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놀라운 십자가
(갈 6:7-8을 언급)삶이란 근본적으로 심고 거두는 문제입니다. 즉,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운명은 이 육체의 삶과 이 세상에서의 삶 속에서 무엇을 했느냐에 따라서 판정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은 엄청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체로 심었는지 아니면 성령으로 심었는지에 따라서 이 땅의 추수와 영원의 추수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일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일어나지만, 기독교와 정반대되는 헛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그러므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첫번째 일은 어떤 것이 참된 메시지인지를 찾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전하고 십자가 상에서 죽임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파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며, 기독교 메시지의 진수입니다.
십자가를 전파한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언제나 핍박이 따랐습니다....십자가는 언제나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는 환영받는 것도 아니고 대중에게 인기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모든 사도들이 전파한 설교의 핵심이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십자가를 증거했고 결국 순교까지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복음의 진수가 주님이 교훈하신 말씀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기독교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여러분이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만을 설교한다면 인간사 제반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 문제를 악화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런 설교는 여러분에게 공허한 것이며 오히려 해를 끼칩니다. 왜냐하면 그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은 예수님의 산상수훈 등을 설교하지 않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라고 사람들은 질문합니다. 그리고는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복음서들을 읽어보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라고 합니다. 주님이 사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자고 강조합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만, 그러한 것들은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결코 아닙니다. 그 교훈들이 기독교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처음부터 전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이 맨 처음부터 설교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도 맨 처움부터 이것을 증거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증거한 것은 바로 십자가 상에서의 주님의 죽으심이며, 그 사건의 의미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 20-25)라는 말씀입니다.
보혈! 십자가의 피! 이것이 모든 서신들의 주제입니다. 로마서 5장을 다시 한번 읽어봅시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권리로 “십자가는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약성경 전체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갈보리 십자가 상에서의 죽으심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기독교 복음의 핵이요, 중심 주제이며, 구원의 복된 소식 전부입니다.
우리를 정말 자유하게 하며 구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바로 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절대적인 생동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주님의 죽으심은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이 그의 설교의 중심이요, 핵심이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기”때문입니다. 그것은 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우리가 구원받게 되었기때문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시지 않으셨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전파해야 될 복음도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구원의 사건이며,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는 결정적인 구속행위입니다. 이것이 곧 사도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하심을 얻는 이것이다”(행13:38-39).
십자가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무엇을 행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고 선포합니다.
구원은 누구든지 십자가로 말미암아 받게 됩니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여러분의 죄악들이 용서를 받게 되었다는 뜻이며, 하나님과 이제는 화목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 28)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오심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음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심은 죄 아래에서 허덕이는 여러분이나 저를 포함한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진 죄인들을 위함입니다. 주님은 최후의 심판과 멸망당하기로 운명되어진 이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니라.” 우리 모두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일 수밖에 없고 이 세상에서 태어나 세상의 운명을 짊어지고 그대로 죽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착하게 사느냐 못사느냐 하는 물제들을, 외형적인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세상에서 최고로 존경함을 받는 사람일지라도 버림을 받은 자요 비참한 처지에 빠져 있는 죄인으로 저주받아 소망없는 인간으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현대인들은 의(義)가 무엇인지, 정의가 어떤 것인지, 또한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징계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법을 제정하신 분이시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죄악을 쳐다볼 수 조차도 없는 가장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 때문에 죄를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누차 우리에게 죄를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죄인이요, 하나님은 죄와는 무관하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함께 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악들을 짐승에게 전가시켜 잡아 죽인 다음 그 피를 봉헌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의가 무엇인지, 정의가 어떤 것인지, 또한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며, 징계도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점점 지옥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에 반하여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며, 법을 제정하신 분이시요,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는 죄악을 쳐다볼 수 조차도 없는 순결하신 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목격한 적도 없다고 가장할 수도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그가 보지 못하는 것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속성 때문에 죄를 벌하셔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누차 우리에게 죄를 벌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죄를 지은 죄인이요, 하나님은 죄와는 무관하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두 가지가 함께 거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피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악들을 짐승에게 전가시켜 잡아 죽인 다음 그 피를 봉헌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일을 매일 성전에서 했습니다. 그들은 흠이 없고 깨끗한 어린양을 취하여 죽이고 피를 흘려 제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할 때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하십니까? 그 놀라운 밤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 왔을 때 애굽의 처음 난 모든 것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어린양을 잡아 피를 흘려 전날 밤에 문설주와 문기둥에 발랐더너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신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죄악들은 형벌을 받지 않았으며, 그들의 생명은 구원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일어난 일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저와 여러분의 죄악들을 그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덮어 씌워 우리의 죄값을 치뤄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1:4).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19-20)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죽음에 이르도록-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로다”(요3:16).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당하시고 우리의 죄악을 짊어지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킨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은 셈이 된 것입니다. 율법이 주님에게 지워짐으로 우리는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를 주셨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설교의 내용입니다....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 메시지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 외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8-39)는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꼭 말해야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무리 지독한 죄인이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나 여자일지라도, 비록 지금 이 순간까지도 죄악의 수렁텅이에 빠져 살고 있더라도 한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 상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아 죽으신 분-임을 믿는다면, 바로 그 순간 여러분이 저지른 모든 것으로부터 전적으로 완전히 의롭다하심을 얻게 됩니다....전적으로 그 분을 힘입고서, 곧 그가 십자가 상에서 이루심을 의지하여 우리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죄가 완저히 지워졌습니다. 이것은 마치 이 전에 결코 죄를 범한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의 의로움으로 옷 입혀진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완전한 자로 간주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메시지요, 기독교 복음이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주님이십니다. 그 분 이외에는 우리를 구원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2장 정밀검사
사도 바울은 오직 한 가지만을 가르치지만, 거짓 교사들은 다른 것들을 가르칩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믿어야 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어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은 할례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기에 율법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진짜 메시지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상에서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대한 설교는 우리가 고찰해 본 바와 같이 모든 기독교 가르침의 심장이요, 중심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이 아니라 십자가, 곧 그의 죽으심이 그 핵심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라고 말씀했습니다....‘자랑한다’는 말이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 모두에 대한 판단기준임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의 판단기준입니다. 실로 이것은 우리의 모든 가르침과 선언에 대한 성도들의 판단기준입니다.
십자가와 관련하여 언제나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대적하는 것이 된다든지, 아니면 우리가 자랑삼아 말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난 것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대적? 아니면 자랑? 오직 두 가지 입장뿐입니다.
십자가는 20세기 사람들에게도 가장 거리끼는 것입니다....제일 주된 이유는 십자가가 사람의 지성에 거리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궁극적인 죄악이 지적 교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관한 설교는 사람의 지성에 대적이 되는 것인데, 인간의 모든 선입관이나 편견들을 십자가가 묵살시켜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좋은 사상이나 어떤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철학에 능통하다고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육적인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선한 생각이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상주의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늘 이상론을 펼치는 이상주의자들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맨 밑바닥으로 내동댕이칩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립니다. 기가 죽어 소망도 없고 힘도 없는 잃어버린 자들이요, 저주받은 자들이요, 지옥에 가리로 예비된 죄인으로 우리를 전락시켜 버립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우리 인간들에 대해서 증거하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자화자찬을 일삼는 자나, 자신을 믿는 신앙, 또 심리학적으로 자신을 잘 발전시켜 나가는 사람 및 자신의 잠재능력을 신뢰하는 모든 사람에게 거리끼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학교에서 배운 놀라운 지식과 더불어 스스로 독립이 가능한 성숙한 인간으로 자신을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는 여러분의 공든 탑을 쉽게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 모든 것들은 아무 쓸모도 없고 무가치한 것들이라고 십자가는 증거합니다.
주님은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소의 사울은 그를 증오하였지만 주님은 그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다소의 사울은 그를 증오하였지만 주님은 그를 위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은 회심하기 전의 사울, 즉 자기를 모독했던 자요, 핍박자요, 해쳤던 자인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은 주님의 신성한 이름을 망녕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요 영광의 주님이라고 한 주님의 말씀을 가증스럽게 여기고, 우리를 깨우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겠다고 하신 주님의 교훈하심을 역겹게 생각했고, 온갖 욕설과 조소를 퍼부은 다소의 사울을 사랑하셨습니다. 바울이 이같은 짓을 일삼는 동안에 주님은 그를 사랑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같은 일을 하고 계십니다.
십자가를 자랑함이 없이는 여러분은 참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믿으신다면 십자가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발견케 되고, 결국 십자가가 여러분의 모든 것임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제3장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는 지나간 역사 속에서 여러분이 부여잡고 있는 모든 것과 또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그 의미를 희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십자가 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예언되어 있음
시편 22편- 십자가 사에서 이루어진 우리 주님의 죽으심에 대하여 분명한 또 다른 예언의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기를 볼 때도 동일한 예언의 말씀들을 발견케 될 것입니다.
그 외에 출애굽기를 읽으시거나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왜 그들이 유월절에 어린양을 죽여야만 했으며, 양의 피를 문설주와 기중에 발라야만 했습니까? 바로 이것이 십자가에 달려 주으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53장에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란 말씀에 모든 것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느닷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들만을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주님 자신이 이 사건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의 한 훌륭한 선생인 니고데모와 대화하는 중에(요3장)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구리뱀이 들리운 것처럼 ’인자도 들리워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의 죽으심에 관한 예언을 그의 초기 공생애 가운데서 이미 언급하신 것입니다. 그는 니고데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는 한 옛날 이야기를 상기시켰습니다. 광야에서 불뱀들이 사람들을 물으니 물린 사람들은 그 즉시 죽었습니다. 이에 대한 치료약은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아 물린 자마다 그것을 쳐다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이 모든 예언(앞에서 십자가 사건에 대한 예언들을 증거하였다)이 무엇을 가르쳐 주는 것인지,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모든 번제들과 희생제사들이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찰해 본 것처럼 유월절 어린양과 모든 번제 및 희생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사건을 지칭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십자가를 자랑하는 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는 이 비참하고 사악한 사망의 골짜기에 처해 있는 비참한 인간들을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들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세상은 그의 세상이요, 세상을 자기의 뜻대로 올바르게 운행하시고자 원하시며, 우리의 구원과 구속사역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나의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시면,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분이 성자 예수님만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거기에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관여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십자가를 그려볼 때 거기에 아버지 하나님이 계심을 보셔습니까? 영원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보다 더 높고 놀라운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한 첫번째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자비함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은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메시지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자신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및 긍휼히 여기심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무엇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이 거기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 우주 속에 하나님의 이같은 속성들이 이처럼 명백히 드러나 보여진 장소는 여기뿐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신 율법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의로우심과 거룩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십계명이 그것을 설명해 주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는 모습에서도 공의하심이 나타납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공의로움과 의로우심, 그리고 완전한 거룩하심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시면 이 놀라운 십자가를 생각하십시오. 거기에서 여러분은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는 영원히 정반대편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모든 신성과 완전성, 그리고 거룩하심의 속성 때문에 죄를 견디지 못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몹시 싫어하실 뿐 아니라 묵인하시지도 않습니다. 죄와는 타협을 불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죄를 형벌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모든 죄인들과 불의 한 자들에게 임한다고 하신 성경 말씀의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불완전하며 불결하고 형편없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심성은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순수한 청결함이나 깨끗한 의로움, 그리고 순전한 성결함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동시에 공의하심과 용서하시며 사랑하심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두 가지를 함께 두실 수 있습니까? 그의 의로우심과 자비, 그의 거룩하심과과 사랑을 어떻게 한 곳에 두실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가능합니다. 그 대답은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십자가가 제게 주는 깨달음은 모든 것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것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하나님)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롬 8:23)
주님은 영원하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저에게 여러분이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에 대해 자랑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회원이라고도 말하지 마십시오. 그런 말에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참 성도인지 아닌지는 십자가에 대한 여러분의 자세를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부인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한, 우리는 십자가를 보지 못한 자요 십자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한 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깨달은 적이 없다면 십자가를 참으로 믿는 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참으로 믿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도 죄 가운데 거하고 있는 것이며, 훗날 심판을 받아 지옥으로 가게 되는 멸망을 자처하는 것입니다.
제4장 세상을 사랑치 말라
참된 신앙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거리로 일삼고 그것만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죽음에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요 산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힘과 같은 못 박힘입니다. ...바울은 지금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십자가에, 세상도 못 박힌 것이요 그렇게 많은 애정을 쏟던 세상 일도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제거합니다.
세상은 본래 우리의 모든 문제의 근원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십자가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세상으로부터 구원받게 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울이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심이요, 십자가가 그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그도 역시 세상에 대해 못 박힌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있는 것들을 자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자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요일2:15)
여기서의 ‘세상’이란 단어는 물질세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관망하는 자세나 마음가짐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세상’이란 언제나 이런 뜻을 품고 있습니다. 때때로 이 말은 우리 주위에 있는 실제의 물질세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세상’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사는 삶, 즉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음없이 생각하는 마음가짐, 신앙없이 살아가는 삶의 자세, 인간과 인간, 시간에 대한 태고, 그 밖의 모든 것들으르 대하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전적으로 하나님 품을 떠나 하나님 없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탐구함으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애쓰지만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세상적인 삶의 태도는 우리를 언제나 나쁜 길로 이끌어 갑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 최고의 절대자로 둔갑해 버렸습니다....하나님의 법을 자기 손에 쥐고 맘대로 휘둘러 보려는 것이 욕정입니다. 지배하려는 욕심장이요 무법자요 제 멋대로 사는 것이 세상의 삶입니다. 물론 이런 욕삼들은 우리를 기쁘게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를 질투의 열차를 타게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보다 나은 이생의 자랑거리를 많이 가진 사람을 볼 때 질투합니다.
세상은 너무나 혼란하고 부패했습니다. 무엇으로도 세상을 구원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그 일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세상에 오셨으며, 세상의 모습을 우리에게 바로 보여주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실 그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위대하게 보이는 바벨론은 무너질 것이며 부서진 조각들로 온 세상이 뒤덮힐 것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극심한 폐허뿐입니다.
세상의 종말에 닥칠 영원한 심판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구원해 줄 것은 이 십자가뿐입니다.
우리가 받을 이 형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그 분을 믿기만 하면 그 형벌은 우리에게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제5장 십자가의 개가
기독교 교회는 우리 주님의 죽으신 그날을 좋은 날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합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대적의 손아귀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십자가는 십자가 안에서 우리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영광을 환히 보게 합니다. 또한 십자가는 우리로 십자가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케 해주며, 아버지의 하신 일을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에 관련된 진리를 발견하게 해주는 곳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한 번도 십자가의 위대함과 장엄함 및 광대함을 보지 못한 데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탄의 존재를 믿지 않을 뿐더러 그의 세력이 어떠한지도 믿지 않고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우스꽝스러운 짓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들은 사탄의 속삭임에 귀기울여 사람이 범하게 된 최초의 실수와 과실로 인한 결과입니다.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교만을 떤 것처럼 인간을 교만의 자리에 떨어뜨렸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이 인간의 죄악된 구렁 속에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탄에 의해서 야기됩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관찰해 보며 조사연구하고 또 이해하려고 애씁니다만, 사람들은 우리 자신보다도 더 더욱 엄청난 존재가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는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세계가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아주 흡족하게 해드리며 그의 전생애를 의롭게 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세상은 하나님 앞에 죄인의 모습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세상을 지배하고 주관하며 통치하는 사탄의 무시무시한 힘 때문입니다. 사탄은 먼저 인간의 마음을 통하여 역사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싫어하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나님을 싫어하게 만듭니다....사탄은 누구든지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독생자를 믿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인간들의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사탄은 하나님을 꺼려하는 자신의 본성을 인간에게서 재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죽음을 무서워함은 죽음에는 곧 심판이 따른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우리 모두를 정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사망은 우리를 하나님의 법에 가장 근접하게 옮겨놓는 것으로써 우리의 공포의 이유입니다.
두려워 벌벌 떠는 인생, 더럽고 추악하기 그지없는 인생의 모습, 사악한 인생의 모습, 죄짓고 불안해 하는 인생의 모습만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조장해 내는 양상들입니다.
십자가 상의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사탄과 죄악의 위협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구원해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사탄이 더 이상 건드리지 못합니다. 사탄을 이겨낼 자는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만남이 끊어지는 순간, 우리는 사탄에 의해서 지배당하게 되고 허약한 사탄의 이용도구들로 전락합니다. 그래서 무장을 하고 사탄이 지키는 보물들처럼 그의 나라에 갇혀 사는 피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 인류 족속이 처해 있는 상황입니다.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죄를 범하여 사탄의 노예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모두는 본질상 사탄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린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진 인간이요, 하나님 나라 밖의 사람이므로 사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인간의 모습은 소망이 없는 비참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 지옥의 형벌을 모면할 수 있는 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탄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소유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능력을 어떻게 소유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인제는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얻기 전에 먼저 해야할 일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바로 갈보리산 십자가에, 그 화목케 되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 모두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진 것은 깨어진 하나님의 법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겼고 하나님께 무례한 짓을 했습니다. 그분에게 침뱉은 자입니다. 그분이 받으신 정죄는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형벌로부터 구원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알기 전에, 먼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 일이 십자가 상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6장 평강의 왕
사도 바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또 한 이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모든 족속들을 연합시킬 수가 있고 온 세상에 참된 평화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남긴 것은 기독교 교회입니다. 십자가는 기독교 교회 안에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이유가 사도 바울을 십자가에 대해서 그렇게 감격하도록 한 것입니다.
인간들은 우선적으로 출신이 어디냐, 무슨 혈통이냐를 자랑삼아 말함으로 교만이 싹틉니다. 출신이 어딘지, 무슨 혈통을 가졌는지를 뽐내는 사람, 국적에 대한 교만함, 흑인이냐 백인이냐를 자랑하는 교만함 등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사회 속에 갈등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또 다는 분쟁의 요인은 교만이 가진 능력입니다. 가진 자는 늘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가지려고 애씁니다.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똑같이 가지려고 온 힘을 다 기울입니다. 필연적으로 그 속에 분쟁이 싹트는 것입니다. 하나라도 더 가지려고 애쓰다보니 거기에 갈등과 분쟁이 싹트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여러분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진단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겸손케 하고 나라들이 평화롭게 되는 길은 이 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가능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 일을 가능케 합니다. 십자가를 떠난 우리의 모든 노력은 헛수가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패의 연속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아주 간단 명료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하늘의 그 영광스러운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몸을 왜 취했습니까? 오직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번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19-24절).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울에게 보여준 내용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본 바울은 자신이 모든 언행심사에 있어서 철저하게 실패한 자였음을 깨달았습니다. 그에게 자랑할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철저히 부숴져 버린 곤고한 인간임을 자각했습니다. 십자가는 그를 겸손하게 했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인간이 되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바울처럼 여러분의 모습을 발견한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양쪽을 다 새롭게 하며, 눅를 더 편애하는 법이 없이 똑같이 취급합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이 먼저 낮아져야만 합니다. 내가 낮아지지 않는한 십자가는 무용지물입니다. 나 자신의 교만을 꺽어야 십자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깨닫도록 도와줍니다.
모든 인간을 똑같은 처지로 이끄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모든 인간은 비참하기 그지없고 소망도 없는 허약한 죄인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랑할 만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십자가가 무엇인지 그 진리를 한 번만이라도 깨달으면 우리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뽐내고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전혀 없게 될 것이며 미워함도 질투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이지만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게 된 사실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십자가는 여러분을 존귀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존귀하게 만듭니다. 십자가는 서로 서로를 새롭게 함으로 평화를 이룩합니다.
서로 서로가 화목케 되도록 자신으 생명을 주신 주님을 바라보도록 기도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제7장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십자가가 증언하는 메시지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설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이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큼이나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명확히 설명해 주는 것은 없습니다.
십자가가 말하는 것은 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심각한 것이란 말씀입니다. ..십자가가 증언하는 진리를 들어보면 사람의 영혼이 아주 귀중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갖는 대인관계는 정상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십자가가 말하는 그 다음 진리는 죄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본질을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죄에 대한 참된 개념입니다. 세상은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죄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로 죄를 우리의 언행심사나 잘못된 행위와 관련해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것도 잘못 행한 죄이긴 합니다만, 정말 문제가 되는 죄란 하나님께 대한 반역죄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깨뜨리는 인간이 심각한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신성하심을 더럽히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을 최고의 경지에 올려 놓고 하나님과 맞서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인간이 정말 문제가 됩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들입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가장 두려운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자기 자신을 신의 자리에 올려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독생자를 하늘 보좌로부터 떠나보내 세상에 내려가 인간의 몸을 입도록 해야 했던 것입니다. 인간과 같이 되어 인간처럼 살으셔야 했으며 최후에는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께 맞으셔야”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이같은 거룩하신 속성을 선포합니다. ...십자가가 여러분에게 던지는 질문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삶의 최대 목적이 하나님입니까? 그분을 위해서 사는 삶입니까? 여러분의 최고의 관심으 대상이 하나님입니까? 하나님에게 전폭적으로 복종하고 있습니까?
십자가는 단순히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곳엔 능력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선언은 능력있는 선포입니다. ...십자가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인간의 죄 문제를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역사상 가장 골치 아픈 이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결점을 십자가가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이 문제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선언합니다.
제자들도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지상 천국을 염두에 두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나라의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축복들을 물질화하려고 늘 애씁니다. 그들은 “이 왕국이 언제나 도래할 것인가?”하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과 또 십자가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의 방도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십자가가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의 대속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란 것입니다.
십자가 선언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표하는 공적인 선포입니다.
십자가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물이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죄를 벌하셨습니다. ...인간의 죄악들 위에 쏟으실 진노의 대접을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들의 육체 위에 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이 화목케 된 것입니다. 이 일이 성취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심으로 그가 평안을 전한 것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으신 주님은 일반 서민들과 죄인들의 친구였습니다. 주님은 소위 선하다고 자랑하던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은 찟기고 상하고 멍들어 버려진 인생들을 외면해 버립니다. 그 누구도 인생 밑바닥에서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여러분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처지에 빠져 사는 인생들을 영접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안아주실 뿐 아니라 쉼을 주시는 분입니다.
십자가의 피는 죄 사함의 축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뿌려진 피가 우리 모두가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하나님의 아들이 지셨다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혀 있는 담을 허물어 버렸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억을 값없이 단번에 용서해 주십니다.
십자가의 증언은 우리에게 절대로 필요한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죄 용서함과 화평함, 그리고 갱생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으며 영생의 소망을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달성되는 것입니다.
제8장 새로운 피조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은 십자가 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믿으시는 그 순간 얻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하나님의 방도를 발견하게 되는 순간, 믿음으로 즉각 여러분의 모든 죄악들이 용서함받게 된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모든 죄악이 깨끗이 씻음받아 이제는 그리스도의 의로움으로 옷 입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벌어지는 우리의 모든 문제들이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본 결과, 그 모든 원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하나님을 대적하는 반역죄의 결과로 즉시 이 세상에 고통이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일을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고 그의 영광과 존귀하심을 찬양하는 삶을 살지 않고는 평화가 무엇인지도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지 않고는 그 누구도 소망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평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을 이처럼 비참한 세상이 되게 한 장본인은 저와 여러분들 개개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태초에 그는 오직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완전한 태초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이룩하신 세상을 보고 흡족해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의 세계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들뿐입니다. 따라서 그의 진노가 머리맡에 놓여 있습니다. 이 세상을 마침내는 심판하실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것을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하나님께서만 채워주실 수 있는 가장 귀중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그것을 만족시킬 수가 없습니다.
참된 평화가 무엇인지를 바로 깨닫기 전, 특별히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로 이해하기 전에 인간이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먼저는 인간이 하나님과는 불화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쪽에서 뭔가가 먼저 발생해야만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죽으셨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의 법이 요구한 모든 것을 다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의하심 및 거룩하심이 전적으로 충족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짊어지우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과 곤욕을 주님께서 당하시게 하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는 사랑과 은혜 및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인간이 화평을 누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향했던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와 형벌을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면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롬 5:12). 그러므로 그가 타락하게 되었을 때에 우리도 r와 더불어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는 죽었고 그 이후로 우리 모두도 죽게 된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죽었습니다. 세상에 사망이 임하였고 아담의 범죄한 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범한 죄악의 주요 요지는 모든 인류족속에게 타락을 도래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날 때부터 타락한 심령으 소유자로 비뚤어진 심령을 지닌 죄인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시나마 행복해 보려고 여러가지 헛된 망상을 합니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 오셨습니까? 그가 세상에 오심은 새로운 인류 족속을 낳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두번째 아담입니다. 두번째 사람입니다. 첫 사람은 아담이었지만 둘째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전 15:47)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놀라운 진리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주님이 우리의 대표자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것은 우리를 위해서 하신 것이므로 주님 안에서 우리가 행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비록 아담 안에서 우리가 타락했으나 타락한 죄인들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소생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와 함께 죽었음을 의미하며, 여러분이 당해야 할 형벌이 치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옛 사람으로 지낸 이전의 모든 것이 깨끗이 제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새로운 인간으로 출발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죽으심과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의 죽으심이 성취한 것이 무엇인지를 믿는다면 여러분이 지닌 아담의 옛 성품은 진실로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제 그 모습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의 모든 현 위치와 상태가 전혀 다른 것이 된 것입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6:14).
기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은 나의 모든 위치와 하나님께 대한 모든 관계가 완전히 변화된 것, 우리가 그분과 함께 화평을 누릴 뿐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관계 속에 거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값없이 베푸는 사랑입니다. 은혜란 죽어야 마땅한 자들에게 베푸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은혜가 바로 하나님 자체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리에 처했을 때에도 한없으신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응시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 더 이상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발견하는 순간과 우리가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안래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십자가가 우리를 위해서 이룩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십니까? 이것을 아시면 무엇이 귀한 축복인지를 인정하실 것입니다. 십자가가 이룩한 것을 보면 우리를 위하여 하늘문을 열고 우리로 기도하게 해줍니다.
기도란 하나님으 존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은 그 하나님, 경멸하고 거절한 그 하나님, 하늘에 계시고 거룩하시며 전능하신 그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하나님의 존전에 우리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느냐란 것입니다. 우리의 추악한 모습으로는 하나님의 존전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죄인인 인간이 안심하고 담대하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권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을 형벌을 대신 져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 평강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제9장 구속과 자유
십자가 바울 자신을 전적으로 새 사람되게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게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자기도 함께 죽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모든 성도가 경험하는 것으로 모든 신앙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며, 율법 문제와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는 은혜 아래에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어 새 출발하는 자입니다.
만일 십자가가 여러분의 삶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지 않다면 참 성도가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을 존경해 마지아니하며 그의 가르침에 탄복합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성도라고 불리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아직도 전통 유대교에 빠져 있는 사람이거나 또는 도덕주의자들로 심취해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 생명을 싹트게 하는 것이며 삶의 핵심입니다. 모든 것이 이로 말미암아 전개되며, 자기 자신에 대한 모든 생각을 십자가가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본질상 인간이 지닌 견해는 모두 다 육체를 따라 난 것이라 말합니다. 여러분이 바울의 서신들을 잘 알고 있다면, 바울은 언제나 그의 서신들 속에서 인간의 육체와 영을 대조하며 서술하고 있음을 금방 알아 차립니다. ‘육체를 따라’ 모든 것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조명함이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다루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육체를 따라’한다는 의미입니다.
현재 우리의 삶 속에서 본인이 처해 있는 직함 여하에 따라서 자기의 지위를 스스로 높이 치켜세우는 자가 인간입니다. 어느 계급이냐, 네 직분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세상은 우리를 판단합니다. 더 나아가면 항상 돈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세상은 부자집 출신이냐 가난한 집 출신이냐를 보고 우리를 판단합니다. 이런 것들을 가지고 세상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십시오. 서로 갈라진 가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질투, 경쟁, 시기, 멸시 등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들과 더불어 인간은 살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이런 것들이 끊어지질 않습니다. 이런 것이 그리스도 없이 사는 모습입니다. 이런 인생들은 위의 것들 외에도 자기들이 가진 천부적인 재질이나 능력을 자랑하고 그보다 못한 상대방을 멸시해 버립니다. 인간의 지능지수가 얼마나 높으냐에 따라 쉽게 판단합니다. 사고력이 어떠한지, 이해력이 얼마나 풍부한지를 살핍니다. 무슨 야망이 있느냐? 아니면 꿈없이 사는 짐승이냐? 이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여기에 따라 서로서로를 규명하여 단정을 내리는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지능지수, 잠재력, 이해력 및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 못했느냐, 무슨 학위를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등에 따라서 섣불리 결정하는 세상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비추어 주는 빛이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사도 바울은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인간이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r는 “저가(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인간들이 하고 있는 일은 자기 자신을 위한 삶입니다. 그 속에는 온갖 자만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을 더욱 교만하게 하는 요인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자기 중심적인 삶을 탈피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위치에서 판단하고 평가해 버립니다. 내가 이것을 함으로 내게 유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합니다....자기 중심적인 모든 인간은 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자기를 위해서라면 나쁜 짓도 서슴치 않고 행합니다. 다른 사람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합니다. 채워도 채워도 끝이 없는 자기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행동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을 위하여 이룩하려고 합니다. 자신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무섭기 그지없는 자기 자신을 늘 만족케 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자기를 알아주지 않을 때는 모욕당하는 것으로 간주하며, 자기 존재를 의식해 주지 않을 때는 수치감이 치밀어 옵니다. 누군가가 행여나 자신을 모독하지 않는지를 늘 염려합니다. 자꾸만 누군가가 그렇게 한다고 느껴집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자기 방어에 몰두하게 됩니다. 자기 보호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 많은 정력을 소모합니다. 자신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피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데 과잉반응이 생깁니다. 극도로 민감해진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온 몸을 휘감아 버립니다.
인간은 스스로자기 자신을 구원한다고 믿습니다. 자기에게 그런 능력이 충분히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며 자기 자신에 의하여 지배당하며 삽니다. 그 자신이 자칭 신이요 처음이요 나중이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자입니다. 자기과신과 자기만족 및 지극히 독립적인 존재로서 살아가는 인간은 이 세상의 어떤 신도 부정합니다. 그에게는 신이 필요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특별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상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깨닫기 전에는 바울도 하나님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우리의 옛 모습은 허상에 불과한 거짓된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시간낭비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자신을 관망하며, 자신을 내세우고, 자신을 검사하고 상받는 일에만 집착하는 것 등 자신만을 생각하는 그런 일에 한치라도 자신의 시간을 보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받게 되는 놀라운 축복 중 또 다른 한 가지는, 십자가의 참된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때에 십자가가 모든 것을 변화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전적으로 새로운 태도로 인생을 살도록 합니다.
인간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기 전에는 주로 선과 악이란 개념으로 인생을 측량합니다. 늘 어떤 행동을 하느냐만을 생각하지 그 이상의 전진은 없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을 전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에게 죄를 관망하는 새로운 눈을 주었고, 죄가 우리의 제일 큰 원수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 줍니다. ...세상이 자랑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비참한 곳으로 몰아넣는 것임을 십자가가 보여줍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모든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 세상의 것들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에서 하늘 가는 길을, 그리고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본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주님과 그의 죽으심을 믿으신다면, 죽는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 이 십자가를 자랑합니까? 아니면 아직도 여러분 자신을 자랑합니까?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아십니까?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할 것입니다. 그 다음엔 여러분은 자신을 증오할 것이며 사망의 몸에서 구원받도록 기도할 것입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 (0) | 2022.03.04 |
---|---|
하나님의 뜻 (0) | 2022.03.04 |
적(敵)도 내편으로 만드는 7가지 소통의 법칙 (0) | 2022.03.04 |
교회는 병원이다 /최영기 지음 요단출판사 (0) | 2022.03.04 |
안아 주심/옥한흠 지음 (0) | 2022.03.0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