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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속으로 〓/성경 교육 지침

안아 주심/옥한흠 지음

by 【고동엽】 2022. 3. 4.

안아 주심

옥한흠 지음

국제제자훈련원 / 2007년 4월 / 259쪽 /

 

 

▣ 저자 옥한흠

한국 교회의 영적 멘토이자 제자훈련 목회의 산 증인인 옥한흠 목사는 현재 국제제자훈련원 원장으로 섬기며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의 제자훈련 사역을 이끌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복음주의 진영의 장형(長兄)으로서, 한국 교회의 갱신과 성숙을 위해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방 등 중책을 맡아 섬기고 있다. 30여 년 전, 서울 서초동에 ‘사랑의 교회’를 개척하여 제자훈련 목회로 수천 명의 평신도 리더가 함께 뛰는 건강한 교회를 일구어 냈으며, ‘교회가 목사와 함께 늙으면 안 된다’는 소박한 확신으로 조기 은퇴와 성공적인 사역 계승의 모범을 보인 목회자이다.

성균관대학교 영문과를 거쳐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수학하고, 미국 칼빈신학교(Th.M.)와 웨스트민스터신학교(D.Min)를 졸업했으며, 2001년 웨스터민스터신학교는 제자훈련을 통해 한국 교회에 미친 그의 영향력을 인정하여 명예신학 박사학위(D.D)를 수여했다. 그의 목회철학과 열정이 담긴 『다시 쓰는 평신도를 깨운다』는 한국 교회의 스테디셀러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길』,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리스도인의 자존심』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세상이 힘겹고 삶이 두려운 이들에게 하늘 아버지의 안아 주심을 경험하게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종종 혼자 걷는 길처럼 막막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눈동자는 우리를 주목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따뜻한 품은 우리를 꼬옥 안고 계신다.

 

 

저자는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공인들의 자살소식을 듣게 되고, 우울증에 시달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면서 ‘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이 저들에게 아무 힘이 없을까?’ 하는 고민 끝에 지금까지 했던 설교 가운데, 우리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상한 마음의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한 것들을 정선하여 이 책에 묶었다.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사는 사람은 그 마음에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이 흘러넘친다. 저자는 바로 이 비밀을 함께 나누고 싶은 것이다. ‘눈물 흘리는 이를 주목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품’에 안겨 본 사람이야말로 삶이 곤고한 이들에게 아버지의 그 품을 전해 줄 수 있기에.

이 책 ‘안아 주심’은 위로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저자는 복음의 본질을 드러내며, 현실의 고통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는 지혜를 전한다. 그것이야말로 하늘 아버지의 안아 주심을 능동적으로 누리는 삶이 아니겠는가.

 

 

▣ 차례

제1부 삶에 지친 당신에게

1. 당신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2. 사람이 두려울 때

3. 근심이 나를 누를 때

4. 하나님이 도우시는 사람

5. 예수의 인내를 배우자

 

제2부 마음이 상한 당신에게

1. 지친 영혼의 비타민

2. 인생이 주는 피곤

3. 마음이 텅 비었습니다

4. 두려워 말라

5. 안아 주심

 

1부 삶에 지친 당신에게

 

당신의 눈물을 보셨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하더라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 누가복음 7:11-17

 

나인 성 여인

관을 따라 쭉 이어진 장례 행렬 속에 울고 있는 한 여인이 보입니다. 나인 성에서의 일입니다. 아마 처녀 때는 아름다운 여인이었겠죠? 그녀는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아마 인생에 있어서 가장 달콤한 시기가 있다면, 갓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을 때일 것입니다. 아이들이 재롱부리는 것을 보면서 젊은 부부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여인도 그랬습니다. 행복한 앞날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부푼 꿈에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행복했던 이 여인은 하루아침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요즘 세상과는 달리, 당시에는 여자가 남편을 잃었다는 것은 앞날에 엄청난 시련과 극심한 가난, 혹독한 고독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하루하루를 보냈겠습니까? 그래도 그녀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고생인 줄도 모르고 최선을 다해 아들을 키웠습니다. 예수님이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 “청년아”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아마도 그녀의 아들은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성한 아들을 보며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큰 꿈에 부풀었겠습니까? ‘이제는 기대고 살 만한 기둥이 생겼어“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아들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여인은 남편을 잃고, 그녀의 모든 꿈이었던 아들마저 잃는 설상가상의 화를 당했습니다. 아들을 잃은 슬픔 앞에 그녀는 울고 싶어도 더 짜낼 눈물이 없을 만큼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여인을 보고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여들었습니다. ‘이 여자, 무슨 죄가 많길래 남편 먼저 보내더니 이제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떠나 버렸담.“ 다들 수근거렸을 겁니다. 청년의 장례 행렬은 동네를 지나 성문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 마침 장례 행렬은 성문을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봅시다. 생명의 주,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나인 성을 향해 오고 있습니다. 그 반대편에는 죽음의 사신인 사탄이 이끄는 죽음의 행렬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두 행렬이 마주칩니다. 생명과 죽음의 만남입니다. 이것은 과연 생명과 죽음의 대결입니다. 이 얼마나 의미 있는 대결입니까!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구세주 예수님이 과연 이 순간에 어떻게 하셨을까요? 피하셨을까요? 아니면 청년의 장례 행렬이 지나가도록 길가에 비켜서서 기다리셨을까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면 대결을 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관 뒤를 따라오며 슬피 우는 과부에게 머물렀습니다. 그 자리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늘 그렇듯이 예수님은 먼저 이 과부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고통을 안고 씨름하는 자에 민감하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항상 사랑의 만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만조를 이루면 온 해변이 바닷물로 덮이는 것처럼 우리를 향해 만조를 이룬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가장 먼저 덮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그 아픔을 그대로 느끼셨습니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과부의 처지를 다 알고 계셨고, 과부의 괴로움과 아픔에 자기 마음을 내주셨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울고 있는 과부를 보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울지 말라.” 예수님의 위로는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 과부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씻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예레미야 선지자가 대언하는 하나님의 음성과 비슷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예수님은 지금 이 여인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 예수님이 청년의 관에 손을 대시자 관을 메고 가던 자들이 그 걸음을 멈추어 섰습니다. 예수님이 명령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관 속에서 일어나 앉습니다. 예수님이 그 청년을 과부에게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눈물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슬픔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슬픔의 근본을 해결해 주심으로 그녀를 위로하셨습니다.

 

생명의 주인

나인 성 과부 이야기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남편을 먼저 보내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까지 잃고 비탄에 잠긴 과부와 같은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설혹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예수님이 당장 그 아들을 무덤에서 일으켜 주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나인 성 과부와 같은 일이 지금 우리에게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의 어느 한 구절도 그냥 기록해 놓으신 것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런 기적을 일으키셨을까요? 이 이야기에는 근본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문 앞에서 죽음의 사자들과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죽음의 사자들 앞에서 생명의 능력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그냥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온 세상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을 이기신 생명의 주시오, 하나님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이 사건의 주된 목적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향해서 “나는 죽음을 이기었노라, 나는 생명의 주가 되느니라”고 선언하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죽음의 사자인 사탄은 장례 행렬을 이끌고 나오며 의기양양했을 것입니다. 죽은 청년의 시체를 끌고 나올 때, 사탄은 자신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군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선포하셨을 때 사탄은 아무 손도 쓸 수 없었습니다. 청년을 붙들 수도, 죽음에 그대로 묶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시자 관 속에 누워 있던 청년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 사실상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옮기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먼저 사랑하는 남편을 하나님 앞으로 떠나보냈거나 어린 자녀를 하나님 앞에 먼저 보낸 분이 있다면, 우리는 인간이기에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다는 사실로 슬퍼할 수 있지만 먼저 간 그들은 죽은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보고 항상 ‘죽지 않았다’고 하시며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누리며 하나님 품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도 다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운 생명의 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사건의 목적이었습니다.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이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 어찌 남은 인생을 마음 놓고 살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시는 그분께 우리 인생을 모두 맡겨야 합니다. 이미 죽음을 정복하신 그분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는 자를 눈여겨보시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이 사건으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성품 두 가지를 보여 주십니다. 그 첫 번째는 예수님이 울고 있는 과부를 주목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울고 있는 우리도 눈여겨보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세상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은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녀를 두신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죄 없는 자녀를 두신 일은 한 번 있습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런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동안 몇 번을 우셨습니다.

 

혹자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합니다. 인생은 고통과 슬픔의 파도가 몰아치는 먼 항해 길과 같습니다. 어찌 눈물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울음으로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을 때는 두 눈에 눈물이 고인 채 숨을 거두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눈물을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눈물 흘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 문화 이면에는 우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문화입니다.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노력하는 것은 가식이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울고 싶을 때는 맘껏 울어야 합니다. 우는 것은 인생 본연의 모습 중 하나입니다.

 

이 세상을 봅시다.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아무리 평안하다 해도, 어려움이 없다 해도, 형통한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눈을 돌려 고통당하는 내 주변, 내 이웃들, 그리고 조금만 주위를 둘러보아도 생각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 우셨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눈물 없이 살기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귀히 여기십니다. 우는 자를 주목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남모르게 우는 사람이 참 많을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여러분을 주목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참 재미있는 기도입니다. 참 인간적인 표현입니다. 다윗은 젊은 나이에 10년이 넘도록 많은 수모와 모함과 고통을 당하며 쫓겨다녔습니다. 그의 삶은 매일 울다시피 하는 인생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시편을 통해 다윗의 우는 장면을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다. 사람들은 나의 눈물을 보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나의 눈물을 보고 계시고, 관심을 갖고 소중히 여기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주여, 내 눈물을 잊지 마소서.”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으셨고, 다윗의 눈물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셨다는 해피앤딩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갈대가 상해서 꺾이면 사람들은 아무도 그 갈대에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무심코 꺾인 갈대를 밟고 지나갑니다. 우리는 40대에든 50대에든 아니면 30대에라도 상한 갈대처럼 꺾일 수 있습니다. 아마 그 순간에 세상이 얼마나 야박한 곳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꺾여 버린 자에게 쌀쌀맞게 등을 돌립니다. 비정하게 그를 밟고 지나갑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와 같은 우리를, 다 꺼져 가는 심지와 같은 우리를 품에 안으시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달래 주십니다.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

아파하는 이들에게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주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고통당하는 우리를 위로하시는 두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주님은 나와 나의 필요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아시기 때문에, 정확한 때에 도와주시기 위해 늘 은혜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 간구하면, 때를 따라서 채우시며 위로해 주시는 손길이 항상 우리 곁에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울고 있는 당신을 주목하시고, 당신의 눈물을 소중히 여기시며 “울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아시고, 정확한 때에 필요한 은혜를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눈의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은 굉장히 큰 그림을 말합니다. 이 그림은 우리가 금방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정신을 차릴 수 없고 해답을 알 수 없지만, 우리의 인생을 큰 그림을 가지고 바라보고 계시는 하나님께 주목해야 합니다. 이 큰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시달릴 때도 있습니다. 우리 당대에서 보지 못하고 다음 세대로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름답고 선한 뜻과 큰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룻기에서 보듯이 나오미에게 그런 끔찍한 비극이 없었다면, 다윗 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이 그 가족 가운데 나올 확률은 전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 같은 비극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다윗 왕의 혈통을 조성하고 계셨습니다.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가 탄생할 구원의 길을 닦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계획이었기 때문에 나오미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입니다. 이 비밀에 대해 당시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 선한 뜻을 품고 계셨고, 그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게 하신다

신앙이 좋음에도 불구하고 눈물 마를 날이 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주시든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큰 계획 속에 한 부분이 되게 하시든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를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게 하십니다. 인생이 비록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느껴질지라도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주님을 의지하고 인생을 영위하는 자는 눈물이 눈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거기에는 열매가 있습니다.

지금 눈물의 나날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그 눈물을 귀중히 여기시는 주님을 신뢰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실패가 없을 뿐만 아니라 최후 승리가 있습니다.

 

 

2부 마음이 상한 당신에게

영혼이 지칠 때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3

 

몇 해 전 <아버지>라고 하는 소설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면서, 서점마다 아버지 코너가 따로 마련될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 내용은 참 소박합니다. 서기관으로 공무원 생활을 화려하게 시작한 어느 남자가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가정을 이끌어 가면서 생기는 이야기들을 담고 있습니다.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하는데 뜻대로 진급이 되지 않고, 일에서 좌절을 맛보고, 치열한 경쟁사회 구조 속에서 조금씩 뒤처지면서 남자 주인공이 겪게 되는 내적 갈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중병이 들어 인생을 마쳤다는, 어떻게 보면 간단한 구성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런 평범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릴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통곡까지 했다고 하지요? 왜 부인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남편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할까요? 왜 자녀들은 아빠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고백할까요?

주인공인 아버지는 참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족을 부양하려고, 또 자기가 가진 꿈을 조금이나마 이루어 보려고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지만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피곤이 쌓이고, 그것에 짓눌려 허덕이다가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고 인생을 초라하게 마치게 되는 한 남자, 피곤한 남편, 피곤한 아빠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피곤은 정신적인 뿌리에서, 영적인 뿌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피곤은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한정된 힘을 가진 육신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유한한 육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분량의 일들을 하다가 보면 과부하가 걸리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남겨 놓으신 자연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피곤하다고 해서 그 피곤이 나쁜 것이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참 피곤한 일입니다. 피곤은 인생의 운명이자, 숙명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처방전

지금으로부터 3천 년 전, 여유롭고 풍족하게 살던 제왕 솔로몬도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만물이 얼마나 피곤한가를 말하면서 그는 한술 더 떠 온 우주 만물이 다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하늘의 달과 별도 피곤하고, 물과 나무도 피곤하고, 동물도 피곤하고, 물고기도 피곤하고, 피곤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인간은 유달리 피곤함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곤은 어느 피조물의 피곤보다 더 노골적이고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3천 년 전의 솔로몬 왕도 그렇게 피곤한 인생을 살았다니, 정신없이 복잡하고 너무 빨라서 도무지 숨쉴 틈도 없는 현대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가 왜 피곤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피곤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피곤한 것이 당연하다고 해서 이 피곤을 그대로 쌓아 놓고 해결하지 않는다면 무기력증에 걸리게 되고, 마음에 낙심이 찾아옵니다. 마치 험난한 파도와 싸우던 선원이 쉴 새 없이 계속되는 파도에 지쳐 배를 포기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처럼 우리가 우리 삶에 대해 그렇게 행할 수 있습니다. 오만 가지가 다 하기 싫어집니다. 백기를 들고 항복하고 싶습니다. 도망가고 싶습니다. 급기야 자살을 선택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에 대해 동문서답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이 말씀은 우리가 피곤할 수 있지만, 피곤 때문에 낙심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를 생각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피곤하면 환경을 개선하라고 한다든지,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다든지 구체적인 처방전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은데,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터무니없는 말씀으로 우리를 속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이나 어떤 특별한 순간이 되면 누군가를 떠올리는 버릇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아주 슬플 때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사가 귀찮을 때 생각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무언가 위로를 받고, 어떤 격려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한 순간이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도 가끔은 게으름 좀 피우고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아휴, 왜 이리 목사 생활이 힘드나! 좀 수월하게 하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떠오르는 분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모습이 내 눈앞에 나타납니다. 바로 우리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무식한 농군이었습니다. 평생에 아들을 앉혀 놓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한 번도 교훈하신 일이 없으셨습니다. 그러나 당신 삶을 통해 저에게 보여 주신 것이 참 많습니다.

 

아버지는 새벽별을 보며 지게를 지고 나가셨고, 밤이 어두워야 돌아오셨습니다. 어떤 날에는 밤새도록 복통을 괴롭게 앓았으면서도 날이 밝기가 무섭게 괭이를 들고 들로 나가십니다. 하루 종일 일하시고, 일하시다 복통이 나면 논두렁에 엎드려서 혼자 신음하다가, 또 힘이 좀 나는가 싶으면 일하시고, 그렇게 몇 안 되는 가족을 먹여 살리며 평생을 소박하게 사셨습니다.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저는 배운 것이 참 많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에 부지런해야 하고 최선을 다해야 된다.’ 이런 생각 하나가 제 마음속에 강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게으름이 나려 하고, 일을 좀 쉽게 하려는 유혹이 올 때마다 아버지 생각이 납니다.

 

그도 피곤하셨다

하나님께서 “피곤할 때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경험자셨습니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피곤을 똑같이 체험하신 경험자입니다. 내가 낙담될 때가 언제인지를 주님은 아주 잘 알고 계십니다. 세상에 오셔서 그는 가난과도 씨름하셨고, 목수의 아들로 중노동을 하면서 하루 종일 여가 없는 생활도 하셨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을 피곤하게 만든 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몰랐기 때문에 그분을 비판했습니다. 대적했습니다. 급기야 증오하여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예수님은 하루 종일 시달렸습니다.

 

특별히 몇 사람을 택해서 제자로 삼았지만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마귀였습니다. 나머지 열한 명도 그다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심신이 얼마나 피곤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친구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고, 나중에는 참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속이 타고, 아파서 눈물을 쏟을 정도로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피곤, 우리가 당하는 낙심,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다 당하셨습니다. 삶의 모든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예외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쓰인 ‘생각하라’는 히브리어 단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는 ‘비교하라’는 의미입니다. 또 하나는 ‘묵상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나와 비교할 때, ‘아, 예수님도 내가 당하고 있는 이 고통을 다 당하셨구나. 내가 짊어지고 있는 인생의 피곤함을 예수님도 짊어지셨구나. 아니 나보다 더한 것을 지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내 아픈 마음을,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이해하실 거라는 확신이 옵니다. 그것이 든든한 힘이 됩니다. 또 그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깊이 묵상하면 내 마음에 어느새 위안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삶이 깊은 위로가 되어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기 때문에 힘들 때 그분을 생각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은)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피곤한 자에게 쉼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무엇이든지 나를 위해서 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피곤하면 예수를 생각하라. 낙심될 때마다 예수를 생각하라”고 말씀하시기에 충분합니다.

 

낙심할 이유가 없다

우리가 지칠 때 예수님을 생각해야 할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분에게는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생각할 가치가 있습니다. 십자가 형벌은 부끄러움까지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십자가는 수치요, 부끄러움이요, 망신거리요, 구경거리입니다. 하지만 이 끔찍하고 모욕적인 죽음도 예수님이 사양하지 않으신 이유는 십자가 다음에 있을 부활의 영광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은 죄와 사망의 고통을 이기시고 모든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영광을 생각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하면 십자가의 그 수치도, 십자가의 그 고통도 다 물러갈 것이기에,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아셨기에 견디어 내셨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모든 인류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으실 주님, 모든 인생의 한숨과 한을 풀어 주실 주님, 그 주님을 생각하면 낙심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모든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낙심하고 계십니까? 남편이 미워집니까?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나요? 자식이 속을 썩입니까?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내 소원대로 다 되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은 내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곤하고, 안 되니까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형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생각하면, 그 낙심될 만한 여건 때문에 오히려 찬송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굉장한 은혜가 따라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은혜가 쏟아지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환란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생각하라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루 일과로 씨름하다 보면 ‘아, 피곤하다. 정말 힘들다. 다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10초도 좋고, 1분도 좋습니다. 잠깐 동안이라도 예수님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운전하고 가다가도 문득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면, 풀리지 않는 문제로 마음이 답답해지면 그때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해 봅시다. ‘아, 예수님도 내가 겪는 이 모든 고통을 다 경험하셨지.’ 이것이 쉬운 것 같아도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답답한 일을 만나면 다른 일로 잠시 잊어버리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 가운데 그렇게 예수님을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몇 마디 나오는 그 기도 때문에 다음에 따라오는 상황이 아주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일주일 중에 어느 날이라도 좋습니다. 한 시간 정도, 좀 더 가능하면 두 시간 정도를 따로 구별해 혼자만 머물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봅시다.

 

그 자리를 찾아갈 때는 홀로 가야 합니다. 핸드폰은 잠시 꺼 두기 바랍니다. 부인이나 남편이 따라가서도 안 됩니다. 모두 다 끊어 버리고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가져 봅시다. 혼자 생각도 하고, 정리도 하는 그런 시간을 갖기 바랍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조용히 있는 시간을 마련하지 못해서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을 다 놓치고 있다.”

이 때는 ‘내가 기도한다’고 하는 능동적인 자세를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려고 선 것이기 때문에 수동적인 자세로 주님 앞에 서면 됩니다. 침묵 중에, 아니면 차분히 기도하는 중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조용히 읽는 중에, 하나님의 뜻과 지시를 기다리는 중에 “주여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 주님, 사는 것이 참 피곤해요. 좀 도와주세요”라고 고백하며 그냥 마음을 열고 가만히 기다립니다. 하나님께 모든 주도권을 맡기고 잠잠히 있습니다. 모든 소란스러운 잡음의 스위치를 내리고,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주파수를 고정하고 조용히 기다립니다.

 

육신의 피곤은 푹 쉬면 해결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피곤보다는 영적인 피곤을 푸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영적인 피곤은 성경적으로 풀어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영적인 피곤을 푸는 방법은 “예수를 생각할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이것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주님과 마주 앉아서 조용한 시간을 한번 가져 보십시오. 이 맛을 알게 되면 피곤에 지쳐 시간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기 전에 스스로 이 시간을 만들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 안에 각자 예수님을 생각하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펴놓고 읽다가 혹은 그 주일 설교로 들은 말씀 중에 한 부분을 선택해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묵상을 하다 보면 해야 할 기도들이 떠오르고 자연스레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더 깊이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말씀의 되새김질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소를 끌고 나가서 풀을 많이 먹였습니다. 눈만 뜨면 소를 끌고 나가서 한두 시간 풀을 뜯깁니다.

 

그 이른 시간에 소에게 풀을 뜯기지 않으면 소가 하루 종일 굶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일찍 풀을 먹고 나서 10시, 11시가 되어 해가 뜨거워지면 소는 그늘에 앉아서 되새김질을 시작합니다. 먹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서 잘근잘근 씹기 시작합니다. 되새김질을 해서 두 번째 위에다가 착착 채우고 두 번째 위가 가득 차면, 세 번째 위에 채우고 세 번째 위가 가득 차면, 네 번째 위까지 가득 채웁니다. 그러면 소의 침과 풀이 잘 섞여 위를 통해 흡수되고, 그 흡수된 영양분이 피를 통해 온몸에 공급됩니다. 되새김질을 잘하니까 소는 풀만 먹고 자라도 통통하게 살이 오르고 건강해집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사십 분 동안 설교를 계속해서 듣고 나면 말씀의 되새김질을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되새김질하듯 곰곰이 되뇌어 봅니다. 그런 시간에 성령님께서 주시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말씀을 깨닫고 그 깨달은 말씀으로 영혼을 가득 채워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영혼의 혈관을 통해 공급되면 영적 피곤이 싹 가시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내 안에서 새 힘이 솟는 것을 우리 모두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피곤하고 낙심될 때 예수를 생각하라”고 하신 그 말씀대로 순종만 하면 반드시 우리 영혼의 피곤, 정신의 피곤을 주님께서 풀어 주십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아버지>라는 소설에 나온 주인공처럼 죽게 됩니다. ‘지금까지 내가 예수님을 등한히 했구나. 그래, 잠깐이라도 예수님을 생각하는 습관을 기르자“고 결심하고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는 따로 떼어 구별해 놓읍시다. 하루 정도 운동을 못하고 사우나를 못 가도, 내 영혼의 피곤을 풀기 위해 예수님을 깊이 만납시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주의 말씀을 되새김질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을 한번 드려 봅시다. 그분과 마주 앉아서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그분을 묵상해 봅시다. 시간을 내어 주님과 만나는 사람은 다릅니다. 영혼의 피곤이 해결되면, 우리의 얼굴은 훨씬 더 밝아지고 우리의 생각은 더욱 건강해질 것입니다.

 

 

안아주심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 신명기 1:29-33

 

여러 달 전에 저는 신명기 1장 말씀을 읽다가 그날따라 유난히 내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신명기 1:31).

 

이 말씀을 가지고 한동안 깊이 묵상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안으셨는데, 마치 아비가 자식을 안는 것같이 안으셨다는 말씀이 바로 눈앞에 있는 커다랗고 선명한 글자처럼 제 마음에 확 들어와 닿았습니다. 어쩌면 다들 무서워하는 병으로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을 하고 있던 차라 이 말씀이 더 민감하게 와 닿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 내가 큰 수술을 하는 가운데서도 나는 하나님 아버지 품안에 안겨 있었어. 지금도 나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야’ 하고 들리는 마음의 음성은 어느 때보다도 저를 더욱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밤낮없이 저를 안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묵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다가 해방되고, 시내 산 광야로 들어와서 첫 1년간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모세가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1년 동안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들이 통과한 광야는 사람이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죽음의 계곡이었습니다.

모세는 이곳을 “그 크고 두려운 광야”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지나온 광야에 많은 위험과 어마어마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자연히 그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필설로 형언하기 어려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물을 구하지 못해 모세에게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봅니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며칠을 굶었는지 모르지만 배가 고파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마실 물이 전혀 없어 어린아이들도 물을 달라고 엉엉 웁니다. 짐승들은 픽픽 쓰러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성을 잃고 맙니다. 나중에는 모세를 향해 돌을 던질 것 같은 정말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며칠에 한 번씩 천막을 쳤다 걷었다 하는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여행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그들 안에서도 분쟁이 그치질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눈에는 광야생활이 하나님 품에 안겨서 걸어가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죽지 못해 끌려가는 삶이었습니다. 이러니 모세가 “너희는 지난 1년 동안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서 이 광야를 지나왔다”고 해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가 과장된 소리를 하는 것으로, 거짓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세는 이처럼 험난한 광야생활을 놓고 백성들과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가 혼자만 구름을 타고 다닌 건 아니지 않습니까? 백성들과 똑같이 고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80세가 넘은 고령에, 광야에서 수백만 명의 생사를 책임져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는 피를 말리는 위치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광야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걷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상황을 보는 시각이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숨막히는 환경만 쳐다보며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전능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향해 눈을 고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래의 것, 곧 눈앞의 현실을 쳐다보고 있는 반면, 모세는 위의 것, 곧 하나님의 약속을 쳐다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의 차이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너희를 품에 안으사

모세는 광야의 여정을 돌이켜 볼 때 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품, 안아 주시는 아버지의 은혜라는 말을 빼놓고는 지난 1년을 도무지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앞 뒤 구절을 살펴보면, 모세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품에 안고 지금까지 광야를 걸어오면서 그들을 대신해서 싸우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광야의 위험에서 백성들을 보호해 주셨다는 말입니다. 아말렉이 공격해 올 때 그 전투에서 생명을 지켜 주셨고, 광야에서 마주치는 사나운 들짐승들의 공격에도 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습니다.

둘째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는 모세의 고백에는 광야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감격이 들어 있습니다. 배고플 때 만나를 주셨고, 목이 타들어 갈 때 반석에서 나온 생수를 마시게 하셨습니다.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면 고기를 주셨고, 오랜 여정 가운데서도 발이 부르트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셋째로는 앞길이 보이지 않을 때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가 되셔서 광야의 여정을 인도하셨습니다.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동서남북을 분간하기도 막막하고 어려운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친히 그 여정을 진두지휘하셨습니다.

이런 사실들을 묵상한 모세에게 있어 하나님은 광야 길 가운데 자기 백성을 품에 안으시고 자상한 아버지로서 백성들을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이 모세가 백성들의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믿음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모세는 이후의 평생을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신뢰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는 광야생활을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삶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39년이 흘렀습니다. 신명기 32장은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설교를 하는 장으로 “그는 네 아버지시요”라고 다시금 아버지 되심을 강조합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제일 먼저 부른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숨이 끊어지기 전에도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너의 아버지가 아니시냐?” 하고 질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임종을 앞두고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현대 말로 바꾸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팔이 너를 끌어안고, 품고 계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야말로 너의 고향이요, 너의 품이요, 너의 안식처가 되신다”라는 이야기입니다. 모세는 이 믿음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광야생활을 1년 한 뒤에나, 40년 한 뒤에나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의 자비로우신 아버지’, ‘내가 기대고 안길 수 있는 따뜻한 품을 가지신 분’이란 생각과 믿음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광야생활을 보는 모세의 눈은 백성이 보는 눈과는 달랐습니다.

 

모세와 같은 영적인 눈을 뜨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우리는 그의 품에 안긴 사랑받는 자녀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통과했던 시내 산 광야보다 더 크고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미지의 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이 세상을 걷고 또 걸어야 하는 나그네입니다. 그 길에는 눈물과 땀이 서려 있습니다. 지루하고 고독한 이 길이 바로 인생길입니다.

 

내 아버지 되신 하나님

이런 광야 길을 달리는 우리가 모세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태산을 넘고 험한 계곡을 지날지라도 하나님 품에 안겨 걷는다면, 우리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나그네로서 한 평생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사실 우리는 구약시대에 살던 모세보다 엄청난 복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의 시대에 그렇게 위대했던 모세도 은혜의 시대에는 작은 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모세가 안 것보다 우리가 더 자세하게 알고 있고, 더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가 우리를 위해서 해 주신 큰 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아버지이신 것을 가르쳐 주신 일입니다.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보고 싶다면 4복음서를 펴놓고 예수님이 행하신 일과 말씀하신 것을 묵상하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를 가까이하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십니다. 죄인을 가까이하시고, 용서하시고 품어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십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신 동안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르며 사셨습니다. 또 우리에게도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는 ‘자녀의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자마자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본능만 가지고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 어렵지 않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두려움을 제거해 주시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도우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성령님이 우리 영을 감동하고 계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품

우리는 자신에게 정말 진지하게 물어 봐야 할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믿는다고 입술로 고백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나를 안고 걸어가시는 아버지라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지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품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품에서 무엇을 느끼고 있습니까? 평안이 있는지, 찬송이 있는지, 내가 그 품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족과 이웃에게 어떤 말을 하는지, 믿지 않는 사람과 구별되어 생활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이것은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불러도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안아 주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면, 그래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은 빈 껍데기 그리스도인입니다.

 

누군가에게 안긴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데서 그치는 메마른 행위가 아닙니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서로 포옹을 한 후 집에 돌아와서 아직도 안겨 있는 듯, 흥분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감정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나님의 품에 안겨 있다는 것도 머리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안긴다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영적인 부분이라도 그것은 나의 전인격을 흥분시킬 수 있는 문제요, 나의 전인격이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행위이지 막연히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그런 메마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하십니다.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안기거나 아이가 엄마에게 안기는 경험이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좋은 반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정신신체학회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아 주면 건강해진다.” 사람은 안기면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안기는 느낌을 자주 맛보는 아이는 건강하게 자랍니다. 피부가 닿고, 신체를 접촉하는 것이 몸을 편안하게 해 주고 스트레스를 줄여 줍니다. 그만큼 안긴다는 것은 실제적인 일입니다.

이것이 어찌 육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겠습니까?

우리의 영혼에도 그대로 해당되는 원리입니다. 누가 속사람이 건강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험한 세상에서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까? 누가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문제를 극복할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 주심을 실제로 느끼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나를 안아 주시는 아버지로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내가 하나님 품에 안겨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나를 안아 주고 계시는 아버지라는 강한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아무도 흔들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에 그 믿음이 꽉 차 있다면 나는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강한 확신이 들면 평안과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상하게 세상이 두렵지가 않습니다. 문제가 눈앞에 버티고 있는데도 걱정이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 품에 있는 사람이야. 하나님이 알아서 인도하실 거야.“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촉촉히 젖어드는 행복이 있습니다.

아버지 되심을 묵상하라

하나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 은혜를 매일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가지는 실천해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씀을 찾아서 자주 묵상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은 구약성경보다 신약성경에 훨씬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시편 1장을 보면 누가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까? 누가 ‘물가에 심긴 나무처럼 형통한 사람’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좋고 즐거워서 읽다가 보면 빨리 덮지를 못하고 마음에 담고 자꾸 되새김질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고백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하나님의 안아 주심을 체험했듯이, 나도 그런 은혜를 받고 싶어서 말씀 앞에 의도적으로 마음을 여는 노력이 바로 묵상입니다. 이런 묵상을 통해서 오늘의 모세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처럼 느껴 보고, 모세처럼 행복한 사람이 되어, 광야의 고난이 축복이었음을 깨닫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하나님의 안아 주심을 체험하게 해 주십니다. 그분의 품에 안겨 광야를 통과하는 모세처럼 나도 그 황홀함을 느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상이 주는 은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 교제할 적절한 환경을 만드는 것을 등한시합니다. 요새는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니까 아이들이 아빠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10분도 안 된다고 합니다. 만나는 시간이 짧아지니 점점 더 서먹서먹해집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묵상의 시간을 만들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사이가 점점 서먹서먹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루에 10분, 20분이라도 말씀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아버지의 품이 어떠한지 직접 경험하십시오.

 

돈키호테처럼

안아 주심의 은혜를 체험하려면 둘째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자녀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세르반테스가 쓴 유명한 소설 <돈키호테>에서 주인공 돈키호테는 중세 유럽에 만연한 부정과 비리를 도려내고 학대받는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기사가 되기를 열망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자기가 마치 기사가 된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학자들은 이 소설이 주는 메시지가 놀랍다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바로 ‘기사가 되고 싶으면 기사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성자가 되고 싶으면 성자처럼 행동하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싶으면 예수의 제자처럼 행동하라. 남편과 더 깊이 사랑하고 싶으면 애인처럼 행동하라. 하나님 품에 안겨 있는 자녀가 되고 싶으면 안겨 있는 자녀처럼 행동하라.”

‘마치 무엇처럼 행동하라’는 것은 신앙생활에도 통하는 아주 중요한 원리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마치 그렇게 된 줄로 알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간절히 구했다면, 이제 구한 것을 받은 자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권위 있는 기독교 저널리스트인 필립 얀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마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사실인 것처럼 믿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을 ‘사랑 많은 아버지’라 생각하고 행동하며 산다.” 이것이 믿음생활입니다. 믿음은 행동입니다. 하나님 품에 안긴 자녀처럼 행동하면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지 알게 됩니다. 그러나 행하지 않으면 그 진리를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을 보면 참 많은 명령들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일 많이 하신 명령은 “두려워 말라”입니다. 신명기에서도 중요한 고비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반복해서 “두려워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넓은 품에 안겨서 광야를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크고 따뜻한 아빠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가 공포에 질려 벌벌 떠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자녀는 떨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살아갈 일이 아득해서 공포가 몰려옵니까? 앞날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두렵습니까? 앞이 캄캄해서 전혀 보이지 않습니까? 믿음으로 나 자신을 향해서 선포합시다. 세상을 향해서 선포합시다. 하늘을 향해서도 선포합시다. 땅을 향해서도 선포합시다. “나는 하나님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야!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야! 내 영혼아 두려워 말라!” 이렇게 할 때 우리를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우리 앞에 반석이 갈라져 생수가 솟는 기적을 볼 것입니다. 우리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것입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길을 열어 주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광야생활을 승리로 끝나게 하시고, 영원한 나라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복락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지금 삶의 현장에서 꼭 체험하며 사는 복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출처 : 예수 생명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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