종말을 예고하는 예수의 위대한 사역은 처음부터 사탄의 도전을 받는다.(마4:1 - 11) 그러나 예수는 귀신들과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그 영향력을 철저하게 봉쇄하며 하나님의 통치를 증명한다.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행위로 인하여 사탄의 왕국은 무너졌다. 축귀이적은 천국을 입증하기 위한 증거라기 보다는 하나님 통치가 역사 속으로 돌입해온 천국의 일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들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을 통하여 진입한 천국의 실재인 것이다. 천국의 임재는 영적으로 악한 나라와의 투쟁 및 그 나라에 대한 정복을 내포한다. 따라서 사탄통치의 종식을 위하여 축귀이적은 필연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모든 이적은 사탄의 세력이 패배하고 천국이 도래함을 증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탄통치의 섬멸은 질병치유에서도 나타난다. 질병은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며, 치유이적은 죄사함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치유이적 역시 죄의 권세, 즉 사탄의 영향력의 분쇄를 의미한다. 새로운 생명력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는 질병을 통하여 행사되던 사탄의 영향력은 근절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 직원의 딸을 소생시킨 이적은 사탄의 사망권세에 결정적인 제동을 건 사건이다. 단지 소녀의 손을 잡는 행위만으로도 '사망'은 떠나가고 '생명'이 역동한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서 사탄의 영향력은 전적으로 무위로 돌아간다. 더 나아가 소생이적은 종말에 있을 부활사건의 예시하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를 확증한다. 광풍을 잔잔케 한 사건은 사탄의 직접적인 공격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할 지라도 예수의 사역을 방해하는 어떤 작용이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예수가 이해하는한 이 세상은 '신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질서' 속에 있지 않다. 사탄의 통치권을 박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초월적인 행위로서만 가능하기 때문에 예수의 이적은 천국의 도래를 위하여 필연적인 사건이 되며 천국의 표징이자 천국의 가시적 실재가 되는 것이다.


예수는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세간을 늑탈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으나(12:28, 29) 사탄의 왕국의 완전히 파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종말에는 인자가 사탄을 심판하고 그의 졸개들까지 영원한 불에 처넣을 것이다.


이적의 역사성 또는 진정성에 대한 회의는 하나님 나라와 사탄의 왕국과의 대립이 요구하는 이적사건의 필연성을 간과하고 있다. 예수의 이적을 부인한다면 그의 메세지의 중요한 일면 하나님 나라의 역동성과 현재의 가시적 성취를 놓치는 것이다.


이상에서 마태복음 8장과 9장을 중심으로 이적기사를 살펴보았다. 마태복음의 이적기사는 첫째, 천국의 현재적 도래를 강력하게 증거하며, 그 나라의 가시적 실재로서 제시된다. 둘째, 마태복음의 천국은 하나님의 왕국과 사탄의 왕국이 대립하는 이원론적 요소를 담고 있으며, 이 구조 속에서 사탄의 왕국을 무너뜨리고 저지할 수 없는 권능으로 진입해오는 천국의 역동성이 표출된다.

 

 


IV.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결합을 통하여 이해한 저자의 의도

 

A. 마태복음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위치


복음서가 예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기술되었다는 점, 그리고 네 편의 복음서가 있다는 점, 이 두 가지는 복음서 해석을 위한 중요한 전제이다. 복음서는 네 명의 각기 다른 인물이 예수에 관하여 쓴 책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다양한 복음서의 저자들의 자율적인 인격에 따른 증언이 되도록 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절에서는 마태복음의 구조 속에서 천국비유와 이적의 위치를 살펴봄으로써 본 복음서 맥락의 일면을 살피고자 한다.

 

 

1. 교차대칭구조 속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의 구조로는 오경구조(The Pentateuchal Sturcture)가 가장 많이 언급되며, 그 밖에는 교차대칭구조와 교체편집구조 또한 기독론적 구조 등이 있다. 이것은 일종의 가설이라고 하겠으나 마태복음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 교차대칭구조와 교체편집구조는 크게 보아 오경구조의 틀 속에서 성립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교차대칭구조는 마태복음의 구조에 대한 여러가지 제안에 거의 무리 없이 이중적으로 성립된다는 점에서 저자가 의도한 구조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마태복음 전체의 구조를 교차대칭구조에 입각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마태의 교차대칭구조 >


+------ 1 - 4 : 예수의 탄생과 출현
| 5 - 7 : 산상설교 ---------------+
| +---- 8 - 9 : 예수의 이적 |
| | 10 : 사도들에게 준 설교 --+ |
| | +-- 11 - 12 : 유대인들의 예수배척 | |
| | +-- 13 : 천국비유설교 --------+ |
| | +-- 14 - 17 : 제자들의 예수 환영 | |
| | 18 : 교회설교 -----------+ |
| +--- 19 - 22 : 예수의 권위와 초대 |
| 23 - 25 : 종말설교----------------+
+----- 26 - 28 : 수난설화

 

교차대칭 또는 교차대구(Chiasm)란 고전학자들에게 익숙한 문학기법이었던 '순환구성'(ring composition)의 발전된 형태로서, 순환구성은 저자가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단어 또는 내용을 글의 말미에서 다시 사용하는 방법이다. 교차대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하나의 맥락에서 시작과 종결을 갖추도록 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맥락의 중간부에서 두번째와 준종결이 역시 같은 모양을 갖추도록 균형을 잡는다. 이상의 구조분석은 천국비유가 전체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마태복음의 신학적 원리는 천국사상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지적과 일치한다.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고 제자들의 설교가 '천국의 임박'(마3:2; 4;17; 10:7)을 선포하는 통일성을 갖고 있는 만큼, 천국비유를 집중적으로 수록한 부분이라는 점 하나로도 13장의 중요성은 충분히 입증된다.

 

예수가 이 비유들을 한 장소에서 일시에 말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13장은 천국의 본질과 원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가 작용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전체의 내용전개를 보면, 13장을 중심으로 후반은 마가복음의 사건 순서에 준하여 시간적 진행에 충실한 반면, 전반에는 마태 특유의 조직적인 배열로 자료들을 주제별로 정리하고 있다. 이중에서도 산상수훈과 이적기사, 천국비유가 두드러진다. 이에 저자의 관점과 의도가 전반부에 주로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그 중심사상인 천국의 개념을 살피기 위한 자료로서 천국비유와 이적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2. 교체편집구조 속에서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


본 복음서는 기사와 교훈이 번갈아 나오는 교체구조를 갖고 있다. 선행되는 사건기사는 뒤따르는 설교를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각 기사의 마지막 본문은 설교와 연관시키기 위한 내용을 담고 있다. 각 설교의 마지막 본문도 그 설교의 중심사상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다.

 

예수는 그의 메세지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고 동시에 그 자신이 메세지이기도 했다. 예수의 언어, 행위, 인격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인 것이다. 예수의 교훈은 순수이론이 아니다. 예수의 언어적 선포 일체는 그의 삶과 결부되어 실천을 지향한다. 그의 선포는 행위를 밑받침하고 정당화하는 한편, 행위는 선포를 실천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예수의 행위는 천국비유와 같이 그 속에 천국을 예시하는 요소를 담고 있었다. 때문에 그것은 윤리도덕적 규범체계가 아니라 천국도래라는 미래의 결정적인 사건을 그의 삶과 인격으로 구현한 것이다. 태복음에의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바로 이러한 언어와 행위의 상응적 관계에 해당한다.

 

물론 천국에 관한 행위적 선포가 이적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예수의 행위 중에서 이적기사만을 별도로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적기사가 천국비유의 언어적 선포에 상응하는 행위적 선포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예수의 복음선포의 두 가지 방식을 균형있게 재현하고 있다. 이후에서는 앞에서 고찰한 내용들을 중심으로 천국비유와 이적의 관계성을 정리하면서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을 이해하고자 한다.

 

 

B. 그 나라의 임재에 대한 시간성의 측면에서

 

1. 천국의 시간성


천국의 시간성에 관한 다양한 견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당한 이해가 해석학적 난제라는 점을 잘 반영해준다. 천국 도래의 임박성에 관한 선포는 예수의 교훈의 중심이었으며, 그의 모든 언어와 행위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는 그의 긴박한 확신을 표출하고 있다. 분명 그는 구약의 하나님 나라가 갖고 있는 미래면을 현재화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여전히 하나님 나라를 미래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하나님 나라가 갖는 시간적 이중성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가르침 중심에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일치하면서도 그 나라의 시간성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시간성을 현재에만 국한 시키는 해석으로서 리츨(Albert Ritschl)의 비종말론적 해석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사랑으로 감동된 호혜적 공동체를 위한 인류의 협동체로 이해하였다. 이해는 하나님 나라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활동에 의한 것으로서 인간적 상호작용의 산물이 아니라는 성경적 관점을 결여한 것이다. 리츨의 견해를 발전시킨 하르낙(A. Harnack)은 형제애, 영혼의 소중한 가치, 사랑의 윤리적 교훈 등을 하나님 나라로 보았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개개인의 마음에 적용되는 하나님의 통치로 보았다. 비종말론적인 해석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지상의 도덕적인 나라로 파악함으로써 그 나라의 시간성을 현재적인 것으로만 한정시켰다.

 

두 번째 견해는 시간성을 미래적인 것에 국한시키는 입장으로서 바이스(Johannes Weiss)와 슈바이처(A. Schweitzer)의 철저 종말론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바이스는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 나라에서 이루어졌으며, 예수는 그 나라가 이 땅에 임재할 것을 선포한다고 하여 미래적 완성에 촛점을 맞추었다. 바이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철저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의 교훈은 종말 직전의 짧은 기간을 위하여 주어진 것일 뿐, 현세적 윤리 사회 안에서의 적용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고 하여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미래적인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주장은, 예수는 종말을 향한 묵시적인 전망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임박한 종말을 준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고 본다. 부트만(R. Bultmannn)의 실존론적 종말론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묵시적 전망에서부터 현재적인 의미를 추론한다는 점에서 슈바이처와 유사하다. 그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는 시간의 과정 속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을 통하여 임한다고 함으로써 시 성 자체를 부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최근의 논의는 그 나라는 현재성과 미래성을 공유한다는 견해가 지배적인다. 다드(Dodd)의 '실현된 종말론'이 제시된 이래 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연구하면서 거기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에는 미래성이 있음을 인식하게 된다. 각각의 차이가 있으나 헌터(A.M. Hunter), 카두(C.J. Cadoux), 테일러(V. Taylor), 풀러(R.H. Fuller), 예레미아스(J.Jeremias), 큄멜(W.G. Kummel), 쿨만(O. Culmann) 등 다수의 학자들이 양면성을 주장한다. 태태복음이 천국의 시간을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음은 이미 살펴본 바이다.

 

 


2. 천국비유에 나타난 그 나라의 시간성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는 세례 요한의 질문에 사35:5, 6; 26:19; 61:1 등을 인용한 예수의 답변은 예수 자신의 행위와 언어 속에서 이미 천국이 임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마태복음의 천국비유는 이러한 전제 하에서 전개된다.

 

우선 세 개의 확장의 비유를 보면, '씨를 뿌렸다',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또는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초림으로 이미 새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천국이 가까왔다'는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가 공간적으로 이 지상에 임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결정적인 사건으로 확인된 사실에 관한 인식을 전제로 하는데, 이것은 메시야의 임재와 함께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는 예수의 사역, 곧 그의 말씀과 행동이 천국의 현존임을 뜻한다.

 

또한 이 비유들은 그 나라의 시작과 함께 현세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는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뿌린 씨의 약 3/4이 유실되고 만다. 천국의 확장을 도모하는 그 나라의 백성들은 이러한 난관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놀라운 수확이 기다리고 있으므로 그 역경은 그 나라의 현재적 활동을 위축시키지 못한다 그 나라의 현재성은 그 강력한 영향력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반죽 속의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전체를 부풀리는 놀라운 힘을 가졌다. 마찬가지로 이미 시작된 천국은 불가시적이지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확장되어 나간다. 이러한 현재성은 사람들에게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적 결단'으로 인도한다. 감추인 보화가 발견되었고 간절히 찾던 극히 값진 진주를 살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솔로몬이나 요나보다 더 위대한, 율법과 성전보다 더 위대한 분이 나타났다. 과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했던 그 날이 온 것이다. 때문에 즉시 모든 것을 다 팔아 그 부름에 대해 즉각 응답을 해야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나라가 이 세대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래에도 존속된다고 말한다.(16:28) 미래의 왕국을 묘사함에 있어 마태는 그것이 현재하는 하나님 통치의 연속임을 강조한다. 나라의 확장에 대한 비유들은 한결 같이 보잘것 없는 시작과 장대한 결과를 대비시키며 엄청난 결실이 있을 것에 대한 미래적 전망을 제시한다. 그 변화는 너무나 기적적이고 우주적이며 동시에 거대한 것이어서 겨자씨가 새들이 깃들 정도의 크기로 자라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또한 미래에 있을 완성에 대한 기대는 현재의 난관과 역경 속에서도 최종적인 성취를 향한 강한 소망을 불러일으킨다. 무엇보다도 천국의 시간성이 갖는 미래적 국면은 종말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나타난다. 현재의 천국은 완전하지 못하여 가라지가 섞여 있고 나쁜 고기들이 섞여 있다. 그 완성을 위해서는 이들을 구별해 내야 하며, 그 때까지 인내하며 궁극적인 성취를 바라보며 기다려야 한다.

 

세분하여보면 천국비유는 그 나라의 시작과 진행 그리고 궁극적인 완성이라는 세 가지 시간을 보여준다. 시작과 진행을 현재로 보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의 시간은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고 있으며 '이미'와 '아직'의 긴장 속에서 완성을 향하여 전진하고 있다. 두 개의 시간 중 어떤 것에 보다 강조를 두는냐 하는 논의에서 단정적인 결론을 얻기는 쉽지 않지만 마태복음의 천국비유는 그 나라의 현재적인 국면을 미래적 전망과 연결시키며 종국적 성취를 고무시킨다는 점에서 미래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한다.

 

 

3. 이적기사에 나타난 천국의 시간성


세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그 대부분이 예수의 이적을 말하고 있다. 모든 희망과 기대와 약속을 성취하는 구속사의 새로운 국면이 예수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이적은 천국의 현재성과 직결된다. 사탄의 통치를 분쇄함으로써 천국의 임재가 증명되었다고 하는 예수의 선언은(12:28) 이적사역이 왕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증거임을 선포한 것이며, 천국이 예수의 사역 안에서 현재적 실제로 나타남을 강하게 증거한다. 하나님의 왕적인 행위에 접촉한 개인의 경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개입을 현재적인 것으로 확증하는 것이다. 국의 권세는 지금 여기에서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며 그들을 사탄의 사슬에서 구해내고 있는 현재적 활동력이다.

 


그 나라의 임재는 바리새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예수의 자기증명을 위한 표적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역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하여 증거되는 것이다.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치력의 확립이 수반되어야 한다. 때문에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는 작업이 요구된다. 이적은 하나님 통치의 확립과 그에 상응하는 사탄 통치의 파멸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승리가 이미 확정되었음을 나타내는 결과적인 사건들로서 천국의 현재적 임재에 대한 결정적 징표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은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를 통하여 천국이 갖는 시간의 양면성을 설명하고 있다. 천국비유에서는 현재성과 미래성이, 이적기사에서는 절대적인 현재성이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천국비유는 천국의 현재적 국면을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연결시켜 그 미래성을 부각시키는 반면, 이적은 철저하게 권능으로 임한 현재적 시간 속에서의 천국을 보여주고 있다.

 

 


C. 그 나라의 존재를 가시화하는 역동성의 측면


천국의 가시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적은 예수 사역의 동적인 면, 그리고 논쟁적인 측면을 부각시키며 그 과정에서 현존하는 천국의 실재를 가시화한다. 이적기사에서 드러난 예수의 상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연설을 하는 정신적 교사가 아니다.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모습은 천국의 권세로 무장하고 사탄의 권세를 분쇄함으로써 천국의 현재적 실체를 사람들의 눈 앞에서 생생하게 펼쳐보이며, 그들에게 그 전쟁의 어느 편에 가담할 것인가를 결단하도록 촉구하는 강력한 행동가이자 논쟁가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수립하기 위한 이적은 하나님 자신의 직접적인 행위가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나타난 것이며, 그 역동성, 즉 행동하시는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통치는 질병의 치유에서 악한 세력의 축출에서, 죽은 자의 소생에서 구체화된다. 역동성은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확증이라는 점에서 천국의 가시화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이적기사는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기 위한 징표로서라기 보다는 하나님 권능을 통하여 가시화된 천국의 실제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천국비유를 가르키는 예수의 모습은 친절하고 지혜로운 교사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그는 예리한 통찰력으로 일상생활에서 추출한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본질과 활동원리를 설명하며, 아직 성취되지 않은 완성에 대한 희망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 예수의 비유에는 팔레스틴의 전원풍경과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일상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파피루스에 나온 애굽 생활의 묘사를 제외하고는 로마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도 하증계급과 농민생활에 대한 묘사를 이보다 더 완벽하게 해놓은 것은 없다."고한다드(Dodd)의 찬사는 다소 과장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의 설명은 예수의 비유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얼마나 생동감 있고 설득력 있는 교훈이었는지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는 셈이다.

 

천국비유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과정에서 그 배경을 이미 살펴본 바지만, 예수는 팔레스틴의 전원생활과 자연적인 환경에서 비롯되는 특유의 정서를 그의 비유에 담아냄으로써 불가시적이고 초월적인 천국의 개념을 가시적 세계로 끌어내어 청중들의 눈 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 예수는 비유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자연과 인간관계 유대적 풍습 등 실제적인 것을 사용할 뿐 결코 상상에 근거한 소재를 이용하지 않는다.

 


결국 비유는 이적으로 가시화된 천국의 현재적 국면을 설명하여 주며,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미래적 국면에 대한 이해와 기대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씨뿌리는 자의 비유'와 '가라지의 비유'는 이적기사에 나타난 현재적 천국의 특징인 '사탄과의 투쟁'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는 그의 대적인 사탄을 이겼으나 그 승리는 아직 결정적인 것이 아니며 악한 자의 세력이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기 때문에 갈등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상황은 최종적인 승리 때까지 지속될 것이며, 오히려 최후에는 그 역공격이 더욱 강화될 것이다. 가라지 비유는 밀에 대한 가라지의 해악과 그 처리 방법에 대한 설명을 통하여 천국의 현재적 국면이 갖는 이원론적 상황을 청중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는 평범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는 하늘의 음성이 실려있었고 천국의 비밀이 담겨 있었다. 마태는 이러한 예수의 비유를 한 부분에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전체의 중심이 되는 위치에 놓음으로써 천국의 개념과 본질 내지는 그 원리에 대해서 일목요연한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적은 그 나라의 가시적 역동성을 비유는 그 나라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을 각기 제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마태의 의도는 개념과 실제에서 천국복음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형성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D. 그 나라에 대한 변증을 의도한 교회교육적 측면


네 복음서에 나타난 다양성은 초대교회 이후에 각기 개별적으로 발전한 공동체가 개별적으로 예수에 대한 문서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는 가정하에서 가장 실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현상이다. 최근에는 마태복음에서 발견되는 교회에 관한 관심을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소개되고 있다. 마태복음서가 예수를 묘사하는 지배적 전망은 신적인 권위를 부각시키려는데 있으며 산상수훈은 그러한 예수의 면모가 잘 반영되어 있다. 여기서 예수는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권위로서 율법의 본질적인 차원에 대해 새로운 해석으로 교훈한다. 여기서 본 복음서가 교회교육을 의도한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일면은 마태복음이 교회밖의 긴장상태로 말미암아 기독교에 대한 변증에 관심을 기울이게 됐다는 배경설명과도 다소 상관이 있다.

 

일단의 학자들은 마태복음이 마태의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유대회당과의 직접적인 대결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A.D.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성전중심의 제의적 유대교는 바리새파를 주축으로하는 회당중심의 랍비적 유대교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기독교의 세력확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율법준수 및 경전연구를 강화하였으며, 유대기독교인들을 회당에서 축출하였다. 마태의 공동체는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에게 맞서 예수의 진정성과 권위를 명확하게 하기위한 교회교육의 필요성을 느꼈고 그 결과 마태복음이 집필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은 마태가 처한 상황이 유대교와의 갈등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서 율법을 거부하는 이방기독교인들과의 갈등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마태의 교회교육에 대한 관심이 헬라적 방종자들을 염려하여 그의 교회에 대해 무도덕성과 무법성을 경고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태의 교회적 관심에 대한 또 다른 설명으로서는 마태복음이 교회의 예전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집필된 것이라는 견해나 당시의 서기관 학파의 교리문답학교에서 유래했다는 견해 등이 있으나 마 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 대한 만족할 만한 답변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때문에 공동체의 상황에 대한 추론을 복음서의 내용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는 신중을 요하는 작업이다. 하여튼 마태복음은 유독 교회라는 말을 두 번(16:18; 18:16)언급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면에서 교회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은 회당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회의적인 마태의 묘사로 인해 앞에서 언급한 유대회당과의 갈등상황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그러나 내부적인 갈등에 대한 설명은 마태복음의 보편주의적인 성격으로 미루어 다른 성급한 해석으로 보인다.

 


대외적으로 유대인들과의 대립적인 상황에 대한 묘사는 특히 이적기사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8장과 9장은 예수의 능력과 함께 천국의 현재적 실재를 보여주는 가운데 제자도의 대가와 위임 그리고 동시대의 이스라엘로부터 그들이 구별되는 방법 등이(8:18-22; 23-27; 9:1-17)이 섞여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이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비난이 이적기사와 연결되어 있다. 백부장의 믿음에 대해서는 누가복음의 병행구에는 없는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와 연결시켜 예수의 권능에 대한 신뢰가 천국과 직결되는 문제임을 지적하면서 유대인의 불신앙을 지적한다. 치유이적에 대한 바리새인의 비난은 매우 집요하다. 중풍병자의 치유에서는 죄사하는 권세를 문제삼아 비난하였으며, 귀신들려 벙어리된 자를 고쳐주자 그 능력의 출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다. 12:22ff에서의 논쟁적 상황은 예수가 축귀사역을 비유로 설명하고 귀신축출이 천국의 실재를 증명하는 것임을 선언함으로써 마무리 된다. 이적기사, 특히 축귀이적에 관한 기사들은 천국을 거부하는 유대인들과 그것을 가시적으로 증명하는 예수의 사역이 대립되는 상황 가운데 천국의 현재적 실재를 강력하게 변증한다. 이적을 통하여 천국의 실재를 제시하는 것은 예수의 분명한 의도 가운데 하나였으며, 마태복음은 그러한 예수의 의도를 공동체의 상황에 연결시키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태복음은 대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비난에 대해서 천국의 실재를 변증하고 대내적으로는 비난에 당면한 공동체에게 천국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이에 반하여 천국비유는 공동체를 향한 교육을 의도하고 있다. 13장의 비유들 사이에 예수가 비유를 사용하는 목적에 대하여 언급한 부분들이 있다. 13:11-17은 비유사용의 목적이 천국의비밀을 감추기 위한것이라고 말하여, 13:34-35은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여기서도 교회 밖의 유대인들과 교회 공도체가 구별되고 있음을 본다. 13:11은 특히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각별히 선택된 무리라는 인식을 주었을 것이며 각별한 배려가 있음을 암시한다. 반면에 '저희들'에게는 비밀이 가리워져 있다. 교회를 향하여 천국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듯한 예수의 말씀이 담겨져 있는 34, 35절은 이러한 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킨다. 따라서 천국비유는 교회에 천국을 가르키기위하여 특별히 동원된 전달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천국 자체가 그 본질적인 성격상 특수한 전달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기도 하나 여 서는 그것이 교회만을 위한 전달방법이라는 사실이 부각되어 있다. 결국 천국비유와 이적기사가 마태가 속했던 공동체의 일원들에게 천국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도구로서 사용될 때, 전자는 교회교육을 위하여 특별히 고안된 전달방법으로서 천국의 비밀을 쉽게 풀어서 이해하도록 하였으며, 후자는 유대종교지도자들과의대립에서 천국을 가시화하며 자신의 사역을 승리로 이끈 예수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속한 공동체에 지금 역사 속에 개입하셔서 행사하시는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에 대한 강한 확신과 함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V. 결 론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의 교훈과 사역을 통하여 역사 안으로 돌입한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제를 경험하였다. 각 복음서는 녹음을 재생하는 기계적인 증언이 아니라 저자들의 예수에 대한 이해 내지는 경험를 표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을 해석하기 위한 실마리로서 바로 이 '예수의 사역에 관한 저자의 이해'를 살펴본 것이라 하겠다. 다음은 본 연구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첫째, 마태복음은 예수의 사역에 나타난 언어적 선포와 행위적 선포의 상응성을 명시하고 있다. 예수의 사역은 언어와 행위를 포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자는 그의 복음서에 이 두 가지를 균형있게 수록하였다. 예수의 행위는 언어로 선포된 하나님의 현재적 통치를 증명한다. 이적기사는 언어적 선포가 미처 표현하지 못한 천국의 도래를 실증하는 강렬한 수단이다. 마태는 언어와 행위를 포괄하여 천국을 증언하고 있으며, 상응적 관계 속에서 천국비유는 그 나라에 대한 개념적 제시를, 이적기사는 실제적 제시를 담당한다. 물론 양자의 관계가 배타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둘째, 현존하는 천국은 과거 언약의 성취이며, 미래의 천국은 현재의 완성이라는 마태의 관점에서 보면 현재는 '이미' 성취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긴장된 시간을 의미한다.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라고 질문한 세례 요한에게 대답하기 위하여 예수가 인용한 이사야35:5f과 61:1은 이적적으로 가시화된 천국의 성취에 관한 구약적 근거이다. 이적행위가 예언의 성취임을 제시하기 위해 원래의 맥락인 대속적 고난과는 다소 무관하게 이사야53:4을 인용한 마8:17도 이러한 저자의 관점을 보여준다. 천국의 현재적 실재와 관련된 이적은 '구약의 성취로서의 천국도래'인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성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므로 미래의 궁극적인 완성을 기다려야만 한다. 천국비유는 이 점을 지적하는 좋은 예로서 현재와 함께 완성을 향한 연속성을 제시한다. 천국비유가 제시하는 바 현재적 미완성은 완성을 지향하여 경이적으로 확장되는 역동적인 것이다. 그 과정에는 적대세력의 방해와 역경이 있으나, 방해세력은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소되며 영광스러운 완성이 도래할 것이다. 그 나라의 성장을 비유로 설명한 이야기들은 모두 미래의 경이로운 완성을 제시하고 있다. 비유는 천국의 시간성에서 미래와 더욱 관련이 있고, 이적기사는 천국의 시간성에서 현재와 더욱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서로 연관되어 현존하는 천국이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된 시간 속에 있음을 말해준다.

 

셋째, 마태복음의 천국개념은 '현재의 가시적 역동성'과 '미래의 경이로운 완성'을 동등하게 강조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예수와 유대지도자들 간의 첨예한 대립을 강조하는 마태의 맥락에서 이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 통치의 역동적 가시화'를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천국의 성장을 설명하는 비유들은 많은 유실에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수확이 있으리라는 것, 시작과 비교할 수 없는 경이로운 성장, 적은 시작이 가져올 풍성한 결과를 강조한다.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각각 마태가 증거한 천국의 양대 특징을 제시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강한 기대와 현재적 역동성을 동등하게 중요시하는 마태의 태도는 유대회당과의 갈등에 처해 있던 그의 공동체에 현재에 대한 확신과 함께 미래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째, 마태복음은 천국의 임재에 관하여 두 가지 차원을 보여준다. 천국은 개인의 적극적인 응답을 촉구한다. 천국비유는 이 점을 강조하여 그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결단이 필요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적기사에 의하면 하니님 나라는 개인의 응답을 통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성립되는 것으로만 볼 수 없다. 천국은 사탄의 통치를 분쇄하며 임재한다. 이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적기사가 제시하는 바 천국의 임재는 하나님의 초월적인 행위에 의하여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천국을 거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역시 천국은 이미 임하였다.(12:28) 이것은 천국의 현재적 임재가 단순히 하나님 통치의 개인적 적용으로만 설명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천국비유와 이적기사는 마태복음의 천국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을 전부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천국비유와 이적기사의 상응적 관계를 통하여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된 시간 속에서 역동적으로 확장되어 만족스럽고 경이로운 완성에 도달하는 천국을 포괄적으로 균형있게 증거할 수 있었다. 예수의 사역을 통하여 종말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 현재에 성취됨으로써 구원의 새 시대가 열렸으며, 현재의 역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승리가 예비되었다는 마태복음의 확신있는 선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 천국백성으로서의 삶을 위한 지표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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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저:주와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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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리츨과 고전적 자유주의(Albrecht Ritschl, 1822-1889)


- 윤리적 문화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 -


제1장 서론

 

역사적으로보면, '자유주의'는 금세기 초 개신교의 학문적 신학을 장악했던 어떤 특정의 운동을 가리킨다. 그것은, 처음 독일에서 슐라이어마흐와 헤겔의 제자들과 추종자들 가운데서 일어났으며 알브레히트 리츨의 학파 안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태를 띠게 되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가장 뚜렷한 대표자는, 곧 알브레히트 리츨과 아돌프 하르낙(Adolf Hamack) 그리고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ch) 이 세사람으로 드러난다. 다른 나머지 사람들을 소홀히 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리츨을 주로 다룰 것이다.

 

 


제2장 고전적 자유주의 신학

 

슐라이어마흐와 마찬가지로, 이 자유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신조들을 현대적 지식의 빛 안에서 재구성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계몽주의 이후로 문화속에서 일어난 몇몇 발전들을 기독교신학이 그냥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고 그것을 적극적인 방법으로 신학 속에 융화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기독교 신학은 그 자신을 잃지 않는 가운데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경향에 적응해야 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클로드 웰치(Claude Welch)가 말했듯이, '현대 사상의 주장들을 최대한 인정'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유주의 신학의 두 번째 특징은 개개 기독교 사상가가 전통적 신조들을 비판하고 재구성할 자유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셋째,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의 실천적, 윤리적 차원에 초점을 맞추었다.

 

넷째,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의 기초를,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 이외의 어떤 다른 것에 두려고 했다.
끝으로, 아마 무의식 중에 앞에서 말한 특징들의 저변을 이루고 있는 특징으로서,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에 의하여 시작되고 19세기 초의 위대한 독일 사상가들에 의해 지속된 바, 초월성을 간과하고 신적 내재성 쪽으로 계속 흘러갔다.

 

계몽주의 이전의 신학자들은 근본적으로 거룩하시고 초월적인 하나님과 죄악되고 유한한 인간들 사이의 분리를 강조했고, 성육신은 그렇기 때문에 존재하는 큰 틈에 다리를 놓은 극적인 사건이라고 보았다. 반대로, 계몽주의에서 시작되고 자유주의에서 그 절정에 다다른 신학자들은, 예컨대, 합리적이고 직관적이며 또는 도덕적인 능력과 같은 것에서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연속성으로부터 신학을 세워 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수를 이 죄악 세상에 진주(進駐)한 그리스도로 보기보다는 모범적 인간으로 보았다.

 

 


제3장 알브레히트 리츨의 삶과 경력

 

19세기 말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 인물은 알브레히트 리츨이다. 1875년부터 1925년까지 미친 영향력 때문에 리츨 학파 하면 개신교 자유주의와 거의 같은 말이 돼 버렸다. 이렇게, 슐라이어마흐가 신학의 한 시대를 세웠지만 어떤 학파를 창도하지는 않은 반면, 리츨은 한 시대를 연 것은 아니었지만, 한 학파를 세웠다.

 

알브레히트 리츨은 1822년 프러시아 개신교회의 한 주교(主敎)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음악의 소양을 보였고, 유년기부터 대단한 지적 능력을 보였다. 청년 리츨은 본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해서 튜빙겐과 할레 대학 등에서 학업을 계속하다가, 종래 학문적 준비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본으로 돌아왔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슐라이아마흐, 칸트 그리고 헤겔의 영향을 받은 신약학자 바우르(F. C. Baur)의 영향을 받았다.

 

리츨은 1846년 본에서 처음 강사직을 얻었고, 1864년에 괴팅겐으로 이주하여 1889년 죽을 때 까지 거기에 남아 있었다. 25년 간 괴팅겐에서 교수로 있으면서 그는 독일의 지도적 신학자라는 명성을 확립했다. 당대의 개신교 목사들과 교사들의 한 세대 전체가 그의 강의와 저술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았다.
가장 중요한 작품은 1870년에서 1874년 사이에 단계적으로 출간된 『칭의와 화해에 대한 기독교 교리』(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and Reconciliation)라는 제목의 세 권짜리 논문이었다.

 

 


제4장 리츨의 신학적 방법

 

전통적 기독교 신학은 유물론(materialism)과 실증주의(positivism)와 같은 사상적 세력에 포위를 당해 있었다. 리츨은 신학과 과학 사이에 있는 갈등은 지식에 있어서 '과학적' 유형과 '종교적' 유형이 있는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과학적 지식은 순수한 이론적 객관성, 곧 사물 자체에 대한 비(非)주관적 인식을 추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반면, 종교적 지식은 실재에 대한 가치 판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종교적 지식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최고의 선을 성취하기 위한 사물의 가치와 관련한 것이다.

 

리츨의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은 보통 형이상학적 요소에 대한 얼마간의 논의를 섞어 넣는다. 리츨은 신학이 형이상학에 기대려고 하는 어떠한 의존도 맹렬히 배격했다. 신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증명들은 과학적 지식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선을 성취하도록 도움으로써 사람들의 삶에 도덕적인 영향을 끼치는 한에서만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인간의 최고의 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발견된다는 집단적 가치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의 공동체이다. 신학은 교회 안에서 가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집단적 종교 경험 및 도덕적 경험을 연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최고선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가치 판단에 근거하며 그것을 중심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요약하면, 리츨에게 있어서 신학은 단순한 외적 형태나 표현들과 구분되는, 기독교의 진정한 정수가 무엇인가를 결정하고자 한다. 또한, 그것은 모든 교리들을 그들을 통어하는 힘인 그 핵심과의 조직적인 관계 속에서 재현하려고 시도한다.

 

신학의 근거와 규범은 무엇인가? 리츨에 따르면, 그것은 성경 전체가 아니라 건전한 역사-비평적 연구를 통하여 결정된 '사도적 사상 체계'(apostolic circle of ideas)이다. 리츨의 신학적 방법은 칸트 철학과 뚜렷한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그의 사상은, 칸트의 기본적인 인식론을 견지하는 한편 그의 회의론을 개량하고자 했던, 괴팅겐의 철학자 헤르만 로츠(Hermann Lotze)를 통하여 리츨에게 전수되었다. 리츨은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삭제하고 종교를 가능한 한 윤리학과 밀접히 연관시키려고 했다는 점에서 칸트를 따랐다. 그러나 리츨은 하나님이 그가 행한 일을 통하여 정말로 알려질 수 있다고 주장한 데서 칸트와 달랐다. 칸트에 대한 대안으로서, 리츨은 로츠에게 크게 의존하여 어떤 사물은(이 경우에는 하나님) 그것이 이룬 결과(이 경우에는 계시와 구원) 속에 존재하며 그 속에서 드러난다는 사상을 지지했다.

 

 

 

제1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리츨의 신론은 그의 신학적 방법론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만 그리고 그러한 결과들에 부응하는 가치판단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진다고 주장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기독교 신학의 주된 긍정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이었다. 여기에 그는 덧붙이기를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인격적일 것과 초월적인 분 혹은 '세속을 초월 하신 분'(supramundane)이기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이 나라가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선이라고 파악한다. 그러므로 신앙이 아는 하나님은 사랑이신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이다. 이것 외에 '하나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인류가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이며 선일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자신의 최고 목표이며 선이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신론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의 강조는 역사를 초월하는 그의 초월성보다는 역사 안에 계신 신의 내재성으로 기울었다.

 

 


제2절 죄와 구원


리츨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죄론과 구원론이 가지는 내적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나라가 기독교 신앙에 의해 최고의 선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신학은 죄를 그 나라와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죄는 일차적으로 이기성이다. 죄는 물려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이다.

 

리츨의 신학적 저작 전반을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초점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종교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것이다. 그 가운데 종교적인 초점은 하나님이 죄인의 죄가 용서되었다고 선언하는 구원의 순간, 곧 칭의이다. 윤리적 초점은 하나님이 그와 화해된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이상을 실현하라고 부르신다는 주장에 있다. 리츨에게 있어서, '구원'은 이 두 가지 초점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구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땅 위에 완전히 실현되는 것이다. 결국, 기독교는 피안적인 종교가 아니라 사랑에 감화된 윤리적 행동을 통하여 세계를 변혁시키는 종교이다.

 

 

제3절 기독론


칼케돈 신조(chalcedon, AD 451)를 따르는 고전적 기독론은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인격으로서 구별되는 두 성품, 곧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있었고 또 현재도 그러하다고 주장한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신조를 완고하게 거부했다. 이유는 그것은 종교적이기보다 과학적이라는 것이었다. 예수에 대한 진정한 종교적 평가는 그의 역사적 행위, 종교적 확신 그리고 윤리적 동기에 관심을 갖는 것이지 그가 가졌을 것으로 가정하는 그의 타고난 기질이나 능력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리츨은 예수의 신성을, 그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에게 인간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의 완전한 구현이 되도록 주셨던 독특한 '소명'-그는 이 소명을 완전하게 성취했다-이라고 해석했다. 리츨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그와 그의 사역이 하나님에 의하여 영원히 아신 바 되고 그의 뜻에 의한 것이었다는 의미에서만 '선재'한 것이었다.

 

리츨 신학에서 중심 되는 것은 그리스도가 인류를 위하여 이루신 구원의 성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여기서 리츨은 예수의 아버지에 대한 '소명적 순종'(vocational obedience)의 개념을 소개한다. 리츨의 주된 관심사는 역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서 그리스도의 역사적 삶에 놓여 있었던 것 같다. 비록 그리스도를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자로 삼는, 여하한 속죄의 교리도 명백히 거부했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정하지 않았다.

 

 


제5장 평가

 

지속적 중요성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라는 리츨의 명성은 20세기 중반에 주로 신정통주의 사상가들인 칼 바르트와 에밀 브루너와 같은 이들의 비평 때문에 위축되어 한풀 꺽여 버리게 되었다. 가장 최근의 비평가들은 리츨이 탈(脫)계몽주의 시대의 과학, 철학과 갈등하고 있던 기독교 신앙을 그 불필요한 갈등으로부터 구해주었고 '교의를 도덕화' 시키는 데 공헌하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의 영향력이 미친 결과로, 당대의 모든 기독교 목사들과 교사들은 '사회 복음'(social gospel)을 전개하였다. 그의 신학적 방법에 있어서 중심적인 문제는 하나님 그 자체에 대한 여하한 논의도 단호하게 배제하려 했지만 자기 자신도 그런 식의 논의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리츨이 신학적 연구를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국한시켰던 것은 여러 면에서 문제가 있다. 예컨대, 그러한 제한을 가지고 있으면 신적 초월성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게 된다.

 

초월의 문제에 덧붙여서, 리츨이 신학을 가치 판단의 영역에만 제한했던 것은 신학이 가지고 있는 공공의 성질에 심각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의 의도와는 달리, 리츨의 신학은 주관주의라는 비난에 노출되어 있는 것 같다.

 

어떤 이유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고대 기독교 교리를 그토록 명백히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내어버릴 수 있었을까? 부분적이겠지만 그 이유는, 이미 확인한 바대로, 그가 부당하고 비일관적인 방법으로 존재론을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사물의 외양과 결과 (또는 영향) 이면에 있는 본질 혹은 존재에 관한 논의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세기의 바르트를 위시한 그 밖의 자유주의 비평가들은 리츨에 대하여 '문화적 개신교'라고 하는 다소 혹독하지만 그렇게 불려 마땅한 꼬리표를 붙여 주었다.
그의 견해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의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인간의 종교적, 윤리적, 이상으로 환원시켰다. 대부분의 자유주의자들에 의한 설명들이 그러하듯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리츨의 설명은, 신약 성경 자체로 소급되는 바, 교회의 성육신을 중요하게 보는 기독론에 훨씬 못 미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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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브레히트 리츨 (Albrecht Ritschl)의 윤리신학

 

조 성 노 (현대신학연구소 소장)

 

현대신학에서의 리츨의 위치를 평해서 최종의 교부라고 한 하르낙의
말은 타당한 표현이다. 하르낙이 가장 존경했던 신학자가 리츨이었으
며, 그리고 엄밀히 이야기해서 리츨학파라는 말을 쓴다면 하르낙도 그
학파의 한 사람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이 낭만주의와 합리주의에
대한 응답이었고 스트라우스로 대표되는 성서비평학이 그 시대의 새로
운 학문과 새로운 학문 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면, 리츨은
I.Kant의 철학과 씨름한 대표적인 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리츨은
1822년에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뛰어난 설교가요 루터파
교회의 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한 유능한 감독이었다. 리츨은 이러한 아
버지의 영향 아래 Steffin에서 그의 유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1839년
에는 본격적인 신학수업을 위해서 본 대학에 입학한다. 그러나 적응하
지 못하고 곧 할레대학으로 옮기게 되는데 거기서 다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하이델베르크에서 다시 튀빙겐 대학으로 옮겨 거기서 정착한
다. 특히 튀빙겐에서는 헤겔학파의 강의를 통하여 일시적으로나마 만
족을 얻는다. 그는 헤겔학파 가운데 F.C.Baur의 영향을 크게 받으면서
Baur의 급진적인 성서비평운동에 적극 참여한다.

 

1846년에 Baur의 지도로 쓴 박사학위 논문인 &quot;마르키온의 복음과 정경
누가복음&quot;이라는 글에서 그는 Baur의 입장을 적극 수용하여 마르키온
의 외전적인 복음이 최초의 복음서인 누가복음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는 것을 열렬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1851년 본 대학에서 사강사로 일
하던 시절에 발표된 &quot;공관복음서 비평&quot;이라는 논문에서는 초기에 취했
던 누가복음서에 대한 입장을 수정하여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Baur의 이론을 반대하고 나선다. 이어 1856년에 발표
된 논문 &quot;고대 카톨릭 교회&quot;라는 저작 제 2판에서는 Baur와의 결별이
더욱 분명해진다. 즉 초대교회 안에 바울과 다른 사도들 간의 날카로
운 신학적 대립과 분열이 있었다는 Baur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
을 주장하면서 튀빙겐학파의 가설을 전반적으로 반박하고 나섰던 것이
다. 사도들과 바울 사이에는 각각 그리스도교 사상을 표현하는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적인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구약과 대조하
여 볼 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체결된 계약이 새것이라는 것과 그 안
에 포함된 종교적, 도덕적 생활이 새것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조건
합치를 보고 있다. 그는 본 대학에서 처음에는 신약성서를 강의했고,
후에는 교리사를 강의하였다. 그리고 1852년부터는 교외학을 강의했는
데 사강사 생활 14년만인 1889년에 드디어 교수가 된다. 그러나 1884
년에는 더 많은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 본 대학을 떠나 괴팅겐으로 간
다. 거기서 그는 슈트라우스부르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도 그는 신
약성서에 관심하면서 조직신학을 강의하였다.

 

리츨의 평생의 관심은 의인론과 화해론 이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리스
도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보았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모두가 그것의
전제이거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 그래서 1870년부터 그의 대표작이라
고 알려진 &quot;의인과 화해의 그리스도교 교리&quot;라는 전 3권의 저작이 출
판된다. 거기에서 그는 그의 주된 관심인 의인론과 화해론을 각각 역
사적, 성서적,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 저작은 그의
생전에 제 3판까지 출판되었다.

 

1875년에는 &quot;그리스도교 강의&quot;라는 책을 출판하여 조직신학 교과서로
사용하려 했으나, 내용이 너무 어려워 결국 교과서로는 실패하고 말았
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1881년에 출판된 &quot;신학과 형이상학&quot;, 1880-86
년에 걸쳐 전 3권으로 출판된 &quot;경건주의 역사&quot;라는 책이 있다. 경건주
의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신앙운동이었다. 리츨은 경건주의를 평하여
복음적인 프로테스탄트 안에서 카톨릭적인 생활이념을 가지고 일어난
거짓된 부흥운동이라고 못박았다. 이미 그의 주변에는 본 대학에서 일
할 때부터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런데 리츨학파의 구성원들은 그의 강
의를 직접 들은 사람들이기 보다는 대개 그의 저서를 통해서 그의 사
상을 접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을 꼽는다면 헤르만
(W.Hermann)과 하르낙(A.von Harnack)이 될 것이다. 리츨은 정력적인
성격에 조예가 깊고 냉정하고 예리한 판단력에 토론하기를 좋아했으
며, 또 정직하고 견실했는데 감정적인 것은 매우 싫어했다. 리츨은 그
재질에 있어서는 쉴라이에르마허에 미치지 못하나 그의 깊이 있는 저
작들이 끼친 영향은 19세기 신학자 중 쉴라이에르마허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문체가 딱딱하고 무거워서 인기를 얻기에
는 한계가 있다고 하나 애써 읽어 가면 갈수록 그의 심오한 사상에 점
점 매료되어 간다는 게 독자들의 일반적인 평이다.

 

 

리 츨 의 사 상


리츨의 신학은 두 가지 점에서 칸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
다. (1) 형이상학이나 이론적 사변이 하나님에 대한 타당한 지식의 원
천이 된다는 사실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2) 종교적 사상은 본
질적으로 실천적이고도 도덕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했다는 점
에서 그렇다. 칸트는 인간 사유의 본질을 다루면서 인간은 대상 자체
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을 지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은 다
만 현상일 뿐이다. 현상이란 대상이 인간의 감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 나타내는 것, 즉 대상의 외관이다. 따라서 칸트는 하나님 자체에
대한 인식, 즉 하나님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 내지 철학적 인식은 불
가능하다고 보았다. 칸트의 이러한 인간 사유의 본질에 대한 이해사상
은 서구의 관념론적 신학에 그대로 적용이 됐다. 심지어는 변증법적
신학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칸트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형이상학적 인식의 형태 외에도 또
다른 하나의 인식의 형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도덕적 의식의 영역
이다. 즉 실천이성의 영역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를 구속하는 도덕적
외무들을 외식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 도덕적 의무들은 무엇 무엇은
해야한다와 무엇 무엇은 해서 안된다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데 칸트는 인간의 이러한 도덕적 의식을 분석해 볼 때, 인간에 대한
도덕적 정언 명령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존재성을 뜻한
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인 의식을 설명
해 주는 필연적인 의식을 설명할 길이 없다. 따라서 인간을 구속하는
도덕적 법칙들을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명령이라고 인식하는 것이 바
로 종교이다. 이로써 칸트에게 있어서의 종교는 인간의 실천이성에 자
리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리츨은 인간 사유의 본질에 관한 이와 같은 칸트에 분석을 그대로 받
아들였고 그것을 토대로 기독교의 의미를 해석했다. 리츨의 기본적인
대전제는 그리스도교는 이론적인 지식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도덕적 의식을 통해서 이해되어지기 때문이다. 하
나님은 결코 합리적으로는 인식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
은 형이상학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도덕적이고도 윤리
적인 성격을 띤다.

 

그리스도교의 일차적인 관심은 지성적이고도 철학적인 것에 있지 않고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것에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교 메시지
의 내용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
떻게 구원을 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리츨은 이와 같이
실천성을 근본 개념으로 하여 종교를 보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도 실
천성이라는 측면에서 본 인간의 가치 판단에 기초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주변의 다른 사물들과 같이 자연의 일부이기는 하
지만 자연에 비해 고등한 가치와 독립성을 갖는다고 이해한다는 점에
서 다른 것들과 질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인간의 이러한
자의식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가능케 하고 또 인간으로 하여
금 그 가치를 실천하도록 도와주는 한 인격에 대한 인식이 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인식하는 것에 전제가 된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 오는 것이다. 왜
냐하면 칸트의 철학이나 리츨의 이해 속에서는 신이 요청된 신이기 때
문에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가치 판단에서 오는 것이다. 종교
의 본질을 이렇게 분석하게 되면 종교인에게서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헌신하게 되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 체계이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실현하려는 장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자연을 통해서라기 보다는 역사를
통해서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셨고 인간에게 자신이
가치 있음을 깨닫게 하셨고 또 참다운 가치들에 대한 인식 능력을 인
간 안에 창조하셨고 나아가서는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을 인
간 안에 심어 놓으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생애는 하나님
이 역사 안에서 활동하신 최상의 역사적 실례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
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으로 계시하셨고 동시에 그 사랑이라는 가
치를 인간의 최상의 이상으로 제시하셨다. 인간들은 예수의 삶에서 최
상의 이상들과 그 이상들을 완전히 실현하는데 전적으로 헌신한 한 모
범을 얻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에게서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내맡길 수 있는 최상의 이상
적인 가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계시하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도덕적 인격이 인간에게 미친 영향
때문인 것이다. 예수가 신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도 그가 하나님과 같
이 인간에게 최상의 도덕적 가치들과 이상들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
다. 리츨의 말에 의하면 예수의 신성은 인간이 구원 얻기에 충분할 만
큼 이룩해 놓은 그의 인격적 업적에 대한 인간의 가치 평가의 결과이
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은 그 근거에 있어서 하나의 이간
의 가치 판단이다. 이러한 가치 판단은 곧 자기가 헌신할 수 있는 이
상이 예수에게서 가장 훌륭하게 실증되었다고 믿는 인간의 확신을 뜻
한다. 그런데 인간에게 제공한 예수의 이 위대한 이상은 마침내 인간
에게서 화해와 의인을 이룩하였다. 본래 인간이란 개개인으로 있게 되
면 자기애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을 자신의 제일의 가치로 삼으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와 직면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
웃에 대한 사랑이 인간의 최고의 가치로 제시된다. 그래서 예수를 믿
고 그의 가치관에 헌신할 때,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자신의 이기심으로
부터 자유롭게 되는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또 자애심으로 인해 참다
운 자아로부터 소외된 것에서도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인
간은 예수를 믿음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인간의 최상의 가치로 삼을 수
있게 되고 그와 함께 사랑을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 침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리츨의 구원관에는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해 주었다는 것에 대해서
는 강조점이 없고, 오히려 예수가 인간에게 최고의 아름다운 가치관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이 그가 구주가 될 수 있었던 자격 요건으로 평
가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함께 사랑을 추구해 나가는 곳인 교회는 예
수에게 기원을 둔다. 예수는 가치를 창조하는 공동체를 세웠는데 그것
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인간의 열망과 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바로 교회에서 예수의 가치 체계가 보존되고 육성되도 선포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교회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에게 계시하는 그 가치, 혹은 그 사랑을 발견하고 따를 수 있다.
그래서 교회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공동체이
다. 그러나 개개인을 교회로 불러들여 구원하는 것만이 역사를 위한
하나님 나라의 수립에 있다. 그리고 구원과 교회는 그 목적에 봉사하
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종국적인 목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리츨의
말을 빌리면, 사랑으로 고무된 행동을 통해 이룩된 인류 공동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통해 이룩하려는 하나님의 세부적 의도는
전인류를 포괄하는 보편적인 도덕적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데 있다. 따
라서 구원받은 자들과 교회의 사명은 인류에게 봉사하는 일에 자신을
아낌없이 헌신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 그러한
삶이 마침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한 삶의 방식을 점차적으로 받
아들이게 할 것이고, 그리하여 결국은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
를 동트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리츨이 이해한 그리스도
교란 도덕적이고도 윤리적인 가치 판단과 사회 속에서의 그것의 완성
을 향한 헌신임이 분명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 판단들이 주관주의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가치 판단들이 개인의 가치관에 근거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교의 창시자인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역
사적인 연구가 사실로 확립해 놓은 것에 근거해야 한다. 바로 이점 때
문에 리츨도 쉴라이에르마허처럼 성서비평을 크게 환영한다. 성서비평
을 곧 예수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들에 대한 진위성 여부를 가리려는
시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로지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스도는 누구였으며 무엇을 말했고 어떻게
행동하였느냐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그러한 비판적 연구는 예수의 생에
있었던 사실들을 더욱 완전하게 밝혀 주는데 공헌할 것이고 교회는 그
러한 사실들의 토대 위에서 비로소 최고의 가치를 산출할 것이며 또
그 가치를 보존하는 공동체로서 존속해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리츨은 성서가 그리스도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 신뢰할 만한 증언을 제
공해 주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예수의 역사적 존재에 대한 사실들에 의해 야기되는 것이라고
는 보지 않았다. 신앙은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의 삶에 인격적으로
현존함에 따라 예수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일찌기 예수가 추구했던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은
현존하는 예수로 부터 생겨난다. 또한 그로부터 인간은 자신의 이기적
주장에 자유롭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
려는 목표를 추구하려는데 헌신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 우리는
리츨이 가치 판단을 내리기 전에 먼저 성서의 비평적 작업을 통해 객
관적 사실들을 확보해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종교와 과학, 또는 이
양자의 영역과 능력을 구분하고 있음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그는 종교와 과학은 인간의 삶에 요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과학은
실제에 대한 사실들을 탐구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에 대한 인간
적 의미에 관해서는 판단을 내릴 능력이 없다고 보았다. 어떤 사실들
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능력은 종교에 있고 그것이 바
로 종교의 과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종교가 이러한
자기의 고유한 영역의 한계를 모르고 남의 영역을 함부로 넘나들게 될
때 거기에는 언제나 혼란과 갈등이 야기된다. 예컨데 과학은 진화론에
대해 주의 깊은 연구를 계속해서 인간이 하등동물로부터 진화한 것과
관련된 사실들을 최대한 밝혀 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그러한
사실들에 대해 가치 판단을 내려서는 안된다. 그것은 자기의 분수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종교도 사실에 관한 한 과학에 귀
를 기울여야 한다. 예컨데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상당히 오랜
세월 전이었다는 것이 과학이 밝혀 낸 객관적인 지식임에도 불구하고
종교가 이에 반대해서 4천년 전 에덴동산에서 첫 출발했다고 우길 수
는 없다. 그러나 일단 인간에 대한 객관적 사실들이 확정된 후, 인간
의 삶에 실존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가치들을 결정하는 것은 종교의
소관이다. 이처럼 과학과 종교는 상대방의 능력을 존중하고 각자 자기
의 역할을 완수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의존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은 리츨의 사상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윤리적,
혹은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신학적 경향들이 현대신학의 한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예를 들면 리츨 이후에 사회적 질서를 재형성하는
데 초점을 두었던 소위 사회복음주의운동이 그러하고 또 그리스도교와
사회와의 관계, 특히 그것을 정치적 차원에서 분석하는데 평생을 바쳤
던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이 그러하다. 오늘날에 와서도 중요한 사회적
이슈들, 예컨데 인종문제, 빈곤문제, 인권문제, 또 평화문제 등을 그
리스도교 신앙과 의미 있게 연계시켜 보려는 시도 따위가 그 신학적
내용으로 본다면 모두 리츨에게까지 소급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리츨은 쉴라이에르마허와 함께 19세기로 부터 오늘에 이르는 모든 인
간 중심적인 그리스도교 사상의 흐름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종교
에 대한 모든 사고의 출발점은 인간과 인간의 경험, 또 인간의 문제들
이다.

 

이러한 사상적 흐름에 반항하여 그리스도교를 신 중심적으로 전환시키
려 했던 사람이 바로 칼 바르트였던 것이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현존
에서 느끼는 신비감과 경외감을 그리스도교로부터 빼앗아 버린 책임이
전적으로 리츨에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실제 리츨은 신
비적인 체험이나 경건주의 그 외에도 사회에서 생활하고 사회에 영향
을 미치는 문제와 관련되지 않은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
는 것을 일체 거부하였다. 리츨에게 있어서는 실천성이 참다운 종교의
핵심이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를 올바로 해석하려면 반드시 성서의
메시지와 인간의 상황이라는 양극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할 때 우
리가 리츨 신학에 대해 할 수 있는 공정한 평은 역시 리츨은 인간의
상황이라는 극쪽에 훨씬 많은 비중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이
리츨의 그리스도교 해석의 강점이면서도 약점이기도 하다. 현실에 깊
이 천착했다고 하는 점에서는 누구의 신학보다도 리츨의 신학이 강점
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텍스트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는 리츨의 신학의 약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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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 리츨학파


리츨 학파의 특징

 

신학에서 형이상학을 배제, 사변적 유신론을 거부, 교회의 교의를 신학과 형이상학의 불합리한 혼합으로 여겨 정죄함, 종교적 신비주의를 형이상학적인 경건의 형태로 여겨 반대함, 종교의 실천적 관념을 중시함, 종교적 지식과 이론적 지식을 구분함, 자연 계시의 반대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를 강조함, 고독교 교의학의 합법적 원리로서 천국이라는 개념을 사용함, 신학적 탐구를 종교 의식의 내용으로 제한하는 경향이 있음. -- 형이상학에 관한 회의론, 교회 교리와 자연 신학의 거부, 역사적 예수와 그의 도덕적 가르침에의 집중, 그리고 영적으로 자유한 사람들의 친교로서의 천국의 개념을 강조 --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의 완전한 표상.
개신교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말의 문화적 환경을 상당히 반영하였다(문화적 개신교주의). 당시 전통적 형이상학은 비난을 받고 있었으며, 성경과 교회 교리는 엄격한 역사적 재검사를 받고 있었다. 기독교를 가장 단순한 형식으로 환원시키려는 관심이 일어났는데,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예수의 윤리적 메시지의 부활을 의미하였다. 종교적 권위는 성경 정경이나 교회 교리보다는 예수를 통한 개인적 칭의와 화해의경험에 두어졌다. 구원은 도덕적, 사회적, 그리고 진보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진정한 신학은 문화적 상황과 기독교 메시지 사이의 "상관의 신학"이라고 한 틸리히의 말이 옳다면, 리츨의 자유주의는 그 시대를 위한 아주 완전한 신학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메시지를 형이상학적 불가지론, 역사주의, 그리고 제1차 대전 이전 시대의 도덕적 낙관론에 맞추었다. 그러나 자유주의자들이 문화적 상황을 충족시키려는 관심 속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왜곡시키면서 그들의 "해답들"을 이끌어낸 오류는 존재한다.


인간의 종교적 경험에 의해서 하나님 지식에 접근을 시도. 인간 본성에 낙관적 견해(성선설 입장)를 가짐으로써 인간의 죄성이 약화됨. 과학적 방법을 받아들여서 현대 문명에 적응하려 했지만 신앙의 혼란과 신앙의 화석화를 조장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결합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초월성을 소홀히 하게 됨 -> 바르트가 이에 반발하여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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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과 신학도의 자세

김 용 복 박사


"현대신학"학이란 현대사회에 대응하는 신학을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의 복음을 규명하려는 신학을 말한다. 여기서 "현대사회", "현대화", "현대"라는 말은 두가지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서양계몽주의시대이후의 역사를 말한다. 두째는 계몽주의철학적 정신 즉 "합리적 이성"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를 현대사회라고 한다. 이러한 철학적 정신은 데카르트(Decartes)에서 시작되어 칸트(Kant)에서 완성되는 합리주의에서 출발되고 현실적으로는 현대과학과 기술체계로 나타난다. 현대정신이 지배하는 사회는 현대적 산업화라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반하였고 서구의 현대문명은 정치적으로는 신민지세력화어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경제적으로는 시장경제를 세계화하게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과학적 합리성을 보편화하였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현대정신의 물결이 진입하게 된것은 1800년대 후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서구세력이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부터 서구현대정신이 한반도의 전통사회에 도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한반도에 현대적 지식인들이 형성되는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1920년대 부터라도 생각된다. 이때에 한국의 지식인들 사회에는 현대과학적 합리성을 숭앙하는 사상이 내면화되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때에 한국의 현대적 지식인은 "종교는 미신이다"는 합리주의적 비판이 일기 시작하였다. 당시에 현대사상의 한 형태로서 사회주의사상이 한반도에 진입하여 "종교비판"을 개시하였는 데 이것은 "종교는 아편이다"는 무신론으로 나타난다.


한국사회가 본륢적으로 현대화하는 것은 해방이후부터이다. 남북한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두개의 대립적인 사회체제를 형성하면서 현대적 산업화라는 목표를 내어놓고 소위 현대화를 추진한다. 이현대화의 근간은 과학과 기술을 근간으로하는 산업경제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현대문명에서 일어나는 기독교신앙에 도전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있다. 몇가지 예를 들어 보자. 우선 현대적 과학주의적 합리성의 철학은 진리의 기준을 철저하게 수학적 합리성에 둔다. 이것은 초이성적 종교적 진리를 미신으로 간주하고 진리의 범주에서 제공한다. 이러한 현대정신은 우선 전통기독교신학의 "형이상학적 논리"를 거부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신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증명이라든지 우주론적 증명같은 신학적 논리를 거부한다. 이것이 칸트의 철학에서 가장철저하게 표출된다. 칸트는 모든 형이상학적 논리를 허구로 규명해버리고 수학적 합리성에서만 진리의 기준을 허용한다. 또 이러한 현대문명의 합리적 과학적 정신은 모든 종교를 미신으로 규명하고 기적을 부인하는 무신론으로 표출된다. 여기에서 기독교성경에 내포된 모든 기적적 진리는 현대문명의 도마위에 놓이게 되고 마침내는 성경의 권위마저도 도전을 받게되는 것이다.


현대신학이란 이러한 현대문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신학적 노력을 의미한다. 현대문명의 도전에 대응하는 흐름은 크게는 두갈래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현대문명의 논리를 전혀인정하지 않고 기독교의 성경과 교리를 보전하려는 보수신학의 흐름이 있고 또 하나는 현대문명을 받아 들이면서 오히려 현대문명속에서 기독교의 진리를 증거하려는 "현대신학"의 흐름이 있다. 이러한 두가지의 흐름은 서구사회에서 줄기차게 일고 있으며 오늘 세계개신교의 큰 두가지의 신학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 두가지가 모두 기독교복음의 진리를 보다 충실하게 증거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다.


우선 현대신학 성경해석에 현대적 합리성의 기준을 적용하는 문제가 제기 된다. 극단적인 현대신학은 성경의 진리가 과학적 합리성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으면 부정하는 태도를 가진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라든 지, 동정녀 탄생이라든지, 기적이라든지를 부인하는 태도가 극단적인 현대신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는 현대정신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현대과학적 합리성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이성절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합리적 방법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결과는 성경의 권위를 붕괴시킬 뿐 아니라 성경을 과학책으로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고 나아가서는 불란서의 계몽철학자들 처럼 이성을 우상처럼 절대神으로 섬기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최근 보수신학의 흐름속에서도 과학적 방법으로 성경의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하고 이것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는 듯하다. 이것 역시 성경의 권위와 진리성을 과학적 규범에 성경의 권위를 종속시키는 오류를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좌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권위가 있는 것이지 인간이성의 테스트에 합격하기 때문에 진리인 것이 아니다.


또 다른 태도는 인간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탈랜트로 인정하고 현대문명도 금정적으로 인정하면서 성경과 신학적 진리를 현대인에게 설득력이 있도록 해석하는 신학적 자세이다. 이러한 신학적 자세가 현대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런 태도의 현대신학은 성경학에 과학적 방법론을 적용하여 성경을 도그마적 성경인식의 종속에서 해방시켜 "성경으로 하여금 스스로 성경말씀되게" 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성경에 대한 비판적 해석학이다. 서구의 현대적 성경연구는 성경에 대한 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밝히고 성경본문의 고증, 편집사, 문학적 형식, 사회경제적 배경등 숱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이러한 결과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금물이지만 그것들이 성경의 권위를 해치지 안고 성경해석에 많은 도움을 주고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성경해석이란 이런 비평적 방법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건한 영적 자세를 핵심으로 하여야 진정하게 이루어 진다는 것을 투철하게 전제하여야 한다. 이것은 인간이성과 합리적 방법의 한계를 전제하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기독교종교철학의 흐름은 기독교의 진리를 형이상학론리에 의하여 설파하려는 데서 탈피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근본적 진리를 현대인에게 설득력있게 설명하는 데 그 촛점이 있다. 신의 존재를 다루는 유신론의 문제라든지, 악의 존재를 다루는 신정론이라든지, 역사와 종말을 다루는 종말론이라든지, 종교적 언어의 타당성을 다루는 종교언어분석철학등이 인간이성의 합리성과 제한성을 소박하게 인정하면서 현대인에게 기독교진리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현대신학의 측면이다.


조직신학이란 본래 현대신학에서 체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신학의 시발은 슐라이에르마하(Schleiermacher)에서 리츨(Ritschl)로 발트(Barth)로 이어진다. 이들은 서구 현대문명의 맥락에서 서양현대지식인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 흐름 이외에도 서구현대신학의 흐름은 대양하고 방대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현대인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알아 들을 수 있게 설명하는 신학체계를 이룬것이 현대조직신학이다. 독일인학자 본훼퍼(Bonheoffer)는 기독교복음은 현대인 즉 합리적 문명인에게 새로운 방식 즉 현대적 언어를 통하여 설파되어야한다고 주장하였는 데 이것이 현대신학의 기본정인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현대신학의 흐름에 대항하여 지속된 보수신학은 한편으로는 성경의 권위를 교리적으로 강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경향을 띄었다. 또 한편으로는 기독교진리의 보수를 위하여 개인의 영혼구원을 강조하고 세계전도를 강조하는 복음주의신학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복음주의신학에서도 개인구원을 넘어선 사회적 관심을 표명하는 새로운 복음주의신학의 흐름이 세계적으로 국내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데 이는 지극히 고무적이라고 하겠다.


현대신학의 한 흐름으로 중요하게 나타난 것이 사회구원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산업혁명이후 기독교는 18세기에서 부터 사회문제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도전을 받아 왔고 결국 20세기에 와서는 체제화된 무신론적 사회주의의 도전을 받게되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런한 무신론적 사회주의가 서구기독교문명속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구기독교문명의 현실 즉 산업혁명의 과정에서 빈곤의 문제와 인간의 사회적 소외를 본격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서구기독교는 공산주의 사상과 러시아혁명을 비롯한 공산주의체제의 확산이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체제들은 강력한 무신론과 사회주의를 공식 정치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이를 주창하였다.


이러한 사회구원의 문제는 18세기부터 서서히 다루지기 시작하였는 이것이 현대신학의 한 흐름이다. 합리주의적 과학적 무신론과 사회주의는 기독교를 배격하였지만 기독교내부에는 신의 존재를 금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기독교의 복음을 토대로하여 인간사회의 구원주장하는 현대신학적 흐름이 대두되었고 이제는 기독교신앙의 사회적 차원을 거부하는 신앙은 잘 못 된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신학적 움직임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본격화 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기독교신학이 서구적인 테두리를 벗어나서 아프리카, 중남미, 그리고 아시아에서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다. 나미의 해방신학, 아프리카의 흑인신학, 아시아의 민중신학과 종교신학, 여성신학등 다양하게 세계적 현대신학의 흐름이 대두되고 있다. 현대신학은 이제 서구위주의 신학이 아니다. 이러한 현대신학은 서구에서 처럼 고전적인 현대정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않고 모든 언어와 문명은 같은 타당성를 가진 것으로 간주 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현대문명의 모순과 한계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서구세력이 현대화의 이름으로 빈곤과 억압 그리고 문화적 신민지화라는 세계적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제는 현대문명에 대한 깊은 회의가 지구의 동서남북에서 심층적으로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신학도가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는 무엇일 가? 우선은 기독교신앙의 근본을 확고히 정립하기위하여 성경연구를 심화하여야 할 것이다. 경경의 기반없이 어떤 신학도 확고히 설 수 없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교리적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경이 성경말씀 즉 하나님의 말씀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는 기성신학의 제약을 넘어서 성처자체에 신앙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깊은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의미 한다.


둘째로는 인간과 역사와 사회에 대한 깊고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살고 있는 인간과 인간공동체에게 주어진다. 시대의 징조를 명확히 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실천하기 위하여서는 인간과 역사와 사회본질과 현실과 변화를 심도있게 인식하여야 한다.


세째로는 기독교신앙과 실천을 위한 이론과 실천론을 전문적인 수준에서 터득하여야 한다. 현대사회는 복잡하고 급변하기 때문에 고정적이고 경직된 신학적 이론과 초보적인 실천신학훈련으로서는 대응할 수 없다. 신학도의 이론적 태도는 개방적이고 창조적이어야 하며 실전적 태도는 전문적이고 효과적이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창조적이고 주체적인 신학이론과 실천력을 겸비한 기독교지도력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부름에 호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신학적 기초를 튼튼히 하여야 하며 그리고 그위에 탁월한 신학이론과 전문적 창조적인 실천력을 연마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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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구미신학의 특징과 21세기 신학

 

한국기독교학술원이 주최한 제22회 학술세미나가 15일 오후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있었다. ‘21세기에 있어서의 기독교신학의 성격탐구’를 주제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목창균(서울신대) 교수가 ‘현대 구미신학의 특징과 21세기 신학’, 현요한(장신대) 교수가 ‘첨단과학과 전통적 신학의 만남’, 이종성(학술원 원장) 박사가 ‘21세기에 있어서도 성서의 신언성이 견지될까’를 주제로 발표했다. 목창균 교수의 강의를 발췌하여 싣는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되는 현대 구미 신학은 지난 200년 간 매우 다양한 형태와 흐름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와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한 자유주의 신학,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20세기 유럽에서 시작된 신정통주의 신학과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신학, 그리고 최근 신학들로 구분될 수 있다.

 

현대 구미신학의 특징


현대 구미신학의 중심 과제는 현대성에 대한 적응 문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현대인들은 전통 신학의 표현과 개념을 단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며, 과학적 세계관과 성서적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에는 후자를 포기하고 전자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교훈을 현대인들이 신뢰할 만하게 재해석하거나 진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석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번역자(translator)와 변혁자(transformer)로서의 접근이다. 변역자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새롭게 표현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기독교 메시지의 기본 내용을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관점이다. 변혁자는 기독교의 메시지를 현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내용상의 심각한 변화도 감수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점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과학적 세계관에 적응하기 위해 전통적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포기하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 이후 출현한 대부분의 급진 신학자들은 변혁자에 속한다.


현대 구미신학의 또 다른 특징은 종교적 경험을 중시하고 그것을 신학작업의 주요한 자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신학에 있어 종교적 경험의 중요성을 재발견한 사람은 슐라이에르마허였다. 그는 종교를 도덕이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계몽주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했다. 교리와 신조 배후에 있는 생생한 경험의 중요성을 발견하여 그것을 신학의 토대로 확립함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도 했다. 현대 구미신학은 신학 방법적인 면에서 종교적 경험에 대한 작용과 반작용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리츨, 하르낙으로 이어지는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경험을 강조했다. 특히 슐라이에르마허는 인간의 종교의식을, 리츨은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자료로 간주했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요 주관주의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반면 20세기에 일어난 신정통주의 신학과 근본주의 신학이 하나님의 계시를 강조하게 된 것은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희망의신학,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신학, 아시아신학 등 최근의 신학들 역시 인간의 경험을 중시한다. 몰트만의 희망의신학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그가 겪은 전쟁 포로 수용소의 체험으로부터 태동된 것이다. 그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 생존확률이 높다는 것을 발견하고 희망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신(死神)신학의 도전에 직면하여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희망을 신학화했다. 대부분의 현대 구미신학은 신의 계시보다 인간의 경험과 더불어 시작하고 있으며 인간의 경험이 그들의 신학 작업의 중심과 토대가 되고 있다.


현대 구미신학은 다양한 형태와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으나 수명이 그리 길지 못하고 유행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신학은 그 기초가 되는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 성서의 메시지(text)와 시대적 상황(context)이 그것이다. 서구의 정통신학은 메시지만 강조하고 상황의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 현대 구미신학은 일반적 역사적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 이후 서구 신학은 시대적 정황의 맥락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현대신학은 상황신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상황이 특정 신학을 만든다. 어떤 상황 아래 발전하던 신학도 그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고 만다. 현대신학이 유행성을 지니는 것은 이 때문이다.


현대 구미신학은 신학의 주제와 관심의 대상도 바꾸고 있다. 신학적 관심이 하나님에서 인간으로, 하늘에서 땅으로, 저 세상에서 이 세상으로, 정통 교리에서 정통 실천으로 전환되었다. 또한 개인적 신앙보다는 타인을 위한 삶이, 그리고 말씀 전파보다는 인간화가 강조되었다.


21세기 신학


21세기는 현대 후기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시대이다. 이 시대에 신학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포스트모던 신학과 복음주의 신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포스트모던이란 용어는 최근 신학계에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신학자들도 현대적 사고 방식이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신학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형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 형성 과정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 사이에도 현대 신학과 포스트모던 신학의 구별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어떤 것이 포스트모던 신학인가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흔히 포스트모던 신학의 대표적 형태로 지적되는 것은 해체신학, 과정신학, 해방신학, 보수주의 신학 그리고 근본주의 신학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과 과학의 한계성을 지적하고 이성의 자율성, 과학의 효능, 역사의 진보를 맹목적으로 신뢰한 계몽주의를 비판하고 그 환상을 깨트린 것이 그 주요한 공헌으로 여겨진다.


해체신학은 해체 철학적 방법을 신학에 적용하는 것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전통신학의 근본 토대를 해체하여 신학을 갱신하고 재생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자아·진리·목적·실재적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고 일체의 세계관을 파괴한다. 특히 전통적 신개념을 현시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의 죽음을 주장한다. 대표적 해체신학자 막크 테일러는 해체를 제3의 변증법으로, 그리고 포스트모던 시대에 종교적 반성을 위한 토대로 취급한다. 그는 해체를 단순히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작업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들어 복음주의란 말은 넓은 의미로는 18세기 부흥운동을 계승한 신앙전통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그 하부그룹인 신복음주의를 말한다. 신복음주의는 근본주의 영향권에서 성장한 온건한 보수주의 기독교인들의 운동이요,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중간에 위치하기를 선호하는 북미 개신교 내의 제3세력이다. 그들은 정통교리를 유지하면서도 학문적 연구에 가치를 부여하고 사회문제에 적극적 관심을 표명했다. 영혼을 구원할 뿐 아니라 문화를 변혁시키는 복음에 대한 비전을 회복했다. 성경 무오성 문제로 보수적 복음주의와 진보적 복음주의로 분열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 진보적 복음주의자들이 복음주의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최근 활발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는 복음주의 학자들은 대부분 이 그룹에 속한다. 따라서 이들이 21세기 복음주의 신학계를 주도할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북미 복음주의 신학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마크 놀(Mark Noll), 스탠리 그렌츠와 핀녹이 중심 인물이 되고 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한다. 그 시대에 맞게 기독교 신앙을 재진술하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잘못 진술하면 기독교 신앙을 손상하게 되는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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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신학의 근황

 

박아론 박사 (총신대 교수)

 

1. 자유주의 삼총사의 몰락과 칼바르트의 등장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유럽신학은 리츨과 하르낙 헤르만 등 자유주의
신학의 삼총사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다. 이들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는
쉴라이에르 마허였다. 이들의 신학은 한마디로 倫理主義 神學(ethical
theology)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윤리주의 신학의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고 인류의 도덕적 선생
으로 생각했으며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다만 인류
를 위한 [위대한 도덕 교과서]로 여기면서 진리의 척도로서의 종교적이
며 윤리적인 경험을 내세우는 데 있었다.


칼 바르트는 1919년 그의 저서 {로마서 강해}를 통해 고전적 자유주의
를 공격하고 이 저서를 통해 유럽의 신학계는 새로운 물결이 밀려 왔던
것이다.

 

 

2. 칼바르트의 실각


1920년대로부터 5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에서 바르트는 他의 추종을 불
허하는 유럽의 대표적 신학자로 인정받고 알려지게 되었고 영미 신학계
와 심지어 피 선교지 신학에 까지 깊이 파고 들어 그 영향력을 행사하였
다. 이 신학은 新正統主義라는 이름의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와 입장을
같이 하는 신학자 에밀 부룬너와 신학적 동반자로서 노고를 나누기도 하
였다.


칼 바르트의 신학은 금세기 중엽에 이르러서 루돌프 불트만의 {말씀과
신화}가 1948년 출간됨으로 실각하게 되었다.

 

 

3. 불트만의 붕괴


불트만은 그의 저서 말씀과 신화의 출판을 계기로 갑작스러운 신학적
인기의 상승을 누리면서 바르트의 과학적 세계관과 실존주의 철학을 무
시하는 듯한 시대와 뒤떨어진 {교회 교의학}을 그의 [양식비평학]과 [실
존주의 신학]으로 제압해 버렸다. 그러나 그도 역시 그의 제자들에 의하
여 비판을 받게 되었다.

 

 

4. 어지러운 신학의 판도


불트만의 신학이 붕괴함으로써 유럽신학계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불
트만 후의 신학자들은 [후기 불트만 신학자]들과 반 불트만 신학자들이
라고 볼 수 있는 [보수파 신학자들]과 [구원사학파 신학자들]과 [판넨베
르그 몰트만파 신학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후기 불트만파 중에는 괴팅겐의 한스 콘젤만과 하이델베르그의 에리히
딩켈, 훅스, 에벨링, 케제만, 큠멜 등이 있다.


반 불트만파에 속하는 학자들은 보수파로 괴팅겐 대학의 예레미야스,
마인즈의 스타린, 함베르크, 고펠트, 엘랑겐의 프리드리히 등 이고, 구
원사학파 신학자들은 바젤의 오스카 쿨만, 말베르그의 큠멜, 베르린의
로제 등이 있다.


또한 판넨베르그 몰트만파가 있는데 이들은 마인즈의 판넨베르그, 튀
빙겐의 몰트만이 그 대표적 신학자들이다.


이 세 부류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신학자는 함버르그의 틸리케가 있다.

 

 

5. 유럽신학의 새 주역들

 

몰트만과 판넨베르그, 에벨링, 옷트는 새롭게 유럽신학계에 등장한 새
로운 주역들이다. 몰트만과 판넨베르그는 앞서 살펴 보았다.


게르하르트 에벨링은 불트만으로 부터 실존주의 해석을 배워가지고 그
것을 새 해석학이라고 일컷는 국면으로 이끌어간 신학자이다.


하인리히 옷토는 칼 바르트의 제자이면서도 칼 바르트와 루돌프 불트
만의 중간에 위치하여 두 신학자들 사이의 신학적 조화를 모색하는 중재
적 신학자이다. 옷트는 후기 하이덱거 사상에서 바르트와 불트만을 조화
시킬 수 있는 方法論을 발견한다.

 

 

6. 신학적 축의 변동

칼 바르트가 실각하고 루돌프 불트만이 무너져버린 뒤의 유럽신학계는
후기 불트만파와 구원사학파와 중간 보수파로 불리우는 신진 신학자들의
난립으로 신학적인 춘추전국 시대를 방불케하는 [혼란기]를 맞이하였으
나 1970년이 지나자 서서히 혼란기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하면서 유럽
신학을 이끌어나갈 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환언
하여, 그동안 거성신학자들의 사망에 뒤따르는 많은 소장급의 신학자들
의 신학적인 불협화음으로 빚어진 유럽신학의 어지러운 파도가 1970년대
를 거쳐 1980년대로 돌입하면서 몇몇 사상적인 독창성과 추진력을 가진
신학자들로 말미암아 질서와 안녕을 되찾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즉 이
몇몇 신학자란 앞에서 지적하고 거론한 바있는 판넨베르그, 몰트만, 에
벨링, 옷트와 같은 신학자들이다. 그리고 한가지 부기해야 할 것은 이들
신학자외에 1980년대에 그 신학적 리더쉽과 영향력을 크게 기대해볼 만
한 신학자로서 헬무트 골비쳐(Helmut Gollwiter;1908-)와 에벨하르트 용
겔(Eberhard Jungel)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골비쳐는 성경과 기독교를
한 두가지 진리로 축소시키려고 하는 [축소주의 신학자들](실존주의 해
석학파와 구원학파 등)을 비판하면서 성경적인 하나님 사사잉 보존되어
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또 용겔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로서의
삶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더욱 동력적이며 활동주의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고 주장한다.

 

골비쳐와 용겔은 둘 다 칼 바르트의 감화를 받았다고 봄이 타당하다.
다만 용겔은 칼 바르트와는 달리 하나님은 인간들이 가지는 진정한 사랑
과 신뢰의 관계들 속에 남 몰래 존재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일종의 [자
연신학]을 인정한다는 것이 그의 신학적으로 특이한 점이다. 그리고 특
히 용겔은 현재 튜빙겐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많은 신학도들의 인기를 독
차지하고 있는데 앞으로 판넨베르그와 몰트만과 같은 선배 신학자들을
물리치고 유럽신학을 리드할 수 있는 유망주로 평가되고 있는 것도 사실
이다.

 

그러면, 유럽신학은 지금 어디까지 와있는가? 20세기 후반기로 접어
들면서 바르트와 부룬너, 불트만과 같은 거성 신학자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게 되면서부터 유럽신학계에서는 사상적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리켜서 저자는 맥퀘리 교수
(Dr.John Macquarrie)와 함께 [사상적인 축의 변동]이라고 부르고 싶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있어서 유럽의 사상계를 지배한 것은 키엘케골-
니체-하이덱거 노선이었다. 그러나 이와같은 신의 사망을 전제로 하는
인간의 정신적인 고뇌와 자아와 세계를 초극하고자하는, 실존성의 추구
를 강조하는 키엘케골-니체-하이덱거 노선이 1970년대로부터 서서히 헤
겔-마르크스-불로흐 노선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에르스트 불로흐(Ernst Bloch, 1885-1977)의 대작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1954-1977)이 유럽사상계에 알려지면서부터 막대
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특히 1970년에는 헤겔의 탄생 이백 주년
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학계의 행사와 더불어 헤겔주의의 回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전시대의 유럽사상계를 지배하던 [키엘케골-니체-하이덱거 노선]의 신
학자들이 세계 제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의 평화와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내면적인 사색의 세계로 몰입하여 [주관의 우물]을 너무 깊이 파고 있었
다. 그러나 60년대 말부터 유럽의 인민들은 서구 민주주의에 대하여 비
록 그것이 그 둘에게 미증유의 {경제적 번영]와 [사회발전]을 가져 왔다
고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일변도적인 변증을 수정하고 공산주의와 마르
크스주의에 대한 호기심에찬 접근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유럽사람들의 사고의 보편적인 변화에 자극되어 유럽의 학
계는 [주관의 우물]을 너무 깊이 파면서 20세기 후반기의 급변하는 유럽
의 정치적이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 버리고
[구 사상 노선]의 학자들과 사상가들에 대하여 반기를 든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유럽학계의 [사상적 진자]는 실존주
의에서 신마르크스주의(neo-Marxism)로 하이덱거의 사색으로 부터 불로
흐의 행동성으로, 주관적 사색의 우물을 파는 일로부터 정치참여를 통한
사상의 가두 시위로 크게 흔들리며 이동해가고 있다.

 

따라서 유럽의 신학계 역시 이러한 유럽학계와 문화계의 동향에 민감
한 영향을 받아서 소위 [사상적 축의 변동]을 자체 내에 초래케 되었으
니 [바르트-불트만-본훼퍼 축]이 [판넨베르그-몰트만-에벨랑-옷트 축]으
로 바뀌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다. 특히, 유럽신학의 축의 변동
과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것은 소위 [신마르크스주의]가 차지하는 사상
적 비중이다. [신마르크스주의]는 칼 마르크스로부터의 영향은 시인하나
정치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간격을 유지하면서 미래학적인 인생관
과 기술사회에 대한 비판(자본주의 사회든지 공산주의 사회를 불문하고)
과 인간의 사회적 본성과 능력, 그리고 혁명적 사회개조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삼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럽신학
계에서 일기 시작한 기독교와 공산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quot;대화와 일
치의 운동&quot;은 현금 1980년에 와서도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유
럽신학의 축의 변동에 기인한 것이며, 1980년대를 걸머지고 나아가는 유
럽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에게 신마르크스주의가 사상적으로크게 작용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실례이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유럽신학의 새로운 주역들이 기독교 신학에 대하여 과다한 [미
래학적 의식구조]와 [종말론적 사회의 실현]을 위한 [혁명적 행동성]을
부여함으로써 결과하는 [기독교 신학]의 &quot;마르크스주의화&quot;를 어떻게 미
연에 방지하면서 그들이 말하는대로 [무신론이 그 인생관이 되어버린 오
늘의 서구사회]속에서 그나마 기독교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는가가 큰
문제거리가 아닐 수 없다.

 

 

7. 유럽신학은 산간벽지 신학인가?


[유럽신학은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하이덱거와 불트만
으로부터 떠나서 지금은 신마르크스주의에 와 있다. 또는 접근하고 있
다]고 우리는 대답을 해야겠다는 것이 지금까지 본 논문에서 진술한 바
내용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급진주의적으로 흐르고 있는 현금의 유럽신학계에는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는 보수
신앙과 그것에 입각한 보수주의 신학이 어떤 형태로든 존재하는지 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생기는 것
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같은 질문에 대한 답변은 [절망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유럽에서 복음주의적이며, 보수
주의적이라고 하는 신학자들의 모두가 성경에 대한 비평학적 연구를 찬
동하고 있으며 특히 어떤 인사의 말과 같이 그들의 혈관 속에 칼 바르트
(Karl Bart)가 주사바늘로 주입한 변증법적 사상 요소들이 계속 순환하
고 있는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바 있는 구원사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이
가장 보수적인 것으로 생각되나 그들도 [역사적 비평학]을 수용하고 있
으며 마르틴 카렐(Martin Kahler)과 헬무트 틸리케(Helmut Thielike)등
서독 신학자들 중에서 경건주의 경향을 보이는 신학자들도 마찬가지이
다.

 

다만 유럽에 아직도 [보수신앙]이 존재하고 보수주의 신학의 잔재가
있다면 그것은 [성서학교](Bible missions school)운동을 통하여 유럽에
생겨난 성경학교와 선교학원들 가운데서 미약하나마 보존되고 있다고 하
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학교들이 세워질 때 미국 교회의 세대주의 영향
을 적지않게 받는 경우도 있고, 또 부흥사 빌리 그레함(Billy Geaham)의
대부흥집회의 결과로서 전도와 선교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
다.

 

그러나 이 유럽의 Biebelmissionsschule 운동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성
경학교와 선교학원들이 유럽교회를 위하여 열심있는 목회자를 양성하고
헌신적인 기독교 교육자와 해외로 갈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다는 것
은 치하하여 마지 않을 일이지만 이들 학교에서 교수들이 가르치는 신학
의 수준은 높은 편이 못되며, 따라서 현금의 유럽신학계에서 진행중인
신학적 토론과 논쟁 그리고 연구모임에서 전혀 소외당하고 있는 것도 사
실이다.

 

그런데 유럽신학, 특히 현금의 [서독신학]은 폐쇄된 [저명 인사들의
회합] 같아서 매우 국제성을 상실한 &quot;산골신학의 냄새&quot;를 풍기고 있다는
것도 아울러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사실은 오늘날의
[서독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과 그들의 발언에 대하여 별로 흥미없는
일로 묵살해 버린다는 것과 똑 같은 자유주의적이며 진보주의적인 사상
을 가진 신학자들이라고 할지라도 독일인이 아닌 외국인일 경우에 신학
적으로 [無味하다]고 하여 무관심한 경우가 많다는 것 등에서 나타나며
증명되고 있다. 예외가 있다면 외국신학자들이지만 라인흘드 니버나 폴
틸리히와 같은 독일 이름을 가진 신학자들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보인다
고 하는 &quot;재미있는 면&quot;도 엿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럽신학이 언제까지나 그와 같은 [신학적 폐쇄성]을 즐기며
저명인사들의 모임으로 유지되어 나갈 것인가에 대하여 우리는 크나큰
의문을 가져야 할 줄로 안다. 첫째로 유럽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자들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소홀히 여긴다는 뜻
이 되므로,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인기와 여론에 편승하여 조석
으로 변하는 [유럽신학]으로 화해가고 있다는 데 대한 좋은 원인 설명이
된다고 본다. 둘째로 유럽신학이 유럽인과 독일인 외의 신학자들에게 그
들의 [신학적 회합]에 참여할 수 있는 회원으로서의 자격을 주지 않는다
는 사실은 공간적으로 너무 협소한 신학, 그러니까 정말로 국제성이 없
는 &quot;산골신학&quot;을 운영하고 있다는 비평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
다. 오늘날 세계는 일찌기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이 [신약성경의
비신화화]와 관련하여 말한 바대로 과학의 발달과 교통방편의 혁신으로
말미암아 [일일 생활권]에 살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의 신학자들은 신
학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활권적 공간]에서 펼쳐나가야 하지 않겠
는가? 이 지상에서 서독만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요, 유럽이 세계의 전부
도 아닐 것이다.

 

유럽의 신학자들은 오늘날 세계라고 하는 &quot;일일 생활권적 공간&quot;에서
공존하고 있는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과 사귐을 가지면서 빈
번한 정보교환과 신학적 토론 및 공동적 학문 연구의 기회들을 마련하는
일을 힘씀으로써만 과거와 같이 [유럽신학]의 우위성을 계속 세계적으로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를 도외시함으로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전통을 상실하여 유럽신학이 [뿌리없는 나무]와 같이 되
었다고 한다면 유럽 외의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자들을 업신여김으로써
유럽신학은 [공간적 연속성]을 상실하여 협소한 지역사회의 신학, &quot;산골
신학&quot;으로 떨어져 버릴 날도 멀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미국에서는 제임스 로버츠(James D.Roberts;1927-)와 제임콘
(James H.Cone;1938-)과 같은 흑인신학자들이 나타나, [흑인 신학]이라
는 것을 만들고 있고, 남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해방신학](Theology of
Liberation)이 한창이다. {인간적 희망의 신학}을 써낸 브라질의 신학자
루벰 알베스(Rubem Alves; 1933-)는 &quot;세계를 해석하는 일로 끊나는 신
학&quot;은 더이상 필요가 없고 &quot;세계의 혁명사적 과정의 한 부분이 될 수 있
는 신학&quot;을 하자고 절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시선을 아시아로
돌릴 경우에, 일본의 신학자 기다모리 가즈오가 우리가 {하나님의 고통
의 신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영어로 번역되어(1951년) 널리 국제적으
로 읽히기까지 하였고, 또한 몇년전에 선교 백주년을 경축하게 된 피선
교국교회인 한국교회에서도 신학적 성숙도를 보여 윤성범 교수의 {한국
적 신학}(1972년)이 한국 사상의 특징을 담고서 나왔으며 보수주의측에
서는 한국교회의 경건한 신앙을 소재로하는 저자의 {새벽기도의 신학}
(1974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와같은 타국, 타대륙의 신학자들과 신학의 동향에 대하여 현금의 유
럽신학자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가가 의심스럽다. 결론은 이것이다. 만일
[유럽신학]이 1980년대에도 1960년대와 1970년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성을 무시하고 시간과 역사의 연속성이 없는 신학을 한다
면, 그리고 타국과 타대륙의 신학과 신학자들을 세계라고 하는 [일일 생
활권적 공간]속에서 공존하는 신학의 동료들로 생각하지 않고 그들을 교
육과 계몽적 지도의 대상인양 착각하는 공간적 연속성이 없는 [산간벽지
신학]을 계속하여 한다면 그것은[유럽신학] 자체를 위하여 매우 불행스
러운 일일 것이라는 것이다. [유럽신학]은 협소한 공간에 존재하는 [역
사와 시간의 뿌리]가 없는 나무 같아서 곧 고갈하며 몰락할 위험성이 커
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로서는 칼 헨리 박사의 말과 같이 차라리 성
경을 읽으면서 본국에 머물러 있는 편이 수년동안 여비와 학비를 들여가
면서 서독에 신학을 배우려고 유학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우리 한국교회는 보편적으로 말해서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기를 힘쓰는 [경건주의 신앙]을
그 체질로 하고 있는 교회이기 때문에 서독 유학을 하고 돌아오는 신학
인들이 &quot;발 붙일 곳&quot;이 그리많지 않다는 것도 한번쯤 고려할만하다.

 

 


* 總結論 - 終末이 가까운 現代神學


우리는 현대신학이 칼 바르트로부터 시작하여 [解放神學]과 [民衆神
學]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基督敎神學 즉 [正統神學]으로부터 너무나 먼
거리에 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현대신학을 대표하고 있는 [歐美神學]은 본훼퍼(Dietrich Bonhoffer)
의 &quot;신의 세속속에서의 존재&quot;의 상념에 크게 영향을 받아 [기독교 무신
론](Von Gott ohne Gott)을 부르짖는데 거의 일치를 보고 있다.

 

하비콕스(Harvy Cox)는 [死神神學]을 가리켜서 현대신학의 &quot;하설작용&quot;
이라고 비꼬았으나 그 자신도 신에 대한 &quot;침묵&quot;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음
으로 &quot;무신론적 복통&quot;을 강하게 느끼고 있는 줄 안다.

 

이렇게 무신론의 &quot;음침한 골짜기&quot;(시23:4)를 헤메고 있는 구미신학은
이미 [신학](Theology)이 아니라 &quot;新學&quot;의 지경에 도달했다. 오늘날 구
미신학은 그 &quot;무신론적 전락&quot;의 결과로서 신학의 殘骸를 여기저기 남기
고 있다.

 

그것은 에스겔이 본 [마른뼈의 골짜기](겔37:1,2)의 광경과 흡사하다.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무신론의 지경에 도달했을
뿐 아니라 [脫基督敎]의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일찌기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말하기를 &quot;기독교의 위대
함&quot;은 &quot;기독교가 유일종교가 아님을 과감하게 시인&quot;하는데 있다고 하였
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도 합세하여 부르짖기를 기독교는 절
대적 진리성을 포기하고 &quot;세계적 종교화합의 시대&quot;의 장을열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현대신학의 영향을 받은 [현대기독교]는 기독교의 옷을 벗기
에 바쁘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벗어 버리기에 바쁘다. [그리스도의
선교]가 아니라 &quot;하나님의 선교&quot;(missio dei)라는 이름 아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 대신에 교회의 &quot;사회적 혁명적 행동성&quot;을 강조한다.
오늘날 [구미신학]으로 대표되는 현대신학은 분명히 &quot;탈기독교의 활주
로&quot;에 와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역사적 기독교신학 또는 [정통 신학]의
[유일종교 사상]을 그 잔재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불태워 버리고 (요
14:6, 롬1:16,행4:12) &quot;무신론적 인본주의&quot; 또는 &quot;에큐메니칼 종교혼합
주의&quot;의 &quot;허무한 공간&quot;으로 영구히 사라져 버리는 순간이 도래하는 것
뿐이다.

 

끝으로 오늘날 [현대신학]을 대표하는 [구미신학]은 그 &quot;사회주의적
급진성&quot;의 발휘로 인하여[공산주의]또는 [미르크스주의]와의 &quot;대화를 통
한 일치 내지는 화합&quot;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정치와 혁명을 통한
[정의사회구현]에 신학이 앞장 설 것을 부르짖고 있는 위르겐 몰트만
(Jugen Moltmann)과 하비 콕스(Harvy Cox)와 같은 신학자들은 [공산주
의]또는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를 강조하면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공
존보다는 한걸음 나아가서 &quot;상부상조적인 협력관계의 수립&quot;을 제의한다.
공산주의 측에서도 기독교에 대하여 대화를 통한 &quot;일치&quot;를 모색하자고
추파를 던져보내고 있다.

 

다년간 공산국 체코의 푸라하 신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다가 스위스에
있는 바젤대학으로 옮겨와서 신학을 가르치면서 WCC 중앙위원이 되었던
쟉 록흐만(Jan M.Lochmann)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가 양자의
사상적 혼합과 절충보다는 [세계사회의 인간화]을 위하여 함께 일하는
협력적 관계를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 보았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출현은 이와같은 록흐만의 &quot;예언&quot;을 &quot;휴지화&quot;하
고 말았다.

 

위르겐 몰트만과 요하네스 멧즈의 [희망의 신학]의 연장선상에 있으면
서 최근 유럽신학계를 휩쓸고 있는 [신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
은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자들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혁명 사상]과
[경제이론]을 신학적 해석학의 내용으로 삼아 세계의 가난하고 억눌림을
받는 인민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신학을 구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티에레즈(Gustavo Gutiemez)와 같은 해방신학자는 공공연하게 성경
을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칼, 마르크스의 시각을 갖고서 읽고 해석할
것을 부르짖고 있는데 이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즈의의 대화나 [인간화]의
목적을 위한 협력관계 운운이 아니라 &quot;기독교의 마르크스주의화&quot;요 &quot;유
물론적 사회주의 혁명의 신학&quot;(Materialistis Socialist Theology of
Revolution)의 출범을 의미한다.

 

역사적 기독교신학 즉 [개혁주의 정통신학]의 입장에서 볼때에 이 얼
마나 어처구니 없고 한심스러운 [현대신학]의 &quot;추태&quot;또는 &quot;탈선행각&quot;인
가(눅12:16-21,롬1:25,시1:1,2,고후6:14-16).

 

1960년대에 헤르만 도이빌드교수(Herman Dooyeweerd)의 저술 {서구 사
상의 황혼}(In the Twilight of Western Thought)이 출간되어 서구사상
의 반기독교적 급진성을 지적하고 경고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1년에는 죤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교수가 {기
독교신학의 자살}이라는 제목의 저술을 펴냈는데 [현대신학]은 그&quot;급진
적 사상성&quot; 때문에 자살적인 총격을 여러번에 걸쳐서 받은 결과로서 지
금은 그 운명의 순간이 시시 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하는 풍자적이면
서 매우 심각한 표현을 하였다.

 

저자는 두 학자의 서구사상과 현대신학 전반에 걸친 비관적인 평가와
&quot;종말적인 표현&quot;에 대하여 아낌없는 찬동과 지지를 보내는 바이다.
앞서 묘사하고 설명한 바와 같은 [현대신학]의 급진주의 일변도의 진
행 때문에 [현대신학]은 현재 &quot;종말의 시기&quot;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하
다. 아니, &quot;종말의 시기&quot;라는 표현보다도 &quot;종말의 순간을 맞이하고 있
다&quot;는 표현이 더 적절할는지 모른다.

 

이와 같이 [기독교 무신론]과 [마르크스주의]로 뒤범벅이 된 현대신학
의 [종말적인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 한국의 [개혁주의 정통신학]은
&quot;기독교신앙과 신학의 보존&quot;이라는 지상 명령적인 목적론을 재확인하고
그것을 수행하는 일에 전력을 기울이려 할 것이다.

 

[현대신학]의 &quot;불신앙의 결론들&quot;때문에 기독교의 존속이 &quot;일대위기&quot;를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 우리에게는 오직 기독교를 보존해야 한다는 [절대
명제]가 있을 뿐이다. 한국과 세계에서 기독교를 보존하고 보존한 기독
교를 전파하는 이 큰 목적을 위하여 우리 교회는 분발하여 노도와 같이
밀려오는 현대신학의 급진적 사조에 대항하여 '일사각오의 믿음'을 갖고
서 용감하게 싸워야 할 것이다(사40:8, 딤전6:12, 딤후3:14-17, 사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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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경건주의 운동과 한국 교회


지형은(독일 Bochum대학 신학박사, 서호교회 담임)

 


1. 머리말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를 다루어야 한다. 경건주의는 기독교 역사 가운데서 가장 크게 오해를 받아온 운동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다.[1]) 서구에서 경건주의를 보는 시각을 살피자. 박사 학위 논문에서 경건주의를 다룬 데일 브라운은 자신의 다른 책에서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가 어느 정도인지를 이렇게 단적으로 말한다.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경건주의’라는 말을 바람직하지 못한 신학적 경향들을 공격하는 모욕적인 말로 사용했다.…… 20세기 신학 용어로서 경건주의는 감정주의, 신비주의, 합리주의, 주관주의, 금욕주의, 정적(靜寂)주의, 신인협력주의, 천년왕국주의, 도덕주의, 율법주의, 분리주의, 개인주의 및 내세 지향주의 등과 같이 부정적 의미로 취급되고 있다.”[1])

 

경건주의가 시작되어 한참 진행되던 17,18세기에 경건주의를 반대하며 공격한 정통주의는 경건주의를 다음과 같은 경향들로 보았다. 도나티스트파, 펠라기우스파, 슈벵크펠트파, 바이겔주의자들, 오시안더파, 혼합주의자, 마욜주의자. 퀘이커파, 열광주의자…. 경건주의를 비난하는 17세기와 20세기의 비난에서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부정적인 신학과 신앙의 흐름을 다 찾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다른 쪽에 경건주의에 대한 찬사도 있다. 경건주의는 종교개혁을 이은 두 번째 종교개혁운동이며 근대 선교 운동이 경건주의에서 시작되었다. 경건주의는 제도화와 고착된 교리화 때문에 죽어가던 정통주의적 기독교 신앙에 활력을 불어넣은 운동이었다. 경건주의 운동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계몽주의가 몰려오는 가운데 내적인 생명력과 따뜻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경건주의를 이해하는 것도 서구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 무조건적인 찬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정확하지 않는 피상적인 지식에 근거한 오해가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이 경건주의를 개인주의적이며 내세 지향적인 신앙으로서 사회적인 문제나 이웃을 향한 사랑에는 무관심한 신앙유형으로 판단하며 비난한다. 그리하여 경건주의가 개혁과 새로움을 거부하고 종교 체제를 유지하는 낡은 틀이라고 본다. 한편, 가부장적이며 제도 편향적인 보수성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경건주의가 가진 이런 특성 때문에 경건주의적 신앙을 좋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무분별한 비난과 지나친 찬사는 모두 대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물이다. 될 수 있는 대로 객관적으로 대상을 파악하며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 논문의 목적은 17세기의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의 본질을 살피고 그것을 오늘날의 한국교회와 연관시켜 생각해보는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로 한정하는 것은 경건주의 운동의 발생 초기에 집중한다는 뜻이다. 경건주의 운동은 17세기에 발생해서 18세기에 절정에 이른 운동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와 연관시키는 논의는 그저 짤막하게 다룰 것이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는 내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점이 어느 정도는 자명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가 갱신되어야 한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으리라본다. 경건주의는 그 본질상 갱신 운동인데 이런 면에 초점을 맞추고 경건주의를 살펴 나가다 보면 오늘날 한국교회와 연결되는 점이 상당 부분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두 번째는 이 발제를 준비하는 나의 한계 때문이다. 5년만에 담임 목회 현장에 돌아와서 6개월 정도 지났는데 한국교회 현장을 신학적으로 분석할 여력이 없었다.

 

경건주의가 무엇인가를 밝히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경건주의가 오해받아온 까닭은 살펴야 한다. 다음으로 시대 흐름과 배경을 뜯어본다. 특히 경건주의가 일어난 17세기의 시대 흐름과 배경은 경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다. 어느 사상이나 운동도 그 시대의 영향을 초월한 것은 없다. 사상이나 운동 또는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은 언제나 ‘시대의 아들’이다.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 문제, 시대 흐름과 배경 문제를 사리면서 벌써 경건주의에 대한 통속적인 지식이 많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작업에 이어서 경건주의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살피되 17세기, 그러니까 경건주의의 초기에 초점을 맞춘다. 우리는 그 본질로 보아서 경건주의가 갱신 운동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와 연결되는 점을 간략하게 토론거리를 제시하는 식으로 언급할 것이다.

 

 

2. 오해와 과제

 

위에서 우리는 무분별한 비난과 지나친 찬사를 포함하는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의 단면을 보았다. 그러면 경건주의에 대한 이런 오해는 어디서부터 오는가? 오해의 원인을 무엇보다도 먼저 경건주의란 개념의 혼란에서 찾을 수 있다.[1]) ‘경건주의자’란 말은[1]) 대략 1674년 즈음에 필립야콥 스페너를[1]) 추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면서 처음 쓰였다. 경건주의 운동을 구체적으로 시작했던 스페너 목사는 그 당시 독일 마인 강변에 있는 도시 프랑크푸르트의 수석 목사였다. 1689년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를[1]) 중심으로 라이프찌히 에서 일어난 각성 운동 때문에 ‘경건주의’란 말은[1]) 독일 전역에 쓰이게 되었다. 19세기가 한참 지나도록 경건주의는 주로 스페너와 프랑케에 연결된 신앙 운동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진젠도르프 백작이 이끌었던 헤른후트파 운동도 경건주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에 알브레히티 리츨이 결정적으로 경건주의의 범위를 넓혔다. 세 권으로 된 경건주의 연구서에서[1]) 리츨은 경건주의의 본질을 신비주의적이며 세상 도피적인 신앙 경향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경건주의, 분파주의, 신비주의, 헤른푸트파 사이에 있는 구별이 모호해지고 이 모든 경향이 경건주의라는 이름에 포함되었다. 네델란드를 중심으로 한 “두 번째 종교개혁 운동”[1])이 경건주의에 포함된 것도 이런 정황에서였다. 리츨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영국의 청교도 운동까지 경건주의에 집어넣는 견해도 있었다.[1]) 리츨의 견해는 후대의 경건주의 연구에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리츨 이후에 경건주의의 범위에 대한 리츨의 견해를 반박하고 범위를 좁게 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경건주의 연구는 대체로 리츨의 견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경건주의의 범위 확대가 가져온 결과 중의 하나는 경건주의라는 현상 안에 다양한 교파가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먼저 16세기말과 17세기에서 본다면 루터파뿐 아니라 개혁파도 경건주의에 포함되었다. 개혁파 가운데서도 네덜란드의 경건주의는 정통주의 족에 많이 가까운데 비하여 ‘영국의 경건주의’(청교도 운동)는 훨씬 더 저항적이며 개혁을 지향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파 안에서도 스페너와 프랑케의 경건주의가 루터파의 종파적 자의식을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데 비하여 진젠도르프의 경건주의는 초교파적인 성격이 강하다. 여기에다(뒤에 논하게 될 것이지만) 시대적 범위가 늘어남에 따라 17세기의 감리교 운동도 경건주의에 포함되는 것이다. 경건주의의 범위가 넓어진 것은 그 개념에 대한 이해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며 더 나아가서 개념의 혼돈스러움과도 연결된다.

 

개념의 넓이와 다양함, 그리고 혼돈스러움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 경건주의가 포괄하는 지역적 범위가 넓다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지역적으로 거의 서구 전체를 포괄한다. 17세기 초엽 경건주의가 발생할 때 그 중심이었던 독일과 네델란드와 영국을 비롯하여 로마 카톨릭이 강했던 프랑스와 이탈리아 쪽에도 신비주의적 경건주의 흐름이 있었다. 개혁파 흐름의 스위스, 루터파가 주된 경향이었던 동유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도 경건주의 운동에 포함된다. 그 당시에 새로운 대륙이었던 북아메리카도 예외도 아니었다. 지역적인 넓이는 자연히 경건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입장 차이를 초래한다. 각 나라나 서로 다른 문화권의 연구자는 대개는 자신의 입장에서 경건주의를 보게 마련이다. 무의식적인 이러한 입장 차이는 때로는 의도적인 시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1])

 

지역적인 범위가 넓은 것 말고도 시간적인 광범위함도 오해의 원인이 된다. 경건주의의 시대적 출발을 일찍 잡는 견해를 따른다면 경건주의는 16세기 후반에 벌써 시작된다. 이 때는 종교개혁 시대 직후며 개신교 정통주의가 시작되는 즈음과도 같다. 끝나는 시기에 대해서 말한다면, 경건주의는 시작한 때는 있지만 끝난 때는 없는 운동이라는 주장을 고려할 때 경건주의는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운동이기도 하다.[1]) 제아무리 역사적인 연속성을 갖는 신앙운동이나 신학적 흐름이라고 하더라도 시대적인 배경 구조가 변하면 그 신앙 운동과 신학의 강조점도 바뀌게 마련이다. 같은 표현을 쓴다고 하더라도 담고 있는 속뜻이 달라지게 된다. 같은 의미를 담기 위해서 시대에 따라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게도 된다. 경건주의가 일어나던 초기인 1600년 즈음과 칼 바르트와 에두아르 투르나이젠이 경건주의를 심하게 비판하던 20세기전반은 매우 다른 시대 배경을 가지고 있다.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이 비판하던 ‘경건주의’는 좀 더 세밀한 표현으로 말한다면 각성운동이며, 그것도 자유주의 신학에 밀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굳어진 각성운동의 뒷물 정도였다. 300년이 훨씬 더 넘는 기간의 신앙 흐름을 경건주의라는 한 개념 안에 포괄하는 것이 무리임을 이런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흔히 정통주의란 말이 역사적 맥락과는 상관없이 꽉 막힌 보수주의자를 가리키는 말로 쉽게 쓰이고, 자유주의란 단어가 기존 제도나 관습을 반대하는 진보주의자 모두를 뭉뚱그려 나타낼 때 쓰이는 경우에 우리는 개념의 포괄성이 끼치는 위험을 본다. 그런데 경건주의는 정통주의나 자유주의라는 말보다 훨씬 더 포괄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에 경건주의를 정확하게 관찰하고 규명하지도 않은 채 판단하는 경우가 많았다. 신학사 안에서 그 대표적인 경우를 잠깐만 짚어 보자.[1]) 먼저 우리는 알브레히트 리츨에게서 그런 오해를 본다. 리츨은 세 권으로 된 경건주의 역사에 대한 저술에서 경건주의를 로마 가톨릭적 신비주의에 뿌리를 둔 흐름으로 보았다. 리츨의 신학적 전제로 볼 때 이런 흐름은 부정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윤리 도덕적 가치에 기준을 두고 있는 리츨 신학의 전제로 볼 때 경건주의는 교회를 갱신한 운동이 아니라 교회를 퇴보시킨 운동이었다.[1]) 리츨 당시에 경건주의에 대하여 리츨보다 더 정확하게 본 학자들이 많았다. 사료에 근거하여 더 객관적으로 경건주의를 평가한 연구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당신에 리츨은 워낙 걸출한 ‘신학적 스타’였다. 대중적 인식은 흔히 사실적인 것보다 통속적인 유행을 더 따를 때가 많은 법이다. 그리하여 리츨 이후에는 리츨의 견해가 교회사 통사의 서술이나 일반적 인식을 지배하였다. 경건주의를 곡해하는 데 기여한 신학사의 매듭은 ‘또 한 사람의 신학적 스타’와 연관되어있다. 20세기 신학의 거봉인 칼바르트다. 인간적인 모든 시도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절대 타자성을 강조한 바르트와 그의 동료 투르나이젠이 보기에 경건주의는 인본주의며 혼합주의였다. 경건주의에 대한 바르트 계열의 비판은 경건주의를 역사적으로 차분히 평가할 기회를 또 한 번 박탈해 버린 셈이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경건주의 연구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경건주의가 종교개혁이후에 있었던 개신교 각성 운동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깊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친 교회와 사회 갱신 운동임이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특히 196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연구는 경건주의에 관한 이전의 연구를 많은 부분에서 수정하고 넘어설 수 있는 결과를 내었다.

 

모든 시대 사조가 다 그렇듯이 경건주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이 운동이 일어난 시대흐름과 배경을 알아야 한다. 무릇 본질론은 상황론과 떼어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종교개혁과 정통주의 그리고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흐름과 시대 배경을 살피는 것은 그래서 매우 유용하다. 특히 이런 작업에서 중세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큰 포물선을 그으면서 생각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런 맥락을 주로 경건주의와 관련되는 범위 안에서만 살펴보자.

 

 


3. 시대 흐름과 배경

 

경건주의가 발생한 작은 배경을 든다면 종교개혁에서 정통주의를 거쳐 게몽주의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경건주의는 이 가운데에서 정통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에 자리를 잡는 다고 볼 수 있다. 좁게 볼 때 경건주의는 이른바 ‘죽은 정통주의’를 반대하면서 일어났다.[1]) 경건주의자들이 보기에 정통주의는 종교개혁을 긍정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이 일어난 100여 년이 지나면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시들어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볼 때 정통주의는 화산처럼 폭발한 종교개혁이 정착하면서 제도화되고, 이론적으로 정리되면서 신학화하는 시기였다. 이런 가운데 자연히 종교개혁의 중요관점들이 현실적인 삶에서 멀어지면서 이론적 영역에만 머물게도 되었다. 이런 상황은 종교개혁 후 기독교 안에 형성된 종파 사이의 교리 논쟁과 깊은 관계가 있다.[1])

 

종교개혁 후에 생긴 기독교 안의 세 종파 곧 루터파와 개혁파와 로마 카톨릭은 1555년까지 서로 무력으로 싸웠다. 그러다가 1555년에 아우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가 열리고 여기에서 루터파와 로마 카톨릭이 화해하였다. 이 회의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이래로 가장 처음으로 서로 다른 기독교 종파가 공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이 회의를 통하여 마련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진리만을 인정했던 중세의 단일 구조가 깨지고 진리는 둘 이상일 수도 있다는 길이 열렸다. 1555년을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가 시작된 때로 볼 수 있다. 이 때부터 각 종파는 무력대신 논리로 싸웠다. 교리 논쟁이 극심해졌다. 이런 가운데 교리 논쟁을 위해서 논리적이며 개념적 수단이 필요해졌고 이런 필요성 때문에 루터가 앞문으로 쫓아낸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슬그머니 다시 뒷문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수많은 교리 논쟁을 통하여 교파마다 신조를 만들었고 이로써 거대한 교리 체계가 생겼다. 중세의 스콜라 사상 체계와 비교할 수 있는 ‘개신교 스콜란 신학’이 건축된 것이다.

 

1600년 즈음에 신앙적 정체성이 불확실해지는 상황 곧 ‘경건성의 위기’가[1]) 생긴 것이 이런 흐름에서였다. 경건성의 위기 현상은 이 시기에 유럽전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경건성의 위기는 매우 중요하다. 경건주의의 발생은 이 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인가? 개신교 정통주의 시대에 형성되는 객관적인 거대한 교리 체계가 개인에게 주관적 확신으로 와 닿지 않기 때문에 신앙 정체성이 흔들린 것이다. 이 즈음의 개신교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문제 의식과 정통주의 시대의 교리 논쟁을 잘 알고 또 이해하고 있었지만 거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이런 위기 가운데서 이것을 넘어서고자 일어난 것이 경건주의다. 영국의 청교도 운동, 네델란드의 개혁파 정통주의 안에 있던 ‘두 번째 종교개혁운동’, 독일 루터파 정통주의 안의 갱신적 움직임, 프랑스 카톨릭의 얀센주의 운동, 동유럽 유대교 안의 하씨디즘 운동 등이 1600년 즈음의 경건성의 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신앙적 흐름들이었다.

 

정통주의는 바른 교리 또는 정통 교리가 무엇인지를 확정하고 그것을 지키는 데 가장 큰 관심을 쏟았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교리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 또는 경건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1]) 교리에서 삶으로 강조점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정통주의를 살의 실천과 변화를 무시한 ‘죽은 정통주의’로 보는 것이 잘못인 것처럼, 경건주의가 교리나 신학을 무시하고 체험만 강조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견해라는 것이다. 경건주의는 교리를 무시하거나 버리지 않았다. 경건주의자들에게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 이루어진 개신교적 교리는 기본적으로 전재된 것이었다. 그들은 교리와 삶을 두고 양자택일하지 않았다. 다만 무게 중심을 삶에 두었던 것이다.

 

계몽주의는 경건주의와 더불어 정통주의를 반대하고 나온 운동으로 인식된다. 교리적 편협성을 반대하고 인간 이성의 자유로움과 가능성을 신뢰한 사상인 것이다. 신이 아니라 인간, 계시가 아니라 이성, 관습이나 전통이 아니라 확인하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을 향한 믿음 등은 계몽주의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 데카르트의 말에서 우리는 이런 경향의 고전적 표현을 볼 수 있다.[1]) 계몽주의는 이러한 믿음 아래 이성을 토대로 하여 미래를 낙관했다. 계몽주의와 경건주의는 처음에 서로를 동지로 생각했다. 그러나 곧 서로가 같이 걸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독일에서 1720년대 이후에 본격화된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의 갈등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사이의 일시적 연대와 곧 이은 갈등은 이 둘 사이에 차이점뿐만 아니라 공유점도 있으리라고 추측하게 만든다. 먼저, 쉽게 알 수 있는 것으로서 정통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두 사조는 공통점이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인간 편의 경험과 인식을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계몽주의와 경건주의에서 각기 다른 구조로 인식되기는 한다.

 

계몽주의에서는 이성을 중시하고 여기에 근거를 둔 인간 정신 작용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것으로 나타나고, 계몽주의에서는 교리적인 믿음보다는 개인의 체험과 경험에 근거한 믿음에 더 큰 비중을 두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미래에 대한 낙관이다. 정통주의가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제는 예수의 재림만 남은 것으로 보면서 미래를 닫힌 것으로 생각한 데 반하여 계몽주의와 경건주의는 미래를 열린 것으로 인식했다. 물론 여기서도 두 흐름이 딛고 선 토대는 달랐다. 계몽주의는 인간 이성의 가능성을 근거로 미래를 낙관했고 경건주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경의 약속과 교회사적 사례를 토대로 하여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았다.

 

지금까지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 배경과 흐름에서 작은 배경을 살폈다. 역사적인 사건이나 흐름에는 작은 배경과 큰 배경이 있다.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 흐름에서 더 큰 배경은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에서 근세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변화다.

 

중세에서 신앙은 개인적인 확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유일하고 보편적인 교회와 단일한 진리를 구현하고 있는 제도적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이 구원을 담보하는 것이었다. 신앙은 구원의 제도에 소속되는 것이며 이것을 체계화한 것이 성례전이었다. 그러나 십자군 운동과 그 결과 발생한 르네상스 시대를 시작으로 중세가 해체되기 시작했고 삶과 신앙의 틀이 바뀌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오늘날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서 일반적으로 쓰이는 ‘구조틀의 변화’[1])에 버금가는 지각변동이 그 당시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그렇다고 인정한 객관적 신앙 구조로는 더 이상 만족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자신에게 확신으로 와 닿아야만 했다. 주관적 신앙확신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집단적 소속감보다 개인적 인격성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객관성에서 주관성으로 이동하는 이런 변화는 중세에서 계몽주의로 이전하는 과정을 대표하는 경향이다.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이런 과정에서 나타난 근대적 현상이라고 파악해야 한다.

 

시대 흐름과 연관하여 하나 더 말해야 할 것이 있다. 중세는 교회적 영역과 세속적 영역이 분리되지 않은 사회였다. 교회와 국가, 신앙과 세속의 삶은 늘 하나로 짜여 있었다. 이 두 영역이 본격적으로 분리되는 것은 계몽주의에서다. 그러니까 경건주의는 교회적 영역과 세속 사회가 분리되기 전 마지막 시대에 일어난 운동이다. 바야흐로 이 두 영역이 나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던 때였다. 경건주의가 사회적 영역을 무시하고 개인의 내면으로만 침잠한 운동이라는 통념이 잘못된 것임은 이 본격적 배경 구조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교회를 갱신하자’는 것은 동시에 ‘사회를 갱신하자’는 요구를 담고 있는 것이다. 경건주의 운동이 교회와 세속 영역 모두에 영향을 끼친 것은 경건주의가 일어난 이러한 시대 특징 때문이기도 한다.

 

그러면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큰 흐름 속에서 정통주의를 반대하며 신앙과 삶의 갱신을 외치며 일어난 경건주의 본질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4. 경건주의 본질

 

경건주의는 본질상 갱신 운동이다. 기독교 역사에서 갱신 운동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경건주의 말고도 많았다. 경건주의가 추구한 갱신의 구체성과 독특성을 파악하는 일은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와 관련시킬 때에만 가능하다. 경건주의의 범위를 좁혀야 하는 것은 이런 이유 말고도 앞서 말한 경건주의 개념의 폭넓음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사에 나타난 여러 흐름의 본질을 파악하려면 그 운동이 일어나는 초기에 그 운동의 진행을 규정할 본질적인 요소가 이미 배태되어 있고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 본질 논의에서 초기에 초점을 맞추는 까닭이 이것이다.

 

경건주의의 발생을 말할 때 우리는 뚜렷하게 드러난 한 사람을 접하게 된다. 경건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스페너다.[1])경건주의를 교파에 따라 나눈다면 루터파 경건주의와 개혁파 경건주의로 나눌 수 있는데 경건주의가 후대에 인식되고도 경건주의적 흐름이 주로 이어졌던 것은 루터파 중심으로였다.[1]) 스페너를 초점으로 경건주의 본질을 다루는 변명이다. 스페너가 쓴 중요한 책 한 권이 또 경건주의 발생의 중심에 위치한다. 『경건한 요청』이란 책이다.[1]) 경건주의의 출발에서 1675년은 매우 중요하다. 이유는 이 해에 『경건한 요청』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기획서다. 스페너는 처음에는 1675년 봄에 발간된 요한 아른트의 복음서 설교집 서문으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독자들의 요청 때문에 이 서문이 같은 해 가을에 『경건한 요청』이란 제목을 달고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경건주의 연구자들은 이 책을 ‘경건주의의 방향 제시서’(Die Programmschrift des Pietismus)라고 부른다. 이 책은 교회사에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이 책의 출판을 통하여 경건주의가 본격적으로 불타올랐고, 이 책 안에 그 이후로 진행되는 경건주의 운동의 중요한 관점이 거의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경건주의 전반을 시야에서 잃지 않으면서 그러나 주로 경건주의가 발생한 17세기 초점을 맞추어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본질을 다루어 본다.

 

 

1) 갱신해야만 하는가?


이 물음을 다르게 표현하면 ‘갱신은 필요한가?’ 곧 갱신의 필요성을 묻는 것이다. 경건주의자들은 갱신이 시급하고 절박하다고 보았다. 갱신하려는 열망은 그 이전에 위기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현재의 상태를 위기로 진단하고 이를 심각하게 깨닫는 정신적이며 영적 각성 상태가 먼저 있어야 갱신을 향한 움직임이 이는 것이다. 1618-1648년의 30년 전쟁을 겪고 나서 황폐해진 17세기 독일에서 갱신은 일반적인 주제였다. 그러나 갱신의 필요성을 느끼는 강도에서 구체적인 갱신운동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했던 곳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개혁파 교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로스토크였다. 이곳의 성직자 테오필 그로쓰게바우어는 1661년에 『황폐한 시온에서 외치는 파수군의 소리』란 책을 썼다.[1]) 그로쓰게바우어는 이 책에서 당시의 설교를 비판한다. 그렇게 설교가 많은 데도 신앙적 회심과 구원의 열매가 적은 것을 지적했다. 설교는 많이 하는데 교회가 영적으로 더 피폐해가고 신앙이 타락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면서 거듭남을 강조했다. 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페너는 1662년에 튀빙엔에 머물 때 그로쓰게바우어의 책을 읽었다. 스페너는 자서전에서 교회의 타락과 갱신의 필요성을 보는 눈을 이 책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에서 교회의 타락한 현실과 그 위기 상황을 절박하게 인식하고 있다. 크게 서문과 본론으로 나눌 수 있는 『경건한 요청』에서 본론은 다시 셋으로 나뉘는데 그 첫 번째 덩어리가 타락한 교회 현실에 대한 진단이다.[1]) 스페너가 보기에 타락은 바닥까지 미쳤다. 스페너가 서문의 처음을 예레미야 9:1의 통곡[1])으로 시작하는 것도 타락의 심각성을 깊게 인식한 때문이다. 위기를 각성하는 것은 비교 대상이 있을 때에 가능하다. 경건주의자들이 그 당시의 교회와 시대 상황을 위기라고 진단한 것은 무엇에 비교했기 때문인가? 가깝게 종교개혁이며 멀게는 초대교회였다. 경건주의 운동은 미완성인 종교개혁을 완성하려는 운동이었다. 교리면에서는 완성되었지만 그 교리를 삶의 현장에 실천하지 못한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하여 종교개혁 정신을 구현함을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경건주의 운동이 목표로 삼은 또 다른 초점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급진적 경건주의 운동 집단에서 초대 교회의 이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점에서 경건주의 운동은 ‘근원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2) 갱신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갱신은 가능한가?’ 곧 갱신의 가능성을 묻는 것으로 바꿀 수 있다. 교회사를 보면 위기를 각성하기는 했지만 현실 교회나 사회의 갱신 가능성을 포기하고 은둔하거나 사회를 등진 운동이나 집단도 많았다. 경건주의자들은 전반적으로 갱신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경건주의 안의 여러 집단에서 갱신 가능성의 강도는 각각 다르다.


갱신의 가능성을 가장 적게 가진 집단은 북미 대륙으로 이주한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럽에서 갱신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새로운 땅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미래의 가능성을 기대한 사람들이었다. 그 다음은 기성 교회에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 급진적 경건주의자들로서, 제도적 교회가 갱신될 가능성은 부정했지만 사회의 갱신 가능성은 인정했다. 이들은 구원받은 거룩한 성도들만의 집단을 만들어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고 믿고 작은 모임들을 만들었다. 가장 긍정적으로 갱신의 가능성을 인정한 사람들은 교회적 경건주의 자들이었다. 이들은 교회가 타락했지만 하나님이 아직도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를 치료하고 사용할 것이라고 믿었다. 갱신 가능성에 대한 강도는 달랐지만 경건주의 전반에 걸쳐서 갱신의 가능성은 분명한 주제였다.


스페너의 『경건한 요청』 본문의 두 번째 덩어리에서 교회의 미래를 전망하면서 낙관론을 편다.[1]) 하나님이 분명히 교회에 더 나은 상태를 허락하시리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경건주의가 낙관적인 역사관을 가진 것을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이 땅에 희망의 시대가 온다는 기대는 역사의 발전을 믿는 그 당신의 일반적인 계몽주의적 사상 구조와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경건주의는 분명히 성경적인 근거에서 낙관론을 가졌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경건주의 안에 그 당신의 역사관 구조를 감싸안을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는 것이다. 정통주의는 현재에서 예수의 재림이 오기까지 희망적인 시대가 있을 것을 믿지 않았다. 말하자면 종말론에서 정통주의가 전 천년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데 반해서 경건주의는 후 천년설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래가 희망적이라는 확신이 있는 곳에서 실천의 동력이 생기는 법이다. 급진적 경건주의 집단에서 나타나는 강력한 헌신은 이런 사고 구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스페너도 교회의 미래를 낙관하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실천과 행동을 강조한다. 믿음을 말할 때도 이 믿음은 언제나 실천과 뗄 수 없이 연관된 하나임을 강조하는 것이 경건주의의 독특한 믿음 이해다. 믿음을 삶의 현장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의 실천을 벌써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이런 견해는 『경건한 요청』의 서문 전체를 꿰뚫고 있다. 스페너는 서문에서 실천이 중요하다고 거듭 힘주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교회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처방약과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그것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 교회의 문제를 이론적으로 또는 신학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이 스페너의 목적이 아니었다. 독자들을 교회 갱신에 참여하도록 호소하여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스페너는 서문의 삼분의 일 분량을 “우리 같이 …합시다”라는 표현으로서 세운다.[1]) 경건주의가 보는 신학은 그래서 철저하게 실천 지향적이며 목회 현장을 겨냥하고 있다. 당시 정통주의에서 신학이 목회 현장과 멀어지고 현학적으로 흐르는 것을 비판하면서 스페너는 신학 교육의 갱신을 제안했다. 스페너의 이 제안은 스페너의 후원과 영향으로 할례 경건주의를 이끌었던 할례의 교육 제도에서 현실적으로 실현되었다.[1]) 그렇다면 이렇게 실천을 강조한 경건주의는 인간의 자기 노력을 근간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실천 체계인가? 갱신의 주체는 누구인가?

 


3) 누가 갱신하는가?


갱신의 주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경건주의적 사고와 계몽주의적 사고가 구분된다. 갱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 경건주의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입장이었다. 스페너는 갱신을 교회와 사회전반을 포괄하는 일반적인 갱신과 좁은 영역에서만 가능한 부분적인 갱신으로 나누었다.[1]) 일반적인 갱신은 세속 정권의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추진해야 마땅한 것인데 이 두 계층이 타락하여 갱신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현재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일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부분적이다. 영적으로 각성한 사람들을 모아서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준비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다. 스페너의 생각에서 갱신의 주체는 하나님이며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서 행동하는 참여자며 담당자다.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오고야 맙니다. 우리는 단지 기다릴 뿐입니다.”[1])

 

사람은 갱신의 주체인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 또는 담당자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위탁을 받아 갱신을 담당하는 ‘위탁된 주체’다.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주체인 동시에 개인의 객체이기도 하다.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변화시키려던 운동이었다. ‘사람을 변화시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자’[1])는 것이 경건주의 중요한 관점이었다. 변화하지 않고는 갱신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경건주의의 갱신론은 제도의 갱신이나 제도적인 조치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를 갱신하려고 했던 정통주의의 갱신론과 뚜렷이 구분된다.

 

사람 변화의 핵심에는 경건주의의 구원론이 자리잡고 있다. 경건주의는 마틴 슈미트가 말한 대로 중생론을 그 핵심에 품고 있다. 중생은 그리스도인의 출발이며 기초다. 이것에 근거해서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갱신될 수 있다. 이렇게 갱신되는 과정이 성화의 과정이다.[1]) 이러한 구원의 모든 과정은 참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Der wahre lebendige Glaube.)이란 표현은 스페너가 삶의 실천이 없는 그 당시의 신앙 형태를 비판하면서 그런 믿음과 구별하면서 쓴말이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믿음과 열매, 믿음과 행함, 믿음과 윤리가 같이 있다. 이 둘은 하나며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참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생-갱신-성화의 구원 과정이 온전하게 이루어진다.

 

경건주의 운동은 성화론에 강조점을 둔 신앙 운동이며 신학 체계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이런 성화론 강조는 루터가 말한 믿음으로만 얻는 구원과 충돌하지 않는다. 경건주의자들은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루터파 안에서 경건주의자들은 끊임없는 갱신과 성화를 강조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론을 주장하는 자신들의 생각이 루터의 믿음이해를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루터의 저 유명한 로마서 서문은 경건주의의 구원론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일부 사람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인간적인 환상이나 꿈일 뿐이다. 그들은 믿음에 대해서 많이 듣고 말해서 익숙하지만 삶의 변화도 없고 선행도 따르지 않으며 오류에 빠져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선행을 해야 경건해지며 구원을 얻는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요한복음 1장에 있는 것처럼 우리를 변화시키며 하나님으로부터 새로 태어나게 한다. 옛 아담을 죽인다. 우리를 마음과 기분과 정서와 모든 세력에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성령이 임하게 한다. 오! 이런 믿음은 살아있으며 활동하며 일하며 강력한 것이다. 믿음이 선행을 중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은 선행을 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묻기 전에 믿음은 벌써 선을 행하며 또 언제나 선을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선행을 하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더듬거리고 두리번거리며 믿음과 선행을 찾는다. 그러나 믿음과 선행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믿음과 선행에 대하여 장황한 말로 설교하며 지껄인다.”[1])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거듭남과 갱신을 통한 성화를 강조하는 경건주의는 평신도 운동을 지향하고 있다. 개인의 신앙 강화를 강조하는 곳에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의 활동이 살아날 수밖에 없다. 진젠도르프가 이끌었던 헤른후트파 운동에서 이점이 특히 두드러진다.[1])

 

이 지반에서 평신도 선교사들이 독일 안의 다른 지역뿐 아니라 해외의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경건주의 운동 안에서 특히 여성의 지도력이 강화되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여성의 활동은 교회적 경건주의에서보다는 급진적 경건주의 집단에서 훨씬 더 강했다.[1]) 평신도 지도력의 강조는 사회적 갱신과도 연결된다. 사회의 여러 구조 속에서 구체적인 직업을 가지고 사는 평신도가 영적으로 각성되면 자연히 사회의 각 현장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는 이런 실례 가운데 하나를 할례 경건주의에서 본다.[1]) 프로이센 제국의 엘리트 교육을 담당했던 할례의 교육 체계는 경건성과 전문성의 두 기둥을 교육의 축으로 삼고 있었다. 이 곳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이 프로이센 제국과 독일 전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4) 무엇으로 갱신하는가?


갱신의 도구는 무엇인가? 경건주의는 신비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했다. 갱신은 신비적 성령 운동으로 되는가? 경건주의는 또 종종 도덕적 운동으로 취급되었다. 갱신은 윤리 도덕적인 실천으로 되는가?

 

경건주의는 무엇보다도 강하게 성경에 중심을 두고 있는 운동이다. 스페너는 『경건한 요청』의 본론 세 번째 덩어리에서 교회를 갱신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여섯 가지 방법을 제시하면서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이 살아 움직여야 한다고 말했다.[1]) 그러나 하나님 말씀은 성령께서 역사 하시는 곳에서 점화된다.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 스페너는 자신을 신비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신비주의를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하나님 말씀 없이 직접 하나님께 가려는 시도라고 정의하면서 이를 거부했다. 하나님 말씀이 언제나 필수적이다. 스페너의 갱신 계획은 성령을 통한 갱신이다.[1]) 성령의 역사는 기록된 말씀과 분리되지 않는다. 단순한 도덕적 윤리성도 이런 점에서 갱신의 도구가 될 수 없다.

 

믿음에 근거하여 거기에서 나오는 윤리만이 갱신을 위해 이바지할 수 있다. 종교개혁이 성경을 재발견했다면. 성경을 모든 평신도들이 읽을 수 있도록 인쇄하여 나누어주고 또 읽도록 격려한 것은 경건주의였다.[1]) 그러나 성경을 영의 활동과 실천적 행동과 결합하여 역동적으로 이해했다. 반면, 오히려 정통주의 안에서 형성된 축자영감설이 성경의 역동적 이해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갔다. 경건주의 운동에서 설교의 갱신에 강한 관심이 있던 것도 여기에 연결된다. 스페너가 교회 갱신의 여섯 가지 방안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이 설교의 갱신이었다. 스페너에 따르면 강단은 자신의 학식이나 유능함을 뽐내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단순하게 그러나 강력하게 전하는 곳이며 이를 통하여 회중의 삶 전체가 변하게 하는 곳이다.[1])

 

 

5) 어디에서 갱신이 일어나는가?

 

갱신은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일어나며 시작되는가? 급진적 경건주의자들은 기성 교회를 포기했다. 그들은 자기들만의 배타적인 모임을 만들었다. ‘교회 밖의 작은 교회’(Ecclesiola ex ecclesia)를 만든 것이다. 반면 교회적 경건주의자들은 교회를 갱신하기 위해 제도적 교회 안에서 목회자의 지도 아래 운영되는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 이른바 ‘경건 모임’(Collegium pietatis)이라고 일컫는 모임이었다. ‘교회 안의 작은 교회’였던 것이다.[1]) 이 두 형태의 작은 모임 또는 경건 모임은 그 성격과 지향하는 것에서 매우 다르다. 교회 밖의 작은 교회는 배타성을 띠고 내부자들만이 참여하는 닫힌 모임을 지향한다. 반면 교회 안의 작은 교회는 포괄성을 가지고 외부자들에게 개방된 열린 모임을 지향한다.

 

그러나 이 두 형태의 경건 모임 구조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발적인 작은 모임의 역동성을 그 기초로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경건주의적 교회론의 중심이 있다. 이 특징은 또 중세와는 구별되는 근대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중세의 교회는 공적인 모임이며 제도적인 조직이다.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소속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555년 이후에 기독교 안에 있는 종파의 복수성이 법적으로 인정되면서 신앙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사항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신앙은 공적인 것에서 개인적인 것으로 되었고, 주어진 것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으로 되었다. 작은 모임은 이러 근대적인 특징에 걸 맞는 것이었다. 개인의 신앙 체험과 확신을 확인하고 강화할 수 있는 마당도 이런 모임에서야 가능했다. 제도적인 교회 안에 작은 모임이 정착하게 된 것은 교회사적으로 경건주의에서 처음이었다.[1]) 스페너는 이런 모임에 갱신을 걸었다. 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인답게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작은 단위로 모아 먼저 양육하여 이들의 신앙이 성숙하고 삶이 변하게 하는 것이다. 바로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 그러면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이들의 본을 보고 따를 수 있게 된다. 『경건한 요청』의 서문에서 스페너는 갱신의 전체 구상을 이렇게 요약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 성장에 필요한 것을 기꺼이 하려는 사람들을 위하여 우리를 (목회자들: 역자)헌신합시다. 목회자 각자가 개교회에서 다른 사람보다도 이러한 사람을 먼저 양육하고, 이들의 구원의 분량이 점점 성장하여 나중에는 이들의 본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도록 일합시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잃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은혜로써 점점 가까이 이끌 수 있게 되고 결국에는 그들도 구원시킬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목회자가 자신의 믿음 성장에 관심이 있는 이런 사람들을 먼저 돕고 이들의 믿음 성장에 필요한 모든 일을 다 한다는 것, 나의 모든 제안은 거의 전적으로 이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되어서 그래서 기초가 놓이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을 위해 쏟는 노력이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1])

 

지금까지 살핀 경건주의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경건주의는 거듭남과 영적 각성을 근거하여 갱신을 추진하고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운동이다.
2.경건주의는 경험적 신앙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삶의 변화와 실천을 강조하여 선교를 지향하는 평신도 운동이다.
3. 경건주의는 경건 모임(교회 안의 또는 교회 밖의 작은 모임)을 근거하여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이다.
4.경건주의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밝혀지는 성경을 근거하여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 운동이다.

 

5. 한국 교회와 연관된 질문들

 

오늘날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믿음은 좋은데 생활은 엉망’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수적 세력은 큰데 거기에 걸 맞는 삶의 실천이 부족하다. 한국 교회에는 한 세대 전과 비교할 때 신학적 수준은 발전했고 신학적 지식과 저작은 풍성해졌다. 설교가 넘치고 신앙 서적이 홍수다. 신앙에 관련된 세미나가 도처에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변화는 어떤가? 사회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행태를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독교의 본질을 삶의 변화에서 보고 실천적 변화를 추구한 경건주의 운동의 강조점이 한국 교회에 필요할 것이다.

 

대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권이 부정적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 중 핵심이다. 이기적인 개교회(성장)주의가 거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이미 형성된 교권의 구조를 꿰뚫어보는 전문 교계 정치꾼이 하나님의 백성인 회중의 통전성을 해치고 있다.

 

대교회 위주의 목회 정책과 세력 불리기 식의 교단 확장은 하나님의 백성을 통속적 민주주의의 대중으로 전락시키고 있다. 작은 모임을 통하여 평신도 개개인의 역동성과 책임성을 강조한 경건주의의 관점은 한국 교회의 갱신을 위해 깊이 고찰해야 할 주제다.

 

이른바 영성이 유행이다. 신학적 비평을 거칠 겨를도 없이 카톨릭의 영성 프로그램이 안방까지 들어와 있다. 목회 현장에서 너도나도 외치는 영성이 이젠 의미 없는 단어가 되어버린 듯하다. 동방 교회와 카톨릭, 오순절 운동과 하나님의 정의를 강조하는 집단 등 거의 모든 기독교 집단이 한결같이 영성을 말하지만 표현만 같지 내용은 영성이란 단어가 유행하기 전에 각자가 주장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개신교 영성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개혁자들이 말했고 100여 년 후에 변하는 시대 속에서 교회와 사회 갱신을 위해 노력했던 경건주의가 또 강조했던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기’가 기독교 영성의 핵심 아닌가? 하나님 말씀이 이 시대의 해답 아닌가?

 

 


6. 맺는 말

 

경건주의는 1600년대에 유럽에서 일어난 교회와 신앙 갱신 운동으로서 종교개혁 이후에 일어난 개신교 각성 운동 가운데 가장 크고 깊게 오늘날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운동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경건주의에 대한 오해의 원인이 대부분 경건주의 개념이 광범위하기 때문에 생긴 것임을 보았다. 이것과 연관하여 경건주의가 일어난 시대의 흐름과 배경을 살폈다.

 

경건주의는 크게 보아 중세에서 근대의 계몽주의에 이르는 포물선에 위치한 운동이며 작게는 종교개혁, 정통주의에서 계몽주의에 이르는 흐름에 위치함을 확인했다. 여기에 근거해서 그 본질상 갱신운동인 경건주의의 본질을 온전한 성화를 지향한 성결 운동, 선교를 지향한 평신도 운동, 신앙의 역동성을 중시한 작은 모임 운동, 설교와 신학 갱신을 지향한 하나님 말씀운동으로 규명했다.

 

한국교회의 갱신이 시급한 때다. 교회가 사회 개혁을 겨우 뒤따라가는 꼴이 되어서는 이 땅의 역사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경건주의와 진지하게 대화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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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트만과 그의 스승 리츨)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조성노 박사 (현대신학연구소장)


서 론


불트만은 마부르그의 자유주의 신학자 헤르만(리츨학파의 대표적인
신학자)의 제자이다. 불트만은 바르트에 이어서, 그리고 본 훼퍼의
영향력이 나타나기 전까지 유럽 신학계의 판도를 지배한 사람이었
다. 바르트의 관심이 하나님의 전적인 타자성에 집중된 데 반해 불
트만의 관심은 계시의 운반체인 성서에 집중된다. 그래서 그는 성
서의 메시지를 어떻게 현대인들에게 전달하고 또 의미를 갖게 할
것인가? 하는 성서해석의 방법을 연구하는데 온 정열을 다 바쳤다.
불트만은 성서 기자들이 당대사람들에게 계시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했던 사고 패턴은 오늘날의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성서가 현대인들에게도 여
전히 이해 가능한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계시의 핵심적 메
시지와 그 메시지를 처음 수용했던 고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분리하
는 작업을 해야 하고 다음은 고대인들의 사고 구조에서 놓여난 그
계시의 메시지에다 다시 현대인들의 사고 패턴을 옷 입힌 다음 이
시대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신앙이 발생될 수 있는 만남이란 언제나 말
씀하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을 듣고 예! 하고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들음이라는 것은 신앙
이전에 우선 의미 있는 접촉이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불트만은 신과 인간의 진실된 만남을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현존재 분석을 시도한다. 이를테면 오늘날의 인간은 무엇이며 자신
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현대인은 지금 어디에 서 있으며 어떤
상황 속에 처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이런 물음들에 답하
기 위한 수단으로 실존철학, 특히 마르틴 하이덱거를 택한다. 불트
만이 굳이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인 하이덱거를 선택한 이유는 그의
실존철학이 인간의 현 존재성을 가장 정직하고 명확하게 분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향해 던지는 물음에 대해서도 가장
타당한 답변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하이덱거의 무신론적 입장이 자기가 참여하고 있는 변증법적 신학
의 신이해에도 오히려 부합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변증법적 신
학에 의하면 신이란 인간에 의해서는 결단코 인식될 수 없고 오직
신의 자기 계시에 의해서만 인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불트만에게는 철학적 견지에서는 결코 신에 관해 말 할 수
없고 신을 발견할 수도 없다는 하이덱거의 무신론이 오히려 진실
한 인간 고백으로 들렸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불트만은 하이덱거
의 현존재 해석학을 인간에 관한 가장 적절한 인식 수단으로 평가
하여 그의 신학적 인간 이해의 틀속에 적극 수용한다. 일단 하이덱
거의 도움으로 현존재 분석의 과제를 달성하고 난 불트만은 또 하
나 중요한 문제인 하나님 말씀에로 주의를 옮긴다.

 

성서의 하나님은 제1세기 인간들이 살고 있던 문화적 틀 내에서 그
리고 그들이 처해 있던 고유한 상황 내에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오
늘 우리는 제 1세기의 상황과 제 1세기의 세계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전달 수단인 성서와 하나님의 본래적 메시
지를 분리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불트만은 바로 이 하나님 말씀의
내용과 그 말씀의 표현 수단의 분리 과정 을 비신화화
(Entmythologisierung)라고 부른다. 이렇게 현존재 분석과 하나님
말씀에 대한 비신화화 작업이 이룩된 후 비로소 불트만은 하나님의
말씀의 재해석이다. 따라서 불트만신학의 구도는 세가지 측면, 즉
현존재 분석과 비신화화, 그리고 말씀의 재해석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1. 현존재 분석


불트만이 절대 의존하고 있는 하이덱거(1927년 &quot;존재와 시간&quot;에 나
타난 현존재 분석을 의미함)에 의하면 현대인이 직면한 삶의 가장
기본적인 가능성은 본래적 실존과 비본래적 실존이다. 본래적 실존
이란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모든 잠재력을 주체적으로 발전시키는
길을 선택하는 삶을 말한다. 그리고 비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
신을 이 세계(사물)와 집합적인 대중에게 내 맡겨 그것들에 의해
자신이 형성되고 영향받게 하려는 삶을 가리킨다. 하이덱거는 현대
인의 대부분이 후자의 길, 곧 자신의 개별적 인격성의 책임을 포기
하는 비본래적 삶을 사는 것으로 풀이하였다. 이유는 그것이 훨씬
살기가 쉽기 때문이다. 비인격화된 대중의 일원이 되어 그런 삶의
방식에 만족하고 그런 가치관에 안주하여 사는 일이란 결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런 삶에 비해 자결의 길,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하기란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본래적 실존이란 인간이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가능성들을 선택하는데 대한
완전한 책임을 져야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인간은 누구도 이 두 유
형의 실존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을 피할 수 없
다. 선택하지 않으려는 결정도 역시 비본래적인 실존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 된다. 이리하여 결국 인간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체
적으로 형성해 나갈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들과 사물들에 의해
형성되어 가도록 내 던져 버릴 것인지에 대해 선택해야 하는 존재
가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번에 결판나는 선택은 아니다. 오히려
삶은 두가지 실존 가운데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다. 따
라서 모든 현재는 자유로운 결단의 순간이다. 그리고 이같은 지속
적인 선택의 필요성이 삶의 주요한 성격인 불안을 조장한다.

 

불트만은 역사내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요 특징을 불안이라 생각
하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의 영원한 긴장 가운데서 실존한
다. 매순간마다 인간은 세계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개별적
인 인격을 상실하거나 아니면 모든 안전을 버리고 미래의 자신을
던져 본래적 존재를 성취하거나 해야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느끼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비본래적인 실존을
선택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자신을 세계에 내어 줌으로써 보다 확
실하게 사물의 지배 아래로 떨어질 뿐 이다. 그리고 주체성을 상실
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사물이 그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인간은
참다운 자아로 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게 된다. 다른 한편 자신에게
열려져 있는 두가지 선택의 길 가운데서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택
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이며 그는 어떻게
자신의 삶의 길을 실현해 가는가.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
은 마르틴 하이덱거의 경우는 일단 인간이 본래적 실존의 길을 선
택하고 나면 스스로 본래적 삶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고 보는 반면에 볼트만은 변증법적 신학자 답게 인간이란 근본적으
로 타락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는 본래적인 실존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본다. 어째든 볼트만은 본래적 실존의 성취는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이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것은 곧 자유를 위한 결단을 의미한다. 이는 두가지 측면에서 그러
한데 첫째는, 이 세상으로 부터 즉 사물에 대한 예속상태로 부터
그리고 집합체의 비인격적 구조로 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에 대한 완전한 책임을 스스로 지겠다
는 결단이다. 둘째, 본래적 실존을 위한 선택은 결국 미래를 위한
결단이기 때문에 과거가 인간에게 가져다준 온갖 예속으로 부터 자
유롭게 되는 결단을 의미한다. 그것은 과거의 실패와 죄책,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종속되어 참다운 자아로 부터 소외된 상태를 모두
내어버리는 선택이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에 전념하겠
다는 결단이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고 회개를 촉
구한 것도 바로 인간에게 열려있는 새 가능성에 대한 선언이후 동
시에 그 가능성에 대한 자신을 개방할 때에만 비로소 참 인간으로
서의 구원이 있음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국 인간에
게 열린 새로운 가능성이다. 인간은 도래하는 것에 비해서만 참
자기로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볼트만이 이해한 성서 특유의 인간
관이다. 그래서 나를 얽어매고 있는 낡은 사슬을 끊고 새 세계로의
탈출을 종용하는 말이 바로 예수의 회개하라는 외침이고 그것이 곧
본래적 실존을 위한 결단의 촉구라는 것이다.

 

 

2. 성서의 비신화화


현대인들의 성서이해에 대한 불트만이 가지는 주요 관심은 신약의
표상 세계와 현대인의 표상세계의 깊은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집중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현대인들의 세계
상은 자연과학과 기술에 의해 이해되는 합리적이고도 차안적인데
비해 성서는 모두가 신화적 세계상에 기초하고 있다. 성서는 이 세
계를 삼중구조로 이해한다. 위는 하늘, 아래는 지옥, 중간은 신과
사탄의 싸움터로서의 이 세상이다. 불트만은 이렇게 말한다 &quot;신약
성서의 세계상은 신화적인 세계상이다. 심지어는 신약성서 선포의
본래적 내용을 이루는 구속 사건의 설명도 바로 이 신화적 세계상
에 일치한다&quot;. 그러니까 신약성서는 그 내용의 핵심적인 구속사건
조차도 신화론적 표상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신약에 나타나
는 그리스도상을 보자. 우선 그는 선재 했던 신적인 존재이다. 그
러다가 땅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십
자가에서 모든 죄의 대가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된지 사흘만
에 다시 살아나시고 본래의 하늘로 되돌아 가셨다가 이제, 죽은 자
의 부활과 심판을 통해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들기 위해 하늘의
구름을 타고 오게 된다. 불트만에 의하면 이러한 그리스도상은 신
화론적 진술로서 영지주의적 구속신화와 유대교적 묵시문학의 영향
을 받아 형성된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론 뿐만 아니라 종말론도
마찬가지이다. 즉, 종말이 시간적인 우주적인 대 몰락의 드라마로
표상 된다. 이를테면 천상의 세력과 악마세력간의 최후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후에 우주적 종말의 심판자가 천사를 거느리고 나타나
서 죽은 자들을 다살려 내어 어떤 이들은 구원하고 어떤 이들은 저
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불트만에 의하면 미래의 이런 사건이 실재로 일어날 것이라고 소박
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주 어리석은 것이다. 그는 성서의 신화론적
종말은 예수의 재림이 신약의 기대처럼 곧 도래하지 않았고 세계
역사는 계속되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되어 갈 것이라는 단순한 사
실을 통해 이미 근본적으로 낡은 것이 되고 말았다. 불트만은 예수
의 부활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화적 사건이라고 한다. 오늘 우
리로서는 신화적 세계관이 지배하던 세계에 살았고 신화적 경험에
일치되게 예수를 해석했던 제자들의 부활절 신앙에 대해서만 알 뿐
이 라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세계상은 역사적이며, 자연과학적인
세계상 속에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결코 이해될 수 없는 황당한 얘
기다.

 

불트만은 전기와 라디오를 이용하고 아플 때 현대의학에 의존하면
서 동시에 신약에 나타난 악마와 영들의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하며 그리스도교의 선포가 현대인들에게 신화적 세계상
을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아니라 의미도 없다고 했다.

 

성서의 신학적 세계상은 그 자체가 특별히 기독교적인 것일 수 없
는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세계상일 뿐이다. 이렇게 현대인의 세계
상과 자기 이해가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세계와 마찰을 일으킨다면
신약의 증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불트만에 의하면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신약성서의 복음을 이상주의적 윤리(리츨, 하르
낙)나 신비적으로 채색된 종교적 정서, 혹은 감정(쉴라이마허)으로
환원시켰다. 그러나 신약은 인간의 종교성이나 윤리성에 대해 말하
는 책이 아니라 신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셨다는 구
속 사건에 관해 말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결정적 구속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하나의 종교적이고도 윤리적인 모범이나 선
생으로만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켰다고 불트만은 비난
한다.

 

여기서 불트만은 복음이 현대인들에게 이해되게 하기 위해서는 현
대적 사고 방식으로 신약의 신화론적 표상을 비판하고 비신화화하
는 방법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고 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화의 본
래적 의도는 객관적인 세계상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그의 세계속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를 표현하
고자 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성서의 신화는 우주론적이 아닌 인간
학적으로 실존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
의 입장에 반하여, 칼 야스퍼스나 폴 틸리히 등은 초월에 관한 한
실제로 암호나 상징으로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보아 불트만의
비신화화 작업을 반대한다. 신화의 의미를 밝히는 실존론적 해석이
결국은 신화가 지니는 비이성적 깊이를 대상화 함으로써 마침내 신
화가 지니는 깊이의 차원을 파괴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도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직접적이고도 문자적으로 받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는 점에서 불트만과 일치한다. 불트만에 있어
서의 신약성서의 사신은 비신화화되어야 한다. 현대인의 사유는 이
미 신약성서를 지배하고 있는 신화적 사유란 의식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고 더우기 믿을 필요도 없었다. 그것이 곧 그들의 이성
적 사유, 과학적 사유를 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로서는 이
세계와 삶의 온갖 수수께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화론적인 방법
이 최선의 해석학적 도구였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 자연과학적인 사유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성서의 신화적 표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
하며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의 결과는 정신 분열증일 뿐이다. 그렇
다면 비신화화의 가정은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불트만에 따르
면 신화의 제거를 통해서는 비신화화가 불가능하다.

 

만약 비신화화가 성서의 신화적 표상 일체를 거부하는 것이라면 결
코 새로운 것일 수 없다. 신화 제거의 작업은 이미 19세기의 급진
적인 성서학자들에 의해서도 상당한 수준까지 시도되었기 때문이
다. 그럼에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신화를 해석하려 하지 않고 제거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서 불트만은 자신이 쓰고 있는
비신화화(Entmythologisierung)란 용어 자체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칫 이 개념이 신화를 제거한다는 뜻으
로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여간 불트만이 말하는 비신화화론
의 과제는 신화의 제거가 아니라 신화의 실존론적 의미를 밝혀내는
해석학적 작업이다. 따라서 불트만의 비신화화론은 신약의 신화론
적 진술을 비판한다는 부정적인 의도보다는 오히려 그 진술들 속에
있는 실존이해를 해명한다는 긍정적인 외도를 가지고 있다. 신화는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되고 설명되고 이해되어야 할 대상이다.
그래서 불트만은 자신의 비신화화론을 성서에 대한 실존적 해석이
라고 한다. 그러면 성서의 신화적 진술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야 하
는가?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신화속의 하나님의 메시지인
케리그마는 무엇인가?

 

 

3. 말씀의 재해석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약성서를 향해 올
바로 질문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약성서가 대답
하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불트만이 이
해한 신약성서의 관심은 전적으로 인간 실존에 대한 문제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트만의 신학을 신존론적 신학이라고 규정한다.

 


1) 구속 사건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있어서 구속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집
중된다. 성서의 십자가와 부활기사에는 역사적인 것과 신화론적인
것이 뒤 엉켜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를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역사적인 것으로 수용할 것인가? 우선 불트만에 의하면 십자가는
분명 역사적 사건으로 용납되어야 한다. 비록 신화적으로 채색되기
는 했어도 심지어는 십자가 사건의 날짜까지도 확정할 수 있는 객
관적인 자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십자가 사건의 진정한 의
미는 그것이 내포한 실존적 의미성을 밝히는데 있다. 즉 그것을 자
신의 실존문제와 관계 지을 때만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 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이세계에 대해서는 등을 돌리고 이 세계와 자신에
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에게 의존하기 위해 비본래적 실존에로 이끌 뿐인 자신에 대한 의
존성을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그것은 이 세계에 대해 그
리고 자신에 대해 죽는 것, 십자가에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
럼 십자가의 구속 사건을 실존론적으로 체험한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에로 들어선다. 죄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비본래적인 실존에
대해서는 죽고 본래적 실존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부활
의 실존적 의미이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일어서의 부활은 십자가와
실존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한갓 신화인가? 일단은 그렇
다. 예수의 부활은 신화적 사건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표현은 역
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전혀 그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부활을 취급하는 신약성서 역시도 부활의 역
사적 성격보다는 오히려 실존적 종말 사건으로서의 의의에 관심을
집중한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해 알고 있는 것도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이 아니라 십자가의 의미성을 신화적으로 해석하
는 제자들의 부활 신앙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독자적인 사
건이 아니라 십자가의 구속의미의 표현이다. 부활은 십자가가 구속
사건으로 선포된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역사속에서
가 아니라 말씀(제자들의 케리그마)속에서 부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부활의 신앙이란 부활 케리그마에 대한 신앙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결코 형이상학적으로 사변할 수 있는 기적이 아니라 선포되
는 말씀에 대한 이해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선포속에서
부활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속에서 지금도 부활한다. 따라서 부
활은 지나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현재에 일어나는 실존론적 이해
의 사건이다. 일찍이 십자가에 달렸던 예수는 오늘도 말씀의 선포
속에서 여전히 우리를 만나고 있다. 바로 이 케리그마에 현재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활신앙의 의의이다.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
이 주는 범인류적인 의미는 역사적인 한 인물이었던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서 입체적이고도 구체적인 구속의 메시지를
선포하셨다는데 있다. 그 하나님의 케리그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
도에 대한 믿음의 결단을 통해 비본래적 실존을 십자가에 못 박고
다시 본래적 실존으로 부활하라는 것이다.

 

2) 종말에 대한 실존론적 해석


불트만에 의하면 비본래적 삶을 영위하던 사람이 본래적 삶으로 전
향하려면 구속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 지점에서 신약성서는 전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그때에 하나님이 개입하신다고 한다. 그
것이 바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 즉 십자가 사건인데 어
쨌든 인간은 반드시 구속사건으로서의 십자가 사건을 믿을 때 비로
소 본래적 실존의 성취가 가능해 진다. 그런데 그 본래적 실존의
선택이란 곧 이 세계가 그에게 부과한 비본래성으로 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에 실존적 종말을 뜻한다. 그는 이제 세상과 세상적
인 삶으로 부터의 결별을 통해 종말론적 실존이 된다. 그러므로 본
래적 실존이란 곧 종말론적 실존을 말하며 종말론적 실존이란 비본
래적 실존의 종국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개인의 신앙안에
서 이미 사건이 되는 실존적인 세상종말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
로서 그는 종말론을 부정하는 즉 시간적이고도 역사적인 종말을 거
부하는 현대신학사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 된다. 이상에서 살
펴 본 것처럼 불트만은 그의 독특한 실존론적 해석학을 통해 신약
성서를 모조리 비신화함으로써 성서 본래의 케리그마를 이 시대에
도 여전히 타당한 보편적 진리로 회복시켰다고 확신한다.

 

 

결 론


그럼 결론적으로 흔히 지적되는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첫째는 불트만의 역사 감각에 대한 문제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는 역사적 종교,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기초한 일면
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믿음으로 간주되어 왔다. 그러나 불트만
은 예수에 대해 알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매우 비관적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도 역사와 케리그마 사이 그리고 예수의 삶과 삶
의 의미에 대한 교회의 설교사이에 어떤 연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는 그이상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트만에게 있어서의 역사는 언제나 신화속에 숨겨져서 회
복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불트만의 관심은 대부분 그리스도
사건이 지금 여기에서 개인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냐에 매어 있
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예수 탐구의 노력은 부질없는
것이고 무익한 것이다. 이러한 불트만의 역사적 회의주의가 그 동
안 가장 심각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2000년 교회사는 교회가
복음서의 내용을 엄연한 역사적 사건들로 받아들여 왔음을 증언하
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로서의 예수의 삶은 그리스도교의 중
심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가 장구한 세월을 통해 믿어온 것을
그렇게 가볍게 제쳐놓을 수는 없다는게 불트만에 반대하는 교회의
입장이다.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첫째로 만약 그리스도교
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지 못할 경우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한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도 없는 신화론적 표상이 우리 그리스도
인으로 하여금 전 실존을 바쳐서 자기 삶을 결단할 수 있게 하는
생의 기반이 될 수 있는가?

 

둘째는 불트만은 성서를 오로지 실존적으로만 의미 있게 해석하려
고 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내용이 인간의 실존적 물음에 대해서
만 의도된 것인가 하는데는 의문의 여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예
를 들면 신약성서는 미래에 있을 우주적 종말에 대해 다양하게 언
급을 하고 있다. 사도바울도 세계의 종말과 그 종말에 수반될 여러
징조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복음서에도 최후적 심판의 표상이 많
이 나온다. 따라서 성서적 종말론은 오히려 역사적이고도 우주적인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트만의 종말 이해는 지나치게 개인적이며 실
존적이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 있어서 종말이란 한 개
인의 비본래적 실존으로 부터의 전향, 즉 세계의존적인 삶의 종국
을 의미한다. 따라서 불트만 신학의 비역사적 측면에 대한 비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집요하게 시도되어 왔다.

 

주목할만한 몇차례의 시도를 살펴보면 우선 오스카 쿨만의 도전인
데 그는 1946년에 출판된 &quot;그리스도와 시간&quot;이라는 저작에서 예수
의 역사는 비신화화론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요소가 아니라, 초대
교회 선포의 중심을 결정하는 객관적 기초라고 밝히면서 불트만에
대해 강력한 반발을 보였다. 다음은 불트만학파의 저명한 학자인
에른스트 케제만이 1952년 게팅겐 대학에서 행한 &quot;독일 신약학의
문제들&quot;이라는 강연을 꼽을 수 있다. 케제만은 이 강연에서 부활절
이후에 신앙되고 전파된 그리스도는 이른바 역사적 예수와의 연속
성속에 있다. 그리고 이 원칙이 없이는 신앙과 선포도 아무런 의미
를 갖지 못한다며 불트만의 케리그마 신학에 반기를 들었다. 바로
케제만의 이 강연을 계기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을 재발견하고자 하
는 후기 불트만학파의 시대가 시작된다.(케제만, 보른캄, 에른스트
폭스, 에빌링, 콘첼만, 막센, 로빈슨, 브라운 등). 그러나 이들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그 다음이 소위 판넨베르그의 도전이다. 판넨베르그는 1959년에 &quot;
구속사건과 역사&quot;라는 강연을 통해 역사를 신학의 중심 개념으로
부각시켰다. &quot;역사는 그리스도 신학의 포괄적인 지평이다. 모든 신
학적 질문들과 대답들은 역사의 테두리 내에서만 의미를 가진다&quot;라
고 선언함으로써 불트만의 비역사적 신학을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판넨베르그도 불트만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끝으로 1965년 &quot;희망의 신학&quot;으로 등단한 몰트만을 들 수 있다. 그
는 희망의 신학을 통해 불트만의 비역사적인 실존론적 종말론을 구
체적인 역사적 종말론, 미래적 종말론, 희망의 종말론을 활성화시
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름은 역사와 희망의
종말론으로 활성화시킨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의 현대 신학의 흐
름은 역사와 희망의 신학으로 전환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그
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트만의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아직까지도 불트만의 이론체계를 극복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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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목창균

 

Ⅰ. 들머리

 


19세기 신학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구획지어진 19세기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1799년 슐라이에르마허의 종교론 출판으로 부터 제1자 세계 대전에 이르는 기간의 신학을 의미한다. 이는 형식과 내용 특히 신학 방법론에서 그 전과 후의 정통주의 및 신정통주의 신학과 뚜렷히 구분된다. 이러한 19세기 신학은 여러 부류로 세분될 수 있으나, 구라파, 특히 독일 신학계를 주도한 신학사조를 흔히 자유주의 신학, 신개신교 신학 혹은 현대주의 신학이라 한다. 이것은 1920년대까지 유럽 신학계를 그리고 1930년대까지 미국 신학계를 주도했다.

 

자유주의 혹은 현대주의는 그 안에 다양한 입장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 뜻을 정확히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기본적인 의미는 “제한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상 체계나 입장을 절대시하거나 그것에 제한을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주의 정신은 개방된 마음 관용 진리에 대한 겸허하고 헌신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는 19세기의 모든 사상 즉 종교를 비롯한 과학, 철학, 경제, 정치 등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종교적 자유주의는 현대의 과학적이며 합리적인 시대 정신에 근거하여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거나 재진술함으로써 기독교를 변호하려한 노력이었다. 19세기 들어 개신교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문제 제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본질적인 문제였다. 이것에 대한 응답으로 나온 것이 자유주의 신학이며 종교와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및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 문제가 주 관심사였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종교개혁 신앙을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러나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 (context)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의 신학이 되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자유주의 신학이 왜 일어났으며 어떻게 일어났는지 무엇을 주장하며 어떻게 발전하고 쇠퇴했는지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무엇인지를 해명함으로써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한다.

 

 


Ⅱ.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배경

 


사상은 시대의 산물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자유주의 신학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파악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 어떠한 배경에서 자유주의 신학이 일어났는가를 이해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의 내용 자체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된다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에 대한 개신교의 응답인 동시에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개신교는 18세기에 여러 측면으로 변화를 겪었다. 정치적으로는 100년전쟁, 영국 시민 전쟁,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 전쟁과 같은 수많은 갈등과 투쟁이 일어났으며 이런 과정을 통해 현대 민주주의가 출현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산업혁명이 일어났으며, 사회 계급이 발생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변화와 도전에 대응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계몽주의와 조화하여 또는 계몽주의의 관점으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재해석하려 했다. 계몽주의는 17세기에 시작되어 18세기에 전성기를 누리며 전 유럽 사상의 주류를 형성했던 사조로서 개인의 자유와 이성의 능력을 무한히 신뢰하고 강조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외에도 경건주의와 19세기 초의 독일 낭만주의가 자유주의 신학 형성에 적지 않는 영향을 끼쳤으며 자유주의 신학이 성장하고 발육한 토양이 되었다.

 

 

1. 계몽주의


버나드 램 (Bernard Ramm)교수는 [현대 신학에서의 긴장들 (Tensions in Contemporay Theology)] 이란 책에 수록된 그의 논문에서 계몽주의가 현대 정신과 신학에 미친 영향으로 일곱가지를 지적했다. 역사주의 과학주의 비평주의 합리주의 관용주의 낙관주의 및 칸트주의가 그것이다. 이들은 계몽주의의 강조점인 동시에 특징들이다. 필자는 램의 글에 기초하여 이들이 자유주의 신학에 끼친 영향을 간략히 살펴 보고자 한다.

 

역사주의는 객관적이고 정확한 역사적 사실만을 진리로 인정하려는 사상이다. 이것은 성서의 역사적 자료에 대한 신뢰성과 사실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자유주의의 발생을 촉진했다. 이것들은 사회 윤리 및 영적 가치를 결정하는 지금까지의 삶의 양태와 가치 기준을 변화시켰으며 성서적인 세계관과 과학적인 세계관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성서의 기록과 현대 과학이 충돌할 때 성서보다. 과학을 선호했다. 따라서 창조와 타락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자유주의 신학은 자연세계에 대한 과학의 탐구 결과를 수용할 뿐만 아니라 과학적 탐구 방법을 신뢰하여 성서와 종교 연구에 사용했다.

 

비평주의는 모든 사실과 자료들의 확실성을 의심해 보거나 분석 또는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따라서 성서 역시 재검사의 대상이 되었으며 고등비평이란 이름 아래 성서 비평이 시작되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가 계몽시대의 새로운 학문과 학문방법에 적응해 보려는 시도였다

 

합리주의는 이성의 완전한 능력을 강조하여 이성을 최종적인 권위와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고 이성의 판단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모든 교리 역시 이성에 의해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태도이다. 이 결과로 그리스도의 신성 동정녀 탄생 기적 등에 대한 교리들이 문제시되었다. 예를 들어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 교수 파울루스 (Paulus)는 기적에 관한 성서의 기록들을 저자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가신 것은 제자들이 잘못 본 것으로 부활은 예수가 정말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라 기절했다. 소생한 것으로 승천 기사는 예수가 정말 죽기 전에 한 고별 인사라는 식으로 설명했다. 이 합리주의를 신학에 도입하여 합리주의적 종교를 만든 것이 자연신론자들이다. 18세기의 자연신론과 자연종교는 종교를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축소시킴으로써 합리주의와 기독교 신앙 사이의 타협을 모색했다.

 

관용주의는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지 않고 계속성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유주의가 인간과 자연세계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인간과 하나님의 연속성과 기독교와 타종교의 공통성을 주장하고 기독교를 다른 종교 가운데 하나로 취급하도록 했다.

 

낙관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미래를 신뢰하여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세계가 계속적으로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이것은 당시의 평화적인 분위기 급속한 산업화 민주적인 정치 구조 역사의 진행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과학에 대한 신뢰 등에 기인되었다. 이런 낙관적 정신에 근거하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원죄교리를 거부하고 죄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계몽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칸트의 비판철학이다. 칸트는 초자연적인 종교의 가능성을 의심하고 단지 이성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종교만을 논함으로 종교를 도덕화시켰다. 이러한 칸트의 철학은 자유주의 신학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할 정도로 슐라이에르마허 리츨 트뢸치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자유주의 신학이 종교의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한 것은 칸트의 영향이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계몽주의의 영향은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성경의 권위와 기적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자연 종교의 발전이 그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의 합리주의 과학의 발전 및 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평적 연구는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과 최고의 권위로 믿는 정통주의적 성서관에 의문을 제기했다. 성서의 권위가 문제시 되자 그 변호자들은 진리의 보증으로 기적에 호소했던 반면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상 사건에 초자연적으로 개입하는 기적의 가능성을 자연질서의 규칙성에 대한 과학적 발견에 근거하여 부정했다. 이런 결과로 기독교 정통주의에 반대되는 자연신론과 자연종교와 같은 합리주의적 종교가 계몽시대에 발전하게 되었으나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려고 했기 때문에 계시나 복음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를 상실하게 되었다.

 

 

2. 경건주의


18세기와 19세기 개신교 교회와 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준 또 다른 사상 운동이 경건주의이다. 17세기 정통주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의 생명력 있는 신앙을 상실하고 형식과 교리화되었다. 성서의 권위가 약화된 반면 세례단, 설교단, 고백실 등이 무언의 우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반동으로 나온 것이 경건주의이다. 경건주의는 사상의 체계라기 보다 감정의 체계이며, 신학적 분위기와 종교적 부흥운동이라 할 수 있다.

 

독일 경건주의의 창시자 스페너 (Philipp Jakob Spener, 1635-1705)는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자신의 집에서 기도와 성서 연구 및 종교적인 문제에 대한 자유스런 토론을 병행하는 모임을 가지는 한편 [복음적 교회의 개혁을 위한 열망 (An Earnest Desire for a Reform, Pleasing to God, of the True Evangelical Churches)] 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서의 진지한 연구 평신도의 교회 행정 참여 기독교인의 실천적 삶이 교리 지식에 대한 본질적인 보층물이라는 것. 이단자들에 대한 관대한 취급 대신 혹독한 공격과 처벌을 할것 대학에서의 기도와 경건 생활, 수사학적 설교를, 순수하고 신앙심 있는 설교로 대치할 것 등을 제의했다. 이러한 스페너의 호소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여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스페너의 사후에는 프랑케 (August Hermann Franke, 1663-1727), 진젠도르프 (Graf Nicholas Zinzendorf, 1700-1760)등이 지도자가 되었으며, 프러시아 왕 프레드릭 Ⅲ세가 경건주의를 적극 돕고 1694년에 할레 (Halle)대학을 설립함에 따라 이 대학이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합리주의의 영향으로 세력이 약화되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신경건주의가 일어 났으며 멘켄 (Gottfried Menken, 1768-1831)등이 이를 대변했다.

 

경건주의의 특징은 다음 몇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종교적 감정과 경험을 강조했다. 의인 중생 성화를 교리로만 취급하지 않고 실제로 체험해야 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며 지식보다. 오히려 실천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주장했다. 둘째 윤리적인 면을 강조했다. 행함에 의한 구원을 주장한다고 비판 받을 정도로 선행을 강조했다. 셋째 개인주의에 기초하여 종교의 개인화를 목적으로 삼았다. 경건주의자들의 주된 관심은 세계를 기독교화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만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넷째 강력한 헌신생활과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교제를 중시하는 친교의 원리를 강조했다. 지역교회 제도와 그 원리와는 달리 교회를 경건한 무리의 모임으로 간주하고 하나님과의 내적인 연합과 중생의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은둔하여 함께 더불어 사는 특수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건주의는 형식화된 정통주의 기독교에 생명력을 회복시키는데 크게 공헌했으나 자신의 영혼 구원에만 관심을 쏟는 개인주의적 신앙이 그 근본적인 결점이었다. 경건주의는 칸트 헤르더 슐라이에르마허 헤겔와 같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19세기의 개신교 사상의 재구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주관주의적이며 경험적이며 윤리적인 성격을 지니게 된 것은 경건주의의 영향이라 하겠다

 

 

3. 낭만주의


18세기를 지배하던 합리주의와 기계론적 우주관을 거부하는 또 다른 흐름이 있었다. 1790년대 루소와 레씽에 의해 독일에서 시작되어 18세기 후반과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예술 문학 과학 등 여러방면에 걸쳐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던 낭만주의가 그것이다. 낭만주의 운동은 형태와 동기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란 말 역시 너무 자유스럽게 사용되므로 통일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헤론 (Alasdair I. C. Heron)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인공적인 것 보다 자연적인 것을 강요된 것보다. 자발적인 것을 차가운 합리성보다. 경험과 감정을 외적이며 형식적인 것보다. 내적이며 상상적인 것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웰치 (Claude Welch)에 따르면 낭만주의는 자유와 역동주의의 이름으로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에 저항한 것이며 개체성 감정의 직접성 및 역사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루소와 레씽에 의해 시작되어 헤르더 (Herder)와 쉴러 (Schiller)에 의해 육성되고 노발리스 (Novalis), 슐레겔 (F. Schlegel)형제, 피히테 (Fichte)등에 의해 개화되었다. 낭만주의는 헤겔 쉐링 등과 같은 철학자와 슐라이에르마허 코러리지 (Coleridge), 뉴우맨 (Newman)같은 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Ⅲ. 자유주의 신학의 태동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현대 정신은 18세기 유럽의 지성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것은 과학적이며, 낙관적인 세계관을 형성했으며, 과학적 경험주의와 역사적 상대주의가 그 특징이었다. 이 현대적 세계관은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다. 이는 성서의 역사적 확실성과 그 가치를 비롯한 전통적인 신학의 모든 전제들을 문제시하고, 집중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이다. 당시 교회나 신학은 이런 도전에 의해 무력해지고 고립화되어 그 토대마저 흔들릴 정도였다. 이런 위기에 직면한 19세기초의 신학적 과제는 기독교 신앙의 활력을 회복하고, 창조적인 미래를 위한 신학의 토대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즉 현대 세계에 존립할 수 있는 신학이 어떻게 가능하며, 어디에서 그 토대를 발견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여 혁신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사람이 슐라이에르마허 (1768-1834)였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가능성을 문제 삼고, 그에 근거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자유주의 신학을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1799년에 출판된 그의 처녀작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에게 보내는 [종교론 (On Religion:Speeches to its Cultured Despisers )]은 이론의 여지 없이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선언서로 간주되었으며 하루밤 사이에 슐라이에르마허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제목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경건주의를 배경으로 계몽주의와 낭만주의에 대해 종교가 현대에서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를 해명한 종교 변증서이다. 계몽주의의 종교연구는 그 본질을 종교 현상에서 발견하려함으로써 종교를 도덕으로 환원하거나 철학에 종속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합리주의적 종교는 19세기초 독일 낭만파 지성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계몽주의의 종교관의 비판을 출발점으로 종교의 직접적인 체험에 근거하여 독창적인 이론을 제시했다. 종교는 “무한자에 대한 감각과 맛”이며 “우주에 대한 직관과 감정”이라는 견해이다. 따라서 도덕화되고 이성화되었던 계몽주의 시대의 종교관에 반기를 들고 직관과 감정을 종교의 본질로 주장하여 종교의 독자성을 확보한 것이 그의 공헌으로 평가된다

 

종교론은 젊은 지성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그들이 외면하고 멸시했던 종교에로 다시 돌아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정통주의 교회의 지도자요 슐라이에르마허의 반대자였던 함즈 (Claus Harms, 1778-1885)의 회고록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는 종교론을 읽고 그의 고상한 삶이 태어난 사건으로 간주할 만큼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의 교의학서인 만년의 저서 신앙론 (1821-1822)은 기독교와 신학의 가능성을 입증한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을 과거 도식의 단순한 반복으로 생각하지 않고 현대 세계와의 살아있는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으로 보았다. “교의 신학은 주어진 시대의 기독교 교회에서 널리 유행하는 교리를 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슐라이에르마허가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음을 말해준다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적 관심의 방향과 출발점을 자아에로 향했다. 그는 신학의 토대를 신조 교의 또는 성경 본문이 아닌 인간의 종교적 경험 또는 기독교인 자기 의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인 생활에서 발견되는 종교적인 감정을 기술하는 것이 기독교 교의학의 과제이다.”이 같이 슐라이에르마허는 신학의 가능성을 인간의 종교적인 경험에서 찾았다. 교리적 신조 배후에 있는 살아있는 경험에로 돌아감으로써 신학의 새로운 토대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신학은 종교적인 의식에 대한 경험적인 기술이 되었다. 이것은 신학 방법론의 일대 변혁으로 경험주의의 도전에 각성하는 기독교 신앙을 대변한다. 슐라이에마허는 미래의 신학이 단순히 권위에 대한 호소에 의해 정당화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경험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했다.

 

이러한 슐라이에르마허의 신학은 몇가지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것은 현대 세계의 도전에 대한 최초의 신학적 응답이다. 그는 현대의 정황에서 신학의 발전을 문제 삼았을 뿐만 아니라 현대의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 관점으로부터 기독교의 진리를 재진술한 최초의 신학자이다. 둘째 인간의 경험을 신학의 주된 자료로 받아들임으로써 신학에 새로운 활기와 관심을 불어넣었다. 또한 인간 감정에 나타난 하나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고 주장함으로써 사변적인 철학으로부터 신학을 독립시키려고 했다. 이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큰 업적으로 평가된다. 셋째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다. 이러한 이유로 슐라이에르마허는 흔히 현대 자유주의 신학의 창건자로 불리어진다. 그러나 후대 신학이 인간 중심적이 되거나 인간학화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의 방법론적 오류에 기인된 바 적지 않다. 그가 신학을 계시의 연구가 아닌 인간의 자기 의식 또는 종교성의 연구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Ⅳ. 자유주의 신학의 조류와 특징

 

1. 신학 조류


자유주의 신학은 신학사적으로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하여 리츨 트뢸치 하르낙 등 독일 신학계를 지배해 온 신학 전통을 말한다. 이 자유주의 신학 전통은 대략 다음 세가지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슐라이에르마허로 대변되는 감정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라허는 비록 학파를 형성하지는 않았으나 신학적인 면에서 19세기 전체가 그의 세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 영향은 지대했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의 영향력은 약화되지 않고 아직도 건재하다. 그의 신학을 비판하거나 거부하는 신학자들도 이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단지 그의 영향권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특히 네안더 (A Neander), 니이체 (Karl Immanuel Nitzsch), 슈바이처 (Alexander Schweitzer), 트베스텐 (August Twesten)등의 신학자들과 조정신학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둘째 헤겔 철학에 기반을 둔 역사 비평적 신학 또는 헤겔학파의 신학이다. 칸트 이후 서양철학은 헤겔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는 본래 철학자였으나 그의 철학이 곧 신학이라 할 정도로 신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철학에 대한 그의 공헌은 특히 역사 철학에서 발견된다. 역사는 그 자체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변증법적으로 진보적 과정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헤겔의 사상을 신학에 도입하여 성서와 기독교의 본질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한 학자들이 있다. 헤겔 좌파에 속하는 쉬트라우스 (David Friedrich Strauss, 1803-1874), 바우르 (Ferdinand Christian Baur, 1792-1860), 바이세 (Christian Herrmann Weisse, 1801-1866), 비더만 (A. E. Biedermann, 1819-1885)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현대사상과 과학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여 전통적인 기독교를 포기하거나 수정하려 했다. 특히 그리스도론이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이상적 그리스도와 역사적 예수의 관계 문제를 해명하려고 시도했다. 한편 벨하우젠 (Julius Wellhausen, 1844-1918)은 구약성서 연구에 역사 비평적 방법을 사용했다.

 

셋째 칸트철학에 기반을 둔 리츨학파의 신학과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의 신학이다. 슐라이에르마허로부터 시작된 경험 신학 전통의 탁월한 해석자요 자유주의 개신교의 왕자로 불리우는 사람이 리츨 (Albrecht Ritschl, 1822-1889)이다. 리츨은 칸트의 추종자로 그의 비판철학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현상계와 본체계의 구분 하나님에 대한 이론적 지식의 한계성 도덕과 종교의 일치에 대한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였다. 그는 종교를 본질적으로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한편 슐라이에르마허 역시 리츨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리츨이 형이상학적 신학을 거부하고 경험에 호소한 것은 슐라이에르마허와 비슷하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기독교인의 의식이 아닌 역사적 계시에 기초한 것은 중요한 차이점이다. 리츨은 복음이 로마 가톨릭 신비주의 경건주의 낭만주의 등으로 인해 변형되었다고 보고 그것을 종교 개혁적인 이해로 재해석하는 것을 자신의 과제로 삼았다. 그의 목적은 종교 개혁자의 길을 통해 신약 성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리츨과 더불어 기독교의 윤리적 의미와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리츨의 사상은 리츨 학파를 형성하여 헤르만 (Wilhelm Herrmann, 1846-1922), 하르낙 (Adolf von Harnack, 1852-1930), 고트쉬크 (Gottschick), 카텐부쉬 (Kattenbush), 숄츠 (Hermann Scholz)에 의해 계승되었다.

 

한편 19세기 마지막 10년동안 독일에서 발전한 학파가 종교사학파이다. 이 학파는 세계 모든 종교를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이해하려 했으며 기독교의 발전과정을 역사적 지리적 환경에 비추어 연구하려 했다. 복음서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요소를 고대근동의 신비 종교로부터 들어온 것이라 하여 제거해 버렸다. 이 학파는 궁켈 (Hermann Gunkel, 1862-1932)이 1888년 출판한 성령의 역사로 부터 시작하여 부세트 (Wilhelm Bousset ), 브레데 (Wilhelm Wrede, 1859-1906), 바이스 (Johannes Weiss, 1863-1918)등이 여기에 속하며 그 대표적인 인물이 트뢸치 (Ernst Troeltsch, 1865-1923)이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은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으로부터 파생되어 미국 특유의 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했다.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파로는 유니태리아니즘 (Unitarianism)과 사회 복음주의 신학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자유주의 신학의 극단적인 형태로서 합리주의적인 해석에 의해 삼위일체론을 거부하고 유일한 신격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채닝 (William Ellery Channing, 1780-1842)이 그 상징적인 인물이며 스튜아르트 (Moses Stuart), 깁스 (Josiah W. Gibbs)등이 이 파에 속한다. 후자는 당시의 낙관적 도덕주의에 기초한 것으로 복음의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여 사회 윤리와 사회 구원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것은 그래든 (Washinngton Gladden)에 의해 시작되어 라우쉔부쉬 (Walter Rauschenbush, 1861-1918)에 의해 미국의 전형적인 종교 형태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밖에 저명한 자유주의 신학자로는 버스넬 (Horace Bushnell, 1802-1876)이 있다.

 

한편 호오던 (William Hordern)에 따르면 1930년대 이후 미국의 자유주의는 네 가지로 분류된다.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인문즈의 그룹 윌맨 (A. N. Wilmann), 브라이트맨 (E. S. Brightmann)으로 대표되는 경험적 종교철학 그룹 워터맨 (Leory Watermann)의 예수 운동 및 복음적 자유주의자인 대다수의 자유주의 교인이 그것이다. 복음적 자유주의자로 간주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포스딕 (Jarry Emerson Fosdick), 브라운 (W. A. Brown), 코핀 (H. S. Coffin)등을 들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새로운 신학운동이 일어났다. 유럽의 신정통주의 신학과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유럽에서는 제 1차 세계 대전을 기점으로 그리고 미국에서는 1929년 경제 대 공항 이후로 자유주의 신학은 쇠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건들로 말미암아 인간 이성의 능력 낙관주의 역사적 진보주의에 대한 신뢰가 파괴됨으로 자유주의 신학은 그 사상적 기반을 잃게 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이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인식하지 못하고 인간의 능력에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이 위기에 시대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는 것을 통해 입증되었다. 따라서 인간 중심주의로부터 하나님 중심주의로의 전환이 신정통주의와 근본주의 신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자유주의 신학이 붕괴된 이후에도 그 영향력은 소멸되지 않고 있다.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는 해방신학 여성신학 흑인 신학 민중신학 등 급진 신학이 오늘날도 자유주의 신학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신학적 특징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관심은 크게 세가지로 정리 될 수 있다. 신학의 가능성 문제, 그리스도론의 가능성 문제 그리고 기독교와 문화의 문제가 그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헤겔, 코러리지 채닝 등 19세기 초의 학자들은 종교의 본질과 신학의 과제를 신학적 토의의 주제로 삼았다. 이들이 제시한 새로운 토대에 기초하여 쉬트라우스 바우어 등 19세기 중엽의 학자들은 그리스도론에 관심을 집중했다. 어떻게 역사적 인물 예수가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19세기 말 경에는 기독교와 문화 또는 교회와 사회의 관계가 신학의 새로운 주제가 되었다. 트뢸치의 종교사학파와 사회 복음의 신학이 이를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이러한 주제에 대한 논의를 통해 여러 갈래로 전개된 자유주의 신학은 어떤 특징과 특색을 지니고 있는가?

 

첫째, 신학의 토대를 인간의 경험에 두었다. 성서나 신조를 신학의 출발점이나 궁극적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가 인간의 종교적인 의식을 리츨이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의 경험을 신학의 근본적 자료로 간주한 것이 이를 입증한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 중심적이며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띄게 되었다.

 

둘째,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 신학은 공관복음서의 자료에 근거하여 역사의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와 구분하려 했다. 특히 역사 비평적 신학파는 신앙의 그리스도는 후대 교회가 부가한 비역사적 요소에 근거한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적 예수를 회복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따라서 자유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에 관한 전통적인 교리를 포기하거나 거부했다. 그리스도를 인간의 원형이나 모본 또는 교사로 봄으로써 인간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슐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의식을 소유한 분으로 그리고 리츨은 탁월한 도덕적 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이해했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했다. 정통주의 신학은 무한하고, 완전한 하나님과 유한하고 불완전한 세계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를 주장했으나, 자유주의 신학은 세계 내에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활동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하나님과 세계 신앙과 이성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타종교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 하여 종교적 관용의 태도를 취했다.

 

넷째, 낙관주의적 인간관을 주장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강조한 반면 타락과 원죄 교리를 거부했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다섯째, 기독교의 윤리적 사회적 의미를 강조했다. 현재의 세계와 인간의 상황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도덕과 종교의 일치를 주장한 칸트의 영향이며 특히 리츨 학파 종교 사학파 사회 복음주의 신학파에서 현저했다.

 

여섯째, 현대 과학과 기독교의 전통적인 교훈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이성의 능력을 신뢰하여 과학의 업적 뿐만 아니라 진리에 대한 접근 수단으로 과학적 탐구 방법을 수용했다. 성서 비평은 기독교를 이러한 학문 방법에 적응시켜 보려는 시도였다

 

 


Ⅴ. 마무리

 

자유주의 신학은 현대 정신을 신학에 반영하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재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과제를 인간의 종교적 의식이나 경험에 근거하여 수행함으로써 인간 중심적인 신학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성과 과학을 진리의 척도로 간주하여 복음의 본질적인 부분을 거부하거나 왜곡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선재성, 동정녀 탄생, 부활, 승천, 성경의 무오성 부정이 그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의 오류는 그릇된 출발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능력이나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다. 잘못된 시작은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자유주의 신학은 복음의 핵심을 상실하고 기독교를 계시종교로 부터 윤리종교로 하나님의 말씀 중심의 종교로부터 인간 중심의 합리적인 종교로 만들었다. 신정통주의 신학자 틸리히가 “유럽에서 개신교는 죽었다. 개신교 신학의 마지막 200년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외친 것도 이 때문이었다. 리츨에서 보듯이 자유주의 신학은 정통주의 신학을 비판점으로 삼아 종교개혁 신앙으로 돌아가고자 했으나 오히려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 단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건전한 신학은 신학의 네 가지 근원인 성서 전통 이성 및 경험이 균형을 이룰 때 가능하다. 우리는 어떤 문제를 다룸에 있어 그것이 성서에서 어떻게 고려되고 있으며 전통에 의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이성에 의해 어떻게 체계화되고 있으며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인간 경험에 관련되어 있는지를 제시해야 할 것이다.

 

계시와 전통에 대한 재해석을 전제로 현대의 정황에 맞는 신학을 모색하고 있는 오늘의 급진신학은 성서와 전통을 희생시킬 만큼 인간의 경험과 이성을 중시했던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실패와 몰락을 귀감 삼아야 될 것이다.

 

 

(주) 1. Stanley N. Gundry, Alan F. Johnson, Tensions in Contemporaary Theology(Chicago:Moody Press, 1976) pp 16-18.

2. Alasdair I. C. Heron, A Century of Protestant Thought(London:Lutterworth Press, 1980), p 12

3. B. A.게리쉬 현대 신학의 태동 (서울 : 대한 기독교서회 1988 pp 1516

4.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Philadelphia:Fortress Press, 1976), p 88

5. 윌리암 호오던 프로테스탄트 신학 개요 pp 97103

6. John Dillenberger와 Claude Welch가 지은 Protestant Christianity 211쪽 이하를 참조할 것

7. Friedrich D. E. Schleiermacher, The Christian Faith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76), p 88

8. 목창균 슐라이에르 마허의 신학사상 (서울 : 한국신학연구소 1991 p 88

9. 윌리엄 호오던 프로테스탄트 신학개요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76 pp 97103

10. Welch, p 4

11. John Dillenberger, Claude Welch, Protestant Christianit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1958), pp 211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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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리츨)

니체의 실존주의 인간에 대한 연구

 

 

성결대학교 신학부 부교수 윤동철

 

 

1. 서 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정신의 자유에 있어서 언어의 위험을 언급하면서 니체가 한 말이다. 편견을 벗어나서 사물과 사유를 접하려는 자유정신은 니체를 따라 여러 가지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우리의 자유정신은 편견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은 니체의 자유정신에 있어서도 유효하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살펴보자. 그의 자유로운 정신이라는 것은 주체도 아니고 신의 창조물도 아니고 단지 육체에 넘쳐 분출되는 쾌락의 과도함과 즐거움을 따라 거침없이 질문을 던져보자.

 

형이상학적 개념들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단지 이성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 더구나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는 개념은 형이상학적 언어에 불과한 것인가? 인간이란 단어로 표현되면서 하나의 개념화 과정을 거치면서, 형이상학적 존재로 개념을 획득하게 된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란 하나의 본질을 규정하는 개념이 아니라 한 실존체 안에 나타나는 복합성과 다양성이 내재하는 삶의 과정을 칭하는 것인가?

 

사물이 그 의미를 드러내는 현상이란 무엇인가? 본질은 어떻게 드러나고 해석되는가? 힘들은 단순히 힘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힘의 투쟁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힘의 의지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살려는 의지인가?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니체는 힘(신)을 동일시하며 초극하는 힘을 신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가?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원숭이에서 초인을 향하여 줄타기를 하는 변화의 과정에 있는가? 자연은 인간을 진화시키는 토양으로 신적 자격을 취하고 있는가? 인간은 계보학적으로 그 안에 여러 진화의 복합성과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인가?

 

사물을 바라보면서 그 사물을 표현하는 힘을 알지 못하고서는 그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모든 사물은 어떤 힘에 의해 점유되어지고, 하나의 현상으로 나타나게 된다. 현상은 힘의 출현이며 다른 힘과 관계하면서 나타난다. 현상은 실재하는 힘 속에서 그것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호이며 징후인 것이다. 사물의 역사는 그것을 점령하는 힘들의 연속이며 그 점령을 위해 투쟁하는 힘들의 공존과 정복의 과정이다. 역사는 이 힘들의 투쟁을 통한 현상과 의미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복합적이고 복수성을 띠게 된다. 다수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 사건이나 현상, 단어 또는 사고는 없다. 하나의 사물은 그것을 점령한 힘들에 의존하면서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복합적인 어떤 것이 되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은 여러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계보학을 통하여 하나의 사물이 지니는 복합성과 다원성이 파악된다. 사물의 복합성과 다원성은 사물을 점령하고 있는 힘에 의해 가리워지게 된다. 해석은 바로 하나의 힘, 하나의 표면적 현상에 의해 가리워진 사물 자체의 복합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니체의 힘의 개념은 다른 힘에 관계되는 힘의 개념이며, 의지는 힘의 변별적인 요소이다. 의지는 다른 의지 위에 행사하며 나타난다. 니체에게서 한 힘이 다른 힘과 갖는 본질적인 관계는 절대로 본질 속에 있는 부정적 요소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스스로 복종하게 되는 힘은 그 다른 것 또는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며, 이러한 차이를 즐긴다. 이러한 현상과 힘의 의지는 존재의 가치를 뒤로하고 변화하는 사물의 본능에 대한 해석을 요구하게 된다. 삶의 본능을 드러내는 현상과 그 힘의 의지를 떠나서 아무 것도 그러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과도한 쾌락"이나 "넘치는 힘"을 대신할 수 없다. 이 자연 가운데 있는 삶의 본능을 떠나서 묘사되거나 규정되는 모든 개념은 허구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神) 또한 사물의 힘을 떠나서는 죽은 것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계몽기의 실패를 일찍 목도하였던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되었다. 그에게 지성이란 태초부터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을 통하여 시간의 경과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투쟁과 경쟁에 있어서의 도구이며 기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엄청난 선천적 가치를 가진 지성을 소유한 자는 그 지성으로 인하여 생존할 수 있었다. 진화론과 칸트의 이론이 결합된 결과 우리로 하여금 생존할 수 있게끔 처신하게 하며 작용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진리요, 그렇지 못한 것은 진리가 안 된다는 실용주의적 진리관이 발전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형이상학적 개념을 해체시키고 진화론의 "편견"을 가지고, 디오니소스적 향락을 추구하며 삶의 본능에 과도한 쾌락이 넘쳐나기를 원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1844년 10월 15일 라이프치히(Leipzig) 근처인 프로시아(Prusia)의 작센(Sachsen)주 뢰켄(L tzen)에서 루터파 교회 목사인 칼 루드비히 니체(Karl Nietzsch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4세 되던 해에 아버지는 뇌연화증으로 사망하고 다음 해에 니체 일가는 자아레(Saale) 강변의 나움부르크(Naumburg)로 이사하였다.

 

니체는 14세에 포르타(Pforta)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이때부터 문학과 음악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1864년, 21세에 그는 본(Bonn) 대학에 입학하였고 여기서 그리스어, 라틴어를 언어학적 입장에서 연구하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하였다. 이때에 그는 슈트라우스(Strauss)의 예수의 생애(Leben Jesu)를 읽고 그 뒤에 신양성서의 원문을 공부하면서 원전비판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해 고전문헌학의 교수인 리츨(Friedrich Willhelm Ritschl) 교수가 라이프치히(Leipzig) 대학으로 옮겨가자, 니체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니체가 라이프치히를 졸업하게 되었을 때 리츨르 교수의 추천으로 1867년 24세의 나이로 스위스 바젤(Basel) 대학의 객원교수가 되었고 다음해에 정교수로 임명되었다.

 

바그너와 만남은 그가 바젤 대학의 교수가 되면서 이루어졌고 이때 니체는 24세, 바그너는 55세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기독교인으로 신앙이 깊어지자 니체는 격노하여 바그너와 헤어지고 그 후 바그너의 비판자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1882년 [즐거운 지식]를 집필하였는데 이 글을 통하여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하였다.

 

니체는 1876년 5월과 6월에 제네바 호반에 머물면서 화란 여성 마틸데 트람페다하(Mathilde Trampedach)에게 구혼을 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장군의 딸 21세의 지성적인 여자, 루 살로메(Lou Salome)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을 신청하였으나 또 거절당하였고, 그로 인하여 실연의 괴로움으로 세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였다. 그 사건이후 니체는 여러 권의 책을 집필하면서 이성을 상실한 그의 광기는 그 정도를 정해갔고, 결국 1889년 1월 발광하여 그의 누이의 손에 자신을 의탁하다가 1900년 8월 25일에 바이마르에서 기구한 생애의 막을 내렸다.

 

 

2. 인간과 신의 죽음


니체는 신이란 연약한 인간이 만든 허구의 존재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천명하였다. 신의 존재는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의 본능 가운데 드러나는 것은 지금까지 알고 있는 개념화된 신, 이 세계가 아닌 피안의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니체는 [즐거운 지식]에서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외치는 것이다. 인간의 자아, 주체성을 확립하기 위해서 신의 형상을 말했을 때,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인간이 삶의 본능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찾기를 원했다. 그는 신을 형이상학적 존재로 보았고, 자신 자신의 초극을 위하여 투쟁할 힘이 없는 연약한 인간의 피난처로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통하여 힘에의 의지를 지닌 자로 표명하였고 모든 사물은 힘을 통하여 투쟁을 하고 드러나는 것이 자연이며 실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향하여 "힘있는 자는 부탁하지 말라! 울부짖지 말라! 탈취하라, 부디 탈취하라!"고 격려하면서, "신은 어디로 갔는가? 내가 그것을 가르쳐 주리라 .... 우리들이 신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대들과 내가 ..... 신은 죽었다 .... 신을 죽인 것은 우리들이다! 우리가 모두 신의 살해자인 것이다!"라고 외친다. 즉 연약한 우리의 자신이 의지하던 방패를 벗어나 초극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 신의 그림자에서조차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신을 죽일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는 바다를 마셔 버릴 수 있었던가?" 그것은 계몽기의 기획에 놓여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인간 이성을 주체로 만들었고 신을 대상으로 삼았고, 계몽기를 접어들면서 인간 이성은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 인간의 주체가 하나님을 대상으로 만들고 인간을 사고의 중심으로 세웠을 때 모든 것은 인간의 사유 속에 잠식되었다. 인간은 세계를, 바다를 그의 사유 가운데 모두 삼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신은 주체가 아니가 객체가 되었고 죽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참된 신이 가상의 틀에, 인간의 이데올로기적 교리에 갇혀 죽음을 맞이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고, 이제 형이상학적 틀로 영원성을 부여받았던 것으로 여겨졌던 신이 니체의 시대에서 그 틀이 벗겨짐으로 생리학적 세계 가운데 몰락하며, 죽음을 맞이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신을 매장하는, 묘 파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아직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가? 신이 썩는 냄새가 아직 아무것도 나지 않는가? --신도 역시 썩는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다! 그것은 우리가 신을 죽였던 것이다. ... 세계가 이제까지 소유했던 가장 신성한 것, 가장 강력한 것, 그것이 우리의 칼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었던 것이다."

 

니체의 신의 죽음은 신의 부재를 말하기보다는 신의 생성, 성장, 소멸을 의미한다. 신은 존재했고, 죽었고, 살아날 것이다. 신은 어떻게 이렇게 투쟁 가운데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가? 그것은 반동적 인간은 신의 연민이나 신의 관용을 참지 못한다. 반동적 인간은 무에의 의지를 통해서 신의 죽음을 말하고 관 뚜껑 위에 주저앉아 버린다. 이러한 반항적이며 광기어린 외침은 그의 욕동(慾動)을 따라 분출되는 대지의 과도함이 대지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신, 도덕, 이성)에 대한 구토의 증세로 표현된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신이란 디오니소스였다. "디오니소스적이란 무엇인가?--이 책 속에 그에 관한 하나의 해답이 있다. 여기서 대답하고 있는 사람은 그 길의 정통자, 신의 비의를 이어받은 사도인 것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사실 이 책의 전체는, 생성하는 모든 현상의 배후에 있는 예술가적인 감각과 잠재 감각밖에 모른다. 원한다면 그것을 신(神)이라고 불러도 좋다. 그러나 이 신은 무슨 일이 있어서도 결코 주저할 줄 모르는 비도덕적인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 이 책 전체는 이런 종류의 예술의 신만을 인지할 뿐이다. 파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건설에 있어서도, 악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선에 있어서도 자기의 변함없는 쾌락과 독재를 고수하려고 하는 신이며, 여러 가지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충실과 과잉의 고뇌로부터, 자기 속에서 솟구치는 모순의 고뇌로부터 스스로 벗어나려는 예술가로서의 신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문화를 동경하였다. 그곳에는 주신(酒神) 바커스의 향연을 통해서 드러나는, 즉 과도한 쾌락과 욕망으로 솟구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가 풍족하였다. 니체는 그리스 문화의 한 복판에서 소크라테스의 합리성이 주도하는 이성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아폴론적 요소가 강조됨으로 고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적 문화가 퇴락을 길을 걷게 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드러내지 못하고 퇴보되어야할 나약한 자들의 생존을 돕는다. 종교는 나약한 자들에게 현실에서의 도피를 돕는 "신의 나라"를 말하고 자신들을 괴롭히는 강한 자들을 처벌하는 심판의 교리를 말하는 종교를 대항하였다.

 

 


3. 인간과 형이상학적 철학


니체는 세 가지 형태의 형이상학적 체계, 즉 도덕, 철학, 종교에 대하여 적대감을 품었다. 첫 째는 소크라테스였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본능과는 반대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내걸었으며, 논리와 낙관주의를 통하여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압도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무의식적인 충동이 신화적인 상징 속에서 그 표현을 얻었는데 소크라테스는 상징들을 개념화시킨다.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문화의 아폴론적 요소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다루면서 소크라테스를 비판한다. 비극이란 두 개의 다른 삶의 형식의 융합이 형체가 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는 고전적 그리스를 찬양함과 동시에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을 정당화하고 선전하려고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하여 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삶은 본질적으로 디오니소스적이다. 디오니소스적 힘에는 공포와 황홀감과 도취가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디오니소스적 향연/문화/예술의 반대자로 예술의 마력적 본능을 와해시켰고, 그가 내세운 도덕, 변증법, 만족은 삶의 피로의 한 형식으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이성으로부터 하나의 폭군을 만들어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이성을 폭군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어떤 다른 것도 덩달아 폭군 노릇을 할 위험이 적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합리성이 그 당시에는 구세주로 여겨졌었다. 소크라테스도 그렇거니와 그의 환자들도 자기를 마음대로 자유롭게 합리적이 되고 안되고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예의상 갖추어야 하는 것이었으며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리스의 사고 자체가 합리성에 경도할 때에 보여주는 열광은 하나의 위급 상태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위험에 처해 있었고 한 가지 선택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다. 멸망하든가--터무니없이 이성적이라든가 … 플라톤 이후의 그리스 철학자들의 도덕주의는 병리학적인 조건 속에 있었다. 그들의 변증법 존중도 마찬가지였다. 이성=미덕=행복이 의미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소크라테스를 모방하여 영원한 햇빛--이성의 햇빛을 창출해 내어 어둠의 욕망과 맞서야 한다는 것. 어떻게 해서든 신중하고, 명철하고, 총명해야 한다는 것. 본능과 무의식에 굴복하는 것은 모두 타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까……"

 

니체는 철학자들이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다룬 것은 개념의 미이라들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의 손에서 현실의 그 어느 것도 살아서 빠져나간 예가 없다. 그들은 현실을 죽이고 개념에 틀에 박제한다. 철학자들, 개념의 우상숭배자들은 현존하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위험한 존재로 변한다. 소크라테스의 감정이나 욕망을 벗어난 이성적인 삶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플라톤을 통하여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육체를 영혼의 무덤으로 보고 형이상학적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함으로 현실을 떠난 신념에 철학을 구축한 것이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그것을 믿는 사람만 기만할 수 있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형이상학적 개념을 허구적이며, 거짓으로 보았다. 개념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은 역동적 힘을 통하여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것을 느끼는 것은 감각이다. "감각은 거짓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 우리가 감각의 증거로부터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감각에 최초로 허위를 도입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단일성의 허위, 구체성의 허위, 본체의 지속성의 허위 등등을 …… <이성>이야말로 우리로 하여금 감각의 증거를 곡해하는 원인이다. 감각이 생성, 쇠퇴, 변천을 보여 주는 한, 그것은 거짓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 그러나, 존재는 공허한 허구라고 생각한 헤라클레이토스는 그 점에서 영원히 옳으리라. <감각의> 세계가 유일한 세계인 것이다. <실재의> 세계란 날조되어 온 것에 불과하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당시의 그리스 젊은이들에게 발휘했던 매력, 그를 비극에 처해 있는 이들로부터 의사처럼 또는 구세주처럼 보이게 했던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합리성>에 대한 믿음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였다. 니체는 "데카당스"라는 말을 종종 사용하였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고귀한 정신에 대한 타락한 육체의 의미에서 사용되었다면 니체에게서는 자연 가운데 실존하는 육체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능력의 범주 밖에 있는 것을 다룸으로 육체가 지니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타락시키는 기만으로 간주하고, 이러한 의미에서 데카당스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이나 도덕가들의 오해이며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가장 엄격한 일광, 모든 것에 우선시 되는 합리성, 밝고, 냉정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며 본능이 없이 본능에 적대되는 삶은 그 자체가 일종의 병, 또 하나의 병에 지나지 않았었다"고 말한다.

 

데카당스는 인간 본능의 타락이다. 니체에 따르면, "어떤 형태로든 힘에의 의지가 쇠퇴하는 곳에서는 반드시 생리학적인 퇴행, 즉 데카당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합리성을 근거로 인간의 본능을 타락시키는 것이다. "하나의 동물이, 하나의 종(種)이, 한 개체가 자신의 본능을 상실하고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선호할 때 나는 그것을 타락했다고 부른다. ... 나는 삶 자체가 바로 성장과, 존속과, 힘의 축적과, 힘을 향한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힘에의 의지가 결여된 곳에는 쇠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의지가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들 가운데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며--쇠퇴의 가치들이 허무주의적 가치들이 가장 성스러운 이름으로 판을 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가 규정하는 인간은 이성이나 형이상학적 체계가 아닌 자신의 본능과 싸워야 한다. 삶이 상승하고 있는 한, 니체에게 행복이란 본능과 한 가지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합리성의 추구는 데카당스의 공식이 된다. 그는 "형이상학이라든가, 신학, 심리학, 인식론 등. 또는 논리학, 응용 논리학 수학과 같은 공식의 과학, 기호학 등, 그것들을 통해서는 현실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논리학을 구성하고 있는 인습적인 기호 체계가 도대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던진다. 니체가 관찰할 때, "소크라테스적" 문화 가운데 있는 인간은 허구적 토대 위에 세워진 지식을 사랑함으로써 존재가 지니고 있는 비극, 영속적인 부상을 치료할 수 있으리라는 미망에 묶여있는 것이다. 비극이 실존이며 삶이고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인간의 내부에 있는 동물적 본능, 힘에의 의지를 빼앗아가려는 또 하나의 시도가 종교적 피안의 세계에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의 두 번째 공격대상은 종교를 향한 것이었다. 특히 그는 서구 철학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진실을 감추어 온 기독교에 대하여 맹공을 하였다. 그는 [반(反) 그리스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기독교를 미화시키거나 치장시켜 주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이러한 드높은 인간형을 반대하여 결사적인 싸움을 벌여왔으며, 이러한 인간형의 근본 충동들을 깡그리 추방해 버렸고, 그같은 충동을 증류하여 악과 악인을 만들어내고--강한 인간은 비난받을 유형으로서, <버림받는 자>로 취급했던 것이다. 기독교는 또 무력하고, 비천하고, 약질인 모든 것의 편을 들어왔으며, 강한 삶의 보존 본능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이상을 내세웠다.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이지의 최고 가치를 죄 되는 것으로, 그릇 인도하는 것으로, 유혹하는 것으로 느끼도록 가르침으로써 심지어는 가장 강한 이지적 본성을 가진 인간들의 이성까지도 타락시켰다. 파스칼은 자신의 이성이 기독교 때문에 타락했을 뿐인 데도 원죄 때문에 타락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드높은 인간이란 어떤 것인가?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니체의 드높은 인간 또는 강한 인간이란 자기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지속적으로 초극하여 진화로 나아가는 존재를 일컫고 있다. 서론에서 밝힌 바와 같이 니체의 의식 가운데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정신은 육체의 산물이지 육체가 정신의 산물이 아니라고 보고 있든 것이다. 육체의 진화과정에서 방출된 정신은 형이상학적 위안 가운데 안주하게 될 때에 진화가 멈추어지고 자신을 초극하기 위해 줄타기를 하는 힘에의 의지도 사라지기 때문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인간의 본질은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초극되어야할 그 무엇이다. 자연의 모든 과도함이 쾌락으로 고통과 인식 속에 동시에 드러나게 될 때에, "과도"(過度)가 진리로서 폭로되었던 것이다.

 

진리란 과도함으로 현실의 울타리를 넘어서 가는 것, 또는 초극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묶고 있는 모든 것이 니체에게는 적이며, 공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기독교는 시초부터 본질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느끼는 구토요, 권태감이었다. 이러한 구토와 권태감은 <다른> 혹은 <보다 좋은> 삶에 대한 신앙 아래 가장(假裝)되고 은폐(隱蔽)되고 치장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세>에 대한 증오, 정념(情念)에 대한 저주, 미와 관능으로부터의 도피, 차안을 보다 더 잘 비방하기 위해 생각해낸 피안, 궁극적으로는 허무에, 종말에, 휴식에, <안식일 속의 안식일>에 도달하려는 욕구--이들 모든 것이 나에게는 도덕적인 모든 가치만을 인정하려는 기독교의 절대적인 의지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몰락에의 의지>의 모든 가능한 형식 가운데서 가장 위험하고 가장 가증스러운 형식처럼 생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가 진화론의 입장에서 기독교를 연민의 종교라고 규정하면서, 연민은 생명감의 원기를 북돋아주는 고무적 정서와는 대립되는 것으로 진화의 과정에서 가장 병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민을 판단함에 있어 그것이 으레 초래하는 반응들의 가치로 그것을 판단한다면 그것이 갖는 치명적으로 위험한 성격이 훨씬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대체로 연민은 도태의 법칙인 진화의 법칙을 방해한다. 그것은 파멸이 가까워 온 어떤 것을 보존하고, 삶의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의 삶의 죄인으로 단절된 자를 변호한다. 그리고 그것은 각양각색의 병골(病骨)들을 삶 속에 엄청나게 많이 살려둠으로써 삶 자체에 암울하고 의문스러운 면모를 부여한다.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연민을 하나의 미덕이라고 불러왔다. ... 연민은 허무를 설득시킨다. ... 직접 <허무>라고는 말하지 않고 <너머>라고 말한다. 혹은 <신>, 혹은 <참된 삶>, 혹은 열반, 구원, 행복 등에 대해서 말이다. ... 거기에는 삶을 적대하는 경향이 있다. ... 우리의 현대성 가운데서 그 어느 것도 기독교의 연민 이상으로 병든 것은 없다." 이와 같은 주장은, 니체가 얼마나 진화론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인간을 유물론적 사상에서 전개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니체는 종교와 더불어 도덕을 거부한다. 종교가 피안의 세계를 통하여 인간의 진화를,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있다면 도덕은 겸손의 미덕 가운데 인간의 삶의 본능을 나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보았다. "나는 하나의 원리를 정식화한다. 도덕상의 모든 자연주의, 즉 모든 건강한 도덕은, 삶의 본능에 의해 지배받는다고--삶의 어떤 명령은 <해야 한다>와 <해서는 안 된다>는 특정한 규범을 통해 완성되며, 삶의 노정에 놓인 어떤 장애나 적대적 요소는 이로써 제거된다. 반자연적 도덕, 즉 이제까지 가르쳐져 오고, 숭앙되어 오고, 설파되어 온 사실상의 모든 도덕은 그것과는 반대로 삶의 본능을 정면으로 적대한다--그것은 그 본능들에 대한 은밀한, 혹은 공공연하고도 뻔뻔스러운 단죄이다. 그것은 [신이 마음 속을 꿰뚫어 보신다]고 말함으로써 삶의 가장 깊고 가장 드높은 욕구들을 부정하고 신을 삶의 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 삶은 <신의 왕국>이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니체는 칸트의 도덕이성을 거부하였다. "늙은 칸트에 있어서 조차도 그렇다. 그의 정언명령에는 잔인한 냄새가 난다." 니체는 칸트의 정언명령이 삶의 진정한 본능을 억제하고 구속한다는 의미에서 보았다. 삶의 동물적 본능을 구속하고 있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이러한 도덕은 삶의 본능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는 원리로 파악되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덕은 <삶의 부정에의 의지>이며 은밀한 파괴 본능이며 퇴폐의, 비소화(卑小化)의, 비방의 원리이며, 종말의 발단이 아닐까? 따라서 위험한 것 중에서도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 나의 본능은 삶을 변호하는 본능으로, 이 문제성을 내포한 책을 가지고 도덕에도 도전하였던 것이다." 그는 도덕과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삶, 순전히 예술적이고도 반(反)기독교적인 것을 디오니소스적이라고 칭하였다.

 

니체의 입장에서 인간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삶의 본능을 약화시키는 도덕은 퇴폐적인 것이었다. 유기체로서의 인간, 진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은 유기체의 전체의 본질적인 성장이 있을 때마다, 개개인의 기관의 일부가 소멸하던가, 그 수가 줄던가 ... 하는 것이 유기체의 증대하는 함과 완전성의 표시일 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부분적 무용화도, 위축과 퇴화도, 의미와 합목적성의 상실도, 요컨대 죽음도, 현실의 진보의 조건에 속한다는 것, 즉 현실의 진보는 항상 보다 큰 힘에의 의지와 행로라는 형식에서 나타나며, 또한 항시 다수의 약한 힘을 희생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어떤 <진보>의 크기는 그 때문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모든 것의 양 여하에 따라 측정된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이것이야말로 진보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라고 진술하고 있다.

 

"집단으로서의 인류가 개개의 뛰어난 억센 인종의 번영을 위해서 희생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창조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화의 줄타기를 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란 결코 창조의 정점이 아니다. 모든 창조물이 인간과 나란히 인간과 동일한 단계에서 완전을 향해 서 있는 것이다. ... 인간이란, 상대적으로 말해서, 가장 성공하지 못한 동물, 가장 병약한 동물, 자신의 본능으로부터 가장 위험하게 벗어난 동물이다." 병약하고 본능으로 벗어나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인간의 본능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고 길들이고 기계화시킨 데 있다. "동물에 관해 말할 것 같으면 데카르트는, 존경할 만한 대담성을 가지고, 동물을 기계라고 생각했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우리의 모든 생리학은 그 명제를 증명하려는 데 전념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논리상으로도 데카르트처럼 기계라고 알고 있을 정도로 진짜 지식이 되어 있다. 이전에는 인간에게 한층 높은 질서로부터의 선물로서 <자유의지>라는 것이 주어졌었다. 오늘날 우리은 인간으로부터 의지까지도 빼앗아버렸다. 의지가 이제는 더 이상 하나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뜻에서이다."

 

니체는 외향성을 향한 인간의 야수적 본능이 이제 자기 자신을 공격하게 된 것이 양심의 가책이라고 규정한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에, 자기 자신다운 것에 괴로워하는 법이다. 이것은 인간이 야수적인 과거에서 억지로 떼어버린 것의 결과, 말하자면 새로운 상태와 새로운 생존조건 속에 뛰어들었던 것의 결과, 이제까지 그의 힘과 즐거움과 공포의 근거였던 오랜 본능에 대해서 선전포고를 한 결과였다. ... 폭력에 의해서 잠재적인 것이 되어버린 자유의 본능 ... 되밀어내지고 뒷걸음질치고 마음 속에 유폐되어 마침내 자기 자신에 대해서 폭팔하게끔 된 이 자유의 본능, 오직 이것이야말로 양심의 가책의 시작인 것이다."

 

니체의 인간은 도덕으로 인해 나약해지고, 본성이 도덕으로 인하여 감금되고 자신 자신을 학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고 말한다.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에 의해 광기가 제거되고 감정이 억압당하고 본능이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기독교의 신과 신의 나라는 나약하고 도태되어야 할 인간들에게, 나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강한 본능을 지닌 우수한 인간들을 약한 자를 위하여 보상적 심판을 집행하며, 그들을 위한 피안의 세계와 도피처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는 바로 선조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강압적 의무로부터 발생했으며,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거룩한 신성의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종류의 체계는 거짓되고 허무한 <정신>과 <신>을 강조함으로 <대지>와 <본능>을 데카당스로 이끌어갔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렇듯 영원하지 않고 목적도 아니고 아직 존재도 아닌 진화론의 과정에 있는 삶의 형태라면, 원숭이에서 초인으로 향하는 진화론의 줄기 위에 재주를 부리는 위험한 실체라면 거기에 어떤 희망이나 가치는 사라지는 것이다. 니체는 [도덕적 계보]에 실린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의 의지" (Was bedeuten asketische Ideale?>에서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를 필요로 한다. 이 의지는 아무 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한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4. 허무주의와 초인


니체의 허무주의는 지금까지 최고의 가치들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무가치하게 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모든 존재자들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최고의 가치들, 신, 종교, 도덕, 철학이 무가치하게 될 경우 그것들에 근거하는 존재자들도 무가치하게 되는 것이다. 가치의 상실감, 모든 것이 공허하게 되었다고 느낄 때 일어나는 심리적 박탈감, 자신의 삶의 목표가 무너지고 가치를 잃게 되었을 때 느끼는 허무한 심리적 상태에서 니힐리즘은 대두된다.

 

우리는 이러한 무의미함에 대한 승인을 니힐리즘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니체도 지적하듯이 니힐리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우선 첫째로 니체가 세계의 무의미함이 제공해 주는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는 니힐리즘이 하나 있다. 이것을 소극적 허무주의 혹은 염세주의적인 허무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소극적 허무주의는 현실에서의 삶을 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러한 허무주의를 피해서 피안을 세계를 마련하는 자들을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이며, 종교가들이며, 도덕가들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니힐리즘은 능동적이면서도 미학적이다. 니체는 이 니힐리즘을 현대화 탈현대의 존재를 위한 올바른 태도로 진단한다. 허무로부터 물러나는 대신에 그들은 주어진 현실을 삶의 본능을 위해 주어진 최선의 장으로 생각하고 그 위에서 춤춘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에 맞는 세계가 없다고 무의미나 무가치의 실망에 젖어 한탄하는 대신, 그러한 세계를 창조하려고 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연적 제약과 한계에 의해 구속되지 않고, 주어진 환경을 초극함으로 자기 자신이 존재의 예술가가 되는 것이다.

 

니체가 "미래의 신화", 즉 서구문명에 드리워져 있는 니힐리즘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화를 도입하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에서이다. [짜라투스트라]는 니체가 기독교의 사복음서와 비교하여 제5복음서라고 말했고, 기독교 교의에 대한 풍자로서 새로운 디오니소스적 철학을 주신찬가(酒神讚歌)식으로 고지(告知)하였다. 그는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커다란 고양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스스로 초인이 되었다고 여겼다. 1884년 2월 그의 친구 로오데에게 보내는 서신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이 짜라투스트라로서 독일어를 그 완성에 이르게 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것은 루터와 괴에테 뒤에 더욱 일보를 나아가게 한 셈이다. --생각애 보려므나, 오랜 동안의 마음의 벗이여, 박력과 유창함과 화음의 세 박자가 이렇게 어울려 있었던 일이 일찍이 독일어에 있었던가 없었던가를." 프렌쩰은 [니이체의 생애와 사상]에서 그가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자기신격화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성경에 예수가 황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쳤다는 사실에 대하여, 니체는 신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자각했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라는 면모를 갖는다. 한편 짜라투스트라는 도덕의 파괴자에 그치지 않고 [도덕의 자기 초극],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을 실험하는 인물이다. [성실로 말미암은 도덕의 자기 초극]은 니체가 현대의 니힐리즘적 상황을 설명할 때 즐겨 사용하는 근본적 주제의 하나다. 기독교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세계와 역사에 대한 도덕적 해석에 있으며 이런 점에서 기독교는 종래의 도덕을 대표하는데, 종래의 도덕, 곧 기독교적 도덕 자체가 그 성실성을 고도로 발달시켜, 이 성실성이 도덕 자체를 부정하고 도덕을 넘어선 경지에 이르는 것이 [도덕의 자기 초극]이다. 니체에 따르면, [도덕을 키워 온 여러 힘 중에는 성실성이 있었다. 이 성실성이 드디어 도덕에 반항하고 그 목적론, 그 타산적 고찰을 폭로한다.]

 

그러면 도덕의 자기 초극은 무엇을 지향하는가? 니체가 말하는 성실은 진리와의 합치이며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성실이다. 곧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확립하는 것이다. ... 곧 종래의 도덕이 완전한 자기 상실이었던데 비해 도덕의 자기 초극은 인간이 현재의 자기를 초극하여 본래의 가기 자신을 회복하는 것, 곧 참된 자유를 달성하는 것이다. 이 책 제1부 [세 가지 변화]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애의 3단계의 변화는 바로 이러한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인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낙타는 의무와 금욕을 상징으로 [그대는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타율적 도덕에 복종한다.

 

도덕을 지키는 자들은 병약한 자들이며, 니체에 따르면, "병들어 죽어 가는 자들이야말로 육체와 대지를 경멸하고 천상적인 것과 구원의 핏방울(십자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피 또는 성찬식의 포도주)을 발명해 낸 자들이다." 낙타는 사막에 가서 [사자]로 변하는데 사자는 자유를 획득하고 고독을 견뎌 내며 스스로 주인이 되려고 한다. 곧 가혹한 자기 부정에 철저한 자유 정신, 비판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새로운 창조를 위한 자유를 확보한 데 지나지 않는다. 참으로 새로운 창조는 순수하고 절대적인 자기 긍정을 하는 어린애의 단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며, 이 단계에서 비로소 참된 자유가 달성되는 것이다. 어린애는 각성자이며, 잘 아는 자로서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육체이며, 육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에 속하는 어떤 것을 표현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는 반 그리스도에서, "우리는 더 잘 알게 되었다. 우리는 모든 점에서 더 겸손해졌다. 우리는 더 이상 <정신>이라든가, <신성>이라든가 하는 것 속에서 인간의 근원을 찾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가장 교활하다는 이유로 가장 강한 동물로 간주한다. 그의 정신성은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여기서도 드러나려고 하는 허영심, 즉 인간이 동물 진화의 비밀스런 위대한 목적이라고 생각하는 허영심을 갖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조심해야한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다윈의 진화론에 의지하여, 인간은 육체이고 대지이며 초월한 짐승이라고 보았다. 도덕에 관하여 그는 말하기를 "초월한 짐승--우리 내면의 야수는 기만당하기를 바라고 있다. 도덕이란 그 야수에게 잡아 찢기지 않으려는 방편적인 거짓말이다. 도덕의 가정에 오류가 없었다면 인간은 짐승에서 머물렀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스스로를 고상한 어떤 것으로 여겨서 엄격한 규율을 스스로에게 짐지웠다. 그것 때문에 인간은 짐승 가까운 곳에서 그치고 만 단계를 증오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노예를 비인간으로서, 물건으로서 경멸했던 과거를 설명할 수 있다."

 

니체는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치노라.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어떤 것이로다. 그대들은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였던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로다. 그대들의 의지는, 초인이란 대지의 뜻이라야 한다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부디 원하노니, 나의 형제여, 대지에 어디까지나 충실하라, 그리하여 그대들에게 초지상적인 희망에 관하여 말하는 것을 부디 믿지 마려므나!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들은 해독자로다. 그들의 삶의 경멸자이며, 거의 시들어버린 자이며, 스스로 독을 머금은 자로다. 그와 같은 무리들에게 대지는 지쳐버렸노라. 그러므로 그들은 죽어버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로다! 일찍이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 최대의 모독이었노라, 그러나 신은 죽었노라. 그리고 그와 더불어 이들의 모독자도 죽어버렸던 것이로다. 대지에 대한 모독이 이제는 가장 무서운 것이로다. 그리고 대지의 뜻보다도 알 수 없는, 신비스러운 것의 내장은 훨씬 더 존중하는 것도 역시! 일찍이는 영혼이 육체를 경멸하며 내려다보았노라. 그리고 그 때에 있어서는 이 경멸이 최고의 것이었노라. -- 영혼은 육체가 더욱 더욱 메마르고 처량하게 되어, 아사하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로다. 그리하여 영혼은 육체와 대지로부터 벗어나려고 생각하고 있었노라."

 

니체는 여기서 인간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인간은 어떻게 극복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극복한다는 것은 인간 가치의 변환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란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의 죽음이 없이는 인간은 가치 변환을 추구할 수 없다. 초인은 신의 죽음을 말하고 더 높은 인간을 향하여 나아갈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신이 부여하였던 인간의 가치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측정될 때에만 인간은 가치 변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니체는 가치변환을 이루는 새로운 방식을 취하기 위하여 종교, 철학, 도덕을 향한 맹공을 퍼부은 것이다. 그리고 가치평가의 전환을 통하여 고차원적 인간의 이론이 취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가치를 무가치하게 만들고 허무주의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영겁회귀의 길을 걷는 것이다. 허무주의를 통해 긍정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영겁회귀하는 것이다. 초인은 영겁회귀한다. 회귀하는 것들은 반동적인 힘들에 의존하다. 인간의 본질은 힘들의 반동적 생성이며 보편적인 생성으로서의 생성이다. 인간의 본질과 인간에 의해 점유되는 세계의 본질은 모든 힘들의 반동적 생성, 니힐리즘일 뿐이다.

 

니체는 보다 높은 인간과 초인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다. 초인은 자신을 반동적인 힘에 의지하며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한다. 그러나 고차적 인간이란 가치를 뒤집고 반동적 행위를 능동적 행위로 바꾸는 것에 그친다. 단지 현재의 인간보다 높은 이상으로 만족한다. 초인은 끊임없는 가치를 무로 돌리고 니힐리즘의 영겁회귀와 더불어 부정을 긍정함으로 다시 힘에의 의지를 가진다. 긍정은 부정을 능가하지만 더 이상 이룰 것이 없기에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초인은 거기서 다시 니힐리즘을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고 끊임없는 반동적 생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거기에 삶의 약동과 생명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초인은 겨울의 죽음 같은 곳에서 생명을 일으키는 대지인 것이다.

 


5. 결론


"모든 언어는 편견이다." 그는 글을 쓸 때마다 편견에 젖어 있었다는 말을 거부할 수 없다. 심리학과 예술, 가치에 대하여 논할 때 그 모든 것은 아마도 이전에 사고가 합리적 형이상학이었다면, 니체의 사상은 심미적(Gestalt) 형이상학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심미적 형이상학은 진화하는 가운데 생겨난 것으로 보았다. 니체의 인간은 진화론 가운데 있고 삶의 본능은 대지의 깊이에서 솟아오른다. 그리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은 육체로부터 분출되어 나온 것이지 고등한 기원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할 때에, 참된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식적인 것을 벗어버려야 하는데 그것은 합리적 이성의 형이상학, 도덕, 그리고 종교였다. 진화란 결국 더 야수적 삶의 본능으로 복귀이고, 형이상학적 진리나 종교적 진리 그리고 선을 추구하는 것은 존재의 나약함, 의무에 사로잡힘, 그리고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의 허구적 틀을 부수고 그런 것들의 가치를 무가치로 받아들이고 반항적 힘들을 표출함으로 초극하는 것이다.

 

결국 니체의 초인이란 삶의 본능의 근원적 힘의 의지로 끊임없이 되돌아가는 것이다. 힘에의 의지, 모든 무가치를 통하여 가치변환을 추구하는 과도한 쾌락과 정열만이 끊임없이 긍정을 허무로 대함으로 긍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초극하는 초인이 되는 것이라면, 초극을 이끌어 가는 인식의 주체는 없는 것인가? 긍정을 비판하는 정신은 대지에서 오는 것일까? 대지 안에서 스스로 이루어 놓은 긍정을 스스로 부정할 수 있는가? 인식의 출현이 육체적 본능의 퇴폐, 데카당스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결국 진화하는 초인은 야수적 본성은 인식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성이 없는 광기가 창출하는 예술은 어떤 것이며, 그 초인은 어떤 존재인가?

 

니체는 존재자 자체를 가치로 해석하였다. 결국 심미적 상태에서 지니는 가치는 존재자의 본질과는 무관한 것이다. 니체에게 인간은 존재가 아니라 변환되는 가치에 있는 것이다. 원숭이로부터 인간 그리고 초인으로 가는 줄타기를 하는 무엇으로서의 가치이다. 결국 심리적 형태의 니힐리즘은 현대적 형이상학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너희 자신도 또한 권력에의 의지이며--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심리학은 권력에의 의지가 갖는 제(諸)형태와 제(諸)단계들에 대한 설이다. 이미 데카르트의 인식은 심리학의 일부였다. 단지 심리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하고 있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하고 자신이 새로운 신을 가르치려고 하였고, 실로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려고 하였다. 예수를 죽음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신의 탄생을 짜라투스트라를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짜라투스트라는 신의 죽음을 말하고 자신을 초극하는 자로서 신적 가치의 존재이다. 즉 끊임없이 자신을 초극하여 다음 단계의 목적에 이르는 힘, 힘에의 의지는 니체에게 있어서 신(神)인 것이다. 이 디오니소스적 신은 허무주의를 통하여 반항적 힘을 통하여 자신을 초극하는 초인인 것이다. 이러한 신은 강해야 하며 자신을 초극해야하기에 늘 긍정에만 의지하는 나약한 인간을 보호하거나 병약한 자들을 남겨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 진화의 과정을 퇴화시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도덕을 폐기하고 성실하게 살아감으로서 도덕을 극복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덕을 폐기하고 용기를 가지고 투쟁하고 야수성을 드러낼 때에 인간은 점점 더 강해지고 더 드높은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더 광기에 차고 무질서하며 정신의 귀중한 소산을 상실하는 것이다. 자신을 이끌어가던 양심의 도덕을 버림으로 짐승이 되는 것이다. 니체는 결국 양심의 가책에 대하여 "양심을 깨문다는 것은 개가 돌을 깨무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짓이다"라고 설명하였다.

 

니체가 순수 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은 순수한 정신은 대상이 없이 홀로 파악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으면서 대상을 파악하는 힘이라면 주체인 것이다. 주체는 대상을 파악하고 인식하는 힘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순히 변천하는 과정의 가치가 아니라 존재이며 목적이다. 타자를 대상화하는 지력(知力)은 주체의 의식이다. 이것은 그 기원이 물질 또는 대지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精神)의 소산인 것이다.

 

그는 형이상학적 구조의 구성체인 개념의 세계를 배격하였으나 개념의 세계는 역동적 삶의 세계에 대한 표현이 지니는 세계이다. 이 세계는 경험과 함께 혹은 인식과 함께 연동하여 의미를 전달한다. 개념은 허구의 틀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언어가 편견을 지니고 있는 것은 읽고 해석하는 해석자의 경험이 의미생성에 역동적으로 관계하고 있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모든 인식구조가 그렇다. 인식구조는 인식자의 경험과 더불어 이해된다. 허구적 틀이 틀로서만 이해된다면, 인식구조의 형태가 그대로 전달되지 않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이 역동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진행과정에서 생겨난 정신이라면 그 정신은 야수성에 젖어 있어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심미적 정신은 보이지 않는 생각의 공간에 정형의 틀 또는 역동적 패러다임을 구성하고 나아갈 정향성을 설정한다. 그 정향성의 목적지에 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그 근원에 신의 손길이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 신의 참여가 있는 것이다. 신에 대한 증명이 없이 왜 필자는 신의 손길(창조), 참여(사역), 의지(구속)가 있다고 말하는가? 신(神)은 내 삶의 기원이기에, 인간은 신을 느끼고 참여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의 신이든, 허무주의의 신이든, 아니면 기독교의 신이 되었든 그는 "잠자는 신"의 부정을 통해서 "활동하는 신"을 찾는 것이다.

 

니체는 형이상학적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과도함 쾌락 그리고 힘에로의 의지를 추구하고 있다. 이는 그가 비판한 바울이 아레오바고에서 아덴의 스토아학파들과 논쟁을 하며 소개한 바로 그 신이다. 바울은 "그(神)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고 전하였다.

 

니체가 겪었던 19세기의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주의는 참된 하나님을 이성의 사유에 가두거나 지나치게 현실을 외면함으로서 니체나 칼 막스(Karl Mark)를 낳았던 것이다. 니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을 외면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종교를 거부하였다. "무신론자로 그의 궁극적 관심이 그에게 신(神)"이라는 폴 틸리히(Paul Tillich)의 평가는 아마도 니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그는 결국 신의 죽음을 통하여 자신이 신을 만들려는 기획을 하였던 것이다. 짜라투스트라와 그 이후에 저작들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그는 말년에 이성을 상실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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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츨주의

 

 

 

이것은 괴팅겐(Goettingen)의 알브레히트 리츨과 그의 추종자들인 하르낙
(A.Harnack), 갚탄(J.Kaftan), 뤄스(F.A. Loofs), 바이스(J. Weiss) 등의 신학을 가르
킨다. 이것은 1875년부터 1914년경까지를 지배했던 자유주의 신학이었다. 그 영향은
아직까지도 오늘날의 신정통주의(Neo-Orthodoxy)나 신현대주의(New Modernism)에서 느
낄수 있다.(메킨토쉬는 바르트를 '리츨의 대 계승자'라고 부른다)


리츨주의는 헤겔의 공상적인 합리주의와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의 주관적
인 신비주의에 대항하는 반 작용으로써 주정적으로 조종된 신학이다. 즉 이것은 지적
이거나 감정적인 것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신학을 설립해 보려는 시도로 나타나 것이
다. 이것은 신앙 지식은 가치 판단의 결과로서 이상의 것들 중 어느 하나로부터 독자
적으로 산출된다는 주장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은 객관적인 것만이 개인에게
가치가 있다는 주장이다. 이처럼 리츨주의는 종교적 실용주의이다.

 


리츨주의는 가치 판단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주관적이지만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에 관한 역사적인 기록에로 돌아가자는 주장에서는 객관적이다. 리츨에
게 있어서 기독교는 가장 고등한 형태의 종교로서 '하나님 나라'(해당 항목 참조)의
설립자이신 그리스도에게 기초한 절대적인 윤리(倫理)였다. 이 나라는 '사람의 행동을
통하여 이룩된 인간성의 조직체'로 기술되었다.

 

따라서 신자들의 공동체, 나라는 일종의 도덕적 집산주의(集散主義)이다.

개인이 칭의와 대속이라는 종교적인 선(善)에 참여하는 것은

오직 개인만이 자신을 그 공동체와 일치시킴으로써만이 이룩된다는 것이
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통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의 죄는 용서받았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되는 것을 믿게 된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정통적인 주장
에 어긋난 것이다.

출처 : 주님의 뜰-행원소구
글쓴이 : xi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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